덕수궁 중화전
덤프버전 :
1898년부터 1902년까지 중화전이었던 건물에 대한 내용은 덕수궁 즉조당 문서 참고하십시오.
덕수궁의 정전이다. 중요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거나 조회를 열던 곳이다.
조선의 5대 궁 정전 중 유일하게 20세기에 창건했으며 처음부터 조선 왕궁의 정전이 아닌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세운 건물이다.
'중화(中和)' 뜻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으로, 《중용(中庸)》에서 유래한 말이다.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 및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몸을 의탁했던 고종은 1년 뒤 1897년(건양 2년) 환궁[5] 하면서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창건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기존에 있던 즉조당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부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즉조당은 너무 좁았고, 규모있는 정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국 선포 이후 5년이 지난 1902년(광무 6년)에야 정식 정전으로 지은 건물이 중화전이다.
및 망국 직전 상황때문에 이전과 달리 단층으로 지었다.
이 곳에서 일어난 중요 행사는 1907년(광무 11년) 1월에 치러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 순정효황후의 결혼식과 1907년 7월에 열린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는 의식[9]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는 1933년에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중화전 뜰의 박석을 걷고 잔디와 꽃을 심는 등 훼손했다. 8.15 광복 이후인 1980년대 말에 문화재관리국에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중화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덕수궁의 정전이다. 중요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거나 조회를 열던 곳이다.
조선의 5대 궁 정전 중 유일하게 20세기에 창건했으며 처음부터 조선 왕궁의 정전이 아닌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세운 건물이다.
'중화(中和)' 뜻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으로, 《중용(中庸)》에서 유래한 말이다.
2. 역사[편집]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 및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몸을 의탁했던 고종은 1년 뒤 1897년(건양 2년) 환궁[5] 하면서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창건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기존에 있던 즉조당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부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즉조당은 너무 좁았고, 규모있는 정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국 선포 이후 5년이 지난 1902년(광무 6년)에야 정식 정전으로 지은 건물이 중화전이다.
창건 당시에는 2층[7] 이었으며, 겉모습이 창덕궁 인정전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년) 대화재로 불탄 이후 1906년(광무 10년) 중건했는데 재정 상의 문제
이 곳에서 일어난 중요 행사는 1907년(광무 11년) 1월에 치러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 순정효황후의 결혼식과 1907년 7월에 열린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는 의식[9]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는 1933년에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중화전 뜰의 박석을 걷고 잔디와 꽃을 심는 등 훼손했다. 8.15 광복 이후인 1980년대 말에 문화재관리국에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정문[편집]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중화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구조[편집]
- 정면 5칸(61.4척), 측면 4칸(58척), 총 20칸이다. 2단으로 쌓은 넓은 월대 위에 높직한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건물 내 · 외부 사이의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언제나 여닫을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