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정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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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활동[편집]


푸틴은 소브차크와 KGB에 양다리를 걸친채로[1] 소브차크의 해외출장에 동행한 뒤 시위원장 특별보좌관으로 승진하며 체제와 반체제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이어간다.

1991년 6월, 소련 각지에서 발생하는 유혈사태와 중앙위원회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고르바초프 세력이 흔들리던 틈을 타 빠르게 권력기반을 넓히던 보리스 옐친처럼 소브차크는 레닌그라드에서 개명된 상트페테르부르크[2]의 초대 시장에 당선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 무렵 소동을 조장하던 분리주의자와 반체제 인사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공산당 보수파와 달리 고르바초프는 좌/우익의 반체제 인사들을 포용하며 개혁개방을 이어가길 고집했고 자신이 호의를 배풀었던 옐친[3]이나 소장파 공산당 관리들과 은밀히 교감하며 8월 요통치료를 위해 크림 반도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다. 고르바초프가 자리를 비운 사이 KGB 국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와 보수파 중심으로 쿠데타 논의가 이루어지고 별장에 있던 고르바초프에게 당 원로들의 명의로 비상사태 선언을 건의했는데 고르바초프가 이를 단칼에 거절하자 KGB 경호부대를 동원해 고르바초프 일가와 대통령 경호원들을 강제로 별장에 연금시키면서 8월 쿠데타가 일어났다.

보수파 측은 KGB의 방대한 조직력 전체를 쿠데타에 동원하려 했으나 적잖은 KGB 무장부대와 각 부서 요원들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지지하며 보수파에 적극적으로 항명하거나 아예 쿠데타 협조 지시를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중적인 생활을 하며 KGB와 소브차크 양측의 신임을 얻은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대외관계위원장에 오른 뒤, 칼리닌그라드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뒤늦게 쿠데타 소식을 접했다. 푸틴은 크류츠코프 KGB 국장을 평소에도 높이 평가했으며 크류츠코프와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소련을 재건할거라 생각하고 보수파를 지지했지만, 정작 본인은 신중히 상황을 지켜볼 뿐 쿠데타를 돕기 위해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소브차크가 쿠데타 반대파와 협조하며 정신없이 움직이던 무렵 푸틴은 보수파와 쿠데타 반대파 사이에서 소극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소련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저항시위가 일어나고 쿠데타 반대파가 하나로 결집하자 대세를 읽은 푸틴은 KGB에 사표를 제출하고 소브차크 편으로 완전히 배를 갈아탄다.

이후 쿠데타가 제압되고 당시에 우익진영의 거두인 옐친에 의해 소련은 해체수순을 밟는다. 생존자로 남은 푸틴은 새로운 러시아 연방에서 소브차크를 계속 보좌하며 해외 투자유치 등 각종 시정업무에 집중했다. 잇따른 정책실패로 인해 시당국의 인기가 차츰 감소하던 1992년, 푸틴은 자신이 깊게 관여한 바 있는 생필품 수입 부패 스캔들에 휘말렸으나 불기소처분을 받은 뒤 소브차크의 비호를 받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으로 승진했다. 그외에도 푸틴은 소브차크 밑에서 부시장으로 일하던 시기에 공금 유용, 내부자 거래, 리베이트 등 여러 가지 부패 의혹을 샀다. 승승장구하던 소브차크 시장이 1995년 선거에서 패배하자 푸틴도 부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시기에는 은근히 푸틴 가족에게 여러가지 사고가 많았다. 아내 류드밀라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중상을 입었고[4] 새로 지은 집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5]이런 불운을 겪던 중 푸틴은 1996년 새 시장의 지시로 직무에서 완전히 밀려난다. 이후 한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무직으로 방황하다가 소브차크와 KGB선배들의 도움으로 옐친 선거캠프에 작은 직함을 얻은 뒤 캠프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린다. 옐친의 재선이 성공하자 성실히 친옐친 인사로 활동하며 인맥을 넓힌 푸틴은 옐친 이너서클과 올리가르히들, 특히 푸틴의 전폭적인 후원자였으나 나중에 정적이 된 보리스 베레좁스키에게 신임을 받으며 고속으로 승진해 KGB 제2총국(국내담당 핵심부서)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보안국 장관, 대통령 행정실 총무실장, 내무담당 수석보좌관 등 다수의 정부 요직에서 재직하였다.[6]

그러다가 1999년 8월 보리스 옐친에게 총리로 깜짝 발탁되었다. 이는 옐친의 신체적, 정치적 한계를 우려해 수년간 후계자를 몰색하던 핵심 측근들의 판단과 당시 막강한 자본으로 옐친을 지원하던 베레좁스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7]

러시아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전무했던 푸틴은 총리 취임 초기에 옐친처럼 국민들에게 냉소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승기를 잡으면서[8] 그 동안 졸전에 지친 러시아 국민의 지지가 급상승하여 12월 총선에서 예상을 깨고 친 옐친 정당[9]이 총선에서 선전을 거두는 데 일조하였고 그 공로로 차기 대권 주자 자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12월 31일 보리스 옐친이 건강 문제[10]로 사퇴하면서 푸틴에게 직위를 넘겨주어 2000년 5월까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으며 2000년 3월 대선에서 52.9%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고 정식으로 대통령직에 오른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12월에 조기 퇴진한 이유는 건강 문제도 있었지만, 차기 대선 후보로 내정된 후계자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푸틴은 유권자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해 체첸 반군과의 싸움을 최대한 빠르게, 성공적으로 끝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선거를 앞두고 점점 심해지는 푸틴의 무리한 공격 요구로 러시아군은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옐친의 입장에서는 이미 정치적으로 파산한 자신이 앞으로 몇 달 더 재임해봐야 자신과 함께 푸틴의 지지율까지 떨어져서 결국 유력 당선후보로 꼽히던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가 차기 대통령이 될 확률만 높여주는 셈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옐친은 각종 혐의로 기소된 뒤 100% 감옥에서 은퇴생활을 보낼 예정이었기에[11] 사임안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물러나는 조건으로 퇴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푸틴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옐친에게 퇴임 후에도 면책 특권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옐친과 푸틴의 사이는 그런대로 괜찮았고, 사후 장례식도 꽤 성대하게 치러졌다.[12]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옐친이 푸틴을 후계자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2. 장기집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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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13]
짤 하나로 볼 수 있는 집권기간, 대한민국 대통령이 다섯 명이나 재임하는 동안 계속 집권한 푸틴. 집권 기간만 약 20년.

그 옛날아돌프 히틀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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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1912 ~ 2011), 2004년의 인터뷰에서.



2.1. 집권 1~2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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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31일,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임기를 수행하던 중 건강 악화로 사임함에 따라 당시 총리였던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하며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실시된 2000년 대선에서 53.44%를 득표하여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후 러시아 연방 재정부 장관 미하일 카시야노프를 러시아 연방 정부주석으로 임명하였다.

대통령 1기를 보내던 시절(2000.05~2004.05)에는 자신이 한때 신세를 진 KGB 선배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의 노선을 이어받아 전략적으로 서방국가와 등거리 외교를 맺으면서도 미국/유럽연합의 여러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친분관계를 맺었다. 특히, 그 당시에는 반푸틴 성향의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들을 모두 척결했고 기업을 국유화하거나 친푸틴 올리가르히가 매입하도록 하여 90년대에 구축된 초기 자본구조를 서서히 신정권 중심으로 재배분했다. 운 좋게도 고르바초프 시절의 4배에 달하는 급격한 석유천연가스 국제시장 가격 상승 추세가 발생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옐친 시절 막장화되었던 경제와 인프라를 재건할 수 있었는데[14], 이로 인해 생활안정화를 절실히 원하던 상당수 러시아 국민들이 푸틴을 지지하였다. 첫 대통령 임기 동안 러시아 경제는 8년 연속 성장했으며, 구매력으로 측정한 GDP는 72%, 실질 소득은 2.5배, 실질 임금은 3배 이상 증가했다. 실업과 빈곤이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었고, 러시아인의 자기 평가 삶의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다.[15]

2002년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이 일어난 동안에 러시아의 신문과 국제 대중매체의 많은 이들은 특수 부대들의 구출작전에서 인질 130명이 사망하여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인기가 심하게 손상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하지만, 포위 공격이 끝난 후 곧 러시아 국민들의 83%는 푸틴이 테러리스트에게 타협 없이 완강했음에 흡족해 하였기에 푸틴 지지율이 올라갔다.

이 덕분에 2003년 총선과 2004년 대선에서 정치스캔들 의혹과 인권탄압, 언론통제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연달아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2기 집권기에 접어 들면서 기존의 친서방 노선에서 러시아 특유의 독자주의 외교로 선회하며, 반미 성향의 국가들과도 손을 잡아 부시 행정부와 외교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보리스 옐친의 집권 기간 동안 많이 피폐해진 러시아의 정치, 군사, 경제면을 안정기로 돌려놓았다고 평가받으며, 그래서 장기집권의 부정적인 모습에도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하다.[16]

2006년 10월 7일 러시아 육군의 부패와 그들의 체첸 공화국에서 지휘를 폭로한 저널리스트 안나 폴릿콥스카야가 자신의 아파트 로비에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10월 7일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생일이어서 말이 많았다. 안나 폴릿콥스카야의 사망은 유럽 등 서방의 대중 매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2. 집권 3기[편집]


헌법상의 문제로 대통령직에 집권여당의 중진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올려두고 자신은 총리로 재임하기도 했지만, 메드베데프는 순전히 푸틴이 대통령 자리를 불가피하게(3선 금지) 비워야 할 때 잠시 대통령 자리를 맡아둔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고, 심지어 푸틴이 휴양지에서 마신 커피 값을 대신 내기까지 하는 등 직책에 관계 없이 푸틴이 여전히 권좌를 차지하였다. 즉 사실상 본인 책상에서 명패만 잠깐 메드베데프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번거로운 의전활동만 떠넘겼을 뿐 실권은 그대로 쥔 것이다. 심지어는 국가 긴급상황 시에는 여차하면 대통령이 내려오고 푸틴이 집권하는 것도 가능하였다고. 독재국가의 최고권력자는 독재자 그 자신임을 보여주는 예. 무아마르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만 하더라도 카다피 본인이 공식적인 직책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과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메드베데프라는 인간 자체가 사실상 푸틴의 신체의 일부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푸틴의 말을 심하게 잘 듣는다. 이러니 이 상태이더라도 러시아의 지배자는 사실상 푸틴이다.

그리고 2011년 9월, 여당인 통합 러시아 전당대회에서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푸틴을 2012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천했고, 푸틴은 이를 받아들였다.
푸틴이 총리 자리로 물러난 이후에도 여전히 60% 이상의 지지도를 가지고 있고, 사실상 그의 카리스마나 인기에 대적할 야권 후보가 나오지 못해서 그의 당선이 유력시되었다. 관련 기사.

2011년 러시아 총선에서 무려 140%가 넘는 투표율이 나오자 그 배후로 거론되며 해외는 물론 러시아 내에서도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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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2년 3월 5일 대선에서 60%가 넘는 득표율을 보이며 당선되었다. # 푸틴을 지지하면서도 정치적 대항세력의 필요성에 공감하거나 그의 장기집권에 피로감을 느낀다는 러시아 여론이 높았지만, 사분오열한 러시아 야권의 사정으로 그의 대항마가 될 수 있는 확실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 당선의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17] 그리고 이론상으로는, 그리고 별 탈이 없다면 푸틴은 2024년까지 대통령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새로운 인물이 나오지 않는 이상 가능성이 매우 높다.

승리 연설 당시 감정에 북받쳤는지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크렘린에서는 바람때문이라고 해명했으나 신빙성은 낮다. 이를 보고 반대자들은 악어의 눈물이라고 비꼬았다.

그런데 체첸에서 푸틴의 득표율이 107%인 지역이 나왔다.[18] 뉴욕타임즈의 보도로는 해당 지역의 유권자는 1389명인데 푸틴의 득표는 1482표. 덧붙여 겐나디 주가노프가 한 표를 받았다. 같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여러 투표소를 돌아다니며 표를 넣었다고 한다. 또 부정선거 #

결국 2012년 5월 7일, 푸틴은 대통령직에 복위(개헌으로 임기 6년에 연임 가능)를 하였다. 그리고 전임 대통령인 메드베데프를 총리로 내정하고 의회의 인준을 기다렸다가 하루 만인 5월 8일에 인준이 승인되고 푸틴의 3기 행정부가 구성되었다.

최근 러시아 '여론 재단'이 '오는 일요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면 누구에게 투표하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5%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링크, 러시아인 10명 중 7명 "다음 대선에 푸틴에 투표하겠다". 그리고 경제난에서도 차기 지지율 83%를 차지했다.#

2017년 2월 2일, 암살당한 보리스 넴초프의 측근이자 반정부 시민운동가인 블라디미르 카라-무르자(Влади́мир Кара́ - Мурза́)가 독극물에 중독되어 한동안 중태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치료에 성공한 뒤 해외로 도피했다.##

2017년 2월 7일, 푸틴은 여당인 통합 러시아가 발의한 가정폭력 처벌 완화법에 서명했고, 이에 따라 배우자나 자녀가 뼈가 부러지는 등 장기입원이 필요한 폭행을 당한 경우가 아니면 처벌을 대폭 완화하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되었다. 가부장 중심의 엄격한 가족 규율과 정부의 가정 불간섭을 지지하던 러시아 정교회는 이를 환영했다.#

2017년 6월 29일에 푸틴은 잠재적인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더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2.3.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편집]


2017년 12월에 2018년 3월에 무소속으로 출마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비록 인터넷 투표지만 2017년 12월 기준으로 러시아 연방 공산당파벨 그루지닌이 푸틴을 4% 차이로 이기고 있다. 90년대 옐친 재임기부터 20년 넘게 대선에 출마해왔던 겐나디 주가노프를 대신하는 공산당의 뉴페이스로 등장한 점, 기업인[19]으로서 괜찮은 소질을 보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 원칙을 농장[20] 운영에 잘 적용한다는 점[21]#[22],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러시아 경제계, 정치판에서 비교적 깨끗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점[23] 등이 제1야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선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친정부 언론, 사법당국, 정보기관, 선관위의 선거개입 정황이 매 선거마다 속출하는 러시아 정치권의 특성상 푸틴이 낙선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추세가 요상하게 흘러가다가 2016년에 있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의 "돈 벌거면 교사 말고 사업가를 하라." 하는 실언같은 결정적인 뻘짓이 여당에서 나왔다가는[24] 대선 때 결선 투표까지 가야하는 상황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파벨 그루지닌이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자 러시아 인터넷의 열성 푸틴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빨갱이 드립은 기본이고 전 주러 미국 대사가 긍정적인 의견을 남겼다는 이유로 소련 공산당의 후신인 공산당 후보에게 미국 첩자라는 드립을 날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루지닌이 홍차 한 잔을 맡아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지만 푸틴이나 여당인 통합 러시아, 러시아 선관위 입장에서는 투표율이 높아야 푸틴 당선의 정당성이 높아지므로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유권자들의 흥미를 끌게 놔둘 가능성이 더 크다. [25]

푸틴의 정치적 은사인 아나톨리 소브차크 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의 딸이자 HTB의 전 유명 앵커[26] 크세니야 소브착이 2018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게 이런 작업의 일환 아닌가 하는 관측이 있다. 유권자들의 흥미를 유발해 대선 판을 키워 푸틴이 역대 최다 득표율로 당선되게 하는 작업의 일환이라는 것이 그 주장. 비록 아버지와는 정 반대로 지난 몇년간 반정부 시위 참여 등 반푸틴 활동에 몸담았다. 대선 출마 선언 후에도 러시아의 조직적인 도핑 조작을 비난하고# 서방의 대러 제재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정적으로 크림 반도 병합이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크세니야의 아버지가 푸틴의 은사였기 때문에 푸틴이 존경하는데, 이런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진작 보리스 넴초프처럼 됐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 그러나 이슈를 노리고 저런 소리 한다는 추측이 있기에 러시아에서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크세니야 소브착이지만 대표적인 야권 운동가인 알렉세이 나발니는 크세니야가 야권 표 분산등 야권 분열에 이용당할 것이라며 출마를 반대하기도 했다.

러시아 선관위는 푸틴 대항마로 가장 위협적일거라고 판단한[27] 알렉세이 나발니의 대선 출마를 불허했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막상 정권 교체가 될 경우 대대적인 정계개편이 일어나며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는 것 보다 서구권에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지만 러시아 패권주의와 개발독재를 지속하며 서구가 아니라 러시아식 자본주의, 러시아식 민주주의를 중시하는[28] 푸틴이 낫다고 생각하거나, 1990년대의 엄청난 혼란을 체험한 탓에 불확실한 변화와 개혁보다는 마음에 들진 않지만 푸틴이 추진하는 기성 정치가 상대적으로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그러나, 푸틴은 공약도 제대로 안 내세우고 선거 얼마 안 남긴 시점에 국회에서 신형무기나 발표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미국의 각종 제재에 시달리는 반면 다져놓은 미래 산업기반은 사실상 없다. 게다가 현 경제성장률도 낮고 잠재성장률도 암울한 상황이며 세계 5백대 기업에는 자원 관련 회사 딸랑 2개가 들어가고 끝이라서, 대만보다도 못하다. 이 상황을 초래한 것은 푸틴 자신인데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국회에서 힘자랑, 그것도 경제를 말아먹으면 양산도 못하고 끝날 신형무기들이나 공개하고 있었다.

푸틴보다 상식적인 공약을 내세운 후보들이 있는데 뽑을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친푸틴 인사들이 자주 써먹는 레파토리 중 하나로 러시아인들은 90년대의 엄청난 후유증으로 인해 변화에 대한 피로와 두려움을 호소하며, 골수 푸틴 지지자들이 아닌 이상 푸틴을 뽑는 사람들은 푸틴을 좋아한다기보단 푸틴이 잘못한 걸 알아도 지금 그나마 가진 것까지 박살나는 것이 두려워서 변화 대신 그대로 머물러있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푸틴은 이것을 이용해서 각종 매체들에서 서방의 위협을 과장하여 사람들의 피로와 공포를 증대시키는 한편, 다수의 사람들이 불만을 크게 품지 않을 만큼만 빵을 분배해 변화할 의지를 품을 힘을 가질 조건을 제거하여 현실에 안주하게 만든다. 또한 애국심과 국수주의 고취로 골수 지지층을 양성하며 최종적으로 부정투표로 독재를 유지한다.

한 마디로 러시아인들의 90년대의 충격으로 인한 상실감과 패배주의, 무력함 등이 안정을 취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푸틴은 이걸 교묘하게 증폭시켜서 지지 기반을 다지고 자신을 소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저항의지를 잃게 하여 적극적 반대자들 밑에 규합되지 못하게 저지하며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암살하거나 누명을 씌워 투옥하고 집권층에 불리한 정보가 올라온 인터넷 사이트는 폐쇄하는 등 부정투표가 행해져도 저항이 크게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중이다. 이것은 현 중국의 행보와 비슷한 상황이다. 단순히 푸틴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푸틴이 압도적으로 뽑히고 부정선거를 해도 큰 저항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다.

2018년 3월 18일에 투표가 실시됐다. 그 결과 푸틴이 76.66%를 득표해서 아예 압승을 거두고 나머지 후보들을 죄다 보조출연자로 만드는 위엄을 보여줬다. 이는 역대 러시아 대통령선거 최다 득표율에다가 선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 만큼 일방적인 득표율이다. 푸틴 지지자들이 푸틴을 찍은 이유로는 대부분 "생계도 어렵고, 푸틴도 좋아하지 않지만 혼란이 싫으니 당장은 '현상유지'만이라도 원한다.", "푸틴이 독재자라도 상관없다. 배짱과 깡이 두둑한 러시아, 강력한 러시아가 좋다."와 같은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2024년 직후 또다시 출마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100세까지 할 생각은 없다."라고 밝혔다.

선거가 끝난 2018년 4월 13일, 블라디미르 푸틴의 충성파이자 체첸 공화국의 수장인 람잔 카디로프가 "최대 2연임까지 가능한 러시아 헌법을 바꿔야 한다." 하는 주장을 내놓았다. 과연 푸틴의 임기 내에 개헌을 통해 차기 선거에 나올지도 관심사. 푸틴 종신집권 개헌론 고개…체첸수장 "3연임 금지 조항 바꾸자"


2.4. 집권 4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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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 취임을 이틀 앞둔 2018년 5월 5일, 푸틴 취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러시아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려 1,600여명이 연행됐다.

2018년 5월 7일, 푸틴 대통령의 4번째 취임식이 열렸다. 푸틴은 이번 4번째 집권으로 2024년에 이번의 임기를 모두 마칠 경우 무려 24년간 집권하게 되는데 이는 스탈린 이후 최장기 집권이다. 이 자리에서 코르테즈 리무진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제 최신형 리무진[29] 역시 함께 공개됐다. # #

연금 수급 연령을 남성은 60세에서 65세, 여성은 55세에서 63세로 개정하는 연금 개혁안을 밀어붙여[30] 임기 초기부터 지지율이 10%P 넘게 하락했다. 국회 표결에서 원내 야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러시아 자유민주당, 공정 러시아가 모두 반대했고 여당 통합 러시아에서도 이탈표가 1표 발생했다. 여론조사에서 거의 90%가 연금법 개정을 반대한다는 결과가 나올 정도로 이례적으로 반대 목소리가 높다. 국회 표결 후 공산당[31]과 야권 주도로 반대 시위를 일어났다.

2018년 9월 3일, 연금 개혁으로 지지율 하락을 경험하고 있는 푸틴 정권은 매주 약 1시간 동안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을 찬양하는 방송을 국영 방송사 Russia-1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통찰력, 멋진 몸매, 그리고 아이들을 천성적으로 좋아하는 그의 모습을 그려낼 이 방송은 Russia-1의 앵커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에 의해서 소개될 예정이다.

2018년 9월 4일, 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는 본인 자서전에 2015년 민스크 회담에서 있던 푸틴 대통령의 말실수를 묘사해 논란이 일고 있다.# 올랑드의 묘사에 의하면 비공개 회담에서 분노한 푸틴 대통령은 실수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 안에 배치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고 한다. 본인의 말실수 이후 푸틴 대통령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계속해서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말다툼을 벌였고 말실수는 계속 이어졌다고 올랑드는 주장했다.

2018년 9월 9일, 푸틴 정권에서 연금 개혁을 반대하는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최소한 800명에 가까운 러시아 국민들이 경찰한테 끌려갔으며, 적어도 15명의 국민들이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OVD-Info는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계속되는 경제 불황과 연금 수급자 증가로 국가 부채가 늘어나자 수급 연령을 늘렸지만, 러시아의 노동 단체에서는 러시아의 기대수명은 서양보다 현저하게 낮다며 푸틴의 이와 같은 결정에 크게 반발했다(금방 죽을수록 받는 게 줄어들거나 아예 못 받을 수도 있으니까). 이 연금 개정 덕분에 러시아 각지에서 반대 시위가 늘고 있으며,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도 하락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018년 9월 지방선거에서 여당 통합 러시아프리모리예 주 주지사 후보가 결선 투표에서 러시아 연방 공산당 후보와 1%P 안팎의 초접전 끝에 당선됐는데 부정선거였다는 의혹이 터졌다. 참조 개표 96% 상황에서 공산당 후보가 여당 후보에게 4%P 차이로 이기고 있어 공산당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미개표 지역에서 무더기 여당표가 우수수 나오는등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 조작이 있었다는 것. 링크에 첨부된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개표율이 98%에서 99%로 넘어갈때 공산당 후보의 표는 5표가 깎이고 여당 후보 표는 13,000여 표 증가했다. 이후 공산당 후보와 공산당원들이 단식 투쟁을 선언, 크렘린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시위가 일어나 크렘린은 선거 결과를 무효화시켰고 당선됐던 여당 후보도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한국어 기사. 2012년 APEC 개최를 계기로 푸틴이 공을 들여 투자한 덕에 인프라 구축의 효과를 체감하게 된 블라디보스토크 유권자들의 푸틴 정권 지지율이 2010년대 중반에 크게 상승했는데 위에서 설명한 연금 개혁안 때문에 그 블라디보스토크에서조차 다수의 이탈표가 발생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참고로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선거 결과 백지화 사례다. 이후 12월의 재선거에서 선관위가 공산당 후보 출마 자격을 박탈하고 9월 선거에서 부진했던 여당 후보를 교체한 끝에 승리했다.

이 지방 선거에서 집권여당 통합 러시아는 여전히 모스크바 시장 등 대다수 지역의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하바롭스크 크라이블라디미르 주에서 여당 소속 현 주지사들이 자유민주당 후보들에게 패해 낙선하는가 하면 하카시야 공화국 대통령(공화국 수반) 선거에서는 여당의 빅토르 지민 현 대통령이 1987년생 변호사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후보에게 12%P 차이로 밀려 결선 투표를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방 의회 선거는 여당의 하락세가 더욱 뚜렷해 전체적으로 통합 러시아의 득표율이 하락하고 야당 득표율이 상승해 야당들의 의석수가 전체적으로 상당히 증가했다. 공산당이 원내 1당이 된 이르쿠츠크 주의회등 여소야대가 되어버린 곳까지 나왔다. 보통 러시아의 지방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되는 사례들은 통합 러시아가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아 여당 없이 야당들끼리 경쟁했을때에나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고[32] 야당 후보가 통합 러시아 후보와 경쟁해서 승리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이번 선거는 여러 차례 재선했던 여당의 현직 주지사들이 낙마한 보기 드문 사례. 연금법 개정안의 여파가 그정도로 크다고 볼 수도 있다.

2018년 9월 21일, 푸틴 정권 아래에 2015년부터 러시아 시민 운동가와 기자들을 향한 공격이 늘어났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보고서에 의하면 러시아 치안 담당 기구는 고문을 실행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지고 있고, 이들의 불법적 행동은 정권 유지를 위해서 더 이상 범죄 행위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2018년 10월 3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국내에서 반발이 많은 연금 수급 연령 개혁법에 서명하여 통과시켰다.#

같은 날, 푸틴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원유 가격상승의 원인이라고 말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거울을 보면 누가 원유 가격 상승의 원흉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2018년 10월 8일,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59%에서 39%로 추락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됐다.# 심지어 크렘린과 가까운 FOM 여론조사 기관도 "지금 다시 대통령 선거를 진행하면 블라디미르 푸틴을 다시 선택하겠다"는 질문에 45%만이 그렇다고 대답해, 2018년 초반보다 약 22%P 급감했다고 분석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크림 반도 합병 이전만큼 높지 못했다. 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러시아 정부가 국민을 희생시켜서 경제 불황을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8년 10월 8일, 푸틴 대통령은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시도와 관련하여 무능함을 보인 GRU의 상장 이고르 코로보브를 소환하여 "우둔한 얼간이"라며 욕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대통령에게 직접 욕을 먹은 상장은 몸을 심하게 떨며 나왔으며 곧 병에 걸렸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이 이만큼 화가 난 이유는 단순히 이번 암살 시도를 진행한 요원 두 명뿐만 아니라, 약 300명이 넘는 GRU 요원들의 신상 정보와 여권 정보가 폭로됐기 때문이다. 즉, 외국 정부들은 러시아 군사 요원들이 과거 어디서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모두 알 수 있게 됐다.

2018년 10월 10일, 2006년 암살된 러시아 내부 고발자 안드레이 코즈로브(Andrei Kozlov)가 밝힌 돈세탁 경로를 통해서, 푸틴 가족과 FSB가 약 2,000억 달러어치 돈을 세탁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돈세탁과 탈세를 도운 혐의로 조사받은 덴마크 은행 당스케의 고위 관료들은 적어도 2013년부터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게 수색 결과 밝혀졌다.# 미국 국무부 서류에 따르면, 미국은 안드레이 코즈로브 암살 이후 돈세탁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조사에 착수했지만, 여태까지 그 규모와 돈줄의 경로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 돈세탁 경로와 안드레이 코브로브의 암살을 조사하던 기자 안나 폴리츠코브스카야(Anna Politkovskaya)도 한 달 뒤에 암살당했다. 이들의 죽음 이후 약 2,000억 달러 자금이 에스토니아에 위치한 당스케가 인수한 은행을 통해서 세탁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8년 10월 13일, 하카시야 공화국의 수반으로 선출된 공산당 후보 발렌틴 코노발로브가 사무 처리 오류로 무효화 처리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코노발로브는 "말도 안되는 일이다. 우리는 선거에서 쉽게 우승했어야 한다. 이제 그들은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려고 한다."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어떻게 취임하기는 했다. 통합 러시아는 경제 불황과 정계의 부패와 비리로 지지율이 31%까지 추락했고, 이번 지방선거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2018년 9월 당선된 야당 소속 주지사들을 몇달 동안 한번도 접견하지 않고 있으며 당선 축하 인사도 하지 않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당선자들을 크렘린으로 불러 대통령이 축하하는 관례가 있는걸 볼 때 기분이 좋지않다는걸 짐작할 수 있다.

요약하면 조금씩 금이 가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 일단 첫번째 임기 이후 안정된 국제유가 상승으로 재정상황은 한숨을 돌린데 비해 실물경기는 2014년 이래로 여전히 침체인 상황인지라 불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크람반도 합병이나 미국과 서방에 대한 대결감으로 이를 상쇄해나갔는데, 4선째 들면서 지급연령 인상과 부가가치세 인상으로 그나마 회복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실질소득이 다시금 줄어들면서 기대감이 폭 식게 되어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게 된 것이다. 4선 이전까지만 해도 다른 대권주자는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경제난이 심해지고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그것이 가시게 된 것이다.

2019년초부터 인터넷 검열을 강화하는 법을 하원에서 통과시키는 등 인터넷 검열을 추진하자 인터넷검열에 반대하는 대규모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3월 18일에는 러시아 대통령과 정부를 모독하는 가짜뉴스나 자료를 유포하는 온라인 미디어와 개인을 처벌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슬슬 스타트에 발동을 거는 걸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13년만에 31%에 달하면서 최저치에 달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선 7월 20일에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야권도 참여했다.# 하지만 7월 27일에 모스크바에서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1074명이 체포되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1달이상 지속되는 홍콩시위를 거론하며 경찰 당국의 강경대응을 비판했다. 특히 러시아 경찰이 유튜브 생중계 중인 시위자가 외신과 인터뷰 도중 들이닥쳐 체포하는 모습이 퍼져나가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고있다. 그 중에 올가 미시크(17)라는 소녀가 '헌법 낭독 시위'를 벌이는 사진이 온라인에서 급속히 확산되면서 탱크맨처럼 주목받았다.#

4기 임기 끝나는 2024년 이후 푸틴의 재임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도 재임 반대가 증가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는 2011년 이후 최대 인원 시위를 참여했다.# 또한, 시위대가 60,000명이 몰리면서 2012년 이래로 최대의 시위가 발생되었다.#

지지율도 2001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이다.# 그리고 9월 8일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통합 러시아가 야권에 대패를 당했다.#

결국 2020년 1월에 낮은 지지율을 버티지 못하고, 내각이 총사퇴 선으로 가졌다.# 3선 대신 의원내각제 수준의 개헌 가능성이 있다.# 다만 푸틴이 언급하기를 러시아에는 대통령제를 유지해야하고 서방식 의원내각제는 러시아 현실에 맞지 않다 하였다.# 사실상 대통령제인 러시아에서 의원내각제식 이원집정부제인 오스트리아처럼 하는게 아니라 프랑스나 루마니아 우크라이나식 이원집정부제로 가능성이 있다.

개헌 방식에 대해서는 헌법의 기본적인 것은 건들지 않으며, 시민사회와 정당, 지방정부 등의 역할을 강화하는데 맞춰진다. 상·하원 의원, 학자, 사회활동가, 기업인, 문화계 인사 등 75명으로 이루어진 개헌 준비 실무그룹 구성으로 이뤄지며, 5월 전까지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될 것이며, 개헌 발의 법안은 2~3월 중에 하원에 제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임기 없애는 개헌은 반대했다.# 1월 20일에 푸틴 대통령은 하원에 헌법개정안을 제출했다.# 이에 대해선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푸틴 본인은 죽을때까지 독재하는것에 대해 과거 소련 공산당 서기장들의 예시를 들며 부정적인 의사를 여러번 표한데다가 스스로 종신 독재를 포기했다며 일부의 찬사를 받는 동시에 퇴임 이후에도 정치 영향력을 행사중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전 대통령의 사례가 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이 처럼 될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 주장대로라면 민주주의와 헌법을 지키기 위해 종신 독재자가 되지 않고 퇴임한다는 명분도 쌓고 실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겠다는 것. 하지만 국부 방식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2월에 최측근이었던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대통령 보좌관이 경질됐다.#

국민투표를 4월 22일로 확정되었다.# 이 날은 레닌 탄생일이다.

3월 2일에 푸틴 대통령은 신을 숭상하는 것과 동성혼 금지(!), 영토 포기 금지를 추가한 헌법개정안을 제출했다. # 3월 10일에 푸틴 대통령은 두마에서 한 연설을 하던 도중에 통합 러시아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의원이 제안한 대통령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길을 열어주는 개헌안을 지지했다. # 그리고 상하원 표결에서 통과되었다. # 이로써 초장기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러시아 헌법재판소도 개헌안에 대해 합헌판결을 내렸다. # 하지만 신종 코로나가 확산되자 푸틴 대통령은 신종 코로나가 악화되면 국민투표를 연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 #

이런 와중에 5월 29일부터 진행 중인 노릴스크 기름 유출 사고가 진행 중이라 러시아 검찰이 모든 영구동토층에 대한 점검에 들어가라고 전했다.#

코로나19를 피해 칩거 중이던 푸틴 대통령이 한 달여 만에 공식 석상에 나와서 개헌 지지를 강조했다.#

6월 14일에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코로나19 대처에선 미국보다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자신의 집권 연장을 허용하는 개헌안 통과를 전제로 2024년 대선 재출마 가능성을 시사했다.#

러시아에서 봄의 민주주의 운동이란 단체가 미니시위 소셜미디어 캠페인이란 이름으로 작은 사물을 활용해 개헌 국민투표를 반대하는 시위를 이끌고 있다.#

자유민주당 소속 하바롭스크 주지사를 살인 혐의로 체포하였는데, 이는 야당 재갈물리기 설이 있다.#[33] 이에 체포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2020년 7월 20일 북극권 주민에게 최대 5년간 커다란 토지를 무상 제공한다고 밝혔다.#

2020년 7월 27일 2024년까지 수소 20톤을 수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가상화폐(암호화폐)의 보유와 거래는 인정하지만 결제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에 서명했다.#

2020년 8월부터 벨라루스에서 시위가 발생하자 루카셴코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의 지원 요청에 푸틴 대통령은 군사적으로 지원할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알렉세이 나발니가 독살 미수를 당했다. 사실 푸틴의 정적인 나발니가 독살 미수를 당했다는것 자체가 푸틴에게 위협적인 정치적 요구가 마구 솟아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파벨 그루지닌 등 앞으로 푸틴 자리를 위협할 정치인들은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지 않을 것이다.

9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통합 러시아가 압도적으로 이겼다.#

9월 14일에 루카셴카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고 푸틴 대통령은 벨라루스에 군사,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 작가 세르게이 콤코프가 푸틴을 노벨평화상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10월 22일에 푸틴 대통령은 발다이 클럽이 주최한 회의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이끌던 시대가 저물고 그 자리를 중국과 독일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의 더 선에서 푸틴 대통령이 파킨슨병으로 2021년에 퇴임(!)한다는 보도를 하자 크렘린에선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러시아 하원에서 푸틴 대통령이 퇴임후에도 형서처벌받지 않게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자국 국영 항만시설 기업인 로스모르포트와 2026년까지 북서부 무르만스크주 주도인 무르만스크에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해저 광케이블을 설치할 계획이다.#

2021년 1월 1일부터 연 소득 500만 루블(약 7320만 원) 이상인 주민의 개인 소득세율을 13%에서 15%로 올리는 법안을 서명했다.#

12월 9일에 러시아 하원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면책 특권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22일에 서명하였다.#


2.4.1. 코로나19[편집]


2020년 3월 26일에 푸틴 대통령이 코로나19의 팬데믹 사태와 관련 심각한 전염병 피해국에 대해 기존 제재를 일시적으로 해제해 주자고 제안했다.#

2020년 4월 13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코로나19를 피해 모스크바를 떠나 교외지역으로 몽진을 하였고, 대신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가 크렘린에 남아서 코로나19 방역대책을 총괄하게 되었다. 기사

2020년 7월 10일 기준 러시아의 확진자가 70만 1천 명에 사망자는 1만 667명으로 치사율은 1.52%이고 이마저도 축소 발표 의혹이 있으나 감염자 순위가 스페인을 제치고 세계 3위이며 사망자 수도 적지 않다.

2020년 4월 28일에는 대국민연설을 했다.#

그런데 코로나19 방역대책을 총괄하던 미슈스틴 총리가 감염되는 대사건이 터졌고 # 코로나19와 경제난으로 인해 푸틴의 지지율이 59%까지 떨어졌다. #

사흘에 한 번씩 코로나19 진단검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2.4.2. 2020년 헌법개정 국민투표[편집]


개헌 내용은 전체 133개 헌법 조항 가운데 46개 조항에 수정이 가해졌다. 하원은 대통령이 추천한 총리·부총리·일부 장관 등의 임명에 대한 승인권을 갖게 하고, 상원은 대통령이 추천한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 대법원 원장과 판사 등을 임명할 수 있게 됐다.#

연기 전 여론조사에서는 초반에는 찬성이 높다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2020년 6월 1일에 푸틴 대통령은 코로나19로 미뤘던 개헌국민투표를 20년 7월 1일에 시행한다고 밝혔다.#

중앙선관위는 한 날에 유권자들이 한꺼번에 투표장에 몰릴 경우 전염병 전파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는 이유로 20년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미리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인터넷 통한 전자 투표도 허용했다.

푸틴에 따르면 개헌 내용은 기존의 헌법에 따라 6년 중임이 가능한데, 개헌 전 대통령직 수행 횟수를 0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본인의 임기는 2024년까지 채우고 나서 2024년 선거에서 대통령직 수행 횟수가 리셋된 채로 대통령에 도전하는 것이다. 즉 이론대로라면 푸틴은 재선까지 하면 본인이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2036년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종신이나 다름없는 셈.

투표 결과, 개헌 찬성이 78% 득표율로 가결되었으며, 투표율은 67.97%이다. 만약, 푸틴이 개헌 헌법 하에서 중임에 성공한다면 32년간 집권해 소비에트 연방의 철권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 기간(31년)을 뛰어넘게 된다.

지역별로 보면 흥미로운 점은 네네츠 자치구의 반대표가 많았다. 이는 아르한겔스크와 연합에 대한 불만이 컸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치구 지사는 공정한 선거 였다고 주장했다.#

코미 공화국은 개헌 반대과 찬성이 뒤바뀌는 바람에 부정선거 의혹이 있다.#

2021년 4월 5일. 대통령이 서명함에 따라 마무리되었다.#


2.4.3. 2021년[편집]


2021년 1월 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특히 푸틴의 신년사는 2분을 넘기지 않는 걸로 유명했는데, 코로나19 상황이라 무려 6분씩이나 연설을 하였다. 기사

알렉세이 나발니가 귀국 직후에 바로 체포, 구속되자 나발니의 석방을 주장하는 반정부 시위가 전국에서 열리고 있다. 나발니는 감옥 안에서도 측근들을 통해 푸틴의 호화 저택과 사생아 자녀 등 각종 비위를 열심히 까발리는 중이다. 시위과정에서 5,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하도 강압적으로 시위를 억압하는 탓에 눈사람을 이용한 반대시위를 하는 모습이 발견돼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현지 경찰은 이 눈사람 제작자를 구금하고, 눈사람들에게서 팻말을 빼앗아 갔다.#

현재는 나발니가 구속된 상태라 시위동력을 잃어서 대규모 시위는 하지않고 있다.

5월 11일에 카잔시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하자 푸틴 대통령은 총기 규제 강화 입법을 지시했다.#

푸틴 대통령은 영토를 침범하는 경우에는 강력하게 대응한다고 밝혔다.#

야권 정치인인 드미트리 구드코프(전직 공정 러시아 의원)가 러시아 정부에 의해 구금됐다.#

러시아가 미국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탈달러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푸틴 대통령은 유럽연합에 러시아산 가스 수입은 달러대신 유로화로 지불해야 한다고 밝혔다.#

7월 1일,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구 소련과 나치 독일이 모두 책임이 있다는 식의 공개 비판을 금지하는 법률이 채택되어 푸틴 대통령이 서명했다.#

9월에 있을 총선을 앞두고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맡고 있는 통합 러시아의 지지율이 하향세를 타자 대대적으로 야권 탄압에 나서고 있다.# 또한 알렉세이 나발니와 관련된 사이트 49개를 접속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다음 대선을 앞두고 사실상 푸틴 4기에 대한 중간평가 역할을 맡았던 국가두마 선거에서 실질적 여당 역할을 맡고 있는 통합 러시아가 출구조사 대비 선전, 개헌선인 300석을 지키면서 선방했다. 하지만 지난 총선보다 성적이 다소 하락한 결과라 푸틴 입장에서 입맛이 쓸법한데다가, 이번 선거 역시 야당과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무라토프 기자가 푸틴 정권이 외국 첩보원법으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고 밝혔다.#

11월 4일, 푸틴 대통령이 크림반도에 있는 세바스토폴에서 열린 국민 화합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

12월 28일, 러시아 대법원이 인권단체 메모리알을 해산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국제사회가 비판했다.#

푸틴 대통령이 법정 권한외의 사이트들을 폐쇄할 수 있는 법안에 서명했다.#(러시아어)


2.4.4. 2022년[편집]


2021년 12월 31일, 역대 신년사 중 가장 긴 6분 22초 동안 방영됐다.#

2022년 12월 8일 전직 무기상이자 KGB 요원인 빅토르 부트WNBA 농구선수 브리트니 그라이너의 교환이 성사되었다. 러시아는 이를 외교적인 승리로 간주하고 크게 환영하고 있으며, 부트의 어머니도 푸틴 대통령 덕분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2.4.5. 2023년[편집]


1월 8일.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 밀로라드 도디크는 국경일 기념식에서 자국에 푸틴 대통령이 보여온 '애국적 관심과 사랑'에 훈장을 수여하게 됐다.#

3월 17일, 국제형사재판소가 푸틴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5월 26일 아르메니아 총리 니콜 파시냔,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일함 알리예프와 모스크바에서 만나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 대해 3자 회담을 했다.

그린피스 등에 이어 세계 최대 야생 동물 보호 단체인 세계자연기금(WWF)에까지 '경제활동 방해'라는 낙인을 찍어 자국 내 활동을 금지하였다.#

9월 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북러정상회담을 가졌다.

2.4.5.1.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편집]

2월 22일, 대국민 연설에서 미국과 NATO가 나토 세력을 더 이상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정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은 러시아에 손해를 입히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나라라 주장했다. 이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주권과 독립을 승인하고 평화유지군을 명목으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군을 투입시켰다.

2월 24일, 정치적 승부수로서 우크라이나 내 군사작전을 선언하며 20만 병력을 동원해 기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목표는 당연히 우크라이나 병합 혹은 속국화를 통한 완충지대 확보였고, 이러한 목적을 정당화 하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탈나치화를 내세웠다.

정치적 승부수로 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공했지만, 우크라이나 내 나치 세력을 타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서 전쟁을 시작하였다.[34] 우크라이나는 정치인, 민간인, 군인 할 것 없이 한데 뭉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키이우 함락이 늦어지며 전쟁의 목적조차 제때 달성하지 못하고 손해가 누적되고 있다. 거기다 이라크 전쟁[35] 러시아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명백한 침략이다보니 전세계적인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어, 이전까지의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 이미지를 잃고 큰 비난을 받고 있다.

거기에 친러 진영을 제외한 전세계 여론이 모두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러시아의 SWIFT 코드 퇴출과 해외 러시아 자금 동결, 러시아 항공기의 영공 진입 불허 등 러시아를 향한 강도 높은 제재가 동시다발적으로 가해지고 있어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러시아 내외에서도 반전 시위가 계속되는 데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에 봉착하여 언제 키이우를 점령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기에 사실상 대통령 임기 최대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다.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종결되든지 간에 푸틴은 이미 침략자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진데다 안 그래도 대봉쇄로 인해 엉망이 된 러시아 경제가 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갑자기 들이닥친 세계의 엄청난 제재로 크게 휘청이고 있기 때문에 임기 말까지 순조롭게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더욱이 언제든지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까지 강하게 남겼기에 사실상 사분오열된 오합지졸이던 NATO를 결집시키고 군비까지 늘리게 하는 부작용까지 초래했으며, 러시아 턱밑에 있는 북유럽 국가들인 스웨덴, 핀란드가 적극적으로 NATO 가입을 추진하게 만들었다.[36] 독일 입장에서는 '악마를 다시 깨운 자는 바로 너'라는 빼도 박도 못 하는 명분이 생긴 셈.

거기에 전황이 지지부진하니 푸틴은 핵위협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라 수많은 조롱과 괄시를 받고 전세계에서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항하여 스포츠, 예술계 등의 러시아 보이콧 및 퇴출, 추방 촉구, 러시아산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37]

우크라이나 침공이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에 걸친 21세기에서 손에 꼽을 만한 최악의 선택이라, 냉혹하면서도 계산적이었던 푸틴이 상황이 꼬일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를 냅다 공격하고 본 것을 의아하게 보는 시선도 많다. 이에 대해 노화를 원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현재 푸틴은 1952년생으로 곧 70세를 맞게 되는데 70대를 맞는다는 건 본격적으로 치매의 위험이 높아지는 시기이며, 아무리 현명하던 사람이라도 판단력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시기다. 게다가 코로나19 사태로 피신하면서 하필 자기 입맛에 맞는 측근들과만 접촉했는데, 이 과정에서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독재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 목소리도 대놓고 반대파만 아니면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게 다 이유가 있는데, 푸틴도 장기집권 때문인지 모르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중요성을 잊어버린 것이다.

군사력 투사가 곧 정치적 성공이란 위험한 공식을 과신한 것을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푸틴은 2차 체첸 전쟁 승리로 권력을 공고히 다졌고, 시리아 내전 개입으로 국제 정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남오세티야 전쟁크림 반도 병합으로 지지도를 높여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다만 위의 거듭된 군사적 성공의 바탕엔, 러시아 국내 여론의 단단한 지지가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실제로 체첸 전쟁은 어디까지나 러시아 연방 내부에서 일어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의 내전이며, 남오세티야 전쟁은 조지아의 대러 선제공격으로 촉발되었다. 시리아 내전은 비록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를 지원하긴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독재자와 민주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악과 악의 대결에 가까웠으며, 무엇보다 개입시점에 IS라는 전대미문의 테러국가를 퇴치한다는 좋은 명분이 있었다. 크림 반도는 소련 시절 어거지로 우크라이나에 귀속된 곳으로 러시아계 인구가 많이 거주하고 있어 그때부터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38]

병합 당시에도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은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투표로 귀속'하는 형식을 취했고, 주민 대다수가 러시아 귀속을 지지한 것까지는 사실이었다. 돈바스 지역 개입도 사실 이전부터 해당 지역 주민들 사이에 반우크라이나 정서가 상당했고, 유로마이단을 계기로 대놓고 친서방 노선이 명백해지자 그럴거면 자기들도 차라리 분리독립하겠다는 주장이 이전부터 공공연히 돌았는데, 대놓고 개입이 아니라 분리독립세력에게 힘을 실어주는 형태였기 때문에 적어도 돈바스 지역 주민들의 지지는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푸틴이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 치러온 전쟁은 최소한 러시아 국민의 지지는 받을 만한 명분을 갖추었고, 나름 서방에 내세울 명분도 최소한은 있었다.

반면에 이번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명분이 너무나 부족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러시아군 병사들조차 왜 자신들이 우크라이나와 싸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푸틴은 '탈나치화'란 명분을 내세웠으나, 오히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하는 짓이 영락없는 나치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의 행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러시아 내에서 조국이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시위가 발생하는 건 당연지사. 어처구니도 명분도 없는 피해자만 생기는 무의미한 전쟁에 끌려간 병사들의 사기와 군기는 뚝 떨어졌고, 러시아 안에서도 '형제국인 우크라이나에 왜 침공을 벌이느냐.'는 비난 여론만 거세졌다. 최소한 빠져나갈 구멍이나 퇴로를 전혀 만들어두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번 침공에 동원된 러시아군의 사기 문제도 여러 미디어에서 다루었다. 우크라이나 민간인과 대화를 나누며 뉴스에서 우리를 뭐라고 하냐고 물어보거나, 군용 장비를 버려둔 채 자포자기해서 도망가는 등 일선부대의 사기가 낮은 상황이고 이에 오바마 행정부 시기 주러 미국 대사였던 마이클 맥풀 등은 '확실히 사람이 변했다. 장기 집권 때문에 현실 감각이 흐려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39]

미국 NBC에 따르면 푸틴 본인도 예상을 넘어선 우크라이나군과 시민들의 저항에 러시아군이 고전하고 있는 것에 대해 좌절하고 있고, 측근들에게 크게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방송은 또 그가 두 귀를 닫고 아첨꾼들의 보고 등 듣고 싶은 내용만 골라 듣고 있어서 제한적인 정보만 갖고 있다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대국민 방송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내 특별군사작전에서 러시아는 군사범죄를 저지르는 민족주의 무장조직 대원들과의 가차없는 싸움을 지속할 것"이라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마크롱 대통령이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정부군이 수년에 걸쳐 벌인 대학살(제노사이드)에 관해 침묵했다고 주장하며 우크라이나 탓으로 돌리고 있다. # 3월 3일에는 이웃들에 대한 어떠한 비우호적 의도도 없다며 관계 정상화를 요구했다. #

여전히 적반하장으로 제재를 풀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미국은 당연하게도 전쟁을 끝내면 제재도 끝날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런 행적을 보면 푸틴이 알렉산드르 두긴의 신유라시아 정책의 일환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코로나19로 인해 모스크바를 피해 이동했을 당시 두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최측근들만 함께 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영향으로 잘못된 자기 확신을 품은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다.

2016년, 2019년에 암 수술을 가졌다는 러시아 탐사보도 매체 프로엑트의 보도를 전했다.# 또한 영국 데일리메일은 러시아 소식을 전하는 유명 텔레그램 채널 '제너럴SVR'에 올라온 글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은 의료진으로부터 가까운 시일 내에 수술을 받을 것을 권유 받았다면서 암 수술을 받게 되면 최측근이자 강경파인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비서관이 권한을 대행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이와는 별개로 카자흐스탄 정부에다가도 구 소련은 카자흐스탄 역사의 일부라면서 러시아에게 복종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했다.#

3월 18일에는 아예 크림반도 합병 8주년 기념식에서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2022년 7월에는 하원 원내 정당 대표들과의 면담에서 "지금 전장에서 우리를 패배시키겠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면서 "할 테면 해보라"고 말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또한 평화 협상을 거부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우크라이나가 협상을 거부하면 할수록 합의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2022년 8월, 대통령령으로 소련 시절의 모성영웅 훈장을 부활시켰다. 10명 이상의 아이를 낳아 10명 모두를 양육하고 있는 러시아 여성은 열 번째 아이가 1살이 될 때 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모성영웅 훈장과 함께 100만 루블(약 2천100만 원)의 포상금을 받게 된다. #

우크라이나인의 러시아 체류 기한을 해제하고, 이들의 러시아 취업을 허용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소련 마지막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죽음을 추모했다. 장례식 당일이 아닌 9월 1일 모스크바 중앙 임상 병원에 방문 및 조문해 붉은 장미를 헌화한 뒤 관에 손을 얹고 있다가 성호를 긋고 자리를 떠났다. 장례식에는 일정상 불참했다.

2022년 9월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은 받지 못 했으나 천천히 반격한다는 계획으로 헤르손 탈환 작전이 본격적으로 들어가고 미국 등 서방이 에너지난에 시달려도 타협없는 러시아산 원유 대러제재에 반발하며 가만히 있으면서 폴란드에 무기수출 계약을 맺은 한국까지 거론하며 미러대결에 참여하지 말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장기화되는 전쟁에 결국 일부 선출직 공무원들이 푸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요구하고 나섰다.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스몰닌스코예 구의회 의원들은 9월 7일 푸틴 대통령이 전쟁으로 국가를 어려움에 빠뜨리는 반역죄를 저질렀다며 러시아 하원(국가 두마)에 대통령 탄핵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결의안이 실제 탄핵 추진으로 이어질 리가 없겠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반대를 드러내고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주목했다. #

2022년 9월 16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개최된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에서 가능한 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협상 절차를 거부했다면서 전쟁 장기화의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돌렸다. #

9월 20일. 방위산업 계약 절차를 간소화 발표했다.# 다음 날, '극동이 일어날 때'라는 연설로 부분동원령을 발표했다.연설 전문(영어)[40]

9월 22일. 이웃인 중국이 비난한다고 보복성이 대놓고 드러나는 가스 밸브 잠그기를 시전했다.#

9월 30일, 크렘린궁에서 우크라이나 내 4개 점령지와의 합병 조약식을 했다. 이 자리의 연설에서는 한국도 언급되었다. 연설 전문(러시아어)#

10월 7일, 사할린 1 사업으로 러시아 기업이 가진다는 대통령령을 가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고전의 영향인지 연말 기자회견을 취소하였다.#

2023년 5월 9일, 전승절을 맞아 러시아를 상대로 한 진짜 전쟁(real war)이 자행됐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써왔던 특수군사작전에서 전쟁이라는 용어로 바꾼건 처음이다.

2023년 6월 24일, 그나마 전쟁에서 성과를 내던 자신의 측근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쿠데타를 일으켜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격해 왔다. 비록 하루만에 벨라루스의 중재로 끝났지만 푸틴 자신의 지도력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바그너 그룹 반란 문서 참고.

8월 3일.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에 참여한 자원병이 사망하거나 부상할 경우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보장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8월 23일 반란 주동자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의 주요 지휘관들이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정황상 푸틴 정권의 배신자 숙청으로 의심되고 있으나 러시아 당국은 일련의 암살 의혹에 대해 자신들은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그들은 사고사로 죽은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현지시각 10월 22일 전 정부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의 텔레그램을 통해 저녁 심정지 상태로 침실에서 발견되어 의료진으로부터 심폐소생술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러시아 당국에서는 푸틴의 건강에는 아무 이상도 없으며 괜찮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푸틴 본인도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듯 공개 일정을 이어갔다.#

2.5. 미국과의 관계[편집]


좌측 상단부터 차례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그리고 조 바이든 미합중국 대통령. 미국의 지도자가 네 번 바뀔 동안 사진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는 푸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기자: 앞으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푸틴: 러시아와 미국은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을 함께 한 동맹국입니다.[41]

그런 만큼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객관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고 봅니다.

러시아는 미국의 동맹으로, 대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러시아는 미국에게 저자세를 취할 이유가 없다고 보고 있다.

아래 영상들은 자막을 켜면 한글 자막이 나온다.

관련 영상 미국과의 대등한 협력관계를 원한다는 푸틴

관련 영상 타이가의 주인이고 간섭을 원하지 않는다는 푸틴

# 미국 독립전쟁 때 지원했던 우호 그리고 1, 2차 세계대전을 함께 협력했던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푸틴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건 인정하지만 러시아의 문제에 간섭하지 말아달라는 푸틴

미국 군사력이 강한 건 인정하지만 어떤 침략자보다 러시아가 강하다는 푸틴[42]

그 밖에 외교적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는 불편한 관계였다. 공식 석상에서 부시는 자주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우려하는 발언을 했는데, 거기까지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부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푸틴에게 추천하였고, 푸틴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이라크 꼴이 되고 싶지 않다고 너스레를 떨어 기자들이 폭소하는 등 부시를 공개적으로 망신시키기도 했다.#다운로드 주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시와 아주 불편한 축까지는 아니고, 사실 2004년 대선 때는 이라크 테러범과 맞서기 위해서는 부시를 지지해야 한다며 부시를 지지한 전적도 있기는 하다.

존 매케인은 푸틴에 대해 "나는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세 글자를 보았다. K, G, B"라고 평한 적이 있는데, 푸틴의 행적을 보면 이걸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과거 KGB 고위 관계자들은 푸틴의 측근들로 활동했다. 애당초 존 매케인의 발언은 푸틴의 경력을 비꼰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초반에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으나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이후에는 사이가 더욱 나빠져, 미국은 유럽 연합과 함께 푸틴과 그의 측근들을 공략한 경제 제재를 실시하였다. 이에 러시아도 서방에 맞불 제재를 시도한다면서 유럽 연합의 일부 상품의 수입을 금지시켰다.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 이후로는 사우디의 석유 경쟁으로 유가가 폭락하면서 러시아의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설상가상으로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 개입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오바마 대통령과 상원 모두 러시아의 선거 개입 조사를 명령했고, CIA는 2008년부터 러시아의 선거 개입이 있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에 오바마는 36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시켰고, 러시아 첩보의 중심지로 의심되는 두 개의 영사관을 폐쇄시켰으며, 경제 제재를 확대시켜 푸틴 관련자들 전체를 압박했다.

예외적으로 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는 서로 우호적인 사이다. 트럼프는 당선인 시절부터 줄곧 푸틴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앞선 28일에는 "푸틴이 나보다 훌륭하다."라고 말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트럼프는 또 "지도력에 관해 푸틴 대통령은 'A'지만 우리 오바마 대통령은 그렇지 못하다."고 비교했다. 그러자 푸틴은 2015년 12월 17일 모스크바 연말 기자회견에서 그는 아주 뛰어나고 의심의 여지 없이 유능한 사람이다.[43]라고 화답했고,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바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대선 개입의 물증이 하나씩 나오자, 2017년 6월 미국 상원은 러시아 경제 제재 확대를 97:2로 통과시켰다. 러시아의 에너지 프로젝트와 금융업을 중심으로 제재를 가하며, 이외에도 채광, 선박, 철도 사업까지 확대됐다.

2019년 2월 27일(현지시간) 미국 양당 하원의원들은 푸틴 대통령의 개인재산내역을 밝히기 위한 새로운 법안을 제출했다고 미국 ABC방송이 보도했다.#

2021년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과는 여러 차례 충돌이 많았던 버락 오바마보다도 더욱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 취임 이후 바이든은 강경한 대러 견제정책을 펴고 있으며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러시아의 대선 개입을 통한 트럼프 지원이 확인된 후 바이든은 러시아가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경고하기도 했다. 2021년 말 터진 우크라이나 위기로 양국관계는 더욱 냉각되었으며 12월에 이뤄진 정상회담에서도 서로 경고를 주고받으며 첨예한 신경전을 벌였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산 석유 및 천연가스 수입조치, SWIFT 배제 등 대러 제재를 대폭 확대했고 우크라이나에 무기지원을 시작하면서 냉전 이래 미국과의 최악의 관계에 직면해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대가를 져야 한다고 밝혔고 러시아 항공사와 선박의 미국 영공/영해 진입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다만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것에는 반대 입장을 표했다.# 2023년 2월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공식적으로 방문하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과 만났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서방 동맹국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푸틴 대통령의 생각은 완전히 잘못됐다', '푸틴의 비겁한 욕망은 패배할 것이다'라며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우크라이나를 '언제까지나 계속' 지지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밝혔다.#

2.6. 외환위기[편집]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문에 고유가가 한동안 지속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서방에 맞설 수 있었으나, 2014년 후반기부터 몰아친 저유가 때문에 유가 수입의 50%로 정부 재정을 꾸려왔기에 이로 인해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일부 논자들은 이런 저유가가 크림 반도를 꿀꺽한 러시아를 길들이기 위한 미국의 음모라는 설을 내놓고 있다. 약간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딱히 러시아를 겨냥했다기보다는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고유가 극복 및 신성장 동력 개발을 위해 미국이 전략적으로 육성한 셰일가스사우디를 비롯한 OPEC 국가들이 증산으로 대응한 것이 근본 원인. 특히 2014년 상반기에 실시된 러시아 경제 제재가 효과를 못 보다가 저유가가 지속되면서 약효가 갑자기 세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우디의 대응이 셰일가스 채산성 이하로 유가를 하락시켜 셰일가스 산업을 고사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셰일가스 산업은 미국의 원유 수입 대체와 국내의 내수를 노리는 산업이고, 대부분이 미국 내에서 소모된다. 따라서 높은 채굴 비용과는 반대로 운송비가 훨씬 적게 들어 수입 원유보다 싸다. 실제 유가가 40달러 후반에서 노는 2015년 1월 기준으로도 셰일가스 산업을 고사시키는 것은 요원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사우디의 의도는 셰일가스 산업의 억제 외에도 OPEC의 감산정책을 따르지 않고 이득을 얻던 무임승차 산유국들이 고꾸라지는 것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목록의 맨 앞에는 베네수엘라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산유국이 있다. 물론 러시아도 덩치만 좀 클 뿐 이 목록에 올랐다. 당연히 두 국가 모두 저유가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간혹 최대 경쟁자 중국이 저유가로 이득을 보기에 미국이 저유가를 의도한 것은 아니란 의견이 있는데, 의도한 것이 아니란 점은 맞을지 몰라도 미국이 경기 활성화로 얻는 이득이 더 크기 때문에[44] 중국이 반사이익을 좀 봐도 미국으로선 나쁠 게 없다. 당장 2014년 3/4분기 미국 GDP 성장률이 5%였을 정도[45][46]

어쨌든 러시아는 1998년에 이어 두 번째 디폴트 선언을 눈앞에 두고 있고, 푸틴 치하 러시아가 호황을 맞았던 것은 푸틴이 잘해서가 아니라 기름 때문이라는 설을 이 저유가 사태가 반증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먼저 푸틴은 러시아의 제조업 붕괴에 옐친보다 오히려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다. 옐친이 말아먹은 1990년대 러시아 수출의 에너지 의존도는 40%대였으나 2013년 기준으로는 70%에 달하며, 러시아는 푸틴 임기 전체에 걸쳐 에너지 산업에 대한 수출 의존도는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 반면 제조업의 GDP 비중은 2007년 17%대에서 2013년 15%대로 소폭 하락하는 등 제조업 강화에는 실패했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푸틴이 러시아 경제가 석유-가스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전부 푸틴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의 경제 개발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제조업이라는 건 당장 돈 쓰고 발전시키겠다고 순식간에 발전이 되는 게 아니다. 원래부터 러시아는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부터 중공업에 몰빵하여 경공업을 등한시했으며, 국민들은 생필품 부족으로 항상 줄을 서도 제때 물자를 얻지 못하는 등, 체제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쌓여 있었다. 소련 시기 제조업 기반이라 해봐야 중공업을 제외하면 서방 국가에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그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과감하게 개선해보고자 했으나, 급진책을 남발하고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해 오히려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고, 설상가상으로 민영화라는 이름하에 국부를 부패세력이나 외세에 넘긴 옐친 임기에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러시아는 세계 제조업 비중에서 10위권 안에 들지만 아직도 러시아제 하면 무기밖에 떠오르는 게 없을 만큼 러시아의 제조업은 시궁창 상태이다. 거기에 소련의 영광을 말하며 집권한 푸틴이 제조업을 차근차근 키우는지, 아니면 당장 자기 집권에 도움이 되고 돈이 들어오는 에너지 수출 기반으로 키우는지 생각해 보면 이것을 무조건 푸틴의 책임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 즉, 소련 때부터 내려오는 문제에다가 고르바초프-옐친을 거치면서 커진 문제를 푸틴이 임기 내에 완전히 해결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틴은 20년 동안 집권하면서도 산업 구조를 바꾸지 못한 것은[47] 엄연한 사실이며 실로비키들이 파이프라인 공사 대금 80%를 꿀꺽했는데도 별다른 조치가 없는 등 푸틴의 한계는 명백하다. 게다가 나중에 오점이 더 드러나리란 것도 불문가지이다.

두 의견을 종합해보자면 소련 시기부터 계속 내려왔던 문제점이 고르바-옐친 시대를 거치며 더 커졌으며, 위의 링크를 참조할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제조업을 육성하려는 노력 및 성과는 보이며 기초과학에도 투자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나[48] 푸틴 정권이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자원 채굴 및 판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제조업의 비약적인 발달에도 불구하고 자원 수출량이 크게 증대함에 따라서 러시아 경제가 상대적으로 오히려 더 자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특히 이것이 집권 초기에서부터 두드러진 것에 반해 위의 노력 또한 집권 2기 중후반 이후에[49]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런 불균형 및 부정부패를 조기에 해소하지 못한 것이 푸틴의 실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50]
  • 러시아 제조업에 관련된 2013년의 분석 보고서. #

2015년 3월 말, 러시아의 재무 장관은 위기 종식을 선언했다. 모라토리엄을 눈 앞에 두고 있었으나, 유가가 소폭 반등하고, 고유가 시절 모아놓은 외환으로 때우면서 최악은 피한 듯하다. 하지만 일단 실물경제는 당분간 침체 전망이다. #

한편 2014년 7월 푸틴은 아르헨티나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 방문에서 러시아와 아르헨티나는 핵에너지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아르헨티나는 2015년 1월 2일 러시아로부터 12대의 전투폭격기를 임차하기로 합의했다. # 2015년 4월 23일 푸틴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끌어올리기로 합의했다. 푸틴은 "러시아는 말비나스 섬과 관련한 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양자 협상을 추진하려는 아르헨티나의 노력을 지지한다." 하고 말했다. #


2.7. 시리아 내전[편집]


시리아 내전 초기에 푸틴은 시리아 정부군과 이란을 지원해주었으며, 2015년에 ISIL의 협박을 받은 것도 있었고 9월에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시리아에 러시아 정규군 파병의사를 밝히자 아사드는 이에 동의하여 시리아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여 IS를 격퇴하는데 큰 활약을 하였다.

다만 반군을 돕는 서방 국가, 특히 튀르키예와 갈등이 있었고 2015 러시아 공군기 Su-24 격추사건으로 터키에 분노를 표했다. 시리아 내전이 신무기 실험에 소중한 기회라고 했다. #

하지만 오히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과 관계가 개선되었으며, 추후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시리아 내전의 승자는 튀르키예와 러시아라는 평가가 나뉘고 있다.


2.8. 관련 문서[편집]



[1] 여전히 KGB 요원(중령 계급)으로 활동하며 정기적으로 KGB 레닌그라드 지부에 선출직 시위원회 감시내역을 보고했다.[2] 정식개명은 러시아 중앙정부의 인가를 받은 뒤 11월 7일에 이루어졌다.[3] 옐친은 쿠데타 이후 정국에서 코너에 몰린 고르바초프 일파를 명렬히 공격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4] 신호를 무시한 과속차량이 류드밀라의 차를 들이받았는데 류드밀라는 중상, 동승했던 막내딸 예카테리나는 경상을 입었다.[5] 이때 푸틴이 집안에 있던 현금을 챙기러 불길이 쎈 집안에 다시 들어가 현금을 다시 가지고 나왔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고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에게 청렴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왜 이런 평가가 붙었냐면 당시 부패한 러시아 정치계에서는 푸틴같은 사건을 겪어도 굳이 현금을 챙길필요 없이 언제든지 현금을 마련할수있이서(...)[6] 여담이지만 소브차크를 모시던 부시장 시절, 과거 소련 공산당 소유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비지니스 센터 건물 한편에 공산당 지지자들이 소련 국기를 내걸었다가 푸틴을 비롯한 건물 관계자들의 요청으로 국기를 다시 수거하는 일이 몇차례 반복되자 푸틴은 국기 게양대를 아예 철거해버렸다.[7] 푸틴은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얼마안 가 옐친의 이너서클과 정면으로 충돌하는데 옐친의 가신이던 악쇼넨코, 카샤노프, 볼로신 등 크렘린 고관들과 자신의 옛 후원자였던 베레좁스키 및 기타 적대적 올리가르히들(상당수가 정부 고위공직자 직함을 겸직)을 차례로 축출하고 이때 자신과 협력한 친푸틴 올리가르히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한다. 특히 베레좁스키는 영국으로 탈출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맹렬히 푸틴을 비판하다가 몇차례의 위기를 겪은 뒤, 러시아 당국의 압박에 굴복해 푸틴에게 용서를 구하다 2013년에 사망했다. 사인은 자살로 추정.[8] 총선 직전 푸틴이 무리한 진격명령을 내려 러시아군의 사상자를 크게 늘렸다는 비판도 있다.[9] 옐친은 무소속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10] 2007년에 그가 사망하게 된 원인인 심장 이상은 1998년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11] 옐친은 이미 대통령 임기 중에 다수의 범법행위을 저지르고 수시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사고 있었는데, 임기 후반부에는 이를 뒷받침해줄 러시아 검찰의 폭로도 나온 상황이라 정권교체에 성공한 공산당이 이걸로 건수를 잡으면 퇴임하자마자 감옥에 들어갈 판이었다.[12] 푸틴 초창기에 총리를 지내다가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총리직에서 해임 당한 뒤,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카시아노프에 의하면 말년의 흐루쇼프처럼 풍족하지만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전화도 맘대로 못하는 불편한 삶을 살았다고 하고, 옐친도 사석에서 은근히 푸틴을 까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개적으로 푸틴에게 비토를 날린 건 아니며, 소련 붕괴 이후 옐친 시대에 푸대접을 받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비하면 월등히 나은 대우를 받았다.(사실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푸틴 시대에는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13] 푸틴의 현재 임기는 2024년 5월 6일까지이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의 후임 대통령윤석열의 임기도 또한 2027년 5월 9일까지고, 러시아의 개헌으로 2036년까지 집권할 수 있기에 중간에 급사하지만 않는다면 2032년 취임하게 될 예정인 제22대 대통령때까지 임기가 겹치는게 거의 확정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친서방 국가들과 연이 끊겼고 윤석열과의 만남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14] 옐친은 이런 호기를 경험하지 못했다.[15] 이때 중산층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지금 푸틴의 주 지지층이다.[16] 물론 사회 전체가 생지옥에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만큼 개막장이었던 옐친 시절보다 훨씬 낫겠지만, 각종 복지제도의 질은 소련 공산당 집권기보다 후퇴했고 실질적인 민생 역시 소련 시절과 비교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많다. 그리고 국민들의 눈에 확 띄는 전기요금을 내리고 눈에 잘 안 띄는 기타 세금을 올려서 기만당하기도 한다.[17] 러시아의 주요 야당들은 만년 제1야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제2야당인 극우 대안우파 자유민주당, 제3야당 중도좌파 공정 러시아이다. 그러나 극우 자민당은 통합 러시아와 긴밀히 협조하는 친푸틴 관제정당 성격이 강하고 공산당과 공정 러시아는 적당한 선에서 여권과 정쟁을 벌이는 진보정당이지만 결집력이 여권보다 약하며 내부에 관제 의혹을 사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물론 그리고리 야블린스키나 알렉세이 나발니 등과 같은 재야 민주세력이 존재하지만, 친푸틴 노선을 견지하는 러시아 주류 미디어와 사법당국이 이들에게 매우 적대적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여당과의 공정한 경쟁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렵고 푸틴체제에 익숙해진 국민들의 지지를 얼마나 받을지도 의문이다.[18] 원래 체첸은 푸틴에게 후원을 받는 군벌들이 지역을 장악한 뒤 푸틴 지지세가 아주 강해진 지역이라 선거 때마다 푸틴의 득표율이 90%를 넘어가곤 했다. 다만 부정투표 논란이 빈번히 발생해서 실제 체첸 유권자들의 민심은 미지수다.[19] 소브호즈(국영농장)라 원칙적으로는 다른 주주들과 대등한 공동 소유주다. 다만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가 경영하는 농장은 아니며 소련 시절의 국영농장 명칭을 지금까지 브랜드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 걸로 보면 된다.[20] 말이 농장이지 사실 러시아 최대의 딸기 생산업체다.[21] 농장 노동자들에게 주택, 의료, 교육 서비스를 무상 제공한다.[22] 레닌 농장 내부 주거지역 항공사진[23] 지금까지 알려진 이력이 사실이라면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그 정도면 러시아 정치판에서는 청정수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분위기가 심상찮으면 예전의 올리가르히 숙청 때나 알렉세이 나발니처럼 횡령 등 여러가지 혐의를 붙일 가능성도 있지만.[24] 사실 푸틴이 통합 러시아 소속이 아닌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하는 이유 중에는 이런 걸 염려해서 그런 것도 있다.[25] 러시아에서는 푸틴 집권 이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야당 후보들이 사실은 푸틴과 한통속이며 각본에 따라 행동하는 거 아니냐는 음모론이 은근히 널리 퍼져 있다. 더 나아가서 푸틴에게 적극적으로 대드는 리버럴 세력들까지 사실은 러시아가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인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려고 푸틴과 짜고치는 놈들 아닌가 하는 음모론까지 나온다.[26] 위에서도 언급됐지만 사교계의 유명인사라 별명이 러시아의 패리스 힐튼이다.[27] 그러나 여론조사에서는 공산당 간판을 등에 업은 파벨 그루지닌에게 밀리는 걸로 나왔다.[28] 러시아 국내외에서 '주권 민주주의', '러시아형 관리 자본주의' 등으로 불린다.[29] 최고출력 598마력짜리 엔진을 얹었다.[30] 여성의 경우에는 20여년 간 받을 수 있던 것을 15년 정도만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빡치는 일이지만 특히 러시아 남성들의 반감이 커지게 되었는데, 러시아 남성 평균수명이 약 67세 정도에 머물기 때문에 러시아 남성들 입장에서는 연금을 꼴랑 1 ~ 2년 정도만 받고 죽으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31] 러시아 연방 공산당 문서에도 적혀 있듯 노년층이 주 지지세력이라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양새를 보여줘야 한다.[32] 게다가 원내 야당들은 관제야당 의혹을 받고 있거나(러시아 자유민주당, 공정 러시아) 적대적 공생관계(러시아 연방 공산당)로 추정되는 상황이라 지방자치단체장 중 진짜 야권 성향이거나 푸틴 정권과 척을 진 경우는 예브게니 로이즈만 예카테린부르크 시장이나 니키타 벨리크 전 키로프 주지사 정도. 후자는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됐는데 알렉세이 나발니와 연계된 것도 이유 아니냐는 음모론이 있다.[33] 소련 붕괴 후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중반 무렵은 소련 붕괴의 후유증으로 사회가 막장화되어 마피아와 결탁한 올리가르히 등 사업가들의 부패와 범죄가 판을 치던 시기라 실제로 살인 연루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34] 허나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유대계 우크라이나인이다.[35] 주요 비교 대상이지만 이라크 전쟁의 명분보다도 더한 것이 당시 미국은 사담 후세인 세력을 끌어내리고 친미적인 정권을 세우려고 했지 러시아처럼 이라크를 속국으로 둘 목적이 아니였다. 러시아의 전쟁 명분 및 상황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와 더 가깝다.[36] 그 중에서도 러시아의 가장 큰 치명적 실수는, 그동안 전범국이었다는 이유로 재무장을 소홀히 하던 독일을 각성시켰다는 것이다. 푸틴의 무모함으로 인해 독일은 서독 시절급의 국방비 증강뿐 아니라 F-35까지 도입하게 만들었다. 이태껏 미국이나 나토가 "야 제발 군비 증강 좀 하라!"고 성화를 냈어도 묵묵부답이던 독일을 러시아가 대신 일깨운 셈이다.[37] 제재를 표방했다 뿐이지 사실상 러시아 봉쇄나 다름없는 형편이다. 푸틴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국가 하나를 왕따당하게 만든 셈이다.[38] 물론 옐친 시절부터 우크라이나 영토라는 것이 기정화 되기는 했었지만 당시 러시아도 크림반도에 미련이 남아있었고 분리독립 운동도 종종 벌어졌다.[39] 스테로이드를 다량으로 복용하면 기침이나 감기, 감염 위험을 증가시키고 성격이나 행동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40] 한국어 번역은 2022년 러시아 동원령 기타 문단 참고[41] 1차대전 당시에는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와 함께 협상국의 일원으로써 1914년부터 참전하고 있다가 미국이 1917년에 참전해서 짧게나마 협력했으며, 2차대전 당시에는 소련은 독일에게, 미국은 일본에게 공격을 받아 참전을 선언하였고 양국 모두 1941년에 참전하여 1945년 까지 5년 동안 연합국의 일원으로써 서로 협력하였다. 특히 독소전쟁으로 소련은 연합군에서 가장 큰 인명손실을 겪었다.[42] 사실 현대전에서 군사력 좀 있는 나라들치고 침략국이 피략국보다 우세를 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다면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국 상공의 제공권은 거머쥐고 있기 때문에, 적군이 어디에 있든 공중폭격으로 날려버릴 수 있다. 예컨대, 한국에 침공을 가한다면, 한국을 장악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상실한 전력을 복구하는 것은 미국과 중국을 제외하면 불가능에 가깝다.[43] He is a very outstanding man, unquestionably talented.[44] 앞서 말했듯 셰일가스는 근본적으로 미국 내수 산업이다. 저유가 혜택만 보는 중국과 달리 미국은 저유가와 셰일가스 산업 발전의 효과를 모두 누린다.[45] 물론 완전히 음모론으로만 치부할 순 없는 게 이미 냉전레이건 행정부는 비밀 문서에 서명하여 엄청난 저유가를 조장했다. 소련은 미국의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연간 200억 달러를 손해보았고, 여러 문제가 겹치면서 결국 붕괴했다(<2020 부의 전쟁 in Asia>-최윤식 저 발췌). 그러나 이건 소련이 한창 고유가로 잘 나가던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된 일이고 지금은 러시아가 그 정도 포스가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낮은 건 마찬가지.[46] 다만 당시 상황을 좀더 자세히 본다면 근본적으로 영국이 석유자유화를 선언하자 사우디에서 심해유전업계를 말려죽이기 위해서 물량을 대거 풀어놓았고, 미국은 이 상황에서 무임승차했던 것에 가깝기는 했다. 하지만 저유가로 인해 석유의존도가 높은 텍사스와 알래스카 일대의 경제가 폭망할 위기에 처하고, 석유값이 급속히 하락하여 석유수입이 늘어나게 되자 에너지 위기가 다시 올수있다고 판단한 조지 W 부시 당시 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석유전쟁을 관두게 되었다. 물론 석유전쟁을 관두었다고 해도 석유값이 고점에 비해 절반 수준에도 못미쳤기 때문에 소련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말이다.[47] 전체 산업 중 자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예전과 차이가 많이 안 난다.[48] 러시아 항목의 자연과학에 대한 서술 부분 링크 참조.[49] 주로 2006년~2007년. 자연과학 R&D 투자는 2013년.[50] 다만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은 제조업 육성 및 국가산업을 발전시키는 일은 외부의 견제, 외부 악재요인이 배제된 상황에서 국가가 꾸준히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가능하다. 한국의 경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국가산업 육성을 미국, 일본의 도움과 국제적인 호경기라는 긍정적 호재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이와 반대인 터라 기본적으로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와는 관계가 나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국의 국제제재를 달고 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고유가를 이용한 자원수출로 국방력을 보강하고 자국산업을 발전시키고 체질개선을 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긴 했다. 하지만 저유가와 미국의 추가 경제제재라는 외부 악재로 인한 재정건전성 악화로 상당히 어려워진 상황이다. 푸틴의 실책과 전세계 최강국인 미국에 밉보여서 불이익 당하는 러시아의 태생적인 문제가 합쳐진 것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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