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옐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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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방 초대 대통령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1]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Boris Nikolayevich Yeltsin


출생
1931년 2월 1일
소련 러시아 SFSR 우랄주 붓카구 붓카
(現 러시아 우랄 연방관구 스베르들롭스크주 탈리차구 붓카)
사망
2007년 4월 23일 (향년 76세)
러시아 모스크바
묘소
러시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91년 7월 10일 ~ 1999년 12월 31일
서명
파일:보리스 옐친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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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비치 옐친[1]
어머니 클라브디야 바실리예브나 옐치나[2]
형제자매
남동생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옐친
배우자
나이나 이오시포브나 옐치나[3]
자녀
장녀 옐레나 보리소브나 오쿨로바[4]
차녀 타티야나 보리소브나 유마셰바[5]
학력
우랄 기술대학교 (석사)
종교
러시아 정교회
신체
187cm[6][7]
최종 당적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대통령
3. 개인사
4. 평가
4.1. 러시아의 평가
4.2. 서방의 평가
5. 한국과의 관계
6. 선거 이력
7. 소속 정당
8. 기타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

1987년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에 급진 개혁파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1990년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회의 주석으로 취임했으며, 1991년에 최초의 직선제를 통해 러시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1년에는 8월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실권자로 떠올랐으며 그 해 말 소련 해체를 주도하는 등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재직하며 중요한 제도적, 절차적 정치 개혁 성과를 이룩했다.[2]

옐친은 개혁파 정치인으로 처음 등장하여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러시아 시민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1991년 독립 이후 경제개혁 실패, 최고회의 해산(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3] 특히 충격 요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하였는데, 국가주도의 소련의 경제의 절반이 러시아 정부에서 민영화되었다. 기업들은 줄줄이 몰락했으며, 예금 자산의 휴지화로 인해 대다수 일반인들은 빈민층으로 전락해버렸으며, 경제가 특정 산업에 편중되었기에 이로 인해 러시아는 1990년대를 통틀어 기나긴 불황을 겪어야 했다.[4] 이후 1996년 제1차 체첸 전쟁 패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위기 및 탄핵 시도로 정치적 입지가 땅에 떨어졌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했고, 건강 문제까지 겹쳐 1999년 12월 31일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기고 정계에서 은퇴, 2007년에 사망했다.

시기적절하게 후임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 주었고,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이 일당독재라는 비판을 들을지언정 지속적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을 거두면서 말년에도 존중받는 삶을 살았다. 대중들의 평이 어떻든간에 러시아 연방정부로부터 국부 수준으로 대접받아 왔기 때문에 퇴임 후에 러시아 연방정부나 통합 러시아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 러시아 자유민주당 가릴 거 없이 최강국 소련을 망하게 만든 원수 취급에 푸대접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보다는 나은 삶이기는 했다. 러시아인들이 옐친을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푸틴은 공석에서 옐친을 비하한 적이 없고 되려 옐친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옐친의 이름을 붙인 문화센터가 개장되는 것을 보면 현재 러시아 연방정부 차원에서 옐친을 존중하는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보리스 옐친은 북한을 비판하고 지원을 중단하였으며, 대한민국과의 역사를 바로잡고 관계를 개선하여 6.25 전쟁 기록물 전달,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당시의 블랙박스 및 유품을 전달하며 사과했다. 또한 소련 시절 차관을 계승해 제대로 갚았다면 한국의 외환위기가 없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오늘날 불곰사업으로 이어져 한국의 방위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옐친은 1931년 2월 1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랄주 붓카구(現 러시아 연방 스베르들롭스크주 탈리차구)에 위치한 붓카(Бутка)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건축 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뛰어난 흡인력과 업무 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1976년에 스베르들롭스크주 지구당의 제1서기가 되었고, 1981년, 26차 당대회에서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1985년 7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에 선출되었으며, 훗날 그와 원수가 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지도자가 되면서 고르바초프는 옐친을 등용하여 모스크바시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모스크바 시정을 맡으면서 1986년 2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에서 물러났다. 옐친은 모스크바시 지구당의 제1서기 시절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보수파들의 반발에 1987년에 해임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아 올려갔고,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 결과 1989년 소련 첫 자유 총선거 때 모스크바 선거구에 출마, 89%의 득표를 얻어 초압승을 거두었고, 그의 동료들도 대거 의원직에 당선되면서 보수파의 세를 누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급진적인 노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여, 절충 개혁을 주장하던 고르바초프와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결국 1990년 공산당을 탈당했다. 원래는 고르비가 급진 개혁을 추진했지만 개혁 정책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개혁파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왔고, 그 과정에서 고르바초프가 절충 개혁을 주장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몰아붙이면서 공산당을 탈당하게 된 것. 이 과정에서 그의 주벽에 대한 얘기가 보수파 사이에서 나왔지만 옐친의 인기는 더더욱 높아졌다. 1990년 5월에 옐친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회의 주석으로 취임하면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된다. 이 당시의 보리스 옐친은 의전상으로 부총리국무위원에 해당되어야 하지만, 경제개혁의 실패로 고르바초프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거듭났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행정구역인 러시아를 다스리는 부총리급 국무위원을 재임하고 있다는 현실을 바탕으로 그것의 무게감은 엄청났다.

당시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 위주의 중앙집권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공화국 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공산당 보수파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지아 공산당 제1서기였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ედუარდ შევარდნაძე, 1928년 1월 25일 ~ 2014년 7월 7일) 같은 공화국 정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포섭했고, 그런 혜택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옐친이었다. 옐친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1991년 6월 12일에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58%만큼 득표했으니, 무소속 후보로서 국내 최초로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2. 대통령[편집]


파일:attachment/소련 보수파 쿠데타/thisisrussia.jpg

1991년 8월 보수파들이 8월 쿠데타를 일으키자 옐친은 러시아 시민들에게 실력 행사를 호소, 보수파의 쿠데타를 막아 내면서 소련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였던 겐나디 야나예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Владимир Крючков, 1924년 2월 29일 ~ 2007년 11월 23일) 등 두 세력 모두 쿠데타로 인해 몰락한 상황이었고, 중앙정부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옐친은 이 공백을 이용해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의 지지 기반이었던 소련 공산당을 압박하여 정국을 원하는 대로 주도해 갈 수 있었다.

1991년 12월 21일 옐친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등의 지도자와 벨라루스에 있는 벨라베자 숲(Белавежская пушча, Biełaviežskaja Pušča)에서 만나 함께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결성을 선언했다. 조약 체결 이후, 12월 12일에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는 1922년의 소련 수립 조약을 폐기하였고, '신연방 조약'의 체결을 준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사임하게 되었다.

새 러시아의 대통령이 된 옐친은 경제 개혁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그나마 간신히 지탱되던 경제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다. 원래 러시아 경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추진한 경제 자유화의 후유증을 떠안으면서 거의 파산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6]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예고르 가이다르(Егор Гайдар, 1956년 3월 19일 ~ 2009년 12월 16일)가 추진한 경제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예금동결과 가격 자유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실패해 버렸다.

사실 고르바초프 시절 추진한 가격 자율 지정화[7]로 인해 이미 후유증이 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가이다르의 개혁은 너무 조급하고 낙관적이었다. 가격지정 자율화는 국영기업들의 생산성을 늘릴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되려 기업들은 국영상점에서 팔아야 될 물건을 농민시장에 내다파는 식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값싸게 물건을 사려면 발품을 수시로 파는 것이 일상이 되는 등 유통구조가 왜곡되었다. 가이다르는 기업들이 난잡한 유통구조를 이용해서 수익을 창출하는 행태나 타 동유럽 국가에서 가격자유화로 인한 임금 및 자산손실이 엄청났던 점을 감안하지 않고 가격자유화를 시행한 결과 물가를 수십배 이상 폭등시켰다. 소련 루블의 가치는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이후 물가를 잡겠다고 시행한 예금동결까지 겹쳐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산손실과 실질임금 하락으로 빈곤층이 되어버렸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구 소련에 속한 나머지 14개국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가이다르의 경제 개혁 실패로 러시아의 GDP는 추락했고, 소련 시절 국가의 지원으로 유지되던 수많은 국영기업, 공장, 콜호즈들과 연구소들은 예산이 대대적으로 삭감되면서 몰락했으며 예금은 초인플레이션과 예금동결로 휴지조각이 되고야 말았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경제 주체들이 사라지고 예금이 휴지조각으로 변하자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은 임금체불과 사회복지예산 삭감까지 겹치며 빈곤과 실업의 늪에 빠져야했으며, 오직 소수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모든 부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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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옐친은 재신임에 성공한 직후 9월 21일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고, 기존 소련 체제의 잔재였던 인민대표회의와 최고회의를 폐지하고 상하원을 신설하는 개헌을 시도했다. 이에 다수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등이 9월 23일 러시아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옐친을 탄핵하자, 분노한 옐친은 10월 4일 모스크바로 육군 병력을 소집했고, 모스크바 군구 타만스카야 사단의 T-80 전차들을 데려다 국회의사당을 포격해버렸다18분 30초부터 나온다.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항목 참조.

2년 만에 전차 앞에서 맞서던 입장에서 전차를 끌고 가서 포격하는 입장이 된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이 때 군부가 옐친을 지지하면서 옐친은 빠르게 상황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잖은 사상자가 나면서 러시아 국민들은 옐친에게 크게 실망했다.[8] 결국 그 해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옐친파 정당은 고작 15.5%의 득표를 올리며 패배했으며, 극우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23%로 제1당이 되었다. 공산당-농민당 연합도 22%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정파는 대다수가 사민주의 정파였다.

1995년 12월 의회에서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22%를 득표하며 1당이 되었다. 11%로 자유민주당이 2당을 차지했으며 10%의 여당 '러시아 - 우리집'[9]은 3당에 그쳤다. 하지만 비례대표제의 특성상 어느 한쪽도 과반을 유지할 순 없었고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10]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은 심장마비에도 불구하고[11] 다양한 이미지 플레이로 초반 지지율 6%에서 결선투표 진출은 물론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를 54%대 41%로 14% 가량 앞서며 승리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 높은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 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올리가르히(재벌)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범죄적 약속을 했다. 그 같은 조치는 러시아 내에서 올리가르히의 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가즈프롬이나 루살 등 에너지나 광물 관련 회사들 등 그 나름대로 흑자를 벌어들이는 사업이 많았는데,[12] 이런 사업체들이 모두 소련 내 관료나 시장원리에 밝았던 전직 공산관료들이나 권력 핵심부에 있던 정부 관리에 넘어감으로써 벼락부자들이 대거 탄생했다. 이들 중 몇몇은 옐친 집권 몇년만에 세계적인 부호가 될 만큼 큰 재산을 모았다. 이런 벼락부자들의 대표적인 예로는 보리스 베레좁스키로만 아브라모비치 등이 있다. 소련 시절에는 부동산 및 생산 수단이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모을 수 있는 재산은 예금이 전부였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서방 기준으로 수천 달러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옐친 집권 하에서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한 이들은 2, 3년 만에 수조에서 수십조원의 자산가가 된다.

게다가 분리 독립을 선포하려던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제압하기 위해 당시 체첸 지도자였던 조하르 두다예프와 협상을 거부하고 무리하게 군을 투입했다. 하지만 체첸군은 아슬란 마스하도프(Аслан Масхадов, 1951년 9월 21일 ~ 2005년 3월 8일) 같은 전직 소련군 출신 인사들에 의해 훈련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13]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그로즈니 시로 진입했다가 체첸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14] 1996년 샤밀 바사예프가 주도한 부됸놉스크 병원 인질극과 체첸 반군의 그로즈니 재탈환으로 체첸군에게 패배하면서 결국 1996년 하사뷰르트 협정을 맺고 굴욕적으로 패배를 시인하면서 체첸에 국가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준 다음 물러났다. 사실 러시아군으로써는 붕괴 이후 군 조직이 약화되고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체첸에 투입되었으니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개 지방이었던 체첸에 패배한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1998년 러시아 정부는 재정 부족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미 옐친의 권위는 잦은 실정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탄핵 직전에까지 몰렸다가 겨우 회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1999년 8월에는 건강까지 좋지 않아 KGB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다. 더 이상 평판이 나빠질 일도 없었던 옐친이 마지막으로 내던진 승부수였는데, 이후 건강 이상으로 물러난 옐친을 대신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푸틴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체첸을 공격, 옐친이 5천 명 이상을 죽게 만들고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을 겨우 2,500여 명의 전사자만으로[15] 러시아군도 큰 피해를 입긴했지만 10년 가까이 지지부진했던 전쟁을 신임 총리인 푸틴이 체첸 반군을 남김없이 쓸어버리며 순식간에 매듭짓자 푸틴은 국민들 사이에서 일약 깜짝 스타로 등극하게 되었다. 여당의 지지율 역시 자연스레 다시 회복되었다. 그 해 12월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들이 선전하였고, 총선에서 선전한 대가로 옐친은 푸틴을 차기 대권 주자로 내정하였다.

옐친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 해 말인 12월 31일, 대국민 신년담화에서 건강 문제[16]와 함께 자신의 실정에 대해 사과하면서 임기를 아직 6개월이나 남긴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사임을 선언했다. 대통령 직무는 푸틴 총리에게 위임되었고 이듬해에 푸틴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파일:4435811_1200x.jpg
1999년 12월, 크렘린을 떠날 당시 후임인 블라디미르 푸틴과 악수하는 모습.

한편 1999년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옐친은 푸틴에게 사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푸틴은 이러한 옐친의 요구를 수용해 퇴임한 옐친에게 면책 특권을 보장함으로써 이에 보답하였다.[17] 그리고 푸틴 정권이 승승장구하면서 옐친은 푸틴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일 없이 잘 지내며 한가롭게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7년 향년 7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놈의 때문에 건강이 나빠서 죽었다고 한다. 옐친은 살아 생전 지독한 주당이었다.[18] 가족으로는 아내 나이나와 장녀 옐레나와 차녀 타티아나, 외손자 3명이 있다.

그 동안의 소련 지도자들은 대부분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옐친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말 그대로 국가 지도자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에 비하면 격이 살짝 낮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러시아의 위인들이 많이 묻힌 곳으로 유명하며 결정적으로 옐친은 소련의 지도자가 아닌 소련 해체 이후에 러시아의 지도자를 역임했던 사람이다. 옐친 사망 15년 후, 악연의 연속이던 고르바초프도 같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묻히게 되었다.

3. 개인사[편집]


러시아인들 중에서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옐친은 단순히 주당이나 애주가 수준을 넘어 알코올 중독자 수준이었다. 주변 인사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보드카와 오이[19]를 찾았다고 증언할 만큼 술에 쩔어 살았다. 심지어 TV로 신년사를 진행할 때에도 맨 마지막에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할 정도였다.1995년 신년사, 5분 4초부터 해당 장면이 나옴 농담 삼아 보리술 옐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술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옐친의 추태는 심각했다. 얼마나 술을 마셔 댔는지, 공식 석상에서까지도 술에 취해서 추태를 부리는 등 러시아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을 정도.

대표적인 예로, 1994년 9월 아일랜드 총리와 회담할 예정으로 섀넌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때 이미 기내에서 만취해 있었던 탓에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해 전용기가 섀넌 상공을 빙빙 돌던 끝에 회담이 연기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일로 한동안 아일랜드에서는 '섀넌 위를 돈다'(circling over Shannon)가 고주망태가 됐다는 완곡어법으로 쓰였다. 해당 사건을 다룬 영어 위키피디아 문서

1994년 8월 독일을 방문했을 때도 공식 행사 때 술에 취해 있었고 행사 중에 지나가다가 갑자기 독일 경찰 악대 지휘자의 지휘봉을 빼앗더니 본인이 직접 지휘했다. 지휘봉을 빼앗기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다가, 결국 뒤에서 적당히 코칭해주고 어울려주는 지휘자와, 지휘자 없이도 어떻게든 카츄사를 잘 연주해 내는 경찰악대의 모습도 재미있다. 이후 독일 어린이합창단이 러시아 민요를 부르자 갑자기 나오더니 앞에 있던 마이크를 뽑아들고 술에 취한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이 장면은 독일 전역에 생중계되었고, 각국의 해외토픽이 되었다.


1995년 10월, 클린턴이 대통령이었던 시절, 러시아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서는 백악관에서 잠을 자다가 술을 진탕 마시고 맨발에 잠옷 차림으로 백악관 문 앞까지 나간 적도 있었다.[20] 당연히 이걸 본 경호원들과 비서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건은 국가 기밀로 취급되어 언론에는 비공개 처리되었다가 나중에 기밀 해제가 되면서 까발려졌다.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이번 옐친과 클린턴의 미팅이 재앙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기사를 썼던 기자들을 비난하면서 여기에 와서 보니 당신들이 재앙이었다고 발언해 클린턴의 폭소를 터뜨리고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때 역시 화이트 와인을 진탕 마시고 만취해 있던 상황. 그나마 이 사건은 분위기를 띄워준 위트있는 농담에 가까워서 크게 문제되진 않았다.

파일:TVBXaUg.jpg
원본은 검지를 펴고 있는 사진인데, 뻐큐하는 사진으로 합성되었다. 근데 이 사람이 하도 술 먹고 이상한 짓을 많이 한 나머지 이 사진조차 합성이 아니라 진짜로 아는 사람도 많다.

그 덕에 옐친의 국제적 이미지는 대폭 추락했다. 측근들은 이 사람이 술 취해서 부린 추태를 수습한다고 애를 먹었다. 그 덕인지 말년에는 하도 병을 많이 달고 다녀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소리를 들었다. 그 외에도 온갖 기행이란 기행은 다 벌리고 다녔는데, 집권 초기에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또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1년에는 음주운전을 한 전과도 있다. 기사.

파일:external/por-img.cimcontent.net/cc22fd579835b3fc29af7cacb205fff7.jpg
사진은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로스토프에서의 선거 유세 중 춤을 춘 사진. 당시 옐친이 선거에서 시도한, 일종의 친서민적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이었다. 이 사진은 1996년 올해의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영상 자료로도 매우 확실하게 남아 있다. 물론 이 때도 술에 잔뜩 쩔어 있는 상태였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옐친은 떡대가 상당했으며 키 187cm의 장신에 거구였다. 외국인들 입장에선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겠으나, 술에 관대한 러시아의 특성상 의도한 대로 친서민적인 이미지를 통한 지지율 상승 효과는 있었다. 이는 만취했다는 점을 빼면, 외국에서도 서민들에게 친밀감을 주기 위해 많은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이다.

말년의 삶은 황금우리에 갇힌 죄수. 옐친 자신이 고르바초프를 농락했던 것처럼 이후로 옐친 자신도 푸틴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게 되는데 고르바초프를 사실상 연금 상태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옐친 자신도 푸틴에 의해 똑같은 상태가 되버리는데 옐친을 믿지 않는 푸틴은 통화도청, 방문객 통제등을 하며 옐친을 철저하게 감시한다. 면책 특권이 감옥에 보내지 않는 것이지 그 외에 감시, 도청 등등의 행동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에 권좌에서 멀어진 옐친을 가두고 감시하는게 얼마나 효과를 봤는지는...[21]


그럼에도 옐친은 끝까지 공식적으로는 계속 푸틴을 지지했으나, 옐친의 말년 시절에 찍힌 위 동영상을 보면 2000년 대선에서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던 푸틴의 당선이 유력하자 가족들은 기뻐하지만 본인은 별로 감흥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나, 2001년 새해가 밝자 TV에서 본인이 집권했을 때의 국가인 러시아 애국가가 아닌 소련 국가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한 새 국가가 연주되자 대놓고 표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등 말년에 그가 푸틴에게 힘없이 러시아 연방의 정권을 넘겨 준 것을 후회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정황이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술은 끊지 못하고 계속 마셔댔다. 아니, 이후의 러시아가 어떤 길을 걸을 지를 조금이라도 짐작했다면 오히려 술을 더 마셔서 그 시름을 달래야 했는지도.

4. 평가[편집]



4.1. 러시아의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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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옐친에 대한 만평[22]참조
소련을 해체하고 러시아까지 말아먹어 재기불능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러시아는 옐친 치하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정착시킬 기회를 잃었고, 실제로 러시아의 국력은 21세기 전까지는 강대국으로 도저히 분류될 수가 없는 수준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다.[23]

그나마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옐친을 높이 평가한다. 이는 옐친이 어쨌든 현대 러시아 연방을 성립한 사람이고,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옐친이 직접 선임한 후계자로 푸틴은 옐친의 후원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며 통합 러시아당의 권력기반도 마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평가는 매우 나쁘다. 1991년 공산당 보수파의 8월 쿠데타를 저지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몰아내고 초대 러시아 연방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개혁가로서의 면모와 친서민적인 이미지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당선 후에 그가 독재에 가까운 전횡을 벌이고 측근들이 소련 시절을 능가하는 부정부패를 일삼아서 급속도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게다가 1994년 체첸 사태로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다. 당시 많은 전비를 지출하고도 패배하여 굴욕적인 평화 협상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큰 실정은 경제 정책이다. 그는 '충격요법'이라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이는 대단히 급진적인 가격 및 생산 자유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을 실행한 목적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최대한 빠르게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급격한 체제 전환에 따른 혼란과 민생 붕괴를 대비하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실행한 충격요법으로 인해 시장에는 엄청난 혼란과 산업 기반의 붕괴가 발생했다. 이는 그동안은 당의 명령에 의해 가격과 공급량이 정해졌었는데, 갑자기 시장 논리에 의해 생산시설이 돌아가기 시작하며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수요 공급이 조절되기까지 과도기가 엄청나게 길어졌기 때문이다.

자유화와 소련 붕괴에 따른 산업 붕괴로 초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예금이 모조리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는 옐친이 경제를 개혁하겠다고 워싱턴 컨센서스에 충실한 학자들이나 기관들(예를 들면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 IMF)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옐친은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충격 요법을 시행했다. 문제는 이들 학자들이나 기관들은 이러한 충격 요법을 시행하면 일어날 파장을 예측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걸 단순히 불가피한 일 혹은 단기적인 일로 여겼으며, 장기적으로 보면 시장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지나치게 낙관했다는 거다.

그리고 옐친은 이들이 제시한 방안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충격 요법에 따라 가격 자유화가 즉각적으로 시행되자, 물가 폭등으로 예금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리면서 구매력이 급속히 떨어졌고, 범죄율도 급속히 상승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국민의 90%가 절대 빈곤선 이하로 전락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도 1990년 당시 5,300달러였던 1인당 GDP가 1997년과 1998년에는 1,600~1,700달러까지 떨어졌다. 과장이 아니라 실업자만 무려 2,000만명에 이르렀다.

러시아인들에게 소련 붕괴 이후 조국의 모습은 상상도 못한 몰락이었다.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은 미국과 대결하던 양대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인들은 체제를 개혁하면 더욱 부강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미국과는 전혀 상대가 안 되는 파탄 국가로 전락한 것이었다. 1990년대 러시아의 쇠퇴는 단순히 산술적으로 분석해도 충격적이다. 소련의 인구는 2억 9,000만명이라서 당시 2억 5,000만명이던 미국을 능가했고, GDP는 미국의 40%에 육박했다.[24]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자, 소련의 일개 지방에 불과했던 러시아 SFSR을 승계받은 러시아 연방의 인구는 소련에 비해 반토막인 1억 4,000만명에 불과했고, GDP는 소련의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이는 미국과 비교했을 때 인구는 미국의 40% 남짓이고 GDP는 미국의 10% 밖에 안되는 수준이다. 소련 붕괴의 그 순간까지도 중앙아시아의 공화국들은 친연방 기류가 강해 소련이든 주권국가연맹이든 잔류하려는 의지가 있었는데도, 옐친은 동슬라브 3국 수뇌들끼리 밀실에서 벨라베자 조약이라는 것을 맺고 소련을 일방적으로 해체시켜버렸고, 그 결과 제정 러시아가 무려 150년을 들여 편입시킨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하루아침에 독립당해 버렸다.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을 버린 것까지는 악성자산 손절이라 하더라도, 옐친은 사정이 훨씬 나았던 러시아 하나조차도 말아먹었다.

또 무분별하게 민영화를 하다 보니 대량의 국부가 유출되었고 빈부격차도 극심해졌으며 경제를 장악한 올리가르히들이 정치계와 언론계까지 장악하는 바람에 부정부패가 소련 시대보다 심해진데다 쓸 수 있는 예산이 줄어서 각종 복지정책 등 사회안전망까지 붕괴되었다. 결국 재빠르게 부를 독점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의 삶은 처참해졌다. 1999년 옐친 말기에 와서야 일시적으로 상황이 호전되는 듯 했지만, 그래봐야 사회적인 지표가 개판에 가까웠고, 금융 범죄도 대거 일어날 정도로 그 내실은 결코 탄탄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외환위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한번 쑥대밭이 되어 급기야 모라토리엄까지 선언했을 지경이고[25][26] 여기에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말 그대로 진짜 벼랑 끝에 내몰리는 바람에 발생한 출산율의 급감과 사망률의 급증으로 매년 인구가 70만에서 90만명선까지 줄어드는 수준이 되어서 한 동안 2050년이 되면 러시아 인구가 1억 명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올 수준이었다.

이 당시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냐 하면 1990년대 러시아 대학생들의 최고 아르바이트가 바로 외국 남자 관광객 상대의 성매매(인터걸)였다는 웃지 못할 사실도 있었을 정도였다.[27] 북유럽 국가에서는 "러시아 여자"란 단어가 성매매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다. 서유럽/북유럽 국가 및 영미권에서는 러시아 여성 매매혼이 벌어졌다.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버스데이 걸(Birthday Girl)이 바로 그 러시아 여성 매매혼을 주제로 한 영화다. 이에 더해, 당시 러시아군의 고위급 장교들도 부업으로 택시 운전을 하면서 투잡을 뛰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옐친 집권 시기의 러시아는 사실상 러시아판 고난의 행군을 겪은 셈이다. 대한민국에서도 1999년에 방영된 러시아발 인신매매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소련에서 검사로 일하던 여성이 생계난 때문에 한국에서 성매매를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믿기 힘든 사례가 보도된 적이 있다.

러시아는 오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국외에 군사력을 전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었는데, 중앙유럽 국가들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이 시기 반소 감정이 심했던 중앙유럽 국가들은 재빨리 서구권에 편입되기 위해 급진적으로 경제 개혁을 진행하면서 냉전 시절의 유산을 청산하였다. 그 결과 벨라루스, 몰도바, 아르메니아 등 옛 소련권 국가들과 내전을 겪은 옛 유고슬라비아 국가들 중 친러 국가인 세르비아를 제외한 대부분이 현재 NATO유럽연합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옐친의 집권기에 러시아는 강대한 군사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러시아에 소련군 수준의 군사력을 유지할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경제난 때문에 극단적인 군축을 거듭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군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크게 망가졌다. 소련 시절의 장교단과 기술자들은 월급도 주지 못하는 군대를 떠났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군의 인적자원을 복구하는 데 크게 애를 먹었다. 그나마 핵전력과 군사 기술 역량만은 어떻게든 유지를 했다는 것이 위안이다. 다만 해군은 잠수함 분야 외에는 개선이 아직도 지지부진하다. 북방 함대 다음으로 중요한 태평양 함대에서 수상함 전력은 소련 시절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처참하기만 하다.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던 옐친은 자신이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자부심을 가졌으며 한때 푸틴이 지방선거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주지사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꿔버리자[28] 옐친은 퇴임 이후 푸틴과 우호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결정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한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러시아에 제도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보리스 옐친 본인은 정작 대통령 임기 동안 반민주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자기 말 안 듣는다고 헌법에도 없는 최고회의 해산을 벌이려다가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같은 내란을 불렀고, 임기 동안 솔제니친이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솔제니친과의 만남)이 폐지된다거나, 주요 방송사와 통신사에 낙하산을 내보낸다거나 주요 언론사들을 매수해서 선거 운동을 하고 막장인 러시아 상황을 알린 외국 언론들에게 압력을 가하곤 했다.

그 영향이 남아서 러시아는 제도적으로만 민주화되었을 뿐, 실질적 민주주의는 취약하며, 경제는 그리 좋다고 보기 어려운 국가가 되었다. 그러니 옐친이 민주 제도를 정착시켰다고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가령 러시아는 헌법상으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지만, 실제로 반정부적인 언론은 여전히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으며, 언론자유지수는 180개국 중 149위(2020)로 세계적으로 하위권을 달리고 있는 상태. 이미 옐친 시기가 지난지 얼마 안된 2002년에도 121위를 마크해서 독재국가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비슷한 순위를 보여주었다. 기자들은 중국이나 소련 시절처럼 코렁탕을 먹는 건 아니지만 유무형의 협박을 받거나 심지어는 암살된다고 한다. 정적의 사생활을 찍어 폭로해 매장하는 몰래카메라[29]를 비롯한 여러 수단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암살 의혹 사건은 옐친-푸틴 시절부터 러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능력 자체는 높게 평가받기는 한다. 사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 보수파에 맞서는 일도 정세를 재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대통령 재임시의 경제난에도 기어이 대통령직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은 물론 서방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얻은 것을 보면 정세 판단이나 회유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알 수 있다. 대통령직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을 제정하는데 성공했고, 두 차례 총선 참패와 지속적인 경제난에도 기어이 대통령직 재선에 성공을 해버린데다가 거기에 야당이 압도적인 의석을 가졌음에도 탄핵안이 부결되어 살아남았다. 이렇듯 정치적인 승부수 하나는 매우 잘 던졌고, 그걸 회수하는 것 하나만큼은 유능했던 사람이 바로 옐친이었다. 더군다나 모라토리엄까지 겹쳤음에도 대통령직에서 곱게 물러나고 정권 재창출에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적으로 엄청난 고단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정치적인 능력이 국민들의 삶에 도움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30]

아무튼 정치적으로 고단수였던 것과는 별개로 대통령 재임 당시의 실정 때문에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에게 나라를 말아먹은 놈, 심하면 개혁을 한답시고 개인 소유 재산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놓고선 자기와 친인척, 재벌들의 배만 불린 놈 정도의 취급을 받고, 긍정적으로 평가해봐야 푸틴에게 권좌를 넘겨준 것이 그나마 잘한 정도로 평가하는 수준이 대다수이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에게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올려준 아버지 같은 인물이다 보니 옐친이 퇴임한 후에도 현안이 있을 때마다 옐친을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조언을 구할 정도로 대접을 융숭하게 해주었으며 장례식도 꽤 성대하게 치러졌다. 또한 옐친의 이름이 거리명으로 사용되는 등 공식적으로 러시아 개국의 아버지라며 좋게 평가해주고 있다. 옐친의 통치 하에서 러시아는 기초과학도 무너졌고 복지도 파괴되었고 국가 경쟁력과 각종 경제 및 사회 지표 역시 폭락했다. 또한 러시아는 옐친 시절 소련 해체와 기본 경제 붕괴로 인해 러시아는 옛날의 제정 러시아 때나 소련처럼 서방과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울 영토적 기반을 거의 상실해버렸다.

이를 인지한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서구권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서구권과 나름대로 협력을 추진하면서 대립을 피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조지아 등이 서구권 편입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러시아는 옛 영향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패권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이는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과 2014년 크림 위기, 돈바스 전쟁,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을 겪으면서 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가 심하게 틀어져 서방에게서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는 이 경제제재를 당장 해제하라고 요구하지만 서방은 서방대로 러시아가 자신들을 계속 위협하는 이상 경제제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또한, 정치 개혁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전쟁, 학살, 강제 이주 등 수십년간 소련 시절 만든 적폐가 워낙 거대했기에 옐친은 매일마다 사과와 개혁적인 약속을 하며 외교적인 면으로 냉전 시대 긴장 완화와 주변 국가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워낙 그 양이 거대했기에 그래도 계속 반성해야 할 부분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러시아 국내 농간을 등에 업고 집권했다고 인식되며 옐친의 엄청난 실정들로 러시아의 사회가 파괴되고 경제는 무능 그 자체로 러시아의 국력을 끝없이 후퇴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옐친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후원한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을 가지고 반미 감정을 키운 러시아인들이 크게 늘었다. 실제 서방에서 옐친을 좋아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이유는 옐친이 서방 국가들의 입맛에 딱 맞고 이용해먹기 아주 편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서방으로서는 자신들이 경계하는 러시아의 국력을 옐친이 실정으로 알아서 몰락시켜주고 외교 군사적 사안에 대해 생각이 워낙 짦고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로 자기 관리도 매우 소홀해 기행을 벌이거나 중대한 정상회담까지도 날려먹는 등 정치인으로서 자질이 심각하게 결여된 옐친이야말로 냉전 시기 소련에 대한 공포심을 여전히 가지고 러시아가 국가 재정비에 성공해서 국력이 다시 강성해지는 것을 내심 원하지 않았던 미국과 유럽의 의도에 아주 충실하게 놀아나는 편리한 호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옐친이라는 최악의 독재자를 지원하고 마냥 긍정적으로 평가해온 대가로 미국은 러시아인들의 압도적인 반미 여론을 형성시켜, 기형적 독재자인데다 서방에 극도로 적대적이기까지한 블라디미르 푸틴의 집권을 간접적으로 야기한 꼴이 되었다. 당장 고르바초프조차 본인의 자서전에서 미국은 민주주의이든 아니든 개혁한 소련이나 민주주의 러시아보다는 옐친이 이끄는 망한 러시아가 더 다루기 쉽다고 판단하고 옐친에게 모든 지원을 집중했다고 비판했다. 지금 동유럽에서 벌이는 푸틴의 각종 무리수가 계속 먹혀드는 것도 이 때의 부정선거가 절반은 해먹었다.

러시아는 나라 특성상 블랙 유머가 많이 통하는데, 옐친도 예외는 아니어서 꽤나 자주 입담에 올랐다. 다음은 공산주의 유머에도 나와있는 예시다.

A: 소련이 70년 동안 그토록 강조했지만 인민들을 설득시킬 수 없었던 과업을, 옐친은 단지 자신의 재임 시절 몇 년 만에 다 이루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B: 인민들에게 사회주의가 좋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다만 부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술적인 부분에 있어선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평도 존재한다. “옐친은 러시아 구한 지도자” 모스크바학술대회 반공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시민들 중에는 옐친을 열렬하게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옹호하거나 공산당보다는 낫다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푸틴과 통합러시아당도 그런 논조로 옐친을 옹호한다. 물론 전반적인 의견은 아닌지라 러시아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옐친 재임 시절의 러시아인들이 겪었던 고통은 IMF 당시의 한국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보다 훨씬 더 강도도 심했고[31] 기간도 길었다는 점 덕분에 부정적 평가는 많아도 긍정적 평가는 매우 나오기 힘들다.

다만 2020년대 들어 현재 러시아인들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옐친의 시대도 어느덧 최소 20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중장년 세대 입장에서는 당연히 젊은 시절에 옐친의 통치기를 직접 겪었던 만큼 여론이 좋을 수 없지만, 일생 대부분을 푸틴 밑에서 보내고 있는 젊은 세대 중에서는 역사를 잘 모르는 경우에는 러시아에 푸틴 말고 대통령이 있었어요?라고 질문할 만큼 점차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다. 푸틴의 독재가 장기화되면서 일어난 씁쓸한 한 면이다.

소련 시절 같은 구성원이자 러시아의 이웃 국가였던 우크라이나, 몰도바, 타지키스탄 등의 나라들이 소련 붕괴 이후 2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내전과 경제 붕괴의 수렁 속에서 잘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을 두고 러시아는 국토가 그렇게 큰 데도 체첸 전쟁 빼면 내전이 없었지 않았냐?라는 재평가가 학계에서 나오기도 한다. 다만 이런 평가는 좀 걸러들어야 하는 것이 체첸 전쟁이 규모가 좀 커서 잘 알려진 것이지 다른 지역도 자치 공화국끼리 분쟁을 하거나 분리주의 운동을 한 적이 있었다.

거기다 이런 주장은 인과관계를 뒤바꿔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옐친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잘한것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만한 나라들을 독립시켜버린거다. 오히려 이런 내전 상당수가 소련해체 이후 5년 이내에 벌어진 것을 보면 그동안 그럭저럭 유지되던 균형이 소련 해체로 인해 깨지면서 내전이 촉발되었다고 보는것이 더 정확하다. 소련 해체 전부터 유혈 충돌을 벌이던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도 사태가 극단으로 나아간 것도 역시 소련 해체 이후였다.

소련 해체 직전 소련의 인구는 2억 9300만여명,러시아의 독립 직후 1992년 인구는 1억 5천여만명이다. 전국민 절반가량의 인구가 사는 땅들을 이제부터는 알아서 하라고 중앙 정부에서 손을 놓아버린거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말 그대로 공중분해된 상황에서 그동안 그럭저럭 유지되던 균형이 깨져버린것은 당연히 기존 중앙 정부의 과다. 구 소련 공화국중 내전을 겪은 나라중 소련에 남고자 했던 나라들의 수가 상당하고, 이들이 소련 해체 이후 내전을 겪은 것에 소련을 해체한 옐친의 과가 없다고는 할수 없다.

러시아에서의 종합적인 평가는 러시아인 기준으로는 고르바초프보다도 못한 놈이다.[32][33] 러시아 정부와 올리가르히, 실로비키들 입장에선 '우리 배불려주고 권력을 쥐어 준 사람'이다.

4.2. 서방의 평가[편집]


옐친은 막나가는 통치를 펼쳤지만 서방에서는 그래도 그를 지원했다. 물론 서방에서도 전부 옐친의 통치를 좋게 본 것은 아니다. 저러다가 나라 말아먹으면 서방에도 위협이 될 것이라 우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원한 건 옐친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옐친 다음으로 지지를 많이 받았던 겐나디 주가노프러시아 연방 공산당 당수로서 "소련 부활"을 부르짖었다. 그 다음으로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러시아 자유민주당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는 아예 소련 영토 재합병, 인종차별 등을 모토로 삼았었다. 서방의 패권 유지를 위해서라도 공산당은 안 될 말이었고, 당연히 극우 정부를 지원했다간 명분도 상실하고 후폭풍도 알 수 없기에 적당히 순종적이고 무능한 옐친을 밀어준 것. 선거 조작 의혹이나 부정부패, 군대를 통한 의회 해산 등 독재적인 정치를 선보였으나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이식한다는 명분으로 정치적 지원은 유지되었다.

이렇듯 옐친의 무능과 독주가 지속되니 그 경쟁자들은 정말로 집권할 가능성까지 높았다. 실제로 주가노프는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과 거의 근접할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다. 1999년에는 아예 공산당의 재집권이 가시적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아프가니스탄전의 영웅인 알렉산드르 레베디, 반정부 활동을 하다 훗날 암살된 보리스 넴초프, 야블로코당 당수였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등 개혁파 정치인들이 공산당에 맞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 거대 양당인 공산당자유민주당을 이길 수 없었다. 만일 이들이 집권한다면 서방의 냉전 승리가 도루묵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잖아도 공산권 붕괴 이후 동유럽의 혼란이 극심했던 상황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신소련의 성립과 냉전의 재개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막장이 된 러시아였지만, 옐친의 삽질로 당장 보이는 GDP가 낮았을 뿐 구소련을 지탱하던 국력의 기반 자체는 건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서방은 차라리 옐친을 지원하기를 택했다. 일부 서방의 언론들은 옐친의 무리한 경제 개혁과 부패에 대해 보도하면서 그를 비판했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출신의 경제 학자들이 러시아의 경제 정책과 방향성을 제시하며 밀어붙였고 정부 차원에서 미국은 옐친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러시아 공산당 당수인 주가노프가 옐친보다 지지율에서 앞서자, 미국 측이 선거 전문가들을 대거 파견했다기사.

더하여, 옐친이 이긴 진짜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 언론을 대부분 소유했던 러시아 재벌 올리가르히들의 지원 덕택이었다. 러시아 국영 방송에서는 소련 시절의 부정적인 모습과 1993년 10월 사태를 중점적으로 보도하면서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다. 이에 반해 공산당 쥬가노프의 선거 전략은 기껏해야 공산주의 시절의 구시대적인 대중 집회와 연설뿐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의 극심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소련 시절에 대한 반감이 컸던 당시 이런 선거운동의 결과는 옐친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1차 투표에서 옐친:주가노프는 35%:32%, 결선투표에서 옐친은 레베드와 지리놉스키의 지지를 얻어 54:40으로 이긴다. 선거 승리의 주역이었던 알렉산드르 레베디는 그 공로로 러시아 국가안전보장회의 의장이 된다. 하지만 얼마 안가 토사구팽당했다. 주가노프 다음 가는 유력 경쟁자였던 지리놉스키는 일개 코미디언급의 인식이 박힌 정치인으로 전락했다.

일부 서방 언론들에서도 개탄하면서 언론들의 건망증이 심한건 알지만 어떻게 옐친이 민주주의냐며 그건 옐친이 아니라 고르바초프이며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한 조치들의 수혜자였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서방의 이러한 대러 정책은 변함이 없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 서방이 러시아를 제제만 조금 가하고 묵인하다시피 이유는 푸틴 정권 자체는 옐친보다도 서방 세력에 더 적대적이나 적어도 서방의 우위를 인정하고 러시아의 세력권을 현실적으로 구소련권 주변 지역 중 비 나토 구역인 우크라이나 동부와 크림 반도 등지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5. 한국과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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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당시
옐친은 한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일단 옐친은 개인적으로 북한을 굉장히 싫어했다.[34] 스탈린김일성의 회담 내용 등을 포함한 6.25 전쟁 관련 문서를 대거 공개해 6.25 전쟁의 원인이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못박았고, 남-북한간 전쟁시 러시아가 북한 편으로 개입하는 조소동맹조약[35]을 파기한 것도 옐친이다. 옐친 개인의 반북 경향과 더불어 한국과 교류를 늘리려던 러시아의 외교 정책, 그것을 파악한 한국 정부의 적절한 외교 전략이 성공한 결과이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고, 블랙박스 및 유품 등을 전달해주었다.

그런데 간접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소련의 해체에 이은 90년대 러시아의 국가 파탄상황에서 북한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자국의 핵무기, 탄도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옐친 치하에서 러시아군은 무기를 제대로 관리를 안 해서 소련 시절 개발한 여러 전략무기들과 기술력들이 북한의 손에 넘어갔고 구소련 전략 미사일 설계국은 돈도 제대로 못 받아 엔지니어들이 거리에 나앉게 되자 북한은 이들을 거금을 줘서 고용을 했다.[36] 북한은 입수한 로켓과 공학자들의 노하우를 적극 이용하여 2000년대 들어 여러가지 전략무기를 제조해내고 있다. 기껏해야 500~700km 단거리 탄도미사일이나 간신히 만들던 나라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에 갑자기 로켓 개발 능력이 향상된 건 이러한 이유이다. 물론 미사일이라는 것이 한 두명의 과학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전자, 재료, 기계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이 만들어내는 만큼, 이들을 모두 데려온 게 아닐 뿐더러 생산 시설이 없는 이상 이렇게 영입한 과학자들만으로 완벽한 로켓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체개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이들의 경험으로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적어도 10-20년은 개발시간과 수십억불의 개발비용을 줄였을 것이다. 지금도 이 러시아 구소련출신 연구자들은 한달에 8천달러의 봉급을 받으며 북한 고급 아파트에서 경호를 받으며 살고 있으며 푸틴이나 동유럽국가들이 줄기차게 이들의 소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북한은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이들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기술력은 북한 과학자들에게 전수되어 송환해봤자 별 소용도 없겠지만.

한편으로 옐친 시절 외채에 시달리던 러시아는 갚을 돈이 없자 채권국인 한국에 채무 상환 대신 군사기술 이전과 군사장비를 통한 상환을 제안했고 그렇게 추진된 사업들 중 하나가 바로 불곰사업이다. 국산 대공미사일 기술의 상당 부분이 러시아의 기술 이전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37] 또한 이 사업을 통해 들여온 T-80U 주력 전차, BMP-3 병력수송장갑차, 메티스-M 대전차미사일 등 다양한 군사장비를 연구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실제로 대한민국 육군에서 운용하기도 하는 등 제법 높은 활용율을 보여주었다.[38]사정이 급해서 기술을 이전해줬던 만큼, 러시아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푸틴 정부 이후부터는 러시아의 국방 기술 이전이 어려워졌다.[39]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3년 당시 옐친이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하고 고려인의 연해주[40] 재이주 정착을 유도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던 많은 고려인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돌아왔다. 종합적으로 보면 역사를 바로잡고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개선한 옐친은 한국인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점이 여럿 보인다.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1차 득표수 (득표율)
2차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9
인민대표대회 선거
모스크바 1 선거구

[[소련 공산당|
]]

(91.53%)
-
당선 (1위)
초선
1990
러시아 SFSR 최고회의 주석 선거
러시아 SFSR
535 (53.9%)
초선
1991
러시아 연방 대통령 선거
러시아 연방

[[무소속|
무소속
]]

45,552,041 (58.6%)
초선
1996
러시아 연방 대통령 선거
26,665,495 (35.8%)
40,203,948 (54.4%)
재선


7.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소련 공산당|
]]

1961 - 1990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90 - 2007
탈당
정계 은퇴
사망


8. 기타[편집]


  • 대조국공훈훈장 1급 수훈자다.
  • 10살에 독소전이 일어났는데 너무 어려서 군대에 가긴 어려웠다고 한다. 대신 여러 군사무기들을 제조하는 일을 했는데 수류탄 내부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몰래 RGD-33 수류탄 2개를 창고에서 훔쳐서 망치로 분해해 보다가 폭발하는 바람에 왼쪽 손가락 두개를 잃었다.#
  • 한국에서는 1987년 11월 초순까지 옐트신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영어로 표기된 Yeltsin을 잘못 읽었기 때문. 일단 당시 소련은 적성 국가였던 탓에 수교도 안되어 있었고, 노어노문학과한국외국어대학교[41]/고려대학교[42]/서울대학교[43] 단 3곳만 있던 시기라서 제대로 된 발음이 잘 안 알려졌던 것. 경향신문/조선일보/동아일보 3곳을 기준으로 1987년 11월 12일부터 옐친이라는 표기가 보도되었고, 기존의 옐트신 표기는 1987년 11월 14일이 마지막이다.
  •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에서는 외계인을 무찌른 후 각국과 정상회담을 한다.
  • 서독의 총리와 훗날 통일 독일의 총리를 역임했던 헬무트 콜은 자신의 토속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각국의 정상들과 만찬을 가질 때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자기가 살던 지방의 특색있는 요리를 만드는 식당에서 만찬을 가지곤 했는데, 문제는 이 요리들이 내장을 사용한 특이한 소시지 요리들이 많아서 각국 정상들을 곤혹스럽게 하곤 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아주 기겁을 했고, 다른 국가 정상들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옐친은 매일 시도때도 없이 먹던 게 소금에 절인 돼지비계인 쌀로소금에 쩔은 오이라는 더 막나가는 조합이었던지라 함박웃음을 띄우며 극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 한국 게임 강철제국에 그의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보이는 총포상 주인 영감인 보리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세르비아 대통령이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서 따 온, 밀로셰비치 육군 대령에게 을 인질로 잡히는 굴욕을 겪는다. 제대로 망조가 들었던 러시아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지만, 고작 세르비아 따위의 학살자한테까지 빌빌대는 굴욕을 당한 셈이다.
  • 파일:Boris_Yeltsin_Mercedes-Benz Maybach_S500_Pullman_Guard_W220.png
메르세데스-벤츠 마이바흐 S500 W220을 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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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옐친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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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생애
가족
아버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비치 옐친 · 어머니 클라브디야 바실리예브나 옐치나 · 아내 나이나 이오시포브나 옐치나 · 장녀 옐레나 보리소브나 오쿨로바 · 차녀 타티야나 보리소브나 유마셰바
역대 선거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관련 정치인
빌 클린턴 · 블라디미르 푸틴
사건 · 사고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 8월 쿠데타
관련 전쟁
제1차 체첸 전쟁(1994~1995) ·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기타
전략무기감축협정
평가
평가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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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세를 적용한 러시아어 발음은 '[bɐˈrʲis nʲɪkɐˈlaɪvʲɪtɕ ˈjelʲtsɨn\](바리스 니칼라이비치 옐친)'에 가깝다.[2] 1991년 소련 국민투표 결과에서 보듯이 소련 국민들은 해체 반대 여론이 훨씬 높았으나 옐친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해체를 결정하였다.[3] 본문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러시아는 소련 말기부터 점차 민주화 작업에 착수해 1991년에는 최초의 직선제 대선을 치르었다. 옐친은 1993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채택, 이원집정부제 국가로 개혁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러시아 의회를 포격하는 등 헌정위기를 초래하고 사상자가 나왔으며 러시아를 독재국가로 탈바꿈시켰다.[4] 소련 때문에 물려받은 빚만 무려 1,300억 달러였고, 이러한 금액도 이자와 경제 개혁 과정 속에서 2,000억달러가 넘도록 계속 불어나게 되었다. 러시아는 유가가 오른 2000년대에 겨우 경제가 회복된다.[5] 많은 러시아인들은 옐친을 증오하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이 옐친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인물이고 옐친으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들으면서 대통령직 수업을 받았다. 또한 푸틴이 대통령직에 오른 이후로 옐친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해 옐친이 감옥에 가지 않고 말년을 별장에서 편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격하를 시킨다면 정통성에 타격을 입을 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6] 사실 소련은 1990년부터 이미 경제 체제가 거의 마비되어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을 정도로 악화되었다.[7] 국가가 가격을 정하지 않고 생산자가 가격을 정하는 것. 자본주의 국가에서라면 이미 당연한 논리겠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에서 국영화된 생산 시설(공장, 농장 등)을 통해 가격을 책정,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었다. 이는 현실공산주의 경제의 가장 기초적인 경제원리였다.[8] 당시 러시아 정부 공식 통계 추산 사상자 187명, 최고회의 추산 약 2,000명 가량으로 집계했다.[9] 옐친은 임기 내내 무소속이었으므로 여기서 여당은 옐친 지지 정당을 말한다.[10] 이런 기조는 1999년 총선까지도 이어지지만, 1999년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이 선전하고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들어서면서 정치는 안정된다. 거꾸로 말하면 이전까지 러시아는 혼란이 심각했단 이야기다.[11] 실제로 옐친은 심장이 좋지 못했는데 1996년에 심장 수술까지 받을 정도였다. 사망했을때도 사인이 심장마비였다.[12] 원래 소련은 1930년대 산업화 시절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군수 산업과 관련된 중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1950년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공업 생산력과 경쟁력이 서방보다 떨어지면서 적자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소련 정부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자원 채굴 사업에 많이 기댔고, 실제로도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자원 소득에서 얻었다. 이런 자원의존형 구조는 소련 붕괴 이후 점차 심각해져 오늘날 러시아는 국고의 52%를 자원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의 재벌들 역시 주요 수익이 자원 채굴과 수출이다.[13] 이미 러시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같은 분쟁이나 1992년 조지아 내전 때 샤밀 바사예프 같은 체첸계 군인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14] 제대로 된 보병과 포병, 공군의 지원없이 무리하게 기갑전력을 시가지로 밀어넣은 결과 고층 건물에서 체첸 반군이 내리 쏘는 대전차무기들에게 뚜껑이 따이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은 당시 그로즈니 시가전을 숫제 연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5] 사실 이 정도의 전사자도 러시아에겐 상당한 피해였다. 그만큼 체첸의 저항이 워낙 거세 고생했던 것.[16] 실제로 재임 중 건강이 좋지 못해 병원에 자주 갔으며 앓아눕는 일도 많았다.[17] 옐친은 이미 대통령일 때에도 임기 중에 많은 뇌물을 받고 부정 축재를 했다는 당시 검찰의 폭로가 있어서 제1야당인 공산당이 재집권할 경우 이걸로 건수를 잡아 퇴임하자마자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18] 허나 지독한 주당 치고는 장수한 편인데 그도 그럴게 러시아 남성의 평균수명은 60대다. 이유는 당연히 술 때문이다.[19] 러시아에서 절인 오이(Солёные огурцы)는 살로(Сало, 돼지 비계)와 더불어서 보드카와 함께 가장 흔하게 먹는 술안주이다. 여기에 좀 더 사치를 부리면 염장 연어알과 같이 먹고, 부자들은 캐비어를 술안주삼아 먹는다.[20] 빌 클린턴과의 퇴임 후 인터뷰를 담은 책 'The Clinton Tapes'에 의하면 정확히는 2번 정도 난동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난동은 백악관 앞 도로에서 만취한 상태로 잠옷만 입고 택시라고 소리쳐대고 있었다고 한다. 사유는 택시를 타고 피자를 먹으러 가고 싶다는 이유로(…). 클린턴에 의하면 결국 피자를 먹는데는 성공했다고. 두번째 난동 역시 만취한 상태에서 백악관 내 숙소 뒷문으로 들어가려다 미국 대통령 경호팀 & 러시아 대통령 경호팀 양쪽 요원 모두에게 불법침입자로 오인당한 것. 다행히 큰 소동까진 가지 않았다고 한다. 택시와 피자로도 어질어질한데 과연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21] 옐친 정권 시절 공직자를 맡았던 우익들을 옐친으로부터 떨어지게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포섭하는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러시아 우익들은 대다수가 친푸틴 성향으로 전향해 통합 러시아에 합류했고, 보리스 넴초프야블로코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같이 푸틴에 협조하지 않고 자유주의 성향을 고수한 소수의 우파 세력들은 주류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22] 만평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다친 곰(러시아)이 그저 치료를 받으려 병원(옐친)에 갔는데 죽어서 관에 실려 나온다는 내용이다. 즉 살아들어가서 옐친을 만나 죽어나왔다는 풍자.[23] 1990년대 러시아의 경제력은 러시아 면적의 100분의 1도 안되고, 인구도 3분의 1도 안되는 한국에게 모든 면에서 처참히 발렸고, 최빈국에서 갓 탈출한 당시 중국의 1인당 GDP와 1,000$도 차이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옐친의 삽질로 인한 경제난과 내부 혼란으로 인해 소련 해체 직전까지도 활발했던 우주 산업의 규모를 대폭 축소시키기까지에 이른다.[24] 소련은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소득이나 삶의 질은 확실히 미국의 40%에도 못 미쳤지만, 소련의 모든 재산은 국유재산이었으므로, 국부 자체는 미국의 40% 정도가 될 정도였던 게 맞다. 국가경제는 기업+가계+정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련은 정부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계쪽은 매우 부실했다.[25] 재밌는 점은 자기들이 발권력을 가진 루블화 표시 채권도 모라토리엄 선언을 해버렸다 모라토리엄만 선언해도 사실상 국가경제가 쑥대밭이 되는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외화 표시 채권이라도 imf에 간이고 쓸개를 다 내줘도 돈을 빌려와 갚는것이 상식처럼 여겨졌는데 돈이 없으면 극단적으로 윤전기 돌려 찍어내도 상관없는 자국통화 표시 채권 또한 다같이 모라토리엄 선언을 해버렸다.[26] 덤으로 이 모라토리엄 때문에 구소련 출신이던 동유럽 국가 몰도바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당시 몰도바는 소련 해체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의 후유증도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경제를 의존해오던 러시아가 파산하니 러시아와의 경제적 교류도 거의 다 끊겨 과장 안 보태고 아프리카 최빈국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경제가 작살났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 후유증을 어느 정도 회복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유럽 최빈국 신세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27] 이는 당시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다.[28] 몇년 후 직선제로 원상복귀되었다.[29] 기사.[30] 이 점은 고르바초프와 대비된다.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는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정치력과 권위가 뒷받침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 고르바초프의 약점이었다.[31] 물론 한국 국민들의 경제난에 대한 체감은 IMF 이후 거의 똑같은 수준이지만, 실질적인 지표가 아닌 체감적인 부분 한정이다.[32] 고르바초프는 정치력이 부족하면서 조급하게 개혁을 추진하는 등 부족한 점은 있었지만, 주권 선언을 하며 소련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한 옐친에 맞서 주권국가연맹이라는 체제로 소련 자체는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브레즈네프 시절 개입한 소련-아프간 전쟁의 여파는 고르바초프 재임 기간 내내 소련에게 어마어마한 부담이 된 데다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아르메니아 대지진같은 대재난까지 겪는 등 악재가 많이 겹쳐지다보니 약간은 면피할 구석은 있다.[33] 여담으로 체르노빌 참사와 아르메니아 대지진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장관회의 부의장이자 연료동력부 장관이었던 보리스 예브도키모비치 셰르비나(Борис Евдоки́мович Щербина)는 옐친이 당선되면 나라를 암흑기로 몰아넣을 거라며 결사반대했으나, 셰르비나는 소련이 해체되기 전인 1990년에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암으로 사망했다.[34] 옐친을 비롯해 냉전시기에 소련 공산당에서 관료 테크를 밟으며 승진한 인물들 중에는 북한을 안 좋게 보는 사람이 많았다. 소련이 뒷목잡을 일을 많이 만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상쇄할 정도로 알짜배기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 소련이 대한민국과 수교한 직후부터 작정한 듯 남한과 경제협력을 해나간 것과, 옐친이 대놓고 북한을 싫어하는데도 러시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건 옐친뿐만 아니라 소련 시절 승진했던 러시아 고위층들이 하나같이 북한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당시 러시아도 북한에 조전과 조문 인사를 보내긴 했다만, 이 정도는 사실 외교관계가 진짜 최악이 아닌 이상 의례적으로 다 하는 거라.[35] 1961년 북한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군사동맹조약으로, 한국으로 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급의 위상을 가졌었다고 보면 된다.[36] 이런 식으로 러시아인 기술자들을 영입한 것은 북한만이 아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 역시도 러시아인 기술자들을 여럿 데려온 바 있다. 데려간 숫자로 치면 북한보다 대한민국이 더 많기도 하고.[37] 현무천궁 미사일의 초기형도 모두 러시아에서 이전받은 기술이 들어간 것이다. 특히 러시아가 한국의 콜드런칭 기술 개발에도 상당수 기여했다고 전해진다.[38] 현재 T-80U와 BMP-3는 전량 전문대항군연대로 인계되었다.[39] 아예 안 주는 건 아니고, 지금도 줄 때는 준다. 전에 비해 단가가 많이 올랐을 뿐.[40] 발해 기준으로는 솔빈부 행정 구역이다.[41] 1954년 창설[42] 1974년 창설[43] 1984년 창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