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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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3. 정치 활동


1. 개요[편집]


러시아의 현직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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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7일,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은 소련 레닌그라드에 위치한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과 마리야 이바노브나 푸티나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들이 지나다니는 소련 노동자들의 낡고 허름한 공동 주택에서 보냈다.

할아버지 스피리돈 이바노비치 푸틴 (1879~1965)은 무려 블라디미르 레닌이오시프 스탈린다챠에서 일하는 전속 요리사였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 (1911~1999)은 1937년 소련 해군수병으로 입대해 잠수함부대에 자대배치를 받았고, 보급병으로 3년 복무 후 1940년에 만기 전역, 이듬해인 1941년 독소전 개전으로 소련 육군에 징집된 뒤 NKVD 휘하 일반 소총부대로 재입대했고 레닌그라드 전선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이후 1943년 레닌그라드 공방전 겨울에 독일군의 포격으로 한쪽 팔이 절단된 후 의병 전역을 했던 상이군인이었다. 어머니 마리야 이바노브나 푸티나 (1911~1998) 역시 친정 식구들 다수가 전쟁통에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참극을 겪었다.[1] 푸틴 부부가 가진 첫째 아이 알베르트는 어릴 적에 일찍 죽었고, 둘째 아이 빅토르는 레닌그라드 봉쇄 중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그렇게 폐인이 된 30대 부부만이 살아남아 전쟁 후에 마흔이 넘어 세번째로 낳은 아이가 바로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이다.#[2]

청소년기의 푸틴은 본인도 인정했듯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또래 불량학생들과 어울리며 물건을 훔치거나 불량학생들의 패싸움에 가담하고 아버지와 난투극을 벌이는 등 크고 작은 비행을 저지르던 비행청소년이었다.[3] 그 탓에 소련 공산당 어린이 조직인 피오네르 동맹에 한참 늦게 가입했고 학교생활도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전후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며 겨우겨우 지역 공산당 중간 간부로 승진한 그의 부친과 독실한 정교회 신도이자 파트타임 일거리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던 모친은 당시 어린 푸틴의 행실을 교정하려 노력했으나 처음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부모의 꾸준하고도 엄격한 가정 교육과 푸틴과 가깝던 운동코치들의 지도 덕분에 푸틴은 고학년 시절부터 모범적인 학생으로 거듭났고 부진했던 성적이나 당 활동에서도 우수한 모습을 보였다.

1960~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푸틴은 철이 든 이후 학업에 집중하면서도[4] 어린 시절 취미를 붙인 무술(유도, 레슬링, 가라데 등)을 계속 연마했다.[5] 스파이 활동을 강하게 열망해 체육을 업으로 삼지는 않았으나 대학 시절에 유도 사범자격을 얻고, 고향 레닌그라드 유도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프로급 격투기 실력을 갖추게 된다. 또 비행청소년 시절의 다소 자유분방한 기질을 잃지 않고 흐루쇼프 해빙기(1956~64)에 시작되어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집권 초기까지 짧게나마 이어진 소련의 낙관적인 사회분위기와 비교적 자유로운 소비/문화생활을 즐겼으며 친구들과 몰래 서구권 문화매체를 향유하기도 했다.

선전물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첩보원들의 모습에 사로잡혀 일찍부터 국가보안위원회를 동경한 푸틴은 청소년 시절에 만난 KGB 레닌그라드 지부 공보관의 조언대로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법학부에 입학해 재학 도중인 1974년 KGB의 수습요원으로 발탁되었다.

2.2. KGB[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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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no such thing as a Former KGB man.

세상에 전직 KGB 요원이란 건 없습니다.

전직 KGB 요원으로 첩보 활동에 대한 세간의 환상이 있고 실제로 국외에 파견되기도 했지만 푸틴이 맡은 일은 낮은 단계의 보안과 연락업무 등에 그쳤다고 한다. 즉 중간관리 사무직 요원이었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색 신분의 특수요원이 아니었다. 007로 대표되는 자극적인 블록버스터물의 첩보원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물론 평범한(?) 정보직 요원이었어도 나름 KGB 출신인만큼 푸틴은 블랙요원으로 화려하게 활동한 이력만 없을 뿐이지 기초 첩보요원 훈련 등은 다 받은만큼, 사격이나 격투, 장비 조종 등을 능숙히 할 수 있고 이를 쇼맨십으로 활용했다.

1974년 수습생으로 정보계에 발을 들인 푸틴은 1975년, KGB 레닌그라드 지부의 행정부서와 국내담당부서(제2총국 등)에서 근무하며 다른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업무와 각종 스파이 교육을 동시에 소화했다. 이후 해외부서로 이동해 보안업무를 맡으며 모스크바 본부와 레닌그라드 지부, KGB 아카데미를 오가다 1983년에 교제중이던 첫번째 부인 류드밀라 시크레브네바[6]와 결혼하고 1985년 여름에 KGB 제1총국 소속으로 동독 드레스덴 지부 파견 근무를 명받았다. 이때의 출장이 푸틴 생애 최초의 외국방문이었다.

1990년 드레스덴 지부의 다른 간부들과 함께 본국으로 소환되기 전까지 푸틴은 동독에서 상당히 평이한 정보업무에 종사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내용이나 실체는 꽤 복잡한 편이다. 저널리스트 캐서린 벨턴이 쓴 푸틴의 사람들에 의하면 드레스덴 지부에서의 활동은 푸틴이 KGB 내부에서 신망받는 인물이 되는데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드레스덴은 동독 시절 베를린과 거리가 있는 소규모 지방 도시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서방국가의 첩보기관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나 있어 KGB가 핵심적으로 관리하는 거점 중 하나 였다고 한다.

푸틴은 그 곳에서 여러가지 임무를 맡았는데,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당시 동구권 국가의 경제체제에서 큰 역할을 했던 밀수, 서방 기업으로부터의 기밀 탈취 부터 시작하여, 서방세계를 공격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에 감화된 무장조직들[7]]를 이용한 테러에 대한 지원, KGB에 매수된 동독 및 서독 사업가들의 사업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한편, KGB를 위한 비밀자금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업무에 깊이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푸틴이 KGB를 거쳐 아래서 이야기할 소브차크의 측근이 되어 신생 러시아 연방의 정계로 진출하는 과정은 일종의 운빨이 제대로 터진 것 내지는 영웅담으로 미화된 경향이 있다. 하지만 푸틴의 등 뒤에는 항상 전직 KGB 고위 간부, 거물 레드 마피아, 또 그들과 연계된 은행가 및 올리가르히들이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제법 앞뒤가 맞는다고 볼 수 있다. 즉, 푸틴이 운좋게 솝차크를 거쳐 러시아 연방의 거물 정치가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도와준 것이 아니라, 이미 드레스덴 지부 시절부터 KGB 내부에서 상당히 신망받는 인물이었으며 소련 해체와 러시아 연방 성립기의 혼돈기에서 전직 KGB 간부들과 솝차크의 측근 생활을 거치면서 알게 된 신생 러시아의 민주화 세력 및 반공 정치가들과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자기 영향력을 충실하게 키워왔다는 것. 특히 전직 KGB 간부들은 레드 마피아와 구소련제 무기를 대량으로 국제 사회에 퍼뜨린 주범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이미 소련 붕괴 이전부터 어마어마한 규모의 달러를 KGB가 직접 관리하는 유령회사로 옮기고, 공작금을 대량으로 횡령하는 등, 소련 붕괴 이후를 충실히 준비하고 있었던 정황이 있었고 그들의 지원을 받은 올리가르히들이 대출세 한 것을 보자면 이것을 단순히 음모론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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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6일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전속 사진가 피트 수자가 푸틴의 젊은 시절(36세)이라고 주장하며 공개한 사진. 관광객인 척 위장하고 근무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알려져 있다시피 푸틴은 중간관리직 요원으로 드레스덴에서 쏟아지는 서류업무를 처리하며 현장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기에[8], 당시 모스크바에서 경호내지 사찰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그런고로 저 사진 속 인물은 푸틴이 아니라 푸틴을 닮은 타인이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도 이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말한 바 있으며 푸틴에 대한 영웅주의 서사와 함께 널리 퍼진 대표적인 오해 사례다.[9]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러시아 TV와의 인터뷰에선 "성난 동독 사람들이 드레스덴의 슈타지(동독 비밀경찰) 건물을 공격하던 와중에 일부 무리가 KGB 지부로 몰려들었는데 나는 그곳에 있었고 '난 통역'이라고 말해서 위기를 넘겼다"고 말했다.[10]

드라스덴 KGB지부에서 있었던 일은 러시아에서 푸틴의 영웅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유유럽방송의 관련된 영상 #

워낙 긴급한 상황이라 부재중인 지부장이나 KGB 모스크바 본부의 지시를 기다릴 틈이 없어서 동독 소련 주둔군 사령부에 연락해 당직장교를 통해 수 차례나 소련군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직장교는 명령 내려오지 않았다면서 병력을 출동시키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나중에서야 명령계통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시위대가 물러가고 나서 몇 시간 뒤에 소련군이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는데 푸틴은 이때의 경험으로 수직적이고 경직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감이 심해졌다고 한다. 본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자차로 무면허 택시를 운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안그래도 전술한 동독에서의 위기를 넘긴 사건을 비롯하여 5년 간의 동독 파견생활 도중 서독의 균형잡힌 경제발전상과 뛰어난 산업모델에 큰 영감을 받았고 이후 동구권 침체,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분열과 호네커의 몰락, 독일 재통일 준비를 모두 지켜본 푸틴은 그 과정에서 소련에 맞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도입의 필요성을 점차 실감한다.

그와 동시에 푸틴은 이전부터 보수적이고 현실인식이 떨어지며 지나치게 복지부동적인 주류 공산당 지도부 및 원로들에 대해 큰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체제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던 와중에도 여전히 소련에 충성적이었던 그는 자신의 영웅인 유리 안드로포프와 정보부의 옛 위인들을 존경했고[11] 처음엔 고르비의 개혁작업도 긍정했지만 조국이 하루빨리 정상화되길 원하던 그의 바람과 달리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았다.

경제난에 빠진 소련과 마찬가지로 귀국 후 푸틴의 입지는 줄곧 하락세였으며 무소불위의 KGB 역시 과거의 위엄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스크바 본부, 제1총국 본부의 한직을 사양하고 KGB 레닌그라드 지부로 돌아온 뒤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위장신분으로 근무하던 푸틴은 자유선거로 선출된 신임 레닌그라드 시위원장(시장) 아나톨리 소브차크[12]를 만나면서 정보업계를 떠나 민간에서 그를 따르기로 하고 KGB에 사표를 제출한 뒤 출근도 안 했지만 정작 레닌그라드 지부와 본부에서는 푸틴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푸틴은 소브차크의 보좌관으로 들어가면서 KGB 윗선에는 '불온한 정치신인과 함께 일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다.'라고 제안을 한 뒤 작전을 승인받고 KGB와 시위원장 사무실에서 동시에 월급을 받아 챙겼다. 게다가 소브차크와 만났을 때 자신이 KGB 요원이라고 밝혔지만 정작 소브차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오히려 푸틴에게 자기 편인 척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겠고 일하기 쉽지 않다고 속내를 털어 놓으며 하소연을 했을 정도로 소브차크의 주변 인물들은 부패해 있었고 차후에 여러 스캔들을 터트리게 된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한 부분이 푸틴에게는 신의 한 수가 된 셈이다. 2018년에는 그의 슈타지 신분증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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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새로 완공된 러시아군 정보총국 GRU(Glavnoe Razvedyvatel'noe Upravlenie) 본부를 방문했을 때 스테츠킨 기관권총을 쏴 보는 푸틴. KGB 출신이라 그런지 사격 자세도 상당하다. 사진을 보면 기관권총임에도 개머리판 없이 사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3]

그가 동독 드레스덴 지부로 보고되는 각종 정보들을 종합하면서 서독 및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심해지는 경제력, 기술력 격차로 내부 개혁의 불가피성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드레스덴 지부에 보고된 1급 정보를 가공한 뒤 KGB 본부에 보냈지만 산업이 정체된 탓에 그 정보를 소련의 기술로 구현하지 못해 결국 폐기 처분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미지 구축을 위해 자주 이런 쪽으로의 이미지를 어필하는 홍보 사진이나 영상물을 간간이 공개하고 있다. 야외에서 웃통 까고 캠핑하는 모습이라든지, 아래의 비행기 조종이나 무술 등등. 지난 대선 때는 폭주족처럼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퍼포먼스를 하였는데,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이젠 좀 식상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러시아인들도 상당수이다. 여담으로 푸틴이 걷고 있는 영상을 보면 왼손만 평범하게 움직이고 있고 오른손은 근육 병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 싶을만큼 몸에 밀착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KGB 사복 요원들이 언제든지 사격을 할 수 있도록 받은 훈련 때문이라고 한다. 이른바 gunslinger gait(총사 걸음걸이)라고 부르는건데, KGB에서 은퇴한지 오래되었지만 직업병이 몸에 밴 듯하다. 관련 가디언지 기사(영문)

구 소련이 붕괴된 직후 생활고로 무허가 택시 영업을 했다고 한다.[14] 그때를 생각하면 본인도 불쾌하다고 하면서도 맞다고 인정했다.#

3. 정치 활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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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정어머니는 독일군이 처형했고, 오빠들은 전쟁에 참전하거나 독일군에 끌려가며 실종되었다.[2] 본격 2차 세계대전 만화의 본 에피소드는 실제 일화를 살짝 각색한 것으로, 어머니가 숨이 붙어있음을 발견한 사람은 실제로는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의 외삼촌이었다. 극중에서 등장하는 타냐는 소련판 안네 프랑크라 할 수 있는 타냐 니콜라예브나 사비체바(Татьяна Николаевна Савичева)에게서 이름을 딴 캐릭터로 추정된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문서 참조.[3] 영국 측에 따르면 이러한 성격 때문에 우크라이나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막나가는 정책을 실시했다고 한다.[4] 수학은 잘하지 못했으나, 문학, 역사, 철학, 독일어 성적이 좋았다.[5] 처음 시작한 무술은 권투였으나, 를 크게 다친 후 그만 두었다.[6] 부부동성을 따르는 러시아의 관습에 따라 류드밀라 푸티나(Людмила Путина)로 알려져 있지만, 2015년에 재혼하여 이후에는 류드밀라 오체레트나야(Людмила Очеретная)라는 이름을 사용한다.[7] 대표적으로 적군파.[8] 유일한 현장 업무는 현지 정보원 관리였다.[9] 윗 사진은 외모도 비슷해보이지만 170cm이하의 신장으로 추정되는 푸틴처럼 키도 작아보여서 네티즌들이 의심없이 믿곤했다.[10] 당시 KGB 드레스덴 지부장과 푸틴을 제외한 다른 간부진은 외출 중이었고 일부 동독시민들이 KGB지부 침입을 시도하긴 했으나 큰 충돌없이 물러났다.[11] 소련이 사라진 지금도 선대 정보 베테랑들에 대한 존경심은 여전하다고 밝혔다.[12]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법학교수 출신의 비공산당 인사로 푸틴이 법학부 재학중 몇차례 소브차크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으나 서로 모르는 사이에 가까웠다. 1989년 인민대표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뒤 새로운 레닌그라드 시위원회에 요청을 받아 시위원장이 된 소브차크는 자신의 보좌할 KGB 출신 정보통을 원했고 공교롭게도 푸틴 역시 이무렵에 지인으로부터 소브차크 밑에서 일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 소브차크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의 정치적 멘토이기도 하며,(실제로 푸틴과는 달리 메드베데프는 KGB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쌩 일반인 출신이다. 즉 푸틴과의 연줄은 소브차크를 통해 생긴 학연이 전부인 셈.) 심장마비로 죽기 전까지 푸틴과 각별한 사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딸 크세니야 소브차크는 열심히 반푸틴 활동을 하고 있다. 별명이 러시아의 패리스 힐튼인 크세니야는 НТВ에서 정치쇼 앵커로 활동하며 푸틴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자신의 반푸틴 성향을 전국에 인증을 했다. 러시아 국내에서 푸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적도 있다. 크세니야는 2015년 보리스 넴초프 전 총리 살해 이후 러시아 극우 단체에서 암살 협박을 받고 있는 중. 결국 2015년 3월 14일, 국외로 도피했다가 다시 귀국해 2018년 대선에 출마했다.[13] 스테츠킨 기관권총분당 750발의 속도로 9×18mm 권총탄을 퍼붓는 물건이며, 이러면 반동 때문에 팔이 이리저리 흔들리게 되고 명중률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 개머리판을 장착해 쓴다. 다만 단발 사격도 가능하기 때문에 푸틴은 단발로 사격했을 가능성이 높다.[14] 이를 웃음거리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막장화된 구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에서 택시 운전은 푸틴같은 국가기관 출신자나 대학 교수등 인텔리들이 투잡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90년대에 순항훈련차 블라디보스토크에 기항한 대한민국 해군 인원들 및 취재를 위해 동승한 기자들이, 어려운 형편에 러시아 해군 대령이 퇴근 후 부업으로 택시를 몰러 가는 모습을 보고 기겁하기도 했다. 한편 푸틴의 과장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