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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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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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을 쌓고 있는 모습. 서독 경찰동독 국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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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반대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동독 국경군 준사관들과 악수를 나누려고 하는 서독 사람들의 모습

독일어
(Die) Berliner Mauer
영어
Berlin Wall
프랑스어
Mur de Berlin
러시아어
Берлинская стена

1. 개요
2. 상세
3. 배경과 역사
3.1. 전후 베를린 분할
3.2. 베를린 장벽 이전
3.3. 서독으로의 끊임없는 탈출 물결
3.4. 베를린 위기와 베를린 장벽 축조
4. 죽음의 구역 (Todesstreifen, Death zone)
5. 즉각사살 명령 (Schiessbefehl)
6. 각종 탈출 시도
7. 붕괴 과정과 이후
8. 민간인 사살 사법 심판
9. 기타
10. 관련 어록



1. 개요[편집]




냉전 시기에 동베를린의 서쪽 경계선에 존재했던 장벽으로, 냉전과 독일 분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조물 중 하나다. 1961년 8월 13일동독(독일민주공화국)이 축조했으며, 1989년 11월 9일에 동서 베를린 시민들에 의해 붕괴되었다.

베를린 장벽이라는 명칭은 주로 서방 세계에서 통용되던 것이었고, 이 장벽을 건설한 동독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반파시스트 방벽(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이라고 불렀다.


2. 상세[편집]


스탈린베를린 봉쇄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국경이 완전히 단절되었으나 베를린 봉쇄는 실패로 끝났고 봉쇄는 풀렸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며 스탈린과는 차별화된 개방적인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과시했다. 동독 측의 우려에 대해 흐루쇼프는 위대한 공산주의의 기치 아래 날로 발전하는 동독의 위용을 보고 자연스럽게 서독 사람들이 동독으로 우르르 몰려올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 실제로는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끝없이 이탈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50년까지 이미 무려 수백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탈주했고 동서독 분단이 고착화된 1950년 이후에도 매년 수십만 명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탈하면서 베를린 장벽 건설 시점인 1961년까지 동독을 탈출한 독일인의 수가 무려 380만 명에 달했다. 동독 영토 한가운데에 놓인 서베를린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과 서방 세계로 탈출하는 주요한 경로가 되었고, 특히 1953년 동독 봉기 이후 소련과 동독 정부가 동독 주민의 탈주를 막기 위해 동서독 국경의 경계 태세를 대폭 강화하면서 동서독 국경을 직접 넘는 것이 힘들어지자 동독 주민의 탈출 경로로서의 서베를린의 중요성은 더 올라갔다. 심지어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이웃 동유럽 공산국가 시민들까지 동베를린을 거쳐 서베를린으로 이탈했다.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특히 고학력자들의 이탈이 심각했고, 결국 동독은 체제 유지를 위해 서베를린과의 경계선 전체에 장벽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흐루쇼프는 공산주의 체제의 패배를 인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베를린 장벽을 세우고 싶어하지 않아 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미소영프가 동시 철군하여 베를린을 비무장 자유도시로 만들자고 두 차례나 서방에 최후통첩을 날렸지만, 서방의 지도자들은 이는 소련이 서베를린까지 날로 먹으려는 기만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포츠담협정 위반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1] 발등에 불이 떨어진 동독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는 체제 유지를 위해서 베를린 장벽을 세우게 해달라고 흐루쇼프에게 애걸했다. 여기에 마오쩌둥수정주의 운운하며 흐루쇼프가 제국주의자들에게 잘 맞서지 않는다고 비난을 해대자 흐루쇼프는 중국과의 사회주의 영도권 경쟁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베를린 장벽 건설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미국에서는 경험이 부족한 젊은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서 외교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였고, 베를린 장벽을 세우더라도 케네디가 아무런 군사적 보복을 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 후르쇼프는 울브리히트에게 베를린 장벽 건설을 세우도록 했고,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군경을 동원하여 한밤중에 서베를린과 접한 전국경을 봉쇄하고 기습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구축했다.

베를린 장벽 건립을 지시한 동독의 울브리히트는 공식 석상에서는 보란 듯이 자랑스러운 투로 연설했지만, 사석에서는 '이는 체제 경쟁에서 졌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충수'라고 푸념했다. 동독 외의 다른 동유럽 국가에서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는데 헝가리 인민공화국 서기장이었던 카다르 야노시는 '장벽 건립으로 공산주의 운동 전체의 명예가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흐루쇼프도 장벽을 "흉물스러운 물건"이라고 평하면서도 동독의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인정했다.

베를린 장벽 건설은 전후 세계 질서를 규정한 포츠담협정을 위반한 중대한 사안이었지만 후르쇼프의 예상대로 케네디는 베를린 장벽 설치 당시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했고, 그 결과 서방 동맹국 언론으로부터 케네디는 큰 비난을 받았기도 했으나 케네디는 전쟁의 위협을 베를린 장벽으로 싸게 막았다며 자위했다. 케네디를 완전히 얕보게 된 후르쇼프는 이듬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도발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지 2년 후 케네디는 서베를린에 날아와서 한 유명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연설에서 "제1세계제2세계간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모르겠다는 자, 공산주의미래의 물결이라는 자, 공산주의와 협조해나갈 수 있다는 자, 공산주의가 적어도 경제적 진전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자는 베를린에 와보라. 자유에도 문제가 많고 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벽을 세워 사람을 가두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라며 베를린 장벽을 강하게 비판했다.

베를린 장벽이 구축된 후에도 1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시도했고, 이중 5,000여 명의 사람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약 200명의 사람들이 장벽을 넘는 도중에 사살되었다.

동유럽 민주화가 진행되던 1989년 11월 9일 붕괴되면서, 독일 통일과 공산주의 몰락 과정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통일된 이후로 조각조각나서 여기저기로 팔렸다. 심지어 이걸 벽째로 사서 소장한 사람도 있다. 덧붙여 지금도 장벽의 파편을 카드에 담아 팔고 있다. 또 게임 월드 인 컨플릭트의 한정판은 실제 조각을 독일 정부의 보증서와 함께 주었다. 베를린에서 장벽의 잔해랍시고 돌덩이를 팔고 앉아있는 경우도 있는데,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에는 대전광역시의 엑스포 과학공원과 서울특별시청계천 한화빌딩 앞에 벽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는데, 후자는 2018년 훼손되었다.


3. 배경과 역사[편집]



3.1. 전후 베를린 분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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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부터 1989년까지 나타낸 분단 독일 지도. 붉은 색은 동독의 영역이며 노란색서베를린, 사실상의 서독 영역이다. [2]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얄타 회담에 의해서 연합국 4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추축국이었던 독일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3] 그리하여 1945년 독일 항복 후 독일 영토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승전국 4개국 점령지역으로 분할되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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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된 베를린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동쪽의 소련 구역 내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베를린은 예외로 하여 4개국이 함께 분할하기로 했다. 왜 하필 베를린에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면 베를린은 30년 전쟁 이후 독일을 주도하였던 프로이센 및 통일 독일의 오랜 수도라서 그 상징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동독의 지배자인 소련은 물론이고 서독을 통치하게 된 나머지 연합군들도 베를린을 포기하지 못하여 그냥 나눠버리는 선에서 합의했다. 서방 연합군의 일원인 미국, 영국, 프랑스는 자신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그만큼 소련도 동부 전선에서 더 큰 피해를 입어야 했음을 지적했다. 독일 해군과 공군의 등뼈를 부러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시작하여 마켓 가든 작전휘르트겐 숲 전투, 아르덴 대공세를 거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서 지크프리트 선을 뚫고 서부전선에서 진격을 멈춘 엘베강 레크비츠까지 흘린 서방 연합군의 장병들의 피와 공적이 쌓여 서베를린을 얻어냈다.[6]

하지만 소련은 1946년 자신들의 점령 지역, 즉 동독 지역에서만 자체적인 선거를 실시하여 사회주의통일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당황한 미국, 영국, 프랑스는 소련에게 독일 전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독일을 독립시켜주자고 제안했다. 소련은 협상에 응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다가 결국 거절하였다. 결국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 점령 지역에서만 총선이 실시되어 1949년 독일 연방공화국, 즉 서독이 출범하면서 동서독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한편 독일의 총선 문제를 두고 미/영/프와 소련이 대립하던 1948년을 전후로 베를린 역시 서독과 마찬가지로 미/영/프 3개국 지역이 빠르게 서베를린으로 통합되었고, 소련과 동독 정부가 지배하는 동베를린과 두 개의 베를린으로 분단되어 갔다.

그러나 베를린을 통해 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였고, 서베를린은 주민들의 이탈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동독과 소련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이에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8년 동독 한복판에 있는 서베를린을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 하지만 미국과 서방의 가공할만한 베를린 공수작전에 의해 이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서베를린은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남은 서베를린은 서독의 월경지가 되었다. 바다나 산, 도로 등을 통해 단절된 것이 아닌 이념으로 단절된 이 땅을 사람들은 '육지의 섬'이라 불렀다.[7]

3.2. 베를린 장벽 이전[편집]


베를린 장벽 이전에도 서베를린과 동베를린간의 엄격한 지역구별이 존재했다. 베를린은 연합국 4개국에 의해 분할되었고, 일종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연합국 4개국은 군사 작전 문제로 인해 영역이 겹치지 않도록 골목길 하나까지 철저하게 다 나눠먹어 놨다. 심지어는 브란덴부르크 문 앞 광장까지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면밀하게 명시했을 정도다. 실제로 서베를린 관할이던 국회의사당 몇 미터 바로 뒤에 경계선이 놓여 있었고, 아돌프 히틀러의 야심작이던 포츠담 광장도 정확히 절반으로 나뉘어졌다.

이런 지역 구분 때문에 생긴 재미있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서베를린은 영국군/프랑스군/미군육군이 관할하는 지역으로 나뉘고, 이에 따라 경고 표지판이 살짝 바뀌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브란덴부르크 문 앞 지역은 영국 육군 관할지였고, 첩보물의 배경으로 많이 쓰인 체크 포인트 찰리 앞 지역은 미 육군 관할지였는데, 양측의 경고문이 위와 같이 달랐다.

파일:attachment/베를린 장벽/americasectorsign.jpg
파일:attachment/베를린 장벽/britishsectorsign1.jpg
"YOU ARE LEAVING THE AMERICAN SECTOR"
"YOU ARE NOW LEAVING BRITISH SECTOR"

서베를린 출입 시 검문을 하는 것도 서독 국경경비대(BGS)가 아닌 미/영/불 3국 육군이었고, BGS는 그저 보조에 불과했다. 국제적으로는 서베를린은 서독 영토가 아닌 미, 영, 불 군대의 점령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8]

1949년 서독과 동독이 완전히 갈라선 이후에도 동서베를린은 실질적으로는 동서독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행정적 영향력을 미쳤지만, 공식적으로는 연합국 관할의 점령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냉전으로 서방 3개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상태에서 동서베를린의 법적 지위는 불분명했다. 동독은 아예 1949년 헌법에서 동베를린을 수도로 공포했다. 서베를린 역시 서독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소련의 반대 속에 법적으로 서독 영토로 귀속되지는 못했다.

1952년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은 서독을 완전한 독립 국가로 독립시키기 위해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독일조약(Deutschlandvertrag)를 맺었다.[9] 이 조약에 따라 서독에서 연합군의 군정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서독은 주권을 완전히 회복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결국 공식적으로는 서베를린을 서독 영토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담았다. 독일조약은 독일연방공화국 정부, 즉 서독 정부가 서베를린에 대해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독일조약(Deutschlandvertrag) 및 파리의정서(Pariser Protokoll)에 따라 서베를린의 연방의원은 서독연방의회(Bundestag)에서 일종의 참관인으로서 참여는 가능했지만 표결권을 가지지 못했다. 또 서베를린의 연방의원은 서베를린 시민의 직접선거로 뽑히지 않고 베를린 지방의회에서 간선으로 선출되었다 서베를린 시민은 서베를린 지방의회에만 선거권을 가졌다. 또한 서독의 법률은 서베를린에 직접 적용되지 못했고 서독의 헌법이었던 기본법(Grundgesetz)도 베를린에서는 상당 부분 그 효력이 제한되었으며, 심지어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조차도 베를린에서는 그 효력이 제한될 정도였다.[10] 서방 3개국이 서베를린을 서독의 공식 영토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명문화한 것은 소련의 반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동베를린을 동독 영토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동베를린 또한 명목상 동베를린 시민은 동독의 최고인민회의의 선거권을 가지지 못했으며, 동독의 법률은 동베를린에서 직접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일당 독재국가인 동독에서 선거권이란 사실상 명목상의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 동베를린은 동독의 수도로 기능했고 동독 영토와 붙어 있었기에 사실상 실질적인 제약을 받지 않으며 동독의 영토이자 수도로서 기능했다.

영토 규정에 따라 베를린에는 연합국의 군대는 주둔할 수 있었으나 동서독 정규군의 주둔은 원칙적으로 불가했다. 실제 서베를린에는 서독군이 주둔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베를린에는 소련의 용인하에 동독군이 주둔했다.

이러한 영토 규정으로 인해 서독 본토와 서베를린을 잇는 항공 노선은 서독 항공사가 취항할 수 없었다. 동독이 서독 항공기의 영공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영/불과 소련은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진입할 수 있는 3개의 항로에 대해서 합의했다. 연합군은 민항기 관제권의 민간 이양을 검토했으나 2차 대전 이전에 독일에는 민간에 의한 항공 관제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조직을 설립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서독 본토의 민간 관제권은 1950년대에 연합군으로부터 이양받기는 했으나 베를린은 여전히 점령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예외였다.[11] 그래서 서독 본토에서 서베를린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려면 영/미/불 항공사 항공편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 나라의 대표 항공사, 영국항공, 에어 프랑스, 그리고 팬암에서 서독과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항공편을 대신 운항하였다. 팬암은 1980년대까지 런던 히스로 공항 등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로 가는 항공편을 운항했다. 반면 동독 쪽은 쇠네펠트 공항이 역시 소련군의 점령지로 간주되었던 동베를린 경계선 밖에 있었기 때문에 국영 항공사 인터플루크가 비행편을 띄우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 대신 이 쪽도 동서독 국경을 직접 넘을 수는 없었다.

이처럼 동베를린이 사실상 동독의 영토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흐루쇼프는 1958년 11월 베를린 최후통첩(Berlin-Ultimatum)을 날릴 때까지 서베를린과 서독 정부간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서 대체로 큰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3.3. 서독으로의 끊임없는 탈출 물결[편집]


동서독으로 분단된 독일은 한국처럼 6.25와 같은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호간 교류가 전혀 없던 남북한과는 달리 동서독은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기는 해도 교류가 어느정도 활발한 편이었다.[12][13][14]

분단 이후 동서독 양국의 수준 차이는 갈수록 크게 벌어졌다. 서독은 루르 공업 지대로 대표되는 서부 공업 지대를 가지고 있었고, 마셜 플랜으로 미국의 경제 지원을 받으며 곧바로 경제를 재건했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었다. 반면 동독은 갑작스러운 공산화로 하루 아침에 모든 기업이 국유화가 되었고, 이에 동독에 있던 여러 기업들은 그렇게 나라에 회사를 빼앗기거나 아니면 서독으로 탈출하여 회사를 재건했다.[15] 그렇게 서독과 동독은 경제력에서 압도적인 격차를 벌이게 되었다.[16]

서독은 동독 사람이 서독으로 건너올 때마다 정착지원금도 꼬박꼬박 주고 연금도 꼬박꼬박 지급해줬다. 동독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도 의외로 서독의 돈질에 쉽게 타협하는 모습을 자주 연출했는데, 대표적으로 동독은 자국의 정치범들에 대해서 서독 정부가 몸값을 지불하면 정치범들의 신병을 서독으로 인도해 주곤 했다. 그렇게 27년간 서독은 동독에 무려 35억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하며 동독의 정치범과 그 가족들을 25만명이나 구출해 냈다. 이 '정치범 장사'는 동독 정부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동독 정부는 동독인들의 서독 방문(이주)에 대해서도 "비노동인력을 서독으로 보내면 우리는 사회부담이 경감되고 서독 재정은 거덜나겠지."라는 생각 때문인지 65세 이상 노인에 대해서는 동독이 서독 방문(이주) 허가도 잘 내주었다. 노인 이외에도 중증 장애인 등 동독 사회에서 전적으로 '나오는 것은 없고 그저 보조해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서독 방문(이주) 허가를 내주었다. 하지만 한참 일할 나이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서독 방문이 허용되지 않았다. 목적은 언제까지나 '비생산연령층을 줄여서 생산연령층의 부양 부담을 덜어주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란 달콤한 것이라, 많은 동독인들, 그리고 동유럽인들은 자유를 향해 서독으로 탈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동독에서 서독으로 가는 방법은 극히 제한되었고 다음과 같은 방법 뿐이었다.

1) 첫번째로 동서독 국경, 이른바 철의 장막을 넘는 방법이 있었다.

사실 1952년까지는 소련과 동독이 국경을 넘는 것에 대해 그렇게 심하게 통제를 하지 않아서 많은 동독 주민들이 쉽게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늘자 1953년 동독 봉기를 계기로 동서독 국경의 경계를 대폭 강화하고 대대적으로 틀어막는데, 이러한 모습은 민간인의 월경이 철저히 통제되는 한반도 내의 군사분계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그 휴전선이 주로 동독 영토 쪽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대한민국 휴전선과는 달리 서독 측 국경지역은 공산측이 자기네 사람들 통과는 막아도 서방 쪽에 대놓고 사보타주를 하거나 하지는 않아 좀 자유분방해서 감시초소 몇 개 있고 사람이 먹고사는데 필요한 건 다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적군파 지원 등의 내부 사보타주는 했지만 북한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자기들 좀 수틀린다고 침투요원을 보내서 국경 마을을 때려 부순다든가 병영을 폭파한다든가 하는 짓은 없었다. 상기한 대로 또 다시 전쟁이 생기는 것을 서로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린 패인 북한과 달리 2차 대전의 핵심 전리품이요 바르샤바 조약기구 중핵인 동독이 모험주의를 했다간 즉각 모스크바로 소환당해 쪼인트까여야했다. 이로 인해 막장 사건이 좀 많이 생기기도 했다. 서독의 국경 인근 마을에서 술먹고 주정부리다가 국경선 넘어서 동독 국경경비대에 체포되어 벌금형이나 징역형을 받는다거나 소가 도망쳐서 동독의 자유를 만끽하다 명을 달리한다거나 말이다.

반면 동독 측 국경지역은 민간인 통제구역도 있고, 지뢰밭도 있고, 철조망도 있고, 무장한 군인, 즉 국가인민군 국경군도 돌아다니는, 말 그대로 비무장지대 마이너 버전인 그런 지역이다. 일반적으로 동독 측 철의 장막 지역에서 민간인 통제구역(Sperrzone)은 국경에서 반경 5km 정도였다. 이 지역에서는 당국으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은 주민만 거주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에 너무 가깝다고 판단된 몇몇 마을은 아예 마을을 폐쇄하고 주민들을 모두 강제이주시키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이 지역에서 함부로 돌아다니다 국경군에 적발되면 즉각 사살될 수 있었다. 종종 국경을 넘어서 탈출하는 용자들도 있긴 한데 그건 한국에서 군사분계선 넘는 거보다 조금 쉬운 수준. 국경을 경비하는 국경군은 혼자 경비하다가 탈출하는걸 막기 위해 최소 2인 1조 근무를 원칙으로 했으며 아예 둘이서 짜고 탈출하는 것도 막기 위해 일반적으로는 3인 1조로 근무를 시켰다. 동서독 국경 문서를 보면 당시 동독측 군사분계선의 경비 상태 그림이 있다.

2) 두번째로 해외여행을 통해 망명 비스무리한 형식으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가장 많이 애용된 루트는 공산권과 국경을 접한 중립국오스트리아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에는 17만 명의 헝가리인들이 오스트리아를 통해 서방국가로 탈출했고, 동유럽 혁명이 한창이던 1989년에는 오스트리아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연다는 소문이 들리자 같은 공산권 국가 간에는 여행과 체류가 비교적 쉬웠던 점을 이용하여 첫 날부터 7,000명의 동독 주민들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하여 오스트리아 국경지대를 넘어 서독으로 넘어갔다. 2번째 탈출에는 무려 20,000명의 동독 주민들이 넘어갔다. 동독 군사관계자들은 이 소식을 3일 후에 듣고 나서야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경비를 강화하자고 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관계자는 동독 군사 관계자들을 씹어버리고 국경을 그냥 방치해 버렸다. 다만 이는 상기됐듯 동독이 여행 허가를 잘 안 내주기 때문에 정말 돈 많고 빽 있는 사람 아니면 불가능했다. 북한에서 여행증을 끊고 중국으로 출국해서 한국으로 도망치는 것보단 쉬웠을 것이다.

3) 세번째는 "제1세계의 섬"이라고도 불린 서베를린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물론 위험 부담이야 있지만, 첫번째 방법처럼 민간인 통제구역을 몇 km씩 넘나드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모험이다. 그래서 실제로 많이 행해졌고 또 성공률이 높은 방법이었다. 열기구로도 동독에서 서독으로 빠져나온 가족이 있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장벽 자체를 이런저런 방법을 통해 돌파한 탈출자들도 물론 존재한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의 다수가 베를린을 통해서 서방으로 넘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아직 동서독 체제가 세워지기 전 혼란한 시기에 서독으로 이탈한 1000만여 명[17]을 제외하더라도 1949년 서독과 동독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후에도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탈출은 끊이지 않았다. 1950년대 동안 평균적으로 매년 20만 명 내외의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종전 직후부터 베를린 장벽을 쌓은 1961년 8월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인원은 380만 명에 달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수십년 내에 동독 인구가 거덜날 판이었다. 지속적으로 노동인력이 사라지게 되면 계획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더군다나 주로 탈주하는 인력이 청년계층이 많다 보니 군사력에도 영향을 주게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고학력자들이 많이 이탈하는 것도 문제였다.

동독 정부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서베를린으로 가는 길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공산주의 체제의 실패를 만천하에 인정하는 셈이었기 때문에 이를 시행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소련 지도부가 이를 반대했던지라 동독은 한동안 베를린 장벽 구축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3.4. 베를린 위기와 베를린 장벽 축조[편집]


냉전 시절 소련의 지배하에 있는 동유럽에서 서독으로 탈주하는 사람들의 규모는 엄청났고, 특히 고학력자들의 두뇌 유출이 심각했다. 이중 많은 이들이 베를린을 통해 서방으로 탈출했다. 이에 동독과 소련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특히 1952년 겨울 동독의 식량 부족 사태와 이어지는 1953년 동독 봉기로 동독 인민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소련군의 신속한 투입으로 봉기는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이에 좌절한 지식인을 위시한 동독의 여러 인민들은 동독 체제에 더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서독으로 탈출만이 살 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동독 봉기로 하마터면 권좌에서 쫒겨날 뻔했던 동독의 발터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이후 겉으로는 인민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실시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슈타지의 대대적인 증원을 통한 조밀한 감시망을 구축하며 인민들이 더이상 체제에 반발할 수 없도록 모든 사업장에 철저한 사회감시망을 구축해 갔다. 아울러 울브리히트는 동독 인민들의 서방 탈출로 역할을 하는 주요 거점인 베를린에 장벽을 구축할 것을 소련에 간곡히 요청하였다.

1950년대 후반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베를린 문제는 가장 큰 골치거리였다. 하지만 베를린 국경을 봉쇄하는 것에 대해 흐루쇼프는 크게 주저하고 있었다. 이미 1948년 스탈린이 서베를린을 차지하기 위해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가 미국의 가공할만한 공수능력만을 확인한 채 개망신을 당한 전례가 있었던데다가 상황은 베를린 봉쇄 때보다 더욱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를린 봉쇄 이전까지만 해도 서방에는 반공 정서가 높지 않았고, 영국 노동당 등 서유럽의 좌파 정당들은 소련에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등으로 소련 및 공산세계의 군사적 도발이 현실화된 후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이후 서유럽은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세계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베를린을 봉쇄한다면 미국 등 서방이 포츠담협정 위반이라며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고 이번에는 무력 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 체제가 실패했음을 대놓고 인증하는 셈이라 흐루쇼프는 베를린에 장벽을 세우자는 동독의 거듭된 요청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베를린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흐루쇼프는 마침내 1958년 11월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에게 서베를린에서 철군하라고 최후통첩(베를린 최후통첩, Berlin-Ultimatum)했다. 흐루쇼프는 전후 처리 합의 효력의 무효화를 주장하며, 기존 연합국의 베를린 점령체제(Besatzungsregime)의 종식을 선언하며 서베를린은 마땅히 동독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흐루쇼프는 서방이 철수하지 않으면 서베를린을 완전히 봉쇄하겠다고 통첩했다.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 압박 / 2차 베를린 위기, 1958 ~ ) 하지만 아이젠하워아데나워 등 서방 지도자들은 서베를린을 날로 먹으려는 소련의 뻔한 의도를 당연히 거절했다. 1959년 1월 서방 지도자들은 흐루쇼프의 통첩을 포츠담협정 위반이라며 공식 거부했다. 이후 베를린의 상황은 급격히 경색되었다.

1959년 3월 캠프 데이비드 미소 정상회담에서 베를린 문제가 의제에 올랐지만 미소 양국간의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1959년 여름 제네바에서 전승 4개국과 동서독 정부가 참여하는 국제회의가 열려 베를린 문제 협상을 시도했다. 흐루쇼프는 서방이 서베를린에서 철수하면 소련 역시 베를린에서 철수하여 베를린을 비무장 자유도시로 만들겠다고 제안하며 소련도 뭔가 양보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18] 하지만 서베를린을 동독의 영토로 귀속하겠다는 기본 내용에는 변화가 없었기에 서방은 이를 거부했다.

1960년 동독 정부는 국경군에게 베를린을 포함하여 국경 부근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살상 무기를 동원하여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1961년 1월 20일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자, 흐루쇼프와 동독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는 젊은 케네디[19]를 경험없고 서툰 인물이라고 얕잡아보고 있었다. 동독 정부는 1961년초부터 베를린 장벽 구축에 대한 계획을 비밀리에 세우고 소련의 승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961년 6월 3일~4일 이틀에 걸쳐 오스트리아 에서 미소 정상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후르쇼프와 케네디는 각종 사안에 대해 입장차를 거듭 확인하며 날선 대립을 보였다. 베를린 문제와 관련하여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1961년 12월 31일까지 동독과 협정을 맺고 베를린에서 미소영프 4개국이 동시 철군한다는 내용을 받아들이라는 최후통첩(ultimatum)을 했다. 서방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서방과 서베를린과의 일체의 왕래를 막겠다고 통첩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최후통첩 내용에 찬성할 수 없다면 전쟁을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케네디는 회담 내내 흐푸쇼프가 소련의 통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노련한 흐루쇼프는 전쟁은 할지말지(소련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일지말지)는 미국이 결정할 일이며, 따라서 전쟁이냐 평화냐는 미국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는데, 케네디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1945년 연합국간에 합의된 협정이 모두 효력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빈 미소 정상회담에서 케네디는 흐루쇼프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기만 했다. 결국 빈 정상회담은 공동성명문 조차 없이 끝나며 사실상 결렬되고 말았다. 빈 정상회담은 서방 측에서는 성급함으로 안보 위기를 불러온 외교적 참사로 평가되며, 이후 소련의 베를린 장벽 축조 및 쿠바 미사일 위기를 불러왔다고 평가된다. 케네디는 준비없이 소련 서기장과의 회담을 추진했고, 냉전 완화라는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길 원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회담 직후 케네디 스스로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흐루쇼프는 피그만 사건 때문에 나를 경험도, 배짱도 없다고 생각하고 죽으라고 두들겨 패기만 했다”고 토로했고, 이후에도 케네디는 “흐루쇼프와의 준비 안 된 만남은 재앙과도 같았다”고 후회하면서 이 회담이 소련과의 핵전쟁 위기를 초래했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이처럼 빈 정상회담이 사실상 결렬되자 이후 베를린에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1961년 베를린 위기, Berlin Crisis of 1961, Berlin-Krise)

빈 정상회담에서 흐루쇼프의 강경한 입장을 확인한 케네디는 흐루쇼프가 서베를린을 차지하기 위해 곧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다. 귀국하자마자 케네디는 펜타곤의 군 수뇌부에 소련과 핵전쟁이 벌어졌을 경우 사상자 등 예상 피해 보고서를 올리라고 지시했고, 베를린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트루먼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딘 애치슨을 베를린 태스크포스 단장에 임명했다. 애치슨은 베를린 사태는 미소 초강대국 간 결의의 시험대이며, 핵전쟁까지 불사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빈 정상회담 후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나약해 빠진 인간이라고 확신했다. 흐루쇼프는 베를린 장벽을 구축해도 케네디가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제 소련과 동독은 비밀리에 베를린 장벽 구축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이미 세간에는 동독과 소련이 베를린에 장벽을 쌓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브리히트 서기장을 포함한 동독 고위 인사들은 장벽 설치 직전까지도 베를린 장벽을 세울 계획은 전혀 없다고 부인했으며, 베를린을 자유도시로 만들겠다는 흐루쇼프의 안을 서방이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1961년 7월 25일 케네디는 TV 연설을 통해 소련의 팽창과 군사적 위협을 더이상 좌시하고 앉아 있지는 않겠다고 천명했다. 소련과의 대화는 이어나가겠지만 앞으로는 소련에 일방적을 끌려다니지는 않겠다고 단언했다. 또한 '포츠담 협정'에 따라 서베를린을 지키겠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같은 날 케네디는 의회에 32억 달러의 군비 예산 추가를 요청했다.

1961년 8월 3일 열린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의에서 동독은 동유럽 각 회원국에 베를린 장벽 설치 계획을 비밀리에 알렸다.

1961년 여름 동독이 베를린에 장벽을 세울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 설치 직전 동아일보는 UPI통신 급전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동독 피난민 격증'

서백림(서베를린)으로의 탈출로를 봉쇄하기 위한 철저한 새로운 조치가 취하여질는지 모른다는 우려로 인하여 11일 자유 서백림으로 탈출한 동독인은 2017명으로 8년 래(내)의 신기록을 내었다. (중략)

동·서 경계 요소에 증파된 공산 경찰은 피난민 수백 명을 제지하였으나 도전적이며 결사적인 피난민들을 저지하기에는 무력하였고, 목격자들에 의하면 여러 경관은 탈출자들을 붙들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백림 마린펠데 피난민수용소에 12일 등록된 피난민은 2017명이며 금년 현재까지의 피난민 총수는 15만 명이다. 8월 1일부터 현재까지의 피난민 수는 약 2만 명이다.

1961년 8월 13일 동아일보


1961년 8월 13일 일요일 새벽 야밤에 기습적으로 동독 군대와 경찰이 대규모로 전격 투입되어 서베를린과 동독 사이 국경선을 완전히 봉쇄했다. 날이 밝자 장벽 축조가 시작되었다. 장벽은 서독과 동독의 경계선에서 동독쪽으로 약간 안쪽에 세워졌다. 장벽이 축조되는 동안 동독군 및 동독 노동자 계급 전투단(KdA)이 장벽 앞에서 지키고 있었고, 그들은 탈주자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동독이 야밤에 기습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구축하자 케네디는 전투기 216대를 급파했다. 하지만 더이상의 군사적 대응은 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흐루쇼프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일단 장벽을 쌓는 선에서 그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전쟁보다는 장벽이 낫다”며 베를린 장벽을 용인했다.

서방 여론은 베를린 장벽을 구축한 동독과 소련을 비판했지만, 한편으로 케네디의 무대응에 대해서도 비판이 일었다. 미국와 서유럽 언론들은 포츠담협정 위반에도 미국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다. 언론들은 베를린 장벽 건설은 용인할 수 없는 일, 미국의 패배라고 지적했다. 예상과 달리 여론의 강한 비판에 일자 케네디는 베를린 장벽 설치가 시작된지 이틀 후 미군 1개 여단을 서베를린으로 파병하여 소련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까지 진주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소련 역시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1948년의 베를린 봉쇄와 달리 베를린 장벽을 쌓아 서베를린으로의 인적 이동을 막는 것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케네디의 대응을 본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나약한 인간이라 확신했고, 이후 더욱 강한 도발을 계획했으니 그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서베를린과 서독 시민들, 그리고 사민당을 제외하고 기민당 등 중도 보수 성향정치인들 역시 케네디 정부의 무대응에 가까운 미온한 대처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서독 사람들은 베를린 장벽이 독일의 분단을 공고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라 봤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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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베를린 장벽의 모습

8월 13일 베를린 국경이 전격 봉쇄된 이후 수개월에 걸쳐 장벽이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임시 철조망이 구축되었고, 며칠 후 벽돌과 모르타르를 이용한 벽이 올라갔다. 이후 체계적인 콘크리트 장벽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장벽 뒤의 집들이 모조리 철거되어 감시탑, 전기철조망, 도랑 등의 구조물로 구성된 '죽음의 구역(Todesstreifen)'이 건설되었다.


4. 죽음의 구역 (Todesstreifen, Death zone)[편집]


파일:attachment/베를린 장벽/walllayer.jpg
베를린 장벽의 전반적인 구조. 왼쪽(서베를린 방향) 콘크리트 장벽부터 오른쪽(동베를린 방향) 철조망까지 약 60 ~ 70 미터에 달하는 민간인 통제 군사 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는데, 이를 '죽음의 구역(혹은 죽음의 띠, Todesstreifen, Death zone, Death strip)'이라고 하며, 여기에는 동독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지뢰, 철조망, 도랑, 감시탑 등 각종 장치와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벽은 1961년 8월 13일부터 수개월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이후에도 1980년까지 지속적인 증축, 개량이 이루어졌다. 1961년 8월 13일 야밤에 기습적으로 베를린 전 국경이 동독 군경에 의해 통제되었고, 날이 밝자 철조망이 설치되었다. 며칠 후부터 벽돌과 모르타르를 이용하여 첫 장벽이 구축되었다. 이후 콘크리트 장벽이 올라갔으며 개량을 거쳐 최종적으로 3.6미터 높이, 폭 1.2미터의 견고한 장벽으로 구축되었다.

벽돌 장벽 구축 후 몇 주 후부터 장벽 바로 뒷편 동베를린/동독 영토에는 60m ~ 70m (최소 15m ~ 최대 150m) 폭의 '죽음의 구역'라 불리는 민간인 통제 군사 구역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곳에 장벽을 보조하여 탈주를 막는 철조망, 지뢰, 도랑 등 각종 장치와 구조물이 설치되었다. 이를 건설하기 위해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강제 퇴거, 이주당했고, 해당 지역에 있던 건물을 모두 철거했다. 죽음의 구역 내부에는 동독 국경군 등 군 관계자, 사전에 출입이 허락된 장벽 시설 관리자, 건설자 혹은 수선공만 검문을 받고 들어갈 수 있었다.

죽음의 구역 내에는 감시탑 302개, 20개의 감시벙커, 127km에 이르는 전기 감지장치[20], 124km의 순찰통로, 105km의 차량 방어용 도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벽을 감시하는 국경군 병력은 1,200명에 달했다. 야간에는 30m 간격으로 설치해둔 서치라이트를 켜두었다. 죽음의 구역에는 반드시 지뢰가 1평 당 0~50개 정도 깔려있어 탈출을 막았고, 지뢰 설치 지역마다 조명탄 인계철선이 늘어져 있어 인계철선이 당겨지면 조명탄이 튀어 올라가 그 주위를 밝히게 했다.

그 외에도 죽음의 구역에는 반경 20~30m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수평으로 건너맨 외줄에 목줄을 연결시킨 군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풀숲에 탈주자의 모습이 가려질 까봐 죄다 제초제를 뿌려서 식물 생장을 막아버렸다. 강이나 호수가 있어서 장벽 축조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물속에 가시철망이 촘촘하게 달린 철제 바리케이드를 쫙 깔아놓았고, 모터보트를 타고 수시로 드나들며 감시했다.

나중에 베를린 장벽과 죽음의 구역 아래로 땅굴을 파고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동독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죽음의 구역 아래에 긴 터널을 뚫기도 했다.

장벽의 총 길이는 약 155km로 그 중 도시를 둘로 나누는 장벽, 즉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경계에 세워진 장벽은 약 43km였다. 높이 3.6m의 콘크리트 장벽이 106km 가량 뻗어 있었고, 나머지 49km는 철조망이 3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80년대의 최종 개량형 장벽은 맨 윗동에 둥그런 구조물이 추가되어, 탈출자들이 잡고 넘어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철조망도 윗쪽을 죄다 뾰족한 철침처럼 만들어서 움켜잡았다가는 손에 구멍이 숭숭 나도록 설계했다. 이 장벽은 동독과 각별했던 북키프로스에도 수출되었다.

장벽 자체가 동서베를린 시계나 서베를린과 동독의 경계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장벽은 그 선에서 몇 발짝 동독 쪽으로 움푹 들어간 형태였다. 그래서 간혹 장벽을 개보수 하거나 새로 축조하러 동독국경군과 근로자들이 장벽을 넘어오기도 했다. 물론 이런 작업 때는 항상 다른 국경군이 따라붙어 감시했고, 작업 전에 우선 진짜 경계선을 따라 자신들을 둘러쌀 임시 바리케이드를 가설해야 했다.

장벽 건설에 사용되는 비용은 1970년까지 1억 동독 마르크 정도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5. 즉각사살 명령 (Schiessbefehl)[편집]


베를린 장벽에는 동독 국경군(Grenztruppen)이 배치되었다.[21] 동독 국경군은 동독의 전 국경에 배치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베를린 장벽에 배치되는 부대는 정예 부대였다. 소련과 그 위성국가에는 육해공군 이외에 국경군이 존재했으며, 체제 유지를 위해 국경군의 중요성이 막강했다. 특히 자본주의 서독과 맞닿아 있는 동독은 국경군이 육해공 이상으로 중요했다. 때문에 국경군은 매우 대우가 좋았고, 제대 후에도 국경군 출신들에게는 취업과 대학 진학 등에서 특혜를 줄 정도의 엘리트 부대였다. 동독 국경군은 본인과 친척에 대한 엄격한 출신 성분 조사 및 철저한 사상 검증 후 선발되었다. 동독 국경군은 사격, 추적, 수색 등 국경을 넘어 탈주하는 사람들을 색출, 처단하기 위한 각종 훈련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국경을 넘는 이들에 대해 가차없이 사살할 수 있도록 철저한 정신교육을 반복적으로 받았다.

동독 국경군의 주 임무는 국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도망가는 자국 국민들을 막는 것이었다. 반역자(국경을 넘는 자)에 대해서는 발견되는 대로 상부 명령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즉각 사살하라는 명령(Schiessbefehl)이 내려졌다. 이는 동독 전 국경에 하달된 명령이지만, 넓은 민간인 통제구역이 설정된 일반 국경과 달리 불과 수십미터의 죽음의 구역이 존재하며, 서베를린의 건물에서 바로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베를린 장벽에서 보다 극적인 사살 장면이 목격되곤 했다. 1982년 동독은 국경에서의 즉각사살 명령(Schiessbefehl)을 법제화했다.

동독 국경군 병사가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3인 1조로 근무하도록 했다. 2인 1조로 배치해도 그 둘이 서로 마음이 맞을까봐 두려워 3인 1조 근무를 기본으로 편성했다. 또 미리 탈출 계획을 세울 수 없도록 수시로 근무 시간이 변경되었다. 또 수많은 슈타지 요원들이 동독 국경군의 복장을 하고 위장 잠입하여 병사들이 서독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베를린 장벽에서 근무한 동독 국경군 중에서 사망자가 다수 있었다는 사실이 독일 통일 후에 밝혀졌다. 근무 중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다른 동료에게 발각되어 사살당한 경우,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는 동독인들에게 살해당한 경우, 복무 중 스트레스로 자살한 경우 등이 있다고 한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사살된 인원은 136~245명으로 알려져 있다.[22] 베를린 장벽 사망자 명단. 기록되지 않은 사망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베를린 장벽을 제외한 동서독 국경에서 탈출하려다가 사살된 사람도 1000명이 넘었다.[23] 사살은 면하였으나, 서독으로 탈출 시도 혐의로 동독에서 처벌받은 사람은 6만명에 달하며, 평균 4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서 죽음의 구역을 가로질러 베를린 장벽을 탈출하려는 동독인들을 동독 국경군이 일제사격으로 무차별 사살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심지어 분단 말기에는 장벽 위에 매달려서 탈출하려는 사람에게 동독 국경경비대가 총을 난사해서 장벽 위에 죽은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이게 동독 구역인지 서독 구역인지 애매해서 수습도 못한 채 한동안 사체가 방치되었던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 공식적으로 확인된,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은 최초 사망자는 이다 지크만(Ida Siekmann)이라는 58살(1902년 출생)의 여성이다. 그녀는 아래에 서술된 창문에서 뛰어내려 탈출이 가능한 베르나워슈트라세 대로 48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8월 13일 동독 당국이 기습적으로 베를린 국경을 통제하고 장벽 건설을 시작하자 대로변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대로쪽 문을 통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였다. 이에 동독 당국은 8월 18일부터 대로쪽으로 난 모든 건물의 문과 창문을 벽돌로 틀어막기 시작했고, 8월 21일에는 그녀가 거주하던 48번지 역시 문과 창문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다음날인 8월 22일 아침 탈출을 위해 거주하던 건물 4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는데 안타깝게도 소방관들이 점핑 시트로 제대로 받아내기 전에 도로변에 떨어지는 바람에 중상을 입었고 결국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녀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다 목숨을 잃은 날이 그녀의 59세 생일 불과 하루 전 날이란 것이었다.

  • 베를린 장벽에서 사살된 여러 케이스 중에서 1962년 8월 17일 발생한 페터 페히터(Peter Fechter, 당시 18세, 벽돌공) 사살 사건은 당시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페히터의 누나는 결혼하여 서베를린에 살고 있었으나 베를린 장벽이 생기면서 그의 가족과 누나와 왕래가 끊기게 되었다. 페히터는 친구 쿨바이크와 함께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꿈꿔왔다. 페히터는 베를린 장벽을 쌓고 보수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장벽 구조물과 지형에 익숙했다. 둘은 마침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대낮에 베를린의 번화가였던 체크 포인트 찰리 인근 베를린 장벽에서 페히터는 친구와 함께 죽음의 구역을 지나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고 시도했다. 쿨바이크는 담을 넘는데 성공했지만, 페히터는 담을 넘는 도중 동독군의 일제 사격을 받고 결국 담장을 넘지 못하고 죽음의 구역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여러 발의 총알 세례를 받은 그는 쓰러져 비명을 질렀으나 그 자리에 방치되었다. 당시 수백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이 목격하고 있는 가운데 그는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갔다. 서독군이 붕대를 던져주었으나 그에게 닿지 못했다. 결국 약 40분 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이후 동독군이 죽음의 구역으로 나와 그의 시체를 가지고 갔다. 충격을 받은 서베를린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 앞에서 '살인자'를 외치며 동독을 규탄했다. 이 사건 이후 동독 당국은 탈주자들을 사살한 직후 곧바로 시신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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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희생자는 크리스 귀프로이라는 남성으로 20살의 나이(1968년생)에 1989년 2월 6일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총에 맞았다. 장벽이 붕괴하기 불과 9달 전이었다.[24] 묘비명은 "Opfer der Honecker Diktatur"(호네커 독재의 희생자). 같이 넘던 친구는 살아남았으나 동독 법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 해 9월 풀려났다. 독일 통일 이후 그를 쏴죽인 국경군 군인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으며, 아래 법적 심판 항목에 관련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6. 각종 탈출 시도[편집]




동독은 국경을 넘어 탈출하려는 자를 발견하면 명령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즉각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렸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의 목숨을 건 탈출은 이어졌다.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1989년 가을까지 약 5,000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장벽 돌파 방법도 웬만한 첩보 영화 뺨칠 정도로 가지각색이었는데,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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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를린 장벽 축조 결정이 내려진 뒤 최초의 탈출자로 기록된 인물은 사진의 콘라트 슈만 동독 국경군 하사다. 그가 베를린 장벽을 넘은 날짜는 1961년 8월 15일이며,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기 시작한지 이틀이 지난 시점으로 이때까지는 철조망만 놓여 있는 상황이었다. 슈만은 사전에 서독 경찰과 장벽을 탈출하기로 합의하였고, 장벽을 만들 자리에 임시로 설치된 철조망 앞에서 경비를 핑계로 어슬렁대고 있었다. 서독 경찰이 "Komm darüber!"(이쪽으로 넘어와!) 라고 외치자 그는 재빠르게 철조망을 넘어가 서독 경찰이 준비한 차량에 탑승하여 탈출하였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이후 서독에 정착하게 되었고 바이에른에 거주하며 잉골슈타트의 아우디 공장에서 설비 관리자로 일하였다. 사진이 상당히 극적으로 촬영되었고, 또 첫 탈출자가 동독 공권력의 일원인 경찰이었다는 점에서 자유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탈출 장면과 탈출 후의 기자회견 영상. 하지만 하지만 이 기록 때문에 슈만은 동독에서 거물급 반역자로 낙인찍혔고, 슈타지가 자신을 암살하러 올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며 살아야만 했다. 통일 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동독에서 반역자 가족으로 낙인 찍혀 고생한 가족과 친척들의 냉대와 서먹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통일 후에도 그는 자신의 탈출 때문에 잘리거나 고초를 겪은 전직 동독 국경군[25] 대원이 복수하러 올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겹쳐 우울장애에 시달리다가 1998년 56세의 나이로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다.

  • 서베를린령 베딩(Wedding)과 동베를린령 미테(Mitte)의 경계를 이루는 대로인 베르나워슈트라세(Bernauer Straße)의 경우 도로 북쪽은 서베를린령 베딩, 도로 남쪽이 동베를린령 미테였다. 그런데 베르나워슈트라세 대로 자체는 베딩에 속했기 때문에 대로변에 위치한 동베를린 건물에서 도로로 무사히 뛰어내리기만 하면 서베를린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장벽 건설 발표 직후 며칠 동안 대로변 건물들에 거주하던 많은 주민들이 건물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형식으로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동독 당국은 주민들을 건물에서 모조리 퇴거시킨 후 대로 쪽으로 난 창문과 문을 모조리 벽돌과 시멘트로 틀어막았다.

  • 초기 장벽은 벽돌을 여러 장 쌓아올려 모르타르로 고정한 형태였고, 이 점을 노려 대형 버스트럭, 심지어 동독 육군에서 훔쳐온 전차 같이 육중한 차량을 몰고 벽을 들이받아 돌파하는 식으로 탈출한 사례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서베를린 사이의 도로 흔적이 남은 구간에서는 경비가 삼엄해졌고, 장벽도 벽돌보다 훨씬 견고한 철근 콘크리트 벽체로 개량되었다.

  • 점령군 병력 이동을 위해 장벽 사이사이에 설치한 몇 안 되는 검문소를 돌파해 탈출한 이들도 있다. 차단봉 밑을 지나가기 위해 보닛이며 유리창을 싹 뜯어버린 차를 몰고 목숨을 건 곡예운전을 해서 서베를린에 도착한다는 계획이었는데, 2차례 성공했다.

  • 소련 육군 장교 군복을 DIY 제작으로 코스프레해서 네 명이 탈출한 사례도 있다. 남성 세 명은 승용차를 타고 장교 행세를 하면서 유창한 러시아어로 검문소의 국경군들을 물먹였으며, 나머지 한 명은 그 옷을 만들어 준 여성인데 그 차의 트렁크에 숨어서 무사히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 차량을 이용한 탈출 사례가 늘자 군용이고 민수용이고 가리지 않고 철저한 검문 검색이 행해졌는데, 2인승 초소형 경차의 경우 이렇다할 적재공간이 없기 때문에 비교적 느슨한 수색만을 받고 통과하고는 했다. 이에 착안해 차대를 최대한 쥐어짜 1사람이 가까스로 숨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개조된 차량 1대가 탈출용으로 이용된 사례가 있다. 여러 차례 성공했으나, 한 노인을 탈출시키던 시도 중 검문 과정에서 기침을 참지 못해 차가 요동치게 되었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국경군에 의해 발각되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인적이 드문 한밤 중에 장벽과 가까운 편인 고층 건물에서 밧줄에 옭아맨 무거운 추를 장벽 너머에 던져놓고, 줄에 매어 놓은 리프트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탈출한 유격을 방불케 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장벽과 가까이 있거나 무인지대에 있던 건물들은 가능한 한 철거 혹은 폭파되었고, 장벽의 높이도 계속 높아지게 됐다.

  • 대형 트럭에 싣고 다니는 커다란 드럼케이블의 나무통 속을 이용해 1통 당 4명씩 들어가 탈출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세 번째 탈출 시도 때 수상하게 여긴 국경경비대원이 나무판자를 뜯어내 탈출 기도자를 찾아내면서 덜미가 잡혔다.

  • 장벽 밑에 땅굴을 파고 탈출한 사례도 상당수 있다. 일례로 위의 베르나워슈트라세에서 있었던 일인데 대로변 근처에 위치한 어느 가정집의 화장실 변기를 뜯어내고 저수조를 우회해 장벽 너머 145m 떨어진 서베를린의 빵집까지 땅굴을 팠고, 이 땅굴로 57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서베를린의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탈출 협조단도 지질학과 학생까지 동원해 정교한 땅굴을 파내려 갔고, 동베를린에 심어둔 비선 조직과 연계해 탈출자들을 서베를린으로 인솔했다. 다만 이 방법도 훗날 꼬리가 밟혀서, 탈출을 위해 땅굴을 파내려가다가 동독 국경경비대에 덜미를 잡힌 이들도 많았다. 발견된 땅굴에도 탈출 시도가 불가능하도록 최루탄 가스수류탄 세례가 퍼부어졌고, 이후 모두 메워졌다. 급기야 이것 때문에 동독 국경경비대는 지하에 터널을 파서 순찰을 했다.

  • 소련기 도장을 한 초소형 항공기를 이용한 월경시도도 있었다. 동독 공군 방공포병들에게 발각되기는 했지만, 이들이 격추를 망설이던 사이 무사히 월경에 성공했다.

  • 의외로 대형 공업기계류에 숨어서 탈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물론 국경경비대원들도 이런 대형 기계류는 가능한 선에서 뜯어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나 이중공간을 만들어 국경경비대원들의 눈을 속이고 무사 탈출했다.

  • 승용차에 철판을 덧댄 자작 장갑차를 몰고 검문소를 강행돌파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결국 운전자가 앞유리쪽 방탄판을 관통한 총알에 맞아 사망하면서 실패했다.

  • 서독 출신의 남자가 동독에 사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탈출시키기 위해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매번 동독과 서독을 오갈 때 학자마냥 항상 큰 가방에 을 가득 넣고 다녔다. 동독 국경경비대원들은 이것을 보고 매번 수상히 여겨 그가 국경을 오갈 때마다 철저하게 검문했지만, 항상 가방 안에는 책만 잔뜩 있었기 때문에 매번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국경경비대원들이 그를 기억하고 '또 저 양반이네…'하는 식으로 그를 그냥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동독을 방문하고 서독으로 갈 때도 동독 국경경비대원들은 조사를 대충 하고 그냥 보내주었는데, 그 때 그 서독 남자의 가방 속에는 책이 아닌 자신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비밀탈출통로를 첫 공개하였다. #


7. 붕괴 과정과 이후[편집]


1989년 9월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월요 시위가 기폭제가 되어 동독 전역으로 민주화 시위가 번진다. 이 여파로 발생한 에리히 호네커의 실각을 전후로 동독 사람들은 언론 자유화, 여행 개방을 주제로 매주마다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동독 지도부는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불간섭 정책은 확고했고, 그쪽도 그쪽대로 급한 상황이라 결국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여행자유화 정책을 1989년 11월 9일 오후 6시 58분 경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다.

물론 일종의 회유책으로 나온 정책이었으니 만큼 일단 동서독 국경을 통한 입출국 허용 및 행정 절차 간소화, 여권발급기간 단축 등이 발표되었으나 실제론 여권발급기간 단축 외엔 별로 달라졌다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심지어 이 개정안조차 형식적인 의미가 강해서 회견장에 모인 외신기자들은 이때까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형식적인 기자회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이탈리아 ANSA 통신의 동베를린 주재기자인 리카르도 에르만(Riccardo Ehrman)이 "이 조치가 언제부터 시행되냐?"는 질문을 했고, 동독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별 생각없이 지체 없이, 즉시.(Sofort, unverzüglich.)라고 대답하는 치명적인 말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샤보프스키가 본 회견 중 읽었던 자료에는 다음 날인 11월 10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라고 정상적으로 적혀있었고, 기자회견 시간이 11월 9일 오후 7시였으니 엄밀히 따지면 어느 정도는 맞게 설명한 것이다.[26] 그러나 이 답변을 들은 에르만은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로마 ANSA 통신 본부에 급하게 전화를 걸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라고 전했고[27], 이렇게 생겨난 이탈리아발 오보는 전 세계 언론으로 퍼지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트위터는 고사하고 인터넷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라 교차검증이 매우 어려웠고, 통신사는 자사 특파원이 긴급하게 전한 바를 실은 것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원래 출국비자 발급은 이튿날부터 발효될 예정이었고, 이를 받기 위해서는 관련 기관에 신청하고 승인을 받는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으나 리카르도 에르만의 질문 한 개[28]와 샤보프스키의 의도치 않은 말실수가 독일 역사를 뒤바꾼 것이다.

다만 리카르도 에르만의 오보 때문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고, 오히려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서독의 뉴스 프로그램이던 타게스샤우이다. 장벽 붕괴 당일(11월 9일)자 타게스샤우의 첫번째 헤드라인이 "동독 국경 개방 (DDR öffnet Grenze)"[29]이었는데,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가 당일 있었던 기자회견에 대해 보도하며 국경 개방 조치가 지금 즉시 시행된다는 점을 전달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동독 시민들은 서독의 텔레비전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는데[30], 특히 뉴스에 관해서는 모두가 동독의 프로그램 "악투엘 카메라"가 아닌 타게스샤우를 시청할 정도로 방송의 신뢰도가 높았고 거기다 동독 관련 소식을 자국 언론들보다 더 객관적으로 전달한다는 이미지도 있었다. 이런 방송에서 동독 정부가 국경을 완전개방한다고 하니, 동독 시민들 입장에서는 기다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 뉴스를 시청한 동독 시민들이 이 소식을 믿고 하나둘씩 베를린 장벽상에 위치해 있던 국경검문소로 몰려들었고 이내 순식간에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당연히 동독 국경수비대원들과 세관원들이 막으려고 했지만, 어마어마한 인파가 계속 밀려와서 상황 통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국경경비대원들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는데 상부에서 국경 개방과 관련된 어떠한 전파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서독으로 출국하겠다고 몰려든 것이다. 결국 다구리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이미 이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든 이상 동독 국경수비대원들은 얌전히 물러나서 국경을 열어주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차단봉이 열리고, 동독 사람들이 마침내 파도처럼 국경을 넘자 동서독 양쪽 시민들은 공구를 가지고 와서 장벽을 개박살내기 시작했고 벽을 빨리 부수기 위해 양쪽에서 오함마, 드릴, 심지어 불도저크레인까지 끌고 나왔다.[31]


1989년 11월 9일 당시 동독 DFF의 Aktuelle Kamera 보도

1989년 11월 9일 당시 ARDTagesschau 보도

1989년 11월 9일 당시 ZDFHeute-Journal 보도[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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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해체 소식을 듣게 된 서방의 여러 예술인들도 베를린으로 와서 특별 콘서트를 여는 등, 연말까지 축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심지어 마지막 사진처럼, 동독 국경경비대원들조차 서독 경찰의 환영을 받으며 장벽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이때의 상황을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에피소드로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는데, 김정운 교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서베를린 동독 난민 수용소 경비실에서 경비원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베를린 시민들이 난민 수용소에 갇힌 가족들을 보러 오느라 몰려들어 이들을 저지하고 수용소 열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대치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989년 12월 31일 신년 전야의 모습
그렇게 대다수의 동서독인들은 이곳에서 1990년 새해를 맞이했다.

미국의 가수 데이비드 해셀호프(David Hasselhoff)의 축하공연
노래는 Looking For Freedom

다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는데,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 같은 인사들은 장벽 붕괴가 곧 통일의 시발점이고 이는 유럽의 균형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독일이 통일되면 다시 강대국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란 두려움은 만성적인 것이었고, 실제로 당시엔 그럴만도 했다. 독일 내에서도 아직 통일에 대한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장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다고 느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우려와 상관 없이 장벽의 해체는 계속되었고, 1990년 10월 통일이 공식 선언된 이후에도 계속 장벽과 제반 시설물에 대한 철거, 끊긴 도로와 철도의 복구가 계속되었다. 이 작업을 위해 3년 동안 1억 마르크의 예산과 400여 명의 해체 전문가가 투입되었고, 철거 과정에서 제거된 흙과 시멘트만 해도 무려 75만 톤에 달했다.

장벽 제거, 통일 논의와 더불어 그동안 베를린을 분할 관리해온 미군영국군, 프랑스군, 소련군(이후 러시아군)도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시의 경계 업무를 독일 측에 완전히 인계했다. 훗날 당시 오보 기사를 만들어낸 리카르도 에르만은 2008년 독일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수여받기도 했다.

2000년대에 가서는 기존 장벽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없어졌는데, 다만 일부 구간에는 분단 당시의 상황을 후대들에게 재교육하기 위해 그대로 남겨놓은 곳도 있다. 대표적인 구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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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 - 프리드리히스하인 구역의 뮬렌슈트라세에 있는 장벽 존치 공간으로, 약 1.3km 구간의 장벽이 보존되어 있다. 갤러리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분단 시절 자주 낙서와 그래피티 대상이 되었던 장벽을 여러 현대미술가들의 캔버스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2013년 3월 일부분이 헐리고 말았다. 아래를 참고하면 된다. 도심에서 살짝 동쪽으로 벗어난 곳이고 베를린 동역이 코앞에 있다. 거리가 길어서 사람은 의외로 많이 없지만 사회주의 형제의 키스 그림[33] 앞만큼은 사람이 꽤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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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러의 지형(Topographie des Terrors) -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의 니더키르히너슈트라세에 있는 존치 공간인데, 예전에 나치 친위대 산하의 악명높은 비밀경찰 조직이었던 게슈타포 본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통일 후 이들이 벌여놓았던 참상과 잔악함을 후손들에게 교육시키기 위해 박물관이 조성되었고, 본부 바로 옆에 있었던 약 80m 가량의 장벽도 허물지 않고 남겨두어 전시 공간으로 쓰고 있다. 가장 포토존과 거리가 먼 곳이다. 테러의 지형 자체도 포츠담 광장과의 거리도 가깝고 입장료도 무료이며 전시물도 상당히 알차다. 다만 악행을 여과없이 보여주다 보니 참수 장면 등이 사진 그대로 나오는 등 상당히 수위가 높은 전시물이 많다. 여담으로 사진에서 보이는 박물관쪽이 서베를린, 박물관 반대쪽이 동베를린이었는데, 통일되기 전 동베를린 시절 관청 건물로 쓰였던 데틀레프-로베더 하우스(뒤의 거대한 E자형 건물) 빌딩 옥상에서 서베를린 쪽으로 대각선으로 밧줄을 이은 후 레펠로 탈출에 성공한 일가족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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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당시 체크 포인트 찰리
현재 체크 포인트 찰리

  • 체크 포인트 찰리와 포츠담 광장 사잇길 - 검문소를 철거하고 광장을 현대적인 재건축하기 위해 이 구간도 원래 헐릴 예정이었지만, 분단 시대 가장 유명했던 장소이기도 했으니 역사 유산으로 남겨놓자는 여론을 받아들여 존치시키고 있다. 제 2차 베를린 위기 당시 미 육군과 소련 육군 전차가 대치한 곳 이기도 하다. 원래 검문소 앞에서 냉전 당시 미 육군 헌병 복장을 하고 있는 연기자들이 있었다. 보통 2유로 정도를 주면 같이 사진을 찍어주곤 했는데, 문제는 이들이 행위가 관청의 허가 없는 불법한 영리 행위였다는 것이다. 당국에선 한동안 예술가들의 부업거리 정도로 보고 묵인해주다가, 아예 관광객들을 위협하며 사진 찍기를 강요하는 등 도를 넘는 행위를 하자 2019년부터 이들의 영업 행위를 단속해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 포츠담 광장 - 위 세 군데처럼 큰 규모로 보존되어 있지는 않으며, 서너 개의 장벽 구조물을 장벽이 있던 자리를 따라 세워놓은 정도다. 거의 관광객용 포토존 급. 진지하게 장벽을 구경하고 싶다면 이쪽은 피하자. 어차피 포토존 아닌 곳을 찾기 힘들지만 여기 있는 장벽은 사실상 장벽이 '있었다' 정도의 설명을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다. 게다가 장벽에는 씹던 껌까지 붙여져 있다.

이외에 철거된 구간들에서 장벽이 서 있던 곳을 표시하기 위해 도로에 박아놓은 표석이나 기념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포츠담 광장이나 일부 기념되는 장소는 장벽 라인이 있다. 철거 후 남은 잔해 장벽들은 전세계에 보내져 전시되고 있으며, 일부는 대한민국에도 보존되어 있다.

2009년 11월 9일에는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베를린에서 대대적인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부터 약 1,000여 개의 스티로폼 장벽들로 도미노를 쌓고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 월경을 허가한 바로 그 시각에 밀어서 넘어뜨리는 퍼포먼스가 열렸다. 이 행사는 ZDF 같은 방송국들에서 실황으로 중계되었다. 영상

동시에 아직도 분단 상황에 놓여 있는 한국 예술인들을 초청해 장벽과 분단을 주제로 한 예술품을 전시하는 행사도 열렸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때문에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축조된 장벽의 철폐를 요구하는 평화운동가들의 집회도 개최되었다. 인터넷 상에서도 장벽 철폐 = 규제 철폐라는 은유로 중국 같이 인터넷 접속을 제한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넷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이 때의 영향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베를린 장벽에 "조국은 하나"라고 한글로 써 놓은 것이 찍힌 사진이 존재한다.

장벽 해체 이후 남은 몇몇 조각들은 관광객들이나 수집가들을 상대로 판매한다는 모양. 월드 인 컨플릭트 한정판에도 장벽 조각이 들어 있다. # 가끔 몇몇 사기꾼들은 여행객들을 상대로 의미없는 돌덩이를 '베를린 장벽 조각'이라고 파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일부 기념품점에서 5~10유로로 작은 돌조각을 살 수 있다. 베를린 장벽 그림의 엽서의 일부로 플라스틱 구에 들어있는데 매우 그럴듯하다.

2013년 3월 27일 이스트사이드에 남은 장벽이 새벽에 기습적인 철거로 무너졌다. 고급 아파트먼트 단지를 위한 도로를 내고자 이뤄진 것인데 장본인인 건설업체 대표는 도로공사가 끝나면 복원하겠다고 하여 욕먹고 있다.


8. 민간인 사살 사법 심판[편집]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베를린 장벽에서 민간인을 사살한 혐의로 구동독 관료 및 군인 약 300여명에 대한 재판이 10여년간 진행되었다. 베를린 장벽 이외에도 동서독 국경을 탈출하려다가 사살된 사람들에 대한 재판도 해당 관할지역 법정에서 행해졌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동독 정부는 국경을 넘는 자에게 명령없이 각종 화기를 동원하여 즉각사살하라고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국경을 탈출하려는 사람을 사살한 것은 동독 내에서는 법적으로 무죄일 뿐만아니라 탈출을 시도한 민간인을 사살한 동독 국경군 병사들에게는 포상이 주어졌다.

통일 이후 베를린 정부가 베를린 장벽에서의 민간인 사살 행위에 대한 기소를 행하자, 구동독의 법률, 나아가 구동독이란 국가를 어떻게 봐야하는가의 문제로 검찰, 변호인은 물론 법률학자 사이에서도 법리논쟁이 일어났다.

베를린 장벽 사살과 관련된 최초의 재판은 1991년 9월에 시작되었다. 베를린 장벽에서 마지막으로 사살된 크리스 귀프로이를 사살한 군인들에 대한 재판이었다. 이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테오도어 자이들은 동독 사람들의 탈출을 돕던 기관 출신이었다. 피고의 변호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구동독법에 따르면 무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장 자이들은 동독은 무법적인 반인권 독재국가였으며, 보편 인륜이 무법국가의 부당한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논리로 사살의 책임을 물어 장교 잉고 H(가명)에게 3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했고, 같이 기소된 동독 국경군 소속 병사 3명에 대해서는 "상부의 명령을 피할 수 없었다"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항소심에서 잉고 H(가명)는 2년형으로 감형되어 형기를 채우고 나왔다. 그러나 학계에서 어쨌거나 구동독도 주권 국가였고, 자이들의 논리는 무리수라는 비판이 가해졌다. 이후 재판에서는 동독 시절의 군인들을 처벌할 때 이들이 1982년 동독 국경법을 어겼는지에 집중하여 재판을 행했다.

이에 따라 이후 재판에서는 사살을 실행한 사병 및 초급 장교들에게 대해서는 상부의 명령을 피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대부분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무죄 판결을 내리더라도 민간인을 사살한 군인들을 찾아내 법정에 세우는 수고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장 최근에 사살된 사건부터 시작했지만, 오래전에 사살된 사건까지 끄집어 내어 법정에 세웠다. 특히 1962년 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참하게 사살되어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던 동독 청년 페터 페히터(Peter Fechter, 당시 18세, 벽돌공) 사살 사건도 한 방송작가가 5년이 넘게 동독 자료를 파해친 끝에 그를 사살했던 2명의 전직 동독군 병사를 찾아내었고 1997년 당시 50, 60대였던 그들은 법정에 세워졌다. 다른 병사들과 달리 그들은 1년여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페터 페히터가 총상을 당해 죽음의 구역에 쓰러져 있었으나 한 시간 동안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인권적인 명령과 법을 지시한 동독 최고위 권력자들도 기소되었다. 동독의 최고 권력자 에리히 호네커를 필두로 동독 수뇌부들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힘없고 이름없는 병사들의 재판과 달리 공산권에서 소련중국 다음 가는 국력을 가졌던 동독 지도자들의 재판에서는 이들을 비호하는 목소리가 훨씬 커졌다. 냉전이 끝났다고 하지만 아직 중국, 북한, 쿠바 등이 건재했고,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더라도 전세계에는 많은 사회주의 지지자들이 있었다. 피고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이는 정치적 재판, 승자의 재판, 보복 재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좌파의 정치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일 법정은 명령을 피할 수 없는 병사들과 달리 반인권적인 민간인 사살을 계획하고 지시한 최고 지도자들은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동독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에리히 호네커의 재판은 옹호 세력의 엄청난 반발에 휩싸였다. 결국 그의 악화된 건강을 이유로 1993년 1월 12일 베를린 헙법고등법원은 재판 중지를 선언했다. 에리히 호네커는 병 보석으로 풀려났고, 곧바로 칠레로 망명했다.

숱한 진통 속에서 재판이 지연되었지만 근성의 독일 법정은 재판을 이어갔다. 동독의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에곤 크렌츠가 징역 6년 6개월, 하인츠 케슬러 전 국방장관이 징역 7년 6개월, 클라우스-디터 바움가르텐 전 국방차관이 징역 6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또 관련된 동독군 고위 장성들도 처벌을 받았다. 상당수는 형을 살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9. 기타[편집]



  • 동독이랑 각별했던 북키프로스 정부도 북니코시아와 남니코시아 사이에 베를린 장벽 축소판인 장벽을 세웠지만 2008년 이후 국경 개방 이후 무너뜨렸다.

  • 장벽이 무너질 당시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는 방한 중이었다.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와의 면담 도중, 독일의 통일이 언제쯤 이뤄질 것 같냐는 질문에 먼 훗날이라고 대답했더니 바로 장벽이 무너졌다는 급보가 날라와서 부랴부랴 귀국했다고.

  • 차범근이 선수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날이 이 날이었다. 아무래도 한국도 분단 상태이니만큼 프라임타임 뉴스에도 주요기사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내용을 다뤘던지라 차범근의 귀국 소식이 3번째 정도로 중요한 꼭지로 다뤄졌다.



  • 희한하게도 '베를린 장벽'이라는 게임도 만들어졌다. 갈스패닉 시리즈로 유명한 카네코에서 독일이 통일되자마자 바로 만들기 시작해서 1991년 1월에 출시했는데#, 유치원생 같은 옷을 입은 주인공이 바닥을 주먹으로 깬 다음 거기에 적이 끼이면 주먹으로 때려 다져서 죽이는 게임이다. A 버튼은 땅을 깨는 주먹, B 버튼은 깨진 땅을 발로 다져서 원래대로 만드는 버튼이다. 텀블팝이나 스노우 브라더스와 비슷한 게임이다. 적들도 무슨 고슴도치 같은 적들이 나오는데 베를린 장벽과의 연관성이라고는 이 게임의 배경을 독일이 통일할 때 찍은 사진으로 썼다는 것 하나 뿐이다. 교도통신과 일본의 '세계문화포토'라는 포토에이전시의 허가를 받고 해당 언론사들이 취재한 사진들을 정식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타이틀 화면 아래에 있는 저작권 표기에 이 두 업체가 표기되어 있다.

  • 스페인의 가수 라 오레하 데 반 고흐의 음반 Cometas por el cielo[34] 에 있는 수록곡 중 Dia Cero는 바로 베를린 장벽의 슬픔을 나타내는 노래다. 물론 뮤직비디오는 아르헨티나에서 촬영했다.


  •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도이칠란트편[35]을 보면 구판에서는 "도이칠란트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하는 여러 가지 키워드 중 "베를린 장벽" 이라고 답하는 컷이 있었다. 그리고 1990년 이후 나온 개정판에서는 이 대사가 "통일!"로 바뀌었다.

  • ZDF의 대체역사 페이크 다큐멘터리 《제 3차 세계대전》(1998, die dritte weltkrieg)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가 다르게 진행된다. 동독 시민들의 월경을 막기 위해 군부대가 배치되고[36][37], 서독 주민들이 국경을 침범해 베를린 장벽을 점거하고 동독 주민들을 탈출시키자, 동독 국경군이 양국 주민들을 총격으로 진압한다. 특히 압권인건 동독 주민들을 쫓아낸 직후 국경군 두명이 일사분란하게 사다리를 놓고, 다른 국경군 한명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베를린 장벽 너머로 총기를 난사한다. 다음날 TV 뉴스 화면에선 중무장한 동독군이 장벽 위에 빼곡히 올라서고 있다. 이 일로 냉전이 격화되고 베를린 봉쇄가 다시 실시된다.

9.1. 대한민국에 보존중인 베를린 장벽[편집]


베를린 장벽의 철거 이후 장벽의 일부가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가거나 기증되었는데, 한국에도 베를린 장벽의 실물을 볼 수 있다. 서울, 의정부, 대전, 제주에 보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3 대전 엑스포를 맞이하여 베를린 장벽이 대전광역시에 들어왔는데, 당시 독일관 앞에 전시되어 있었고, 엑스포 폐막 이후 대전에 기증되어 현재 대전엑스포공원 내 대전엑스포 기념관 외부에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2020년 기준 그래피티 범죄자들로 인해 서울에 있는 장벽보다 더 큰 피해를 받아서 심각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

2005년에는 청계천 복원을 기념하여 우리은행의 자금 지원과 베를린 시의 기증으로 서울특별시 청계2가 사거리의 장교빌딩과 한화빌딩 맞은편에 조성된 '베를린 광장'에 설치되었는데 베를린 장벽의 실물 3개와 100년이 넘은 독일 가로등, 베를린의 상징인 곰 조형물 등을 볼 수 있다.

2007년에는 제주도가 베를린 시로부터 장벽 2개와 철조망을 기증받아 제주4.3평화공원 구내에 설치하였다.

2014년에는 의정부시의정부역 앞의 평화통일공원을 건설하면서 베를린 시와 민간회사의 기증으로 베를린 장벽의 실물 4개와 브란덴부르크 문 축소모형을 설치했다.

장벽 전체는 아니지만, 거기서 떼어낸 파편 두 개도 국립중앙도서관에 상주하는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장벽 구조물 일부를 활용한 조형물이 1993년 건국대학교 상허기념도서관 앞에 설치되었다.


9.1.1. 2018년 서울 베를린 장벽 훼손 사건[편집]




10. 관련 어록[편집]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38]

)’였습니다. 오늘날, 자유 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제1세계제2세계 간의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또는 모르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Let them come to Berlin). 공산주의가 미래의 흐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공산주의자와 함께 나아갈 수 있다고 유럽과 일부 지역에서 말합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심지어 공산주의는 나쁜 제도이지만 경제 발전의 기회를 준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민주주의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완벽하지도 않지만, 우리는 결코 국민을 가두려고 또는 국민이 우리로부터 떠나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벽을 쌓은 적은 없었습니다. 미국 국민은 비록 옆에는 없었지만 지난 18년의 역사를 여러분과 함께 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대서양 건너 수 만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민을 대신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8년 간 포위 당하고도 서베를린처럼 희망과 결의가 활기 있게 살아있는 도시는 아직 없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야말로 공산주의의 좌절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가장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시장님 말씀처럼 가족을 뿔뿔이 흩어 놓고,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를 갈라 놓고, 함께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떼어 놓는 것은 역사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든 간에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이 말을 자랑스럽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1963년 6월 26일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연설 중에서


"General Secretary Gorbachev, if you seek peace, if you seek prosperity for the Soviet Union and Eastern Europe, if you seek liberalization: Come here to this gate! Mr. Gorbachev, Open this gate!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고르바초프 서기장! 평화를 원한다면, 소련동유럽의 번영을 원한다면, 자유화를 원한다면, 이 문으로 오시오! 고르바초프 씨, 이 문을 여시오! 고르바초프 씨, 이 장벽을 허무시오![39]

"

1987년 6월 12일,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40]

연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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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흐루쇼프는 1958년 서방에 통첩을 날렸으나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 아데나워 서독 총리 등 서방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1961년 미국에서 정권이 교체되고 40대의 젊은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흐루쇼프는 또다시 케네디에게 최후 통첩을 날렸다. 물론 케네디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1980년대 동독에서 만든 베를린 일대 지도를 보면 그냥 외국 취급한 흔적을 볼 수 있다.#[3] 원래는 미/영/소 3국의 분할 점령이 예정되었으나 프랑스가 자신들 또한 승전국이므로 자신들도 분할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미국과 영국이 점령 지역 일부분을 떼내 프랑스에 넘겼다.[4] 원래는 전체적으로 소련의 몫과 미/영/불 3국의 몫의 합이 비슷했으나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구 독일령을 폴란드와 소련에 할양했기 때문에 동독 영토가 축소되면서 서독의 절반이 안되게 줄어들었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얄타 회담에 따라 소련이 점령한 동독 지역 + 구 동방 영토 중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동방 영토 대부분을 폴란드에 넘겨주고 쾨니히스베르크 일대는 소련이 넘겨받았다. 분할 점령 당시 소련 점령 지역(약 223,000km2)은 미/영/불 점령 지역(약 245,000km2)보다 조금 더 작았고 베를린 또한 마찬가지로 소련 관할인 동베를린(약 401km2)이 미/영/불 관할인 서베를린(약 490km2)보다 조금 더 작았다.[5] 독일 분할 당시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에 합병된 상태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국민투표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합병을 했으니 일단은 합법적인 과정이었음을 감안하여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로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나 영세중립국을 조건으로 1955년에 통일되었다.[6] 대신 서방 연합국 역시 소련이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독일 땅을 폴란드와 소련이 합병하는 것을 용인했다.[7] 그런데 그 서베를린에도 작은 월경지들이 또 딸려 있어서 문제였다. 서독 '본토'와 서베를린 사이를 오가기도 힘든데 서베를린 '본토'와 서베를린의 월경지들을 오가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8] 이 때문에, 1940년대 말에 사실상 수훈 자격을 가질 주둔지가 사라져 수훈자가 급감한 미군의 점령지 주둔군 훈장을 베를린 주둔 미 육군 복무자는 1990년까지 받을 수 있었다.[9] 1954년 10월 23일 파리의정서(Pariser Protokoll)에서 일부 내용이 개정되었다.[10] 이에 관해서는 K. Hesse, Grundzüge des Verfassungsrechts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20. Aufl. 1995, Rdnrn. 93f. 참조.[11] German Air Traffic Control During The Cold War: The Story of Rhein Control 참조[12] 하지만 이건 좋게 말해 그런 거고 실상은 우리한테 이익되는 쪽으로만 교류하기다. 그것을 쉽게 보여 주는 예가 동독과 서독의 축구 경기다. 스포츠 강국인 동독이 서독보다 못했던 몇 안 되는 종목이 바로 축구. 그래서 동서독 축구 대표팀의 친선경기는 분단 역사상 전혀 없었다. 유일한 대결이 월드컵 본선에서 맞붙은 것이다. 이땐 동독이 이겼다. 1974년 월드컵 본선에서 붙었다. 당시 개최국이 서독이었고 서독은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승까지 가서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까지 차지했다. 뮌헨에서 열린 이 결승전은 프란츠 베켄바워요한 크루이프의 세기의 대결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청소년 대표나 올림픽 대표는 몇 차례 만난 적은 있었다.[13] 이러한 배경에는 같은 분단이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그 근본적인 상황 자체가 서로 달랐기에 가능했다. 유럽은 기존의 '지배국'의 입장으로서 나름대로의 탄탄한 이념/정치적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전후 스타트가 좋았다. 제1차 세계 대전보다 한참 전의 사람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억누르기 위해 이들의 요구 조건인 '사회보장제도'를 한발 앞서 만들어 놓을 정도였으나 같은 시각 아시아 국가들은 아직 개인 정치 이념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대부분이 전제왕조 국가였다.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은 '식민지'로 지내왔고 이에 따라 종전 이후 자신들을 통제해 줄 지배 세력이 없어진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유입된 냉전의 이데올로기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힐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경우는 자발적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승전 세력인 연합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 나뉜 분단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양 국가의 거주민들이 서로를 싫어해서 나뉜 게 아니라 그냥 외부의 간섭으로 찢어졌을 뿐이었으니 구태여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14] 유럽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에 의해 동유럽이 순식간에 공산화되자 이에 대응하여 1947년 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이 시작되었고, 1948년베를린 봉쇄를 통해 긴장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은 이제 막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라 다시 한번 서로 싸울 여력도 생각도 없어서 서로를 그렇게 자극하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결국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분단 국가들의 경우 이러한 상호간의 큰 전쟁이 없었고 이에 분단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혁명과 전쟁을 동반한 피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15] 아우디는 원래 동독 작센에 있던 기업이었지만 국유화 이후 임직원들이 서독으로 탈출하여 회사를 재건했다.[16] 서독은 저 돈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는데 일례로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려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가든가 동독에 깔린 도로를 이용해 가야 했다. 다만 서독 정부에서 서베를린 주민들의 교통비를 일정부분 부담해서 현지인들에겐 큰 부담은 아니었다. 당연히 동독은 서독인들이 자신들의 도로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통행료를 부과했으나 서독은 이 통행료를 내는데 전혀 인색함이 없었다. 그러나 개인 단위로 다닌다고 하면 엄청난 부담을 져야 했다.[17] 오데르 나이세 강 동쪽 지역에서 강제 추방된 사람들이 주로 서독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 수치를 제외하고 오데르 나이세 강 서쪽의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들의 수치는 크게 줄어들지만 그래도 족히 수백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18] 이처럼 큰 강도짓을 하는 와중에 작은 것을 내어주며 생색내는 것은 흐루쇼프 특유의 전략이었고 이는 나중에 케네디 정권 시절 매우 큰 효과를 발휘했다.[19] 케네디는 전사한 흐루쇼프의 장남과 같은 나이였다.[20] 감지장치에 달라붙으면 경보가 울린다[21] 장벽을 경비하던 동독 측 병력은 28년 동안 총 11,000명에 달했다.[22] 독일어 위키피디아 참조. 이 수치는 오인사격, 탈출자에 의한 경비 군인 살해 등을 포함하느냐 여부에 따라 집계는 달라진다.[23] 베를린을 포함하여 약 1245명.[24] 베를린 장벽 붕괴 전 두번째 사망자이다. 마지막 사망자는 붕괴 8달 전인 1989년 3월 8일에 사망한 윈프리드 프라우덴베르크로, 열기구 추락이 원인이었다.[25] 그가 탈출한 후 그가 소속된 동베를린 국경군은 발칵 뒤집혔다. 위에 나오는 국경군의 3인1조 근무, 슈타지의 감시 등이 시행된 것도 슈만의 탈출 때문에 생긴 일이다.[26] 영상의 약 40초 부분에서 나온다.[27] 어떻게 보면 실수라기보다는 국경 전면 개방으로 이해한 기자가 비유적 표현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타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통신사는 이걸 말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 애초에 로널드 레이건이 서베를린에서 "고르바초프씨, 이 벽을 허무시오!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라는 길이 회자되는 명연설을 남긴 것이 불과 2년 전인 1987년 6월이었으므로 동독의 국경 개방에 있어 장벽이 가지는 상징성이란 엄청났던 것이다.[28] 에르만이 베를린 장벽 붕괴의 숨은 공로자로 평가받는 이유도 만약 그가 질문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샤보프스키의 결정적인 말실수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29] 같은 날 Heute-Journal의 헤드라인은 "국경 개방: 동독,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Öffnung der Grenze: Der DDR sucht neue Wege)" 였다.[30] 엄밀하게는 불법이었으나 동독 한가운데에 서베를린이 있다는 특이점 때문에 거의 전 국토에서 서독 방송이 수신되었고 결국 70년대에 들어서는 정부 차원에서 묵인했다.[31] 다만 베를린 장벽이 콘크리트로 엄청나게 튼튼하게 지어져서 망치와 정 정도로는 가루만 떨어질 뿐 정말 안 부서졌다고 한다.[32] 위의 악투엘 카메라 방송분을 그대로 인용했다.[33] 소련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키스하는 사진. 교과서에서 많이 보았을법한 사진이다.[34] 총합으로 따지면 6집, 레이레 마르티네스 기준으로 2집.[35] 이원복은 독일 유학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도이칠란트"라는 표현을 고집한다.[36] 8월 쿠데타가 더 빨리 일어나서 소련 보수파가 고르바쵸프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소련은 동구권 혁명을 중국식 해결책으로 진압하기로 한다.[37] 그러나 이후 세계대전중 소련군 전황이 악화되자 총기로 무장한 시민들이 폴란드에서 봉기한다. 사면초가에 몰린 소련은 핵시위를 벌이고, 미국의 대응을 핵전쟁으로 착각하면서 핵전쟁이 발발한다. 핵전쟁으로 지구가 황폐해졌다는 나레이션과 날아가는 핵미사일을 비추다가, 다큐멘터리의 주요 장면들을 역재생하고 미소짓는 고르바쵸프를 보여주면서 다큐멘터리가 끝난다.[38] 고대 로마에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시민이 체포될 때 이 말을 하면 고문을 받지 않고 정당한 수사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울이 있다.[39] 육성이 1997년작 영화 '자칼'의 오프닝에 삽입되었다. 이 연설에 얽힌 뒷이야기도 존재한다. [40] 이와 관련된 비하인드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