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나디 주가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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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러시아 연방 공산당 서기장
겐나디 안드레예비치 주가노프
Геннадий Андреевич Зюганов
Gennady Andreyevich Zyuganov


파일:겐나디 주가노프 2022.jpg

출생
1944년 6월 26일 (79세)
소련 러시아 SFSR 오룔주 미므리노
(現 러시아 오룔주 미므리노)
현직
러시아 연방 공산당 서기장
국가두마 공산당 파벌 원내대표
공산당 연합 - 소련 공산당 대표
제7대 국가두마 의원
서명
파일:겐나디 주가노프 서명.pn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브콘탁테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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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안드레이 주가노프[1]
어머니 마르파 주가노바[2]
배우자
나데즈다 주가노바[3]
자녀
안드레이 주가노프[4]
타티야나 니키포로바[5]
학력
국립 오룔 대학교 (철학 / 박사)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사회과학연구소
병역
소련 육군 대령 전역
종교
러시아 정교회[6]
소속 정당

약력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러시아 연방 공산당 후보
2000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러시아 연방 공산당 후보
200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러시아 연방 공산당 후보
2012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러시아 연방 공산당 후보
유럽 평의회 의원


1. 개요
2. 생애
3. 소속 정당



1. 개요[편집]


겐나디 주가노프러시아정치인으로,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당수이다.


2. 생애[편집]


모스크바 남쪽의 오룔주 출신이다. 정치인이 되기 전에 국립 오룔 대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중학교에서 물리, 수학 교사 일을 했다.

1966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후 1970년 오룔주 대의원을 시작으로 활발히 정치활동을 했고 당내의 많은 파벌 중에서는 니콜라이 리시코프 파벌에 있었다. 소련이 붕괴한 뒤 당시 러시아 내 소련 공산당 지지세력 중 가장 위에 있었던 1991년 RSFSR 대선 후보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신임을 얻어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당수가 되었다.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에는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보리스 옐친과 타협을 시도했으며 그 사건을 계기로 옐친과 타협하지 않았던 경쟁자들이 사법 처리를 받게 되자 당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된다. 처음 선거를 지휘했던 1995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원내 1당에 등극하면서 약진했고, 친 옐친파 정당들이 1993년 두마 선거와 마찬가지로 참패하면서 주가노프는 유력 차기대권주자로 떠올랐다.

이러한 기세로 1996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이 될것이라는것이 주 전망이었으나 엘친의 '공산주의는 러시아를 망칠 것이다' 등으로 네거티브 선거 전략을 펼쳤고 올리가르히 언론사들의 의도적 옐친 밀어주기로 선거막판에 판세가 뒤집히며 낙선해버리고 말았고, 이 때문에 입지에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후로 러시아의 경제사정에 커다란 전화점이 온것도 아닌데다가 또한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소련에 대한 향수가 절정에 달하며 와신상담에 성공할듯 했지만 공을 들였던 옐친 탄핵이 실패한데다가 총리로 임명된 푸틴이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반군 강경진압으로 갑자기 인기를 얻게 되면서 1999년 총선에서 예상 외의 부진을 보였고, 또한 2000년 대선에서 푸틴이 1차 당선되며 낙선하고야 말았다. 이후로 2004년과 2008년, 2012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푸틴에게 완전히 밀려버렸다.

러시아 공산당을 수정주의라 비난하는 빅토르 튤킨, 김정일을 칭찬했으며 구소련 국가들의 공산당연합을 이끌며 세를 과시했던 올렉 셰닌, 대놓고 스탈린을 지지하며 페레트스로이카를 부정한 니나 안드레예바, 소련정계의 후신을 자처하며 마찬가지로 김정일을 칭송한 사지 우말라토바, 쿠데타를 이끈 소련의 마지막 원수 드미트리 야조프나 고르바쵸프를 비판했던 리가쵸프, 심지어는 마오주의자인 그리고리 이사예프 등에 비하면 훨씬 온건파로 '공산주의 세력 내에서는' 온건한 성향이었다. 물론 현재는 더 온건한 파벨 그루지닌이 강세를 보이는 상태.

주요 지지층은 반 푸틴 세력이다만... 주가노프의 비판점이 여기 있다. 반푸틴 야당이라는 위치와는 달리, 주가노프는 강력한 러시아 중앙정부를 지지하고 반동성애법을 지지했으며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동부 우크라이나 위기에서도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는 주가노프가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기 때문. 사회주의적인 정책은 모든 주요 산업의 국영화 정도. 그러다보니 푸틴에게 지지율을 많이 빼앗겼다. 황당한 것은 이런 주가노프도 공산당 내에선 사민주의자에 비견될 정도로 미하일 고르바초프니콜라이 리시코프와 동격의 개혁파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2008년 중국에 방문해 공산당을 지지했다. 러시아 공산당이 중국 공산당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 대선에서는 고령을 이유로 출마하지 않았다. 공산당 대선 후보는 파벨 그루지닌이 선출되었다.

2020년 벨라루스 시위에서 알략산드르 루카셴카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각국 공산당 대표로서 냈다. 링크(러시아어)

2022년 2월 11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증상이 나타나 병원에 입원했다. # 2월 18일 단순 감기 증상이었던 걸로 밝혀져 퇴원했다. ##

2022년 2월 27일, 유럽 평의회에서 주가노프를 포함한 모든 러시아의 유럽평의회 의원들의 의원직과 러시아의 대표국 회원 자격이 박탈당하자 "유럽 평의회에서의 러시아 대표국 회원 자격 정지는 러시아에 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맞섰다. # 동시에 우크라이나를 침공블라디미르 푸틴을 옹호했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목적을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라고 밝히면서 러시아를 지지했다.

2022년 2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했다는 명분으로 미국, 영국, 캐나다, 유럽연합, 호주, 일본의 제재 명단에 추가되었다. #

2022년 러시아 동원령 당시 손자 안드레이 주가노프 모스크바 시의원이 트위터에서 동원령에 응할 것이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아 논란을 빚었다. #

그의 또다른 손자이자 모스크바 시 두마 부의장인 레오니트 주가노프가 갑자기 체포되었다. 표면상 이유는 주유소에서 기름값 2,800루블을 안 내고 도망쳐서이나,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분명 계산대에 카드를 삽입했고, 차 끌고 떠날때 직원들도 아무 말 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떠나자마자 부리나케 경찰들이 쫓아와 도로 한복판에서 자기를 체포했다고 한다. 겐나디 주가노프 본인도 격분하여 크렘린의 도발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희한한 건 겐나디 주가노프는 찬전파라는 것이다.

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소련 공산당|
]]

1966 - 1991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91 - 1993
해산


1993 - 현재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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