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성서초등학교 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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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1년 3월 26일 대구직할시(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5명의 국민학생들이 도롱뇽알을 주우러 인근 와룡산에 올라가서 동반 실종되었다가 실종된 지 11년 6개월이 지난 2002년 9월 26일에 백골로 발견된 사건. 언론의 오보로 인해 도룡뇽이 아닌 개구리로 알려졌다.
범인의 윤곽은커녕 피해자의 신원이나 행방조차 밝히지 못한 사건은 전국적으로 많이 보도되었지만 이렇게 불가사의한 사건의 경우 당대의 이슈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수사 인력의 편중으로 인해 초동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묻힌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은 범인이 잡히기 이전 시점의 화성 연쇄살인 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영구 미제사건으로 불릴 정도로 전 국민들의 주목을 받았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결정적 증거로 범인을 찾아냈다.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은 범행 동기가 확실하고 유력 용의자가 특정되었다. 반면 이 사건은 밀폐되지 않은 산 속에서 5명을 한꺼번에 살해한 범행 수법, 대대적인 수색이 이어졌음에도 윤곽조차 잡지 못한 범인, 불확실한 살해 동기, 그리고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불가사의 투성이었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미제사건 중 가장 의문점이 많은 사건이고,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의문이 아닌 게 없다. 우선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훤히 아는 인근 산이었다는 것과 흔적이나 범인의 정체, 살해 수법 등 모든 것이 수수께끼와 같고 이렇게 5명이나 되는 초등학교 3~6학년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을 산에서 전부 살해하고 암매장하는 식의 사건은 국내외 막론하고 비슷한 유형의 사례조차 찾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더욱 의혹이 들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2. 명칭[편집]
정확히는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채집하려고 집 근처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되었는데 사건 초기에 도롱뇽이 개구리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5명의 아이들은 일명 ‘개구리 소년’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개구리 소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도롱뇽 알을 구하러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보도하면 당시 개구리와는 달리 도롱뇽을 잘 모르는 전국의 많은 아이들이 도롱뇽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지니고 괴생명체로 오인할까 봐 일부러 인지도가 높은 개구리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구리와는 반대로 도롱뇽은 대한민국에서는 서식지가 제한적인지라 그다지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도 아니기 때문에 개구리 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건 당일 5명의 아이들이 가는 길에 만난 친구에게는 탄두를 주우러 간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와룡산에 있었던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에서 흘린 탄피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도 있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나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 혹은 대표적으로 개구리 소년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정식 사건명은 대구 성서초등학교 학생 실종 사건이었는데 2002년 9월 26일에 아이들의 시신들이 발견되면서 대구 성서초등학교 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변경되었다.
3. 사망자[편집]
- 우철원(禹喆元): 1979년생. 국민학교 6학년
- 조호연(趙浩衍): 1980년생. 국민학교 5학년
- 김영규(金榮奎): 1981년생. 국민학교 4학년
- 박찬인(朴燦印): 1982년생. 국민학교 3학년
- 김종식(金鐘植): 1983년생. 국민학교 3학년[4]
4. 사건 발생[편집]
1991년 3월 26일은 지방자치제가 다시 시행된 이후 최초로 전국 기초자치단체의 지방의원을 뽑는 선거인 1991년 지방선거일이어서 임시공휴일이었다. 이 날은 기초자치단체 의원을 뽑는 날이었다.
아침 8시 무렵 성서국민학교(現 대구성서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3~6학년 어린이 우철원 군(6학년), 조호연 군(5학년), 김영규 군(4학년), 박찬인 군, 김종식 군 그리고 김태룡 군(이 셋은 모두 3학년) 총 6명은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조 군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놀라'라고 핀잔을 줬다.[5]
이후 6명의 아이들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인근의 와룡산으로 향했다. 6명 가운데 김태룡 군은 같이 따라가려다가 '위험하니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을 떠올렸고 아침밥도 먹을 겸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선택은 인생 최고의 선택이 되었고, 김태룡 군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화를 면한 생존자가 되었다.
조호연 군의 형 조무연 군(당시 중학교 1학년)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라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면서 시내에 나가 파출부 일을 하던 김순남 아주머니가 9시쯤 아이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김 아주머니는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려고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 쪽으로 올라가는 5명의 아이들을 지나쳤다. 그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 등의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한다.
우철원 군과 같은 반 학생이었던 김경열 군과 이태석 군(1979년생)이 "12시쯤 아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봤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점심 먹기 직전 우철원 군이 아이들과 산 쪽으로 가길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와룡산 기슭에 살던 김이수 아주머니는 "14시 무렵에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함승훈 군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아파트에서 살던 그는 이날 다른 무리의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가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소리를 두 차례 들었다.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쯤 되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성인이 된 함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고 밝혔다.
함 군이 산에서 비명을 들었다는 11시 30분쯤에 김종식 군의 어머니 허도선 씨와 김영규 군의 어머니 최경희 씨는 모두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한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함께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가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면 야단이나 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점심 때가 훨씬 지나서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들은 18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19시 50분에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였다.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사건 당일인 1991년 3월 26일 서구 중리동에 위치했던 가축 도살장(現 퀸스로드 쇼핑몰) 인근 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들이 버스를 같이 타는 걸 목격했다는 여성의 제보가 있었으나 묵살되었다고 한다. 당시 목격 내용 전문
5. 경과[편집]
사건 초기 경찰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로 인한 앵벌이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엉뚱한 수사 방향을 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5명 아이들이 모두 집안 사정이 부유하진 않았어도 별다른 문제 없이 화목했기 때문에 가출할 만한 사유가 없었으며 더구나 실종된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이던 우철원 군이 13세, 나머지는 거의 갓 10대에 들어섰고 특히 막내인 김종식 군은 9살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 나잇대의 아이들이 집단 가출이란 엄청난 일을 벌이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늦추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남은 유력한 가능성은 유괴 아니면 가출인데 딱히 유괴범으로부터 오는 협박 전화도 없었을 뿐더러 앵벌이 조직이 굳이 외딴 마을에 찾아와 아이들을 깡그리 납치해갈 가능성은 낮았다. 번잡한 도시에서야 아이 1명이 갑자기 사라져도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이 얼마 살지 않던 시골 마을[6] 에서는 순식간에 마을 전체가 난리가 나기 때문이다. 당시 시골에는 '골목대장'의 말을 부모님의 말보다 더 듣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초등학교 6학년 '형님'의 말이라면 아이들이 이끌려 갈 수도 있기에 호기심에 타지에 놀러갔다가 범죄에 연루된 게 아니냐는 추측에 의거해 초기 수사 방향이 정해졌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정체불명 살인마가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추측에는 누구도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사건이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5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군과 경찰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초반에는 수색 인력이 부족해 와룡산 서남쪽과 연못만 수색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가 7월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산하에 수사본부가 차려져 총 25개조에 1조당 25명으로 구성됐고 이곡동 성서파출소 옆 건물에 둥지를 틀었다. 10월 24일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을 겸하면서 대구지역 군경 수천명이 탐침봉까지 들고 와룡산 전체를 뒤졌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1996년 해체 전까지 5년 간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산악수색 48차와 일제 검문검색 43차 외에 복지시설 및 종교단체 1천여개소, 가정집 11,000세대를 각각 수색했고 성서초 졸업생 1,800명과 공단 노동자 19,000여명에게도 수소문해 제보만 570여건이나 됐지만 전부 허사였다.
경북 구미에선 목격 제보가 들어왔고 부산에서 앵벌이로 커피를 팔거나 새우잡이배에 납치됐다는 등의 제보도 나왔으나 찾지 못했으며 사건이 워낙 유명해진 탓에 허위제보도 잇따랐는데 "아이들은 내가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 OO로 찾아와라" 같은 장난전화가 빗발쳤고 자기가 실종 어린이들 중 한 명이라는 장난전화를 하면서 부모를 놀리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신이상 증세를 앓던 어린이가 "내가 개구리 소년"이라고 주장하고 떼를 쓰며 난동을 부리거나 심지어 부모가 자녀에게 장난전화를 시키기도 하는 등 부모와 조사하던 경찰들을 허탈하게 하여 수사에 혼선이 생겼다.
그밖에도 아이들이 혹시 마을 인근 저수지에 빠져 죽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경찰들이 양수기를 동원해 저수지의 물을 죄다 빼내 보기도 했고, 전국 각지의 앵벌이하는 아이들도 조사했으며 심지어 외딴 섬이나 무인도에 아이들이 납치되었다는 유언비어도 퍼져서 경찰들이 그런 섬들까지 다 찾아다니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했다.
가족들 역시 말할 것도 없다. 다섯 아버지들은 직접 트럭을 한 대 마련해 함께 어제는 이 도시, 오늘은 저 도시 식으로 전국을 헤매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다녔다. 전국 군(郡) 단위 이상의 지역은 모두 가봤다고 한다.
다행히 국민들의 어떻게든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덕분에 각 기업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찾기 위해 홍보에 진력했다. 그래서 전화카드나 담배갑은 물론 당시 즐겨 보던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에는 어김없이 개구리 소년과 관련된 광고가 삽입되었고 우유나 과자 포장에도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가 인쇄되었다. 특히 포항제철은 대구지방경찰청에 현상금 1천만원을 기탁해 가며 전단 80,000장을 임직원과 고객들에게 뿌렸고 한진그룹도 대한항공과 한진고속 승객 및 임직원, 고객들을 상대로 100만장을 뿌렸다. 럭키도 수퍼타이 등 전 제품에 실종자들의 사진을 붙이고 수퍼타이 CF '미아찾기 캠페인'을 통해 홍보했으며 국민신용카드도 1991년 11~12월까지 대금청구명세서를 담을 우편봉투에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를 실었다.
한국담배인삼공사는 미아찾기 캠페인 참여사로서 88담배에 아이들 사진을 삽입했고 부산택시조합도 1992년 달력에 사진을 실었다. 그 외에 제일제당, 기아자동차(現 기아), 남양산업, 남양알로에(現 유니베라. 1976년에 설립된 건강기능식품 및 화장품 제조회사로 대한민국 최초로 알로에를 시험재배한 회사), 대도제약(1962년 설립. 혈전 용해 치료제 '용심'과 어린이 영양제 '아토실'로 유명했다. 1997년 삼성정밀화학에 인수) 등지도 사보에 사진 및 명단을 실었다.(참고)
또 개구리 소년을 주제로 한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1992년 11월 개봉)이나 노래도 제작되었고 MBC 《생방송 여론광장》- '얘들아, 어디있니?' 편(1991년 5월 4일 방영분)을 비롯해 SBS 《그것이 알고싶다》(1993년 3월 21일 방영분), KBS1의 《사건 25시》(1993년 6월 26일 방영분) 등에서 심층 분석하기도 했다. 심지어 대교출판에서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 동화 《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이기창 저)》를 출간했다.
한편으로는 1970년대에 남파 간첩을 훈련시키는 교관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북한 공작원이 남한 고교생 등을 납치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 공작원의 납치설도 떠돌았다.[7] 심지어 허무맹랑한 UFO 납치설까지도 제기되었다.[8] 아이들은 사실은 인류가 아니라 어느 별의 외계인이라서 외계인이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이라는 개소리까지 돌았을 정도. 심지어 "나병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경찰이 나환자촌까지 가서 수색하려다 한센인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심리학자와 심령술사, 역술인들 역시 이 대열에 동참하면서 경주 왕릉 매장설, 김종식 군 자택 매장설, 고속도로 교각 매장설 등 온갖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찾지 못했고 결국 영구 미제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돌며 자식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 부모들의 눈물겨운 노력도 허사가 되어 갔다. 1993년 1월에 실종자 부모들이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를 냈지만 9월에는 직접 수색을 포기했다. 1995년에 경찰은 컴퓨터로 만들어진 아이들이 자란 후의 얼굴을 예상한 가상 몽타주를 실은 전단을 2만여장이나 뿌렸고 1996년에는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관련 업무를 달서경찰서 수사전담반으로 넘김에 따라 경찰서장이 본부장을 맡고 수사인력도 총 10명으로 줄었다. 1997년 8월에는 40대 여성이 법정에서 자신이 개구리 소년을 유인 후 암매장했다고 밝혔지만 허위 진술로 밝혀졌다.
사건 발생 약 10년 후인 2001년 7월에 전남 신안군 지도면 증도의 한 염전에서도 제보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급파됐으나 허위로 판명났고 그해 10월 22일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슬픔을 술로 달래며 살던 게 화근이 되어 간암으로 사망해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건 이후 다른 부모들과 함께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던 모습과 1993년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 인터뷰에 응했던 모습을 보면 본래 그는 매우 건장한 체격이었다. 젊었을 때 유도를 해서 매우 건강했다고. 그런 그가 간암에 걸려 죽을 정도로 폭음을 했으니 아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게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알 수 있다.
유골 발굴 전인 2002년 9월 한 남성이 "아이들이 묻힌 곳을 알고 있다"라며 거짓 제보를 했는데 하필 유골 발견 전날에 들어온 제보라 제대로 엮였다. 경찰은 이 남성의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수배했다. 이 몽타주가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의 범인의 몽타주로 알려져 돌아다니는데 범인의 몽타주가 아니다.
결국 이 남성은 경찰서에 자수해서 체포되었다. 이때 "노태우 정부가 강경대와 김기설 사건 등 당시의 어수선한 시국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죽여 암매장한 공작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등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고 조사해 보니 10여년 전 권투해서 돈을 벌겠다며 집을 나갔다가 머리를 다쳐 정신이상 상태였으며 서울역과 명동성당 등지를 전전하던 노숙자였다. (기자협회보, 연합뉴스)
6. 유골 발견[편집]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2002년 9월 26일, 실종으로부터 11년 6개월 만에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우근씨에 의해 유골이 와룡산 기슭에서 발견되었다.[9] 이곳은 구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 부지였으며 50사단은 이미 1994년에 북구로 이전했다. 실종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불미골을 중심으로 수색하였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여 벌어진 실책이다.[10]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이 있어서 탄피가 많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랐다는 제보도 잇따르면서 일각에서는 유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되었다.[11]
발굴 이틀 후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다시 구성해 의욕을 보이는 듯했으나 경찰들은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성급한 수사를 해 빈축을 샀다. 대구달서경찰서는 시신 발견 신고를 받고 출동한다.[12] 경찰은 무슨 의도였는지 현장보존도 하지 않고 과학수사대도 부르지 않은 채 곡괭이 등을 이용해 땅을 파헤쳐서 현장을 훼손시켰다. 또 정확한 부검도, 현장감식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이 파헤쳐낸 유골만 봤으면서도 "상식적으로 봤을 때 타살 흔적은 거의 없는 거 같다."거나 "조난을 당했고 추위에 떨다가[13]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고 주장해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14]
여기서 경찰은 사건 현장을 건드려서 크게 훼손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에 보도된 영상을 보면 의경들이 삽질을 하고 형사들이 유골을 함부로 마대에 정리해 담아놨다. 이 꼴을 본 서울대학교 법의학과의 이윤성 교수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할 말을 잃었을 정도. 그래서 시신 중 감식반의 현장 감식을 받은 시신은 단 1구뿐이라고 한다.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여러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다만 가장 유력한 범행도구는 용접 후 슬래그를 깨거나 긁어내는 데 사용하는 용접망치로 일명 깡깡이 망치다.
7. 공소시효 만료[편집]
2003년에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했고 2005년 11월 28일에 유족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촉구했지만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며 2015년엔 내사마저 종결됐기에 이제 와서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처벌할 수 없다. 공소시효를 무시하고 수사가 가능한 경우도 존재하긴 하지만[15] 범인에 대한 더 이상의 단서가 없어서 수사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재까지도 범인 또는 범인을 아는 사람이 자수하지 않는 이상 잡힐 가능성조차 안 보이며 설령 다른 사건으로 인해 이미 수감되었는데 그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져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16]
8. 수사 및 추측[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구 성서초등학교 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수사 및 추측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1년 11월에 이기창 작가가 이 사건을 다룬 어린이 추리소설 《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를 낸 바 있다.
- 1992년 11월 28일에 조금환 감독이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해 개봉하였다. 조금환 감독은 1953년 경기도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정진우 감독의 연출부에서 일하다가 1986년 《영웅 돌아오다》를 연출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했고 1990년대 초반까지 《캠퍼스 연예특강》, 《풀잎사랑》,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등의 청춘영화들을 주로 연출했다. 2014년에 영상물등급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당시 서울에서만 300,227명의 관객을 기록했으며 아역배우로 활동했던 변성현, 장덕수, 김민정, 이재은이 출연하였다.
- 2003년에 발매된 MC 스나이퍼 2집 수록곡 《개구리 소년 (개구리 소년의 유가족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은 이 사건을 다룬 곡이다.
- 2005년에 김가원 前 교수[17] 가 소설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를 냈는데 2011년에 이규만 감독이 이걸 바탕으로 하여 《아이들...》로 영화화했다. 다만 영화의 내용은 책을 신뢰하는 호의적인 내용이 아니라 틀린 점을 조목조목 짚어주며 비판하는 내용이다.
10. 기타[편집]
-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됐음에도 경찰 측은 공식적으로 수사를 끝내지 않은 채 수사를 이어가다 2015년 내사 종결 처리했으나 2019년 9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 이춘재가 잡히자 민갑룡 경찰청장이 이 사건도 재수사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위의 두 사건은 최소한의 증거라도 있는 반면 이 사건은 모든 게 의문투성이고 실질적인 증거가 아이들의 유골뿐인데다 그마저도 추정해 낼 수 있는 증거가 매우 제한적인지라 진척은 기대할 수 없다.
- 간간이 방송에서 유족들의 근황을 취재하기도 하는데 이를 두고 '왜 아픈 기억을 자꾸 들춰서 유족들을 괴롭히냐'는 반응도 나오지만 정작 가족들은 "미제사건이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대중들에게 재차 알리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아픈 기억보다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이들과 사건이 잊히는 게 더욱 괴롭다고 한다.
- 실종 이래 성서초 측은 유해 발견 전까지 실종자들을 쭉 정원 외로 학적에 남겨둔 채 관리해 왔으나 발견 후 2003년 2월에 명예졸업장이 추서됐다. 소년들의 유해는 2004년 경북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대구시립화장장에서 화장돼 성주대교에서 뿌렸다. 다만 두개골만은 유족들의 뜻에 따라 경북대에 보관되어 있다.
- 비슷한 사건이 1979년 울산에서 일어난 적이 있다. 이 사건의 아이들보다도 훨씬 어린 6~7세 미취학 아동 3명이 가재를 잡는다고 산으로 간 뒤 실종된 사건. 이 당시에도 "누군가 아이들을 죽여 장기를 꺼내간 것"이라거나 "'몹쓸 짐승'(여기에는 사람의 의미도 들어있음)이 아이들을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 무참하게 해친 것"이라는 등 별의별 소문이 난무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단순히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한 것이었고 산나물을 캐던 할머니들[18] 에 의해 28일 만에 발견되어 생환했다. 다행히 시골 아이들이라 그나마 야생에서 먹을 것을 직접 채취할 줄 알아 장장 4주 동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해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3명이 다시 모여 매체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
- 50사단이 이전한 와룡산에는 쓰레기 매립장이 생겼고 고등학교가 이전해 오면서 사건 당시와는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 2020년 1월, 싱가포르 국영매체 CNA에서 한국의 '개구리 소년 실종'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실종 소년들의 부모님과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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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이후 30년이 되던 2021년 3월 26일 대구시는 와룡산 인근에 있는 선원공원에 '개구리소년 추모 및 어린이안전 기원비'를 제막했다.(기사) 가로 3.5m, 세로 1.3m, 높이 2m의 비교적 아담한 조형물이다. 크고 작은 다섯 꽃송이 모양의 화강석이 보이고 그 아래 두 개의 둥근 돌에는 ‘안식-품. 다섯 소년들이 엄마 품처럼 안전한 곳에서 포근히 안식하기를 염원하며, 재잘거리는 새소리와 여린 꽃의 앳된 미소를 닮은 어린 소년들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하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 2021년 4월 15일,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해당 사건처럼 10년 이상 된 구조대상 범죄피해에도 구조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범죄피해자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지역구에서 벌어진 유명한 사건이라 이런 법안을 발의한 듯하다. 다만 2024년 회기 만료로 폐기.(법안 정보)
- 2021년 7월 20일, 경찰인 우철원 군의 외삼촌이 코로나 백신 교차접종(1차 아스트라제네카, 2차 화이자) 후 자택에서 쓰러졌으나 숨졌다. 고인이 경찰의 길을 택한 계기도 이 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 희생자 우철원의 친형인 우영택은 해당 사건을 다룬 영화 아이들…에 취재기자 역으로 출연했으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194번 참가자 역으로 출연하는 등 배우의 삶을 살고 있다. 줄다리기에서 기훈의 상대 편 선두로 등장하는 역할이며 엔딩 크레딧에서의 이름은 '기훈 상대 선두'다.
- 2022년 4월 22일, 김영규 군의 아버지 김현도 씨가 지병인 뇌경색으로 인해 향년 79세로 숨을 거뒀다.
- 2022년 6월 8일, 당시 서울 여의도를 운행하는 버스에서 20대 남자 둘과 함께 있는 아이들을 봤다는 목격자가 보배드림 커뮤니티에 구체적인 정황이 담긴 글을 올렸는데 종일 베스트에 올라왔다.# 해당 글의 글쓴이는 아이들이 타고 있던 버스 내부 그림까지 그려서 설명할 정도로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고 이를 여러 차례 매스컴과 경찰에 제보하였으나 묵살당했다고 한다. 다만 아이들의 유골 발견 시점이나 장소를 생각하면 이 목격담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의견이 다수다.
- 2023년 5월 6일 박찬인 군의 아버지 박건서 씨가 급성 뇌경색으로 향년 69세로 숨을 거뒀다는 사실이 같은 해 7월 7일에 뒤늦게 알려졌다.
- 2024년 1월 11일 김종식 군의 삼촌과 조호연, 우철원 군의 아버지 등 실종된 아이들의 보호자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출연했다. 영상 꼬꼬무 100회 기념 기자 간담회 당시 방송을 통해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 투표에서 1위로 선정된 사건이라고 한다.
11. 참고 자료[편집]
- 시사저널 1991년 9월 19일 기사
-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2014년 3월 25일 방송분
- CBS <김현정의 뉴스쇼> - '탐정 손수호' 2017년 9월 28일 방송분
- 일요시사 <긴급기획> 개구리소년 30주기: 1회, 2회, 3회, 4회,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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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계청 화폐가치 환산(#)에 따르면 1992년 당시의 보상금 42,000,000원은 2023년 12월 기준으로 106,428,000원이다.[2] 1992년 기준 세는나이이며 사건 발생 기준으로는 각각 세는나이 13세, 12세, 11세, 10세, 9세였다.[3] 달서교회 뒷편에서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경사지의 기슭에서 발견되었다.[4] 빠른년생으로 보인다.[5] 사건 이후 이 청년은 인터뷰에서 나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자책한 것으로 전해졌다.[6] 당시 대구시는 직할시였지만 서구 상리동은 대구에서 개발이 거의 되지 않은 미개발 지역이었다.[7] 시신이 발견된 후에는 간첩에 의한 타살설로 바뀌어 또 주장되기도 했다. 1990년대에도 가끔 간첩이 출몰하긴 했으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8] UFO 납치설은 지금 보면 뜬금없지만 이 사건 즈음은 "안녕하세요 지구어린이"란 괴작 서적이 아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던 시기였다. 서적 판매뿐만 아니라 UFO가 녹음된 소리라며 비싼 정보이용료가 청구되는 ARS 전화를 유도하여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갈취했을 정도였고 이 서적과 전화에 진지하게 속아넘어간 어린이들 때문에 혹시 개구리 소년들도 UFO에 납치된 게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9] 당일에는 4명의 유골이 발견되었고, 다음날 1명의 유골(김영규 군)이 추가로 발견되었다.[10] 2022년 3월 이 근처에 ‘와룡 숲속 놀이터’라는 어린이 놀이터가 만들어졌다. 7~12세 전용의 자연친화적인 놀이기구가 많다.[11] 2020년대 이후에도 대한민국 육군의 사격장들에서 유탄으로 인한 사망사고가 몇차례 있었다.[12] 2005년에 대구성서경찰서가 신설되어 현재 사건 현장은 대구성서경찰서 관할이며 달서경찰서는 월배권 관할.[13] 대구 기상관측소의 당시 기상관측 자료에 의하면 1991년 3월 26일의 평균기온은 8.2℃, 최고기온 12.3℃, 최저기온 3.3℃, 평균운량 7.5, 일강수량 5.8mm였으며 다음날인 3월 27일은 평균기온 6.0℃, 최고기온 7.8℃, 최저기온 4.6℃, 평균운량 10.0, 일강수량 2.4mm였다. 최저 기온은 섭씨 3.3도였고 빗발이 5.8~8.2mm가량 뿌리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바람도 다소 많이 불었다고 한다. 산속인 점을 고려하면 더 추웠을 수도 있겠다.[14] 그러나 책까지 내며 저체온사를 계속 주장하는 파들이 여전히 있다. 《아이들은 왜 산에 갔을까》 참조.[15] 이를 공소시효 배제라 한다.[16]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인 이춘재가 그러하다.[17] 유족인 김철규 범인설을 주장하여 물의를 빚고 카이스트를 떠나야 했다.[18] 이후 아이들은 이분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10여년간 지속적으로 교류했다고 한다. 또 이들은 당시 아이들의 부모가 건 현상금 300만원을 받을 자격이 있었으나 "예닐곱 꼬맹이가 산에서 길을 잃었다면 누구든 업고 안아서라도 데려오지 않겠느냐. 당연한 일을 했는데 잘 살지도 못하는 아이 부모한테서 돈을 받는다니 당치도 않다."라며 오히려 현상금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