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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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257호

258호

259호
서울 운현궁
서울 명동성당
강화 선원사지

주교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성당
The Cathedral Church of Virgin Mar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명동대성당 | 明洞大聖堂

기본 정보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명동2가)
종교
가톨릭
교구
서울관구 서울대교구
지위
주교좌성당(Cathedral)
주임사제
조학문 바오로 신부(2018~)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건축 역사
건축가
외젠 코스트 신부
빅토르 루이 푸아넬 신부
착공
1892년 5월 8일
완공
1898년 5월 29일
축성
1898년 5월 29일
건축 정보
양식
네오 고딕(고딕 리바이벌)
면적
1,668 m2
전체 길이
69 m
전체 너비
28 m
종탑 높이
45 m
언어별 표기
라틴어
Ecclesia Cathedralis Myeongdong
Cathedralis Ecclesia Immaculatae Conceptionis Mariae Virginis in Myeongdong
영어
Myeongdong Cathedral
Cathedral Church of Virgin Mar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in Myeongdong
프랑스어
Cathédrale de Myeongdong
Cathédrale Notre-Dame de l'Immaculée Conception
스페인어
Catedral de Myeongdong
Catedral de la Virgen María de la Concepción Inmaculada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256호
서울 명동성당
서울 明洞聖堂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천주교 / 성당
지정일자
1977년 11월 22일
소유자
(소유단체)

(재)천주교서울대교구유지재단
관리자
(관리단체)

명동성당


파일:주교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성당.jpg

명동성당 본당[1]


파일:external/aos.catholic.or.kr/Today_img.png

명동성당 전경[2]
1. 개요
2. 역사
2.1. 성당의 건설
2.2. 일제강점기
2.3. 민주화 운동
2.4. 교황의 방문
3. 건축
3.1. 대성전
3.2. 지하 성지
3.3. 성당 외부
4. 역대 본당 주임신부
5.1. 대성전
5.2. 파밀리아 채플
5.3. 혼인피로연
6. 방문
7. 미사
7.1. 강론
8. 21세기 명동성당 개발 계획
10. 주변 시설
10.3. 가톨릭회관(옛 명동성모병원)
11. 기타




1. 개요[편집]



파일:주교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성당 내부.jpg

명동성당 내부[3]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 (명동2가)에 자리한 천주교 서울대교구주교좌성당으로, 한국 천주교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가톨릭의 본산이다. 건축 양식은 네오 고딕을 따르고 있다.

주보성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무염시태: 無染始胎)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당의 정식 명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성당' 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고, 줄여서 '명동대성당', '명동성당'으로 부른다. 1898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유적지로[4] 사적 제258호에 지정되어 있다.


2. 역사[편집]




2.1. 성당의 건설[편집]


성당이 있는 명동 언덕은 한국 천주교에서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던 곳으로 '명례방'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곳은 한국에서 처음 천주교 전례가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김범우 토마스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안드레아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자체적으로 공소예절을 드렸다. 포도청 당국이 이를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했지만, 김범우는 중인 계급이라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가 사망했다. 이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해인 1886년부터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나서 새로 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이 이 명동성당이다.

건축 당시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명동성당의 언덕 아래에 왕실의 어진을 모시는 영희전(永禧殿)이 있어서 풍수상 곤란하다"며 반대해서 건축이 지연되었다. 또한 성당을 짓는 실무 기술자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왔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술자들이 중국으로 귀국해버려서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2.2. 일제강점기[편집]


일제강점기에 가톨릭 교회는 빌렘 신부가 안명근 야고보 야고보[5]의 고해성사 때 얻은 정보를 일제에 밀고한 대가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성당 주위의 부지를 하사 받았다. 그 결과 일제는 안명근[6]을 포함하여 신민회소속 독립운동가 105명을 일망타진하며 신민회를 해산시겼다. 명동 성당은 하사 받은 부지로 대대적인 증축을 하였으며 해당 부지는 아직도 명동성당의 일부이다.#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15일에 (황국)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거행하고 황군 위문금을 모금한 역사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민간 쇠붙이 생필품이나 철로 등과 마찬가지로, 군수품으로 쓴다며 종탑의 종을 공출당할 뻔했다. [7] 이에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는 종을 치는 끈을 거두고 종탑을 폐쇄했다. 그래서 종은 무사했지만, 대신에 성당 제대 앞에 있던 철재 영성체 난간[8]이 뜯겨져 목재로 교체했다.[9] 6.25 전쟁 때는 성당 전체가 폭격으로 날아갈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 당시 성당 인근에 주둔하던 인민군을 몰아내기 위해, 미군 측에서는 "명동 일대를 싹 폭격한 뒤에 성당을 새로 지어주겠다"한국 가톨릭에 제안했다. 하지만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등 한국 가톨릭에서 결사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이후 1947년, 1973년, 2009년에 보수공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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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의사 의거비
그렇다고 20세기의 부끄러운 역사만 있는 장소는 아니어서, 개신교 신자의 독립운동이 이루어진 역사는 있다.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12월 22일에는 개신교 신자 이재명 의사가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10]의 추도미사에 참석하고 빠져나오던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성당 언덕 아래의 길가에서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력거꾼인 박원문이 이를 가로막았다가 칼에 찔려 그가 대신 죽고 실패했다. 이완용도 칼에 찔렸지만, 당시 최고 흉부외과 의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 이때 이완용이 죽었다면 역사가 묘하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2.3. 민주화 운동[편집]


대표적인 것이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의 성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명동성당에서는 1976년 3.1 민주 구국선언이 발표됐고 특히 그 유명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11]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을 폭로했던 1987년 5.18 7주기 추모미사[12]가 거행됐고 6월 항쟁 당시에는 대학생 농성단의 은신처로 역할을 다했으며, 6월 항쟁 이후에는 항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각종 미사들이 집전되었다.


2.4. 교황의 방문[편집]


1984년 명동성당은 성당 건립 이래 가장 큰 손님을 맞는다.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주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교황은 행사 당일인 5월 6일 대회장에 가기에 앞서 오전 8시 명동성당을 방문했다. 교황은 성당 오른편에 있는 명례방 집회 성화와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이벽 세례자 요한ㆍ이승훈 베드로ㆍ김범우 토마스 성화, 교황 방한 기념 부조를 축복했다. 이어 제대 앞에 마련된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한국 천주교회와 한민족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2014년 사목방문차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일정의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을 방문하였다. 교황은 명동성당 내 꼬스트홀에서 한국 종교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진 후 대성전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주례하면서 남북한의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를 기원했다.


3. 건축[편집]


한국에 있는 고딕 양식 계열의 성당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본당의 높이는 23m, 신랑 높이 약 19m, 탑의 최고 높이는 46.7m, 성당의 전체 길이가 약 68m, 폭 28m다. 정확한 건축 양식은 전통적인 고딕 양식을 근대에 되살린 네오 고딕(고딕 리바이벌) 양식이다.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E. J. G. Coste) 신부가 후에 명동성당을 설계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1892년 5월 8일 정초식을 가졌으나 도중 코스트가 사망하여 푸아넬(Victor Louis Poisnel, 1855~1925)이 이어받아 1898년에 완성하였다. 때문에 구조적, 양식적으로 약현성당과 유사한 편.약현성당에 대한 이해 20여종의 붉은색, 회색의 구운 벽돌을 섞어 지었다.

평면은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랑(nave)이 긴 라틴 십자가형 평면을 가지고 있다. 다만 십자가의 양 날개 부분인 익랑(transcept)이 다소 짧아 평면이 직사각형에 가깝다.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중앙의 통로에서 천장이 높은 곳이 신랑(nave)이라고 하며, 좌우의 낮은 통로는 측랑(aisle)이라고 하는데, 측랑의 폭이 익랑에 맞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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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두식 아치, 성당 입구와 창문
리브볼트, 성당 내부
리브볼트, 성당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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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외벽, 공중부벽(flying buttress)은 없다.
실내 천장에 리브볼트(Ribbed vault)[13]를 사용한 점은 고딕양식에 충실한 점이지만, 전형적인 고딕 성당은 볼트가 석재로 되어 있는 반면, 명동성당의 볼트와 종탑 지붕은 하중을 줄이기 위해 목재로 되어 있다. 성당이 건설되다가 붕괴 사고가 발생했던 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리브볼트가 기둥을 좌우로 밀어내는 힘을 감당하기 위한 외부 구조물인 공중부벽(flying buttress)[14]은 건물 내부에 감추어져 있다. 측랑 상부 2층인 트리포리움에 올라가보면 공중부벽이 보인다.

그리고 건설 중의 붕괴 사고 때문에 원 설계안보다 기둥이 굵고 작은 창을 가지게 되어, 고딕보다는 그 이전의 육중한 양식인 로마네스크적인 분위기를 살짝 풍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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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에 있던 예수상
2014년 보수 때 성당 앞에 있던 예수상이 성당 서편의 교구청 사도회관으로 옮겨졌다. 이 예수상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유명한 조각가인 최종태 요셉이 제작했다. 최종태는 혜화동 성당성모 마리아상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로서 서울 길상사관세음보살상까지 제작한 독특한 이력으로 유명하다.

사적 제258호이기 때문에 실측 자료를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볼 수 있다.


3.1. 대성전[편집]


아래는 대성전에 있는 성상 및 성화.


3.2. 지하 성지[편집]


아래는 지하 성지 묘소에 안치된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5위 및 순교자들.
  •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 모방 나 베드로 신부
  •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두 번째 한국인 가톨릭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아버지
  • 성 김성우 안토니오
  • 순교자 이 에메렌시아
  • 무명 순교자 1명
  • 푸르티에 신부
  • 프티니콜라 신부


3.3. 성당 외부[편집]




4. 역대 본당 주임신부[편집]


순서
이름
재임기간
순서
이름
재임기간
1대
백규삼(장 마리 귀스타브 블랑)[15]
1882~1890
2대
정가미(카미유 외젠 두세)
1890~1892
3대
박도행(빅토르 루이 푸아넬)
1892~1926
4대
우일모(마리 피에르 폴 빌모)
1926~1942
5대
이기준 토마스[16]
1942~1950
6대
장금구 요한 금구[17]
1950~1957
7대
양기섭 베드로
1957~1962
8대
이종순 라우렌시오
1962~1963
9대
신인식 바오로
1963~1964
10대
황민성[18] 베드로
1964~1965
11대
이계중 요한
1965~1968
12대
이문근[19] 요한
1968~1971
13대
최석우 안드레아
1971~1972
14대
김몽은 요한
1972~1978
15대
경갑룡[20] 요셉
1978~1982
16대
김수창 야고보
1982~1986
17대
김병도 프란치스코
1986~1988
18대
정의채 바오로
1988~1988.9
19대
조순창 가시미로
1988.9~1994
20대
장덕필 니콜라오
1994~1999
21대
백남용 바오로
1999~2003
22대
이성만 토마스
2003~2004
23대
박신언 라파엘
2004~2010
24대
여형구 미카엘
2010~2013
25대
고찬근 루카
2013~2018
26대
조학문 바오로
2018~현재


5. 결혼식장[편집]


아래에 언급하지만 명동성당은 천주교 신자인 부부들이 혼인성사를 하길 가장 선망하는 성당이어서 결혼식 수요가 엄청나게 많다. 당연히 이 수요를 모두 감당할 수 없어서 사전에 선별해야 하는데, 복권처럼 추첨해서 선별한다. 신앙이 독실한 신자를 선별하기엔 신앙심을 점수로 계산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헌금 내는 순서로 한다면 이건 말 그대로 성당을 돈 받고 빌려주는 꼴이어서 더더욱 불가능하기 때문. (예시-2020년도 혼인미사 추첨 공지) 물론 대부분은 거리 등의 이유로 소속 교구 내 혼인성사가 가능한 인근 성당으로 향한다.[21]

5.1. 대성전[편집]



파일:external/www.mdsd.or.kr/main_img10.jpg

결혼식이 열리는 대성전
고딕 양식의 웅장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와 상징성 덕분에 천주교 신자들의 혼인성사 장소로는 최고로서 각광받는 곳이다.

토요일, 공휴일에는 정오 12시와 오후 15시에, 금요일에는 오후 13시에 예식 집전이 가능하다.

혼인 비용 - 주교좌 명동대성당 : 기본 5,000,000원(사진 앨범 1,100,000원 포함) + 선택비용(폐백, 냉난방비, 동영상) + 주례감사예물(주례신부님께 직접 전달)


5.2. 파밀리아 채플[편집]



파일:external/www.mdsd.or.kr/chapel_img01.jpg

파밀리아 채플
세련되고 아담한 분위기가 장점이며, 비용은 대성전 혼인성사보다는 저렴하다.

토요일, 공휴일, 주일에는 11시, 13시, 16시에 예식 집전이 가능하다.

혼인 비용 - 파밀리아 채플 : 기본 2,500,000원(사진 앨범 1,100,000원 포함) + 선택비용(폐백, 냉난방비, 스크린, 동영상) + 주례감사예물(주례신부님께 직접 전달)


5.3. 혼인피로연[편집]



파일:external/www.mdsd.or.kr/chapel_img02.jpg

혼인피로연 장
예식이 대성전인 경우 프란치스코홀(금요일)과 문화관 1층(토요일, 공휴일)을 파밀리아 채플인 경우 프란치스코홀을 이용한다.


6. 방문[편집]


명동의 최동단이기 때문에 4호선 명동역보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이 가깝다. 명동에서 올 때는 오르막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걸어오는 경우라면 을지로입구역에서 내려서 오는 편이 더 낫다.

명동역에서 올 경우에는 8번 출구와 가까이 있는 옛 계성여자고등학교 후문 쪽으로 와서 옆길을 이용하면 빠르게 갈 수 있다. 그 길로 가다보면 '명동성당 지름길' 이라며 간단한 안내 표시도 나온다.


7. 미사[편집]


아래 미사 시간표는 대성당에서 봉헌되는 미사를 기준으로 작성한 시간표이다.

요일
미사 시작 시간
주일
07:00, 09:00(영어미사), 10:00, 11:00, 12:00(교중미사),
16:00, 17:00, 18:00, 19:00(청년미사), 21:00
월요일
06:30, 10:00, 18:00
화 ~ 토요일
06:30, 18:00, 19:00[22]
또한, 월~토 오전 10시 지하성당에서 성지 미사를 봉헌한다.

서울에 체류하는 영어권 외국인 신자들을 위한 영어 미사도 봉헌한다. 영어 미사는 주일 오전 9시에 대성당에서 봉헌된다.

토요일 저녁 6시, 7시 미사는 주일미사(특전미사)로 진행된다. 이 중 7시 미사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사용한다. 원래 라틴어 미사였는데 미사를 집전하시던 신부가 다른 곳으로 가는 바람에 미사를 드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바뀌었다. 신학교에서 라틴어 배우지 않나? 왜 다른 신부님은 라틴어로 못 드리지?? 그 전에 1학년 때 Missale Romanum(라틴어 미사 경본)을 줄 텐데?![23]

2020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21시 미사가 사라졌다.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던 주일 밤 9시 미사를 2022년 5월 22일(주일)부터 재개한다는 공지가 나왔다. (2022년 5월 4일 공지 - 주일 밤 9시 미사 재개)


7.1. 강론[편집]



얼마 전 유튜브 cPBC 평화방송 채널의 매일미사 방송 댓글에 누군가가 미사 강론을 방송국에서 써 준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의 댓글을 올린 적이 있다. 미사 강론은 원칙적으로 집전 사제가 준비하는 것이다. 대축일 교구장 사목교서를 집전 사제가 읽거나 홍보 목적으로 다른 사제가 강론 시간을 쓰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사제가 쓴 강론을 집전 사제가 대신 읽는 경우는 없다.

단, 명동성당에서는 다른 본당에서는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강론 전담 사제가 있다는 것이다. 미사 시간표에서 알 수 있듯 영어미사를 제외하고 주일 미사가 9대 있고, 토요일과 어린이 미사까지 포함하면 미사만 10대 이상이고, 명동성당 상주 사제 1인당 2대 이상의 미사를 소화해야 한다. 어린이 미사와 청년 미사를 제외하고 그외 일반 미사 강론을 5명의 사제가 모두 준비하는 건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일반 미사 강론을 전담하는 사제가 있다.

이 경우에도 미사 집전 사제와 강론 담당 사제가 다른 경우 강론 담당 사제가 복음 봉독과 강론만 하고 퇴장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즉 강론 담당 사제가 써 준 강론을 미사 집전 사제가 대신 읽는 게 아니라 강론을 쓴 강론 담당 사제 본인이 직접 강론을 하는 것이다.



8. 21세기 명동성당 개발 계획[편집]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1061100329_1.jpg

명동성당 개발 관련 《조선일보》 기사[24]
정확한 명칭은 〈명동성당 특별계획구역 세부개발계획〉이다. 명동성당을 비롯하여 종교, 역사, 문화,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건축물들이 밀집한 이 지역을 체계적으로 재단장해, 명동 관광특구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 계획은 2029년까지 20년간 총 4단계로 진행되게 되어있다.[25]

2015년 1월까지 진행되었었던 1단계 사업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업무공간으로 활용되는 교구청 신관이 지하 4층~지상 10층으로 증축되었고[26], 초기 명동성당의 경사로가 복원되었으며 주차장 등으로 쓰이던 상당 진입부가 광장으로 조성되었고, 대신 교구청 신관 지하에 주차공간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차량으로 인해 혼잡해보이던 명동성당 진입부 부분이 상당히 깔끔하게 바뀌었다. 암튼 공사 전 우려했던 것에 비해 반응은 좋은 편으로[27], 교구 사무 공간이 증축되고 지하 상가가 새로 생겼다. 사실 상가라고는 하나 내부가 광장처럼 넓고, 서점카페 위주로 입점하여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1단계 공사가 진행되면서 역시나 이런저런 문제점이 발생했는데[28]@ 이에 대해 시공사인 대우건설에서 서울대교구와 협의없이 공사 진행의 편의를 위해 진행하다 생긴 문제라며 사과를 하기도 했다.

현재는 2단계 사업단계로 교구청 신관이전으로 여유공간이 생긴 교구청 별관 수선이 이뤄지고 있으며 3단계는 계성여자고등학교의 이전으로 생긴 빈 공간에 교구 업무타운 조성과 대강당 증축 등이 추진된다. 마지막 4단계는 60년대 지어진 가톨릭회관 하부 일부를 수선하고 교육관을 철거하게 된다. 그 이후 선교센터를 구축하고 수선한 가톨릭회관 하부 필로티에 쌈지공원이 생길 예정으로 있다.

이에 대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이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원로사제인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이제 명동성당에 오면 솔직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화 성지가 더 이상 아니다.

원형을 지키기는커녕 집회와 시위를 막으려고 넓은 길을 좁혀서 구불구불하게 만들고, 화단까지 조성해 놓고,

상업시설까지 들어와 죽 치고 있는 게 너무 꼴 보기 싫다!! 자본주의의 때가 껴도 너무 끼었다.

자꾸만 보수 개신교 대형 교회의 모습을 벤치마킹 하는 것 같다."



9.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명동성당/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주변 시설[편집]



10.1.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본원[편집]


성당 뒤편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본원이 있다. 1696년 프랑스에서 루이 쇼베 신부에 의해 창설되어 1888년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로, 한국 가톨릭에서 (남녀 수도회 통틀어) 제일 오래된 수도회이다.[29] 프랑스인 수녀 2명과 중국인 수련수녀 2명이 입국하여, 오늘날의 거대한 수도회로 성장했다.

당연히 한국 최초의 수녀를 배출해 낸 수도회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박황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수녀[30], 김해겸 마리아 쌘뽈 수녀이다. 원래 최초로 수녀원에 입회한 소녀들은 5명이었으나, 3명은 병으로 일찍 죽었다.

오늘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한국 가톨릭에서 제일 큰 규모의 수도회로, 2개의 관구(서울관구, 대구관구)에 1,000여 명의 수녀들이 있다. 본당, 교육, 병원, 사회복지 등등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명동성당의 수녀들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이다.


10.2. 옛 계성초등학교, 계성여자고등학교[편집]


성당 뒤편에 계성초등학교, 오른쪽에 계성여자중학교와 계성여자고등학교가 있다. 교문이며 건물이 주변 건물과 비슷하게 생겨서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 보호색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소속으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에서 위탁운영하는 학교들이다. (교장이 수녀이고, 교사들 중에도 수녀들이 있다.) 이 가운데 계성여자중학교는 1987년에 폐교되었다.

계성여자고등학교는 축제날과 졸업식날, 1년에 2번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31] 특히, 축제날에는 본격적인 축제 시작 전 아침에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이 미사가 끝나면 교내 시상식이 있었다. 조용한 명동성당에서 와글와글 떠드는 여고생들과, 그녀들을 진압하기 위한 선생님들의 고함소리가 난무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도심 공동화 문제로 학생 수가 급감하는 문제가 발생해서, 2016학년도부터 성북구 길음동 길음뉴타운으로 학교를 이전하면서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교명도 계성고등학교로 변경되었다.[32] 그 때문에 명동성당에서 하는 졸업식은 1997년 3월~1998년 2월생(24~25세)을 끝으로 영영 없어졌다.

계성초등학교2006년 2월 28일 서초구 반포동 신반포역 인근으로 이전했다.

계성여자고등학교도 기존의 아가씨 학교(?) 이미지를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잃어버렸다. 학교가 이전한 지금, (현재 성북구로 옮겼고, 남녀공학이 되어 명칭도 계성고등학교가 되었다.) 건물은 서울대교구 문화학교와 영성센터로 사용중이며, 명동성당 상설고해소가 이곳에 있다. 명동성당 3단계 개발사업 때 리모델링 후 천주교 서울대교구 업무시설로 쓰일 예정으로 있다.


10.3. 가톨릭회관(옛 명동성모병원)[편집]


명동성당 입구 쪽에 자리잡은 가톨릭회관은, 원래 여의도성모병원의 전신인 명동성모병원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강남성모병원이 서울성모병원으로 엄청난 규모로 확장하기 전에는 그냥 성모병원으로 불렸으며, 가톨릭중앙의료원(CMC)의 모태가 되는 병원이었다. 1986년에 여의도로 이사를 갔고, 이후 병원 건물은 가톨릭회관으로 리모델링 되었다.

회관에는 각종 가톨릭 단체들이 입주해 있고, 우리 농산물을 판매하는 가게도 있다. 1층과 2층에는 성물 및 신앙서적들을 판매하는 곳도 정말 많으며,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성물점도 많다. 베네딕토회[33], 예수의 성모 수녀회,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회에서 성물점을 운영하고 있다.

동네 성당 성물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 뿐 아니라 성작, 성반, 성합, 성광, 감실, 입당용 십자고상 등도 있다. 또한 사제들이 입는 제의, 수단, 클러지 셔츠 등도 판매하고 있다. 다만, 당연히, 일반인이 옷가게에서 옷 사듯이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구입할 수는 없다. 그 외에 바오로 딸 서원도 있고, 까말돌리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전통 약방도 있다.#

까말돌리 수도회의 약방에서는 일반 약국과 같은 의약품을 파는 건 아니고, 보습제, 영양크림, 핸드크림 등등을 판다. 본래 까말돌리 수도회는 오래 전부터 약초를 이용해 약품, 화장품, 식료품, 와인 등을 만들어 환자를 돌보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등의 일을 해왔다. 시중에서도 '유럽 수도자들이 만든 까말돌리 화장품' 등의 문구로 광고하며 화장품을 파는데, 까말돌리 수도회와 관련이 있는 업체인지는 의문. 위의 관련 기사를 읽어보니, 까말돌리 수도회와 관련 없는 업체에서 까말돌리 화장품을 멋대로 파는 듯하다.

우연인지 재미있게도, 까말돌리 수도회와 한국 천주교 사이에는 인연이 있다. 1831년 9월 9일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시켜 조선대목구(現 천주교 서울대교구)를 설정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까말돌리 수도회 수사 출신이라는 것.


11. 기타[편집]




《가톨릭튜브》에서 제작한 명동성당 종 관련 영상

  •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천주교 성당답게 삼종기도를 바치는 오전 6시, 낮 12시, 오후 6시에 종을 울린다. 대성전 종탑에 종이 걸려 있는데 현재 걸려 있는 종은 2001년에 새로 설치한 종이며 역대 명동성당의 종 중에서 세 번째로 달린 종이라고 한다. 첫 번째로 설치돼 사용됐던 종은 성당이 지어졌던 1898년부터 1965년까지 있었고 두 번째로 설치돼 사용됐던 종은 1965년에 명동성당 교우들의 정성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두 번째 종은 현재는 성당 서쪽 문화관 천장에 달려있다. 현재 종탑에 걸려 있는 세 번째 종은 1년에 단 하루만 울리는데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 때만 실제로 타종하며[34] 평상시에는 녹음해둔 종소리를 시간에 맞춰서 방송으로 울린다. 실제 타종을 성탄절에만 하는 것은 건물의 안전 때문이라고 한다. 종을 칠 때 퍼지는 진동과 음파가 자칫 건물의 벽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에 실제 타종 횟수가 적은 것이다.

  • 2002년에는 성당 내부 기둥에 벽걸이 TV를 설치해, 제대에서 거행되는 전례를 성당 어디에서나 볼 수 있도록 했다. 기둥 때문에 가려진 제대를 보지 못하며 전례에 참례하는 불편함이 사라졌다.


  • 네이버에서 명동성당을 검색하면 어린이 청소년을 담당했던 모 보좌신부가 연관검색어로 뜬다. 그 이유는 이 신부가 신자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극강 동안이었기 때문. 강론에서도 본인이 동안이라는 걸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으며, "저 같이 귀여운 신부가 이하생략". 사진을 올려라!! 심지어는 어떤 외국인 부부는 미사 도중에 이 신부가 지나가는 것을 보더니 "So cute"(…)라고 말한 것을 신부 본인이 강론 중에 직접 언급하며, 본격 '글로벌 귀요미'에 등극했다고 자화자찬하였다. 손발리 오그라진다 하지만 2012년 인사발령에 따라 이 신부는 명동성당을 떠났다. 미사 드리러가 아니라 신부 얼굴 보러왔던 신자들 안습. 한 술 더 떠서 다른 성당에 있다가 아예 이탈리아유학을 갔기 때문에 이제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바티칸에 갔을 때 거행된 미사에서, 주례 추기경의 강론을 대독했으니, 영상을 찾아보면 확인할 수 있다. 방부제를 한 사발 잡수신 듯, 여전히 동안이다.

  •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하나 있는데 랜드마크로서의 상징성도 더 높지만 그 정류장을 코앞에 끼고 있는 중앙극장에게 그 정류소 명칭을 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극장 문서 참조.

  • 한국 최초의 본당인 만큼 사실상 속인적 본당으로 간주되어 신자들의 거주지와 상관없이[35] 교적이 2만 개 넘게 소속되어 있으며[36], 1년에 한두 번 정도 모집하는 평범한 본당들과 달리, 2월과 8월을 제외하면 매월 예비신자 교리반을 모집한다. 사실 예비신자 교리반 이수는 꼭 거주지 관할 본당이 아니어도 큰 문제가 없긴 하다. 세례를 받고 나서 주소지 관할 본당으로 교적을 옮기면 되니까. 천주교 군종교구 신병교육대 성당 급의 영세율을 나타낸다. 그리고 견진성사 교리반도 1년에 2회(상반기, 하반기) 모집한다.

  • 명동성당 영어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경우, 교적에 상관없이 참석할 수 있다.[37] 한남동 국제성당과 다른 점은, 국제성당은 애초에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운영하는거라 교적 제도 자체가 없지만 명동성당에는 전례를 통해 영어를 배우고 싶은 한국인과 한국에서 장기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오기 때문이다.[38] 이럴 경우 교적과 상관없이 명동성당에서 영어미사를 드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마찬가지로 교적은 본인 관할 성당에 둬야 하고 판공성사는 본인의 교적이 등록된 관할 성당에 내야 한다.

  • 최초의 성당인만큼, 최초의 스테인드글라스도 가장 먼저 설치됐다. 프랑스 툴루즈의 제스타 공방에서 제작되어 설치된 것인데,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많은 것이 깨져 수습한 뒤 1898년 성당 축복식에 맞춰 설치했다. 이후 명동대성당이 6.25 전쟁으로 크게 파손되면서 스테인드글라스도 마찬가지가 됐지만 오랫동안 손을 대지 못했다. 그 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한 것을 계기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수하고 복원했다.

  • 2019년 11월 기준 명동성당에 교적을 둔 세대수는 총 19,367세대이고 이 가운데 교무금을 책정한 세대수는 2,947세대로, 교무금 책정률은 약 15%정도이다.

  • 대성전이 부제/사제 서품식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협소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제/사제 수품 예정자가 최소 수십 명이라 각 수품자의 가족, 친지, 출신 성당 소속 신자들 등 수많은 인원을 수용할 공간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은 대부분 잠실실내체육관, 올림픽공원에서 열린다(…) 그래서 2011년부터 총 4단계에 걸친 대대적인 종합개선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각 수품자의 부모만 현장 참석을 허용하고 나머지 인원은 참석을 불허하여, 원칙대로 명동성당에서 서품식이 열렸다. 또한 주교 서품식이나 수도회 사제 서품식[39]은 종종 명동성당에서 열린다.

  • 현재 장궤틀이 없다. 무릎 꿇는 행위를 칭하는 '장궤'는 보통 때의 미사 중에는 성찬 전례 때 거양성체 때와 영성체 직전 두 차례 행하며,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수난복음 봉독 중 한 차례(예수의 죽음을 언급하는 대목), 주님 수난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중에는 매우 자주 행하며, 그 외에도 미사 밖의 여러 신심 행사는 물론 개인적인 기도를 바칠 때도 장궤를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나라 천주교회들과는 달리, 유독 한국 천주교는 새로 짓는 성당은 물론이고 기존 성당에 있던 장궤틀도 없애고 있는 추세다. 신자 수에 비해서 성당 규모가 작다 보니, 좌석 수를 늘리기 위해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장궤틀을 아예 없애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실 현재 많은 한국인 가톨릭 신자들은 장궤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40]

  • 명동성당에 있는 성물방은 가톨릭출판사 및 기타 업체에서 관리하고 있다. 대성당 옆 건물에 있는 성물방 하나와 가톨릭회관 1층에 있는 성물방 하나는 가톨릭출판사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나머지 성물방들은 기타 업체, 출판사에서 운영하고 있다. 미사 직후에 잠깐 성당 평신도 봉사자들이 운영하는 평범한 동네 성당 성물방과 다르게, 이쪽은 별도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카드 결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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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출처.[2]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천주교 서울대교구.
[3] 사진 출처.[4] 서소문공원 인근의 중림동 약현성당, 인천 답동성당, 대구 계산성당, 전주 전동성당, 아산 공세리성당 등과 더불어 구한말에 지어진 대표적 고딕 양식 성당으로 분류된다.[5] 안중근 의사의 동갑내기 사촌이다.[6] 일제에게 종신형을 선고 받아 10년 넘게 복역하다가 감형되어 남만주로 망명한다.[7] 다만, 이 때는 가톨릭 교회가 자발적으로 신자에게 금속품을 일제에 헌납할 것을 장려하던 시절이다.[8] 제대와 신자석을 분리하는 분리대[9] 현재도 명동성당의 영성체 난간은 목재 난간이다.[10] 이 인간도 이완용 못지않은 악질이다. 콩고를 지배하며, 사람들을 노예로 부려먹으면서 엄청난 사람들을 죽이고 손목을 자른 학살자다.[11] KBS TV를 통해 생중계되던 성탄 자정미사 강론 도중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라는 말로 장기집권을 노리던 박정희 정권을 향해 핵직구를 날렸다. 결국 이 강론을 들은 박정희는 크게 격노했고, 미사 중계를 담당하던 KBS에 득달같이 전화해 방송 중단을 지시한다.[12] 1987년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이 어느날 옆방에서 어느 수형자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교도관에게 "저 사람은 왜 울부짖느냐"고 묻자, 교도관은 "사실 저 울부짖는 수형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고문을 자행했던 고문 경찰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조작됐다."는 충격적 사실을 말해주게 된다. 이부영은 이 사실을 메모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측에 전달했고, 이날 미사를 집전했던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사건의 조작·은폐를 폭로했다. 그리고 이 폭로는 나비효과가 되어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13] 롤빵처럼 둥근 천장을 볼트라고 하며, 리브는 천장의 뼈대를 말한다.[14] 성당 외부의 독립된 기둥들로, 외벽이 밖으로 쓰러지는 것을 막아준다.[15] 제7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명동성당을 짓던 중, 1890년에 선종하였다.[16] 명동성당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17]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언변이 좋고 강론을 잘 하여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래서 한국 가톨릭에서는 그를 '요한 금구(金口)'라고도 부른다.[18] 제2대 천주교 대전교구장.[19] 여러 성가를 작곡한 작곡가이며, 영화 포화 속으로의 모티브가 된 이우근 학도병의 형이기도 하다.[20] 제3대 천주교 대전교구장.[21] 대표적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영애인 문다혜가 남천성당에서 혼인성사를 치뤘다.[22] 토요일 저녁 6시와 7시 미사는 청년미사이자 특전미사로 봉헌된다.[23] 사제로서 다수의 신자들 앞에서 미사 통상문과 고유문을 라틴어로 그것도 노래로 바치는 것은 상당한 연습과 용기를 요구한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라틴어 외에도 신학생과 신부들이 계속 연습해서 한국어 미사 통상문을 노래로 바치는 수준으로 체득해야 한다.[24] 《조선일보》.[25] 명동관광특구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계획이라는 이유로, 상당수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26] 십자가가 있는 첨탑보다 낮게 지어야 하다보니 10층으로 결정되었다[27] 재개발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래 비판과 견해에도 후술되어 있듯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상업적인 장소로 전락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28] 부지 전체가 아니라 대성전만 문화재라서 대성전보다도 오래된 주교관이 문화재가 아닌 것, 땅 파는데 대성전 안 무너지도록 고려 제대로 했는지 논란, 조선시대 유적 + 근대유적 다 묻혀 있는데 무시하고 부숴버린 등[29] 한국 가톨릭에서 제일 오래된 남자 수도회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본원을 두고 있는 성 베네딕토회이다(1909년).[30] 할아버지 박 바오로는 병인박해순교했고, 아버지 박순집 베드로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서 묻어 주고,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선교에 힘썼다.[31] 그 이외의 미사들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미사를 드렸다.[32] 대구광역시에도 같은 교명을 가지는 유서 깊은 고등학교가 존재한다(같은 재단인 계성초등학교, 계성중학교도 있다). 이쪽은 계명대학교 재단으로,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계열이다. 대구 계성고등학교도 2016학년도부터 학교를 새로운 곳으로 이전했는데, 이래저래 말이 많았다. 특히, 공사비 문제로 건설사와 마찰이 심했다.[33] 정통 독일식 수제 소시지도 (소규모로) 판매한다.[34] 주님 부활 대축일 전례의 핵심인 파스카 성야 미사 중 대영광송 때는 제대 뒤에 있는 제대종을 친다.[35] 그러나 2015년부터는 명동성당 근처가 거주지가 아니면 명동성당으로의 교적 이동이 쉽지 않다고 한다. 역으로 명동성당 근처에 사는 사람이 다른 성당에 교적을 두는 것 또한 매우 어렵다. 2018년 12월 기준 명동성당에 문의한 결과, 일반성당과 마찬가지로 명동성당 주변에 주소지를 둘 경우에만 교적이동이 가능하며, 그 외의 경우는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한 경우만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수료 후에는 주소지 근처 성당으로 재배치된다). 다른 대성당도 마찬가지로, 부산교구 남천성당의 경우 해당 성당 근처에 사는 사람만 교적을 둘 수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내에서는 대성당 관할지역에 살지 않는 한 일반적인 미사를 목적으로 대성당에 갈 일이 별로 없다. 같은 이유로 다른 성당들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그쪽에 교적 넣기가 쉽지 않다.[36] 명동의 주민등록 인구가 1만 명 선이다(…) [37] 원래 어느 나라의 어떤 성당이든 교적과 상관없이 미사는 참석할 수 있다.[38] 한국에서 주소를 두고 거주할 경우 당연히 이들도 교적을 만들어 관할성당에 등록해야 한다.[39] 대표적인 곳이 한국외방선교회.[40] 새로 짓는 성당에는 아예 장궤틀이 없는 경우가 많고, 상징적으로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에 장궤틀이 없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림동 성당이나 혜화동 성당처럼 장궤틀을 뜯어내지 않고 계속 사용하는 곳도 있고, 이문동 성당처럼 새로 지으면서 장궤틀을 갖추는 곳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