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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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의 제32대 군주. 신문왕의 태자이고, 어머니는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이다.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긴 신문왕과 오래 재위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성덕왕 사이에 끼어서 상대적으로 오래 재위하지도 못하고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나름 업적을 남기기는 했다.
2. 생애[편집]
효소왕은 《삼국사기》에 생년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신문왕 본기> 신문왕 7년(687년) 봄 2월에 원자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효소왕이 태어나던 날 날씨가 매우 어두웠으며 천둥 번개가 많이 쳤다고 한다. 692년 즉위했으니 기록대로라면 6세(만 5세) 때 즉위하여 16세(만 15세)에 죽은 것이 된다.[3] 역대 신라 군주들 중에서 최연소 즉위다.[4] 어쨌든 효소왕은 신문왕의 태자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유년기에 즉위한 왕이 친정(親政)을 했다기보다는 모후(母后)나 신하들의 섭정(攝政)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일단 《삼국사기》에 그런 뉘앙스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왕권을 대변하는 중시 자리에 신문왕 시기 공신들이 연이어 임명된 것과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된 황복사 3층 석탑의 금동사리함기를 보면 발원자가 효소왕과 신목태후(신목왕후) 명의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신문왕 시기 공신들의 조력으로 신목왕후가 섭정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효소왕이 즉위한 692년에 좌리방부(左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51년 설치)와 우리방부(右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67년 설치)를 각기 좌의방부(左議方府)와 우의방부(右議方府)로 바꿨는데 효소왕의 이름 '이홍'(理洪)에 '이'(理) 자가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철저히 지켜졌고, 현대 한국에도 일부 남아있는[5] 피휘(避諱) 문화가 슬슬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좌의방부와 우의방부는 정부 관청 이름이니까 바꿨지만 이외 부분에서는 고려나 조선과 달리 피휘를 철저히 지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건국되기 전의 중간기인 효소왕 시대에는 신라 북쪽에 여전히 고구려 잔존 세력이 어떤 나라의 통치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는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693년 3월 국선 부례랑이 원산 인근에서 그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효소왕 시대부터 옛 고구려 남부 영토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하는데 훗날 500년 고려 왕조의 수도가 될 송악성을 694년에 축성하고, 이것을 신호탄으로 이후 훗날 패서(浿西)로 불릴 지역에 계속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켰다.
695년 수도 서라벌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했다. 이미 지증왕 때 동시(東市)가 세워진 바 있으므로 이제 서라벌에는 3개의 큰 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이는 삼국통일 이후 수도 서라벌의 상업과 유통이 크게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후속 조치로 서시와 남시를 관리하는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도 설치하고 조세를 담당하는 조부(調府)의 사(史, 서기관) 2인을 증치(增置)했다.
698년 일본의 조공을 받고 699년 당과 화해하여 오랜만에 조공을 재개했다. 698년 발해가 건국되는데 통일신라는 발해가 건국되자마자 대조영에게 대아찬이라는 벼슬을 하사한다. 이는 발해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면서도[6][7] 통일신라가 발해보다 위라는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다.[8]
700년 이찬 경영이 반역을 도모하다 살해당했는데 중시였던 김순원이 여기에 연좌되어 파면당했다. 예전에는 이찬 경영의 반역 도모를, 이후 왕비를 배출하게 되는 김순원의 파문을 들어서 전제 왕권에 도전하는 진골 귀족 세력에 대항하여 일으킨 것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복구하고자 했던 세력과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던 세력 간의 다툼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9] 신라와 당나라는 나당전쟁 이후 7세기 후반 동안 데면데면한 관계였던 반면 일본과는 교류가 오히려 늘었는데 이 때쯤부터 다시 일본과의 교류가 점점 줄어들고 당나라와는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때문이다.
700년 6월 어린 효소왕 대신 정치를 했을 신목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효소왕은 14세에 불과했는데 <신라 촌락 문서>에 따르면 신라에서 성인으로 여기는 나이는 15세 ~ 16세인만큼 아직 미성년일 때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사망한 것이다.
702년에는 효소왕도 사망하는데 이 때가 16세였다. 고대 사회 기준으로도 일찍 세상을 떠난 편인데 효소왕 역시 아버지 신문왕처럼 치세 1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효소왕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으므로 친동생인 김융기가 즉위하는데 그가 바로 성덕왕이다.
신라 하대의 혼란을 왕들의 이른 죽음에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다면 신라 중대에도 같은 혼란이 올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전왕의 이른 죽음으로 다음 왕이 지나치게 어릴 때 즉위하게 되기 때문이다. 신문왕과 효소왕에 이어 성덕왕 역시 즉위시 10대 초반이어서 신문왕 초기 김흠돌의 반역 사건이나 효소왕 시기 이찬 경영의 반역 사건과 같은 국정 혼란이 발발할 것으로 보였지만 다행히 효소왕 시대는 부왕 신문왕이 철저하게 판을 깔아두어 왕권이 가장 안정화된 시대였다. 또한 성덕왕 대에는 본인 자체가 명군이라 8세기 신라는 위기를 벗어난다.
3. 효소왕릉[편집]
자세한 내용은 효소왕릉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184호.
4. 일화[편집]
-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평왕의 천사옥대의 장식이 실제 용임을 간파하고 하나를 연못에 넣어보아 용이 승천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왕이 총명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퍼진 설화일지도. 또 잠시 잃어버렸었던 만파식적을 되찾아 '만만파파식적'이라고 개명시키기도 했다 한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설화적 성격이 강한 일화들이지만 이 이야기대로라면 어렸어도 총명하기는 했던 모양.
- 《삼국유사》에서만 전하는 혜통 스님의 일화도 효소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삼국유사》에 따르면 <모죽지랑가>의 배경 사건이 되는 호족 익선의 화랑도 모독 사건이 일어나 익선의 아들이 익선 대신 사형당하고, 익선의 고향 모량리 출신 사람들은 전부 연좌제에 걸려 관직과 승직에서 추방된 사건이 있었다.
5.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효소왕 본기>
一年秋七月 효소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원선을 중시로 삼다
一年 도증이 당에서 돌아와 천문도를 바치다
三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면하다
三年 문영을 상대등으로 삼다
三年 김인문이 당에서 죽다
三年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다
四年春一月 자월을 정월로 정하다
四年春一月 개원을 상대등으로 삼다
四年冬十月 도읍에 지진이 일어나다
四年 중시 원선이 물러나다
四年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다
五年春一月 당원을 중시로 삼다
五年夏四月 가뭄이 들다
六年秋七月 완산주에서 가화를 바치다
六年秋九月 임해전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다
七年春一月 체원을 우두주총관으로 삼다
七年春二月 도읍에 지진이 나고 태풍이 불다
七年春二月 당원이 물러나자 순원을 중시로 삼다
七年春三月 일본국 사신이 오다
七年秋七月 도읍에 홍수가 일어나다
八年春二月 살별이 나타나다
八年 당에 방물을 바치다
八年秋七月 동해 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八年秋九月 동해에서 수전이 벌어지다
八年 미짐이 주운 황금을 왕에게 바치다
九年 인월을 정월로 하다
九年夏五月 경영이 반란을 도모하여 죽이다
九年夏五月 순원이 반란에 연좌되어 파면되다
九年夏六月 목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年春二月 혜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年夏五月 영암군 태수 제일을 벌하다
十一年秋七月 효소왕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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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유사》 기록에 근거해서 677년에 출생했다고 보기도 한다.#[2] 《삼국사기》에서는 효소왕이 7월 27일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황복사금동사리함기』에 기록된 효소왕의 기일과 일치한다. 공교롭게도 할아버지, 아버지와 같은 달에 죽었다. 한편 《삼국유사》 <탑상> -오대산 오만진신조-에서는 16세에 즉위하여 26세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일연이 6세에 즉위하여 16세에 사망한 것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 신빙성을 두고 실제로 26세에 죽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3]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효소왕이 16세(만 15세)에 즉위하여 26세(만 25세)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신문왕 7년에 태어난 원자가 효소왕이 아니라 다른 왕자라고 보고 효소왕의 실제 출생연도를 677년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존재한다.[4] 효소왕에 이어 2번째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은 상대 최고의 정복 군주 진흥왕(7세, 만 6세)이었고, 대조적으로 가장 최고령에 즉위한 군주는 지증왕으로 즉위 당시 나이가 무려 64세(만 63세)였다.[5] 현대에도 우리나라는 상대방을 이름보다는 직책이나 관계로 부르는 일이 많고 절친한 친구가 아닌 이상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어감상꺼리는 문화가 남아있다. 박 일병, 이 사장, 김 선생, 황 서방 등.[6] 대아찬은 신라 골품제에서 왕족과 똑같은 진골이고, 신라가 신라인이 아닌 외부인에게 진골 대접을 해 준 건 그 외부인이 다른 나라의 왕족급일 때 뿐이었다.[7] 다만 이 인정이 발해를 고구려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통일신라는 고구려를 신라가 흡수했다는 입장을 견지했기에, 최치원의 표현을 인용하면 발해는 고구려의 '잔당'으로 간주했다. 고구려 후손이 아닌 건 아닌데 일부 이단인 셈. 그래서 발해는 신라나 당나라와 외교할 때는 고구려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일본과 외교할 때만 고려라고 했다.[8] 두 나라는 옛날 삼국시대처럼 전쟁을 크게 벌어진 않았지만 이런 묘한 자존심 싸움은 이후 200여년간 계속된다. 어느 나라 사신이 당나라에서 더 윗자리에 앉느냐, 어느 나라 유학생이 당나라 빈공과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하는가 등등.[9] 김순원은 복권되었는지 이후 성덕왕과 효성왕 시대에 신라 정계에 복귀해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