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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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정조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홍낙춘(洪樂春)이며, 어머니는 이유(李維)의 딸이다. 동복오빠는 홍국영이다. 조선 역사상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무후무한 예우를 받은 유일한 후궁이다.
그녀의 가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홍이상이 8대조이고, 정명공주의 남편 영안위 홍주원이 6대조 조상이 된다. 따라서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과 연결되어 있으며, 원빈 홍씨와 정조는 12촌이 되는 셈이다.
또한, 그녀의 5촌 당고모는 경주 김씨 김한희의 부인이자 김면주의 어머니였다. 김면주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그 오빠 김귀주와 6촌이 된다. 홍국영이라는 인물이 정조 시대를 다루는 사극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유명하다보니 집안이 이미 왕실과 인연이 있다는 점은 간과되는 편이다.
2. 생애[편집]
2.1. 출발선부터 파격적인 대우[편집]
1778년(정조 2) 5월 2일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빈어(嬪御)를 간택하라는 언서를 내린다. 이때 정순왕후는 "불행하게도 중전(효의왕후 김씨)에게 병이 있어서 후사를 볼 가망이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2] 이에 따라 금혼령과 함께 간택이 치러지고, 1778년(정조 2) 6월 13세의 어린 나이에 후궁으로 책봉된다.[3]
원빈 홍씨에 대한 예우는 파격적이었다. 본래 후궁들은 대부분의 절차를 의례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홍씨는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까지 간택의 모든 절차를 거쳤으며, 가례의 의절과 의장은 대명집례[4] 와 당나라와 명나라의 예를 모두 찾아본 다음 시행하였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채제공이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다음, 대전에서 중궁전까지 순서대로 인사를 끝냈다.[5] 그런데 숙창궁의 승언색(承言色)[6] 이 채제공에게 온 것이다. 이에 채제공이 놀라서 "세자를 탄생한 빈궁(嬪宮)이 아니면 문안할 수 없는 것이 예법인데, 누가 이를 예로 정하였는가? 유독 하늘에는 두 해가 없는 이치를 모르는가?" 라고 말했다.[7][8] 비록 원빈이 간택후궁 중에서도 후사를 넓힌다는 뜻으로 들어온 인물이기는 했지만,[9][10] 엄연히 왕비인 효의왕후가 건재하고 세자를 낳지도 않았는데 원빈에 대한 예우가 선을 넘었다는 의미.
훗날 정조도 이것이 너무 파격이었다고 생각했는지 두번째 간택 후궁인 화빈 윤씨를 들일 때는 "이번에는 그렇게 할 것 없으니, 품계가 있는 빈원의 예를 참고해서 하라."고 한다.[11]
2.2. 효의왕후와의 갈등[편집]
역사상 왕실에서는 '후사를 넓힌다'는 뜻으로 종종 후궁 간택이 있었다. 그러나 성종, 선조, 인조, 숙종 등이 후궁을 간택한 전례와 비교하면, 간택된 처녀들은 집안의 유무에 상관없이[12] 내명부 종2품 숙의의 품계로 입궁하였다가 차차 승급하였다.[13] 그런데 원빈 홍씨는 처음부터 정1품 빈(嬪)으로 입궁하더니 빈호에는 으뜸 원(元) 자를 썼다.[14] 일개 후궁에 대한 이런 무리한 예우는 자연스레 왕비였던 효의왕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당시 효의왕후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숙창궁입궐일기》가 있다. 여기서 효의왕후는 더위를 핑계로 원빈 홍씨의 조현례를 받는 걸 며칠이나 미루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부녀의 도리 자연 적국(측실)을 꺼림이 예사라"는 표현으로 효의왕후 입장에서 원빈 홍씨를 꺼리는 건 예삿일로 말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효의왕후의 처지는 상당히 곤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혜경궁 홍씨가 죽고 김조순이 지은 지문에서 '중궁이 누차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다'는 내용이 있다.
홍국영(洪國榮)의 악(惡)이 무르익었을 적에 그 누이동생을 궁중에 들이고는 원빈(元嬪)이라고 일컬으면서 분수에 벗어나는 일을 넘보았으므로 중궁이 누차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으나, 〈빈께서는〉 간사한 싹을 미리 꺾어 극력 보호함으로써 마침내 안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궁중의 일은 은밀하여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불만을 품은 무리가 도리어 간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중궁이 위험에 빠진 것은 자궁이 주장하여 꾸며낸 일이다.'라고 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16년 1월 21일
2.3. 이른 죽음[편집]
1779년 5월, 원빈 홍씨는 창덕궁 양심합에서 1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국영은 여동생 원빈 홍씨가 갑자기 죽은 이유를 효의왕후에게서 찾았다.
하늘이 밝으시고 국영이의 죄악이 천지에 가득 차니, 그 누이는 들어온 지 일 년도 못 된 1779년에 별안간 죽었느니라. 이 일로 국영이가 독기와 화를 이기지 못하여, 제 감히 누이 죽은 것에 중전을 의심하여 정조를 돋워 중전의 내인들 여럿을 잡아다가 칼을 빼들고 무수히 협박하며 조사하니라.
《한중록》
하지만 정조가 직접 지은 행장에서는 원빈 홍씨가 종기를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온다. 원빈 홍씨는 어려서부터 평소에 병이 없었는데, 1778년(정조 2) 겨울부터 종기가 여러 번 발병하여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종기를 앓지 않는 달이 없었으며, 증세가 갈수록 심해져 죽기 1달 전부터는 통증이 극심했다.[15]
야사에서는 정조와 합궁하고 출혈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16] 창작물에 이 이야기가 차용된 경우가 있다.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에서 정조와 원빈이 동침하던 밤에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을 두고 상궁 두 사람이 "어른이 아이 버선에 억지로 발을 디밀어 넣으면 어떻게 되겠소?"라고 에둘러 표현한다.
또 강미강의 로맨스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도 이러한 야사가 일부만 차용되어 있다. 원빈 홍씨가 간택되어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입궁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합궁 당일에 정조는 원빈의 침소까지 동행한 대전 상궁들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옷도 벗지 않고 원빈의 곁에서 시간만 좀 보내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침수를 든다. 보통 저런 경우에는 왕이 합궁한 후궁의 침소에서 자고 수라까지 드는 게 관례였다. 이 때문에 당시 대전의 지밀나인이었던 덕임은 정조가 원빈에게 가자 최소한 다음날 아침까지는 쉴 수 있으리라 믿고 졸고 있었는데 정조가 한밤중에 갑자기 돌아와 잘 수 있도록 이부자리를 펼치라고 지시하자 크게 당황한다. 차후에도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됐고 급기야 정조는 남몰래 마음에 두고 있던 덕임에게 너는 언제 초경을 시작했냐고 물으면서 원빈이 너무 어려서 합궁하기 곤란하다며 남모르는 고충을 토로한다. 홍국영은 원빈이 초경을 했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말도 한다.
이렇듯 원빈의 나이가 너무 어린 것도 문제였지만[17] 행장에서 "종기를 따면 회복되었다가 종기가 다시 발병하고, 종기의 뿌리가 매우 커서 보통 사람이 감내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다"는데, 아픈 사람과 실제 합궁이 이뤄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원빈이 어리기도 했지만 입궁하고 채 1년도 못 살고 숨졌는데 그 짧은 기간의 거의 대부분 동안 몸이 성치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
2.4. 사후[편집]
당시 원빈 홍씨의 상장례는 후궁으로서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원빈 홍씨가 사망한 당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정조를 비롯하여 정순왕후 김씨,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조정의 대신들은 선화문 밖에서 슬픔을 표시했다. 또한, 지난날 현빈 조씨의 전례대로 5일 동안 조회와 장시의 업무를 정지시켰다.[18] 그리고 당나라 황귀비의 예를 좇아서 시호를 인숙(仁淑), 궁호를 효휘(孝徽), 원호를 인명(仁明)이라고 추증하였다.[19]
이때 홍국영은 은언군의 맏아들 상계군 이담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아서 대존관(代尊官)으로서 상을 주관하게 하였고, 봉호를 고쳐 '완풍군(完豊君)'이라고 하였다. 완풍군은 전주이씨의 관향을 뜻하는 '完'자와 풍산홍씨의 관향을 뜻하는 '豊'자를 합한 의미다. 종실을 후궁의 양자로 삼는 일은 전례가 없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조실록》에서 사관은 이같은 행태를 두고 홍국영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해서 온 조정이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고 썼으나 후세의 평가일 뿐, 당시 장례 절차와 예우는 정조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고, 조정에서도 앞장서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조는 원빈 홍씨를 위해 직접 행장까지 지었다.[20]
원빈 홍씨의 신주는 경희궁 위선당에 모셔졌고, 원빈 홍씨의 원소인 인명원에는 묘표, 상석, 향로석, 혼유석 등의 석물을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정자각과 재실, 홍살문까지 지었다. 그러나 1786년(정조 10) '인명원'에서 '원빈묘'로 강등되면서 홍살문 등은 모두 헐렸다.[21]
3. 가계[편집]
- 고조부: 홍중해(洪重楷)
- 증조부: 홍양보(洪良輔)
- 증조모: 청송 심씨(심척(沈滌)의 딸)
- 조부: 전라도관찰사 홍창한(洪昌漢)
- 조모: 기계 유씨(유두기(兪斗基)의 딸)
- 백부: 홍낙순(洪樂純)
- 백모: 전주 유씨(유복명(柳復明)의 딸)
- 종형제: 홍복영(洪福榮)
- 숙부: 홍낙빈(洪樂彬)
- 숙모: 함안 조씨(조중회(趙重晦)의 딸)
- 종형제: 홍익영(洪益榮)
- 고모: 이하영(李河永)의 처
4. 여담[편집]
- 인명원 자리는 1946년에 고려대학교에 매입되어 '애기능'이라고 불렸는데, 고려대에서 이 '애기능' 주변으로 이공계 학과들을 이전 및 신설하였다. 그래서 자연계 캠퍼스를 애기능 캠퍼스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원빈 홍씨의 묘는 1950년 6월 13일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