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빈 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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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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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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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선조의 후궁
온빈 한씨 | 溫嬪 韓氏





온빈 한씨묘 위치
출생
1581년 11월 12일(음력 10월 7일)
사망
1664년 11월 30일(음력 10월 23일)
(향년 84세)
묘소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 485-1
재위기간
조선 숙원~귀인
1592년 ~ 1627년 이전
조선 온빈
1627년 이전 ~ 1664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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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남양 홍씨
부모
부친 - 한사형(韓士亨)
모친 - 죽산 박씨
배우자
선조
자녀
슬하 3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흥안군(興安君, 1598 ~ 1624)[1]
차남 - 경평군(慶平君, 1600 ~ 1674)
장녀 - 정화옹주(貞和翁主, 1604 ~ 1667)
3남 - 영성군(寧城君, 1607 ~ 1649)

봉작
숙원(淑媛) → 숙의(淑儀)
→ 귀인(貴人) → 온빈(溫嬪)


1. 개요
2. 생애
3. 자녀 문제



1. 개요[편집]


선조의 후궁. 예종익대공신[1] 1등, 성종좌리공신[2] 2등에 책록된 청평군(淸平君) 한계순(韓繼純)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중추부 첨지사를 지낸 한사형(韓士亨), 어머니는 죽산 박씨 박유년(朴有年)의 딸로, 둘 사이의 딸이다.

슬하에 흥안군 이제, 경평군 이늑, 영성군 이계, 정화옹주를 낳아 3남 1녀를 두었다.

2. 생애[편집]


1592년(선조 25년)에 12세의 나이로 후궁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종4품 숙원, 종2품 숙의, 종1품 귀인을 거쳐 정1품 온빈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한씨는 지금으로 치면 한창 젊은 나이인 28세에 과부가 된다. 선조가 승하하고 사가로 나가서 살았지만, 슬하에 둔 자식들이 일으키는 문제로 평온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자식 상팔자

정묘호란이 벌어지자 양주로 피난을 갔는데 인조가 한씨에게 음식을 신경 써서 올리라고 고을에 명을 하기도 하였다. 그뒤로도 반찬이 없어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등, 출궁 후 사가에서 빈한하게 지내다 84세가 되던 현종 5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3. 자녀 문제[편집]


장남 흥안군과 차남 경평군은 늙은 부녀자 뿐만 아니라 사대부를 폭행하고 재산을 빼앗고 과부를 추행하고 궁궐 하인들을 몰래 데려가는 등의 다양한 사건 사고로 인조 시절까지 지속적으로 지탄 받았다. 조정의 탄핵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아들이자 왕실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보호받았다. 그러나 역모에 휘말리자 더이상의 보호도 통하지 않았다. 흥안군의 경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하여 처형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형이 처형당한 사실을 모르지 않을텐데, 1625년(인조 3년) 이후로도 경평군은 정신을 못 차렸다. 매년 백성들의 음식과 땅을 빼앗고 몰래 도둑질한 뒤에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등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집을 짓는데 돈을 안 주었다며 관원들에게서 돈을 빼앗고 채무자를 가뒀다고 탄핵까지 받았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경평군을 정신 장애로 보고 있고, 당시 인조는 "다른 왕자는 이같지 않을 것인데, 그 중에 경평군(慶平君)은 실성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3] 그런데 사실 선조의 자식들 중 문제가 없는 인간이 드물다. 그럼에도 인조가 유독 경평군 한 사람을 가르켜 실성했다고 말한 것은 나이 차이 때문으로 짐작된다.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도 백성들 사이에서 악명으로 드높았지만, 나이 차이로 인해 인조 때에는 세 사람 모두 죽고 없었기 때문이다. 싸이코의 세대 교체?!

여기에 한씨의 막내 아들 영성군도 한몫 거들었는데, 영성군이 부리는 종이 감옥에 들어가 죄수들을 마음대로 풀어줘서 관원들을 폭행하게 하는가 하면, 소성대비의 연제(練祭)[4]를 병을 핑계삼아 불참했다가 탄핵을 받았다. 그래도 인조가 처벌하지 않은 걸 보면 인조의 참을성이 대단할 정도다.

그리고 선조의 막내 딸 정화옹주는 태어날때부터 벙어리에 자각이 없어서 혼기가 지나도록 혼인하지 못했다. 1629년(인조 7) 왕녀가 배필이 없을 수 없다는 어명에 따라 이복언니 정선옹주[5]의 남편 권대임의 재종동생 권대항과 혼인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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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68년 10월 28일 남이의 역모를 평정한 공로로 예종에 의해 책록된 공신. [2] 1471년 3월 2일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을 즉위를 도운 공로로 성종에 의해 책록된 공신. [3] 인조실록 24권, 인조 9년 6월 1일 계묘 2번째기사. # [4] 사망하고 첫 기일에 지내는 제사로 흔히 소상제(小祥祭)라고도 부른다. [5] 선조와 후궁 정빈 민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