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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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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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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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숙종의 후궁
소의 유씨 | 昭儀 劉氏


파일:서삼릉숙의묘역.jpg

서삼릉 후궁 묘역 전경
출생
연대 미상
사망
1707년 5월 9일
능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후궁묘역
재위기간
조선 숙원
1698년 9월 5일 ~ 1699년 12월 13일
조선 숙의
1699년 12월 13일 ~ 1702년 12월 6일
조선 소의
1702년 12월 6일 ~ 1707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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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강릉 유씨
배우자
숙종
봉작
숙원(淑媛) → 숙의(淑儀) → 소의(昭儀)
사당
수진궁(壽進宮)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 숙종의 후궁. 본래 궁녀 출신으로 숙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가계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2. 생애[편집]


1698년(숙종 24) 종4품 숙원이 되었다. 당시 숙종은 새로 후궁으로 삼은 유씨를 위해서 큰 돈을 썼는데, 은 4천 냥, 콩 1백 석에 따로 저택을 살 값으로 은 2천 냥을 들였다. 이에 사람들이 나라의 저축이 고갈되고, 민생이 곤궁한데 후궁에게 과하게 베푼다고 근심하였다.[1]

그 이후에도 그녀는 안 좋은 일로 입에 오르내렸다. 1699년(숙종 25)에는 숙안공주 궁방과 유 소의의 궁방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마구잡이로 걷어 들여 문제가 되자 대신들이 이를 비판하였고, 1707년(숙종 33)에는 삼각산 북쪽 산기슭을 훼손하는 바람에 사헌부로부터 비판 받았다. 그러나 숙종이 매번 비호하면서 논란을 덮어주었다.

1699년(숙종 25) 단종 복위를 기념하여 종2품 숙의가 되고, 1702년(숙종 28) 정2품 소의가 되었다.[2]

그녀는 자식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궁 밖에 신주를 두고 노비의 봉공을 받았다. 훗날 정조가 즉위한 다음 왕실의 근검절약을 위해 일체 국고로 이속되었고, 신주는 수진궁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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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8월 2일 계묘 2번째기사. # [2] 이때 다른 후궁들과 함께 품계가 올랐는데, 귀인 김씨가 영빈, 귀인 박씨가 명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