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원 이씨(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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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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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중종의 후궁
숙원 이씨 | 淑媛 李氏

출생
미상
사망
1520년
본관
대원 이씨(大元 李氏)
부모
부친 - 이백선(李白先)
형제자매
여동생 - 상궁 이은대(李銀代)
부군
중종
자녀
슬하 2녀
장녀 - 정순옹주(貞順翁主, 1517 ~ 1581)
차녀 - 효정옹주(孝靜翁主, 1520 ~ 1544)
봉작
숙원(淑媛)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조선 중종의 후궁. 아버지는 병절교위[1] 이백선이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다.

슬하에 정순옹주, 효정옹주를 낳아 2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하여 딸들이 혼인을 치르는 모습도 보지 못한 데다가 딸들의 혼인 생활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2. 생애[편집]


언제 어떻게 중종의 후궁이 되었는지의 기록이 없다. 1517년(중종 12) 정순옹주를 낳고, 1520년(중종 15) 효정옹주를 낳았다. 그러나 효정옹주를 낳은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본인이 낳은 두 딸은 정말 운 없게도 남편 복이 지독히도 없었다. 특히나 효정옹주의 일대기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정도

3. 여담[편집]


  • 1544년(중종 39) 상궁 은대가 효정옹주부마 순원위 조의정의 첩 풍가이를 때려죽인 일이 있었다. 이때 중종은 "은대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본주의 동생이니, 그 동생의 집 종[婢]을 때린 일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흉패한 일도 아니며, 내인(內人)을 조옥(詔獄)이 추국하는 것은 근래에 없던 일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본주'는 숙원 이씨이므로 은대가 그녀의 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2] 그러면서 그 전에 이미 은대가 정순옹주의 부마 송인의 천첩 두 명과 그 자식도 때려죽인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조카들의 복수를 잔혹하게 한 것으로 볼 때 숙원 이씨와 은대 자매는 우애가 매우 깊었던 듯.

  • 박은혜가 연기한 드라마 대장금이연생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역사상의 숙원 이씨와는 달리 단명하지 않고 오래 살았으며, 옹주만 낳았기 때문에 중종 사후 문정왕후의 숙청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고 오히려 문정왕후의 바로 곁에서 신임을 얻으며 건강하게 살아남았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4 11:28:22에 나무위키 숙원 이씨(중종)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조선시대 종6품 하계(下階)의 무신의 품계. [2]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6월 4일 신미 3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