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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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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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의빈 성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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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 宜嬪 成氏


조선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 宜嬪 成氏


파일:1510px-SSNRT037_01.jpg

의빈 성씨묘 전경
출생
1753년 7월 26일
사망
1786년 10월 24일 (향년 33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의빈창녕성씨지묘
(宜嬪昌寧成氏之墓)
재위기간
조선 상의
1782년 이전 ~ 1782년 10월 13일
조선 소용
1782년 10월 13일 ~ 1783년 3월 21일
조선 의빈
1783년 3월 21일 ~ 1786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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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창녕 성씨

덕임(德任)
부모
부친 - 성윤우(成胤祐 1709 ~ 1769)
모친 -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扶安 林氏 1722 ~ 1756)
형제자매
5남 4녀 중 4녀 [ 펼치기 · 접기 ]
오빠 - 성담(成湛, 1741 ~ 1783)
오빠 - 성협(成浹, 1742 ~ 1810)
오빠 - 성완(成浣, 1743 ~ 1806)[1]
오빠 - 성숙(成淑)
언니 - 강덕순(康德淳)의 처
언니 - 윤귀영(尹貴永)의 처
언니 - 홍낙성(洪樂性)의 측실
이복 남동생 - 성흡(成洽, 1762 ~ ?)

배우자
정조 선황제
자녀
슬하 1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문효태자(文孝太子, 1782 ~ 1786)
장녀 - 옹주(1784 ~ 1784) 요절
셋째 - 복중 사망(1786년 음력 10월 출산 예정)

봉작
상의(尙儀) → 소용(昭容) → 의빈(宜嬪)
사당
의빈궁(宜嬪宮)[1][2]


1. 개요
2. 생애
2.1. 가계 배경
2.2. 입궁
2.3. 《곽장양문록》 필사
2.5. 자녀
2.6. 비극적인 죽음
3. 독살 의혹
3.1.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
3.2. 이윤묵에 의한 독살설
3.3. 화빈 윤씨에 의한 독살설
4. 사망 이후
4.1. 의빈묘
4.2. 사당
4.2.1. 의빈궁(宜嬪宮)
4.2.2. 안현궁(安峴宮)
4.4. 어제문
4.4.2. 《어제의빈묘표》
4.4.3. 《어제의빈치제제문》
4.4.4.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4.4.5.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5. 관련 장소
5.2. 승가사
6. 가족 관계
7. 여담
8. 대중 매체에서
8.1. 드라마
8.2. 예능
8.3. 창작 뮤지컬
8.4. 창작 판소리
8.5. 소설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후궁.[1] 본관은 창녕(昌寧). 이름은 덕임(德任).[2]

정조가 총애했던 빈으로 알려져 있으며, 약 10살 무렵 궁에 들어와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가 총애해 곁에 뒀다고 하니 정조와는 이때쯤부터 연이 있었다고 보인다. 21살 무렵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곽장양문록》 국문 필사에 참여했다.[3]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태도가 단정하고 총명할뿐더러 재능·기술·예술까지 갖춘 여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내린 승은을 15년간 두 차례 거절하는 등 권력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정조가 하인을 벌주자 비로소 후궁이 되었다.[4] 이후 문효세자옹주를 낳았고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한미했던 집안은 외척이 되었다. 이로 인해 오빠 성완(成浣)[5]은 정조에 의해 어영청 군교에서 파면되었으나 성협(成浹)과 동궁의 내례(內隷, 하인)가 되었다. 훗날 성완은 부사용, 성협은 절충장군이 되었다. 고모는 정방(鄭枋), 언니는 홍낙성(洪樂性)의 첩이어서 친인척은 요직에 올랐다. 이에 비해 아버지 성윤우와 어머니 부안 임씨의 추증은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지 2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옹주는 경기(驚氣)[6], 문효세자는 홍역으로 조졸했다. 뒤이어 임신 중이던 의빈 성씨도 당시로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7]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의빈 성씨의 소원대로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는 효창원(現 효창공원) 왼쪽 언덕에 마련되었다. 정조의 뜻에 따라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사당도 한 영역에 세워졌다. 정조 연간에 제사궁(祭祀宮)을 의빈궁(宜嬪宮)이라 했고 고종(高宗) 연간에는 칠궁(七宮)에 제향되었다. 순종(純宗) 재위 기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칠궁에서 폐궁되었으나 제사는 원소(園所)의 예를 따랐다. 이후 일제에 의해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2. 생애[편집]



2.1. 가계 배경[편집]


본관은 창녕(昌寧). 이름은 덕임(德任). 1753년(영조 29) 음력 7월 8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 찬성 성윤우(成胤祐)이고 어머니는 통덕랑 임종주(林宗胄)[8]의 딸인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이다.

아버지 성윤우[9]는 본래 홍봉한(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10]였다. 신분은 낮고[11] 집안은 가난하고 변변하지 못해서[12] 늦은 나이에 무관의 반열에 올라 1753년(영조 29)에 교련관, 1754년(영조 31)에 경복궁 가위장이 되었고 여러 직위를 거쳐 1761년(영조 37)에 유원 첨사(첨절제사)가 되었다.[13] 한 달 뒤에 관직을 그만뒀고 1769년(영조 45)에 사망했다.

성윤우는 정실부인 세 명 사이에서 5남 3녀를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담(成湛), 성협(成浹), 성완(成浣), 성흡(成洽)은 무과에 급제했고 성협은 절충장군[14], 성완은 부사용, 성흡은 만호의 벼슬까지 지냈다.

족보에 실리지 못한 의빈 성씨의 언니는 홍낙성(洪樂性)의 첩, 고모는 정방(鄭枋)의 첩이 되어 인척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영조 때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던 홍낙성은 1783년(정조 7)에 좌의정이 되었다. 정방은 1784년(정조 8)부터 부총관, 한성 좌윤, 참판, 판의금부사 등 여러 직위를 거쳐 1786년(정조 10)에 공조판서가 되었다.[15]


2.2. 입궁[편집]


의빈 성씨의 입궁 계기는 부친 성윤우가 전포 아문의 관리와 함께 7,000냥을 범포(犯逋, 나라에 바칠 돈이나 곡식을 써 버림)해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를만큼 망한 사건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16] 그러나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는 나오지 않는다.

의빈은 홍봉한의 풍산 홍씨 가문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1762년(영조 38)[17] 이후에 혜경궁 홍씨가 의빈 성씨를 거두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18][19] 의빈이 입궁하기 전에 친어머니(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는 1756년(영조 31)에 사망했고, 성윤우는 평소 담벽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와병 중이었으며, 가세가 많이 기울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20]

효정왕후(헌종의 왕비)와 철인왕후(철종의 왕비)는 자식이 없어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녀를 양녀처럼 키웠던 경우가 있었는데, 혜경궁에게는 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가 있었다. 하지만 임오화변(1762년) 이후 정조는 1776년(영조 52, 정조 원년)까지 혜경궁이 머문 창덕궁이 아닌 경희궁에 있었고 청연공주는 1765년(영조 41), 청선공주는 1766년(영조 42)에 하가해서 혜경궁을 자주 만나러 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비해 의빈은 혜경궁 처소의 궁녀로 늘 혜경궁 곁에 있을 수 있고 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비슷한 나이대여서 혜경궁이 의빈을 자식처럼 기른 것으로 추측된다.

신분이 중인이었다는 점과 혜경궁이 사실상 수양딸처럼 키운 걸로 보아 지밀, 침방, 수방과 같은 고위 부서의 생각시였을 가능성이 높다.[21] 18세기 이전에는 법적으로 천민만 궁녀가 될 수 있었지만 이후 중인 출신이 지밀, 침방, 수방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2.3. 《곽장양문록》 필사[편집]


파일:Screenshot_20201007-223001_DaumCafe.jpg
곽장양문록》 필사 당시 의빈 성씨의 친필 글씨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곽장양문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4. 승은 거절 및 승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의빈 성씨/승은 거절 및 승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66년(영조 42)에 정조승은을 내자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정조는 의빈의 뜻을 납득하고 물러났다.

1779년(정조 3)에 첫 번째 간택 후궁 원빈 홍씨가 사망하고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씨를 간택하자고 했을 때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받아들였다.[22] 화빈 간택 이후[23]에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뜻을 굽히며 승은을 받아들였고[24] 상의(尙儀)[25]가 되었다.


2.5. 자녀[편집]


황윤석은 《이재난고》에서 의빈 성씨가 1780년(정조 4) ~ 1781년(정조 5) 사이에 유산을 두 번 했다고 적었고[26][27] 정조는 《어제의빈묘지명》에서 합궁한 달에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임신했다고 했다. 두 기록이 상반되는데 의빈이 문효를 낳기 전 두 번이나 유산한 일이 사실이면 정조가 《어제의빈묘지명》에 그 일은 굳이 적지 않은 것이고, 거짓이면 호사가들 사이에서 의빈에 관한 소문이 이미 문효세자가 임신되기 몇년 전부터도 파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 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28]

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29]

1782년(정조 6) 9월 7일 인시(새벽 3시 ~ 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30] 이 때 의빈을 딸처럼 키운 혜경궁 홍씨가 본가에서 데려온 몸종 복례[31]와 유모 아지[32]를 보내 출산을 도왔다. 정조는 1782년(정조 6)에 문효세자를 위해 창덕궁중희당을 건립했다.[33]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34]

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소용궁에게 올릴 빈호를 의(宜) 자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빈(嬪)으로 봉작(封爵)하는 관교(官敎)는 작년에 이미 옥새를 찍어 하비하였으니, 자호(字號)를 정사를 열어서 거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방에 있는 낭관을 재촉해서 올라오게 한 후에 전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35]

[36]


파일:문효세자책례계병.png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례를 그린 <문효세자책례계병>

의빈은 문효세자가 태어난 날 정 5품 상의(尙儀)에서 정 3품 소용(昭容)으로 올랐고[37], 문효세자가 원자로 정해지고 나서[38] 1783년(정조 7)에 정 1품 의빈(宜嬪)으로 진봉 되었다.

1784년(정조 8) 윤달 3월 20일 묘시(오전 5시 ~ 7시)에 옹주를 낳았다.[39] 정조는 “아들이 있는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40]라고 했다. 그러나 옹주는 5월에 병을 얻어 피접을 나갔고 결국 5월 12일 신시(오후 3시 ~ 5시)에 경풍으로 요절했다.[41] 7월 2일에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42]되었으나, 1786년(정조 10) 5월 11일에 홍역으로 요절했다.


2.6. 비극적인 죽음[편집]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43]

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44]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45]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病情奇怪, 竟至於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從今國事尤靡托矣)."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46]


의빈은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칠정(七情, 마음의 병) 증세가 있었는데,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곧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47] 정조가 그날그날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48],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직접 살폈으나[49] 병은 악화 되었다. 결국 1786년(정조 10) 9월 14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50]의 몸으로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51] 다만 위의 승정원일기에서 '마음의 병'을 언급한 것을 보면, 병의 원인이 무엇이었든 아직 어린 자식들을 잇따라 앞세운 슬픔과 스트레스가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는 데 한몫한 듯.


3. 독살 의혹[편집]


독살 의혹이 있다.

3.1.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편집]


1786년(정조 10) 12월 1일에 정순왕후 김씨가 “은언군이 장남 상계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독살 했으니 그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언문 교지를 내렸는데, 당시 상계군은 이미 의문사 한 뒤였다.[52] 이로 인해 구선복이 상계군을 추대하려고 했던 사실이 드러나자[53]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 보내졌다.[54]

…(중략) 기해년(1779년)에 이르러 홍국영(洪國榮)과 같은 흉악한 역적이 또 나와 감히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주상의 나이 30이 채 차지도 않았는데 감히 왕자를 둘 대계(大計)를 저지하고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완풍군(完豊君)으로 삼아 가동궁(假東宮)이라고 일컬으면서 흉악한 의논을 마음대로 퍼뜨렸다. 주상이 그의 죄악을 통촉하고 그 즉시 쫓아내자, 흉악한 모의가 더욱 급해져서 밤마다 그의 집에 상계군을 맞이하여 놓고 널리 재화를 풀어 무식한 무리들과 체결하였으므로 잠깐 사이에 변이 일어나게 되었다…….(중략) 그런데 천만 뜻밖에 5월에 원자가 죽는 변고를 만나 성상이 다시 더욱 위태로워졌으나 그래도 조금은 기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는데, 또 9월에 상의 변고를 당하였다.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 나라에 관계됨이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 상의 변고에 온갖 병증세가 나타났으므로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필경에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고 담이 떨려 일시라도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다…….(중략) 이때에 상계군이 불의에 죽었으므로 비록 그에게 무슨 아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방안에서 죽어 걱정이 조금 풀린 것 같지만 대의가 펴지지 못하고 윤강이 없어진 것은 진실로 그의 생사에 차이가 없다. 이러고도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겠는가? ……(중략) [55]



3.2. 이윤묵에 의한 독살설[편집]


내관 이윤묵이 의빈에게 먹일 을 자기 멋대로 달여 올렸다는 의혹이 일자 정조가 직접 심문한 적도 있었다. 결국 이윤묵은 1786년(정조 10) 11월 10일에 고향으로 방축(放逐: 자리에서 쫓아냄)[56] 되었으나 차후 유배되었고 1791년(정조 15)에 유배지 파주목에서 풀려났다.[57] 손용득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는데 1790년(정조 14)에 대사면(大赦免: 대규모로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함)으로 풀려났다.[58]

대제학 김종수가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어떤 인사가 찾아와서 이 종이 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종이쪽지에 ‘동네에 있는 손가(孫哥)란 놈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9월에 병환을 앓을 때에 내관 이지사(李知事)가 약물을 살펴보았는데, 약국의 약을 쓰지 않고 그의 약을 달여서 올렸으므로 그것을 먹고 그 즉시 죽었다. 비록 이런 일이 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하니 왕대비께서 이를 상감(上監)에게 고하자, 상감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 바로 성빈(成嬪: 의빈 성씨)의 치상소(治喪所)에서 이 지사를 붙잡아다 그 즉시 내보내 목을 베려고 하였다.[59]

그런데 중간에서 만류한 자가 있어서 그 자리에서 칼을 씌워서 멀리 귀양을 보냈다가 11월에 방면되어 돌아왔다. 대체로 이 내시는 일찍이 홍국영과 마음을 통해 체결하였는데 지극히 요악스러워서 옛날 조고(趙高)라도 그보다 더할 수 없었다. 그의 양자 양대의(梁大宜)도 임금의 총애를 받아 품계가 높았는데, 그의 생부가 처벌을 받았을 때 그의 품계를 삭탈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약을 사용한 일에 있어서, 약을 조제하고 약을 다릴 때 내가 직접 살피었으니, 이는 궁중 안팎에서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더구나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에 두고 사용하였으니, 사실이 대체로 이와 같다. 이는 중관(中官)이 궁방을 주관하였으므로 자기들끼리 시기한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니, 지난해에도 이처럼 터무니없는 말이 있었다. 그 단서의 유무를 기다려 문안(文案)을 내보여 주겠다."

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친히 손용득(孫龍得)을 신문하였다. 손용득이 공초하기를,

"내관은 바로 이윤묵(李允默)인데, 이윤묵이 귀양 갔을 때 그 집 늙은 여종이 신의 형수인 여복가(女卜家)에 와서 점을 쳤습니다. 그 여종이 말하기를 ‘우리 집 대감이 본궁을 주관하였는데, 혹 약을 쓸 때에 잘 살펴보지 않아 죄를 저질렀을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여 친하게 지낸 양반에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여복 김아지(金阿只)에게 신문하니, 김아지가 공초하기를,

"내관의 여종이 말하기를 ‘큰 상전이 갑자기 귀양을 갔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약물을 살필 때에 잘 하지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되기에 와서 물어본 것이다.’고 하였는데, 손용득의 처도 이 말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내관의 여종 악연(岳蓮), 악이(惡伊)와 대질시켰다. 손용득의 처 최아지(崔阿只)가 공초하기를,

"내관의 여종이 점을 친 것을 보았는데, 여복이 그 여종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신수는 마땅히 죽어야 하므로 이런 죄를 지은 것이다. 이번 상사(喪事)는 혹시 약을 잘못 쓴 소치가 아닌가?’ 하니, 그 여종이 대답하기를 ‘우리 상전이 본궁을 주관하여 매사를 살피고 있었으니, 약을 쓸 때에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악연이 공초하기를,

"사실입니다."

하였다. 다시 손용득을 문초하니, 손용득이 공초하기를,

"말뜻의 줄거리를 모르고 갑자기 듣고 나니 놀랍고 분개하여 친한 사람에게 우연히 말한 것이지, 퍼뜨리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손용득을 형조로 넘겨 귀양 보내고, 악연은 형추하고 나서 먼 섬으로 귀양 보내 여종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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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화빈 윤씨에 의한 독살설[편집]


이재난고》에서는 “의빈이 자현[61] 증상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죽었다. 화빈 윤씨의 처소에서 은밀히 독을 써서 해친 까닭에 화빈은 중한 죄를 물어 내쳤다.”라고 한다.[62] 하지만 《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에 화빈 윤씨를 내쳤다는 내용은 없다. 다만 화빈 윤씨의 고모부 조시위(趙時偉)[63]가 귀양 보내졌다.[64]


4. 사망 이후[편집]



4.1. 의빈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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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빈·귀인 분묘 집장지 의빈 성씨 묘 전면#
의빈 성씨의 묘비#

의빈의 상례는 영빈 이씨의 예에 따라 후정 1등의 예로 거행하라고 했다.[65] 하지만 올해 든 흉년, 문효세자의 장례, 칙행(칙명을 전달하는 사신 행차) 때 많은 돈이 들었었다. 더군다나 나라의 비용이 손을 쓸 수 없음에 이르고 호조 재력까지 탕진되어 도감을 세울 수 없었다.[66] 그래서 영빈 이씨의 《등록》을 쓰지 않고 모든 비용을 아끼고[67] 호조와 전의감에 특별히 따로 설치하여 예장을 거행하되[68] 절차 법칙은 영빈 이씨 때를 따랐다.[69]

9월 16일 묘시(오전 5~7시)에 입관하고[70] 안현(安峴)의 본궁에 빈소를 차렸다.[71] 《노상추일기》에서는 동궁(東宮)에 빈소를 차렸다고 한다.[72] 11월 20일에 효창묘[73] 왼쪽 언덕 임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74] 의빈묘와 효창묘는 한곳에 있고 두 묘의 거리가 백 걸음 떨어져있는데, 정조가 의빈의 생전 소망을 따랐다.[75] 숙종숙빈 최씨의 장지를 명선공주와 명혜공주[76]의 산으로 정한 내관 장후재를 파직 한 전례와 비교하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다.[77]

본래 의빈묘는 곡장,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 쌍, 문인석 한 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불순한 의도로 효창원이 효창 공원으로 격하되면서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문효세자는 백부인 의소세손과 나란히 묻혀있고, 의빈 성씨는 효창원에서 2km 떨어진 후궁묘역에 묻혀있다.


4.2. 사당[편집]



4.2.1. 의빈궁(宜嬪宮)[편집]


1787년(정조 11)에 의빈묘(宜嬪廟)와 의빈궁(宜嬪宮)이라는 호칭이 처음 나란히 등장했다.[78] 1797년(정조 21) 이후에 쓰인 《제물등록》, 1799년(정조 23)에 만든 《사전사례편고》, 1865년(고종 2)에 편찬한 《대전회통[79], 1867년(고종 4)에 반포한 《육전조례》[80], 1873년(고종 10)에 개편된 《태상지》[81] 등에서 의빈궁(宜嬪宮)이라고 한 점을 보아 1797년(정조 21) ~ 1799년(정조 23)에 명문화한 것으로 보인다.

의빈궁(宜嬪宮)은 대빈궁(大嬪宮)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의빈 성씨와 옥산부대빈 장씨(희빈 장씨) 모두 의빈(宜嬪)과 대빈(大嬪)이라는 호칭 자체로 사당의 명칭을 정했다.


4.2.2. 안현궁(安峴宮)[편집]


인조의 잠저이자 원종[82]의 옛집이 남부 회현방 송현에 있어서 송현궁(松峴宮)이라고 했듯이, 의빈의 빈소를 안현(安峴)의 본궁에 차려서 안현궁(安峴宮) [83] [84] [85]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4.3. 칠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칠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73년(고종 10)에 개편된 《태상지》에서 ‘궁(宮)’에는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경우궁(景祐宮), 선희궁(宣禧宮), 의빈궁(宜嬪宮)[86]이 속했다. 당시 의빈궁은 선희궁(영빈 이씨)과 같은 예법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87] 1898년(광무 2)에 《향수조사책》에서 이 궁들을 칠궁(七宮)이라고 했고[88], 의빈의 전체적인 호칭은 ‘의빈궁 의빈 성씨(宜嬪宮 宜嬪 成氏)’였다.

1908년(융희 2)에 제사 제도가 개정 되면서 의빈궁은 매안[89] 되고 제사는 원소[90]의 예법으로 지내게 되었다.[91] 하지만 1909년(융희 3)에 만든 《향비규정(享費規定)》에서 의빈궁의 제사 때 쓰인 금액에 대해 나온 점으로 보아 칠궁에서는 폐지 되었어도 의빈궁이라는 호칭까지 폐지되지는 않았다.[92] 이후 칠궁은 육궁(六宮)으로 있다가 1929년에 덕안궁(순헌황귀비 엄씨)이 들어오면서 오늘날의 칠궁이 되었다.


4.4. 어제문[편집]


어제문이란, 왕이 직접 쓴 글을 말한다.


4.4.1. 《어제의빈묘지명[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어제의빈묘지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어제의빈묘지명》 이미지
정조는 의빈 성씨가 죽자 손수 묘표와 묘지명의 문장을 지었다. 《어제의빈묘지명》은 정조가 지은 의빈 성씨의 묘지명의 원고이다. [93] 《묘지》(산문으로 쓴 것)에서 죽은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다. 정조는 두 글에서 의빈 성씨의 생애를 돌아보며 추억한 뒤 세계(世系)를 밝혔다. 일반적으로 《묘지》는 피장자의 간략한 이력과 세계를 밝히지만, 정조의 어제는 다소 긴 문장으로 비문을 꾸몄다.

조선에서 배우자를 위해 묘표나 《묘지》의 문장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을 위한 비문일 경우 어머니나 일족의 여성 어른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왕실에서도 역시 드문 일로 해창위 오태주(海昌尉 吳泰周)가 부인인 명안공주를 위해 비석을 세웠으며, 영조는 화순옹주를 위해 어필로 비석을 세웠고 영빈 이씨를 위해 묘지명을 지었다어제영빈이씨백자묘지명. 그리고 정조가 의빈 성씨를 위해 묘표와 《묘지명》을 지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정조의 여인들 가운데 어제비를 받은 것은 의빈 성씨가 유일하다.#

특히 의빈 성씨의 《묘지명》은 국왕이 글을 짓고, 당대 명필로 이름 높던 이들이 글씨를 쓴 것으로,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든 경우이다.#


4.4.2. 《어제의빈묘표》[편집]


《어제의빈묘표》 이미지

《어제의빈묘표》(묘표=묘비. 묘갈이라고도 한다)는 정조가 1786년(정조 10년)에 썼다. 《어제의빈묘표》의 탁본이 예술의 전당에 전시되었을 때 보도자료에 탁본의 연도(혹은 비석을 세운 연도일 수도 있다), 서(書)한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94]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이 함께 1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어제의빈묘지명》 또한 1786년(정조 10년)에 쓰였다.

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고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이르렀는데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정전이 아닌 천신을 향해 있는데 병에 걸려 위독해진 것은 어울리지 않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정전에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곧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감히 당석(잠자리)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결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결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1753년 음력 7월 8일) 생이고 득년(향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 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정경이 군자감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고조부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고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를 추증한 일은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이기 때문이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왕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이렇게 묻은게 묘지명이다. 다행히 그 내용도 남겨놓아 묘를 발굴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어제의빈묘지명 항목을보면 훨씬 디테일한 언행과 사연이 담겨있음을 확인할 수있다)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후세 사람들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하게 여기고 불행한 운명을 슬퍼하게 할 따름이다.



4.4.3. 《어제의빈치제제문》[편집]


《어제의빈치제제문》

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치제 제문》을 썼다. 치제(致祭)란 윗사람이 제사 때 올리는 음식과 죽은 사람에 대해 슬픈 뜻을 표하는 글을 내려서 죽은 아랫 사람을 제사하는 일이다. 제문(祭文)이란 제사 음식을 올리고 제사 때 읽는 글을 읽는 일이다.

건륭 51년 병오(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7일 정축

국왕은 의빈 창녕 성씨의 영혼에 유제하니 다음과 같다.

아! 나는 빈의 죽음에 더더욱 이와 같이 슬프다. 죽음으로서 떠나보낸 재앙은 비통하고 참혹하며, 인정과 도리는 끊어질 듯이 아픈 마음이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것보다 심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로지 위로하고 애써 떨쳐 내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더위와 추위가 바뀌어갔다. 평상시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근심하지 않는 얼굴로 서로 잊고 지내는 듯했는데 빈의 죽음 때문에 이와 같이 슬프다.

아! 빈은 문효세자의 어머니이고 빈이 뱃속에 품은 아이는 문효세자와 같은 기운을 가졌다. 문효세자는 이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반드시 친밀감을 가지고 소중히 대하며 애틋하게 여기고 그리워하기를 구했을 것이다. 또한 형제가 틀림없이 매우 비슷하고 꼭 닮기를 기대 했을 것이다.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참하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할 길은 여기에 있고 도리를 떨쳐낼 방법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문효세자의 남은 흔적과 향기는 쓸어버리듯이 사라져버렸다. 장차 내가 어찌 구하고, 어디에 기대고,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통하며 비참한 마음을 어찌 위로하고, 어찌 달래겠는가? 이에 있어서 지금의 슬픔이 거의 예전의 일보다 심하다. 내가 슬퍼하는 마음이 어찌 오직 빈의 죽음에 대한 슬픔뿐이겠는가?

아아!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아아! 슬프도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4.4.4.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편집]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발인부터 3년 탈상 후 담제까지 제사 때마다 《어제 제축문》을 지었다.[95]


계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세월이 빠르고 세차게 흐르는 동안 속세의 머뭇거림이 있었는데 좋은 화살로 하여금 궁독(아들을 낳았을 때 천지 사방을 향해 활을 쏘아 축하하는 뜻을 취함)을 완연히 드러냈다."

조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상여를 따라가니 기약을 져버림에 이르렀구나. 아! 장자 이 길을 어찌 가겠는가?"

견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나는 글로서 너를 보내며 예장(禮葬)을 맡은 관원들이 도와서 상여가 무사히 무덤에 이르기를 바란다.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노제.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경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관머리 앞에 만시(挽詩)를 세우고 길에 휘장을 두르고 제사를 지내는구나. 밤 동안 한가득 걱정하다가 아침에 보내니 장차 서두르지 마라."

묘소성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상자를 열어 비단옷을 일렬로 늘어놓으니 흰 휘장이 소용돌이치는구나. 우수수 하고 부는 바람 소리에 슬퍼하며 밤에 술잔을 올렸다. 네가 홀연히 죽어서 보고 싶다고 바라여도 볼 수 없구나. 혼령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흠향하길 바란다. 아, 너는 뒤섞여서 너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두려워했었다."

묘소계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부승지 홍명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새벽닭이 울 때 망건을 꿰매달라고 재촉하면 물이 그득 흘러가는 모양으로 봤는데 아침에 혁옥을 타고 흐른 물은 저 어둠이 내린 산으로 떠나 가버렸다. 아주 오랜 세월을 따른 촉룡(계절, 기후 같이 대자연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너를 저승으로 환하게 인도 할 것이다."

사후토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총융사 김사목을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땅의 신이여. 지금 의빈 성씨가 여기 고양군 율목동 효창묘의 왼쪽 언덕 임좌의 자리에 비어 있는 무덤으로 갑니다. 빈의 행동은 얌전하고 정숙하여 감출 것이 없으니 이에 현숙한 여인의 한 골육이 있는 언덕은 신 역시 위해줄 것입니다.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있어 재앙이 있다고 꾸짖어도 작은 힘으로 뒤의 어려움을 아주 명백하게 물리칠 것입니다. 천 가지를 삼가고 깨끗한 술과 제물을 차려놓고 신에게 공경히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여 주십시오."

임광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서정수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나는 바짝 이제 와서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슬프고 슬픈 사람의 마음은 매여 있지 않은 것 같다."

제주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형체는 이미 넋이 되어 모두 돌아 가버렸다. 만일 여기로 와서 무탈하게 편안히 단장 하고 저 집에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하여 저 어두운 언덕 구석으로 가서 혼령이 되어버렸는가. 임금이 완연히 기댔는데 어찌하여 아이들은 태어나고 멀리 가버렸으며 더욱이 또한 그 어머니마저도 멀리 가버린단 말인가."

초우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반우(反虞)를 지낸다. 이로써 이 길을 따라 무사히 사당에 이르기를 청한다.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재우.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1일 신묘,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재우(再虞)를 지낸다. 가는 세월에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삼우.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임진,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삼우(三虞)를 지낸다. 가는 세월에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졸곡.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갑오, 국왕은 금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졸곡(哭萬)을 지낸다. 빈은 온갖 일을 겪고 뱃속의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나버렸다. 내 마음 속에 품은 정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초전.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덧없이 가버리는구나. 이미 캄캄해지고 나니 또한 초하루가 되었다. 빈이 한 번 떠나버리더니 돌아오지 않아 속죄 할 길이 없어 한탄스럽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망전.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하늘의 때는 이처럼 갑자기 그 달 동안 위태로워졌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빈이 남긴 행적에 대한 마음을 어찌 다하겠는가?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생신차례.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어떠한 생각도 못했는데 홀연히 또 빈의 생일이 왔다. 어찌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일에 제사상을 받는가. 빈과 즐겁게 노닐었는데 적막하고 고요해졌다. 생각하건대 빈은 난초와 혜초처럼 향기로운 풀로서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는 채로 지난날을 생각하니 내가 무료 할 때 빈을 보고 이야기 하면 서로 더욱 뜻이 맞고 정다웠었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정조.

건륭 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정조(正朝)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이후 정조 한식 삼일 단오 추석 동지 제사 제문은 동일하다

중춘.

건륭 치세 모갑 2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2월에 빈을 사려(思慮)하며 제사를 올린다. 궁궐 기상(禨祥)이 굽어 들어 신리(伸理)하는데 마땅히 감통(感通)한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이후 중하 중추는 내용이 동일하다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월삭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이미 예를 마치고 대상(大祥)을 치르고 나서 또 담제(禫祭)를 지냈다. 길이 그리워하는데 나를 더욱 감응하게 하는 훌륭한 잠언(箴言)을 누가 말하겠는가? 세월이 흘러가면 역시 잊을 수 있도다. 빈이 죽은 뒤의 명예는 백세 뒤에도 더욱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4.4.5.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편집]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정조가 의빈 성씨의 상례를 모두 마치고 탈상한 후, 1년간 각종 제사를 지낼 때 《어제 제축문》을 썼다.[96]

삭제

세월의 차례는 건륭 모년 모갑 모월 초하루 모갑, 국왕은 신하 모관 모를 보내 의빈 성씨의 제사를 지내게 하노라.

날이 가고 달이 가서 이미 초하루가 되었네. 돌아보면 아름다운 위의가 있었네. 슬프고 애통한 마음 어찌 견디겠는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하여라.

朔祭

維乾隆某年嵗次 某甲某月朔某甲 國王遣臣 某官某 諭祭于宜嬪成氏

日居月諸 亦旣云朔 緬言令儀 曷任愴衋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

망제

세월의 차례는 건륭 모년 모갑 모월 모갑 초하루 모일 모갑, 국왕은 신하 모관 모를 보내 의빈 성씨의 제사를 지내게 하노라.

차고 이지러지는 것이 저와 같아 해와 달이 서로 바라보네. 아득한 내 그리움이여 애타게 길이 슬퍼하네.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하여라.

望祭

維乾隆某年嵗次 某甲某月某甲朔某日某甲 國王遣臣 某官某 諭祭于宜嬪成氏

盈虛如彼 烏兎相望 悠悠我思 惄焉永傷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

생진다례

세월의 차례는 건륭 모년 모갑 7월 초하루 8일 모갑, 국왕은 신하 모관 모를 보내 의빈 성씨의 제사를 지내게 하노라.

해마다 이날이 오면 어김없이 기약했는데 세월이 도도히 흘러가도 어찌 여기 오지 않는가.

너의 슬픔 뿐만 아니라 문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어라. 애오라지 진정으로 아는지 모르는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하여라.

生辰茶禮

維乾隆某年嵗次 某甲七月朔初八日某甲 國王遣臣 某官某 諭祭于宜嬪成氏

毎歲此日 至必如期 逝者滔滔 胡不來斯 匪直爾哀 文孝之思 聊以瀝情 知也未知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

정조

세월의 차례는 건륭 모년 모갑 정월 초하루 모갑, 국왕은 신하 모관 모를 보내 의빈 성씨의 제사를 지내게 하노라.

머무르기 어려운 건 흐르는 세월. 좋은 계절이 돌아왔네. 느꺼운 마음이 일었다고 미루어 생각하며 저 향기로운 제수(祭需)를 거두네.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하여라.

正朝

維乾隆某年嵗次 某甲正月朔某甲 國王遣臣 某官某 諭祭于宜嬪成氏

難淹者辰 聿回令節 感玆推欦 擷彼芬芯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

한식(寒食), 삼일(三日), 단오(端午), 추석(秋夕), 구일(九日), 동지(冬至)는 날짜를 제외하고 정조(正朝)와 내용이 같다.

중춘

세월의 차례는 건륭 모년 모갑 2월 모갑 초하루 모일 모갑, 국왕은 신하 모관 모를 보내 의빈 성씨의 제사를 지내게 하노라.

시절은 중춘이 되어 예법을 지켜 제사를 지내네. 철에 따라 나는 산물 누차 바뀌니 정서가 더욱 새롭구나.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하여라.

仲春

維乾隆某年嵗次 某甲二月某甲朔某日某甲 國王遣臣 某官某 諭祭于宜嬪成氏

時惟仲春 禮有常禋 節物屢嬗 情緒逾新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

중하(仲夏), 중추(仲秋), 중동(仲冬), 납일(臘日)은 날짜를 제외하고 중춘(仲春)과 내용이 같다.

기일

세월의 차례는 건륭 모년 모갑 9월 모갑 초하루 14일, 국왕은 신하 모관 모를 보내 의빈 성씨의 제사를 지내게 하노라.

세월이 흘러 기신이 다시 돌아왔네. 천시를 좇아 정중히 행동하고, 하늘의 해처럼 빛나는 대의는 동관에 기록되었네.

이는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어라. 종묘에 오래토록 힘입었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하여라

忌日

維乾隆某年嵗次 某甲九月某甲朔十四日 國王遣臣 某官某 諭祭于宜嬪成氏

嵗序遷易 忌辰復至 循天敦行 炳日大義 紀在彤管 非我私言 宗祊永賴 俾也可諼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



5. 관련 장소[편집]



5.1. 거둥고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거둥고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조는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묘에 몇 번이나 거동해서 오늘날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 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서울 지명 사전


5.2. 승가사[편집]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6. 가족 관계[편집]



6.1. 조상(창녕 성씨)[편집]


  • 7대 조부 : 제릉 참봉 성칙(齊陵 參奉 成恜)[97][98][99][100]
  • 7대 조모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6대 조부 : 성운(成䉙)
  • 6대 조모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5대 조부 : 노사직 성숙양(籚司直 成叔良)
  • 5대 조모 : 대구 백씨(大邱 白氏)

  • 고조부 : 군자감 정 성경(軍資監 正 成景)[101]
  • 고조모 : 김해 김씨(金海 金氏)

  • 증조부 : 증 이조참판 성근립(贈 吏曹參判 成謹立, 1639 ~ 1709)
  • 증조모 : 증 정부인 충주 유씨(贈 貞夫人 忠州 劉氏, ? ~ 1705)


6.2. 본가(창녕 성씨)[편집]


  • 조부 : 증 이조판서 성수산(贈 吏曹判書 成壽山, 1668 ~ 1749)
  • 조모 : 증 정부인 김해 김씨(贈 貞夫人 金海 金氏, 1674 ~ 1698)
  • 조모 : 증 정부인 창원 황씨(贈 貞夫人 昌原 黄氏, 1677 ~ 1747)

  • 백부 : 성윤조(成胤祚)[102]
  • 백모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사촌 : 성호(成灝)
  • 사촌 올케 : 경주 김씨(金海 金氏)

  • 사촌 : 성연(成淵)
  • 사촌 올케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아버지 :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 1709 ~ 1769)
  • 전어머니 : 장흥 마씨(長興 馬氏, 1715 ~ ? ) 직장 마시행(直長 馬時行)의 딸[103]
  • 친어머니 :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 1722 ~ 1756) 통덕랑 임종주(通德郞 林宗胄)의 딸
  • 새어머니 : 단양 지씨(丹陽 池氏)

  • 오빠 : 성담(成湛, 1741 ~ 1783) - 무과 합격[104]
  • 올케 : 성주 이씨(星州 李氏, 1739 ~ 1770)
  • 올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751 ~ 1799)
    • 조카 : 현감 성국민(縣監 成國民, 1766 ~ 1809)
    • 질부 : 강릉 유씨(江陵 劉氏, 1768 ~ 1809) 동지중추부사 유계조(同知中樞府事 兪啓祚)의 손녀
    • 조카 : 성희민(成羲民, 1780 ~ 1809)
    • 질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오빠 : 절충장군 성협(折衝將軍 成浹, 1742 ~ 1810)[105]
  • 올케 : 강릉 최씨(江陵 崔氏)
  • 올케 : 단양 문씨(丹陽 文氏)
    • 조카 : 선략장군 성도민(宣略將軍 成道民)
    • 질부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조카 : 성호민(成皥民)
    • 질부 : 청주 한씨(淸州 韓氏)

  • 오빠 : 부사용 성완(副司勇 成浣, 1743 ~ 1806) - 성식(成湜)에서 개명[106]
  • 올케 : 청주 한씨(淸州 韓氏, 1742~1794)
    • 조카 : 첨정 성순민(僉正 成舜民, 1763 ~ 1849)
    • 질부 : 단양 우씨(丹陽 禹氏)
    • 조카 : 성덕민(成德民, 1782 ~ 1828)
    • 질부 : 의령 남씨(宜寧 南氏, 1780 ~ 1812)
    • 조카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질서 : 조상주 (趙尙周) 한양 조씨(漢陽 趙氏)

  • 오빠 : 성숙(成淑)[107]
  • 올케 : 미상
    • 조카 : 성흥민(成興民)

  •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 강덕순(康德淳) 신천 강씨(信川 康氏) 동지중추부사 문도(文道)의 아들[108]

  •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 윤귀영(尹貴永) 파평 윤씨(坡平 尹氏)

  • 동생 : 성흡(成洽) - 무과 합격
  • 올케 : 금천 나씨(錦川 羅氏)
    • 조카 : 성준민(成俊民)

  • 숙부 : 성연지(成淵祉)

  •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 정희규(鄭熙揆) 연일 정씨(延日 鄭氏)

  •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 임성징(林聖徴) 임천 임씨(林川 林氏)

족보 미등록
  • 고모 : 공조판서 정방(工曹判書 鄭枋, 1707 ~ 1789)의 첩[109]
  • 언니 : 영의정 홍낙성(領議政 洪樂性, 1718 ~ 1798)[110]의 첩[111]
  • 6촌 언니 : 정득환(鄭得煥)의 첩[112]


6.3. 왕가(전주 이씨)[편집]


  • 남편 : 정조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8일)
    • 미상 : ? (1780년 음력 12월 8일 이후 유산 추정)[113]#
    • 미상 : ? (1781년 음력 7월 이후 유산 추정)[114]#
    • 1남 : 문효세자 (1782년 음력 9월 7일 ~ 1786년 음력 5월 11일)
    • 1녀 : 옹주 (1784년 윤달 3월 20일 ~ 1784년 음력 5월 12일)[115][116]
    • 셋째 혹은 다섯째 : ? (1786년 음력 9월 14일) - 복중 사망


7. 여담[편집]



  • 정조와 의빈 성씨의 러브 스토리와 의빈에 관한 인적 사항은 정조가 구구절절 의빈에 대한 사랑을 기록한 제문과 여러 궁소식을 기재한 《이재난고》가 비교적 뒤늦게 번역돼서 알려지게 됐다. 정조가 남긴 기록들 덕분에 의빈 성씨라는 인물이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정조는 《어제의빈묘지명》에서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라고 적기도 했다. 2020년대에도 의빈 성씨에 관련된 자료가 번역이 덜 된게 있다고 하니 추가적인 자료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8. 대중 매체에서[편집]


임금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 만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이 한문으로 기록되어있어 번역되지 않아 21세기 초까지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명, 가족 관계 등이 적힌 《이재난고》도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도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이었다는 점 때문에 소설, 드라마에서 주로 정조가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비극적인 죽음[117]을 맞는 정조의 첫사랑[118] 정도로 그려지긴 했다. 2005년 로맨스 소설에 처음 등장했고,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은 한지민이 연기한 드라마 《이산》 속 성송연 캐릭터 였다가 이후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세영이 연기한 성덕임 캐릭터로 바뀌었다. 이후 정조를 다룬 창작 뮤지컬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에도 등장하였다. 실제로는 궁녀 출신이나 도화서 다모, 호위 무사 등으로 각색되어 등장하였다. 본명은 '성덕임'이나 작품마다 '성송연', '성선우', '성연' 등 각양각색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8.1. 드라마[편집]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파문 의빈 성씨.png}}}||
조선왕조 500년 - 파문》의 의빈 성씨
여기서는 이름은 따로 안나오고 그냥 의빈으로 불린다. 자신이 낳은 어린 원자홍역을 앓자 직접 간병하겠다며 정순왕후(김용선 분)와 정조(김용건 분)를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중전인 효의왕후(이휘향 분)가 원자를 아끼고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며 친어미로써 씁쓸해한다. 원자의 세자 책봉이 부당하단 상소가 올라오자 상소의 내용을 베낀 뒤 바로 정순왕후에게 가서 상소를 올린 김하재를 처벌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효의왕후에게 내명부 사람들이 끼어들 일이 아니며 상소가 올라오면 어명을 기다리면 될 것을 왜 굳이 들고 와서 고하냐고 꾸중을 듣는다. 수빈 박씨가 첫 출산할 때 효의왕후와 함께 도왔는데 옹주를 낳자 좋아한다.(...)[119] 문효세자가 중병에 걸리자 누군가가 독극물을 먹였을 것으로 여기고 정순왕후에게 범인을 찾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결국 문효세자는 죽고 의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 7개월인 상태에서 사망한다. 죽기 직전에 몸을 크게 떨고 울면서 무언가 말하려 하나 결국 말을 못하고[120] 세상을 떠난다. 이후 정순왕후는 은언군상계군이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독살에 연루되었을 것이라 여겨 그들을 잡아들여 문초하려 하지만, 정조가 반대하자 이에 화가 나 (일종의 시위 형식으로) 을 나가 사가로 갔다. 결국 은언군과 상계군은 의금부로 잡혀간다.

  • 2007년 ~ 2008년 MBC 드라마 《이산
    • 배역: 도화서 다모 성송연
    • 배우: 이한나(아역) → 한지민(성인)[121][122]
파일:성송연 _드라마 이산.jpg
파일:의빈 성씨_드라마 이산.png
도화서 다모 시절
의빈 시절
성송연 문서 참고 바람. 역사대로 이산(정조(이서진 분))의 첫사랑으로 그려졌다. 임오년에 궁녀로 입궁했다는 것까지는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임오화변이 있던 이 해에 당시 세손이었던 이산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이후에 도화서 다모가 됐다는 것은 모두 제작진의 허구적 상상력에 의한 설정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조의 승은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자를 출산했고, 그 원자가 세자(문효세자)로 책봉됨에 따라 소용에서 의빈으로 승급했다. 그러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죽는 걸 봐야 했다. 이때 둘째[123]를 임신 중이었는데 장결병(간경화) 진단을 받게 된다. 이산은 그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의원을 불러오려 한다. 그러면서 송연에게 나는 아이보다 네가 더 소중하니 아이를 포기하고 치료를 받으라며 낙태약까지 건네나 송연은 아이를 더 잃을 수 없다며 일체의 치료를 거부하고 버틴다. 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정조의 어진을 직접 그렸으나 결국 산달까지 살지 못하고 임신 중에 끝내 병사한다.

파일:성덕임_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png
파일:의빈 성씨 성덕임(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jpg
지밀나인 시절
의빈 시절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의빈 성씨에 대한 추가 사료가 나온 후에 방영하는 첫번째 드라마이다. 다른 드라마와는 달리 정조가 아닌 의빈 성씨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며 의빈 성씨의 인생과 정조와의 사랑을 그린다.


8.2. 예능[편집]


2017년 1월 1일 방송된 언빌리버블 스토리 코너에서 '왕이 사랑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한신대학교 김준혁 교수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 2019년 채널A천일야사》 118회-성덕임, 정조의 첫사랑 : 2019년 3월 25일 방송, 정조와 궁녀 성덕임(의빈 성씨)의 사랑이야기#
    • 배역 : '성덕임' 역
    • 배우 : 송도원


8.3. 창작 뮤지컬[편집]


  • 2016년 수원 시립 공연단 창작 뮤지컬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124]
    • 배역 : '성선우' 역
    • 배우 : 홍민아
정조와 장터에서 처음 만나 '물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8.4. 창작 판소리[편집]


  • 2017년 수원 문화 재단 창작 판소리 《정조가
    • 배역 : '성덕임' 역
    • 소리꾼 : 신유진


8.5. 소설[편집]



  • 2005년 로맨스 소설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 콘티 작가 '강건희' 역

  • 2007년 ~ 2008년 드라마소설 《이산 정조대왕》
    • 도화서 다모 '성송연' 역
드라마 《이산》의 소설판. 전 5권. 성송연의 생애는 드라마와 거의 유사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나 극중에서 병사한 것과 달리 소설에서는 정순왕후 김씨에게 자결을 강요당해 어쩔 수 없이 정조를 위해 음독 자살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등 일부는 드라마와 다소 차이가 있다. 성송연에게 독약을 주던 정순왕후의 명분은 중인 출신 승은후궁인 성송연보다는 반가 출신 간택후궁으로부터 적법한 후사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이미 간택해 놓은 처자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용히 자결하지 않으면 정조가 위험해진다고 협박하고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성송연의 처소의 궁인들까지 다 정순왕후에게 매수된 상태였기에 자신이 처한 상태를 알릴 수조차 없이 감금되어버린 성송연은 원치 않았어도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독약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약을 삼킨 뒤에 몹시 후회했고 토해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수포로 돌아가 고통스럽게 숨진다. 성송연의 시신을 발견한 그녀의 유년 시절 친구이자 호위무사인 박대수는 몹시 분개하며 진상을 밝히고자 하나 정조는 정치적인 이유로 성송연의 석연찮은 죽음을 묻어 두어야 했다.[125]

  • 2017년 로맨스 소설 《우아한 환생》
    • '의빈 성씨' 역
현대의 의사 오세아가 정조 시대 한세로 태어나서 정조를 돕는 내용. 극중 오세아(한세)와 의빈은 별개의 인물이다. 의빈은 정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하게 되는 궁녀로 등장한다.

작가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8년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며 집필한 첫 소설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의빈 성씨는 궁녀였습니다. 경희, 영희, 복연이라는 궁녀들과 소설을 필사하고 임금의 사랑에마저 순순히 응하지 않는, 정조의 완고한 가치관과 맞지 않을 법한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했는데 왜 하필 그녀여야만 했던 걸까요?' 이러한 의문을 이야기로 풀어냈다고 밝혔다. 작가는 후기에서 집필 완료(2015년) 이후에 새로 국역된 사료를 메인 스토리에 반영시키지 못한 걸 아쉬워하기도 했다.


9. 관련 문서[편집]



[1] 비공식적으로는 첫 번째 후궁이다. 《어제의빈묘지명》에서 정조가 "빈(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둔지 지금까지 20년이다.(“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라고 말했으니 정조는 처음 고백했던 15세 때부터 성덕임을 후궁으로 여겼다.[2]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에서는 '성송연'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이는 창작명이다.[3] 청연공주, 청선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 성덕임(훗날 의빈 성씨)이 참여했다.[4] 궁녀에게 하인이 웬 말인가 싶겠지만, 서양에서도 왕족을 지척에서 모시는 상급 시녀시종은 본인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고위 귀족인 것처럼 동양의 궁에서도 왕족을 모시는 지위쯤 되면 궁녀 중에서도 상급이라 방자나 무수리 등 심부름꾼 두는 것을 나라에서 보장해주었다. 내명부 항목 참조.[5] 개명 전 이름은 성식(成湜).[6] 어린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병의 총칭[7] 드라마 이산에서는 장결병(현대의 간암이나 간경병과 비슷)으로 설정했다.[8] 《어제의빈묘지명》이 쓰인 1786년(정조 10) 11월 이후에 종 6품 인의(引儀)에서 정 5품 통덕랑(通德郞)으로 증직 되었다.[9]승정원일기》, 《이재난고》, 《무보》, 《갑진왕세자책봉경용호방》, 《창녕성씨상곡공파보》 속의 성윤우는 동일인물이다. 아들 성담(成湛), 성완(成浣), 성흡(成洽)이 무과에 합격했고 부친은 성수산(成壽山), 조부는 성근립(成謹立), 증조부는 성경(成景)이라는 점이 모두 일치한다.[10] “元子私親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황윤석 《이재난고》 35권, 1783년(정조 7) 2월 30일(신묘)[11] “閭巷卑微” 《어제의빈묘표》[12] “嬪者出自寒微” 《어제의빈묘지명》[13] 《승정원일기》[14] 계고직비(階高職卑, 품계는 높고 관직은 낮음)에 따라 품계는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이고 관직은 종4품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이었다.[15] 정방의 조카 정복환(鄭福煥)은 1786년(정조 10)에 부안 현감, 1787년(정조 11)에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당대 사람들은 정방, 정복환을 두고 의빈과 인척 관계여서 관직을 제수받았다고 웃었다.[16] “而爲一錢布衙門該吏 犯逋七千兩 幾死而敗”, 황윤석《이재난고》35권, 1783년(정조 7) 6월 11일(신미).[17] "踰十歲選入掖庭", 정조 《어제의빈묘지명》[18] “昭容成氏 名德任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황윤석 《이재난고》35권, 1783년(정조 7) 2월 30일(신묘)[19] “則惠慶宮 爲收昭容于侍側 親鞠育” 황윤석《이재난고》35권, 1783년(정조 7) 6월 11일(신미)[20] 《승정원일기》 영조 30년(1754) 5월 6일 갑신 20/35 기사[21] 애기나인은 생각시와 각시로 구별되는데, 생각시는 지밀, 침방, 수방 소속으로, 양갈래 머리를 틀어올려 댕기를 단 생머리(새앙머리)를 해서 생각시라 불렸다. 특히 지밀 소속일 경우 댕기가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뜨렸다. 치마도 끌릴 정도로 길게 해서 입었다고. 반면에 각시는 평범한 땋은 머리였다.[22] 《일성록》 정조 4년 경자(1780) 2월 21일(경오) 4번째 기사[23] "尹嬪當於正月 就舘設産室 則二月分娩之期明矣 或言 內人中又有受胎者 亦已多月云", 황윤석 《이재난고》 권33, 정조 4년(1780) 12월 8일(임자) 실록에는 기록이 없음.[24]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 정조 《어제의빈묘지명》[25] 상의(尙儀)는 정 5품 하계 궁관직, 상계 궁관직은 상궁(尙宮)이다. 승은을 입었으므로 특별 상궁 직첩을 받은 듯하다.[26] "尹嬪當於正月 就舘設産室 則二月分娩之期明矣 或言 內人中又有受胎者 亦已多月云", 황윤석 《이재난고》 권33, 정조 4년(1780) 12월 8일(임자)[27] "自辛丑七月聞 成氏有娠", 황윤석 《이재난고》 권35, 정조 8년(1784) 10월 21일(갑진)[28]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난 해. 사도세자의 경우 당일에 바로 원자정호를 했지만 문안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29] 《정조실록》 14권, 1782년(정조 6) 9월 7일 신축 1번째 기사[30] 김종수 《문효세자지문》 "壬寅九月七日寅時誕世子于昌德宮之讌華堂"[31] "복례는 1782년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 몸과 마음을 다한 공이 있어 주상께서 공을 갚으셔서 시녀 직위를 주시니, 제 영광이 지극하더라." 《한중록》[32] "아지는 내 유모로 (중략) 1782년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도 산실에 들어와 수고하니, 앞뒤로 거의 스무 차례가 넘는지라. 그 공이 적지 아니하니, 주상이 공을 표창하여 제 자손을 관청에서 일하게 하여 후한 녹봉을 받게 하시고, 저를 후히 대하셔 천한 몸에 당치 못할 은혜와 영광을 많이 주시니라." 《한중록》[33] 《궁궐지》 권 2, "重熙堂在觀物軒東 正宗六年壬寅建 東曰重陽門西曰資始門○堂額正廟御筆"[34] 의빈 사망 후 간택된 후궁 수빈 박씨가 이 빈호를 받았다.[35] #[36] 《일성록》 정조 7년 계묘(1783) 2월 19일(경진), 13번째 기사[37] 《일성록》 정조 6년(1782) 9월 7일(신축)[38] 《정조실록》 14권, 1782년(정조 6) 11월 27일 경신 3번째 기사[39] 《일성록》 정조 8년 갑진(1784) 윤3월 20일(을해) 3번째 기사[40] 《일성록》 정조 8년 갑진(1784) 윤3월 20일(을해) 2번째 기사[41] "新生翁主阿只氏, 以驚風奄忽普慟"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42] 《정조실록》 18권, 1784년(정조 8) 7월 2일 을묘 1번째 기사[43] 1764년, 영빈 이씨가 사망한 해[44] 문효세자가 죽은 후[45] 소망은 의빈이 죽기 전 뱃속에 있던 아이를 말한다.[46] 《정조실록》22권, 1786년(정조 10) 9월 14일 갑신 2번째 기사[47] “上曰, 婦人心弱, 全是七情症也。自五月以後得重病, 其間避接於本宮, 少有差勝之意, 故還爲入來, 竟至於此矣。” 《승정원일기》 1610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5일(을유) 15번째 기사[48] “彌月沈頓而日必盥頮爲予之” 《어제의빈묘지명》[49]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2월 27일 병인 5번째 기사[50] “成嬪 又方有娠四朔 則十月 乃産期也”, 황윤석 《이재난고》 39권, 1786년(정조 10) 9월 21일(신묘)[51] 일각에서는 단기간에 수차례 임신/출산/유산을 반복했다는 걸 근거로 의빈의 증세를 임신중독증으로 추측하기도 한다.[52]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1월 20일 경인 3번째 기사[53]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2월 9일 무신 4번째 기사[54]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2월 28일 정묘 2번째 기사[55]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2월 1일 경자 2번째 기사[56] 《일성록》 정조 10년 병오(1786) 11월 10일(경진) 2번째 기사[57] 《일성록》 정조 15년 신해(1791) 5월 3일(정축) 6번째 기사[58] 《일성록》 정조 14년 경술(1790) 6월 24일(계유) 3번째 기사[59] 정조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60]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2월 27일 병인 5번째 기사[61] 임신 중에 태기가 불화하여 가슴이 답답하고, 신경에 가해지는 어떤 자극으로 인해 몸이 쑤시고 아픔.[62] “又聞 九月十四日 成嬪 子懸之證 暴發而逝 盖和嬪尹氏所密毒也 故尹亟罪黜” 《이재난고》 39권, 정조 10년(1786) 10월 24일(갑자)[63] 한국학자료센터 인물관계정보 - 만가보: 7책 45면 (좌측) 7단 8행[64] 《정조실록》 23권, 1787년(정조 11) 1월 12일 신사 2번째 기사[65] 《정조실록》22권, 1786년(정조 10) 9월 14일 갑신 2번째 기사[66] "上曰, 夏禮葬時經費多入, 勅行纔過而今又遭意外喪變, 以今國用, 萬無措手之道, 戶曹財力蕩盡, 此實可悶。今番則旣不設都監, 汝須料量, 凡百所入, 務從省減, 其外應入之物, 皆以儲置給價爲之。以汝所見, 經費當爲幾許耶?” 《승정원일기》 1611책 (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6일 병술 14/14기사[67]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17일 정해 2번째 기사[68] “禮葬戶曹典醫監別設擧行” 《탁지오례고(度支五禮考)》 제 2책[69] 《일성록》 정조 10년 병오(1786) 11월 18일(무자) 4번째 기사[70] 《일성록》 정조 10년 병오(1786) 9월 16일(병술) 2번째 기사[71]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9월 16일 병술 1번째 기사[72] 《노상추일기》 1786년(정조 10) 9월 16일[73] 1870년(고종 7) 12월에 효창원으로 승격된다.[74] 《일성록》 정조 10년 병오(1786) 11월 20일(경인) 2번째 기사[75] “高陽郡之栗木洞壬坐原距文孝墓百步而近以從嬪之願也” 《어제의빈묘표》[76] 숙종의 누나와 동생[77] 《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1718) 4월 20일(무술) 1번째 기사[78] 《일성록》 정조 11년 정미(1787) 1월 10일(기묘) 2번째 기사[79]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80] 행정법규집[81] 봉상시(제사, 시호에 관한 업무를 보던 관청)의 행정 변천과정, 조직, 업무 등을 정리한 책[82] 인조의 생부[83]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 황해도 은율현 안현궁 궁방_1793년(黃海道 殷栗縣 安峴宮 宮房_1793年)[84] 승정원일기 2273책 (탈초본 114책) 순조 32년(1832) 1월 28일 병자 37/39 기사[85] “安峴宮 成氏 正宗後宮 文孝世子 大妣” 1894년(고종 31) 《의판(儀版)》 궁묘원(宮墓園)[86] “宜嬪宮 宜嬪成氏 文孝私親” 《태상지(太常志)》 권지 3, 〈궁(宮)〉[87] “四仲四名日祭...同 宣禧宮...” 《태상지(太常志)》[88]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 8책, 칠궁이묘(七宮二廟)[89] 신주를 무덤 앞에 묻음[90] 왕세자, 왕세자빈, 왕의 사친 등의 산소[91]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 7월 23일 양력 3번째 기사[92] 《향비규정(享費規定)》 1909년(융희 3) 4책[93] 묘표는 곧 묘비로 돌로 만든 비석을 생각하면 된다. 묘지는 망자의 신상에 대한 내용을 적어 무덤 내부나 근처에 묻은 것을 말한다. 묘지명은 산문으로 쓴 '묘지'에 대응하는 운문인 '명'까지 함께 있는 경우를 일컫는다[94] 1786년(정조 10년) 전면대자 : 박명원 서, 음기: 정조 어제, 서용보 서[95] 장서각 >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內各祭祝文)[96] 장서각 >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後各祭祝文)[97]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49쪽[98] 8대 조부 성자심(成子深)의 양자[99] 자(字) 만종(萬種)[100] "七代祖萬種齊陵參奉", 《어제의빈묘지명》[101] "高祖景軍資監正", 《어제의빈묘지명》[102]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3쪽[103] 성윤우가 사망했을 때 성윤우 - 장흥 마씨 - 부안 임씨 셋이 함께 합장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윤우의 맏이인 성담(成湛)이 마씨의 소생인지 임씨의 소생인지는 모르나 성담이 태어났던 1741년에 임씨의 나이가 20살이었던 것으로 보면 성담부터 의빈 성씨까지는 확실히 임씨의 소생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혼인 적령기를 생각해 보면 전란으로 인한 상황 등이 아닌 이상 혼인을 20살까지 늦추는 경우는 없으니 임씨는 늦어도 1740년에는 성윤우와 혼인을 하였고 3년 상을 생각하면 마씨 역시 1738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04]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3쪽[105]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4쪽[106]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6쪽[107]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7쪽[108] 신천강씨대종회, 인터넷족보, #[109] “鄭枋妾成生者與成嬪爲姑姪”, 황윤석 《이재난고》[110] 혜경궁 홍씨의 6촌 형제[111] “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황윤석 《이재난고》[112] “成哥之女 今東宮私親成貴人也 貴人之再從姊 卽鄭得煥之妾也”, 황윤석 《이재난고》[113] "內人中又有受胎者 亦已多月云(궁녀도 임신한지 여러달이 되었다.)" 황윤석, 《이재난고》[114] "自辛丑七月聞 成氏有娠(내가 신축년(1781년) 7월에 듣기를 성씨가 임신했다.)" 황윤석, 《이재난고》[115]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이때에 새로 출생한 옹주(翁主)가 졸하여 여러 신하들이 문안하기 위해 와 기다리고 있어서 드디어 소접(召接)한 것이었다.", 정조 실록 1784년 5월 12일[116] 이재난고에서는 옹주가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곧 죽었다는 내용과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에서는 옹주가 경풍(驚風: 갑자기 몹시 놀라서 정신을 잃고 넘어지며 몸이 싸늘해짐)으로 매우 급작스럽게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다.[117] 작품에 따라 병사, 자살, 살해 등으로 그려진다. 실제로는 병사했으나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다.[118] 정조가 의빈 성씨를 10대 초반에 처음 만났을 걸로 추측되고 15살 때 고백했을 정도니 실제로도 첫사랑이었을 것이다.[119] 수빈이 왕자를 낳지 않아야 자신의 아들이 대통을 잇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 하지만 문효세자는 5살에 요절했고 거의 곧바로 의빈 성씨도 세상을 떠났다. 정조의 뒤는 수빈 박씨가 의빈 사후에 낳은 순조가 이었다.[120] 정조가 의빈의 처소로 가는 장면에 의빈의 목소리로 깔리는 내레이션을 들으면, '(의빈의 생각에) 문효세자를 독살한 범인을 잡아 세자의 원혼을 풀어달라'는 말을 하려했던 것 같다.[121] 한지민은 드라마 이산 종영 이후 의빈 성씨의 묘를 실제로 다녀왔다고 말했다.#[122] 배우 한지민은 영화 역린에서 정순왕후 역도 맡았다.[123] 실제 역사상으로는 다섯째 임신 중에 졸하지만 극 전개상 일찍 죽은 옹주는 등장하지 않았다. 연출자인 이병훈 PD는 정조가 사랑하는 영조, 홍국영, 문효세자, 의빈 성씨의 연이은 죽음에 시청자들이 피로를 느낄까 우려했다고 한다.[124] 2016년 초연, 2017년에는 수원 연극 축제 개막작으로 재공연되었다.[125] 참고로 성송연이 강요된 자결을 하는 바람에 태어나지 못한 둘째는 왕실의 기대와는 달리 딸이었던 것으로 암시된다. 정조 서거 후에 박대수의 환상에서 정조, 성송연, 문효세자, 그리고 어린 소녀가 함께 나타났다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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