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 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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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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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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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 | 昌嬪 安氏


파일:창빈안씨묘소.jpg

창빈안씨묘 전경
출생
1499년 9월 11일(음력 7월 27일)
조선 경기도 금천현 안탄대 사저
(現 경기도 시흥시)
사망
1549년 11월 17일(음력 10월 18일)
(향년 51세)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소
창빈안산안씨지묘
(昌嬪安山安氏之墓)
재위기간
조선 상궁
1520년 ~ 1529년
조선 숙원
1529년 ~ 1540년
조선 숙용
1540년 ~ 1549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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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안산 안씨
부모
부친 - 안탄대(安坦大, ? ~ 1567년 이후)
모친 - 정경부인 황씨(貞敬夫人 黃氏)
배우자
중종
자녀
슬하 3남 1녀 [ 펼치기 · 접기 ]
1남 - 영양군(永陽君, 1521 ~ 1561)
2남 - 이이수(李頤壽, 조졸)
1녀 - 정신옹주(靜愼翁主, 1526 ~ 1552)
3남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 ~ 1559)[1]

봉작
상궁(尙宮) → 숙원(淑媛)
→ 숙용(淑容) → 창빈(昌嬪)


1. 개요
2. 생애
3. 대중 매체
4. 묘소



1. 개요[편집]


조선 중종후궁. 덕흥대원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친할머니이다. 참고로 하동부대부인과 더불어 선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국왕들은 전부 그녀의 후손이다.


2. 생애[편집]


경기도 시흥[1]에서 중종반정원종공신인 안탄대(安坦大)[2] 의 딸로 태어나 1507년(중종 2년)에 궁녀로 입궁했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성품이 차분하고 행동거지가 정숙하여, 정현왕후의 신임을 받았다. 정현왕후는 안씨를 아들 중종후궁으로 추천하여, 1520년(중종 15년)에 안씨는 정5품 상궁에 배수되고 1529년(중종 24년)에는 종4품 숙원(淑媛)에 책봉받았으며, 1540년(중종 35년)에는 종3품 숙용(淑容)까지 올랐다.

1544년(중종 39년) 11월 15일에 중종이 57세로 승하하자, 3년 복제 이후 인수궁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는데, 소용 안씨는 평상시 품행이 단정한데다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와 사이도 돈독하여 특별히 궐에서 머물도록 명하였다.(선왕이 승하하면 선왕의 살아있는 후궁들의 품계를 1단계 진봉하는 것이 관례였다.)

중종과 슬하에 영양군정신옹주를 생산한 데 이어, 후대 조선 왕통을 이끌어갈 덕흥군을 낳았다.

후계자 문제로 정치가 불안정하던 중종 시절, 안씨는 궁궐 생활에 눈에 띄지 않았고 품행이 단정해서, 중종의 정실(계비)인 문정왕후와 잘 지냈다.

중종 사후에도 문정왕후의 만류 덕분에 안씨는 여승이 되지 않고 궁궐에 머물 수 있었다. 또한 안씨가 죽은 이후에도 문정왕후는 안씨의 세 자녀를 잘 돌봐주었다. 그런 인연 덕분인지 문정왕후의 외아들 명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의 정실 인순왕후는 안씨의 자손인 하성군을 즉위시켰다. 선조와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안씨의 후손들이다.

안씨의 생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그녀의 손자인 하성군이 왕위에 오른 덕분에 소용 안씨는 내명부 정1품 빈(嬪)으로 추존되어 창빈의 칭호를 받았다.[3] 이후 묘자리에 국립서울현충원이 세워지면서 묘 주변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4명이나 묻히면서 그 영광을 더했다.


3. 대중 매체[편집]


  • 1995년 KBS2조광조》에서는 장연식이 연기했다. 딱히 존재감은 없지만 얌전한 이미지로 나온다. 장경왕후(박주미 분)가 후궁이었던 시절부터 친했던 것으로 묘사되는데, 장경왕후가 승하할 때 다른 후궁들이 겉으로는 울면서도 왕비 자리를 노릴 때, 진심으로 통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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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의 창빈 안씨
2001년 ~ 2002년 SBS여인천하》에서는 최정원이 연기했다. 경빈 박씨(도지원 분), 희빈 홍씨(김민희 분)처럼 암투를 꾸미는 후궁들과 달리, 이쪽은 역사에 기록된 대로 분쟁을 꺼리며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사람으로 나온다.[4] 그래서인지 문정왕후(전인화 분)의 편에 서거나 아예 나서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중종(최종환 분)이 세자를 책봉하기 위해 아들들의 재능을 살피며 경쟁을 시켰을 때도, 창빈은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을 기권시켜 옥좌를 포기하게 만든다.
하지만 파릉군(최동준 분)이 살생부를 제작해 반정공신을 비롯한 대신들이 모조리 쓸려나갈 위기에 처하자 다른 후궁들과 의기투합해 독기어린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5] 결국 드라마의 마지막까지 궁궐에서 사는 사람은 창빈 안씨 한 사람 뿐이다.[6] 또한, 내레이션에서 대놓고 "후궁 중 결국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최후의 승리자"라는 평가를 내린다.[7] 참고로 극 중에서 내내 '창빈'으로 나오지만, 그가 '창빈'으로 책봉받은 것은 사후에 손자인 선조가 즉위한 다음의 일이다.


4. 묘소[편집]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51호[8]

54호

55호
기기국 번사창
창빈 안씨 묘역
정간공 이명 묘역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
창빈 안씨 묘역
昌嬪 安氏 墓域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 / 면적
분묘 1基,석물 1基, 토지 414.3㎡
지정연도
1983년 11월 11일
시대
조선시대

파일:창빈안씨묘소.jpg}}}
창빈 안씨 묘[9]


묘소는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경내 후방에 있다. 1549년(명종 4년)에 사망했을 때는 경기도 양주 장흥에 매장되었으나 풍수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1550년(명종 5년)에 과천현 동작리로 이장했다. 그런데 무덤을 이장한 후 손자 하성군이 왕으로 즉위하자 이곳이 명당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세간에서는 창빈묘를 '동작릉'이라 높여 불렀다. 이장 후에도 130년 가까이 비석이 없었다가 1681년(숙종 7년)에 왕명으로 비가 세워졌다.[10] 원래 후궁의 묘지에는 신도비가 없지만, 조선왕조의 맥을 이었다는 공을 인정받아 신도비가 세워졌다. 재미있게도 창빈묘 주변에는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등 대통령 4인의 묘가 있어서 주변에 대한민국 대통령들을 거느리고 잠들어 있는 셈이다(!). 창빈의 묘를 가 보려면 국립현충원 김대중 대통령 묘소 쪽으로 가면 찾기 쉬운데, 창빈 묘는 정말로 저 네 대통령 무덤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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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경기도 금천현. 시흥은 조선 후기의 명칭이다.[2] 하지만 실제 공신 목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3] 《선조실록》 11권, 선조 10년 3월 24일 신해 1번째 기사.[4] 물론 초반에 일탈을 한 적이 있었는데, 드라마 5회에서 경빈, 희빈과 함께 화해주를 마시다가 이후에는 놀이를 벌주까지 마시다가 끝내 취해서 역시 취한 희빈과 웃옷을 벗고 잠깐 잠들었다가 밤에 희빈의 처소에 들어선 중종에게 들켰다. 여담으로 중종이 희빈의 처소에 들어선 건, 다름 아닌 취기를 이유로 먼저 저리에 떴던 경빈의 계략.[5] 다만, 이는 역사왜곡인데, 여인천하에선 '안당(安瑭, 1467~1521)'의 조카딸로서 반정 공신의 집안으로 묘사되었지만, 상술된 내용처럼 성이 같을 뿐 안당과는 본관도 다르고 남남이다. 여담으로 안당은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우참찬,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내면서 공신(정난공신)이면서도 조광조, 김안국 등을 중용하는 데 일조했는데,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를 변호하다가 탄핵당했으며, 이후 아들 안처겸이 역모를 꾀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들과 함께 처형(기록에는 교형(絞刑)이라 하여 교수형)당했는데, 당시 이를 고발한 사람이 천출 출신이지만, 안처겸의 인척으로 안당의 배려로 벼슬살이를 하던 송사련이란 인물로 선조 때 학자이면서 기축옥사의 배후로 거론되는 송익필의 아버지가 된다.[6] 실제 역사에서도 희빈 홍씨는 아들이 역모에 연루되는 바람에 궁궐을 나간다. [7] 다만, 희빈 홍씨가 80세가 넘어서까지 살았다. 그러나 손자가 왕이 된 창빈 안씨와는 비교되지도 않는다. [8] 52호 승가사승가굴관음보살상은 1989년 4월 10일에 해제되어 보물 1000호로 재지정받았고, 53호 중명전은 2007년 2월 7일에 해제되어 사적 124호 덕수궁과 통합되었다.[9] 사진 출처 - RanomA.[10] 《숙종실록》 11권, 숙종 7년 3월 17일 경오 3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