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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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종의 왕자
인성대군
仁城大君

봉호
인성군(仁城君) → 인성대군(仁城大君)[1]
시호
효소(孝昭)
본관
전주(全州)
이름
분(糞)
부왕
조선 예종
모후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생몰
기간

음력
1461년 11월 30일 ~ 1463년 10월 24일
양력
1461년 12월 31일 ~ 1463년 12월 4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여담
5. 가족과 후손



1. 개요[편집]


조선 전기의 왕족. 예종장남으로, 어머니는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한씨이다. 즉, 한명회의 외손자이며 현숙공주제안대군은 그의 이복동생이다.

2. 생애[편집]


1461년(세조 7년) 12월 31일에[2] 태어났다. 예종이 1450년 생이니까 무려 11세(!)에 첫 아들을 낳은 것이다. 세는나이 기준으로도 12살이다. 어머니 한씨는 15세[3]였는데 인성대군을 낳고 불과 5일 뒤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463년(세조 9년) 12월 4일에[4] 풍질로 불과 1세의 나이로[5] 요절했다.

3. 사후[편집]


사망 후 할아버지 세조는 영순군 이부[6]와 윤사로, 정인지,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상지관을 데리고 정인사에 가서 장지를 고르게 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의경세자의 묘소 동쪽에 조성되었다. 그해 12월 4일에[7] 효소라는 시호가 추증되었고 인성군(仁城君)으로 추봉되었다.

1472년(성종 3년) 4월 1일에[8] 인성대군(仁城大君)으로 승격되었다.

인성대군의 제사를 모시는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 1465년(세조 11년) 8월 15일에[9] 인성군의 제사평원대군의 사당에서 맡게 했다가 1470년(성종 1년)에 어머니 장순왕후의 혼궁으로 신주를 옮겼다. 그러나 3년 뒤에 장순왕후의 신주가 종묘로 옮겨져 혼궁을 폐하자 갈 곳이 없어진 인성대군의 신주는 묘소에 묻고 속절에만[10]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1488년(성종 19년)에 다시 평원대군의 사당에 부제하게 했다.#

일제강점기에 묘가 서삼릉의 비공개구역으로 이장되었다.


4. 여담[편집]


  • 이름 '분(糞)'의 뜻은 대변이다.(...) 왕손의 이름을, 그것도 왕세자의 아들[11]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12] 다만 고종의 어렸을 때 이름이 '개똥'이었던 것처럼, 오래살라는 의미에서 아명을 일부러 천하게 짓는 풍습에 따른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하는 정도. KBS1 드라마〈왕과 비〉에서는 세조(임동진 분)가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고 하여 그렇게 지어줬더니 도리어 요절했다"며 분노하는 장면[13]이 나오기도 했다.

5. 가족과 후손[편집]


아기 때 죽었으니 당연히 부인도 없고 자녀도 없다. 고종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14대손인 이백연을 인성대군의 봉사손으로 정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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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호는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에서 따왔다.[2] 음력 10월 24일.[3] 세는나이 17세.[4] 음력 10월 24일.[5] 세는나이 3세.[6]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외아들. 인성대군에게는 당숙이다.[7] 음력 11월 5일.[8] 음력 2월 23일.[9] 음력 7월 24일.[10] 俗節. 제삿날 이외에 철을 따라 사당이나 선영에 차례를 지내는 날.[11] 인성대군 생전에 예종은 왕세자였다.[12] 다만 뜻이 뜻인지라, 전주 이씨 일부 족보에서는 '숙(璛)'이라는 비공식적인 휘를 쓴 경우도 있다.[13] 이 장면은 세조 재위 말년을 묘사한 것으로, 원손(인성대군)은 물론 장남(의경세자), 둘째 며느리(장순왕후) 등이 모두 요절한 것을 두고 효령대군(김인태 분)에게 한탄하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