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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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高麗大學校
KORE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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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자유, 정의, 진리
LIBERTAS, JUSTITIA, VERITAS
상징
동물
호랑이
교목
잣나무
교화
철쭉
교색

크림슨



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분류
파일:고려대학교 심볼.svg 사립대학
개교
1905년 5월 5일 보성전문학교[1]
설립자
이용익[2]
총장
제20대 정진택[3]
재단 및 법인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주소
본교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
,(안암동5가 1-2),
분교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세종로 2511
,(서창리 208),
재학생
학부생
20,047명(2021년)
대학원생
9,525명(2021년)
교직원
교원
4,237명(2021년)
직원
1,181명(2021년)
대학기본역량진단
일반재정지원 선정대학(2021)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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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캠퍼스


세종캠퍼스





1. 개요[편집]



파일:koreauniversitymaingatemainbuilding.jpg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정문


고려대학교 홍보영상 (2020)


고려대학교 홍보영상 ‘Welcome to KU’ (2020)

고려대학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정릉동에 위치한 사립 종합대학이다.

1905년 충숙공 이용익이 고종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근대적 사립 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 1932년 인촌 김성수가 학교를 인수하였고 해방 후 1946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며 교명을 고려대학교로 하였다.

약칭은 고대(高大)이며, 영문명 Korea University의 약칭은 KU이고, FM구호민족고대[4]이다.

1980년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5]분교 설립을 인가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문서 참고.


2.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특징[편집]



3.1. 교명[편집]


영문명은 Korea University이다.

대학의 이름을 '고려(高麗)'로 정한 것은 인촌 김성수의 발상이었는데, 그는 1932년 재정난에 처해 있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1934년 안암동의 신축 교사(校舍)로 이전하고, 선진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보성전문의 교육여건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광복 후 1946년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를 발족시키며 새로운 교명을 정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그의 지론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가 만드는 대학은 반드시 우리나라나 민족을 대표하는 대학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는 만큼 교명도 반드시 그러한 뜻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야 하겠는데, 「조선」이나 「한국[6]

은 역사상 이민족에게 수모를 당한 일이 있어서 싫고, 「고려」도 실은 여진, 몽고 등의 시달림을 받은 일은 있지만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하여 좋다. 우리나라의 외국어 명칭인 Korea, Corea, Corée도 「고려」의 음을 표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

유진오, 『養虎記』. 231~232쪽


그러나 민족을 대표하는 대학이 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나타낸 김성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일제 초기에는 실력양성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 성향을 보였지만 이후 친일로 전향한 '선항일 후친일' 인사이다. 김성수의 지지층에서는 친일 행적 못지 않게 독립운동에 지원한 바도 크다며 친일이 아니라며 항변하지만, 대법원에서 친일 행적을 인정하여 독립훈장의 수훈이 취소된만큼 친일 여부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김성수가 과연 친일인사인지 여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역사적 해석에 관한 논쟁은 그 특성상 사회의 다른 분야와는 달리 법원의 판단과는 별개로 자유로이 이뤄지게 마련인데, 해방 직후 친일파로 인식되지 않았고 일생에 걸쳐 애국적 삶을 살아온 그를 친일로 모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참고자료] 그의 사후(死後) 1962년 독립유공자로서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가, 2018년 훈장이 다시 박탈되는 과정 속에서 친일에 대한 이러한 논란은 재부상하였다.

한편 고려대학교 정문에는 '고려대학교'라고 적힌 문패가 없다. 그 이유가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굳이 대학의 이름을 적지 않아도 누구나 이곳이 고려대학교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이를 소재로 한 시(詩)도 존재한다.[7]

3.2. 학풍[편집]


[집단연구] 고려대 106년의 자화상 : 월간조선 2011년 2월호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국내에서 인식되어 왔던 고려대의 모습은 아래와 같다.

1. 야성적, 저돌적, 정열적
고려대학교의 교풍은 야성적, 저돌적, 활기와 정열 등으로 대표되어 왔다. 대학의 상징동물인 호랑이, 활기와 정열의 진홍색(Crimson) 등 고대를 대표하거나 '고대' 하면 떠오르는 상징들은 대부분 위의 특징들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2. 협동적, 끈끈함
고려대에서는 졸업생을 '동문', '동창' 등의 단어 대신 '교우'라고 부르는데, 이는 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라는 의미이다. 사회에서 고려대 출신 사이에는 선후배간의 유대가 매우 강한 편이며 이는 개인적 면모가 강해진 현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고대에는 자기 이익만 앞세우려 하기보다는, 타인과 소통하며 서로의 장점을 살려 일을 분담함으로써 시너지를 내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또한 일대일 간의 관계보다는 폭넓은 집단주의적 관계를 더 선호하는 편인데, 구성원들의 애교심이 워낙 커서 그런지, 정치적 이념 및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르더라도 같은 고대 동문 사이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려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고려대는 동아리 조직이 발달하여, 그 구성원이 인간관계를 다지고 팀플레이를 하는 풍조가 강하다. 공부도 물론 중요시하지만, 개인의 성적만을 챙기는 능력보다는 사회 속의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능력, 남을 이끄는 지도력이나 상급자, 동료와 화합하는 친화력 등을 더 높이 평가한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장기적인 대인관계와 신뢰감을 중시하는 습관, 총대 메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질이 이런 문화 속에서 길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3. 개방적, 포용적
사실 고대생의 끈끈한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외부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일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고려대 교수들 가운데 자교 출신 비율이 60% 정도에 불과한 것,[8][9] 타 학부 출신 고려대 대학원생에 대한 대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역으로 상당히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더불어, 각 교수 및 학생들의 특기와 전문성 등을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교수들도 이런 학교의 문화에 큰 자긍심을 느끼며, 어느 학생이든 '고대' 와의 인연이 있다면 언제나 그들을 반갑게 맞이 할 준비가 되어있다.

4. 불굴의 기질, 집념
이에 대하여는 캠퍼스 곳곳에 서 있는 육중한 석조건물이 고대생의 기질에 영향을 끼치는거 같다는 말이 있다. 연구에 있어서 특유의 집념과 저력으로 장기간의 꾸준한 연구를 요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래서인지 고대 출신 인물들은 날렵함, 또는 눈치 싸움으로 승부하는 분야보다는 지구력이나 참을성, 우직함으로 승부를 보는 분야에서 매우 강하다. 예를 들어 본교가 자랑하는 법학은 장기간의 지루한 공부를 견뎌내야 하는 분야이므로, 강세를 나타내 온 것이다.

5. 비판적, 저항적
학문적 기조는, 기성 학문에 수긍하기보다 독자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데이터 분석을 통한 수리논증이 대세가 될 때에 그에 맞서 이론분석의 방법론을 동등하게 강조하기도 했고, 미국/일본 유학파가 주류를 이룰 때에는 그에 맞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소개하기도 했다. 더불어 미국이나 일본에서 새로운 사조가 들어와서 우리 학계 전체를 휩쓸 경우에도 거기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전통적, 기본적,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일제 시절에는 일본 문화가 워낙 주류를 차지하다 보니 학문에 있어서도 민족주의적 경향이 매우 강했다. 참여정부가 추진한 한일공동역사연구회의 주축은 고려대 출신과 고려대 교수들인 조광, 김현구, 조법종 등이었고, 식민사관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비판하는 이희진 교수 또한 고려대 사학과 출신이다. 임나일본부설에 가장 실랄히 비판을 가하는 학자중 한명인 이재석 교수 또한 고대 학부 출신이다. 한편 민족주의의 병폐가 오히려 두드러진 이후에는 민족주의적 경향을 차차 희석시키기도 하였다. 물론 사이비까지는 아니지만 이희진 교수나 최재석[10] 교수 같은 경우는 다소 무리한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편이다. 해방 이후 한글 쓰기 운동이 대두되고 대한민국 교육이 한문을 점점 소홀히 하기 시작할 때 고대는 한문 해석 능력의 저하를 우려해, 학생들의 한문 실력을 대단히 중시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 교내 졸업요건에 한자 급수를 포함시킴으로써 이어 오고 있다.

열거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고려대의 학풍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스탠스에 특유의 정(情)이 합쳐진 모습으로 대표되어 왔고 이는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이점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학내에는 여전히 수직적인 문화가 많았으며 실제로 동문 모임이나 학교 생활 대부분에서 일명 '고대인다운 모습'을 가질 것을 요구받기도 하였다. 더불어 고려대학교가 지켜 왔던 ‘굳건한 기질’은 다르게 말하면 보수적, 즉 변화에 소극적이라는 단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듯 학교의 구성원은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것에 소극적이었고, 2010년대 초중반을 지나며 경쟁 대학들이 새로운 건물이나 시스템 등을 구축하며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함에 따라 고려대의 위상에 대한 회의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20대를 중심으로 하여 불어온 자유주의 및 개인주의 성향은 고려대에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학풍에 근본적인 변화가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다른 대학에 비해선 여전히 전체주의적이라 볼 수 있지만 개인주의적 면모 역시 매우 강해지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몇 가지 존재하는데 첫째는 총학생회의 장기간 계속되는 부재이다. 1990년대경까지 지속되었던 사회운동의 시대에 고려대는 그 중심에 서 있었고, 이러한 학생운동의 중심에는 학생회 및 회장이 진두지휘를 맡고 있었다. 즉 집단 및 끈끈함을 상징하는 본교의 심장과도 같은 직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리가 장기간 공석이 된 것은, 출마한 후보의 자질 문제도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과거와 같이 조직을 중심으로 똘똘 뭉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학생회 선거에 대한 주목도가 많이 낮아진 것이 크다.

둘째로는 집단 행사의 약화이다. 본교에는 4.18 구국 대장정, 사발식과 같은 단체행사들이 많이 존재하였으며 이는 학교의 아이덴티티였다. 이를 기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이를 참여하며 결속을 다지곤 하였다. 그러나 2010년대부터 인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이러한 행사 속에서 묻혀 왔던 다양한 폐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맞춰 재학생 사이에서 강제 참여에 대한 비판론이 대두되었고, 결국 대부분 행사는 폐지, 혹은 선택참여 수순을 밟게 된다. 더하여, 새로운 교육을 중시하는 자율형 고등학교 및 국제고 출신 학생들, 그리고 해외 유학생들이 늘면서 학과 내의 가부장적 색채 또한 옅어지는 추세이다. 가장 큰 변화를 보여주는 학과는 국제학부로, 상당한 수의 유학파들이 영향을 준 결과 교수진까지는 몰라도 학생들 사이는 전혀 가부장적인 느낌도 없으며 딱히 집단주의를 굳이 강요하지도 않고 학생 개인에 따라서는 나이 차이가 나도 그냥 친구로 지내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맞추어, 보수적이라 평가받았던 학교 운영 측이 2020년 들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시행하는 것이 눈에 띈다. 15년 가까이 사용되었던 학교 수강신청 시스템을 개편했고 '전과' 등 타교에서 시행하는 학사제도를 신규 도입하거나, 모바일 학생증을 신설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상당히 급진적이기 때문에 향후 학생 측과의 대화를 통한 점진적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즉, 고려대학교는 격동하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특유의 끈끈한 집단주의 및 정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으나,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고자 이를 소폭 희석시키는 동시에 자유주의적 면모를 더해 가고 있다. 분명 이는 긍정적인 변화이나, 자칫 너무 극단적인 변화를 추구하여 타 학교와 차별화되어 왔던 고유의 기질이 사라지지 않도록, 구성원들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4. 재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상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상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학생운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학생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교우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교우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학사제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학사제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강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강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학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학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대학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대학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입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입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총학생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총학생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동아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동아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 시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시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1. 식당 및 매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식당 및 매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 고려대학교의료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의료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 교통[편집]





18. 각종 행사[편집]





19. 사건사고[편집]





20. 노동조합 현황[편집]




21. 출신 인물[편집]





22. 관련 문서[편집]





[1]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로 승격[2] 대한제국 시대의 관료,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자세한 생애는 문서 참조.[3] 고려대학교 기계공학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본교 기계공학부 교수로 재직하였다. 고려대학교 공과대학장, 공학대학원장, 기계공학부장, 교수학습개발원장, 대외협력처장 등을 역임하였다.[4]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고려대학교 총학생회가 모여 처음으로 총학생회의 이름 앞에 자주, 민주, 민족, 해방 즉 자주-민주 민족해방 별명을 붙이게 된 것이였고, 각각 자주관악, 민주연세, 민족고대, 해방이화였다. 연세대학교의 경우 민주화 이후 학생사회에서 남북통일문제가 이슈가 되던 1988년 '민주연세'에서 '통일연세'로 바꾸었다.[5]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6] 여기서의 '한국'은 현재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제국을 의미한다.[참고자료] 관련 자료(모바일버전, PC버전), 증언 동영상(모바일버전, PC버전), 관련 논문(#1, #2), 관련 서적(#1, #2)[7] 이 시를 읽으며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정문에도 문패가 없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으나, 관악캠퍼스로 통합 이전하기 전 서울대학교 대학본부가 위치해 있던 동숭동 캠퍼스의 문리과대학 정문, 법과대학 정문 등에는 원래 문패가 있었다. 옛 동숭동 캠퍼스 자리 맞은편의 연건캠퍼스를 꾸준히 지키고 있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문의 경우 정문 자체의 원형을 현재도 잘 간직하고 있다.[8] 고려대학교의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교수들 가운데 다수의 교수들, 예를 들어 김병로, 현상윤, 안호상, 오천석, 유진오, 손진태, 이상은, 김상협, 김준엽, 현승종, 윤천주, 김충렬, 김우창, 문국진, 이필상, 김화영 등이 타교 출신이다.[9] 서울대의 경우 교수의 자교 출신 비율은 80% 이상, 연세대는 70%에 이른다.[10] 다만 최재석은 사학과 교수도 아니고 전공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