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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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조선 전기
3. 임진왜란과 소실
4. 조선 후기의 중건 시도와 방치
5. 흥선대원군의 중건
6. 연이은 고난
8. 광복 이후
9. 복원
9.1. 1차 복원 사업
9.2. 2차 복원 사업
9.3. 복원 오류 논란
9.3.1. 시멘트 사용
9.4. 광화문 현판 복원과 월대 복원


1. 개요[편집]


다큐 온 - 조선의 첫 궁궐, 경복궁 다시 서다
경복궁의 역사에 관해 다루는 문서.

상세 내용처럼 경복궁은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면서 공백의 역사를 자주 지녔다. 현대인들에게는 경복궁의 상징성과 랜드마크로서의 인지도가 다른 4개의 궁보다 크게 인식되고 있어서인지, 경복궁의 역사성까지 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 통념과 달리 경복궁의 역사성은 인근의 창덕궁, 창경궁보다 훨씬 짧은 편이다.[1]


2. 조선 전기[편집]



파일:비변사계회도경복궁.jpg

1550년 〈비변사계회도〉에서 묘사한 경복궁의 전경
경복궁 입지 결정에 관해서는 정사의 기록과 야사가 혼재되어 있는데, 정사와 야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학대사의 비중이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야사에는 무학대사의 영향력이 큰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무학대사와 관련된 야사의 상당부분은 후세에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경복궁 입지 결정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진다. 무학대사가 한양에서 궁궐의 터를 잡을 때, 처음에는 청계천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현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지.)에 터를 잡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노인이 소를 이용해 밭을갈며 소가 일을 못한다는 불평으로 "이러, 이 무학 같은 소야."라고 하는 바람에 놀란 무학이 좋은 터를 묻자 여기서 십 를 더 가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2] 그리하여 처음 터가 왕십리[3]가 되었고, 노인이 말한 곳이 현재 경복궁 터였다고 한다.[4]

위 야사와는 별개로 실제로 경복궁 입지를 두고 최초로 고려된 것은 계룡산의 남쪽(현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계룡대 부지)[5]이었으나 수운이 너무 약하다는 의견 등으로 엎어졌고 이후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경합했던 두 곳은 무악산[6] 남쪽(현 연세대학교 부지)과 북악산 남쪽 고려 남경 행궁 부지(현 경복궁 위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 3년(1394년) 8월 8일부터 태조는 서운관원 등 소수의 신료들과 직접 한양에 행차하여 며칠간에 걸쳐 무악과 북악을 모두 시찰하였다.[7] 무악과 북악을 두고 신료들의 논쟁이 이어졌으나 무악이 좁다는 의견이 많았고, 1394년 8월 24일 태조는 도평의사사의 의견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현 위치로 최종 결정하였다.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도성 설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후에도 11월 태조는 무악으로 천도를 다시 의논해보라 하였으나, 역시 신하들이 모두 좁다고 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경복궁은 풍수를 고려해서 지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모두 수도로 한양을 지목했지만 무학 대사는 동향을,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무학 대사가 2가지 예언을 했는데, 첫 번째 예언두 번째 예언은...[8] 당연히 위의 두 이야기는 야사일 뿐이다. 무학대사는 사실 한양을 지을 때나 경복궁을 지을 때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태조가 한양에 대하여 묻자 "좋은 곳이긴 한데 대신들과 백성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라"고 한 게 전부이다. 또한 정도전은 풍수지리를 괴력난신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야기 역시 야사에 해당한다. 무학 역시도 풍수에 별로 밝은 인물이 아니었고, 태조가 처음 천도 논의를 할 때에도 사양하려 하였으며 이후에도 실록을 보면 풍수와 관련된 논의에 별로 끼어들지 않는다. 경복궁은 풍수가 아니라 《주례》에 의거하여 대신들이 정하였고, 무학은 별로 관여한 바가 없다. 실제로 위의 두 예언 설화는 16세기나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전란이 터진 뒤에 그것과 경복궁을 끼워맞춘 것에 더 가깝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 정도 지난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다. 흔히 비교되는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이다. 자금성은 1406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다. 즉,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따 지었다는 등의 설명은 틀린 설명이다. 완공 후 정도전이 궁궐의 주요 전각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등의 이름을 정했다.[9]

처음 완공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390여 칸이었는데, 흥선 대원군 중건 당시 규모가 7225칸이었다는 점을 보면 상당히 작고 조촐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완공 당시 궁궐 중심부의 핵심 시절 위주로 건설되었으며, 궁궐 주위를 구분하는 담장도 없었다.[10] 이후 지속적으로 증설 공사가 이어졌는데, 특히 세종대에 대대적인 확장 공사가 이루어져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도록 서쪽으로 틀어지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火]의 산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 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1405년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단행했다. 이때 태종은 곧바로 한양으로 재천도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과거 태조 시절 천도 후보지였던 무악(연희동)과 한양을 두고 고심하였다. 1404년 10월 태종은 조준, 하륜, 권근, 이천우 등 조정 최고위 관료들과 여러 종친들을 데리고 직접 무악 현지 답사까지 다녀왔다. 조정에서는 무악과 한양을 두고 격론이 오갔으나 찬반이 비슷하여 결정이 나지 않았다. 결국 태종은 종묘에서 점을 치도록 하였고 그 결과 2대1로 한양이 결정되었다. 이때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를 확정하면서도 “나는 무악에 도읍하지 아니하였지만,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무악에 아쉬움을 보였다. 태종은 한양 재천도를 결정했지만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건설하여 이곳으로 들어왔다. 태종은 경복궁을 매우 꺼려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이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를 명하고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창덕궁이 완공되지 않아 입궐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이때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민가에서 일주일 정도 숙박한 후에 창덕궁에 입궐했다. 태종이 경복궁을 얼마나 꺼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11] 당시 창덕궁은 꽤나 짧한 일정 속에 지어졌는데, 경복궁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였고 정전(正殿)인 인정전은 3칸 규모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1411년 태조가 승하한 지 3년이 지나자 사간원에서 "태조께서 지으신 경복궁을 비워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려 태종에게 경복궁에 다시 거처하라고 주청한 일이 있다. 그러나 태종은 꽤 솔직하게 ‘내가 무인년에 말하기 부끄러운 일을 했는데 어찌 차마 경복궁에 거처할 수 있겠느냐’며 거부하였다. 관련 실록 기사 그러나 태종은 사신을 맞는 등 큰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 경복궁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태종 본인도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라 여겼고, 본인이 계속 창덕궁에 거처한다면 후세 왕들도 경복궁에 거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결국 태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할 뜻을 밝히고 박자청에게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추가적인 중수 공사를 명하였다.

1412년에는 연못에다가 어찌 건물을 올릴 수 있느냐는 신하들의 우려도 불구하고 경회루 건설을 지시했고, 박자청은 이를 실현시켰다. 왕세자 양녕대군이 친필로 직접 경회루의 현판을 써서 태종을 기쁘게 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태종 대에 건설된 누각은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현재의 것보다는 작은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경회루 하단의 석조 기둥들은 태종 대에 만들어져 임진왜란 때도 불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경복궁 터를 그린 그림에서는 황폐한 궁궐 터 가운데 경회루의 석조 기둥들이 남아있는 모습을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태종은 핑계를 대며 미루다가 1413년 5월 말 드디어 경복궁으로 이어했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만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창덕궁으로 돌아와서는 멋쩍었는지 신하들에게 "더위를 피해 경복궁에 머물렀느니라"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가끔 경복궁으로 이어했지만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던 곳으로 보인다. 그래서 태종 실록에만 경복궁으로 이어, 창덕궁으로 환어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후 세종실록부터 임진왜란 때까지는 경복궁으로 환어했다는 표현이 실록에 지속되므로 경복궁이 계속 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세종대부터는 경복궁은 다시 왕이 실제 거처하는 정궁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세종은 상왕 태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주로 창덕궁에 거처했지만, 태종이 승하한 후 세종은 경복궁 공사를 명하였고, 집권 중기 이후부터는 거의 경복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봤다. 특히 비만 및 눈병으로 고생하던 후기에는 거의 경복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경복궁에서 세종의 왕도정치의 흔적이 녹아 있는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가 집현전 전각인데, 왕이나 왕족이 사용하지 않는 궐내각사에 불과한 건물임에도 불과하고 집현전은 경복궁에서도 근정전과 경회루 다음 가는 규모의 크고 아름다운 건물로 건설되었다. 세종대에 여러 전각이 새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 다소 작게 건설된 사정전 등의 기존 건물들을 중수하기도 했다. 1431년에는 광화문이 세워졌다. 이때의 광화문은 중건 이후와는 달리 문 입구가 사각형 모양인 평거식(平据式)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경복궁은 세종 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 전기 경복궁의 기본적인 형태는 세종 때 완성되었다. 이후 경복궁은 조선 전기 내내 조선의 정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세종대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지속적인 증·개축을 거쳤다.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기와가 올라가기도 했다.

이후 중종 때 화재로 동궁전이 불타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전 경복궁에 일어난 가장 큰 화재는 명종 때 발생했다. 1553년(명종 8년) 대화재가 발생해 근정전을 제외한 편전 및 침전 구역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이때 조선 왕조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보물과 유산들도 화재로 함께 소실되었다고 한다. 윤원형 등의 지지하에 명종이 독촉한 결과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어 이듬해에 매우 신속하게 중건이 완료되었다.

3. 임진왜란과 소실[편집]


명종 때 중건된 지 38년 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파천을 떠나자 도성이 아노미가 되면서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은 일본군이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의 손에 이미 모조리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12]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세자빈(順懷世子嬪)의 찬궁(欑宮)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수정실록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

왜란기의 경복궁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대로 선조가 파천하자마자 성난 군중들이 궁성과 형조, 장례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방화 주체가 조선 백성들이 아닌 일본군이라는 설도 제기되기도 한다. 일단 인조 대에 쓰인 선조수정실록은 《징비록》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데, 당시 파천에 함께했던 류성룡도 직접 보고 쓴 기록이 아니라는 한계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13]무엇보다 파천 당일 폭우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궁궐에 화재가 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한성 함락 당시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일본 측의 기록이 나오면서 일본군이 방화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있지만, 해당 기록의 출처인 《조선정벌기》는 정작 임진왜란 때 참전도 하지 않은 저자 오제키가 후대에 상상력을 가미해 쓴 군담소설에 가깝기 때문에 경복궁을 보았다는 진술은 신뢰하기 어렵다. 심지어 오제키의 임진왜란 당시 나이는 8살이라 신뢰도는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 선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본 것은 4대문과 종묘 정도였다.

다만 그렇다고 경복궁 방화의 주체가 분노한 백성들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점들이 꽤 있는것도 사실이다.

일단 선조실록에서는 왜군이 한양에 당도하기전 궁궐이 불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선조실록에서는 종묘에 주둔한 왜군들에게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서 왜군을 괴롭혀 피를 토하고 죽는 군사들이 발생하였다는 과학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기록도 있어 선조실록에 있다고 100%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해당 기록에 따르면 종묘는 왜군이 한양에 당도할때까지 있었다는건데 분노한 민중들에게 궁궐이 불탔다면서 조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건물[14]인 종묘는 궁궐보다도 조선왕실에 대한 상징성이 더 큰데도 민중들이 냅뒀다는것은 뭔가 납득하기가 힘들다.

또한 왜군이 경복궁에 대해 묘사한 기록이 후대에 창작된 기록이라하더라도 왜군이 방화했을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지는것은 아닌것이 한양에 당도한건 5월 3일인데 일본의 기록인 서정일기에서는 5월 7일에서야 불타버린 경복궁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걸 보면 5/3~5/7사이에 왜군에게 불타 없어진걸수도 있다.

이와는 별개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울에서 퇴각하면서 대량 학살과 방화를 한 기록은 있다.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행장(行長) 등이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긴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밖에 있는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하는가 의심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오직 여인들만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남자들 중에는 혹 여자 옷으로 변장하고 죽음을 면한 자도 있었다.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도 거의 불태워버렸다.

선조수정실록선조 26년(1593년) 1월 1일 #


4. 조선 후기의 중건 시도와 방치[편집]


수복 후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는 정릉동[15]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를 개수하여 임시 궁궐로 사용했고, 그곳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16] 선조는 경복궁 대신 창덕궁부터 우선 중건하도록 결정하여 1605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선조는 경복궁을 먼저 중건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착공에 들어갔지만, 경복궁 터가 너무나 황폐화되어 복구하는 데 엄청난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중건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창경궁을 재건하였고, 새로 경희궁[17]인경궁을 짓는 등 궁궐병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궁궐을 동시 다발적으로 지었지만, 경복궁은 끝내 중건하지 않았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경복궁 중건을 일부러 피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복궁은 조선 후기 내내 중건되지 못했고, 궁궐 터는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인 채 270여 년간 공터로 유지되어 왔다. 다만 의령남씨가전화첩의 〈영묘조구궐진작도〉를 보면 영조가 근정전이 불타고 남은 축대 위에서 신하들에게 하례를 받는 모습이 있어, 그냥 아무 관리 없이 방치된 것은 아니고 나라에서 관리는 지속해온 것으로 보인다.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인 주변 환경 덕에 경복궁은 20세기 초엽까지 범의 주요 출몰지역 중 하나였다. # 또 조선시대에 호랑이라 기록되던 '범' 중 일부는 표범이었는데, 조선시대 한양에서 서식했던 '도시표범'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던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과 런던동물원은 한양에 출몰하였던 이러한 '도시표범'들이 300년의 세월 가까이 비어있던 경복궁을 은거지로 삼아 숨어있다가 어두워지면 한양 도심으로 나와 사냥에 나섰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버려진 경복궁은 맹수들에게 있어 이상적인 서식지였는데, 주요 사냥터인 도심지는 물론 주변의 산과도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낮에는 경복궁의 폐허나 인왕산, 북악산 등에 은거하다가 밤이 되면 도시로 기어나왔다는 것이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시베리아호랑이/한반도 문서 참조.

5. 흥선대원군의 중건[편집]



파일:gPOGWb3.jpg

고종 당시의 경복궁 조감도
1864년 고종의 섭정 자격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집권 이듬해인 1865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다. 2년 후인 1867년에 마침내 경복궁이 중건이 완료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7,225칸 규모였다.[18] 경복궁 중건에 소요되는 재원은 당시 조선 1년 예산의 10배 가량 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를 조달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원납전을 걷고 당백전까지 발행하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펼쳤는데, 당백전은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조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고[19] 이는 결국 그의 실각 원인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국력을 크게 소모해 가면서까지 새로 지었는데 정작 실거주자인 고종은 신축된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복궁에 입주한 지 5년 만인 1873년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몰래 경복궁 북쪽 구석에 민가 형태의 건청궁을 지은 후 아관파천 때까지 거의 줄곧 그곳에 거처했다. 을미사변이 벌어진 장소도 건청궁 안 곤녕합이다. 개항 후에는 전등을 설치하고, 러시아인 건축가인 사바틴을 초빙해 건청궁 내에 있던 관문각을 2층 크기의 양관으로 바꾸는 등의 현대화 작업도 진행되기도 했다.[20]

6. 연이은 고난[편집]


중건 후 20년도 되지 않아 경복궁은 조선의 혼란스러운 근대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 군대가 궁궐을 습격하여 대원군을 정계에 복귀시켰고, 1894년에는 청일전쟁을 앞두고 조선의 정국을 장악하려던 일본군이 재차 대원군을 옹립하며 경복궁을 무력 점령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듬해 일본은 친러 행보를 보이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또다시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을 무력 점령하고,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는 만행을 벌였다. (을미사변) 2년 연속으로 칼을 빼든 일본군 장교들에게 위협을 받은 고종은 더이상 경복궁에 애착을 가질 수 없었다.

결국 을미사변 후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했다. 아관파천 후 1897년 고종은 경복궁 대신 경운궁[21]으로 환궁했고,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환궁 당시 경운궁은 민가를 개조한 전각 두 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고종은 1896년부터 1902년에 걸쳐 6년간 대대적으로 경운궁을 궁궐화하는 공사를 벌였다. 확장 공사라기보다도 그냥 궁궐을 새로 짓는 수준이었다. 공사 당시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가 경운궁 전각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고종은 경운궁으로 이어한 후에도 일부 행사에서는 경복궁을 계속 이용했는데, 외부인들을 초대해 가든파티를 개최하거나 귀빈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1907년 다이쇼 덴노가 황태자 시절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황태자였던 영친왕의 안내로 경복궁을 둘러보기도 했다.

경복궁과 다르게 창덕궁의 전각은 전혀 헐리지 않았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 전체가 홀라당 타버렸을 때 고종과 조정은 창덕궁으로 이어할지, 경운궁을 재건할지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지만, 경복궁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경복궁에 대한 고종의 태도는 거의 혐오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보인다. 한편 세간에는 한일병합조약 직후 일장기가 근정전에 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경술국치 문서 참조.

7. 일제강점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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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공진회 개최 당시의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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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선 시기의 경복궁


EBS에서 제작한 영상 〈역사채널e - 경복궁의 눈물〉
한일합방조약 이후 새로이 한반도를 지배하게 된 된 일본 식민체제는 직전의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식민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훼손했다.[22] 조선총독부는 우선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동쪽 담장을 안으로 밀어넣으면서(현재 삼청동길) 약 4,000여 동의 건물을 없애 버렸고, 이후 경복궁 내부 중앙 축선에 근정전광화문을 가로막는 형태로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지은 뒤 광화문을 다른 자리로 옮겨버렸다. 이 외에도 여러 전각들을 훼손하거나 통째로 일본으로 밀반출하는 등 일제강점기 내내 온갖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일제가 훼손한 공간들은 상술한 조선물산공진회나 다른 박람회 여럿을 개최하는 등, 일종의 컨벤션센터 개념에 가깝게 활용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흥례문 터에 지어진 조선총독부 청사집옥재 일대에 총독 관저의 경비를 맡은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집옥재 일대의 경우 8.15 광복 이후에도 이 잔재가 남아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경비단 병력[23]이 경복궁 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1996년 30경비단이 33경비단과 통폐합해 제1경비단을 창설하고 부대를 이전하면서 해결하였다.


8. 광복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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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앞을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가로막고, 그 건물을 또 콘크리트 광화문이 가로막고 있는 모습
일제강점기 일제의 수탈로 수난을 당했던 경복궁이었으나, 광복 이후에도 격동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며 경복궁은 수 차례 수난을 당해왔다. 경복궁에 남았던 대표적인 수난의 흔적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광복 이후에도 미 군정청사,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의 참모본부, 휴전 이후부터는 정부중앙청사로 쓰였다. 대한제국 황실이 몰락하고 조선총독부가 물러난 이후에도 경복궁은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 다시 섰던 셈이다.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정변에 참여한 군인들이 경복궁 내의 정부중앙청사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일도 있었다. 중앙청을 장악해 진압군을 무력화시키고 대통령과 미군의 승인을 얻어내기 위함이였다. 무력으로 경복궁을 장악한 박정희 정부는 광화문을 복원하겠다고 나섰으나 본래의 모습이 아닌 콘크리트 구조로 된 석조건물로 만들어버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의 기술로 문화재를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였다.[24]


파일:external/sunday.joins.com/0405.jpg

1979년 12월 13일 낮 광화문에 주둔 중인 쿠데타군.
뒤로 중앙청이 보이고 경복궁 담장은 일제에게 훼손당했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12.12 군사반란 당시에는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던 장세동 대령 휘하의 30경비단이 수도경비사령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쿠데타에 참여하기도 했다.[25] 당시 쿠데타군의 핵심이던 전두환 소장, 노태우 소장, 장세동 대령 등은 이곳에 모여 정승화 총장 체포, 수경사령부 및 특전사령부 무력화 등의 계획을 세웠다.


파일:attachment/capital_hall_destroyed.jpg

해체되는 조선총독부 청사
경복궁은 1995년 문민정부가 시행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재조명받게 된다. 문민정부는 과거사 잔재 청산을 내세우며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고 12.12사태의 주역이던 30경비단을 통폐합하여 이전했다. 이후 정부와 서울시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과거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9. 복원[편집]


광복 이후 경복궁을 다시 복원하려는 노력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무산되거나 체계적이지 않게 복원되었다. 1955년부터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이 경복궁사무소를 설치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엄연히 따진다면 지금의 청와대 자리 또한 경복궁의 뒤뜰에 해당되기 때문에[26] 완전 복원을 위해서는 청와대를 없애야 한다. 참여정부 때 청와대를 당시 '행정 수도'로 불린 세종시로 옮기기로 계획했으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은 관습헌법에 해당하기에 헌법개정절차와 같은 국민 투표를 거쳐야하며, 그렇지 않은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좌절되었다. 만약에 이때 대통령 관저를 세종시로 이전했다면 청와대 건물을 함께 옮겼거나 다른 장소에 청와대를 옮겨서 현대사를 기릴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27]

박정희 정권 시절 경복궁을 복원하려고 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실제로 복원된 것은 광화문을 제 위치로 돌려놓은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예산 부족과 정확한 고증과 철저한 준비 없이 의욕만 앞서서 시도하여 광화문을 콘크리트 구조물로 복원하여 정확한 복원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현판도 박정희가 쓴 한글 현판이었다. 웃지못할 일화로는 서예 대가이자 국회의원이었던 윤제술이 콘크리트 광화문에 걸린 현판을 보고 화가 나서 "아니, 어느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냐!"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 때 옆에 있던 동료 정치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통령을 가리키자 식겁하여 얼른 큰 소리로 "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 있는 글이구먼!"이라고 했다고.

윤제술이 지적했듯이 박정희의 글씨가 문화재에 걸 만한 명필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증대로면 한자로 적어야 할 현판을 한글로 적었으니 거기서부터 문제점이 있었던 것. 광화문이 후에 다시 제대로 복원될 때 그 현판의 보존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결국 고증을 지켜서 박정희 현판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현판은 당대 것을 복원하기로 하고 복원은 광화문 유리원판 사진을 바탕으로 고종 당시 영건도감 제조로 광화문 현판 서사관이 된 임태영이 쓴 현판을 디지털 복원하기로 하였다.

전반적인 문화적 교양 없이 탁상행정으로 결정해 버린 폐해가 드러난 예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나마 광화문이 겉모습이라도 멀쩡하게 복원되고 담장도 궁궐 양식을 따라 복원되면서 최소한 이곳이 경복궁 부지임을 일반인들도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조선총독부 청사도 가릴 수 있었다.


파일:1990년 경복궁 조감도.png

1990년 〈경복궁 조감도〉. 대부분 빈 터이다.
이때 경복궁 복원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데에는 비용 문제도 있었거니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었기도 했는데, 경회루 앞에 골프장을 만들겠다고 하거나(1963년), 박물관을 짓겠다면서 기존에 남아 있던 경안당, 대향당, 정훈당(동당) 등 9동 106칸의 전각을 철거(1966년)하는 등 그나마 남아있던 경복궁을 훼손하기도 했다. 철거한 경안당의 부재 일부는 1978년에 향원정 앞 향원교를 보수하며 사용한 기록이 있다. 1972년에는 앞서 서술한 고종 때 건축된 선원전 자리에 땅을 파고 조선 정부에서 기피한 불교 양식을 듬뿍 바른 국립중앙박물관 신청사 같은 건물을 지어올렸다. 이렇게 정부와 공무원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현저하게 낮았다.[28]

그러다가 1992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경복궁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계속 여러 곳에서 복원 공사 중이기에 지금도 경복궁 권역을 둘러보면 어딘가는 항상 공사 중에 있다. 하지만 이 공사에도 문제가 있는데, 동궁 근처 자리에 주차장을 짓질 않나, 앞서 국립민속박물관처럼 1979년에는 중앙청 후생관(현 국립고궁박물관)을 궐내에 짓더니 그것도 모자라 경복궁역과 연결 통로까지 짓는 등 어떻게 보면 궁궐 복원과 역행하는 짓을 저질렀다.

1990년 당시 경복궁 내의 전각은 36동만 남았다. 고종 당시 전각의 7% 수준으로, 말 그대로 거의 대부분이 사라진 공터가 되어버렸다. 궁내 잔디 밭은 대부분 건물 터다. 사라진 문화 유산에 대한 관점으로 보자면 잔디밭은 건물들의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파일:external/www.royalpalace.go.kr:8080/guide04_zoom.jpg

파일:gPOGWb3.jpg
2015년의 경복궁
고종 당시의 경복궁

9.1. 1차 복원 사업[편집]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이루어진 경복궁 복원 사업이다. 1차 복원 사업에서 총 89동의 전각을 복원하였다.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 완비를 목표로 작업하여 복원에는 목재 800톤, 석재 5,000톤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총 사업비는 1,571억 원이다. 1차 사업 결과, 경복궁 내의 전각은 모두 125동으로 고종 중건 당시 전각 500여 동의 25% 수준이다.

1단계
1990년~1995년
강녕전 및 침전 권역 복원
석조 문화재를 이전하고 강녕전 등을 복원.
2단계
1995년~1999년
자선당 및 동궁 권역 복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동궁 권역을 복원.
3단계
1996년~2001년
흥례문 권역 복원
국립 문화재 연구소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영제교 등을 복원.
4단계
1997년~2005년
태원전 권역 복원
30경비단을 이전하고 태원전과 주변 행각을 복원.
5단계
2001년~2010년
광화문 및 건청궁 권역 복원
기존 광화문을 철거하고 복원.


9.2. 2차 복원 사업[편집]



파일:경복궁 2차 복원 수정안.jpg

〈경복궁 2차 복원 수정안 계획도〉
정확한 명칭은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이다. 원래는 2011년 10월 3일부터 2030년까지 경복궁 전각을 약 76%로 복원하는 계획이었으나, 2015년 12월 15일 문화재청에서 경복궁 2차 복원 사업의 규모를 줄이고 총 기간을 연장하는 방향으로 조정키로 했다. 복원 추진 과정에서 문화재에 대한 방제 여건, 관람객 불편 최소화 등을 이유로 254동을 복원하기로 했던 것을 80동으로 줄이며 공사 기간은 기존의 2045년으로 15년 연장하였다. 총 투입 예산도 5,400억에서 3,000억으로 감소하였다.

2011년 12월 8일 문화재청은 경복궁의 사정전, 수정전, 향원정창덕궁금천교, 부용정, 낙선재와 함께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

1단계
2011년~
2021년
궁중 생활 권역 복원
소주방흥복전 영역의 건물 28동을 복원한다. 약 584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2단계
2019년~
2026년
제왕 교육 및 궁중 군사 권역 복원
동궁 및 오위도총부 영역의 건물 14동을 복원한다. 약 502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3단계
2026년~
2034년
궁중 통치 권역 복원
궐내각사 영역의 건물 14동을 복원한다. 약 529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4단계
2031년~
2042년
궁중 의례 권역 복원
선원전 및 혼전 영역의 건물 23동을 복원하고, 국립민속박물관을 철거한다. 약 1,304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5단계
2040년~
2045년
궁중 방어 권역 복원
· 서십자각 및 내사복 영역의 건물 1동과 궁장을 복원한다. 약 81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9.3. 복원 오류 논란[편집]


잘못 복원된 경복궁의 전각들

이 블로그의 글들과 2023년 현재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대략 이렇다.

침전 일대: 강녕전 실내복원이 잘못 복원되었고 강녕전응지당, 연길당, 경성전, 연생전의 행각이 연결되지 않았고 경성전연생전의 가퇴는 미복원되었다. 교태전도 역시 실내복원이 잘못되었고 동행각의 창문,벽지가 잘못 복원되었다. 또한 함원전 북쪽의 침채고는 복원하지 않았다.

동궁 일대: 자선당의 기단정면계단이 2단이 아닌 3단으로 복원되었다. 단 이건 일본으로 이건되고나서 찍힌 사진이여서 변형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하지만 측면의 계단을 미복원한건 아쉬운 부분이다.

흥례문 일대: 행각의 내부자료 부족으로 기별청을 제외한 행각이 뻥뚤린체로 복원되었다.

태원전 일대: 서쪽 세답방 일대가 절반만 복원되었다. 단 이건 궁장이 일제강점기에 안쪽으로 밀려났고 효자로를 세로 이건하는데 드는 예산문제로 어쩔수없다. 또 신무문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진거문 옆의 협문이 미복원되었다.

건청궁 일대: 건청궁의 담장은 자경전처럼 꽃담으로 되어있었지만 현재는 증거부족으로 일반담장으로 되어있다. 관문각과 종각(경복궁 시계탑)은 도면이 없어서 터만 남아있고 신무문집옥재 사이는 행각으로 나뉘었으나 내부자료 부족으로 담장으로 복원되었고 그 아래의 광임문은 솟을삼문이었으나 평삼문으로 복원되었다.

광화문 일대: 현판의 복원오류가 있고 증거부족과 예산문제로 월대와 좌우에 쌍으로 구성된 문 바깥쪽의 위소, 문 안쪽의 군사방이 미복원되었다. 단 현판과 윌대는 2023년 10월 15일 복원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다만 위소의 경우, 장애인출입구 및 경사로 설치를 위하여 해당 부분 월대 난간과 함께 미복원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경복궁은 1995년조선총독부 청사가 해체되면서 본격적으로 복원이 시작됐지만, 전각들이 복원될 때마다 항상 논란이 일고 있다. 이유는 당연히 그 전각이 어떤 모습인지는 알고 복원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현재는 이러한 복원에 부정적인 학자들도 대단히 많다.

일단 결정적으로 전각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려면 그 전각의 외부 및 내부 모습을 샅샅이 알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경복궁은 그런 도안이 없다.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은 〈동궐도〉와 〈서궐도안〉이 남아있어 그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지만 경복궁은 다르다. 일반인들이 말하는 〈북궐도형〉이라는 것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는 그림이 아니라 배치도이다. 즉 전각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고 몇 칸인지만 보여줄 뿐 내부 모습은 어떤지, 계단은 어떤 모양인지, 공포는 어떻게 생겼는지 등의 세부 사항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북궐도형도 구한말에 만들어진 거라 흥선대원군 당시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가령 강녕전과 부속 건물들은 원래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당시 왕실에서 그린 그림에서는 보이지만 《북궐도형》에서는 보이지 않는다.[29]

경복궁을 찍은 유리건판 사진을 참고하면 되지 않겠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100%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전부터 일본의 손에 경복궁의 전각들이 하나하나 해체되던 상태여서 모든 전각 중 겨우 20%의 사진만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주요 건물들의 당시 사진은 남아있으나 북궐도형을 기준으로 왼편, 오른편의 전각들의 사진은 선원전, 만경전, 제수합, 자선당, 오위도총부, 문경전, 선전관청, 서십자각 빼고는 아무것도 사진으로 남지 못했다. 그나마 유리건판 사진에 있던 전각들의 대부분도 이미 복원되었고, 현재 사진은 남아있지만 복원계획에서 복원되지 않은 전각은 문경전,선원전, 만경전, 오위도총부, 서십자각밖에 없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건물의 내부나 외부를 추정해서 복원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항상 논란이 있다.


9.3.1. 시멘트 사용[편집]


2018년 10월 8일 KBS의 보도에 따르면 흥복전 복원 공사에 시멘트를 20포대 정도 사용했으며, 2018년 4월에 관계자의 양심고백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 이에 재시공에 들어갔으나,# 시멘트가 소량 남아있을 수 있다고 문화재청이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한편 현재 진행 중인 전국의 여러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 시멘트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


9.4. 광화문 현판 복원과 월대 복원[편집]


2023년 10월 15일 광화문 현판과 앞에 월대를 복원했다.# 특히 월대는 100년만에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1] 특히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갑절이나 넘는 시기 동안 왕의 주요 궁궐(편의상 '정궁') 지위를 유지한데다, 상기했듯이 경복궁은 사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는) 275년 간은 복구하지도 않았던 궁궐이며, 조선왕조 500년간 경복궁에서 왕이 정사를 보던 시기는 150년 안팎이다. 즉 경복궁은 조선 초기와 고종 시기에만 궁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반면에 창덕궁은 조선 건국 초부터 그 멸망까지 계속 원형을 보존하며 존재했던 유일한 궁궐이다.[2] 일설에 따르면 그 노인이 신라 하대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도선국사였다는 야사도 있다.[3] 往十里, 갈 왕(往)를 써서 십 리 더 가라는 뜻. 왕래하다 할때의 그 왕이다. [4] 이 야사는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작중 에피소드로 다뤄졌다.[5] 실제로 궁궐 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에도 계룡대 내에 당시 공사에 사용된 석재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새로운 수도로 검토되었던 곳이라는 의미로 신도안(新都案)이라는 지명이 생겼다.[6] 서대문구 안산의 조선 시대 지명이 무악산이었다. 현재도 서대문구 무악재, 종로구 무악동 등의 지명에 남아 있다.[7] 여기에도 야사에 따르면 이성계가 서운관원들과 정도전, 무학대사를 데리고 무악산에 올랐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를 누가 수행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있지 않다.[8] 한양성을 쌓을 때 어떤 바위를 성 안에 넣느냐 마냐로 정도전무학대사가 싸운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풍수지리상 그 바위가 성 밖에 나오면 유교가 흥하고 성 안에 들어가면 불교가 흥한다는 것이었는데, 두 사람의 의견이 워낙 강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중 눈이 바위를 성곽 바깥으로 두어 둘레를 그리며 쌓였고 무학대사는 '불교가 이번 왕조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구나!' 하여 체념하였고 눈 울타리, 즉 설울이 훗날 서울의 어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기도 있다. 이 바위는 인왕산 선바위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해당 이야기는 당연히 설화일 뿐, 실제 서울의 어원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어원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이 변한 것이라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9] 정도전을 증오했던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창덕궁을 새로 짓도록 하고 그곳에 주로 머물렀다. 또 완공 직후 정도전이 일괄적으로 이름을 붙인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각 전각의 이름을 따로 짓지 않았다.[10] 제1차 왕자의 난 때 사병 군대가 쉽게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였기도 하다.[11] 그도 그럴 것이, 경복궁이라는 이름부터 시작해서 각종 전각 이름을 지은 당사자가 바로 태종이 죽인 정도전이다.[12] 선조실록에서는 일단 백성이 태웠다는 언급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나 # #이는 선조실록과 선조 수정실록의 차이점 중 하나이다. 보통 선조실록보다는 수정실록을 높게 쳐주고 선조에 관한 이야기 대부분을 수정실록에서 가져다 쓰므로 수정실록이 더 자세한 내막이 적혀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13] 사실 징비록에서도 백성이 태웠다는 언급은 없다.[14] 다만 당시에는 선조(조선)가 파천하면서 위패는 모두 가지고 간 상태였다.[15]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이 아니라, 당시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이 있던 현재의 중구 정동 지역이다.[16] 이후 광해군대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받고 정식 궁궐로 승격된다.[17] 건설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이었지만 영조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꿨다.[18] 애초에 처음 창건된 경복궁은 390칸 정도의 비교적 아담한 규모였으나 이후 실용적 필요로 확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전 경복궁의 규모는 아무리 크게 봐도 5,000칸 정도였다.[19] 원래 상평통보 최고액권이 당이전(當二錢)이었는데, 갑자기 그 50배 가치의 주화를 시장에 쏟아내게 되니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밖에.[20] 현재 관문각이 있던 자리는 빈 터로 남아있는 상태며, 을미사변 당시까지 건재했고 설계자였던 사바틴이 관문각에서 사건의 전말을 목격했다고 한다.[21] 경운궁은 당시 외국 대사관들 사이에 위치해 있었기에 일본군이 함부로 무력을 행사하지는 못하는 곳이었다.[22] 한국이나 대만 일부에서 주장하는 쇠말뚝 주장처럼 풍수지리적으로 기를 누르려고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 일본에 풍수지리가 많이 퍼지지는 않았고, 일본은 조선의 풍수지리를 미신이라며 비웃고 폄하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23]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에 속한 장세동이 지휘한 그 부대다.[24] 다만 이건 문화재 복원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무지가 더 큰 원인이였다.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다는 개념보다는 더 크고 멋있게 빨리 만들어야한다는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박정희 정부는 신라의 옛 도읍인 경주에 보문관광단지를 개발하여 신라시대의 유적을 발굴하였고 이 과정에서 경주 월성, 안압지, 대릉원 등의 신라 유적 및 유물들을 재조명한 업적이 있다.[25] 다만 30경비단과 경복궁 뒤편인 삼청동에 주둔한 33경비단은 편제상 수경사 소속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청와대 등 주요시설의 방위부대로서 대통령경호실의 통제를 받았다. 즉 쿠데타가 일어나던 79년 12월 12일 시점에서는 10.26 사건으로 인해 이 부대를 통제할 수 있는 명령권자인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등이 모두 사망하여 궐위였기 때문에 사실상 통제권을 가진 상급기관이 없는 상태였고 이 부대의 부대장이였던 장세동과 김진영은 쿠데타 이전부터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26] 지금의 경복궁은 면적의 일부가 잠식당했지만 부지의 상당 부분은 보존된 편이다. 경복궁의 권역에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까지 포함되는 매우 넓은 궁궐이었다. 하지만 그 권역 중에서 3분의 2가 날아간 덕수궁이나 권역이 통째로 사라졌다가 10분의 1 정도만이 복원된 경희궁에 비하면 보존이 잘 된 편이다.[27] 다만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과 동시에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용산구 한남동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게 되었다. 물론 청와대 자체가 이미 대한민국 현대사를 기리고 대통령의 권위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 되어버리면서 청와대 건물 자체를 이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28] 이러한 극치를 보여준 예가 무령왕릉 발굴 때의 일화와 1994년부터 있었던 경주 경마장 유치 파동이었다.[29] 1875년 화재 때 강녕전을 비롯한 내전 건물들이 다 타버려 다시 지었을 때 행랑을 연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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