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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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민황태자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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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의 황태자
의민황태자 | 懿愍皇太子

제2대 창덕궁 이왕

파일:영친왕.png

예복을 착용한 영친왕의 모습 (1920년대)
출생
1897년 10월 20일
한성부 경운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책봉
1907년 8월 7일
한성부 덕수궁 중명전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사망
1970년 5월 1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낙선재
능묘
영원(英園)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자
1907년 8월 7일 ~ 1910년 8월 29일
이왕세자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이왕
1926년 4월 27일 ~ 1947년 5월 3일
재임기간
대한제국 황실 수장 (명목상)
1926년 4월 27일 ~ 1970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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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은(垠)[1]
부모
부황 고종 태황제
모친 순헌황귀비
형제자매
4남[2] 1녀 중 4남
배우자
이방자
자녀
슬하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이진 (李晋, 1921 ~ 1922)
차남 - 이구 (李玖, 1931 ~ 2005)

종교
유교 (성리학)가톨릭 (세례명: 요셉, Joseph)
신장
158cm
작호
영친왕(英親王)
사시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
(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3]
절일
천추경절(千秋慶節)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13년 ~ 1945년
최종 계급
중장

1. 개요
2. 호칭 관련
3. 생애
3.1. 황태자 책봉과 결혼
3.2. 고통 어린 망국의 황태자
3.3. 조선 이왕(李王)직 승계와 일제시대의 행적
3.4. 광복 이후
3.4.1. 제정복고 시도 연루
3.4.2. 환국과 사망
3.4.3. 사후
4. 가족
4.1. 처가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시대의 경계인,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KBS 〈역사스페셜〉, 2011. 5. 12.)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후의 황태자이며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이왕(李王)이며 또한 일본 제국의 마지막 비주권군주다.[1] 종묘에 배향된 마지막 조선-대한제국의 황족이다. 종묘 영녕전에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이란 명칭으로 위패를 봉안하였다.

고종황제의 7남으로 순종황제의친왕의 이복동생, 덕혜옹주의 이복오빠이다.[2]


2. 호칭 관련[편집]


대한민국에서 그의 통칭은 고종황제가 된 후에 내린 친왕 號(친왕 작호)인 '영친왕(英親王)'이다.

간혹 '친왕(親王)'이 일본식 칭호이기 때문에 '친왕'에서 '친'을 뺀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부인인 이방자 여사도 생전에 '영친왕'은 잘못된 호칭이니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3]

하지만 사실 친왕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제도이고, 대한제국도 이에 준하여 제도를 정했기 때문에, '~친왕'을 가리켜 틀린 호칭이라고 하는 주장이 도리어 잘못이다.고종실록》 등에 '영왕'으로 적힌 예가 있긴 하나[4] '영친왕' 칭호가 틀려서가 아니라 단순히 '영친왕'을 줄여 썼을 뿐이다. 중국의 예를 들면, 청태조 누르하치의 아들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을 줄여서 예왕(睿王)이라고 부르곤 한다. 대한제국 시절 왕부에서 사용하던 도장에서도 '영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파일:external/www.dapsa.kr/2014_05_01-P5019598.jpg

파일:attachment/영친왕/영친왕필적.jpg
가운데 인장은 예서체로 '영친왕부', 오른쪽 인장은 전서체로
'영친왕부지인'(英親王府之印)이라고 새겼다. 왼쪽은 의친왕부의 인장.

영친왕이 9세 때 쓴 글.
왼쪽에 '英親王 九歲 作(영친왕 9세 작)이란 글씨가 보인다.

또한 영친왕도 스스로 '영친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9살 때(1905년) 쓴 글에도 스스로 '영친왕'이라고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영친왕인(英親王印)이라고 새긴 도장을 찍었다.

저런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수백년 넘게 정식 황제국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한국에서 '친왕' 호칭 자체가 낯선 데다가[5], 중국, 한국과 달리 황태자도 친왕으로 부르는 일본의 풍습, 그리고 '황태자 영친왕'이라 부르는 관습이 맞물려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영친왕' 호칭은 다른 이유로 문제가 된다. 저 칭호는 황태자가 되기 전에 썼기 때문이다.

친왕은 일반 황자일 뿐이고, 황태자는 '친왕'보다 격이 훨씬 더 높은 황제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황태자 작위와 친왕 작위를 동시에 가지는 것은 중국과 조선(대한제국)의 예법에서는 있을 수 없다. [6]그래서 영친왕이 황태자가 되자 영친왕 작호는 폐기되었고 이후 쓰이지 않았다. 그가 살면서 지녔던 작위는 '영친왕(英親王)', '황태자(皇太子)', '이왕세자(李王世子)', '이왕(李王)'이다.

해당 지위에 있을 때는 그에 맞게 불렀지만, 문제는 광복 이후였다. '이왕세자', '이왕'은 일제강점기 이왕가의 잔재라서 더 이상 공식적으로 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황태자라고 하기도 그랬다. 민주공화국 시기에 대놓고 황태자라고 하기엔 묘한 감도 있었으며 대한제국 황태자였던 시기도 몇 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가장 무난한 호칭은 몇십 년 전에 폐기했던 '영친왕'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지녔던 지위인 '황태자'와 '이왕세자', '이왕'은 보통명사로서 어떤 한 개인을 콕 찝어서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동시대에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한 명일 뿐, 시대에 따라서 지위를 가진 사람이 답습(세습)하면서 계속 변한다. 그런데 '영친왕'은 1인 고유명사로 그만을 따로 지칭해 부를 수 있다.

따라서 광복 이후 사람들은 그를 영친왕으로 불렀고, 그의 생전 당시 《대한뉴스》에서도 '영친왕' 호칭을 사용했다. 제370호 - 〈영친왕비 입국〉, 제445호 - 〈영친왕 환국〉, 제776호 - 〈영친왕 서거〉

사실, 일제강점기에도 비공식적으로 그를 '이왕', '이왕세자'보다는 '영친왕'으로 부른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런데 그건 일제의 호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태자'라고 부를 수도 있었겠으나 이미 나라는 망했기에 그러기에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애매했을 것이다.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시호인 '의민'을 붙인 '의민황태자', '의민태자'로 부르는 것이 맞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올린 사시(私諡, 사적인 시호)이기 때문에 또다른 논란이 된다. 원래 시호는 임금이 내리는 것이다. 사시(私諡)란 임금이 아닌, 어떤 사적인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들끼리 정하여 올린 시호를 가리키므로 공적인 권위가 없다. 만약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 이후 시호 제도를 부활시켰다면, 임금 대신 정부나 대통령의 명의로 시호를 정하여 '공적인 권위'를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시호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순종과 영친왕이 죽은 이후로 더 이상 '공적인 시호'가 나올 수 없다. 전주 이씨 집안 모임인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정한 사적인 시호를 과연 공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할까? 즉, 정리하자면 "'영친왕'은 왕조가 있던 시절에 정식으로 받은 고유 호칭이나, 황태자로 승작됨과 동시에 무효화되었다는 문제가 있고, '의민황태자'의 경우, '황태자' 작위는 공식적으로 받은 것이 맞지만 시호 '의민'이 사시라는 문제가 있다." 고 할 수 있다.

다만, 종묘 영녕전에 '의민황태자 영왕'으로 올라가 있고 아들인 이구의 영결식에서 대한민국 정부 측 인사인 국무총리도 해당 호칭으로 '의민황태자'와 '영친왕'을 섞어서 언급한 사례가 있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영왕 전하'로, 이해찬 국무총리는 '의민황태자 영왕 전하'로 호칭했다. 해당 영결식에서는 전례에 맞추어 의민황태자는 '전하'로 이구는 '황세손 저하', 이구의 죽음을 '훙서'로 표현했다.[7]〈이구 영결식〉 〈대한제국 황세손 영결식 조사〉(국무총리) 〈故 황세손 이구 영결식 식사〉(문화재청장)[8] 물론 그렇다고 학계에서 사적인 시호를 공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9]

위키백과는 이 점을 신경썼는지 표제어를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사시인 '의민황태자'로 등재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친왕' 호칭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백과사전과 학계 등에선 일반적으로 '영친왕'으로 등재하고 부르며 이 문서에서도 통칭인 '영친왕'으로 표기하도록 한다.


3. 생애[편집]




3.1. 황태자 책봉과 결혼[편집]


늦둥이인 점도 있지만, 당시 친모 순헌황귀비가 궁궐에서의 영향력이 컸던 탓인지 태어나자마자 귀하게 자랐다고 한다. 이 덕분인지 1907년(융희 원년) 순종 즉위 후 다음 제위 계승 1순위였던 이복형 의친왕을 제치고 대한제국 황태자로 봉해졌다.[10]

사실 연령으로 보면 엄밀히 말해 영친왕보다 20년 연상인 의친왕이 다음으로 황태자가 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여러 가지 환경이 의친왕보다 영친왕에게 유리했다. 의친왕이 문제가 많아서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엄귀비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막후에서 힘을 써서 황태자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귀비는 당시 내명부에서 가장 직책이 높았지만, 의친왕의 생모인 후궁 귀인 장씨는 직첩도 보잘 것 없었는데다 오래 전에 별세한 상태였다.[11] 게다가 엄귀비는 고종이 사선을 넘나든 아관파천 당시 가까이서 고종을 보필한 공이 있는만큼 다른 후궁들보다 총애를 남다르게 받았고,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정1품 황귀비(皇貴妃)의 직책을 받아 영친왕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1902년(광무 6년)에 있었던 '일심회 사건( 一心會)' 또한 황태자 책봉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 사건은 일본에 국비로 유학한 재일 유학생 일부가 고종을 양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획책한 사건으로 이 당시 의친왕은 한창 미국 로어노크 대학교에 유학중이었기 때문에 의친왕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 일이었다. 이후 사건이 밝혀져서 가담자들 일부는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고[12] 주동자 3인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의친왕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5년 이후에 황태자를 책봉할 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 듯 하다.

순종황제의 동생이었으니 황태자(皇太子)가 아니라 황태제(皇太弟)가 되어야 더 정확했지만, 굳이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된 것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황제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13] 또한 제위에선 물러났어도 사실상의 황제는 고종 자신이라는 의지의 표시이기도 했다.[14]

사실 이 황태자 책봉은 고종 황제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1907년 일본군의 협박으로 강제로 퇴위당하고 함녕전으로 물러나면서 일본 뜻대로만은 되지 않겠다고 세운 수였다. 하지만 국력이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으니 무위에 그쳤다. 그 해 일본인들(대표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식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고[15] 일본 방계 황족 가문의 딸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와 강제로 정략결혼했다.[16] 영친왕에겐 민갑완(閔甲完)이라는 약혼녀가 이미 있었지만 강제로 파혼당하고 이 정략결혼을 했다. 정략결혼임에도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17]

일본에 인질로 붙들려 있었을 때, 의외로 메이지 덴노와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아들(미래의 다이쇼)이 여러 가지로 모자란 면이 많은 데 반해 꽤 총명한 아이였던 영친왕을 자기 친아들처럼 여기고 잘 대했다는 주장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종종 나올 정도.[18] 일단 왕공족, 그것도 조선 이왕가의 수장으로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기에 생활 자체는 유복했다고 한다. 다른 일본 황족들은 매월 궁내성에서 주는 일정한 생활비 외에는 돈줄이 없었지만 영친왕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족들의 관리 기관이던 이왕직(李王職)에서 돈을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었다. 이 덕분에 영친왕을 부러워하는 일본 황족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 광복 이후엔 신적강하로 이왕가든 다른 일본 황족이든 더 이상 아무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3.2. 고통 어린 망국의 황태자[편집]



파일:external/pds.exblog.jp/e0171614_1111167.jpg

[[이토 히로부미|{{{#gold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19]

그가 황태자로 책봉된 건 전혀 행운이 아니었다. 그저 이름(허울)뿐인 황태자이고 어린 나이에 일본에 인질격으로 끌려가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에야 겨우 고국에 돌아오는 고통뿐인 인생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친왕의 일본 생활은 앞서 말했듯이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이왕직을 승계한데다[20], 현역 일본제국 육군 중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어쨌거나 이용가치가 있었고, 공식적인 특권 계층인 왕공족이었기 때문에 전시에도 안전한 후방 보직에 있었다. 그가 실제로 가장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닌 고향에 대한 동경, 그리고 향수와 지독한 고독이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이방자 여사가 공기에나 쓸 새하얀 조약돌을 발견했다고 한다. 다 큰 어른 방에 있을 듯한 물건이 아니라서 물어보니 그가 머뭇거리다 답하길 "어릴 적 고향이 너무 그리워 한국으로 창덕궁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조약돌을 전해줬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조약돌을 계속 바라보고 만졌다고 했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 고종은 물론 어머니 순헌황귀비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며[21] 그나마 순종 사후에 이왕직을 승계하고 나서야 종묘에 들르는 것이 가능했다. 그나마도 짧은 기간 내에 다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제사는 지낼 수가 없었고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의 집에 위패를 세워 간이 종묘(개인 사당)를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제약이 심한 생활 속에서 몇십 년을 일본에서 살았으나 고국으로 돌아가겠단 희망과 의지는 놓지 않았는지 유창하게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억양, 문법 모두 틀리지 않고 말이다. 1950년에는 "A First Book of Korean"이라는 제목의 한국어 교본을 레지널드 호러스 블라이스(Reginald Horace Blyth)와 함께 영어로 직접 집필하기도 했다.[22]

이형근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조선인 동기생 생도들과 함께 영친왕을 찾아갔다고 한다. 앞선 주석에서 설명했듯 영친왕은 허울 뿐이긴 하지만 명목상으론 조선 총독보다 높은, 조선의 대표자격인 상징 그 자체였다. 식민지 출신으로서 심정적으로 기댈 만한 어르신(당시, 고종과 순종은 세상을 뜨고 없었기에 실질적으로나 명목상으로 '조선' 자체의 상징)이었던 셈. 영친왕은 조선인 생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실내에 조선인밖에 없는데도 일본어로 격려를 해주어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천황의 항복 선언 다음 날, 다시금 영친왕을 찾아갔을 때 굉장히 유창한 한국어를 쓰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한다. 주변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자가 없었단 걸 생각하면, 한국어를 전혀 잊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일본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인지,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는 일부 평도 있다. 물론 워낙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에서 성장한 탓에 아무리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손 치더라도 그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일 것이다.


3.3. 조선 이왕(李王)직 승계와 일제시대의 행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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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에게 경례하는 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gold 하세가와 요시미치}}}]]
[[1928년|{{{#gold 1928년}}}]] [[프랑스|{{{#gold 프랑스}}}]] 여행[23]에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 붕어(崩御) 후 하루 뒤, 순종이 일제강점기 때 가졌던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 지위를 계승한다. 이왕직 내부에서는 '사왕 전하(嗣王殿下/しおうでんか)'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1년 중에 종묘의 제사가 있던 며칠 간 뿐이었고 거의 대부분을 도쿄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동경(東京) 이왕'으로 부르기도 했다.

다이쇼 덴노와는 어린 시절에 만난 이후부터[24] 나름의 친분이 있었는지 그가 지방에서 요양하다 죽기 직전에 그를 찾아와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요시히토는 영친왕과 한국어로 대화하고 싶어서 황태자 시절부터 꾸준히 한국어를 배웠지만 당시 그는 뇌일혈로 말이 어눌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와 혼인시킬 당시 요시히토도 마사코 여왕의 아버지인 나시모토노미야 노리마사 왕을 불러서 명령하는 등 관여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지내던 이복 여동생인 덕혜옹주조현병으로 의사표현을 못하자 이복오빠로서 후견인이 되어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을 허락했지만 자신의 생계가 어렵던 시절에도 정신병원에 돈을 대주는 등 그래도 오빠로서 나름대로 동생을 열심히 보살폈다고 한다.

그는 일제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두루 친분을 맺었다. 관동 대학살 당시 영친왕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궁내성 제 2대기실 앞에 쳐진 텐트 속에서 1주일 동안 피신해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방자 여사의 말에 의하면 조선인 학살 소식을 들은 영친왕은 슬픔과 분노로 목소리를 떨고 있었으며 1주일 내내 눈물을 글썽이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왕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일본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은 사람이기도 하다. 1917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9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군생활을 시작, 1923년엔 일본 육군대학을 35기로 졸업하고[25] 일본군의 육군참모본부에 배속된다. 1935년에는 대좌로 무난히 진급했으며, 이후 1938년 육군 소장, 1940년에는 육군 중장에까지 올랐다.

1928년 근위보병 제2연대 휘하의 대대장, 1935년 우쓰노미야 보병 제59연대 연대장[26] 1941년 제 51사단 사단장을 역임한 뒤[27],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육군 중장으로서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일본 육군 제1항공군은 1942년 4월 13일 창설된 부대로서 주로 본토방공(미국의 일본 본토 폭격에 대응하기 위한 임무)을 책임지는 아주 중요한 부대였다. 사령관은 일본육군 중장, 사령관을 보좌하는 참모장은 일본육군 소장이 보임되었다. 부대 창설 이후 1945년 종전시까지 총 4명의 사령관이 있었는데, 다른 3명은 재임 기간이 길어봤자 1년도 안될 정도로 짧았지만 제3대 사령관인 영친왕은 거의 2년 가까이 사령관 자리에 있으면서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다.[28]


파일:attachment/Image-Crown_Prince_Euimin.jpg

일본군 예복을 입은 영친왕

3.4. 광복 이후[편집]


1945년에 일본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자 일본에서 살던 조선인은 공식적으로 국적이 없는 무국적의 재일 한국인이 되었다. 이후 1947년 GHQ(연합군사령부)의 조치로 이왕직이 사라지고 무일푼 평민으로 강제 격하당했다.

《한성일보》[29] - 1946년 8월 6일 자에 따르면, 그 무렵 영친왕은 《UP통신》 기자에게 당시 조선의 정세 및 장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꽤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조선의 외교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조선은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무력에 의한 독립 존속은 매우 어려우며, 아시아 대륙과 붙어있어 일본보다도 공산주의가 침투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공산당을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삼팔선은 독립에 장애가 되므로 빨리 제거해야 한다." 면서, 과도기에 대해서는 "일종의 국제관리기관을 설치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밖에도 "조선의 민주화를 위한 기본 조건은 학교에서 조선어를 쓰는 것이나 일본어, 영어, 중국어 교육도 인정해야 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되 유교국교로 존치시켜야 한다." 등 앞으로 들어설 국가의 비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또한 미군에게 배포된 한국에 대한 정보를 담은 팜플렛에 영어로 번역된 〈아리랑(Arirang)〉이 수록되었는데 추적 결과 이 〈아리랑〉 영어 번역자가 바로 영친왕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국을 계속 그리워했던 영친왕이었지만, 그 고국은 그를 철저히 냉대했다. 한국에서는 친일 황족이라며 증오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 중에서 의열단 출신으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을 역임한 박건웅은 "동경의 이왕은 민족 반역자인데 왜 광복 후 자살하지 않았느냐."는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이방자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 따르면, 영친왕도 이 발언을 들었으며 직후 큰 충격을 받고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영친왕은 1945년 광복 직후와 1948년에 두 차례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전자 땐 미군정이, 후자 땐 이승만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이나 순정효황후 윤씨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이우에 대해 조금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이승만은 강경한 공화주의자로서 기본적으로 이미 망한 왕조의 부활의 가능성을 차단할 의도가 있었고, 대한제국 고종이 전제왕정을 선포해 황제 독재를 지향하기도 한만큼 대한제국의 복귀는 민주공화정을 위협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므로 모든 공화주의자들이 영친왕의 복귀를 경계했다. 또 이승만 자신이 철저한 독립운동가였으니 독립을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1947년까지 일본의 최고위 왕족으로서 풍족히 살던 직계 황족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런 거라는 의견이 있다. 거기다 이승만은 1899년 고종의 퇴위를 꾀하고 공화정을 세우려고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받은 바 있어 구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 후 한일 양국에 미군정이 들어서고 이승만이 재일 미군정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가 영친왕을 우연히 만났는데 영친왕이 넌지시 자신의 영구 귀국을 논의해보려 했으나, 이승만은 영친왕을 외면하며 "오든 가든 마음대로 하시구려."라며 약간 무시하는 것처럼 홀대했다고 한다. 영친왕은 나중에 이 일화를 기록하며, "대단히 실망스러운 날이었다"고 표현했다.

이승만 정부에서 귀국을 거부한 표면적인 이유는, 영친왕이 일본 황족으로 살아간 것이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즉, '영친왕은 일본인이 되었다'고 법률을 해석하여 그의 귀국을 거부한 것. 물론 일본 정부에서는 호적을 기준으로 영친왕 부부를 재일 한국인으로 보았으므로 부부가 모두 무국적 신분이 되었다.

이 조치가 재밌는 것이, 1948년 5월 11일 제정된 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11호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에서 조선인을 부친으로 둔 사람에게 조선 국적을 부여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조선 국적이 대한민국 국적으로 일괄 변경되었다. 이 법에 의해 영친왕 또한 대한민국 국적을 얻을 수 있으나 이승만은 영친왕이 조선인의 호적인 조선적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30] 영친왕의 대한민국 국민 자격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 입장에서는 '외국인'인 영친왕을 쫓아낸 격이지만 실제로는 영구적인 국적 박탈이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왕가)의 재산 상당부분을 국고로 귀속시켰다. 그래서 6.25 전쟁 이후 구 황실의 사유 재산이라곤 사동궁, 창덕궁 낙선재 등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친왕은 "나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라며 아내 이방자에게 고통을 계속 호소했다고 한다.

또한 신적강하 이후 귀국도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면서 점점 고독해졌는데, 일제 때 사귄 이들도 진심으로 사귄 자들은 없었는지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오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그를 사기쳐서 뜯어먹으려던 목적을 가진 이들이었다. 결국 큰 사기를 당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도 잃고 물질적으로 궁핍해졌다.[31]

이 때 한 기록을 보면, 이방자 여사를 만나러 온 한 여인이 집에서 누군가가 뒤돌아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영친왕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친왕은 누가 왔는지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앉아 있었으며 그녀가 나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친왕에게서 지독한 쓸쓸함을 느꼈다고 한다.

6.25 전쟁 시기에 노획한 조선인민군 문서를 바탕으로 한 정병준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북에서는 일본 육군대학 출신의 영친왕이 남한으로 귀국하여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직접 대한민국 국군을 지휘할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고려를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대통령 이승만이 그를 적대했기 때문에 복귀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에서는 대개 어지간한 황족이면 모두 장성 계급에 있었으며, 이것은 실제 야전군 사령관이 된 두어 명을 제외하면 실제 지휘 능력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당시 '왕'이나 '공'이란 칭호를 받은 구 대한제국황족들은 일본의 황족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그가 만주군이건 일본군이건 실전 경험이 있는 다수의 한국군 장교들보다 나았을 거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3.4.1. 제정복고 시도 연루[편집]



파일:1952.07.16 왕정복고당 검거.jpg

1952년 7월 16일 자 《경향신문》 기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071600329202002&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07-16&officeId=00032&pageNo=2&printNo=1851&publishType=00020|{{{#gold 왕정복구를 몽상, 일당 8명을 검거 문초 중.}}}]]
그런데 6.25 전쟁실제로 제정복고를 꿈꾸며 그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이유립. 《환단고기》의 그 사람 맞다.(...) 1952년 7월 12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유립은 청주대학 상과 대학 학생 이용하와 함께 1951년 8월 경 조총련의 전신인 '재일조련선전부(在日朝聯宣傳部)'의 지령을 받아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음모를 꾸몄다. 그래서 같은 해 9월 초에 '정치혁명민족협의회(政治革命民族協議會)'라는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은밀하게 회원들을 모집했고, '불구레문화사'란 간판을 내걸어 위장한 다음, 일본에 있던 영친왕을 국가 수령(원수)으로 모시기로 했다.

국명은 대달(大達), 국가는 신가(神歌), 연호는 개벽(開闢), 국화(國花)는 진달래로 정했다. 그리고 국기태극기에서 사괘를 뺀 뒤 중앙에 연한 검은색 원을 둔 황색 바탕의 디자인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 다음에 영친왕에게 보낼 문서를 이용하를 시켜 당시 경상남도 부산시 구포(龜浦)에 피난와있던 순정효황후에게 전달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러다 부산중부경찰서 사찰계원(정보팀 형사)이 이를 적발하여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이유립, 이용하를 포함하여 노동당원 노봉우, 통관업자 홍성도, 사주업자인 이석영, 한국독립당 대전시책인 박헌철 등 일당 8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지방검찰청으로 넘겨져 수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5년 뒤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비록 영친왕이 직접 관련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런 사건까지 벌어지자 이승만 정부는 그 사건 이후 영친왕을 더욱 경계했다. 당시에는 대한제국을 경험한 중년 이상 노인층들이 많았기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도 있었다.


3.4.2. 환국과 사망[편집]



파일:의민태자, 이구, 이방자.png


파일:Yeongchin.png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 가족 사진.
가운데의 인물이 영친왕의 아들 이구. 앞 왼쪽부터 영친왕, 이방자 여사.[32]

옆 사진과 같은 시기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그러다 1957년, 유학 가 있는 아들 이구를 보러 미국으로 가려고 했을 때 발생한 여권 문제 때문에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국민들 사이에선 그에 대한 반감이 더 강해졌다. 영친왕은 나중에 김을한 기자를 통해 밝히기를, "국적 같은 것은 나중에 다시 쉽게 회복할 수 있을 줄로 알았다"고 술회하며 일본 국적 취득이 온전한 자신의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왕공족으로 있으면서 근대적인 법제 등에 대해 무지한 면이 약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55년에는 여동생인 덕혜옹주소 다케유키와 후견인 자격으로 이혼에 합의해주었다. 조현병 환자인 덕혜옹주의 의사 결정 능력이 전무했기에 자신과 아내 이방자가 후견인으로서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 합의를 대신 진행했다고 한다.

1947년 신적강하 이후 완전한 평민이 된 영친왕과 그의 큰조카 이건 모두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했다. 결국 경제적 이유로 이왕가저세이부 철도에 매각했다. 그 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주일 한국 영사관 부지로 이왕가저를 사려고 했기 때문에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자 그의 한국에서의 평판은 더 나빠졌다. 이 시기에 따로 직장을 구하지 못한 그는 이방자 여사의 친정 구 나시모토 가문과 몇몇 재일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간간히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였던 애신각라 부걸[33]사가 히로가 종전 이후 중국에서 각종 고생을 다 했던 것과 달리, 종전 당시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전범으로 취급받지 않고 일본에 머물 수 있었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만주국에서 실권은 없었지만 각종 일에 관여했던 부걸과 달리, 영친왕은 이미 문을 닫은 대한제국황족이라 아무것도 관여할 수 없었기에 일본 밖에 있었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1961년에 아들 내외 이구 부부가 있는 하와이를 들렀다가 일본으로 귀환하던 중 뇌일혈이 다시 재발, 이후 의사소통에 문제(실어증)가 생겼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으로 쓰러진 것은 1958년이라고 한다.

이승만 정부4.19혁명으로 하야해 물러나고 5.16 군사정변이 발발한 이후 영친왕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수장이 된 장도영에게 편지를 보내 5.16을 국가재건의 큰 대업으로 지지하기도 했고, 1961년 9월 5일에 앞서 왕정복고 논란을 일으킨 이유립 등 유생 14인 등은 영친왕의 환국을 바라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관련자료 이후 장도영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 박정희이승만과 달리 영친왕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 영친왕은 한국 국적을 다시 회복하고 1963년 11월 22일에 혼수 상태인 채로 일본에 유학이란 명분으로 인질로 끌려간지 언 56년만에 돌아왔다. 박정희는 하와이의 이승만의 귀국을 불허한 대신[34]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상당한 호의를 베풀었는데 덕혜옹주와 함께 그런 사례 중 하나다.


파일:영친왕 이방자 이구.jpg

귀국 후 명동성모병원에서 영친왕, 이방자 여사, 아들 이구
1년간 서울 명동성모병원 병상에서 생활한 끝에 퇴원한 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일반주택과 창덕궁 낙선재에서 국가에서 지급하는 국고 보조금을 받아 생활했다. 하지만 자신과 덕혜옹주의 병원비가 300만 원 가까이 밀리는 등 가난한 생활[35]을 하다가 7년 후인 1970년 5월 1일 사망했다.[36] 향년 72세. 만약 순종의 뒤를 이어 제위를 그대로 계승했다면 재위 44년이었을 것이다.[37]



[[대한뉴스|{{{#gold 〈대한뉴스〉}}}]] 제 776호에서 다룬 영친왕 장례식


3.4.3. 사후[편집]



파일:external/www.kocis.go.kr/king-150429-2.jpg

영친왕 부부의 합장묘 영원(英園)
장례는 9일장이었다. 5월 9일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영친왕의 시신을 모신 재궁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아버지이 안장된 홍유릉 능역으로 운구하여 '영원(英園)'이란 이름이 붙은 조선/대한제국 왕릉 최후의 능원에 안장했다. 신위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으로서 종묘에 모셨다.

그는 대한제국황태자로 있다가 나라가 망한 이후 이왕에 올랐다. 생전에 황제였던 적은 없으므로 그의 무덤을 홍유릉과 달리 황제릉으로 조성하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시대 황태자의 무덤을 만든 전례가 없었으므로 영친왕의 무덤을 조영(造營, 무덤의 양식을 구성하는 일)할 때 어떤 무덤을 전례로 따를 것인지 논의한 결과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문조수릉을 전거로 삼았다. 조선시대 왕세자의 원(園) 중 가장 나중에 조영되어 시기상 가장 가까웠으며, 뒷날 왕(익종)황제(문조)로 각각 추존받았기 때문이다.

황제릉과 왕릉은 석물의 배치방법, 참도(포장된 길) 배치, 정자각 건물의 양식 등이 서로 다르다. 실제로 홍유릉과 다른 조선왕릉을 비교해보면 고종과 순종의 능은 황제릉으로 조선왕릉 중에서도 따로 돋보이는 구조를 하고 있다. 반면 영친왕의 무덤은 시기적으로는 더 나중에 만든 곳임에도 고종 이전 다른 조선 왕릉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제후왕릉 양식임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그를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이라는 사시(私諡)로 추존했다.[38] 영친왕과 이후 사망한 이방자 여사의 신위를 마지막으로 종묘의 정전 및 영녕전의 제실(祭室)이 정확하게 채워져서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딱 맞았다.[39]

영친왕의 장례식 때 일본 황족들이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조문을 왔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부인이자 이방자 여사의 이종 사촌 여동생인 세쓰코(勢津子) 비,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부부 등이 빈소에 왔다.


4. 가족[편집]



파일:external/cfs6.blog.daum.net/47326063c5c4e&filename=NISI20070222_0003883153_web.jpg

사진은 영친왕과 가족들.
왼쪽부터 [[순종(대한제국)|{{{#gold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gold 순정효황후 윤씨}}}]]. 중앙에는 영친왕과 [[이방자|{{{#gold 이방자}}}]] 여사, 아들 [[이구(1931)|{{{#gold 이구}}}]].
오른쪽은 [[고종(대한제국)|{{{#gold
고종황제}}}]]와 [[순헌황귀비|{{{#gold 순헌황귀비}}}]] 순이다.

이방자 여사와의 사이에서 아들 2명을 두었지만, 장남[40]은 일찍 죽었다. 차남인 이구는 결혼은 했지만 슬하에 자식은 두지 못했다. 그 때문에 실제로는 대가 끊겼으나,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 의해 이구의 양자로 지명된 의친왕의 손자 이원[41]이 명목상으로나마 대한제국의 황실수장으로서 대를 이었다. 다만, 1990년 민법 개정으로 사후 양자 입적은 인정되지 않고 있으므로 명목상 대통을 이었으되, 호적상 실제 양자 입적이 행해진 것은 아니다.



4.1. 처가[편집]


쇼와 22년(1947년) 직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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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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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하라다 미츠코




모리마사 왕비 이츠코


히로하시 노리코

































오다 아츠코




히로하시 다다미츠































데라오 우타코



오다 히데자네


모리히로 왕


노부히코 왕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모리히로 왕비 시게코 내친왕 (상단)


후미코 여왕































나루히코 왕비 도시코 내친왕


모로마사 왕






































아와타 아키츠네






































도시히코 왕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나베시마 기쿠코




























츠노다 스가코




야스히코 왕비 노부코 내친왕



나베시마 나오야스





























이치조 준코





다카히코 왕


후쿠코 여왕




















나카무라 소마



이치조 다다카






다카히코 왕비 지카코


도모히코 왕


























고가 세이엔





오토와 다다히코


미노코 여왕


























오타니 도모코





오규 기요코




























후루야마 지에




오타니 고쇼







오규 요시타츠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 왕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미치히사 왕






















곤도 가즈오







나가히사 왕비 사치코


하츠코 여왕























호리우치 노부코


고마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다치바나 미네코





























아키히토 친왕비 요리코






다치바나 다네카츠































요시히사 친왕비 도미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


히가시조노 사와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나루히사 왕비 후사코 내친왕



히가시조노 모토후미






























야마우치 미츠코 (이혼)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 왕


도쿠가와 다에코























사루바시 사치코



츠네히사 왕비 마사코 내친왕



도쿠가와 구니사다
































간로지 미츠코


다케다노미야 츠네요시 왕


츠네타다 왕

























간로지 오사나가



츠네요시 왕비 미츠코


모토코 여왕




























호시나 다케코


사노 아야코


노리코 여왕




























호시나 마사아키




사노 츠네미츠


츠네하루 왕






























고토코 여왕



































노부히사 왕

































이와나미 이나코


아리마 사다코




































아리마 요리야스




































고마츠 데루히사



































후타라 히로코

































우키야마 이쿠무




후타라 요시노리































사루바시 가네


후타라 요시유키































마에나미 사카에


우에노 마사오


































아키노미야





































나루노미야





































가초노미야 히로츠네 친왕


가초노미야 히로아츠 친왕

































히로츠네 친왕비 이쿠코




































분슈 여왕




































기무라 시무코


무라쿠모 니치에이

































이타미 요시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토나리 친왕






















마츠다이라 다카코


아츠히토 왕

































마츠다이라 다다노리


안도 유키코


































안도 노부아키

































다메노미야


구로다 시게코
































기요스 이에노리



구로다 나가미치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스에코 여왕































고토히토 친왕비 지에코


간인노미야 하루히토 왕

































요리히토 친왕비 가네코



하루히토 왕비 나오코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


히로코 여왕

































야마우치 야에코 (이혼)


가초 하나코

































마치노미야




가초 히로노부











5. 여담[편집]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친왕.jpg}}} ||
권오창 화백이 그린 영친왕 초상화
동강 권오창 화백이 그의 영정을 그렸다.# 권오창 화백은 이외에도 고종, 명성황후, 순종의 초상화도 직접 그린 바 있다.

  • 생전에는 구 황실에 대한 일말의 예우심과 맞물려 동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국 왕공족과 일본 황족을 상징적으로 묶어놓은 이방자 여사와의 결혼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운동가들은 영친왕을 매국노로 여겼으며 이는 공화정에 반대하던 복벽파의 몰락을 야기한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독립신문국권을 빼앗고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의 나라에 장가를 들었다고 하여 정면으로 '금수(禽獸)'라는 멸칭을 붙였으며 독립운동가 서상한은 영친왕 부부를 폭사시키고자 사제 폭탄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미수로 그쳤다. 이들 부부의 큰아들 이진의 독살설을 뜬소문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 8.15 광복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일본군 중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일본 정부로부터 매달 돈을 받고 지냈다는 점, 나아가서 중일전쟁 시기에는 중국의 화북지역 등 주요 전선에서 선전 활동을 주 임무로 복무한 것이나 일본 본토 후방 방위를 담당하던 제1 육군 항공군 사령관 등의 지휘를 맡았다는 점,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제의 선전 활동에 이용되었다는 점을 들어 친일파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영친왕만이 아니라 여러 왕공족이 비슷한 활동을 했고 군인으로서의 계급도 높았기 때문에[42] 왕공족을 친일파로 분류해야 할지 논의가 있었는데 왕공족에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왕공족은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는지 유무로 친일파인지를 판단했는데 영친왕과 이우는 어린 나이에 사실상 일본의 인질로 끌려간 처지를 감안해 제외되었다. 왕공족들 대부분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고 그도 역시 일본에 온 뒤 일본 황족급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황족 남성이라면 누구나 군사교육을 받았다.[43] 이에 따라 육군유년학교 예과에 진학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으니 사실상 다른 학교로 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며 일본군으로서 한반도에서 조선인을 탄압하거나 중국에서 중국인들을 학살한 일선 지휘관도 아닌 후방 부대의 얼굴마담에 불과했다는 이유를 들어 일제에 적극 가담한 역적 타이틀을 씌우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 유럽 순방을 했을 때 여러 인물을 만났는데,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유럽 정세와 인물관, 유럽 왕족들의 독특한 면모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보불전쟁 전공이던 영친왕은 매우 억센 인상을 주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1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략전술에 대해 논한 후 연합군이 배상금으로 독일의 혼을 꺾으려고 하는 데 독일 국민이 절대 굴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자 감동해 "그분은 독일의 혼과 힘이 들어 있는 분"이라고 누차 강조했으며 역사와 문화를 매우 좋아해 조선에 직접 방문했고 조선의 문화에 조예가 깊기도 했던[44]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자신의 콜렉션인 고려자기를 보여주며 특히 신라 문화가 조선에서는 제일이라고 칭찬한 뒤 "동양 하면 사람들은 인도와 중국만을 떠올리지만 코리아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이런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은 무엇으로도 멸망시킬 수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자 깊이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 생전에 영친왕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당대 일본 최고의 화가로 유명한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에게 사사(賜寫, 그림을 베껴서 주다)하기도 했다.

  • 패전 후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였다. 일본 진입을 위해 사회 저명인사와 귀족계급을 우대하던 당시 일본 프리메이슨의 정책에 따라 전전일본의 지배층 다수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영친왕은 관동로지의 초대 워십풀마스터를 역임하는 등 뚜렷한 활동을 보였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 1970년 개봉한 영화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45]에서는 영친왕의 어린 시절 역할은 아역배우 김정훈, 성인 이후는 배우 김희라가 각각 연기했다. 1989년에 세경문화영상에서 VHS 비디오테이프로 낸 바 있다.

  • 1970년 TBC 드라마 〈영친왕 전하〉[46]에서는 배우 이낙훈, 엄유신 등이 출연했다고 나오나, 자료가 부족해 상세한 배역은 불명이다. 또한 고종의 손자 이석이 영친왕의 외사촌 엄주명 역을 맡아 잠깐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1970년 동아방송에서도 같은 제목의 라디오 연속극을 방영한 바 있으며 작가도 동일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파일:서인석 영친왕.png}}} ||
    〈왕조의 세월〉의 영친왕
1990년 KBS 8.15 광복절 45주년 특집극 〈왕조의 세월〉[47]에서는 배우 서인석(아역: 변성현)이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 이방자 역은 배우 이휘향이 맡았다.[48]

1996년 MBC 8.15 광복절 51주년 특집극 〈덕혜: 조선의 마지막 황녀〉에서는 배우 김홍석이 연기했다.[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