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함화당 · 집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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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경복궁 함화당 · 집경당
景福宮 咸和堂 · 緝敬堂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건축시기
1890년 (창건)

파일:경복궁_함화당.jpg
함화당[1]
파일:경복궁_집경당.jpg
집경당[2]
1. 개요
2. 역사
3. 용도
3.1. 함화당
3.2. 집경당
3.2.1. 외국 공사를 접견한 집경당?
4. 구조
5. 여담
6. 매체에서



1. 개요[편집]


경복궁의 건물이다. 흥복전의 북쪽, 향원정의 남쪽에 있다.

서로 별개 건물이나 복도로 이어져있다. 한 권역으로 묶여있기에 이 문서에서도 두 건물을 함께 다룬다.


2. 역사[편집]


1860년대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다. 그러다 1890년(고종 27년)에 옛 춘희당과 보광당 자리에 새로 지은 것이 함화당과 집경당이다.[3]

일제강점기경복궁전각이 대부분 헐렸을 때도 함화당과 집경당은 살아남았다. 일제는 전각 주변의 행각과 문을 헐었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사무실로 사용했다. 1924년에는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이곳에 조선민족박물관을 개설하여 유물들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광복 이후 2000년대 후반에 건물 수리 및 행각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3. 용도[편집]



3.1. 함화당[편집]


파일:경복궁 함화당.png
함화당 외경[4]
후궁 권역에 있어 후궁들의 처소였다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2007년 함화당 수리 도중 상량문을 발견하여# 정확한 용도를 확인했다. 고종의 침전으로 지은 것이다.#

함화당 · 집경당 일대는 당시 고종이 머물던 건청궁과 가까웠다. 왕의 침전을 후궁 영역에 굳이 지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함화당과 집경당을 후궁 권역보다는 건청궁과 하나로 묶이는 공간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고종은 함화당을 신하들을 만나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1892년(고종 29년)부터는 외국 공사 접견소로도 활용했다.##

3.2. 집경당[편집]


파일:경복궁 집경당.png
집경당 외경[5]
집경당은 주로 신하들과 경서를 읽는 곳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건청궁 관문각을 서양식으로 다시 지을 때 그곳에 있던 , 그림을 잠시 이곳에 보관하기도 했다. 이 물품들은 1891년(고종 28년)에 왕실도서관 집옥재를 건립한 뒤 그곳으로 옮겼다.

3.2.1. 외국 공사를 접견한 집경당?[편집]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외국 공사들을 접견한 곳으로 집경당이 나온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집경당의 한자는 ‘緝敬堂’인데 외교관들을 만났다는 기사에는 표기가 ‘集慶堂’인 것이다.

‘集慶堂’ 한자를 쓰는 건물경희궁에 있었다. 침전 회상전의 부속건물인데, 정황 상 고종이 그곳에서 외국 공사들을 만났을 리 없다.

1860년대에 지은, 경복궁 중건과정을 다룬 책인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경희궁에서 건물 5채를 제외하고 전부 헐어와 자재로 썼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남은 건물들 중 집경당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를 보아 1890년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설령 남아있었다 해도 허허벌판이 되어 이미 다른 용도로 쓰고 있던[6]에 굳이 가서 외국 공사를 접견할 일이 없다.

그리고 고종이 외교관들을 만난 날의 《승정원일기》 기록은, 항상 '상(임금)이 경복궁에 있었다.'로 시작한다.### 그래서 저기서 말하는 집경당은 경희궁 집경당이 아닌, 경복궁의 집경당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集慶堂’이 오기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공사를 만난 기록들마다 표기가 일관되게 ‘集慶堂’인 점이 걸린다. 그렇다면 외교관들을 접견하기 위한 ‘集慶堂’이 따로 있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용도에 따라 같은 건물의 한자 표기를 다르게 했던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4. 구조[편집]


  • 두 건물 및 행각과 문, 담의 자세한 구조는 이 포스팅을 참조.


5. 여담[편집]


  • 1897년(광무 원년)에 고종이 지은 명성황후 지문(誌文)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4년(고종 30년) 6월에 일본군경복궁을 점령할 때 함화당에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물고 있었다. 고종이 명성황후와 왕세자에게 잠시 건청궁으로 피하라고 권유해서 명성황후는 잠시 피신했지만 곧 되돌아와 함화당에 머물며 사람들을 안심시키겠다고 했다한다.#

  • 2000년대 후반에 주변 행각과 담, 문을 복원하기 전에는 건물 뒷편과 향원지 사이에 매점이 있어 관람객들이 쉬어가는 공간으로 기능했었다.

  • 경복궁 별빛야행의 코스 중 하나이다. 이 때 두 건물에 들어가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 2010년부터 매년 설 연휴에 함화당과 집경당에서 ‘온돌방 체험 및 세배 드리기 행사’가 열린다. 이 때 실제로 아궁이에 불을 피우기 때문에 말그대로 전통 온돌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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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문화체험' 관련 YTN 뉴스 영상
2016년 4월 ~ 5월에 열린 궁중문화축전의 프로그램 중 궁중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고궁문화체험’의 공간으로 쓰였다.#

  • 2011년부터 문화재청은 함화당과 집경당을 창덕궁 가정당과 함께 소규모 회의장이나 교육장으로 쓸 수 있도록 기업이나 단체 등에 개방하기로 했다. 단, 문화재 보존 및 관리에 영향이 없고 궁궐의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 한해서이다. 2011년에는 9월 ~ 10월, 2012년에는 5월 ~ 10월에 개방했으며 2013년부터 현재까지 4월 ~ 10월에 개방한다. 사용료는 첫 1시간은 50만 원, 추가 1시간 당 25만 원이다. 경복궁 입장료는 별개로 내야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 곳을 참조. 2019년부터는 다자녀 부모[7]의 경우 사용료가 50% 감면된다.#


6. 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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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이때 창덕궁 중희당을 헐어 경복궁으로 옮기라는 고종의 지시가 있었는데 정황을 추측해보자면 경복궁 함화당 · 집경당의 기록이 실록상으로는 1892년(고종 29년)부터 나타나는 점, 그리고 고종이 중희당에서와 유사하게 함화당과 집경당에서 외국 공사를 접견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상 많이 나타나는 점을 감안하면 함화당과 집경당 둘 중 하나가 중희당으로부터 이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집경당은 정면 9칸으로 동궐도상의 중희당의 정면 칸 수와 동일하다. 함화당과 집경당을 건립하기 전까지는 경복궁의 흥복전이나 만경전에서 접견이 이루어졌는데, 신정왕후가 1890년 흥복전에서 승하한 이후 흥복전과 만경전에서 접견이 이루어진 기록은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양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정사를 보았던 중희당을 아무 이유 없이 내지는 중요한 목적 없이 철거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신정왕후 사망 이후 자신의 정통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의미에서 중희당을 옮겨와서 자신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함화당과 집경당의 기록이 승정원일기상으로는 1890년에 적게나마 등장하긴 하나 1890년 12월을 마지막으로 1892년 7월 이전까지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그것이 중희당의 이건에 따른 개축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4]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5]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6] 경희궁 터에 경작지를 만들고, 뽕나무 을 일군 뒤, 창고와 양잠소까지 세웠다.[7] 만 13세 이하 막내 포함, 자녀가 2인 이상인 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