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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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14대 국왕
봉상왕 | 烽上王
파일:마선구 2100호 전경.jpg
봉상왕릉으로 추정되는 마선구 2100호 전경.
출생
(음력)
271년 이후 추정[1]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300년 9월 (향년 20대 추정)
고구려 국내성 별실
능묘봉산원(烽山原)[2]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의 태자
연대 미상 ~ 292년
제14대 국왕
292년 ~ 300년 9월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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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횡성 고씨
상부(相夫) / 삽시루(歃矢婁)
부모부왕 서천왕
모후 왕후 우씨
형제자매동생 고돌고
왕후2남 왕자의 모후
자녀2남
시호봉상왕(烽上王)
치갈왕(雉葛王)
치창왕(雉菖王)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가? 바라노니 다시 말하지 말라.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復言."

- 폭정을 그만두라는 창조리의 간언에 웃으며 답한 말.

《삼국사기》 中


1. 개요
2. 생애
3. 《삼국사기》 기록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고구려의 제14대 군주. 고구려판 연산군.삼국사기》에서는 봉상왕의 유년 시절에 대해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했으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고 기록해서 어린 시절부터 폭군의 기질이 보였다고 평[3]하고 있기는 한데, 《삼국사기》의 기록 자체가 매우 적어서 재위 7년 이전으로는 봉상왕이 확실한 폭군이었다고 하기가 애매하다. 자기 숙부나 동생을 처형한 기록이 있기는 한데, 이건 권력자들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이 있으면 하는 공통적인 행동이고, 창조리고노자를 등용한 것을 보면 마냥 능력없고 잔인하기만 한 군주라 보기 힘들다. 그보다 애초에 봉상왕 7년 이전에는 내정에 관한 기록이 창조리를 등용한 일 빼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치세 초기부터 막장이었다는 증거를 타당하게 판단할 근거 자체가 딱히 없다. 다만, 창조리 등의 신하들이 간언한 부분들을 보면 재위 7년 이후로 폭군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팩트이다.[4]


2. 생애[편집]


봉상왕 초기 국상 상루가 사망하자 창조리를 국상으로 삼았다. 명장 고노자도 등용하면서 국상 창조리의 건의를 수용하여 그를 신성 태수로 삼았고, 연(燕)나라(모용선비) 모용외의 침략을 격퇴하기도 했다. 이 때 서진은 291년 팔왕의 난으로 본격적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다.

293년 모용선비의 1차 침공에서 모용외는 수도로 바로 진격하는 작전을 감행했고, 이에 당황하여 신성(新城)으로 몽진을 떠난 봉상왕을 곡림에서 따라잡았으나 마침 신성 태수로 부임해있던 고노자의 500명으로 이루어진 기병에 반격당하며 패퇴하고 말았다.

296년 모용선비의 2차 침공에서는 서천왕의 능이 위치한 고국원까지 적군이 도달하여 서천왕의 시신 및 부장품을 도굴하려고 했으나 작업에 투입된 인부가 끊임없이 병사하고, 능에서 풍악이 울려 도주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이 고구려군의 반격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애초에 모용선비는 고구려의 주요 방어선을 뚫지 않고, 평양이나 고국원으로 달려가는 그야말로 어택땅 전략을 사용했기에 수도 근교까지 적이 밀고 들어왔음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전의 동천왕이나 뒷날의 고국원왕의 경우를 생각하면 분명 선방했다는 것이 뚜렷해지는 부분이다.

내부적으로는 반역 음모를 경계해서 왕족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형제 상속제에서 부자 상속제로 전환되던 시기인지라 할아버지인 중천왕, 아버지인 서천왕이 모두 왕위를 노린 동생들의 반란을 겪어야 했다. 그 선대에는 신대왕의 아들인 고발기가 자신의 동생인 산상왕의 즉위에 반발한 사례도 있었다.[5] 292년에는 숙신을 무찌르고 국민적 영웅이 된 숙부 고달가와 동생 고돌고를 주살하였다. 특히 삼촌 고달가는 292년 3월에 재위하자마자 바로 숙청했으며, 1년 뒤 동생 고돌고의 목숨마저 빼앗아 버렸다. 그래도 고돌고는 훗날 아들인 미천왕이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해주기는 했다.

이러한 고구려 왕실 내부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나라의 침공을 불러왔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그런가 하면 나라가 흉년을 겪고 있음에도 궁실을 대규모로 증축하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창조리가 간언했지만 오히려 욕만 실컷 얻어먹었고, 결국 봉상왕이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6] 그리하여 창조리가 일으킨 정변으로 폐위당하는데 그 후 후환이 두려웠는지 아들 둘과 함께 자살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다만 클레오파트라 등 다른 여러 경우처럼 자살의 증거가 명확하지 않기에 일각에서는 창조리 일파가 그들을 시해한 후 자살로 위장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물증에 해당할 사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3.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三國史紀)
[ 본기(本紀) ]
1권 「신라 1권 (新羅 一)」2권 「신라 2권 (新羅 二)」
박혁거세 · 박남해 · 박유리 · 석탈해 · 박파사 · 박지마 · 박일성박아달라 · 석벌휴 · 석내해 · 석조분 · 석첨해 · 김미추 · 석유례 · 석기림 · 석흘해
3권 「신라 3권 (新羅 三)」4권 「신라 4권 (新羅 四)」5권 「신라 5권 (新羅 五)」
김내물 · 김실성 · 김눌지 · 김자비 · 김소지김지대로 · 김원종 · 김삼맥종 · 김사륜 · 김백정김덕만 · 김승만 · 김춘추
6-7권 「신라 6-7권 (新羅 六-七)」8권 「신라 8권 (新羅 八)」9권 「신라 9권 (新羅 九)」
김법민김정명 · 김이홍 · 김융기김승경 · 김헌영 · 김건영 · 김양상
10권 「신라 10권 (新羅 十)」11권 「신라 11권 (新羅 十一)」
김경신 · 김준옹 · 김청명 · 김언승 · 김수종 · 김제융 · 김명 · 김우징김경응 · 김의정 · 김응렴 · 김정 · 김황 · 김만
12권 「신라 12권 (新羅 十二)」13권 「고구려 1권 (高句麗 一)」14권 「고구려 2권 (高句麗 二)」
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고주몽 · 고유리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고궁 · 고수성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고우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고원 · 고건무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27권 「백제 5권 (百濟 五)」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부여의자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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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41-43권 「열전 1-3권」44권 「열전 4권」
김유신 ,김원술 · 김윤중 · 김윤문 · 김암,을지문덕 · 거칠부 · 거도 · 이사부 · 김인문 ,김양도, · 김양 ,김흔, · 흑치상지 · 장보고 · 정년 · 사다함
45권 「열전 5권」46권 「열전 6권」
을파소 · 김후직 · 녹진 · 밀우 · 유유 · 명림답부 · 석우로 · 박제상 · 귀산 · 온달강수 · 최치원 · 설총 · 최승우 · 최원위 · 김대문
47권 「열전 7권」
해론 · 소나 · 취도 · 눌최 · 설계두 · 김영윤 · 관창 · 김흠운 · 열기 · 비녕자 · 죽죽 · 필부 · 계백
48권 「열전 8권」
향덕 · 성각 · 실혜 · 물계자 · 백결선생 · 검군 · 김생 · 솔거 · 지은 · 설씨 · 도미 · 필부
49권 「열전 9권」50권 「열전 10권」
창조리 · 연개소문궁예 · 견훤



《삼국사기》 〈봉상왕 본기〉
一年 봉상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안국군 달가를 죽이다
一年秋九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八月 모용외의 침략을 신성재 고노자가 물리치다
二年秋九月 아우 돌고를 자결하게 하다
三年秋九月 창조리를 국상으로 삼다
五年秋八月 모용외가 침략해오다
七年秋九月 서리와 우박이 내려 농작물이 피해를 입다
七年冬十月 궁실을 증축하다
七年冬十一月 을불을 찾아서 죽이려 하다
八年秋九月 귀신이 봉산에서 울다
八年冬十二月 겨울에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다
九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고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다
九年秋八月 봉상왕이 죽다
九年秋八月 국상 창조리가 을불을 찾아오게 하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곽재식의 소설인 《모살기》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며 여기에서는 아버지 서천왕의 후궁인 소 태후가 봉상왕을 공격하고자 옛날 애인이자 봉상왕의 숙부인 달가를 찾아가 봉상왕이 자신을 고문하며 괴롭히고 있다고 사기를 치며 봉상왕을 공격하자고 충동질한다. 봉상왕 또한 달가의 명성을 질투하고 있어서 달가를 제거하기 위해 달가가 소 태후와 놀아나거나 소 태후를 괴롭혔다는 식으로 음모를 꾸며서 달가를 사형시키고 소 태후는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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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천왕이 왕후 우씨와 혼인한 해가 271년이라 그 이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2] 마선구 2100호 추정.[3] 일반적으로 왕의 기록에 대해서는 미화하기 마련인데도 대놓고 이렇게 적힌 것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싹수가 노랬다고 보는 시각과 미천왕의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폭군의 프레임을 씌우는 과정에서 조작된 기록이라는 시각이 있다.[4] 그걸 보여주는 게 삼국사기의 자연재해 부분인데 재위 7~8년 시기에 자연재해가 집중되어 기재되어 있다.(재위 1년차에 지진이 잡혀있는 걸 빼면 1~6년차에는 자연재해 기록이 없다.) 자연재해를 왕의 부덕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라 간주하던 고대 사회에서 저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나도 분명하다.[5] 고국천왕과 왕위계승분쟁을 벌였다는 첫째 발기는 기록상 모순 때문에 셋째 발기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정설이다.[6] 즉위 7년차까지는 그런데로 나라를 별탈없이 잘 다스렸던 걸 보면 자리를 위협하는 왕족들이 다 사라지고 모용선비의 침공도 성공리에 막아내면서 긴장이 풀려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궁궐 증축은 왕권 과시의 수단 중 하나이기에 왕권 강화를 위해 국상인 창조리와 충돌했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왕권강화하려다 밀려난것처럼 보이지만 그와 완벽히 일치하는 군주가 바로 연산군이다. 즉, 왕권 강화시도가 선을 넘어 백성까지 힘들게 하니 폐위당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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