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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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초한쟁패기, 전한(前漢) 한고조(漢高祖)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 진(秦) 시대에도 관직에 있었으며, 이후 유방(劉邦)의 막료(幕僚)로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전한의 개국공신. 한자 때문에 간혹 '조삼'이라고 읽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참이 맞다.[1] 자는 경백(敬伯). 다만 사기나 한서에는 조참의 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박물지에 '조참의 자는 경백이다.'라고 적혀 있는데, 박물지라는 책의 연대가 조참이 살아있던 시기와 몇백 년 이후에나 나온 책인지라 얼마만큼 신빙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2. 진나라의 관리[편집]
아직 진나라의 힘이 천하에 건재할 당시, 조참은 패현에서 죄수들을 관리하는 옥리(獄吏)였다. 일단 사기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에서는 '소하(蕭何)와 조참은 아전들 중 호걸이었다.'라고 말하고 있긴 한데, <번역등관열전(樊酈縢灌列傳)>에서 사마천(司馬遷)은 "내가 소하, 조참, 번쾌 등이 살던 곳을 가 봤는데, 그들이 여기에 살 때 누가 훗날 그렇게 귀해질지 상상이나 했겠는가?"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여하간 그 당시엔 별 달리 특색은 없었던 모양.
그러나 시대가 그들을 본의 아니게 영웅호걸의 길로 들이밀었다.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켰고, 이윽고 장초(張楚)를 건국하는 데 이르렀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조참이 있던 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겨, 마침 함양으로의 노역 이동을 때려 치우고 망탕산(茫荡山)에서 숨어 지내던 유방을 번쾌(樊噲)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유방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을 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반응이 일어나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지만, 유방은 짐짓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소하나 조참은 무슨 숭고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만약 일이 실패하면 친척들이 모조리 도륙당할까봐 두려워서 유방에게 모든 일을 양보했다. 반란의 우두머리가 되면 가족은 물론이고 다른 친척들까지 모조리 엮어들어가는 건 피할 수 없지만, 유방이 얼굴마담으로 나서 준다면 설사 일이 실패해서 자기들이 죽더라도 연좌제는 최소한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내린 판단.[2] 유방이 이에 시원스레 응하면서 소하와 조참은 유방을 추대하게 되었다.
3. 반(反) 진 전쟁[편집]
그리하여 유방이 처음 거병 할 때, 조참은 중연(中涓)[3] 으로 종군을 시작했다. 그 후 전투에도 나서 유방이 호릉(胡陵)[4] 과 방여(方輿)[5] 를 공격할 때 진나라 감공(監公)의 부대를 물리치는 공을 세우고, 유방이 설(薛)을 함락시키고 사수군(泗水郡)의 태수 장(壯)을 물리칠 때도 활약 했다.
위(魏)나라에 항복한 풍(豊)을 공격하여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그 후로도 계속 유방과 보조를 같이 하며 움직이면서 싸웠는데, 원척(爰戚)과 항보(亢父)를 점령할 때는 병사들보다 먼저 성벽에 오르는 화끈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6] 항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조참은 유방과 함께 북상하여 항량과 합류해 동아에서 장한의 군대를 격파한 뒤 복양까지 추격하였다.
이후에 초회왕(楚懷王)이 유방을 탕군(碭郡)의 수장에 임명하자 건성군(建成君)이라는 봉호를 받았으며 집백(執帛)[7] 이 되었다.
이후 유방이 함양에 입성할 때까지 계속 함께 움직이며 전투에 참여했다.
4. 초한전쟁[편집]
홍문연의 일이 있은 후 유방이 한왕에 봉해지자 조참은 건성후(建成侯)가 되었다. 그 후 유방이 삼진을 평정할 때 계속 종군하다가, 경릉(景陵)이라는 곳을 20일 정도 지키고 있을 때 장평(章平)[8] 등이 공격해 왔지만 대패를 안겨주었다.
유방이 동쪽으로 진군할 때도 마찬가지로 따라가면서 용저(龍且)와 항타(項他)를 물리치면서 순조롭게 팽성까지 장악했지만, 아주 가루가 되도록 박살이 나고는, 서쪽으로 물러나면서 한군이 박살난 틈에 배반을 하거나 분탕질 하는 왕무(王武), 정처(程處), 주천후(柱天侯) 등을 모두 물리쳐서 대패 이후에 있을 동요를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BC 205년에는 잠시 좌승상 대리로 후방인 관중(關中) 지역에 머물다가, 위표(魏豹)가 배반하자 한신(韓信)의 군대에 속해 보조를 함께 했다. 이후 한신과 조참은 눈부신 공을 세우게 된다.
위나라와의 안읍 전투에서는 별도의 부대를 이끌고 위나라 장수 손속(孫遫)을 동장(東張)[9] 에서 격파하고 내친 김에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까지 공격해서 위나라 장수 왕양(王襄)을 사로잡았다. 당시 위표는 임진(臨晉) 쪽으로 오는 한신의 부대를 경계하고 있던 참이라, 이에 크게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하열(夏說)을 물리친 후에 한신, 장이(張耳)와 함께 조(趙)나라 공략에 나섰고, 정형 전투 이전 한신의 명령으로 따로 군대를 이끌고 오성(鄔城)에 주둔하던 조나라의 별장 척(戚)을 참살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엔 잠시 유방의 본대에 합류해 있다가, 한신이 제(齊)나라를 공략할 때 한몫을 거들었다. 해하 전투 때는 한신이 유방의 요청으로 항우를 물리치기 위해 이동했지만, 조참은 제나라 지역에 머물며 항복하지 않은 지역을 평정하느라 참전하진 못했다. 통일 직후, 직속 상관인 제왕 한신이 유방에게 걸려 제나라가 소멸하는 바람에 상국에서 해임되고 잠깐 무직(...)이 되기도 했으나, 1년 후 유방의 서장자 도혜왕이 제나라 왕이 되면서 다시 제나라 상국에 복직했다.
5. 평가[편집]
5.1. 소하에 밀린 콩라인[편집]
그야말로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싸우면서 막대한 공적을 세웠던지라, 전쟁이 끝난 후 조참은 온 몸에 상처가 70여 개가 있었다고 하며 논공행상에서 10630호라는 어마어마한 식읍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탓에 전쟁이 끝난 후 유방이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삼으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반발하기까지 했다. 소하는 그냥 후방에서 숫자 셈이나 했고, 조참은 직접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엄청난 공훈을 세웠으니 당연히 조참이 최고 공신이어야 한다는 것. 일단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하려는 마당에, 장수들의 반발 때문에 이를 물린다면 자신의 권위에도 문제가 생길 유방은 영 기분이 나쁜 상황이었다.
이때, 유방의 심기를 알아차린 관내후(關內侯) 악천추(鄂千秋)가 발언하였다.
“여러 대신들의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조참이 비록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적군의 성과 땅을 점령한 공이 크다고 하나, 그것은 일시적인 공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항왕(項王)과 5년 동안 서로 대치하고 전투를 벌인 폐하께서는 여러 번 싸움에 지고 그때마다 그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 뿔뿔이 흩어져 버려 홀홀 단신으로 도망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하는 그럴 때마다 관중의 자제들을 모아 폐하가 계시는 전선으로 보내 그 잃어버린 병력을 보충시켰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폐하의 지시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한 일입니다."
"또한 관중에서 수만의 군사들을 전선으로 보낼 때는 언제나 폐하께서 싸움에서 패한 직후의 가장 위급한 때였습니다. 한군과 초군이 형양에서 몇 년에 걸쳐 대치할 때, 군중에는 양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하가 관중에서 수레나 선박을 이용하여 양식을 보내주어 한군은 굶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여러 번 효산(崤山) 이동 지역의 싸움에서 패하는 동안 소하는 오로지 관중 지방을 굳건히 보전하여 만세에 길이 빛날 공훈을 세웠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비록 조참과 같은 사람 100명이 없다 한들 한 왕실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한 왕실은 조참과 같은 사람들을 얻음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일시적인 공로를 세운 사람을 만세에 길이 빛날 공적을 세운 사람 위에 놓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마땅히 소하의 공을 맨 위에 올리고 조참을 그 다음으로 하시옵소서."
즉, 조참과 같은 100명이 없었으면 피똥을 싸더라도 어쨌든 이길 수는 있었겠지만 소하가 없었으면 그대로 망했을 테니 소하가 1등 공신이라는 것. 이 말을 듣고 수긍한 유방은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정했고, 소하에게는 신발을 신고 전당에 오를 수 있고, 칼을 찬 상태로 황제를 볼 수 있고, 황제를 배알할 때도 작은 걸음이 아니라 큰 걸음으로 걸을 수 있게 하는 등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 눈치 빠르게 소하의 편을 든 악천추도 역시 보상을 받았다.[10]
실제로 소하는 사실상 홀로 전시행정을 이끌었지만, 조참은 유방 휘하의 장수들 중 가장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한 뛰어난 인물이었을 뿐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단순한 공로만으로 따지면 초를 제외한 전국을 휩쓴 한신, 초의 후방에서 유격으로 항우의 시선을 분산시킨 팽월, 초의 항장으로써 놀라운 무위로 유방을 서늘하게 했던 영포 등과 공로를 나눠먹기까지 했다.
물론 이러한 쟁쟁한 장수들과 한삼걸의 명성에 가려져서 그렇지, 조참은 분명 한삼걸 다음 가는 초한전쟁 최고의 공신이다. 한고제가 일등공신을 정할 때 장수들이 대부분 조참이 1등이어야 한다고 한 것부터 범상치가 않다. 보통 이런 논공행상에서는 대부분의 장수들이 자신의 공로를 과장하여 상을 더 받고자 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유방의 진영은 유방 본인부터 해서 아랫사람들이 대체로 자유분방한 분위기였고, 이 때문에 논공행상 당시에도 장수들이 술에 취해 궁궐 기둥에 칼부림을 하는 꼬라지를 보여 왔다. 그런데 이런 장수들이 모두 한 수 접어주고 조참을 1등 공신으로 밀어 줬다. 조참이 유방의 신뢰가 가장 깊고[11] 경력이 오래된 장수이기도 했지만, 조참의 전과 자체도 대단한 것이었다. 조참은 122개현을 함락시키고, 제후국 재상 셋에 장군 여섯을 사로잡았다. 전국시대로 치면 거의 기전파목급 퍼포먼스인 것이다, 사마천 역시 '조참이 전쟁터에서 공이 많은 근거는 한신과 같다. 한신이 모반하여 죽고 나서 열후 중의 가장 큰 전공자는 조참뿐이다.'라고 사실상 한고제의 장군 가운데 한신 다음의 공훈을 세운 장수라고 평가했다.
5.2. 제나라의 상국[편집]
소하와의 비교에서는 굴욕을 당하긴 했지만(……) 조참은 그 후에도 활약을 멈추지 않았다. 진희(秦稀)가 반란을 일으킬 때는 진희의 장수 장춘(張春)을 격파했고,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제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의 12만의 원정군을 이끌고 유방과 합류하여 경포를 박살내었다.
그리하여 평생 동안 2개의 제후국을 무너뜨리고, 122개 현을 평정하거나 점령했으며, 제후왕 2명[12] , 제후국의 상국 3명, 장군 6명, 대막오(大莫敖), 군수(郡守), 사마(司馬), 후(侯), 어사(御使) 각 1명씩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고 한다.
혜제 시절인 BC 192년에는 제후국에 상국을 두는 법이 폐지되어 제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이때 제나라 관할의 성읍은 70여 개가 넘었는데, 전쟁이 막 끝난 뒤인 데다 제도혜왕 유비는 나이가 어려 여러가지로 나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에 조참은 사람들의 조언을 들으려고 학자들을 불러모았지만, 말하는 학자들마다 서로 "이거해라, 저거해라."라는 등 중구난방이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교서(膠西)의 개공(蓋公)이라는 인물이 학식이 깊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예물을 두고 초청했다. 개공은 이런 의견을 내었다.
"치도(治道)의 가장 좋은 방법은 청정무위(淸淨無爲)로써,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스스로를 안정시킬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참은 그러한 황로학파(黃老學派)의 학술로 제나라를 다스려 효과를 보았고 사람들은 조참이 현명한 재상이라고 칭찬하였다. 이후 조참은 이러한 무위지치의 정치를 계속 유지하였다.
5.3. 아무것도 안 하는 재상[편집]
소하는 본래 조참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그와 몹시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소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참은 "그래? 내가 상국이 되겠네?" 하더니 무작정 짐을 꾸렸는데, 진짜로 황제의 사자가 조참을 부르러 왔다. 조참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고 제나라를 떠나 상국으로 부임한다.황제께서 좋은 재상을 얻었으니, 소하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참은 부임하더니 괴이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글을 잘 쓰거나 출세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쫓아버리고, 별 생각도 없고 글도 질박하게 쓰는 사람들을 데려와 승상부(丞相府)의 관리로 임명했다. 그러더니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술만 퍼마시고 살았다. 경(卿)·대부(大夫)·관리·빈객 등이 대체 무슨 지거린가 싶어 조참에게 따지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조참은 손님들에게 억지로 술을 퍼먹여서 아무 말도 못하게 했다. 어떻게 입을 좀 떼보려고 하면 계속 술을 권하니 결국 따지려고 찾아온 사람들은 인사불성이 되어 나가기 일쑤였다(…).감옥과 시장은 간사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이니, 그러한 곳에 대해서는 마땅히 신중해야 하며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감옥과 시장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이다. 만약 그대가 그곳들을 엄중히 관리하지 않는다면, 간악한 사람들이 몰려와 가득 찰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이 중요하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별 생각도 없다가 뜬금없이 불려왔는데 자기를 부른 상관은 일은 커녕 술만 퍼마시고 있으니 승상부 관리들은 조참을 매우 미워했지만, 뭐라 하려고만 하면 술을 먹여대는 통에 방법이 없었다. 생각한 끝에 승상부 관리들은 조참을 아예 후원으로 나와서 놀게 하고, 이웃에 있는 관사에서 다른 관리들이 모두 술을 진탕 먹고 고성방가를 하며 놀게 했다. 부하들이 놀자판인 걸 보면 천하의 조참도 기강을 잡으려고 술을 삼가게 될 것이라는 예상에서였다. 그런데 조참은 그 광경을 보더니 되려 자기가 앞장서서 놀이판에 가세했다. 승상부 관리들이 실수라도 하면 좀 책망하려나 했더니, 따지기는커녕 허허 웃고 마니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혜제 역시 조참의 그런 괴이한 모습이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아서, 조참의 아들 조줄(曹窋)을 불러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조줄은 황제가 시키는 대로 집에 가서 "아버지, 왜 일을 안하세요?" 하고 물어보았는데, 조참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아들을 두들겨팼다.집에 돌아가거든 조용히 부친에게 '고제(高帝)가 돌아가시어 신하들과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황제의 나이도 아직 젊은데, 부친께서는 상국이 되어 날마다 술만 마시고 황제께 소청하거나 보고하는 일도 없으니 무엇으로써 천하 대사를 걱정하십니까?' 라고 물으라. 물론 짐이 그랬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
어이가 없어진 혜제는 조참을 보자 내막을 밝히고 대체 왜 그랬느냐고 나무랐다. 이때 조참이 남긴 말이 유명하다.넌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모시는 일이나 제대로 해라! 네까짓 게 천하의 일을 말할 바가 아니다!
즉 자신이 딱히 하는 게 없었던 건 사실이나(…) 이것이 엄연히 정책에 대한 분명한 관점에 의거한 행동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결국 혜제는 별 말 없이 조참을 돌려보냈다. 이것이 '소하가 규정하면 조참이 따라간다', 즉 '이전의 기틀을 그대로 물려받아 보전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소규조수(蕭規曹隨)의 유래이다."폐하께서는 돌아가신 고제(高帝)보다 더 영용(英勇)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어찌 감히 선제(先帝)와 비교를 할 수 있겠소?"
"그럼 폐하께선 저와 소하 중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
너 하는 꼬라지를 보니조 상국이 소 상국보다 못한 것 같소!""그 말씀대로입니다.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였고, 소하가 법령을 밝게 정하였습니다. 둘보다 못한 우리는 직분을 지키면서 옛 법도를 따르기만 하고 잃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럴 만도 한 게 당시 중국은 550여년을 끌어온 춘추전국시대라는 전무후무한 대난세가 끝나나 싶더니 천하통일을 이룩했던 진나라가 혹형과 폭정 및 과도한 대토목공사로 순식간에 붕괴하고, 그 뒤를 이어 격전이 이어진 초한전쟁이 터지는 대혼란기였다. 이제 한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하긴 했으나, 2,000만명이나 되던 중국의 인구가 500만으로 줄어들었을 정도로[13] 온 나라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국가적으로 뭔가 일을 벌이는 것보단 그냥 법과 질서만 세워 놓고 내버려 두는 게 나은 선택일 수 있었다. 애초에 법과 질서는 소하가 정리해 놓은 상태라서 굳이 뜯어고칠 데도 없었고. 통일했다고 이것저것 빡빡하게 돌리다가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해서 15년만에 망해버린 진나라의 사례가 있으니 더더욱.[14] 진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더 나아가 세계사에서도 뭔가 큰 사업을 시도했다가 국운이 기운 나라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15] 유방이 괜히 함양에 입성한 뒤 법을 약법 3장으로 퉁친 게 아니다.[16] 조참의 이런 결정은 황로술(黃老術)의 영향이 강한 전한 초기에 노자가 이상적인 군주의 덕목으로 꼽은, 바로 위에서 조참이 우선으로 했다고 서술된 '무위의 치(無爲而治)'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혜제나 조참이나 인정했듯 자신들은 각각 자신들의 선대인 고제나 소하보다 못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앞의 한나라의 처참한 상황과 그런 상황에서 일단 고제와 소하가 나라의 틀을 어느정도 만들어놓은 상태에 진나라의 전례를 감안하면 능력이 있어도 백성들이 힘든 상태에서 뻘짓으로 나라를 망칠 수 있는데 능력도 그렇게 없으면서 뭘 하겠다고 하는 것은 백성에나 나라에나 해롭다고 판단할 수 있다.[17] 어차피 백성들도 진나라로부터 고생한게 오래전 일도 아니니 뭘 하겠답시고 들볶는 나라보다 알아서 잘 하라고 내버려두는 나라가 더 고와보일 것이다.
과연 조참의 방책이 헛되지 않았는지, 조참이 죽자 백성들은 노래를 지어 부르며 조참의 덕을 추모했다.
사마천은 이렇게 조참을 평론하였다.蕭何爲法 若畵一(소하가 법을 세우니 획 하나까지 분명했네)
曹參代之 守而勿失(조참이 그를 이으니 그를 지키고 잃지 않았네)
載其淸淨 民以寧一(맑고 공정하게 이를 돌보니 백성들이 한결같이 편안했네)
상국 조참이 야전(野戰)의 공로가 많음은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과 같다. 그런데 한신이 멸망한 후에 열후에 봉해진 공신 중에서 유독 조참만이 그 이름을 빛냈다. 조참이 한나라의 상국이 되자 시행했던 그의 정치 사상 청정무위(淸淨無爲)는 도가의 원칙과 가장 부합된다고 하겠다. 더욱이 백성들이 진나라의 잔혹한 통치를 받은 후, 조참이 그들에게 무위이치(無爲而治)로 휴식하게 하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조참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사기(史記) 조상국 세가(曹相國世家)'''
근데 시키는 대로 했다가 오버액션에 괜히 맞기만 한 조줄만 낭패이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줄은 어사대부로 잘 나가다가 여씨를 척결할 때 협조하지 않았다 하여 면직되었다고 한다. 다만 면직만 되었을 뿐 평양후의 지위는 계속 가졌고, 평양후는 조참의 5대손 조종(曹宗)이 무고의 화에 연루되어 죽고 봉국이 폐지될 때까지 유지했다.
6. 기타[편집]
삼국지의 조조 가문이 이 조참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삼국지집해에서는 불확실하다고 여기는 주가 달려 있다.[18]
7. 대중매체에서의 조참[편집]
모토미야 히로시의 적룡왕에서는 유방을 도망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유방으로 위장하고 항우를 속이는 역을 하기도 한다. 원래 이것은 유방과 생김새가 비슷했던 부하 기신이 했던 일인데 본 작품에서 기신이 등장하지 않아 조참이 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여기서 기신은 항우의 손에 죽지만 조참은 혼전 중에 번쾌가 구해줘서 목숨을 건졌다.
코에이의 초한지 기반 게임 항유기에서는 전 능력치가 7, 80대를 찍는 올라운드 장수로 등장한다. 그런데 어째 온몸에 상처가 나 있었다고 하는데 일러스트에서는 그걸 묘사하지 않았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유방전 연의 비중은 빠지는 전투가 많아 좀 낮다. 장수특성으로 역전용사와 전화위복을 동시에 받아 물리탱커로서 강력한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