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참 (문단 편집) == 진나라의 관리 == 아직 진나라의 힘이 천하에 건재할 당시, 조참은 패현에서 죄수들을 관리하는 [[교도관|옥리]](獄吏)였다. 일단 [[사기(역사책)|사기]]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에서는 '[[소하]](蕭何)와 조참은 아전들 중 호걸이었다.'라고 말하고 있긴 한데, <[[번쾌|번]][[역상|역]][[하후영|등]][[관영|관열전]](樊酈縢灌列傳)>에서 [[사마천]](司馬遷)은 '''"내가 소하, 조참, 번쾌 등이 살던 곳을 가 봤는데, 그들이 여기에 살 때 누가 훗날 그렇게 귀해질지 상상이나 했겠는가?"'''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여하간 그 당시엔 별 달리 특색은 없었던 모양. 그러나 시대가 그들을 본의 아니게 [[영웅]][[호걸]]의 길로 들이밀었다.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켰고, 이윽고 [[장초]](張楚)를 건국하는 데 이르렀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조참이 있던 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겨, 마침 함양으로의 노역 이동을 때려 치우고 망탕산(茫荡山)에서 숨어 지내던 [[고제(전한)|유방]]을 [[번쾌]](樊噲)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유방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을 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반응이 일어나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지만, 유방은 짐짓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소하나 조참은 '''무슨 숭고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만약 일이 실패하면 친척들이 모조리 도륙당할까봐 두려워서''' 유방에게 모든 일을 양보했다. 반란의 우두머리가 되면 가족은 물론이고 다른 친척들까지 모조리 엮어들어가는 건 피할 수 없지만, 유방이 얼굴마담으로 나서 준다면 설사 일이 실패해서 자기들이 죽더라도 연좌제는 최소한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내린 판단.[* 물론 이외에도 이들은 원래 진나라의 관리였던 만큼 사람들이 얼마나 믿고 따를지 의문이었고, 그 점에서는 어쨌거나 동네에서 이름값 하나는 확실하고 따르는 사람도 많은 유방이 제격이었을 것이다.] 유방이 이에 시원스레 응하면서 소하와 조참은 유방을 추대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