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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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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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제 정책
2.1.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2.2. 외국 자본의 침투와 쇄국 정책
3. 권력 기반의 문제
4. 재탕된 개혁 정책?
5. 국방 개혁의 한계점
5.1. 흥선대원군 집권기 조정의 식견 수준
5.2. 앞선 기술에 대한 안이함
5.3. 반론
6. 대외무역 개념 부재
6.1. 반론
7. 당백전 발행의 실패
7.1. 반론
7.2. 호포제
8. 통상 수교 거부 정책
8.1. 쇄국을 하게 된 계기와 경과
8.2. 이에 대한 반론
9. 세도정치의 종결
9.1. 또 다른 세도정치의 시작?
11. 경복궁 중건
13. 기타 비판
13.1. 권력욕
13.2. 외교 정책
13.2.1. 반론
14. 당대 사람들의 평가


1. 개요[편집]


흥선대원군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특유의 쇄국 정책과 보수적 경향성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세도 정치의 폐단을 끝낸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가부터 극심한 보수적 정책으로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악평까지 모두 존재하는 인물이다. 화술, 카리스마, 배짱 등 뛰어난 리더십으로 고종의 곁에서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며 구한말을 풍미한 전주 이씨 왕족의 거물이지만, 근대화된 서방의 선진 문물을 배척하면서 당백전 발행으로 발생한 초인플레이션에 의해 조선이 멸망하는 기반을 다진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2. 경제 정책[편집]


흥선 대원군이 받는 비판 대부분은 경제 정책이다.


2.1.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편집]


우선 경복궁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를 보면, 고종이 왕이 되고 바로 다음 해에 시작했다. 한참 정치하면서 돈을 모아놓고 권력을 다진 다음에 이제 돈 좀 써보자 하고 나선 것이 아니란 소리다. 대원군의 의중도 있었겠지만, 당시 실세였던 세도가들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가 없는 속도다. 더구나 고종이 왕이 되기까지 상당한 곡절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다들 반대하는데 권력 기반도 불안했던 대원군이 혼자 밀어붙일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중간에 화재 등으로 재료를 날려먹기 전까지는 공사비가 부족해서 허덕인 것 같지는 않으니, 다들 해볼만한 공사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것이다.

당백전 발행은 실책임이 분명하지만, 그 여파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당백전의 유통은 경기 지방이 중심이었고, 평안도 등에는 아예 당백전이 들어간 적도 없었으며, 발행 기간도 6개월을 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조선은 금속 화폐 비중이 한자리 수에 머물렀고#, 나머지는 쌀과 면포로 거래하는 구조였다. 대부분은 당백전을 아예 만져볼 필요도 없는 경제 구조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 측 기록을 보아도 당백전의 회수 후 수년간 인플레이션이 잡혀서 안정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1]


2.2. 외국 자본의 침투와 쇄국 정책[편집]


조선 말기 경제가 망가진 절대적인 이유. 세도 정치 등으로 허약해진 상황이었지만 그럭저럭 먹고 살고 있던 조선에 외국 문물들이 들어와서 치명타를 안기게 된다. 일본 및 청나라 상인들이 개항 훨씬 이전부터 싸고 품질좋은 공산품을 밀무역 형태로 들여와 팔았으며, 이에 쌀과 금 등이 유출되면서 나라에 돈이 메말라가는 현상이 관찰된다.

대원군 집권 3년차에 벌써 서양 문물에 위협받는 조선 경제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천은 아름다워서 원래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서쪽으로는 연경(燕京)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왜(倭)에 이르러 천을 수입을 하고 있다. 이 밖에 신기한 장난감 같은 수입 상품들이란 모두 나라의 돈을 소모하고, 백성들의 판단력만 흐리게 하는 것들이다. 이런 서양 물건들이 거의 전국에 가득하여, 이미 지각있는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된지 오래다.

일성록, 고종 3년 7월 30일자 기사


서양 물건이란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든 공산품들인데, 조선에서 수공업으로 만들 제품들이 품질이든 가격에서든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농기구, 의류, 염료 등등 생활과 관련된 모든 공산품들이 외국제로 점차 바뀌었고, 이거 지불하느라 쌀이나 금 등 원료는 고갈되어 갔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외국 상품 열 가지 가운데 공산품이 아홉을 차지했는데, 외국으로 나가는 우리 상품은 열 가지 가운데 아홉 가지가 천연 자원이니, 우리의 아둔함이 너무 심하다. 대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상품들은 비단, 시계, 칠기(漆器)같이 교묘하고 기이한 물건들이며, 다른 나라로 나가는 상품들은 모두 쌀, 콩, 가죽, 금, 은과 같이 평소 생활에 필요한 보화들이다. 그러니 나라가 척박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현, 매천야록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개항을 해서 무역을 풀어버린다? 대원군 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나 반대를 할 형편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예측한 대로, 나중에 대원군이 물러나고 개항이 이루어지자 과연 조선은 무역 적자로 망하기 직전이 된다. 다음은 개항 3년차에 나온 보고서다.

요즘 나라의 창고가 비어가는 지경에 이르러 관리들의 급여(쌀)를 주기 어려우며, 병사들의 급여도 밀린 바 많고, 기술자나 일꾼들의 품삯도 주지 못할 지경이니, 황급한 상황으로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이때 해결 방법은 오직 사치를 억제하고 물자를 절약하여 기강을 세우는 데 있다. 그 중에서도 중국, 일본, 서양으로부터 신기하기만 하고 쓸데없는 물건들을 수입하면서 돈을 너무 쓰고 있어, 사치하는 것보다 더 큰 손해가 나고 있다.

승정원일기, 고종 16년 1월 24일자 기사


여기에 추가로 외국 상인들이 상평통보를 위조하여 유통하는 등, 화폐 쪽에서도 조선 경제는 박살이 나고 있었다.


이렇게 위협받고 있던 조선에게, 얼른 개항했으면 서구 문물 받아 강해졌을거라는 소리는 물정 모르는 몽상에 불과하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그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현대의 경우에도 개발도상국은 무역적자를 보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무역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외부에서 물자를 들여와야 자기 나라가 돌아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당시 조선은 내부적으론 굳이 외국과 무역을 하지 않아도 나라가 얼추 돌아가긴 했다. 또한 개발도상국에서 제일 많이 수출하는 것 중 하나가 인력인데[2] 문제는 당시 조선은 인도와 중국이라는 아주 커다란 외노자 공급처가 있는데다가 이들은 인건비도 싸서 경쟁이 힘들었고[3] 이들과 경쟁하려면 인건비라도 싸야 하는데 당시 조선은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만큼의 막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국처럼 파독 근로자, 오일쇼크 이후의 중동, 베트남 전쟁 같은 사람 보내기 좋은 기회도 없었고 냉전 시대처럼 중국과 인도에서 사람 수급해오는게 어려운 시대[4]도 아니었다.

3. 권력 기반의 문제[편집]


흥선대원군이 개혁이든 섭정이든 뭘 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대원군 정권은 절대로 오래갈 수 없는 일종의 과도기적 정권이었으며 고종이 성장함에 따라 친정을 하게 되자 섭정할 명분을 잃었다.

알다시피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생부이다. 하지만 법적으로 고종은 익종(효명세자)양자의 자격으로 국왕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말 그대로 대원군이지[5] 재위에 있다가 물러난 상왕이 아니고, 또한 살아있는 대원군은 흥선대원군이 조선 역사상 처음이었기 때문에 대원군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당연히 법으로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의 섭정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익종(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의 법적 어머니의 위치에서 대왕대비로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다가 일반적으로 조선 왕이 성년으로 인정되는 15세가 되자 뒷방으로 물러났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이때부터는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어야 했다. 아무런 직책도 없는 흥선대원군이 갑자기 여기에 끼어들 근거와 명분, 핑계는 전혀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엄밀하게 말하면 조정에서 나가서 직접 정치를 하는 위치도 아니었고, 법적으로 권한이 주어진 것도 아닌 이상한 위치였다. 고종의 법적 부친은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였고, 모친은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직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고종이 성인으로 인정받는 15세가 되고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끝낸 시점부터는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어야 했다. 20세까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한다는 것은 왕의 생부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법적 제도적 근거가 없는 행동이었다. 때문에 책임소재도 약했고, 중앙에 아들인 왕을 두고 비판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겉으로 드러난 비선실세에 의한 정치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흥선대원군은 사실상 상왕,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인세이(院政)의 위치를 노렸다고 봐야 할 지경이다. 허나 조선은 일본과는 달리 그 당시에 어린 왕이 즉위하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짧으면 왕이 15세일 때까지 길어도 성인이 될 때까지만 하는게 원칙이었던걸 감안하면 흥선대원군은 원칙까지 파괴한거다. 조선사에서 악녀로 욕을 먹는 문정왕후조차도 명종이 20세가 되는 재위 8년차에 수렴청정을 중지했다. 물론 명종은 재위 20년차인 32세때 문정왕후가 죽기 전까지 자유롭게 통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이량을 중용하는 것이나 그로 인해 윤원형의 세력을 조금 누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등 적어도 문정왕후가 명종처럼 비선실세로 활동한건 아니다. 심지어 문정왕후를 그렇게 욕하는 사림 출신의 사관들이 쓴 명종실록에서 수렴청정 후 저지른 국정농단 기록이 전무하며 기껏해야 명종이 "외척이 대죄를 입으면 어찌해야 하는가?" 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문정왕후가 직접 "나와 외숙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라고 말한게 전부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강경 드라이브를 걸 수 있었던 배경이자 동시에 권력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공식적 지위와 권력의 범위가 없기 때문에 뭐가 되고 안 되고를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권한이 있는 직책을 전혀 받지 않았음에도 흥선대원군은 마치 상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국정 전반에 다 끼어들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이라는 체제 내부에서 '대원군' 이외에 어떠한 공식적 지위도 가지지 않았지만 국왕의 생부이기 때문에 아무도 못 건드리는 이상한 위치가 되었다.[6][7]

일반적으로 이런 모습은 소위 말하는 문정왕후와 같은 극히 일부의 대비들에게서 정말 가끔 보이는 요소[8]인데, 흥선대원군은 이걸 5년 이상 계속했고 고종이 20세가 된 시점에서도 자의적으로 물러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종과의 대립이 일어났던 것이다. 마치 일본사에서 인세이로 인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던 모습이 조선에서도 아주 잠깐 나타났던 것이다.[9]

결국 국왕의 친아버지라서 아무도 손을 못 댔기 때문에 국왕이 직접 나서서 몰아내야 하는 상황이 되고말았다. 국왕이 직접 몰아내는 것도 너무 거칠게 대하면 유교에서 중시하는 효 사상에 어긋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어 한동안은 조심스러웠지만 정작 고종이 한 번 시동을 걸자 애시당초 공식적 지위가 없었던 흥선대원군은 무슨 직위에서 해임한다는 소리도 없이 자연스럽게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고종이 이 과정에서 급하게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 외척인 여흥 민씨 집안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으로 5년 이상 집권하는 과정에서 조정을 흥선대원군판으로 짜놔서 여기에 해당이 안 되는 세력을 찾다 보니까 외척이 나온 것이다.[10]

흥선대원군은 이전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 다른 아들손자들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계속해서 시도했는데 단 한 번도 자신이 직접 왕이 되겠다고 나선 적은 없다.

그나마 조선사에서 왕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실권이 아버지에게 있었던 경우는 딱 한 번 있었는데 바로 태종-세종이다. 태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뒤 아들인 세종이 30살이 될 때까지 병조의 일은 자신이 직접 맡고 국사의 주요 일들을 논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돕겠다고 했는데, 비록 4년만에 사망했지만 강상인 사건으로 태종은 세종을 앞지르는 권력자임이 재확인되었고[11] 이후로도 대마도 정벌 같은 굵직한 일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태종과 세종의 관계는 명백하게 태종(친부+아버지+상왕)[12]-세종(아들+왕)의 관계로 혈연, 계보, 지위 모두 태종이 앞섰고 세종은 그 다음일 뿐이었다. 심지어 태종은 '자의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지라 더더욱 목소리가 클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생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원군이라는 자리 하나밖에 없던 흥선대원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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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재탕된 개혁 정책?[편집]


호포제 실시와 서원 철폐는 이전부터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사창제의 실시와 의정부, 삼군부의 설치는 과거에 있었던 제도를 다시 쓴 것 뿐이기도 하므로, '흥선대원군이 독창적으로 펼친 개혁'은 없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기득권층의 저항, 대외적 여건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이 '당연해 보이는' 개혁들을 하지 못해서 국가 전체가 퇴보하는 일이 세계 역사에서 한둘이 아니다. 흥선대원군만의 개혁이 없다고 할지라도 바로 앞 선대의 암군들과 달리 앞서 나온 제도를 수렴하고 잘못된 관제를 바꾼다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강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특히 기존의 군포와 서원 철폐[13]는 그와 관련된 폐해가 오래 전부터 지적됐음에도, 조선 후기 200여 년간 세금 내기 싫어한 지주, 기득권층의 끊임없는 반대로 실행되지 못한 법이다. 그러면서도 각 지방의 유림들 중 지주였던 사대부 상당수는 공공연하게 농민들을 수탈하고, 기근이 들면 오로지 조정에서 모든걸 다 해결해 주기를 바랄 뿐, 제 곳간을 풀어 소작농들을 구휼하는 명망높은 지주는 손에 꼽혔다.[14] 그에 더하여 지금의 국방의 의무와 같은 군역은 양반, 특히 지체 높은 문반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국방세로 볼 수 있는 군포를 내지도 않았다.[15] 양반이라면서 거들먹거리고,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쥐잡듯이 잡아 작황이 나쁘면 굶기 일쑤인 조선 후기의 평민 이하의 백성들은 양반들에 대한 증오가 거세졌기에 아무런 희생도 양보도 하지 않는 지주들과 왕실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조선 말기는 상당히 많은 반란이 일어났으며 동학의 확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의무 회피, 왜곡되는 조세 형평성과 사다리 걷어차기 등 사회 구조상의 부조리를 혁파하는 것은 오래된 사회 체계를 가지는 집단에서는 늘 직면하는 과제였고, 이로 인해서 지도층이 바뀌거나 혁명이 일어났으므로, 체제를 유지하면서 기득권층의 양보를 강요하는 정책의 추진은 큰 용단이라고 평가할 여지도 있다. 이를테면, 루이 16세는 못한 일이고, 흥선대원군은 해냈다는 정도다. 그러나 기대했던 조세 수입 증가나 신분간 갈등 완화 측면에서 그다지 도움이 안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5. 국방 개혁의 한계점[편집]


흥선대원군 집권기 군사력 증강이 종종 과도한 고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흥선대원군의 군사력 증강은 병인양요(프랑스)를 계기로 하여 압도적으로 박살난 신미양요(미국) 이후까지, 병력을 증강하여 화승총(구 조총)병을 주력으로 하는 상비병 3만명을 유지한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서방은 이미 기존 전장식 소총의 무지막지하게 느린 연사 속도와 낮은 명중률을 보완하기 위해 보편화되었던 전열보병을 18세기까지 있다가 소총의 발달로 19세기 들어서는 사라지고 있었고, 싸움터의 길이가 길어지자 비가시선 지휘(보고)와 단위제대의 전술지침 등을 일선 지휘자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사관학교가 보편화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대량의 면직물이 보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령군을 시작으로 면직물 군복이 대량 지급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공세종말점을 늘리기 위해 공모를 통해 음식인 병조림을 개발하는 등, 서방 열강은 한세기가 다르게 좋은 속도로 혁신하고 있었고, 서양에 비해 수세기나 뒤쳐진 상태였던, 청제국과 일본, 오스만 제국은 늦긴 했어도 좌우당간 비슷한 시기에 개항(서구와의 교역, 무역), 산업화, 행정체계 개선, 군사기술 도입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초고속으로 빠르게 근대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조선만 안한 것이다. 흥선대원군만 안한 것이다.

병인양요로 인해 프랑스군 등의 서방 병력이 대규모로 조선을 침입하는 걱정 정도는 한것 같은데, 5년 후 신미양요로 미국과 싸워서 승리하긴 했지만 꽤 큰 피해를 입은 이후로도[16] 흥선대원군은 여전히 느낀게 없었고, 발달한 신식 무기에 대응하여 구식 지휘체계와 대규모 직업군인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것은 안그래도 경복궁 중건 강행과 스스로 일으킨 당백전으로, 조선 경제가 심각하게 안좋은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조세 부담으로 이어졌다.[17] 또한, 구식 병종이 서방의 군대를 맞아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알고도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미국이 강화도에서 조선군 수백명을 쓰러트렸지만, 자국 병사들의 목숨이 아까워 퇴각할 정도로 조선의 통상수교 매력이 심각하게 저평가되어 있었던 탓에 미군이 물러난 것을 두고, 흥선대원군과 고종, 그리고 보고하는 김병학 등은 안이하기 이를데 없는 말을 나누며 이후를 도모할 계기로 삼지 못했다.

다만 당시 조선의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앞서 나온대로 서양 문물이 조선 경제를 침투해 들어오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밖에서 쳐들어오려는 것을 겨우 문 붙들고 막고 있는 형편인데, 거기다가 군대를 신식으로 개혁까지 시킬 수 있을 돈이 과연 있었을까 생각해보자. 더구나 조선은 원래도 넉넉치 않은 생산력에, 세도정치가 한껏 망가뜨려 놓은 나라였다.

아들놈 때에는 30명도 안되는 일본군에게 털려서 강제 개항 당한다는 것과 비교하면 (운요호 사건), 국방 부분에서 할만큼 했다고 평가해야 될지도 모른다. 없는 살림에 군대를 유지하고 일단 외세에 저항이라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용하다고 보아야 할 듯.

5.1. 흥선대원군 집권기 조정의 식견 수준[편집]


신미양요 당시 미국에 대해 고종과 흥선대원군 앞에서 김병학이 보고한 내용 중 일부만으로도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당시 조선 조정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세력들에 대해 잘몰랐다.[18]

“정황이 불측한 것으로 서양 오랑캐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미리견(彌利堅)은 부락으로 있을 뿐인데, 그 중간에 화성돈(華盛頓)이라는 것이 있어서 성지(城池)를 만들고 기지를 건설하여 해외의 양이(洋夷)와 더불어 서로 교통하고 있으며, 영국(英國)은 거리상 가장 가까운 듯하니 이는 《해국도지(海國圖誌)》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니, 상(고종)이 이르기를,

이들은 해적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그들이 경영하는 것은 오직 이익만을 좇는 것인데 바닷섬 사이를 오가면서 또한 겁탈하는 버릇도 많으니, 과연 해적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들이 소위 교역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해괴한 말입니다. 저들이 비록 이런 구실로 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나 일체 엄격히 막은 뒤에야 나라가 나라의 체모(體謀)를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上)이 이르기를,

비록 교역이라 하더라도 외국과 더불어 서로 교통(交統)해서는 안 된다. 만약 한 번이라도 서로 교통하게 되면 사학(邪學)이 반드시 치성해져 부자(夫子)의 도(道)가 장차 폐지될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8년(1871년) 4월 20일 국역 링크


요약하면, 영의정 김병학이 보고하기를 1871년 당시 "미국은 민가로 이루어진 부락만 있고, 그 중앙에 워싱턴이라는 동네가 요새로 만들어져 서양 오랑캐들끼리 교류한다"고 하니, 고종이 대뜸 "해적과 다름없다[19]"고 하고, 김병학이 맞장구치며 "교역은 해괴한 말"이라고 하니, 다시 고종이 받아서 "외국과 교역하여 소통하게 되면 천주교 같은 서양 종교가 득세하여 유교의 도리가 훼손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내용이라고 잘못 번역되어서 퍼져있는데 실제 국역본이 아닌 김병학이 인용한 《해국도지(海國圖誌)》의 내용과 원문 내용을 잘 살펴보면 해당 국역본이 의미 전달에 문제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핵심은 1) '미리견에는 부락만 있다' 2) '워싱턴이라는 곳' 이 2군데인데

炳學曰, 情形之叵測, 莫如洋夷, 而所謂彌利堅, 只有部落而已。 中間有華盛頓云者, 開拓城池, 建得基址, 與海外洋夷, 互相通涉, 而英吉利, 似是最近, 此在海國圖誌矣。

(『승정원일기』, 고종 8년(1871년) 4월 20일 원문: 승정원일기 DB) 원문 링크


"所謂彌利堅, 只有部落而已"의 해석 자체는 괜찮지만, 여기서 '부락(部落)'이 과연 무엇인지의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일단 김병학이 인용하고 있는 위원의 《해국도지(海國圖誌)》 중 제 62권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彌利堅洲之育奈士迭國,分士迭二十有六。士迭,華言大部落也。達厘多裏二,華言地方也。底士特力一,華言國都也。在各士迭之中,又各分岡底士,華言小部落也。

미리견(아메리카) 대륙의 육내사질(위나이스뎨, United States)국은 나뉘어있는 사질(스뎨. State)이 스물 하고도 여섯이다. 사질이란 중국어로 곧 대부락(大部落)이다. 달리다리(達厘多裏. 다리둬리. Territory. 준주)가 둘 있으니 중국어로 지방(地方)이다. 저사특력(底士特力. 디스터리. District. 워싱턴 D.C.)이 하나이니 중국어로는 수도(국도)다. 각 사질 안에 또 각각 나누어 강저사(강디스. Counties)가 있으니 중국어로는 소부락(小部落)이다.

<해국도지> 중 제 62권


즉, 정말로 김병학이 해국도지를 인용하여 저렇게 아뢰었다면, 저기서 말하는 '부락'이란 촌락이 아닌 곧 미국의 개별 주(State) 즉, 행정구역상의 주(州)를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의 저 대목은,

가) '미리견'이 아메리카 대륙을 의미할 경우, 그 땅에 유럽과 같이 강대국들이 모여있는 것은 아님을 뜻할 것이다.

나) '미리견'이 미국 자체를 뜻하는 경우, 미국이 유럽 각국과 같은 강대국이 아닌 개별 주들의 합중국임을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워싱턴이라는 곳'을 살펴보자.

"中間有華盛頓云者"에서 '云者'는 '~라 불리는 자', '~라 불리는 곳', '~라 불리는 것' 등으로 모두 번역할 수 있다. 아마도 위에서 소개한 국역본의 역자는 현존하는 워싱턴 D.C.를 생각해 저 구절을 '워싱턴이라는 곳'으로 옮긴 듯하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해국도지>에 따르면 미국의 수도는 '디스트릭트(District)'지 '워싱턴(Washington)'이 아니다.

실제로 워싱턴(화성돈)은 <해국도지> 전체를 살펴봐도 인명으로만 나오고, 특히 61권에서는 <영환지략>을 인용해 워싱턴이 이끈 독립전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中間有華盛頓云者"의 올바른 번역은 '그들 가운데 워싱턴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로 봄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뒤이은 開拓城池, 建得基址, 與海外洋夷, 互相通涉에도 주어가 뚜렷이 나타나,

"그들 가운데 워싱턴이라는 자가 있어, 도시를 개척하고 터를 다졌으며, 바다 밖 양이들과 서로 통교하니"로 보다 매끄럽게 옮길 수 있게 된다.

물론 전체 맥락을 보았을 때 미국의 국력을 낮추어보고 굳이 통교하지 않아도 됨을 주장하기 위함이므로, 어느 쪽이든 미국에 대한 비하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 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 땅에는 개척촌 몇 곳만 있습니다 ㅋㅋㅋ' 정도로 보기는 어렵다. 과연 신미양요 시점에서 조선은 미국을 몰랐는가?

그렇다면 김병학이 <해국도지>를 읽었다는 전제하에[20], 왜 그가 고종 앞에서 미국의 국력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는지의 문제가 또 다시 제기된다. 이는 그의 정치적 관점이 보수적 측면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고[21] 그것이 결국 여러 생각의 문제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김병학은 당시 흥선대원군이 중용하는 인물이었고,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인해 아버지의 의중대로 말하고 결정하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국방과 외교 분야의 모든 오판과 실책의 이유가 이 대화 한 번으로 어느정도 설명이 된다. 이는 흥선대원군과 주요 대신들이 그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서양세력들의 실체를 정확히는 알지 못했거나 어느 정도 대충은 알고 있었음에도 정치적인 판단으로 애써 외면했음을 의미한다.

김병학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아뢰는데,

“선전관에 가서 보니, 선판(船板)이 파손되었다는 것은 정말 그랬다고 한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저들의 배가 감히 방자하게 날뛰는 것은 반드시 우리나라 사람이 종용(從用)하는 것이 있어서일 것입니다만, 굉음을 내는 포가 선판을 파손시켰으니, 저 추악한 무리들의 간담이 떨어졌을 것인바 이는 통쾌한 일입니다.”

하였다.

“저 선박 안에 우리나라 사람이 많다 하니, 더욱 통탄스런 일이다. 이런 무리들을 어찌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 다른 나라 선박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정상을 따져보건대 만 번 죽고도 남을 죄가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은 곧 금수만도 못하니, 어찌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손돌목을 지나갈 즈음에 어찌 우리나라 사람의 내응이 없었겠는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만약 내응하는 무리가 없었다면 저들이 어찌 감히 어려움 없이 엿보아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모두 사도(邪徒)들이 휩쓸려 호응해서 그런 것이니, 더욱 통탄스럽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사학(邪學)의 무리는 모조리 섬멸하는 것이 옳다. 지금 또한 나머지 무리들이 있는 듯하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사도를 다스리는 법이 이미 준엄하고 엄격해서 끝까지 찾아 체포하고 체포하면 반드시 죽이고 있는데, 달아난 나머지 무리들이 또한 많지만 차차 제거될 것입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8년(1871년) 음력 4월 20일


무슨 말이냐 하니, 고종 3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로 집단학살을 당하던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미양요의 책임을 돌린 것이다. 흥선대원군 앞이니 흥선대원군에게 하는 말이고 자신들끼리 주고 받는 자뻑과 정치적 책임의 전가였다 할 것이다.

신미양요 당시 뜬금 없어 보이는 김병학과 고종의 이 대화는 병인박해로 인해 병인양요가 벌어지고,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이 양이 침입에 대비한다며 급하게 상비병을 늘렸는데, 신미양요가 일어난 책임을 이미 학살한 수천 명의 천주교 신도들의 남은 가족이나 잔당들에게 모두 돌리는 것이다. 즉, 이 사건들은 서로 연결된 사건들이며 그 연관성이 이 대화에 다 들어있다는 뜻이다.

김병학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일가가 죄다 숙청당한 이후에도 요직을 잃지 않을 정도로 흥선대원군과 인적 교분이 두터웠고, 그의 행보는 병인박해에 있어서도 천주교도를 죽이고 천주교를 금지하는 데에 앞장섰던 사람인데, 보수적인 척화파였기에 이런 대화가 나온 것이다. 천주교의 확산은 조선 사회의 기득권인 유림들의 입지에 어떤 관점으로 봐도 위협적이었을 것이므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던 유림들은 눈에 불을 켜고 사학의 무리를 찾기 바빴고, 결국 희생자 숫자가 작았던 그 이전과는 자릿수가 다른 병크의 끝장판인 병인박해로 마무리를 지었다.

개혁가라면서 실제 행보는 서원 철폐나 호포제 정도를 제외하면 다 유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서양을 바라보는 시각은 고종의 추임새 같은 대답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시 청이 서양을 바라보던 중화사상에 기반한 시선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5.2. 앞선 기술에 대한 안이함[편집]


2차례의 양요를 겪으며 신식 군함 건조를 추진한 것도 실패로 끝났고, 흥선대원군은 그 실패를 통해 기술 격차를 극복할 마땅한 대안을 내놓기는커녕 서양과 조선의 학문적, 기술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은 줄곧 목선만 제조해왔고, 대포와 같은 공용화기도 여전히 주물포를 쓰던, 증기기관이 뭔지도 모르던 조선[22]이 갑자기 증기기관을 갑자기 모조해낼 능력은 없었으며, 근대의 화기들 역시 모조하여 개발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화력 군사기술이 상당히 강했다는 고평가를 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 전기까지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로는 발전속도가 크게 저하되었고 조총을 기반으로 한 화승총의 발전에만 몰두하고 하염없이 화승총만 생산해냈다. 화포류도 마찬가지로 2세기 전에 개발된 홍이포, 불랑기포 같은 정도였고 포탄은 당연히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19세기 이후 현대의 포탄 원형이 개발되기 전에도 서방과 미국은 조선에서 지연 신관 역할을 했던 심지와 포탄 자체가 파편상을 일으키는 폭발탄(작열탄)을 계속 발전시키고 대포의 명중률도 개선하였으며 탄도학을 비롯한 포병술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23] 조선군의 농성은 애초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신미양요의 전투 결과는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이후 추진한 상비군 증강이 그냥 이전 것을 그대로 해서 양만 늘린 것이고 근대화된 병졸들을 상대로는 막기 힘들다는게 확인된 것이다.


5.3. 반론[편집]


위에 있는 주장은 조선의 처해진 상황을 보지 않은 부분이 있다. 우선 상비군을 강화하고 기존 무기를 계속 사용하는 이유는, 시대적으로 당시 조선은 정조 이전에도 이양선이 주변에 돌아다니면서 사회적으로 불안감을 키우는 동시에 청제국이 아편전쟁을 하면서 당시에 엄청난 충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방어가 집중이 되었는데 문제는 조선은 세도정치라는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 이후로 국방력이 거의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정조 때도 국방력이 너무 쇠퇴해가고 있어서 박제가성호 이익이 "조선의 국방은 너무나 개판"이라고 한탄하였고 당시 조선에 숨어서 활동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신부가 "무기고에 무기는커녕 썩고 녹슨 나무 토막, 토막만 있을 뿐이니 군함만 끌고와서 대포만 갈기면 알아서 문을 열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심각했으며 특히 개화된 이후에도 동학 농민 운동 때는 서양식 신식 무기와 훈련을 하고서도 패배하는 추태를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서방 세력에 빠르게 대비를 할 정도로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상비군을 늘리는 길 이외에 방법이 없었다.

대외인식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는건 모르는 척 한 것에 불과 할 뿐이지 최전성기때는 세계에서 군사력이 가장 강력하던 청나라가 쇠망하여 1차, 2차 아편전쟁 때 수도인 북경이 함락당하고 홍콩 할양에 황제가 퇴각한 사실 정도는 조선 정부까지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적 산물인 왕권 강화라는 수단에 불과 한 것을 목적으로 착각 하였기에 경복궁 중건 같은 왕가의 권위 향상에만 골몰하였기 때문에 소홀히 한 것에 불과하다. 신권에 비해 황족의 권력이 조선보다 훨씬 강력한 청제국이 계속된 전쟁 중이라는 상황만 보았을테며 동력원의 대소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방향이 적절한 것인가를 따졌어야 했다.

그리고 뒤쳐진 무기로 상비군을 무장시켜 앞선 무기에 맞서게 했다는 주장도 당시 상황을 보지 않은 채 주장하는 것이다. 현실은 절때 빅토리아 시리즈 같은 게임이 아니며 계속 뒤쳐진 무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새로운 무기를 갖추는 데 돈과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일단 서양에서 사용된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면 기술자를 초빙해서 무기공장을 설립하고 제작지식을 보급하는 교육시설을 만들고 무기에 대한 규격과 도량을 통일시켜야 하며 거기에 각 진영에 어떻게 보급을 하고 거기에 유지비를 어떻게 마련하고 거기에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따로 새로운 군대를 만들거나 재편해야 하며 거기에 이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교육관을 양성시켜야 하는 등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돈을 마련하는 것은 둘째 치고 뒤쳐진 무기를 빠르게 대체할 시간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었다.

서양에서 무기를 수입하면 하는 것도 문제다. 서방 국가들 중에서 어느나라의 무기를 선택을 하고 무기를 수입하는 루트를 개발하고 어떻게 빠른 시내에 무기를 빨리 수입해서 충당을 하여 각 진영에 보급하는 것도 위에서 상황보다 낫지만 시간이 상당히 걸리며, 거기에 서방 국가들이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 순순히 자기들의 무기를 조선에 갖다바쳐줄리가 없으며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거절하거나 설사 수입이 가능하다 해도 여러가지 바가지를 세우며 비싸게 팔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어디까지 임시방편이고 언젠가는 무기를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다. 거기에 수입하는 것은 둘째치고 군사를 따로 훈련해야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실제 양무운동 사례를 보면, 무기는 당시 세계 최강 수준으로 최신식으로 제대로 갖춘 상태였지만 군인들의 훈련 인프라가 충실하게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청나라가 일본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기들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바가 있다.[24]

그럼 군사력 키우지 않고 곧장 문을 열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문제다. 군사는 미래에 만약에 사태를 대비하는 조직이기에 이 상황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고 오히려 아무런 준비없이 서방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더 만만히 보면서 더욱 이익을 챙기기 위해 노략질을 해올지도 모르는 얘기다.[25] 말이 좋아 문을 개방한다는 것이지, 현대로 비유하자면 개발도상국 수준의 국가가 선진국FTA를 하는 것과 비슷한데, 과연 당시 대암흑기인 세도정치기 때문에 국가, 군사, 정치체계 모든 것들이 파탄나있던 조선이 이를 해결해나갈수 있었을까?

진짜 문제는 제쳐놨던 문제이다. 흥선대원군은 기술과 산업 발전 시키고, 군사력 강화할 돈을 원납전당백전으로 조선 전체에서 뜯어내서 경복궁 건설했었다. 고종은 광무개혁을 포함해서 이걸 이렇게 하려고 하긴 했다는 식이라도 나오고 그게 한참 부족하다는 평[26]으로 이어지는데, 흥선대원군은 이 부분도 부족하다. 구식군대 유지를 제외하면 끽해야 면제배갑이나 제너럴 셔먼호 엔진 인양한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는 증기선 정도에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그중 남은 것은 없었다. 광무개혁 시기 진짜 제너럴 셔먼호양무호 구매한 것도 쓸모 없다는 소리나 듣는데, 잘 보면 움직이는 수준이었던 증기선은 무의미했고, 면제배갑신미양요 때 이미 한계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구식군인들은 정부의 재정파탄으로 인해서, 대폭 축소와 지원감축이 일어났다. 5군영은 2군영으로 축소되었고, 강화도 병력의 자금원이었던 경강수세[27]도 중앙재정으로 돌리면서 강화도 병력은 실질적으로 무력화 되었다. 임오군란 시기의 임금 문제도 당연히 횡령도 있겠지만, 신식 군인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얼마 없던 자금여력이 소멸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28]

결국 군사 개혁의 문제는 돈의 문제다. 어느 부분에 돈을 더 쓸 것인가 등등의 판단을 잘못 내릴 수는 있지만,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우선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당시 조선은 돈 나올 구석이 없다시피했다. 명언/전쟁 부분에 나온 Gian Giacomo Trivulzio의 말을 빌려와 보자. "전쟁을 하려면 세가지가 필요하다. 돈, 돈, 그리고 더 많은 돈이다."

6. 대외무역 개념 부재[편집]


일본이 1853년 미국의 개항 요구에 순순히 굴복하여 아무 준비없이 불평등 조약을 맺고, 준비되지 않은 전면 개항 십수년만에 일본이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며 무진전쟁이 발발한 것을 보고,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군사력 강화가 잘한 정책이라고 보는건 무척 좁은 시각이다. 조선이 일본과 청나라간의 무역만 겪어서 세계의 무역 동향에 무지해서 그렇지, 조선도 개항 시 서양식 조약에 무지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는다고 가정할 시에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은 쿼터제다. 공무역의 형태로 중국과 정한 양의 물품을 교환하거나 정해진 지역에서 중국, 일본의 소규모 무역에서 할당량을 정하여 교역하는 것은 충분히 익숙한 개념이었으므로, 개항을 하되 관세의 불평등을 교역량을 크게 제한한 다음 점진적으로 늘리는 방식으로 하고, 시장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기술도입을 추진하는 방안 등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겪은 이후 일부 적용했고 양무운동을 전개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그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개항을 안하고도 당백전 병크를 통해서 스스로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조세 개혁이라 함은 나라의 세수를 늘리는 여러 개혁을 묶어 평가해야 하는 것인데, 흥선대원군의 조세 개혁에서는 대외무역에 의한 관세가 빠져있다. 그 이유가 대외무역은 그저 외세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하려하는 수단 정도라고 보는 수준이었다는게 여러기록에서 드러나는 바, 그의 조세 개혁은 철저하게 조선 내에서 걷히는 세수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6.1. 반론[편집]


그러나 당시의 국제무역이라는 것은, 기술이 발전한 강대국들이 식민지가 될 나라들의 경제를, 앞선 공산품들을 내세워 먹어들어가는 형태였다. 식민지 제품들은 품질과 가격에서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맨체스터 공장에서 옷감 싸게 떼어다가 인도 식민지에 팔면 금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가능한 시기였다. 그나마 청나라 정도가 막대한 인구를 갈아넣은 가내수공업에서 비롯된 가격 경쟁력과 수요의 부조화때문에 산업혁명의 본고장인 영국에 적자행진을 안겼으나 영국은 전략을 바꾸어 아편무역과 아편전쟁이라는 비열한 방법으로 청나라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당연히 조선 입장에서는 대외무역을 한다고 세수가 추가로 걷히기는커녕 있는 돈 안나가면 다행인 상황이였다. 일단 개방이 되면 외국산 물건에 경제가 완전히 잠식되어서 꼼짝 못하게 되는 것이 수순이었다. 왜 간디 등 식민지 사람들이 (대개 실패했지만) 국산품 애용 운동을 전개했겠는가?

반면 모든 외국 상인들과 정부들은 한몫 잡고자 만만한 나라는 개항부터 시키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한가롭게 쿼터제 하겠다고 지켜질 턱이 없었다. 단적으로, 당시 러시아 대장성의 한국지 기록에 보면 개항 이전 3년간의 조선의 대외 밀무역 규모가 개항 이후 정식 무역에 비교해서 70% 수준에 육박한다. 무역 제한을 있는대로 걸어놔도 그 지경인데 더 풀어줄 여지도 별로 없었던 것. 청나라는 규모가 있으니까 강대국들이 나눠먹으려고 할당제 한다고 했을때 지켜지는 시늉이라도 한 것이지, 작은 나라 조선에서 하는 할당제를 외국 상인이 지킬 이유가 별로 없었다. 아편전쟁에서 보이듯이 수틀리면 군대 불러와 무역 조건 바꾸는 시대였다. 더구나 그 밀무역자의 다수가 청나라 상인들이었다는 것은 해봤자 안될 거라는 확인사살.

7. 당백전 발행의 실패[편집]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병학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추어 준절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적에 당십전이나 당오전을 쪼개어 당이전이나 당삼전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대번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官)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아주 좋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 고종 3년(1866년) 10월 30일 2번째 기사

경복궁 중건이나 갑작스레 증강한 상비병으로 지출할 돈이 많아지니, 그저 단순하게 "돈을 찍어내면 다 해결 되겠지."하며 당백전 병크를 일으킨 것인데, 흥선대원군의 능력은 자신이 세운 정책을 밀어붙이는 카리스마 같은 건 있을지 몰라도, 경제관에 대해서는 한없이 모자란 필부의 수준이었다. 조선 조정은 당백전을 찍어낼 생각만 하고, 찍어낼 화폐의 가치를 담보할 이나 을 보유하지도 않았고, 당백전 자체가 귀금속도 아니었으므로,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만 엄청나게 늘어나니, 상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폭락하는 당백전을 꺼릴 수밖에 없었고, 이에 물가가 완전히 박살나게 된다. 즉,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이후 상황과 똑같게 되었다. 수량을 100장으로 한정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래 언급된 1,600만냥은 금위영에서 5개월 동안 직접 생산한 것만 고려한 수량이다.

당백전이 발행되기 전 재정이 아주 많이 필요했던 조정에 의해 백성들뿐 아니라 조선 왕실도 정부 고관들도 원납전이라는 형태로 돈을 내놔야 했고, 이걸로 부족해서 강제로 걷어야 했다. 상평통보의 발행량이 1,000만냥인데, 원납전으로만 750만냥을 걷어들이고도 돈이 부족했다. 호포제의 실시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며, 결두전[29]을 포함해서 온갖 잡세가 다 등장했다. 예를 들면 사대문 밖에서 출입세를 걷고 한강에서 선세를 걷었다. 이게 고종 재위 시기라고 해서 고종의 악행으로 까이고 있다. 하지만 고종 10년에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고종 시기 행적의 굵직굵직한 것들은 흥선대원군이 앞서 추진한 것이기에 공도 과도 모두 흥선대원군의 것이다.

이걸로도 부족해서 생각해낸 것이 앞서 언급된 당백전과 청전의 발행이다. 당백전은 기존의 상평통보에 비해서 6/100 정도의 악화였는데도, 2년만에 1,600만냥의 가치의 돈이 풀렸다. 이로 인한 문제는? 당시는 실질화폐의 시대이다. 명목화폐를 사용하고 싶었다면, 조선 정부가 당백전에 대한 지급보증을 해야 실질적으로 운영이 가능하다. 이게 아니면 조선 정부가 1,000만냥 이상을 조선 전체에서 강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화폐 발생 초기 왜 , , 구리를 필두로 한 금속이 화폐로 사용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금속제 화폐는 내구성이 매우 높아 반영구적이기도 했지만, 화폐를 구성하고 있는 금속의 가치가 화폐의 가치를 담보하기 때문에 화폐가 안정적인 신용도를 쌓을 수 있던 것이다.[30] 당시는 신용의 시대가 아니었으며(정확히 말하면 '신용 화폐의 시대') 심지어 현대에서조차 화폐 이전에 현물이 있다.[31] 그 유명한 미국 달러조차 '브레튼우즈 체제'로 대표되는 금태환 화폐 시절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와 브레튼우즈 체제를 통해 미국 달러는 파운드 스털링의 따귀를 후려치고 기축 통화의 위치에 올라서는데 성공한다.

현대 신용화폐의 시대에서 화폐 발행의 주체들이 윤전기를 돌리면서도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가 화폐가 전적으로 현물과의 교환을 담보할 수는 없다는 사실[32] 때문이다. 금본위제도에 의거한 금태환 화폐의 경우에는 무조건 '금'이라는 현물과의 교환이 담보되기 때문에 문제가 비교적 적다(비교적 적다는 것이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용화폐가 과도 발권될 경우 화폐는 신용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결과 짐바브웨 꼴이 나므로 윤전기를 돌리면서도 타이밍을 열심히 재는것이다. 고도로 금융학이 발전한 현대에도 이럴진대, 근대의 물도 제대로 못 먹은 조선에서 화폐의 신용 개념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악화(당백전)를 유통했으니 어떤 꼴이 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대원군은 당백전 유통을 위해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지출하는 돈의 비율을 당백전2, 상평통보 1의 비율로 하라고 명령했고, 나중에는 중앙에 올리는 공납 전부를 당백전으로 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게 작용되어 지방 수령들은 상평통보나 아예 실물로만 세금을 받은 다음에, 명목 가치에 해당하는 당백전으로 조정에 상납하여 수령들 배만 엄청나게 불렸기 때문에 이를 처벌하는 조항까지 등장했다. 결과적으로 조선 조정이 양화인 상평통보를 빨아들이고, 악화인 당백전의 유통 비율을 높인 것이다.

더구나 기존의 상평통보의 총액은 1,000만냥 정도에 불과했으니,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즉, 당백전으로 교환한 화폐의 양을 어디서 벌충해 올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됐고 화폐가 부족해지니 물가는 떨어지는데 화폐의 가치가 오르는 디플레이션으로 전환 되어버린 것이다. 자연스럽게 상평통보는 창고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에 대한 불신이 쌓인 것이다. 결국 5개월만에 주조 중단, 그리고 2년 만에 당백전은 폐지된다. 무려 1,600만냥이 폐지되었다. 폐지된 당백전은 유통이 불가능하고, 녹이기라도 하면 국법으로 처벌되었다. 당백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다 호구, 빵셔틀이 된 것. 이에 구제책으로 조선 조정은 당백전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교환비율은 당백전 1개로 상평통보 또는 청전 1냥. 그렇게 회수한 당백전은 녹였다.

하지만 갑자기 대량의 이전 화폐가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하면 단순하게 저울추가 평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위의 대책은, 오히려 화폐의 가치 하락을 부추김으로써 우리가 당백전의 문제로 알게 되는 조선 경제에 인플레이션효과를 불러온다. 애초에 당백전으로 돈놀이해서 번 돈이 사라지면 재정 압박이 강해지지 않겠는가. 이걸 대비한 것이 앞서 언급된 청전(淸錢)이다. 애초에 청전은 밀수품이었다. 당백전이 워낙에 말도 안 되는 악화이다 보니, 그보다는 볼만한 돈으로 시선이 몰렸는데, 그것이 바로 청전이다. 청전의 명목가치는 상평통보와 같지만, 실질가치는 상평통보의 1/2. 이것도 악화란 소리다. 하지만 청전을 수입해서 조선에 풀어놓으면 그 과정에서 유통마진이 명목가치의 1/3이 생기기 때문에 밀수가 이뤄졌는데, 이 짓거리를 조선정부가 직접하기 시작한 것.

이러니 상평통보가 창고 밖으로 나올 일은 여전히 없다. 애초에 당백전에 비해서 양화(良貨)란 것이지, 어차피 상평통보 대비 악화인 청전은 비율이 상대적으로 낫다는 이유로 대원군 퇴임하는 그 시점까지 사용되었다. 이게 안정적으로 유통되었다는 소리도 하는데, 자기나라 돈의 화폐 유통체계를 개판으로 만들고, 밀수된 외국 화폐를 정식 유통하는 것이 무슨 놈의 안정인지도 의문이지만, 이건 이것대로 문제다. 청전의 유통도 400만냥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되었고, 대원군의 돈놀이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청전은 경복궁 다 지은 이후에도 유통이 금지되지 않았다. 청전의 유통은 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남의 나라 돈을 자국 공용화폐로 쓴다는 것 자체가 그나라 경제가 개박살 났음을 의미하며 현대에 이런 나라는 짐바브웨, 에콰도르, 북한 등 경제가 완전히 파탄난 나라들이다.

게다가 고액권 화폐의 존재 자체가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며 이로 인해 고액권 화폐의 발행은 신중해야 한다. 유럽은 전유럽 통일화폐로 유로화를 만들어서 영국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에서 통용했는데 문제는 대한민국 원화 액면가로 65만원에 달하는 500유로짜리 지폐의 존재였다. 너무 액면가가 커서 환전도 어렵고 이에 따라 물가도 상승하게 되어 유럽연합 측에서는 당장 500유로화의 발행을 중지하고 계속 회수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환전을 거부하며 환전을 해주는 나라에서조차 5~8유로의 수수료를 받는 형국까지 갔다. 고작 65만원짜리 지폐가 발행된 것 하나만으로 온 유럽의 통화가 어지러워지고 있는데 이 당시의 당백전을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500유로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는 거의 1,000만원권 지폐나 다름없는 고액 화폐였기에 이 당시 당백전의 발행 자체만으로도 조선의 시장경제가 얼마나 큰 혼란을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화폐 사기극과 그로 인한 초(超)인플레이션은 가혹한 조세 수취보다도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정부 시책을 따라서 당백전이나 청전을 사용하는 이들만 손해를 보고, 상평통보를 자기 창고에 쌓아두었던 이들은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관북 지방영남 지방에서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애초에 당백전이건 청전이건 사용하지 않았다. 정부 시책이 안 먹힌 것이고, 부작용이 기호 지방과 특히 한양에 몰빵이 될 것이란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연 실질 가치의 1/3인 악화를 유통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금을 거둬들이는 쉬운 방법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빨아들인 최대의 블랙홀인 경복궁 중건에 시대착오적 왕권 강화책이란 명분은 차라리 부차적일 정도이다. 정부의 재정적 한계와 국가의 경제적 화폐적 기반을 뒤흔들 정도의 뭔가를 진행했다면, 그게 왕권 강화책이건 민주주의의 상징이건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재정 문제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악화를 통한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화폐 불신을 끝내기 위해서는 결국 악화를 폐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모든 후폭풍은 악화를 폐지하는 시점에서 몰아치게 된다. 그게 바로 고종의 친정 초기이다. 황현은 자신의 일기 매천야록에서 "대원군이 10년을 쌓아둔 재정을 고종명성황후가 1년만에 탕진했다"고 기록하면서, 고종 부처를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면, 이미 파탄지경이었던 조선의 재정 상황에서, 모든 자금을 빨아들인 블랙홀 경복궁 중건을 거친 대원군이 도대체 무슨 수로 재정을 쌓았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되는데, 이 경우의 해답은 청전과 당백전 유통의 이익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결국 이 모든 환투기 수단을 폐지하고, 조선 왕실이 스스로 불러온 인플레이션을 정면을 맞이하게 되는 고종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재정 파탄으로 가게 된다.

우선 청전이 폐지되었으므로, 당연히 인플레이션은 정반대로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되게 되고, 더구나 지방 관청에서 상평통보로 세금을 걷고 중앙에는 청전만 올려보낸 것은 이 때도 유지되었기 때문에, 청전을 폐지시키고 보니 중앙정부 금고에는 청전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고종 친정 시기 이 재정파산 상태를 타개하는 것에만 2년이 걸렸다. 이 때문에 조선정부가 한 최대의 실책으로 평가하는 입장도 존재하지만[33], 역으로 말하자면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조선 정부의 손해를 민간에게 떠넘기거나, 혹은 10여년에 걸쳐서 천천히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어느 쪽이건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이 여파 때문에 조선 정부는 세수 확보에 발악을 하게 된다. 그런 흔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운요호 사건 시기다. 대원군이 재정을 동원해서 강화했던 강화도 병력의 주 수입원이었던 경강수세마저 중앙정부 유지비용으로 들어가고, 강화도 병력들이 별다른 응전도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황현과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대원군이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과정과 고종 초기에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이전 관념으로 상상해서 집어넣는 것이다.[34] 그러니 보수적인 사대부나 유림들 입장에서는 대원군이 돈 많은 이유야 호포제 등을 실시해서 그럴 것이고, 고종이 돈 없는 이유야 사치를 통해서 돈을 많이 써서 그렇겠거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전 세계 어느 지식인이라 해도, 극소수 경제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7.1. 반론[편집]


대원군의 당백전 발행을 평가할때, 오늘날의 신용 화폐 경제를 생각하고 분석하면 안된다. 우선, 당시 조선 경제에서 금속화폐는 그 비중이 국민 총생산 대비 3%였다. # 나머지 97%의 거래는 쌀과 면포로 하였다. 쌀이나 면포를 화폐처럼 쓰는 나라인데 여기서 갑자기 중앙 정부가 1억원짜리 종이돈을 만들었다고 하자. 일반인들은 그냥 종이돈 안받고 쌀이나 면포로 계속 거래하면 그만이다. 그 종이돈을 억지로 받아야되는 사람들, 가령 중앙 정부에 납품하는 대상인들이나 고위 관리들이 주된 희생양이 된다.

중앙 정부가 처음에 몇몇 부자들에게 억지로 떠넘겨 돈을 좀 벌 수는 있지만, 그 수익은 얼마 못간다. 그걸 다른 누구에게 떠넘기고 현물로 바꿔야 되는데 권력으로 강제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안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인플레이션이 온 경제로 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돈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소수에 불과한데 고액권을 푼다고 그게 유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손해를 보고 어느 즈음에서 그 돈을 쓸 수 없게 된다. 좀 과장하면 외국 외딴 섬에 가서 1억짜리 가짜 부루마불 돈을 총으로 위협해서 쓰는 경우와 같다. 그 부루마불 돈이 나중에 그 섬에서 유통이 되긴 할까? 절대 돈 취급 못받고 종이조각 가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거 처음 받아든 상점 주인만 불쌍한 것이고.

실제로 당백전 유통은 6개월이 넘지 않았으며 경기 지방에 도는 것에 그쳤다. 실제로 이를 수습하여 몇년 안에 경제가 안정을 찾았다는 일본 측 기록도 있다.[35]

당백전 발행이 고종 3년인데 조선군 보급이 끊어져 망하는 운요호 사건은 그보다 9년 후다. 그 기간 동안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에서 조선 국방력은 기능은 하고 있었고, 나중에 고종처럼 군대에 보급을 끊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라 소유의 물품들을 정리한 것을 보면 대원군이 물러날 즈음 재정이 몇배 더 탄탄해져 있다. 현대 화폐경제론에서도 정책 시차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9년전 6개월동안 발행한 돈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십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망한다는 소리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실물 화폐를 97% 쓰는 경제에서 말이다.

오히려 대원군이 물러날 즈음 외국 물품들이 밀무역 형태로 밀고 들어오고 (무역 적자) 외국 화폐까지 침투하면서 (인플레이션, 위조지폐) 경제위기가 터졌는데, 이것을 애먼 9년 전 당백전 주조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7.2. 호포제[편집]


가끔 고종이 호포제를 폐지했단 말이 있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애초에 대원군의 호포제부터 양반과 평민의 세율에 차이를 둔 불안정한 것이었거니와,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린 고종이 그나마 안정적인 세원(稅源)인 호포법을 폐지할 리가 없다. 실제 완전 균등 과세는 갑오개혁 시기에 완성되고, 그 이전은 대원군의 세수 체제가 그대로 이어졌다.

군포라는 수백년을 이어온 병역세에서 혜택을 받아온 양반은 서원철폐도 열받는 판에, 1871년 호포제까지 시행되자 거의 게거품을 물다시피하며 상소를 올렸지만, 부패한 유림을 개혁하려 했던 흥선대원군과 뒤이은 고종의 입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호포제는 그나마 성공한 세수 확대 정책이었다.

문제는 호포제가 군역을 면제받던 유림들에게 조세로서 군역을 이행하게끔 하는 정도의 견제효과와 약간의 조세수입 증가 정도에서 효과가 그친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호포제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세금에 대해서는 토지에 대한 정책이니만큼 대단히 민감한 부분이라서 당시 세금개혁으로 상류층에게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자체가 결국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직접세의 문제점인 조세저항이 강하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당장 균역의 면제는 당시 양반의 특권이었다. 당장 방납의 폐단 때문에 대동법을 실시하려 했으나, 지방 지주층들 가장 반대했기 때문에 완전히 실행까지 무려 100년이나 걸렸다.[36] 거기에 균역법마저도 이전부터 논의되어오던 제도이나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가 영조 때와서 실행이 되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봤을 때도 쉽지 않다. 고대 로마시대 때 심각한 빈부격차로 그라쿠스 형제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을 하다가, 최고 권력 집단인 원로원의 강력한 반대로 암살을 당해 실패했다. 프랑스 혁명의 이유가 점점 나라의 빚이 너무나 늘어나 어떻게든 개혁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기득권에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발로 무산됐고, 실제로 귀족들이 조금이나마 양보해서 세금을 낸다면 국가의 빚을 갚고도 남는데도 끝까지 거부한 결과 벌어진 게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군역을 면제받던 유림들에게 조세로서 군역을 이행하게끔 하는 정도의 견제효과와 약간의 조세수입 증가 정도에서 효과가 그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백성들이 가장 기피한 조세 제도가 역이었고 실제 백성들뿐만 아니라 양반들조차 역에 대해 기피하였다. 당장 속오법으로 속오군을 구성할 때 양반부터 노비까지 모든 계층을 징집하려 했지만, 결국 노비들만 남았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37] 그나마 어떻게든 호포제를 통해 간산히 양반들에게 역을 부과할 수 있었고 약간의 조세수입이 증가했다는 점은, 백성들에 대한 과도한 수탈을 막고 기존에 있던 당시 법대로 세금을 거두면서 생기는 일이다. 당장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민생안정책으로 기존의 있던 조세를 10분의 1로 다시 조정하면서 결과적으로 감세 정책이 되었던 전례가 있다. 그리고 오히려 백성들이 낼 과중한 세금이 당시 대다수 인구를 차지한 양반층에게 부담되면서, 세금이 각 계층마다 적절하게 분배가 되었다는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이전까지는 군포를 10명 중 2명이 각각 5개로 부담했으면 이제는 10명이 각자 1개씩 부담하는 것이다.


8. 통상 수교 거부 정책[편집]



8.1. 쇄국을 하게 된 계기와 경과[편집]


애초에 조선은 외부에 관심이 적을지언정, 나라를 완전히 막아버릴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 건국기에는 국경을 크게 확장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의 대외 군사력 투사에 집중한 시기가 있었으나, 유교 중심의 사회가 자리잡은 덕에 숭명 사상이라는 매우 자발적인 굴종과 중국 숭배(소중화)가 고착되었다.[38] 선조임진왜란 대비를 나름대로 잘한 부분이 있어서 칭송받을 여지도 있었으나, 애초에 선조가 이런 사상에 찌든 사람인지라 재위 초반에는 알 수 없었던 찌질함이 드러나면서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주하려 하고, 전쟁 이후 아들 광해군과의 갈등 역시 명나라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명청 교체기 척화파가 멍청하게 보이는 원인이 항전을 주장하면서 내민 명분이 숭명이었고, 강력해진 여진은 그저 하등한 오랑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얕잡아보던 하등한 오랑캐에게 굴복하여 그들의 명령을 따라 더 멀리서 온 오랑캐들과 싸우며 흥선대원군 집권기 직전에는 에도 막부로 형식적으로나마 보내던 조선 통신사도 보내지 않게 될 정도[39]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었다. 그걸 공식적이고 '개혁적'으로 추진하여 천명한 정책이 쇄국 정책이다.

흥선대원군 집권기 이전부터 청나라에도 막부도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쇄국을 지향했는데, 청나라명나라의 무역과 경제 인프라를 그대로 이어받았기에 경제 문화적으로 부족한게 전혀 없었다. 유럽에서도 엄청난 부의 땅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많은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 항로를 개척할 때 조선 같은 건 안중에 없었으면서도 중국만큼은 되든 안되든 꼭 무역을 요청하였을 정도였다. 그런 서구 열강 중에서 무역을 허가받은 영국이 대청 무역을 하면 할수록 무역 적자가 심해지자 스스로 애걸복걸 했으면서도 아편전쟁까지 일으켰다. 에도 막부는 매우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한 덕분에 지방 다이묘들을 통제하고 내정을 안정시킨다며 수세기에 걸쳐 쇄국을 이어나갔지만, 나가사키의 데지마 항을 통한 서양 문물 및 기술, 국제 정세를 끊임없이 보고받으며 흡수하였다. 이 때문에 뜬금없는 개항이 일어나고 무진전쟁까지 발발하였음에도 비교적 국가 전반에 걸친 혼란은 적은 편이었다. 이는 미국내에서 남북전쟁으로 국내에 정세기 혼란이 있는 행운까지 겹쳤던점이 있었다. 애초에 조선은 처음부터 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상 외세와 접촉이 드물었고 직접적인 개항 및 요구도 가장 늦게 발현되었다. 이를 두고 일본 및 청과 비교하여 개항이 늦었다니 비판하는 것은 과한 점이 있고 잘못되었다.


8.2. 이에 대한 반론[편집]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기 전에, 이미 정조 때부터 이양선이 오면 식량과 물을 주되 적절하게 쫒아냈으며 거기에 1832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선 암허스트호가 조선으로 와서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이때 흥선대원군이 처한 바와 다르게 암허스트호는 아무런 무력적 압박 없이 평화로운 요구였는데다, 머무르는 동안 감자를 재배하는 신농법을 알려주거나 의료 봉사를 해주는 등 우리가 그간 조선 말기에 당해온걸로 무작정 나쁜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당시 서양 세력들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결국 세도정치와 교조주의로 치닫던 조선의 당시 상황과 겹쳐 이러한 평화적인 요구에도 매몰차게 조선은 거부한적이 있는 등 이미 통상에 대한 거부는 이미 관례대로 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정조때의 일도 사실 이전부터 해오던 일에서 약간 수정한 정도에 불과한게 인조 때 온 벨테브레하멜의 사례를 보고 '조선은 외국인이 오면 살려는 주지만 보내지는 않는 나라' 라고 인식하기 쉽겠지만 사실 원래는 중국으로 보냈다. 아마도 '중국은 큰 나라고 큰 나라니까 여러 나라랑 접촉할테고 그러니 중국으로 보내면 귀찮을 일 없겠지' 라고 생각해서 일듯한데 문제는 벨테브레가 왔던 때는 명청교체기라 선뜻 중국으로 보내기 뭣한 상태였고 하멜은 아예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이미 임진왜란으로 개판이 된 적이 있던 조선으로서는 하멜을 일본으로 보내기는 뭣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하멜 일행이 탈출에 성공한 이후 조선에 딴지를 걸었으니까 즉 조선이 외국인을 만나면 되도록이면 내보낸다는 정책은 수백년간 지속된 정책이었다.

또한 근대라는 개념이 생소한 당대에 당장 개항해서 근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40] 사회 전반이 명나라 이후 유일하게 자신들이 중화 문명의 전통을 이었다는 소중화주의에 젖어있어, 당시에도 청나라를 멸시하고 나아가 서양을 양이라고 멸시했다. 거기에 천주교는 진산 사건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조선사회에서 인식이 최악으로 떨어진 상태. 물론 일부 개화파들을 위시해 개항을 해야한다는 목소리도 있긴 했었지만 이들은 정치적 역량이 없는 소수 비주류들이었고, 그들이 직접 서양에 대한 문물을 접하는게 아니라 청나라에 있던 서양 문물과 서양 사람들과 접촉하는게 한계였으며, 개항을 한 이후 어떻게 근대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41]

설령 개항이 되었다고 해도 근대화를 시키는 과정은 별개의 문제다. 근대화는 단순히 제도의 개혁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국가의 전체적인 법, 제도, 문화, 과학기술, 학문, 시민들의 의식 등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 이미 세도정치로 인해 당시 조선은 상당히 피폐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설사 근대화가 진행된다고 해도 기존의 있던 세력들이 기득권을 잃을 우려로 크게 반발하여 불미스러운 일로 트집잡아 흥선대원군을 실각시켜 근대화가 저지당할 경우와, 그간의 전통과는 파격적으로 달라 근대화 자체를 반기지 않는 일반 백성들, 그리고 그러한 난리통에서 자국의 이득을 꾀하려는 외부세력에 의한 간섭도 고려해야 한다. 반발세력을 통제하면서 각종 불미스러운 일과 변수들에 잘 대처하고 넘보는 외부세력까지 잘 견제하며 전체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 하지만, 그냥 글로 읽어만 봐도 알 수 있듯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일본처럼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당시 조선 외에 근대화를 급속 추진했던 많은 나라들 또한 실패의 길을 걸었다.[42]

즉 개항을 한다해도 근대화는 이미 불투명한 상태였다. 당장 청나라에서도 양무운동이 실패하자 광서제가 캉유웨이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꾀하나 이에 보수파들이 서태후의 원조 아래 반발하여 결국 좌절된 사례가 있다. 이렇게 되면 개항만 하고 근대화는 해내지 못해 사실상 서양세력의 식민지로 직행하는 꼴이고, 이러한 광경을 옆에서 보고들은 대원군이니만큼 개항과 근대화가 별개라는 것은 몰랐을 리 없다.

하물며 당시 상황조차 도움을 주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미 내부세제 등 개혁에 집중하느라 개항 준비에 힘을 쏟기 힘든 상황이었고 거기에 _이미 개혁으로 인해 양반의 세력들이 불만이 엄청나게 쌓여있는 상태였는데, 이들이 서양을 혐오하기까지 하는 상황에서 개항을 추진한다면 결사적 반대에 직면할 것은 뻔한 상황_이었다. 이 반대를 누르려면 개항에 마땅한 명분이 필요했는데, 위에 언급한 천주교 관련 사태들로 사실상 개항의 명분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고, 이 상황에서 개항과 근대화를 강행하면 반대 세력들이 "대원군이 양이와 손을 잡아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려고 한다"는 식의 명분으로 오히려 실각을 당할 수 있었다. 실제 광해군 때 중립외교로 인해 서인들에게 덜미를 잡혀 인조반정이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43][44][45]


9. 세도정치의 종결[편집]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치 않겠다."

흥선대원군

순조 재위부터 세도정치로 조선 사회는 본격적으로 막장이 되어갔다. 임금의 부덕함을 지적하고 모자란 지혜를 더하여야 할 조정은 붕당 정치의 폐해만 심각해져 제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 끝장판은 섭정 형태에 가까운 세도 정치였다.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 후기 몇몇의 유력 사대부들의 권력이 비대화되고, 국가의 총생산을 좌우하는 농민과 상공인들을 위한 정책이 못나오거나 무효화되는 왕조 말기의 흔한 폐단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것을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종결하였다. 이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몇가지 긍정적인 평가 중 하나가 되었다.

세도정치를 끝내기 위해 세도가와 정치적인 협력 등을 통하여 고종을 보위에 앉히고, 능력을 중시하는 고른 인재 등용을 표방하여 조정을 구성하였다.

흔히 잘 알려진 집권 이후 (신)안동 김씨를 살려준 것은 그가 딱히 관대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신)안동 김씨와 정치적인 거래를 한 것도 있었고, (신)안동 김씨가 그나마 능력 위주로 집안을 관리했기 때문에 김병학이나 김병국처럼 실무 행정에 능숙한 엘리트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흥선대원군 자신부터가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천명했으므로, (신)안동 김씨를 깡그리 없애는 것은 자신의 명분도 부정하는 꼴이 된다. 앞서 흥선대원군의 집권 과정에서도 언급했지만, 고종의 즉위는 (신)안동 김씨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였고,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편에 선 것이 '병(炳)'자 돌림의 김병학 - 김병국 형제였다. 무엇보다도 (신)안동 김씨를 완전히 몰아내면 조 대비풍양 조씨가 다시 단독 최대 파벌로 떠오른다. 그야말로 풍양 조씨만 좋은 꼴이고, 조 대비의 의도대로 (신)안동 김씨 학살 + 고종의 왕비가 풍양 조씨가 되는 루트가 되었다면, 이건 풍양 조씨가 종친전주 이씨와 손잡고 세도정치를 재현하는 꼴이 될 뿐이다.[46] 때문에 집권 직후 풍양 조씨의 대두를 막을 세력으로 (신)안동 김씨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신)안동 김씨가 그를 포함한 왕족들에게 그렇게까지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이하전의 사사는 (신)안동 김씨가 악질이거나 그 시대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라,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원래 조선시대 종친에 대한 전반적인 대우에 불과했다.


9.1. 또 다른 세도정치의 시작?[편집]


무엇보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실력으로 몰아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측근세력을 만들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왕은 커녕 아무런 법적 직위를 가지지도 못한 인물이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권력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손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친위세력을 만들어야 했다. 상단에서 흥선대원군이 여흥 민씨를 관리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는데, 만일 흥선대원군이 며느리 명성황후 민씨를 통해서 여흥 민씨를 관리했다면 고종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제 3의 세력을 통해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신)안동 김씨를 몰아낸 것'을 세도정치의 종료로 이해하는 것은, '대원군'이라는 직책에 뭔가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흥선대원군을 왕, 혹은 적어도 상왕으로 은연중에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쥐고 죽을 때까지 유지하면 그 자체로 세도정치일 뿐이다. 왕에게 있어서 자신, 또는 자신의 세력이 아니라는 점은 외척이건, 처족이건, 근친이건 다 똑같다.


10. 서원 철폐[편집]


예조(禮曹)에서, ‘한 사람에 대해 중첩하여 세운 서원(書院)을 헐어버리는 문제는 두 차례의 하교에 따라 신 조병창(趙秉昌)이 대원군(大院君) 앞에 나아가 품의(稟議)한 결과, 「성묘(聖廟)의 동쪽과 서쪽에 배향하는 제현(諸賢)과 충절(忠節)과 대의(大義)를 남달리 뛰어나게 지킨 사람으로서 실로 백세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개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사를 그만두며 현판을 떼어내도록 하라.」는 뜻으로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미 사액(賜額)하여 계속 남겨두어야 할 47개의 서원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 계하(啓下)한 뒤 각도(各道)에 행회(行會)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경기(京畿)의 개성(開城) 숭양 서원(崇陽書院), 용인(龍仁) 심곡 서원(深谷書院), 파주(坡州) 파산 서원(坡山書院), 여주(驪州) 강한사(江漢祠),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김포(金浦) 우저 서원(牛渚書院), 포천(抱川) 용연 서원(龍淵書院), 과천(果川) 사충 서원(四忠書院), 양성(陽城) 덕봉 서원(德峰書院), 과천(果川) 노강 서원(鷺江書院), 고양(高陽) 기공사(紀功祠), 충청도(忠淸道)의 연산(連山) 돈암 서원(遯巖書院), 홍산(鴻山) 창렬사(彰烈祠), 청주(淸州) 표충사(表忠祠), 노성(魯城) 노강 서원(魯岡書院), 충주(忠州) 충렬사(忠烈祠), 전라도(全羅道)의 태인(泰仁) 무성 서원(武城書院),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 장성(長城) 필암 서원(筆巖書院), 경상도(慶尙道)의 경주(慶州) 서악 서원(西嶽書院), 선산(善山) 금오 서원(金烏書院), 함양(咸陽) 남계 서원(藍溪書院), 예안(禮安) 도산 서원(陶山書院), 상주(尙州) 옥동 서원(玉洞書院), 안동(安東) 병산 서원(屛山書院), 순흥(順興) 소수 서원(紹修書院), 현풍(玄風) 도동 서원(道東書院), 경주 옥산 서원(玉山書院), 상주(尙州) 흥암 서원(興巖書院),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 진주(晉州) 창렬사(彰烈祠), 고성(固城) 충렬사(忠烈祠), 거창(居昌) 포충사(褒忠祠), 강원도(江原道)의 영월(寧越) 창절 서원(彰節書院),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 금화(金化) 충렬 서원(忠烈書院),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 청성묘(淸聖廟), 배천(白川) 문회 서원(文會書院), 장연(長淵) 봉양 서원(鳳陽書院), 함경도(咸鏡道)의 북청(北靑) 노덕 서원(老德書院), 평안도(平安道)의 영유(永柔) 삼충사(三忠祠), 안주(安州) 충민사(忠愍祠), 영변(寧邊) 수충사(酬忠祠), 평양(平壤) 무열사(武烈祠), 정주(定州) 표절사(表節祠)이다.】

고종실록 1871년 3월 20일 기사


세도 정치 혁파의 일환으로 부패한 유림들을 일깨우기 위해 서원 철폐도 단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초기 개혁 행보는 유력 사대부들이 왕실과 결혼을 통하여 간섭하거나 섭정하면서 왕권을 약화시키고, 그렇게 취한 권력을 개인 치부에 사용하거나 기득권 보호에 사용함은 물론, 지방 유림들은 공자의 가르침은 누구보다 잘 안다면서 백성의 삶은 잘 모르겠고 그저 개인 치부에만 몰두하며, 조세나 병역은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문자 그대로 쓰레기 같은 귀족계층으로 전락하였다고 보고 추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서원 철폐 자체는 상당한 개혁이라고 볼 수 있으나 삼정의 문란이 극복되지는 못하였고,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의 여러 병크를 물고 늘어지며 상소를 올리자 결국 하야하게 된다.

물론 서원 철폐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어 고종도 만동묘를 복구해준거 하나 빼고는 싹 다 개무시했다. 그나마 만동묘도 관 위주로 운영토록 하여 유림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철저히 막았다. 심지어 유림들마저 서원의 병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인지 소심하게 중요 서원들만 복구를 청했지만 이마저도 싹 다 씹혔다.


11. 경복궁 중건[편집]


왕권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이뤄진 경복궁 중건 사업은 후대에는 일단은 업적으로 분류되는데 조선은 말아먹었어도 대한민국에 문화 유산은 남긴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을 당시에는 낭비라는 만 들어먹었지만 정작 후대에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관광 자원이 된 건축물들이 몇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광화문과 경복궁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 또한 흥선대원군 덕분이다. EBS 신병주 교수의 역사이야기 편 참조[47] 특히 실책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에 시대상과 현실을 고려할 것을 주문하면서 정작 경복궁 중건 부분은 현대에 관광 자원으로 활용이라는 현대적인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48] 무엇보다 현대적인 관점으로 평가를 하게된다면 상단의 '당백전 발행의 실패'는 환투기, 청전 밀수, 화폐간의 명목가치를 빙자한 폰지사기, 과장을 조금 더 보태면 위조지폐 사범이라도 된 듯한 초인플레이션까지, 심각한 사항들을 배제할 수 없는 인물이다.

중건하는 도중에 운이 없었는지 초기에는 신분 차별없이 걷은 원납전을 통해 자금을 충족하고 부역도 신중하게 정한 데다 위로금도 지급하여 순탄하게 건설되었으나 중건 시작 후 1년쯤에 화재로 그동안 만들어놓은 전각왕릉에서 벌목해 쌓아놓은 목재가 다 타버리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것이 총지휘자였던 흥선대원군이 무리하게 당백전을 발행하면서까지 자금을 마련한 원인이다. 그럼에도 공사에 쓸 자재가 부족했던지, 돈의문에 있던 이궁 경희궁을 철거하고 그 부재가 경복궁 공사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서궐도》 속의 경희궁의 모습이 다 날라가 버렸다. 또 사유지의 목재와 석재까지 허락 없이 싹쓸이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고생하며 만든 경복궁을 정작 집 주인인 고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이든 뭐든, 엄청난 인력과 재원이 필요한 대공사는 국가 경제 사정을 봐가면서 해야 한다. 그런데 경복궁을 중건하려던 시기는 수십 년에 걸친 삼정의 문란으로 국가의 재정이 바닥을 친 상황이었다. 또한 중건을 시작하자마자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경복궁은 경복궁대로 계속 짓고 국방은 국방대로 지출되는 봉록의 부담만 가중되었다. 경복궁 자체는 왕권을 강화하자는 목적에 비하여 너무 많은 재정이 필요했다. 경복궁 중건을 고집한 탓에 당백전을 발행하는 희대의 실정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화폐 불신이 심화되었으며 거둔 세금의 가치도 절하되었다. 이것은 열강 개입 이후 외세의 말도 안 되는 폭리와 여러 사업권의 헐값 매각에도 영향을 준다. 경복궁 재건은 일제강점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경복궁 재건에 쏟아부은 엄청난 때문에 조선의 국력은 그만큼 쇠락해졌고 일본 제국은 그만큼 손쉽게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왕권은 중요하지만 그런 공사를 하려면 그에 맞게 경제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 놓은 뒤에 해야 했다.

각주들이 추가되기 전의 경복궁 중건에 대한 평가는 원납전당백전을 사용할 정도로 과하게 진행된 시대 착오적 왕권 강화책 정도가 고작이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대충 이 정도로 적혀 있다. 하지만 각주에도 적힌 것처럼 경복궁 중건은 평시 조선 조정 1년 예산의 12년치 분량의 자금을 쏟아붓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이보다도 더 들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760만 냥이라는 돈이 경복궁에 들어간 돈의 총액이 아니라 경복궁을 짓기 위해서 설치되었던 영건도감에서 발표한 원납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백성들과 양반들에게 거둬들인 돈이 720만 냥, 왕실과 내하전에서 내놓은 것이 35만 냥이었다. 760만 냥이 어느 정도 거금인가 하면 당백전을 발행하기 이전에 유통되던 조선의 공식 화폐인 상평통보의 총액이 약 1,000만 냥이다. 더구나 당백전과 청전으로 얻은 이득, 부역, 벌채, 결두전이나 통행세 등은 세지도 않은 액수다. 물론 이게 다 경복궁 중건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나 조선 후기의 연간 세입 규모가 현물과 화폐를 통틀어 60만 냥 정도였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정말로 엄청난 규모인 것이다.


12. 을미사변#흥선대원군의 가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을미사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기타 비판[편집]



13.1. 권력욕[편집]


정치인이 권력욕이 있다는 것 자체는 지극히 정상이고,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권력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잡으려는 것은 문제이다. 이 때문에 평가가 크게 갈리는 집권시 행적과는 달리 실각 이후는 압도적으로 불호가 많다.

그런 면에서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의 활동은 문제가 많다. 그는 정권을 다시 잡으려고 꾸준히 쿠데타 시도를 하였다. 국왕의 생부라는 점에서 "재집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만, 사실 그럴만한 법적, 절차적 정당성은 전혀 없었다. 고종이 성년이 되면서 대리청정(그나마 공식적인 지위도 아니었다)이 끝나면, 흥선대원군은 물러나서 후견인으로만 존재하는 게 합당하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세종 초기 태종처럼 상왕같은 위치에서 집권하려고 하였으니, 국왕인 고종의 측근 세력과 대립한 것은 당연한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왕실 내부의 문제가 외국 세력들이 꾸준하게 이용하는 전가의 보도가 되었다는 점도 문제이다. 더욱이 이때 흥선대원군의 행보를 보면 정권 장악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면 그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는 등 극도로 기회주의적이었다. 강경하게 척화를 부르짖었던 사람답지 않게 일본 세력과도 기꺼이 연계하였으며, 심지어 자신이 혹심하게 탄압했던 천주교 쪽에 손을 내미는 듯한 모습[49]까지 보인다.

결국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대립 과정에서 왕족은 분열되었다. 그리고 고종과 대립했던 흥선대원군 계파는 황당하게 이후 친일로 넘어갔다.[50] 사실 고종의 친정 이후, 고종과 대원군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사실상 부자 관계는 남아 있지 않고 정치적으로 원수가 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결국 권력 회복 시도는 국가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만들어, 안 그래도 나쁜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들었다. 기실 조선왕조의 멸망은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 중에서는 흥선군+왕족 VS 고종+민씨 척족의 갈등도 있었고 실제로도 흥선군 편의 조선왕족들은 이후 매국노가 되는 일이 많았으며 이 모든 원인이 실각 이후의 행보도 문제지만 당시로서 성인이 된 후에도 권력을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가장 큰 책임이 크다. 흥선대원군의 파트너인 조대비도 15세가 되자 수렴을 그만뒀고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조선왕실사에서 20세까지 수렴청정이라도 한 경우는 성종뿐이라 흥선대원군 역시도 안 그래도 대원군이라는 애매한 지위라 공식적 실세 노릇하기엔 모자란데 그렇다면 더더욱 정석적으로 행동해야 했지만 오히려 왕이 성인이 되고로 권력을 놓지 않는다는 악수를 두었고 이는 고종이 흥선대원군이 애써 배제한 외척을 끌어들여 권력을 회복하고 이후 민씨 척족의 만행, 백성들의 고난, 이에 따른 흥선대원군 일파의 음모 등이 이어졌다. 이러니 흥선대원군이 욕을 먹어야 할 수 밖에 없다.


13.2. 외교 정책[편집]


또한 당시 세계사적 흐름을 감안하고 보면,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평가할 게 거의 없다. 조선의 외교 행정 체계는 서양과 통교 기간이 꽤 된 청나라에 크게 뒤쳐졌고, 이것이 고종 집권기 열강들(특히 일본)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서 조선에 크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 이후 조선과 비슷한 수준의 쇄국을 유지하며 뒤떨어져 있던[51] 중 서양의 개항 압력과 일본 내부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메이지 유신이 벌어졌다. 메이지 유신은 개혁 집권 세력이 근대화의 필요성과 서양과의 통상 수교 필요성을 인정하고 추진한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일본은 통상 교역만 하며 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던 청과 달리 빠르게 근대화를 이룩하여 경제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고, 자신들이 서양의 외교법에 무지하여 개항과 통상 수교를 하며 당했던 불평등 조약들을 조선에 그대로 이용해먹었다. 흥선대원군이 일본보다 앞서거나 동시에 서양과 통상 수교를 시작하였다면, 만약이 없는 역사라고 하여도 무능한 껍데기 개혁가 흥선대원군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혁명적인 개혁가로 남을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며, 조선이 일본에 종속되는 한이 있어도 국가를 유지했을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정치적인 목적과 서양세력이라는 '외부의 적'을 내세워 정권유지에 쓰기 위해 서양과의 통상수교를 전면 거부하고 되려 척화비를 세우며, 집권 내내 내정에만 집중했다. 그나마도 100년 넘게 묵은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만큼의 성과도 없었고,[52] 천주교 박해 및 조선 후기에 세력을 키운 세도가와 권력 쟁탈에 몰두하는 게 전부였다. 서양의 개항 요구는 조선도 횟수와 강도는 일본보다 적기는 하였으나 분명히 있었음에도 아무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도굴 사건 한 번 정도로 서양 세력의 요구에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는 것은 그 안일함과 무관심이 다른 선대 암군들보다 다를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에도 조선과 비슷한 생각으로 서양에 배타적인 세력이 강성했음에도 당시 집권 세력이 서양과의 통상 수교 필요성을 인정하여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것인데, 흥선대원군은 개혁가라는 평가를 달고 있음에도 비슷한 행보를 한 것이 전혀 없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흥선대원군이 정말 진지하게 주변국 정세에 무관심하여, 일본메이지 유신 이후 국호를 바꾸고 천황 명의로 문서를 보내자 일본을 자극하여 일본에서 정한론이 득세하는 빌미를 준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멍청한 화폐 정책과 쇄국 정책, 그리고 일부 성과를 거둔 세법 개혁 정도로 '자강의 노력을 한 개혁가'라는 과찬을 하는 사람들은, 조선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흥선대원군 시기의 조선은 거의 300년 전에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을 겪었고, 청나라에게는 200여 년 전에 쳐맞은 다음 알아서 긴 상태였다. 왕조 교체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조선이 엄청난 풍요를 누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청나라와 일본 양국의 정세 파악에 아무런 관심이 없음은 물론 일본의 변화가 외교 문서로 전달되는데도 노발대발하며 반려하고 그게 끝이었다. 물론, 조선 입장에서 하등한 섬나라 왜인들이 중화 천자에 맞먹는 천황을 칭하니 노발대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 군주나 개혁가가 맞다면 일본이 어느 정도 깜냥이길래 청나라 황제에 맞짱뜨는가를 살펴야 하는 게 아닐지?

세계사적 시점에서 흥선대원군을 평가해야 한다. 개혁개방이냐 아니면 쇄국이냐 이 선택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갈릴 중요한 시기에 그가 조선을 다스렸고,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근대화 시기를 활용하지 않아 일본에게 완전히 합병되게 한 여러 원인을 제공[53]하였으므로, 그의 시대적 과오를 재조명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묘호가 똑같은 고려 고종은 1231년부터 1257년까지 몽골(원나라)과의 전쟁에서 전 국토가 유린되며 작살났어도 조정을 유지한 채로 강화하여 고려라는 국가와 국호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조선 후기 조정의 총체적 문제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에 더하여 외교적 감각이 없어서 나라를 못 지켰다. 뿐만 아니라 수탈당하는 농민들을 구제하는 데 끝내 실패하였다

13.2.1. 반론[편집]

위에서는 흥선대원군의 외교 정책에 비판하고 있는데 요점은 크게 2가지다. 첫 번째, 일본과 달리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지 않은 점 + 서계 사건에 대한 대응, 2번째 외국 정세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무지이다. 그런데 위의 비판에는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결과론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있어 주의할 필요가 있다. 후술할 내용에서는 당대의 관점을 고려하여 서술하였다.

첫번째, 흥선대원군이 일본처럼 적극적인 유신을 하지 않았다. → 당시 조선일본의 정치 환경이 달랐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단순히 외국 문물에 대한 개화뿐만 아니라, 천황의 친정을 복구한 것이었다. 개화 세력은 프로이센제국주의를 모방하여 천황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는 물론 천황이 정말로 절대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천황의 뒤에서 조슈 번사쓰마 번이 천황의 간판을 이용하여 호가호위한 것이다. 에도 막부 시기에 조선에 비해 중앙 집권 수준이 약했던 일본이었기에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천황을 위시하여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에 이러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에 반해 조선은 세도정치로 문란해지긴 했어도 흥선대원군의 집권 아래 중앙 집권이 빠르게 복구되었고, 조세 제도의 개혁 성과는 이러한 기반 아래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서계 사건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당시 쓰시마 도주 소 요시아키라가 전달한 외교문서 서계와 일본 정부의 국서 초안은 동래부 왜관을 거쳐 동래부에 전달되었다. 이때 서계에는 일본 황실을 황실, 천황의 명령을 받는 것을 봉칙이라 하였다. 그간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관계 아래 교류하였는데 유신 이후 뜬금없이 자신들이 조선의 상국 행세를 하니 외교적 결례가 아니겠는가? 단순히 섬나라 왜인들이 참람하게 황제의 칭호를 써서 조선이 오버했다는 서술은 지나치다. 더군다나 전년이었던 고종 4년(1867)에는 청나라에서 어느 일본인이 홍콩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공설을 퍼뜨려 물의를 빚은 사실을 통보한 바도 있었다.

..."근래 일본국의 군사력이 자못 강해져서 현재 80여척의 화륜선을 보유하고 있고 장차 해외에 있는 조선을 침공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고 했다"- 『일성록』 고종 4년 3월 7일자 기록


위 의구심과 더불어 조선 조정과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충분히 경계할 만한 사건이었다. 단순히 서계 사건을 조선의 실책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또한 외국 정세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무지에 대해서도 해명할 거리가 있다. 조선헌종, 철종 대를 거치며 2차례 아편 전쟁에 대한 내용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내에서도 이미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상소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프랑스가 선뜻 통상을 하자고 하면 흥선대원군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옆 나라 중국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서양 국가들이다. 흥선대원군으로서는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비유를 하자면 옆집을 턴 강도가 우리 집에도 왔는데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통상 정책을 거부한 것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서양 세력은 조선 내 천주교 세력과 연계하여 밀입국을 시도한 적도 심심찮게 있었다.[54] 조정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체제를 무너뜨리려 한 경계 대상이었다. 통상을 하더라도 문제였다. 조선과 서양은 대등한 위치에서 통상을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자원이 척박했던 조선에 비해, 서양은 모든 문물이 우수하였다. 강화도 조약 당시 최익현상소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저 적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모두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면서도 기이한 노리개이고 손으로 만든 것이어서 그 양이 무궁한 데 반하여, 우리의 물화는 모두가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이고 땅에서 나는 것으로 한정이 있는 것입니다."최익현 '''-『면암집』권 3 「지부복궐척화의소」


이러한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의 선택지는 통상 거부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당시 그것은 조선에게 있어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 물론 흥선대원군이 통상을 거부할 때,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을 통해 서양 기술을 일부 받아들여서 자주적으로 대처할 능력을 갖추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통상 거부 외의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일본메이지 유신 이후 국호를 바꾸고 천황 명의로 문서를 보내자, 앞뒤없는 사대주의로 일본을 자극하여 일본에서 정한론이 득세하는 빌미를 주었다는 것도 비약이다. 외교라는게 국가를 대표하는 일이기 때문에 옛부터 정치나 외교적인 일에서 언행과 감정, 예절으로 인해 문제되는 일들이 다분했다. 심지어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전쟁난 경우도 역사에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고, 지금도 어구 하나 하나로 국가의 이익이 오락가락한다. 그런데 황제 칭호조차 과분한 것을 '하늘의 황제(천황)'라는 대단히 오만한 칭호를 쓴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중국황제도 자국 황제를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라 칭하던 때인데 말이다.

그리고 조선일본이 자국의 (명목상) 지도자를 천황라 칭하는걸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성호 이익이 먼 훗날의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고했을때 일본의 천황를 '왜황'이라 칭한 바 있다. 이익은 일본에 다녀온 사람도 통역관도 그렇다고 중앙정계에서 한 실력 했던 인물도 아니었고 단지 지방에서 학문을 닦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도 알 사실을 조선 조정에서 모른다는 사실은 말이 안된다[55]. 즉 이미 천황이라 칭하는걸 알고는 있었지만 일단 서계에는 그렇게 쓰지 않았으니 넘어갔던 거지만, 아예 서계에서부터 천황이란 표현을 써서 문제삼은 것일지도 모른다. 병자호란 시기 최명길이 대간들의 탄핵을 받았던 것도 "오랑캐 칸을 '청국 황제'라 하여..." 라는 이유도 있었는데, 외교 절차상 결국 호칭 문제는 조선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56][57]. 조선은 아직까지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일본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점은 조선은 그 동안 세도정치라는 사회적 때문에 제 아무리 흥선대원군일지라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세도정치를 옹호했던 기득권층은 아직도 건재하고 거기다 여전히 소중화 사상을 버리지 못하여 근대화 정책에 여전히 반감심에 거부감까지 들던 사람들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정치라는 것도 자신의 권력 지지가 있어야 실행할 수 있는데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조선을 먼저 내부를 잡고 힘을 키워놔야 개화를 하더라도 그나마 온건적인 방향으로, 위의 비판하는 의견처럼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세도정치는 무려 60년(짧게 잡아도 30여 년)에 걸쳐 일어났고 그 동안 일어났던 부정부패로 망가진 조선의 군사, 정치, 경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민심 거르고, 적극적인 개화를 선택해도 앞으로의 미래는 굉장히 불투명해질 수 밖에 없다. 한 번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근대화가 무작정 개방한다고 바로 뚝딱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근대화가 가져오는 부작용으로 나라가 더 피폐해지는 상황도 생기는데 당시 내정 상황이 좋지 못한 조선이 무작정 개방을 하게되면? 농담이 아니라 나라가 그대로 망할수도 있다. 이렇기에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큰 리스크를 짊어질 바에는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나을거라 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흥선대원군 자신의 움직임에도 제약이 있던것이 당장의 조선 내정 모든 문제인 세도정치를 뿌리뽑겠다고 서원 철폐, 만동묘 폐쇄를 단행했다 결국 탄핵을 받아 하야해야 했고, 이후 실권을 장악한 고종은 조선의 내부실정을 잘 살펴보지 않고 개방하여 일본에게 강화도 조약을 맺었는데 어떻게 보면 흥선대원군 정책의 반대로 가는 정책이였지만 오히려 백성들은 먹고 살기 더 힘들어졌다[58]. 열강들이 더 빼앗아가고 혹사시켜버린 덕에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고 기득권층들은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아예 나라를 팔아먹기까지 하였다.

정리하자면, 흥선대원군의 목적은 조선의 내정 안정이었지만 이미 여러대에 걸쳐 부정부패가 심화되고 막장국가로 달리고 있던 당시 조선의 상황이 크게 좋지 않아 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민생 안정책과 무리한 경복궁 중건으로 오히려 나라 경제를 망치는 등 본인의 실책이 겹쳐져 그의 개혁은 모두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사의 중심에 서있는 흥선대원군은 그 자체로 논쟁거리가 많은 사람이다. 공과 과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어떤 식으로 결론을 내리든 오늘날의 관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을 고려하여야 생산적일 것이다.

14. 당대 사람들의 평가[편집]


인물은 인물이었는지, 당시 외국에서도 제법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선의 정치가였던 셈. 외국인들의 평가를 대충 종합해 보면, 과격, 완고, 보수적이지만, 투쟁적이고 카리스마를 갖추었으며 능력도 있었던 정치인 정도로 귀결된다.

한편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의 보고서는 임오군란(1882년) 직후에는 '그의 성품이 간교하고 포악하다'고 했다가, 2년 뒤 갑신정변 직후에는 '조선인은 모두 문약하나 이하응만은 효웅(梟雄)이다'라거나 '그의 재기(才器)는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극찬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나 외국 사신들의 기록에 의하면, 키는 작고 얼굴은 얽었으나 그 목소리나 품행이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평했다.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흥선대원군을 이렇게 평가했다.

석파(대원군의 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항상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아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대원군이 사망하자 당시 주한미국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은 국무장관에게 한 보고에서 대원군을 이렇게 평했다.

대원군은 잔인하고 배타적이었으나, 항상 자기 나라에 대해 정의와 진실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인들과 손잡고 왕비를 시해할 때까지 그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국민 대부분은 그가 다시 권좌에 오르기 바랐습니다. 최근에 그의 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이 사망했는데, 이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898년 미국의 언론지인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에서는 "강철같은 의지와 확고한 목표를 가졌던 인물"이라고 했으며, 역시 미국의 언론지인 《보스턴선데이포스트(Boston Sunday Post)》지에서는 대원군을 가리켜 "철석(鐵石)같은 인물(Bowels of iron and heart of stone)"라고 묘사하고 있다.

황현은《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대원군 이하응은 10년을 집권하는 동안 공과가 반반이었다. 갑술년 이후 명성황후와의 사이가 날로 악화되어 여러 차례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10여 년간 두문불출하는 동안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뭇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번번이 좌절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경륜이 쌓여서 이름이 외국에까지 알려졌으며, 조야(조정과 재야)가 그를 대로(大老 : 나라의 원로, 큰 어르신)로 의지했다. 그가 죽자 모든 사람들이 다 슬퍼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대원군을 매우 고평가했다.

흥선대원군은 용맹하고 과감하며 번개처럼 빠르고 변통에 능했으니, 실로 정치사상 대혁명가라 할 수 있다.


확실히 여러 기록으로 미뤄 보면, 당시 백성들에게 '운현 대감'은 그야말로 애증이 교차하는 존재였던 듯하다.
[1] 오카 요이치(岡庸一), 『최신한국사정(最新韓國事情): 한국경제지침(韓國經濟指針)』, 高山堂, 1903, #[2] 애초 이런 나라는 출산률은 높은데 일자리는 적다 보니 외노자로 가는 경우가 많다.[3] 중국의 경우 영국이 무역에서 손해를 본 것이 단순한데 중국이 안 사줬다. 예시로 면직물의 경우 중국에도 있는 것이고 중국의 인건비가 워낙 싸서 영국산 면직물이 가격경쟁이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공산품을 수출하자니 그건 수요가 별로 없었고...[4] 최소한 중국은 공산당이 들어섰기에 1세계에서는 중국인을 수급하기 어려웠다. 타이완,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가 있긴 하지만 여기는 지금 인구를 다 합쳐도 3700만밖에(현 한국 인구의4/5) 안된다.[5] 직계 왕통으로 입양 가서 즉위한 왕의 친아버지는 법적으로는 왕의 직계가족이 아니기에 그냥 일반 왕족과 다를 것이 없다. 단 대원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대원군이라는 작호는 그래도 인정상 낳아준 친아버지를 다른 듣보잡 왕족과 같은 대우를 할 수는 없기에 예우 차원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6] 조선 전기 경국대전이 편찬된 이후 왕의 아들이나 가까운 직계혈족들은 정치적인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에 따르면 대원군이 정치를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이 작위는 대체적으로 사망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기에 살아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한 규정이 없었다. 또한 왕의 친부가 아들을 돕겠다는데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어렵고, 왕이 대원군 말에 따라서 국사를 추진하면 신하들로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7] 흥선대원군의 섭정은 당대에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최익현이 상소에서 "다만 이러한 지위에 있지 않고 다만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그 지위만 높여주고 후한 녹봉을 줄 것이며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면서(若其不在其位, 而惟在親親之列者, 只當尊其位, 厚其祿, 勿使干預國政。)"라고 한 게 바로 흥선대원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상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생부라는 지위 때문에 고종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대원군을 몰아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8] 정작 문정왕후를 포함해서 대비들의 상당수는 수렴청정 끝난 다음부터는 정치에서 물러나기 때문에 이후 행적의 공과는 국왕에게 돌아간다. 여왕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는 문정왕후도 수렴청정 거둔 뒤에는 정치에 공식적으로 개입한 흔적이 없다. 진짜 예외라면 친정가문이 몰락하거나, 몰락한 친정가문의 복권 때문에 호소를 하는 사례 정도이다. 예를 들어 경신환국으로 친정이 망할 지경이 되자 상황을 뒤집어 엎은 명성왕후가 대표적인 예인데 이 때 명성왕후는 자살 드립까지 쳐야 했다.[9] 일본사의 인세이는 구한말보다 거의 1천년 전이기 때문에 실제로 근대 일본학계에서 정체성론(한국사가 발전이 정체되고 근대 초기까지도 고대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주장) 드립칠 때 이걸 써먹었다. 세도정치헤이안 시대에 가져다 붙이고 흥선대원군을 인세이에 두면서 그 배경을 헤이안 시대에 이어붙인 것이다.[10] 흥선대원군은 왕족들에게 과거의 최종 시험인 전시를 예비시험 초시와 본시험 복시를 보지 않고도 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는 직부전시를 실시해서 무리하게 자기 측근세력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고종은 대부분의 왕족도 배척해야 했다. 결국 고종 직계를 제외한 대부분 조선 왕족들은 모두 친일파로 넘어갔다.[11] 병조는 자신이 직접하고 나머지는 돕겠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상 태종이 다 해먹었다. 이 시기에 신하들과 의논을 하고 세종이 내린 결론은 상당수가 "상왕과 의논하고 결정하겠다" 수준이었다.[12] 세종 3년부터는 정종이 승하하면서 상왕에서 태상왕으로 바뀐다.[13] 영조 때도 서원 일부를 폐쇄한 적이 있고, 군포 부담이 과중하다하여 균역법을 실시한 적이 있다.[14] 경주 최부잣집 가문이 그토록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들만이 대대로 기근때 농민들을 구제했기 때문이다.[15] 조선의 조세체계에 따르면 모든 양인들은 과세대상자다. 그리고 조선의 신분체계는 법적으로 良人과 賤人 이 2가지밖에는 없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양반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군역을 담당해야 했다.(학생인 경우에는 지금과 같이 학습이 끝날때까지 군역 담당을 뒤로 밀수있었을 뿐이고, 관리는 면제 대상이었다.) 또한 서원은 그 자체로 면세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교육 진흥차원에서 국가에서 지원해주던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변질되었다.[16] 전투는 미군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으나 전략목표였던 조선의 개항을 달성하지 못했고 추가 증원이 없는 원정군 규모로 조선 전체와 전쟁을 벌이기는 어려움을 느껴 철수했으므로 조선의 전략적 승리는 맞다. 흑선 내항 한방에 손발들고 개항한 일본처럼 조선도 위력시위를 통해 쉽게 개항을 이룰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던 미국의 오판이 1차적 이유.[17] 참고 : 이재은, 구한말 근대적 지방재정제도 도입 과정에 관한 연구, 2014년[18] 물론 1860~1870년대의 조선은 문호 개방 이전이라 상호간에 사신이 오간적도 없었고 당시의 서양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도 청에서 들여온 서적정도가 전부였다는걸 감안해야 한다.[19] 실제로 해당 설명은 쓰시마 해적과 유사하다.[20] 해당 서적은 이미 오경석이 사행길에서 많이 구해다 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김병학은 강화도 조약에도 반대했던 인사다.[22] 에도 막부조차 임진왜란 직후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쇄국을 할지언정 서양과의 교역 항구는 지정하여 제한적으로 유지했고, 그 덕분에 증기 동력선의 존재를 일찍 확인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일본은 1853년 쿠로후네 사건 직후 자체적으로 증기 동력선을 모방 건조하기 시작했고, 겨우 40년 만에 양적 팽창을 지속하던, 수치로도 외견상으로도 일본을 압도하던 해군기술력을 자랑하던 청나라와의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동아시아 최강 패권국으로 거듭났다. 메이지유신 전부터 일본이 증기선을 모방 건조했다는 것은 민간 차원의 교류도 기술 혁신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시사하는 바이고, 16세기 이후의 세계사에서 적당한 개방과 소통이 국가 운영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를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이다.[23] 게다가 매우 안타까운건 조선은 이장손이라는 군사기술자 장인에 의하여 매우 혁신적인 신식 포탄인 비격진천뢰를 실전에서 사용하였는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에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낸 것보다 무려 2세기 앞선 것이었다. 비격진천뢰에 영감을 준 진천뢰라는 무기는 투척식 폭발탄으로서 출현 시기가 매우 오래된 화력 무기였지만, 이 무기를 포탄으로 발전시킨 것만 봐도 조선 초기까지 매우 진보적인 군사 기술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은 이런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최강의 화력무기를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인 문제를 이유로 군사 무기 발전에 소홀히 했고, 망할 때까지 이런 혁신적인 무기들에서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아서 정체되었다.[24] 아무리 무기가 강력해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구식 무기가 편해 계속 사용하던 전쟁사적 사례가 있듯이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도 신식 무기를 사서 쓰고 싶지만 훈련도 훈련이고 무엇보다 화승총 등의 총기 무기로 계속 훈련해왔던 조선군인데 갑자기 신식 총기로 쓰라고 하면 그만큼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거기다 흥선대원군 시기는 갑작스러운 급개혁을 추구했던지라 무기까지 새로 바꾸어 훈련시킬 여력이 없었다. 당장 양무운동 혁명처럼 무기가 당시 세계최강 수준이었다 한들 그 무기를 다시 훈련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신식 무기에 대한 훈련 하는 시간이 부족 하면 무기는 그저 장신구일 뿐 구식 무기만도 못한다.[25] 당장 문을 곧장 개방한다고 해도, 그 나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야 나중에 어떤 외교사항을 내밀때 이걸 대처할 수 있다. 외교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상당히 복잡하다. 거기다 국제 정세랑 상대가 원하는 것과 자신들이 손해보지 않는 등의 일종의 사업관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군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척화를 했던 조선이 갑자기 개방한다 해도, 지식이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흥선대원군일지라도 조선은 내내 척화정책 때문에 서방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었다.[26] 무기 사온 것이나 전기회사 만들고, 전철 깐 것 등을 고종의 취미 수준으로 취급된다.[27] 조선시대는 지방군의 상당수는 중앙에서 봉급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돈 벌 수단을 마련해줬다. 한양의 군대는 난전을 벌였고, 강화도 군대는 지방 영주라도 된 것처럼 한강으로 올라가는 배들에게 통행세를 받으며 삥을 뜯으며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게 경강수세이다.[28] 그러나 더 문제되었던 것은 당연히 세도 정치와 각 지방관료들의 부정부패였다. 거기다 고종과 명성황후도 세도 정치를 부활시켜버렸기에 정치가 그야말로 전쟁터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었고 가뜩이나 어려웠던 군비지급이 임오군란 계기 때 폭발한 것이다.[29] 토지에 붙는 추가적 세금이다. 토지 1결당 100문을 더 걷었다. 이건 그냥 증세다. 토지세가 결국 하층 농민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거야 새삼스럽지도 않고.[30] 좀 쉽게 설명하자면 내가 금, 은, 구리를 가치있게 생각하는 만큼 남들도 금, 은, 구리를 가치있게 생각했기 때문이란 거다.[31]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대침체가 있다. 금융시장의 성장은 계속되었으나 실물시장(대표적으로 부동산)은 성장이 둔화되거나 오히려 축소되고 있었고, 그 결과 거품이 발생하게 되어 거품이 사그라들자 다 폭삭 주저앉아버린 경우이다.[32] 화폐의 고정적 가치를 담보할 수 없다는 뜻.[33] James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202.[34] 황현은 정부 관료도 아니고, 경제적 지식은 더더욱 없다. 있는 지식이라고는 대원군 집권기에는 정부에서 큰 공사도 벌이고 이것저것 했는데도 문제가 없더니, 고종이 친정하더니 돈 없다고 난리더라는 것뿐이었을 것이다.[35] 오카 요이치(岡庸一), 『최신한국사정(最新韓國事情): 한국경제지침(韓國經濟指針)』, 高山堂, 1903, #[36] 다만 대동법 같은 경우 당시 운송 수단의 한계로 인해 오히려 수량이 맞지 않으면 다시 올려야 했기 때문에, 운송하는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점의 측면이 크다.[37] 사실 지금도 재벌들의 자제의 병역기피가 뜨거운 감자이며, 미국도 옛날에 전쟁에 군대에 가서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매도하고 비난했다는 점을 봤을 때, 옛날이나 지금이나 상류층의 병역의 의무에 대해 대단히 민감했다는 점을 알수 있다.[38] 분명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숭명은 국력 차이로 인해 명나라를 무시할 수가 없으니 나온 외교정책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조선 초까지만 해도 명나라의 순장 풍습을 왕과 신하들이 대놓고 비웃거나 외교 사절단을 절도사가 알아서 돌려보내는 등 명나라를 견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림파의 득세와 임진왜란 이후로 숭명사상은, 단순히 외교에서 명을 중요시여기는게 아닌, 정말 명을 자신들보다 더 상위의 존재로써 숭배하는 사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39] 물론 조선 조정이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내지 않게된 것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도 있고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쇄국 정책 이전까지 조선 조정은 통신사를 통하여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는 것을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590년의 통신사를 통하여 센코쿠 시대가 막바지에 이르는 것을 보고받은 선조는 비록 황윤길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류성룡과 본인이 직접 파격 인사를 통하여 이순신이억기를 남해안에 배치하여 전력을 크게 보강하는 등, 주도권을 쥐고 있던 남인들의 안일한 주장에도 남인의 의견을 헛되이 흘려듣지 않고, 후일 나라를 구하는 이순신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을 재배치하여 완전히 망할뻔 한 상황을 피했다. 원균 등의 치명적인 인사 실책도 있었으나, 다행히 이순신의 능력이 천행에 가까웠던 덕분에 어찌 커버할 수 있었다. 일본은 정권을 잡은 막부가 조선의 통신사를 맞았는데, 당시 명을 거친 조선의 (최신) 문물을 소개받거나 값진 소정의 선물을 받고 막부의 권위를 높이는 정치적 도구로 상호가 이익을 취했기 때문에 이런 외교 행사는 영조 재위 1763년까지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고, 대마도에서 끝나버린 순조 재위 1811년의 통신사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많은 비용이 들었기에 자주 이루어지진 않았으나, 주변국의 정세를 살펴 평화로운 치세를 도모하려는 기본적인 개념은 탑재하고 있었던 조선 조정도 세도 정치가 극에 달하여 권력 다툼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않으려 한 것은 사실이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이후에도 이런 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40] 하지만 이 시기엔 서양이 잘나간다는 사실은 두번의 아편전쟁으로 충분히 알려져 있을 때다 필요성 정도는 충분히 인식하였다.[41] 다만, 진산 사건과 백서 사건 때문에 정조 때 꽃 피우던 실학과 천주교의 사상이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이건 그들의 자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것 때문에 조선은 한동안 척화와 천주교 박해라는 폐쇄 정책이 펼쳐졌고 만일, 이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적어도 개화를 할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역사는 만약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적어도 조선의 개화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든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42] 당장 단발령을 시행하려고 하자 조선 백성들이 반발했다거나 화장을 거부하는 등의 사례를 보면 근대화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43] 물론, 광해군은 겉으로는 중립외교였지 사실상 속으로는 명과는 친하면서 청을 서서히 압박하는 식으로 후미를 위협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광해군참조.[44] 거기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서로 둘 다 기득세력 층과 맞서는 정치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물론, 조선의 이익을 위해서. 광해군은 중립외교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저 야만족 청나라보다는 계속 동맹이었던 명이 낫지."라는 생각에 청나라한테는 아무 탈없이 지냈지만 북방에 군사를 주둔시키며 후미를 위협했고, 흥선대원군도 초기에 프랑스 선교사와 정치적으로 손을 잡으려던 시도가 있었다라는 야사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기에 충분했지만 두 사람의 판단은 거의 국제 정세상으로는 현명한 판단이었고 당시 군사제도가 엉망인 조선 입장에서는 현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해야 했었다.[45] 사실 대원군은 러시아청나라에게서 연해주를 받게되어 국경을 접하게 되자, 이에 대한 대항책으로 조선에 와있던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들을 통하여서 프랑스와 대화를 하고자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신부들과의 대화가 늦어지고, 상황이 아주 급박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행동을 진행하였다는 것이 드러나게면서 정치적 어려움이 오게 되자 오히려 박해를 하게되었다.(다시 말하자면 대원군은 執政할 그 어떠한 정당성이 없는 상태였으며, 사실 대원군은 천주교와의 관계가 다른 양반들보다는 비교적 가까운 상황이였다.)[46] 다만 조 대비가 안동 김씨를 멸문시키고 풍양 조씨의 세도화를 바랐다는 건 야사에나 나오는 낭설일 뿐이다. (신)안동 김씨는 약 60년간 정권을 잡았는데 이때 일어났던 폐단은 한둘이 아니다. 이걸 몽땅 다 까발린다면 당연히 (신)안동 김씨는 직격타를 맞고 몰락할 수밖에 없다. 지방 관리의 경우엔 안동 김씨라는 이유로 된 경우엔 물러나야 했다만 핵심 인사들은 안 그랬다. 이게 흥선대원군이 그러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부인 흥선대원군보다는 법적으로 완전히 왕의 어머니가(족보상 고종은 효명세자의 양자로 갔는데 효장세자의 세자빈이 조 대비였다.) 나서서 (신)안동 김씨를 숙청하려 들면 별 도리가 없다. 왕실 서열로도 본인이 아래고 조 대비와 흥선대원군의 관계는 군신 관계였기 때문이다. 즉 조 대비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과거 일을 캐내어 (신)안동 김씨를 박해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것이다. 고종의 왕비를 풍양 조씨로 만들려고 했으려고 했다는 것도 억지다. 위와 같은 상황이 되면 힘센 외척 = 세도 정치 = 청산'의 등식이 성립될 만한 일이다. 어느 가문이 왕비 자리를 채우든지 흥선대원군의 경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그 시대를 살아서 폐해를 잘 아니까. 이런데 조 대비가 나서서 풍양 조씨를 왕비로 세우려고 한다고 치자. 중요한 사실은 풍양 조씨도 한때 (신)안동 김씨와 한편인 세도 가문이었다. 이리 되면 다들 "이거 (신)안동 김씨의 재림이네요?" 라고 할 게 뻔하다. 즉 조 대비가 나선들 풍양 조씨를 후보로 만드는 것조차 분위기 때문에 매우 힘들거나 불가능하다.[47] 샤 자한타지마할을 무리하게 건축하는 바람에 무굴 제국의 재정을 파탄내서 희대의 암군으로 영구까임권을 얻었다. 에펠 탑은 처음 건축된 당시에 파리의 경관을 망치는 뼈대만 앙상한 흉물이라며 시민들과 예술가들에게 온갖 욕을 배불리 먹었다. 라파누이족은 모아이 석상을 무리해서 세우느라 이스터 섬의 자원과 자연 환경을 거덜내버렸다. 하지만 역사가 흐른 오늘날 현대에 타지마할, 모아이, 에펠탑은 인도, 이스터 섬, 프랑스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이러한 것은 완전히 실용적인 건축물이 아닌 모든 건축물에 적용되는 사항이며 국력이 받쳐주는 한도 내에서 만들었다면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후손들에게 관광 자원을 물려준 업적으로 재평가된다. 그러나 모아이, 타지마할, 경복궁처럼 나라를 거덜내면서 만들었다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인정받아도 암군 딱지는 떼기 힘들다.[48] 실제로 루트비히 2세는 오로지 관상용으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했고 이 이후로도 무리한 건축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이러한 점이 루트비히 2세에게는 실책으로 남아 폐위까지 몰렸다. 비록 그 성이 폐위된 직후에도 관광 자원이 되었음에도 말이다.[49] 심지어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에게 인삼을 보내며 환심을 사려고까지 하였다.[50] 분열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극히 일부의 근왕파를 제외하면 흥선대원군의 파벌이 되었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 종친 우대 정책을 펼쳤던 것이 그 이유다. 흥선대원군의 장남 흥친왕과 장손 이준용으로 대표되는 흥선대원군계 친일파는 '조선 왕실 = 친일'이라는 시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일부 근왕파를 제외한 집권욕을 가진 왕족들이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하다.[51] 다만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16세기부터 오랜 기간 동안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서구 열강들과 접촉을 하였으며, 비록 조선과 같이 쇄국 정책을 펼쳤을지언정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면서 서구 문물을 조금씩이나마 받아들이기도 하였고, 당시 국제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는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과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는 점은 알아두어야 한다.[52] 그나마 다행이라 할 만한 건, 백성들이 고종의 친정과 개항 이후 흥선대원군을 그리워한 걸 보면 최소한 "아 그때는 좀 나았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어쨌든 조금은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 듯. 실제로도 세도정치 시기나 고종 친정 이후에는 탐관오리들의 만행이 수도없이 많은데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적어도 탐관오리에 대한 기록은 잘 없다.[53] 그러나 조선이 개혁개방을 했다한들 과연 소중화 사상이 만연했던 조선의 높으신분들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적었으며 그나마 규슈 나가사키 데지마를 통해 화란(네덜란드)로부터 국제정세와 문물을 정기적으로 보고를 들어서 국제정세에 빠르게 적응이 가능한 기반이 있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헨드릭 하멜의 사례와 같이 통역 및 국적을 알아내기 위해 청나라에 서신을 보내 답변을 받아내거나 미국에 대한 정보도 청나라를 통해 얻어낼 정도로 우물 안 개구리였던 국가여서 개방했다 한들 적응 못 하고 실패할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54] 또한 종교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애용해먹는 침략수단 중 하나였다.[55] 이익까지 갈 것도 없고, 조선통신사들이 남긴 사행록들만 들춰 봐도 "왜황" 이라는 칭호는 꽤 자주 나온다. 개중에는 황제를 자칭하는데 실권은 없으니 웃기는 일 아니냐며 조롱하는 시를 쓰거나 가짜 황제라며 위(僞)황이라고 부르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반대로 일본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목적에서 역대 천황들을 주욱 나열하면서 "건방진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얘네가 쓰는 대로 쓰겠다" 라면서 무슨 천황, 무슨 천황 하고 일일이 부른 경우도 있었다. 또 통신사라는 게 사적으로 가는 게 절대로 아니고 조선이 일본에 보내는 공식 외교 사절로서 일본에 다녀오면 국왕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이 의무였던데다 일본에 갈 때 이전에 쓰였던 사행록을 구해 읽고 가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조정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결론밖에는 안 나온다.[56] 심지어 일본에서도 조선이 이렇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도 막부 시대 일이긴 하지만, 조선 통신사에게 답서를 들려 보낼 때 통신사들이 답서에 쓰인 글씨나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고쳐 오라고 물리친 경우가 거의 매번 있었기 때문. 특히 그 중에는 막부의 쇼군을 "일본국왕" 이라고 할 것인지 "일본국 대군" 이라고 부를 것인가를 놓고 크게 싸운 적도 있었고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문제 때문에 쓰시마 번에서 양국 간에 주고받은 국서를 위조한 것이 발각되어 큰 문제가 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천황의 칙서라는 것을 조선에 공식적으로 보낼 경우 조선이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57] 어차피 당시 시대상, 아니 시대가 아니더라도 전근대에는 군주국들이 자국에서 쓰는 칭호와 외교적 칭호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 즉 조선도 일본이 자국 군주를 천황이라 칭하든 말든은 상관이 없지만 그걸 조선과의 외교문서에서 집어넣는 일에는 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하여 유럽이라면은 '왕은 그 나라에서는 황제' 개념에 의해 적당히 넘어갈만도 하지만 동양에서는 무조건적으로 황제가 왕의 위라서 더 그렇다.[58] 당장 동학농민운동도 사실상 기득권층의 부정부패로 민심이 폭발해 일어났었고, 이후 개방했는데도 각 열강들에게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면서 조선은 아예 무너지기 시작했었다. 비록, 결과론이긴 해도 흥선대원군의 집권 때보다 조선은 더 혼란스러워지고 스펙터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 조선은 아예 회생불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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