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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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리청정()은 군주가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태자, 태제, 태손 같은 후계자가 군주 대신 정사를 돌보는 것이다. 대리청정은 군주국에서만 존재하고 공화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섭정의 하위 개념으로, 태자, 태제, 태손을 비롯한 후계자가 군주를 대신하여 국정을 맡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군주의 건강이 위중해서 업무를 볼 수 없는 경우에 한정한다. 이때 대리를 하는 태자, 태제, 태손을 소조(小朝), 군주를 대조(大朝)라 칭하여 구분했다. 현재의 대통령 권한대행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래도 권한대행은 계승권이 없다는 점에서 대리청정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원칙적으로는 군주의 건강이 위중할때 국가운영을 위해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는 군주가 후계자를 교육하고, 보위 승계의 정당성을 주기위해서 하는것이 원칙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주가 후계자의 역량 확인 또는 정치국면 전환의 방법 등으로도 자주 써 먹었다. 그 때부터 대리를 하는 후계자에 있어서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 때문인지 조선의 경우 제대로 된 대리청정은 문종, 정조, 효명세자처럼 정말 드물었고[1] 사실상 후계자 교육과 왕위승계까지 제대로 이루어진 경우는 문종 하나 말고는 없었다.[2] 정조는 대리청정 3개월 만에 영조가 승하하는 바람에 제대로 해보지 못했고, 반대로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자체는 아버지 순조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잘 했으나 정작 본인이 3년만에 병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즉위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대리청정을 지시하면 대개 신하들은(이게 진짜 승계목적인지 충성심 시험인지 알 수 없으니 안전빵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울부짖고 차라리 날 죽여라!고 저항하며 명령을 받들려하지 않았다. 세종 때도 거의 완벽한 정통 후계자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3] 신하들이 지독하게 반대하여[4] 세종이 "지금 내가 내 몸 건사하기 급급하다 이놈들아! 날 죽일셈이냐?"황희:"네? 뭐라고요?"라고 거의 애원어린 일갈을 하고 나서야 겨우 관철되었고 영조가 사도세자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도 당파(노론, 소론, 남인, 북인)를 초월해서 신하들은 비를 맞으며 돌바닥을 머리로 두드려 피를 철철 흘리며 반대했지만 영조가 "이러면 그냥 선위하겠다."고 협박하여 겨우 물러났다.

그런데 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시킬 때는 친 세자파였던 소론은 반대하고, 친 연잉군파이던 노론은 쌍수들어 환영했다.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이 숙종의 건강이 워낙 안좋아진 것도 있지만 장희빈 아들에다가 몸이 약한 경종을 숙종이 마음에 들지 않아하여 노론과 의논하여 트집잡아 폐세자시키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 강하다.[5] 또 훗날 효명세자에게 순조가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하들이 "종사의 무궁한 복입니다."라고 쌍수들어 환영했다. 이건 홍인한, 정후겸이 대리청정 반대하다가 끔살당해서 생긴 학습효과라는 해석이 있다. 무능한 임금을 자처하면서까지 여러번 양위 선언을 시도했던 순조의 행적까지 고려하면, 순조 본인은 그닥 권력욕이 없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며, 스트레스 받으면서 왕 노릇하기 보단 적당할 때 아들한테 양위하고 은퇴해서 쉬고 싶어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리청정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뒤 순조가 효명세자를 크게 신뢰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것을 보면 더욱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제대로 된 대리청정의 예를 살펴보면 대리청정이 성공하기 위해선 군주가 확실히 후계자에게 전권에 기꺼이 내줄 마음이 있어야 하며 서로간 사이가 매우 좋아야 하고 후계자의 정치력이 성숙한 상태여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제군주제에서 군주의 권력을 나누어주기 위해선 그만한 신뢰가 필요하단 이야기일 것이다.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훈육과 기대치 때문에 부자간의 갈등이 극심했으며, 대리청정 체제로 간 뒤에도 대부분의 정무를 영조 본인이 처리했기에 아무리 오래했어도 의미는 없다. 사실상 대리청정 선언 역시 당시 분열된 정부의 당파싸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영조의 정치책략 중 하나라고 봐야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용당한거나 마찬가지인 사도세자의 스트레스는 장난 아니었을 것. 심지어 영조는 태종이 했던 선위 파동까지 했다.

현대의 군주국들의 군주는 이런 대리청정이 필요한 상태가 되기 전에 아예 후계자에게 미리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건강 상태가 좋아지고 평균 수명 자체도 길어지면서, 선왕이 지나치게 오래 살게 되어 후계자도 덩달아 너무 나이가 많아지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즉 굳이 대리청정을 해야 할 정도로 계속 군주의 자리에 남아 있느니 일찍 퇴위하는게 더 낫다는 것 다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왕처럼 현대판 대리청정도 존재하기는 한다.


2. 사례[편집]


괄호는 대리청정을 한 기간이다.


2.1. 중국사[편집]




2.2. 한국사[편집]





단순히 기간만 따지자면 사도세자에 이어 2위지만, 사도세자는 실제로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대리청정을 주관한 기간을 따지자면 이쪽이 조선 최장기간 대리청정이라 할 수 있다. 세자 이향은 부왕의 명으로 1445년부터 1450년에 부왕이 훙서할 때까지 대리청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식 대리청정 기간이고, 실질적으로는 이미 1442년부터 행사에서 왕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었다. 중간에 문종이 삼년상종기 때문에 매우 위독해져서 대리청정을 중단하고 세종이 직접 정무를 살핀 기간이 있다.

대리청정 당시 문종은 확실한 정통성과 아버지의 전폭적인 신뢰, 할아버지 대에서 다져놓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국정을 돌봤으며, 그 기간에 여러 업적을 세웠다.(특히 세종 말기의 군사적 업적은 사실상 문종의 공이라 보면 된다) 또한 그 기간동안 확실한 후계자 수업과 차기 왕으로서 권위를 세웠기에, 아들 단종까지 이어지는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다. 본인이 오래 못 살고 동생이 배신하면서 공을 세운 신하들을 후하게 대접하는 바람에 세조대에 신권이 강해지고 왕권이 약해지는 계기가 생겨서 문제지, 문종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제도를 확실히 다진 명군으로 남았을 확률이 높다. 살아있는 왕의 권위와 의지를 존중하면서 젊고 유능한 섭정이 사실상의 왕으로서 훌륭히 직무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대리청정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

세자 이윤은 병약한 부왕을 대신해 1717년에서 1720년까지 대리청정했다.

조선 역사상 최장기 대리청정이다. 세자 이선은 부왕의 명에 따라 1749년부터 1762년까지 대리청정했다. 기간만 보면 조선 최장기 대리청정이나 실질적으로 대리를 한 기간은 훨씬 짧다. 사도세자가 병을 이유로 정무를 기피한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조도 겉으로만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지, 실질적으로는 본인이 다 했었으니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아무 의미없는 허울이었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세손이 대리청정을 했다. 세손 이산은 죽기 직전의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했다. 기간은 짧지만 대리청정이 시작된 이후 영조가 혼수상태가 되었고 정조 본인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세자 이영은 부왕의 명에 따라 1827년부터 1830년까지 대리청정했다. 세종 - 문종과 더불어 대리청정의 모범적인 사례로 순조는 효명세자를 전적으로 믿고 맡겼으며 효명세자 역시 정사를 잘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안타깝게도 효명세자가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막을 내렸다. 문종이 재위 기간이 극히 짧기는 해도 최소한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했는데 이쪽은 아버지보다도 일찍 죽어 왕이 되지도 못했다는 점에서 더 불우하다.

고종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해 일제에 의해 폐위되기 직전 황태자 이척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으나 같은 날 폐위당했다. 어찌됐든 황태자는 부황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황제 자리를 물려받기는 했으나, 마치 임금이 죽었을 때 등극하는 절차 마냥 며칠 동안 정식으로 황제 칭호를 쓰지 않고 형식적으로 잠시 대리청정의 형식을 취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대리청정은 아니었다. 대리할 임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2.3. 일본사[편집]


다이쇼 덴노가 병석에 눕자 황태자로서 대리청정.

쇼와 덴노가 병석에 눕자 황태자로서 대리청정. 그래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임명장도 황태자가 대리 서명하고 취임식에서 임명장도 황태자가 대신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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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종의 경우 하긴 했는데, 위기에 몰린 것을 잘 알고 있는 경종 스스로가, 의견개진을 거의 하지 않고 중간만 가자는 식으로 임해서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없다.[2] 다만 아버지 세종이 승하한 이후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본인도 너무 빨리 승하하는 바람에 아들 단종이 왕위를 너무 어린나이에 이어받았다.[3] 아들 단종이 워낙 정통성이 뛰어나서 그렇지 문종 본인도 적장자-원자-세자루트를 다 밟았고 세자수업도 착실히 잘 받아 흠 잡을게 하나도 없었다.[4] 사실 신하들로서는 과민반응할 수밖에 없던 것이 바로 전대의 태종은 재위한지 고작 6년만에 뜬금없이 세자 이제에게 선위하겠다고 몇 번씩이나(!!!) 나서서 신하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한 적이 있다. (그는 왕자리에 12년이나 더 있었다.) 심지어 한번도 아니고 총 세번이나 선위 쇼를 한 뒤에야 네번째에 진짜 상왕으로 물러난 것. 태종은 신하가 수상하다 싶으면 바로 철퇴를 내릴 정도로 왕권을 세우는데 집착한 왕이었가에, 그 모습을 본 신하들 입장에서는 (선위는 아니지만) "내가 왕 노릇 하기가 버거운데 말이지..."란 제스쳐에 "아니옵니다 전하!!"라고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5] 실제로 숙종과 이이명이 독대를 했는데 그래서 더 의심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