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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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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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성호 이익.jpg
이름
이익(李瀷)
출생
1681년 11월 27일 조선 경기도 안산군
사망
1764년 1월 19일 (향년 82세) 조선 한성부
본관
여주 이씨

자신(自新)

성호(星湖)
가족관계
증조부 익헌공(翼獻公) 소릉(少陵) 이상의(李尙毅/1560-1624)
종조부 청선(聽蟬) 이지정(李志定/1588~1650)
할아버지 이지안(李志安/1601-1657)
아버지 매산(梅山) 이하진(李夏鎭/1628~1682)
어머니 후부인 권씨(權氏)
큰형 청운(靑雲) 이해(李瀣)
둘째 형 섬계(剡溪) 이잠(李潛/1660~1706)
셋째 형 옥동(玉洞) 이서(李溆/1662~1723)
첫번째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1]
두번째 부인 사천 목씨(泗川睦氏)
내재종형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2]
아들 이맹휴(李孟休/1713~1751)
손자 이구환(李九煥/1731~1784)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실학자.


2. 생애[편집]


재야의 학자로 머무르면서 실용적인 학문을 할 것, 한전론, 호포론, 개병제, 양반의 생업 종사 등을 주장하였다. 이익의 둘째 형인 이잠은 1706년 노론 대신들이 당시 세자였던 경종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라 상소를 올렸다가 옥사했던 인물이다. 때문에 동생 이익은 벼슬길이 막히고 말았다.

일부 문벌 가문의 자제들이 쉽게 급제할 수 있는 과거 제도의 실태를 지적하고 여론과 평판에 의해 인재를 등용하는 공거제를 주장했다.[3] 또한 과거제도, 노비제도, 문벌제도, 잡술, 승려, 게으름을 나라를 좀 먹는 여섯 가지 폐단이라고 주장했으며[4] 검소함을 장려했다.

허목의 학통으로 이잠, 이서우의 문인이며 반계 유형원을 사숙하였다.[5] 저서는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 등이 있다. 학맥으로는 성호학파 문서 참조.


3. 기타[편집]


  • 조선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조선 외부의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던 모양인데 통찰력이 상당했다. 당시 일본 쇼군 너머 천황이 있음을 근거로 조일관계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자신들과 동급인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려면 조공체제를 확립해야만 가능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일본은 바다에 둘러싸인 섬나라라 외부사정에 무지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의 선민사상과도 충돌했다. 막부 정권은 명목상 천황의 조정인 공가 대신 자신들이 주권자임을 외부에만 천시하는 방법으로 중국과 통교하였다.[6]

에도 막부가 주변국 중 유일하게 국가 대 국가로 교류한 나라는 조선이었는데 숙종 무렵까지 쇼군은 조선의 대군급으로 취급되었다. 숙종 시기에 들어서 일본이 쇼군을 국왕급으로 대우해달라고 요청하자 논란이 일어났다. 일본 내에선 자국의 국왕인 '천황'을 신으로 섬기며 인간보다 위로 여기기에 일본 내에서는 모순이 아니다. 다만, 일본의 왕실과 쇼군들의 실제 관계에서 쇼군들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자신들의 신을 무시하고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쇼군들도 일본의 국왕인 '천황'이 상징적이며 무력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미. 그러니 무로마치 막부 시절처럼 천황을 무시하고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의 대표자임을 천명한다고 비칠 여지가 있었다. 이에 일본 국왕이라는 호칭을 잠시 쓰기는 했지만 지속적이진 않았고, 타이쿤이라는 호칭과 혼용했다. 이런 미묘한 관계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식 외교 관계를 받아들인 이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러한 모순을 지적한 것도 모자라 그로써 야기될 문제를 지적하며 훗날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에 터진 '서계 거부 사건'과 일본인들조차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대정봉환보신 전쟁까지도 예언했다. 심지어는 '신정부군이 천황을 옹립하여 명분을 세운다.'는 대략적인 전쟁의 양상부터 신정부군 승리까지 예견하였으니 놀라울 따름이다.[7] 이익은 저 사건들로부터 100년도 더 전의 사람이고 이 시기의 에도 막부는 건재하게 버티는 상태였다. 대정봉환과 보신 전쟁 부분만 따지자면 이익은 직접 당사자인 일본인도 아니고 외국인이다. 사실 일본 내 토막파(討幕派)의 움직임은 쿠로후네 사건으로 별안간 터져나온 아주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 에도 막부가 건재하던 18세기 전반 때부터 수도 교토의 근왕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물 밑에서 퍼져가던 기류였다.
이 무렵 토막파들은[8] 자기들끼리 몰래 토막을 논하며 세상사를 한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동행했던 남옥(南玉)과 친왕의 교육 담당이었던 나와 로도(那波魯堂)와 만나서 나눈 이야기에도 나왔다. 이들은 언제 자신들을 막부에 찌를지 모르는 자국민들보다도 그럴 위험이 없는 외국인이었던 조선인들을 상대로 토막의 속내를 은근히 털어 놓으며 한을 달래기도 하였다. 막상 넋두리를 들어주던 통신사가 "당신들의 임금이 정권을 잡는 건 높이 살 일이지, 슬퍼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을 건네며 토막의 뜻을 분명히 들으려고 은근슬쩍 찌르면 그때만큼은 물러서서는 "창의적인 소리일 뿐이다."라 하는 등 말이든 행동이든 상당히 조심하면서 지냈다.[9]
나와 로도의 속내가 이러했다는 기록은 일본에는 전무하고 오직 조선통신사이 남긴 글에만 있다. 남옥은 교토 지식인들을 만나본 후 "서경의 인사들과 깊이 마음 속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보니 이들이 모두 비분강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관백을 패자(悖子)[10], 왜황을 왕자(王者)[11]로 여기고 있다. 이들은 관백을 왕망, 조조와 같은 찬탈자로 보고 있다."[12] <청성잡기>로 유명한 성대중 또한 나와 로도를 만나보고 나서 <차상기(槎上記)>에 남옥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적었다. 원중거(元重擧)는 <화국지(和國志)>에서 "에도의 정치가 흔들리고 찬탈자인 조조나 사마의와 같은 무리들이 만일 각지에서 나타난다면 왜황을 둘러싸고 국권을 쟁탈하려는 자가 이 땅에 나오지 않으리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아마도 당시 통신사들은 천황이 허수아비 신세이고 이에 분노하는 지식인들이 많았음을 인지했던 듯하다. 토막의 움직임을 일본 막부가 아니라 오히려 조선이 무려 100년이나 빨리 알아차렸던 것.
그러나 조선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거니와, 이익과 같이 그러한 환경이 미래에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고찰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다음은 저서 '성호사설' 권17 '일본 충의(日本忠義)' 편의 관련 부분이다.
왜황이 실권한 지가 불과 6~700년밖에 되지 않는데 국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어서 그 사이에 차츰 충의로운 선비(충의지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명분이 바르고 주장이 이치에 순하니[13] 훗날 반드시 한 번 그 뜻을 펼칠 날이 올 것이다. 만약 하이(蝦夷)와 연결하고 왜황을 보좌해서 제후들에게 호령한다면 필시 대의를 펴지 못하지는 않으리니 66개 주의 태수들 가운데 어찌 뜻을 같이 해서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만약 그러한 지경에 이른다면 저쪽은 황제이고 우리는 이니 장차 어떻게 대처하려는가?[14]

  • 다만 이것을 가지고 이익을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한다거나 다른 조선의 관료, 학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저평가할 것까지는 없다. 성호 이익은 조선 후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외침을 겪은 뒤에 태어나 살았던 사람이고, 일본의 실권자가 조선이나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이라 불린 존재 즉 막부의 최고 주권자인 쇼군이며 천황은 쇼군에 의해 관리되는 아무런 실권이 없는 껍데기라는 것이나[15] 일본에서 막부가 무너질 때에 천황을 끼고 국권을 쟁탈하려는 자가 나올 수 있고 그것이 조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은 조선 초기 관료나 학자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16] 또한 성호 이익이 살았던 조선 후기와 달리 이예, 신숙주 등이 활약했던 조선 전기는 조선 후기처럼 성리학이 교조적인 도그마로 크게 자리잡고 맹위를 떨치는 시대도 아니었다. 성호 이익은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쇼군이 실권자라고는 해도 엄연히 천황의 신하이고, 쇼군이 무너지고 천황이 다시 복벽하면 우리는 왕이고 저들은 천황인데, 그게 외교가 될 거 같냐?"라고 했지만, 이예나 신숙주는 쇼군이나 그 휘하 무사들이 실권을 쥐고 국정을 운영하던 현실에 더 주안점을 맞추어 "쇼군이 무너지고 천황이 복벽? 그때는 내전 좀 겪고 다른 쇼군이 나와서 또 실권을 잡든가 하겠지. 저 비실거리는 천황이 복벽은 무슨 복벽?"이라고 넘겼을 것이 틀림없다는 얘기다. 당장 천황이나 쇼군은 싸우지 말라고 명령을 하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 수도인 교토 안에서 27만 대군이 몰려들어 편을 갈라 싸우고[17] 다시 전국적으로 백여 년 가까이 내란을 벌이는 그런 나라에서 별다른 힘도 못 쓰는 천황이 복벽을 해봤자 이익의 생각처럼 천황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18] 다시 쇼군 중심의 막부 정권 재탕에 불과할 것이고 천황과 직접 전면에 나서서 외교 교섭할 일은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19]

  • 제자인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쓸 때 이익이 직접이 쓴 항목은 없지만 자료 수집과 감수 등 많은 부분에서 큰 도움을 줬다.

  • 상평통보 발행 초창기에 구리 수급의 문제, 조정의 미숙함등의 원인으로 장시간 발행하지 않거나 전황, 가치의 급등락등 화폐신인도는 크게 하락하였다. 또한 이익은 화폐가 사치의 근본이라 보았다. 이에 성호 이익은 아예 동전을 폐지해 버리자는 '폐전론'을 주장하였다.

  • 자신의 주장이기도 했고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처지라 재야에 머물며 직접 생계활동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닭을 키우다 느낀 점에 대해 '할계전(瞎雞傳)'이란 글을 남기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한쪽 눈이 멀고 허약한 암탉이 오히려 훌륭하게 병아리들을 키워낸 사례를 보고 험한 세상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살아나갈 방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

  •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 14권 인사문(人事門)편에서 일명 '조선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을 언급함으로써 후대의 작가들에게 떡밥을 제공하기도 했다.

  • 시헌력대통력보다 여러 부분에서 우수하자 "천문학은 서양이 으뜸이고 회회(아라비아)가 버금이며, 중국은 이를 따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 이익은 부친이 쉰살 넘어 낳은 늦둥이였다. 또한 생전에 굉장히 병약한 체질이여서 10살 무렵까지 글을 읽지 못했고, 숱한 잔병치레를 겪었다. 그나마 나이가 들어 스스로 농사짓고 소식을 하는 습관을 들여서 83살까지 장수했다. 특히 콩을 즐겨먹었다고 한다.

  • 이익의 형은 상기한 둘째 형 섬계(剡溪) 이잠(李潛/1660~1706) 말고도 큰형으로 청운(靑雲) 이해(李瀣)가 있고, 셋째 형은 한국 서예사에 중요한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창안자 옥동(玉洞) 이서(李溆 1662-1723)이다. 이서는 둘째 형 이잠이 옥사하여 집안의 벼슬길이 막혔기도 했지만, 본인 역시 관직에 그리 큰 욕심이 없었다. 중하급 관직인 종6품 찰방(察訪)을 지냈을 뿐, 평생 서예를 연구하는 데 진력했다. 그는 기존의 서예 대가들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비판할 정도로 엄격했고, 서첩이나 비문을 보고 따라하기란 겉에만 치중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서예는 깊이 생각하고 마음 속으로 기준을 잡아 탐구한 바에 따라 붓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서예 이론과 기법을 집대성한 《필결(筆訣)》을 저술했는데, 한반도 서예 역사 최초의 서예이론서이다. 그가 이룩한 동국진체는 그의 친구였던 공재 윤두서와 윤두서의 조카 백하 윤순에게로 이어졌으며, 윤순은 중국 당송원명의 역대 서예 대가들의 글씨를 깊이 연구하여 동국진체에 반영하는 대시도를 함으로써 동국진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냈다. 이후 동국진체는 윤순의 제자 원교 이광사의 대에 이르러 이광사의 서체인 원교체로도 이어지게 되었으니, 동국(동쪽 나라, 즉 한반도를 이르는 오래된 표현)의 참다운 서체라는 의미의 동국진체는 바로 이런 계보로 이어지며 오늘날까지 한국 서예사의 중요한 맥으로써 자리매김하였다.


  • 성호 이익의 당숙인 이원진은 제주목사로 재직하던 때 표류하던 네덜란드인을 발견하고 거두어주었다. 그 네덜란드인 중 하나가 고향으로 돌아가 기록을 남기니 바로 헨드릭 하멜하멜 표류기이다.

  • 2018학년도 수능 비문학 지문에서 서학의 수용으로 일어난 인체관의 변화를 조선 학자들의 견해를 통해 제시하는 지문에서 아담 샬, 실학자 최한기와 함께 등장한 바 있다.

  • 지금으로서는 당연하지만 당시로는 특이하게 담배가 노화를 촉진하는 몸에 해로운 물질이니 피우면 안된다는 매우 합리적인 주장을 했다. 하지만 몸에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거니와 담배 장사가 돈이 되기까지 하니 이 주장은 자연스럽게 묻혔다.
어떤 이는 또 "그러면 담배는 사람에게 유익하기만 하고 해는 없다는 말입니까?"고 묻는다. 태호 선생은 "몸에 이롭고 해로움을 따진다면 해가 더 심할 것이다. 안으로 정신을 해치고 밖으로 듣고 보는 것까지 해쳐서 머리가 희게 되고 얼굴이 늙게 되며, 이가 일찍 빠지게 되고 살도 따라서 여위게 되니, 사람을 빨리 늙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 담배는 유익한 것보다 해가 더 심하다고 하는 것은 냄새가 나빠서, 재계(齋戒)하여 신명(神明)을 사귈 수 없는 것이 첫째이고, 재물을 없애는 것이 둘째이며, 세상에 일이 많은 것이 진실로 걱정인데, 지금은 상하노소를 막론하고 해가 지고 날이 저물도록 담배 구하기에 급급하여 한시도 쉬지 않으니 이것이 셋째이다. 만약 이런 마음과 힘을 옮겨서 학문을 닦는다면 반드시 대현(大賢)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글에 힘쓴다면 문장도 될 수 있을 것이며, 살림을 돌본다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역(周易)》에, '상륙(上六)은 오르는 이치에 어두우니, 곧고 바른 데에 한결같이 쉬지 않는 것만이 이롭다' 했다."고 답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門) 남초(南草)편

우리나라 풍속에는 한가로이 노는 자가 많아 난리가 일어날 시 군사를 늘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병사를 먹이는 것이 쉽지 않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하루에 쌀 2되를 먹지 않으면 굶주린다. 병사가 십만이면 하루에 2만 말을 먹는 것인데, 우리나라 관례에 15말을 1석이라 하니 하루에 1330여 석을 먹여야 하고, 한 달 훈련을 하면 4만 석이 필요하다. 그 중에는 말들도 있으나 말먹이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 행군할 적에 마소 1필이 쌀 20말을 운반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1000필이 있어야 하루 식량을 운반할 수 있다. 1000필이 있어야 한다면 이를 모는 자도 1000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의 식량도 이것[20]에 포함되지 않는다. 만일 10일 동안 행군을 한다면 사람과 말을 먹이는 곡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무기 구입하고 이리저리 쓰는 비용은 이에 더해질 터이니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출처][21][22]
  • 이익은 형제중 다섯째로 바로 위 넷째 형인 이침의 손자가 바로 이가환이다.

  • 안산시엔 그를 기리기 위한 성호박물관이 있으며 근처에는 이익선생의 묘와 성호공원이 있다.

[1] 죽헌 신필청(申必淸/1647-1710)의 딸이다.[2] 그 유명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지은 대학자이자 실학자이다. 이익의 증조할아버지인 익헌공 이상의의 외증손자로, 유형원에게는 이익이 외가 6촌 동생이 된다. 그러나 이익은 1681년에 태어났으므로 이익이 태어난 시점에 유형원은 이미 고인이었다. 6촌 간인 두 사람의 나이차는 무려 59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증조할아버지와 증손자 뻘이었다.[3] 유의해야 할 것은 당시 조선은 두번의 대기근을 통해 제도가 엉망이어서 양반들도 죽어나갔다. 부족한 관료들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부정청탁이 있었다는 것이 씁쓸한 현실.[4] 이익도 양반의 한계인지 노비제도를 개선하는데는 찬성했지만 완전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5]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는 의미.[6] 무로마치 막부 시절은 이런 수작이 극에 달해 명나라로부터 대놓고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았는데, 이는 사실상 정권의 명분을 천황이 아닌 중국에 두는 것과 다름없었다. 에도 막부 시절은 중국과 공식적인 교류가 없어서 이런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민간교류가 활발하여 나가사키차이나타운은 당시 일본 내 제1의 외국인 거주지였다. 이외에 류큐 왕국을 침략해 속국으로 만들고 류큐 이름으로 중국과 조공 무역을 하기도 했는데 간접적인 방식이라 중국과 격을 따질 문제는 전혀 없었다.[7] 메이지 유신 자체를 예견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이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은 대정봉환과 보신 전쟁보다도 '대정봉환을 명분으로 세우고 보신 전쟁을 거친 뒤에 근대화에 성공한다'는 것에 있다.[8] 다케우치 시키부가 천황과 공가를 상대로 존왕론을 강의하다가 막부한테 박살이 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호우레키 사건이다.[9] 남옥, '일관기(日觀記)' 권10, 황계. 참조[10] 유교에서 그릇된 인물을 이르는 말.[11] 왕의 아들인 왕자(王子)가 아니다.[12] 후마 스스무(夫馬進) '천황의 역사 6권-에도시대의 천황' 편 참조.[13] 성리학적 입장에 입각하여 명분이 옳으므로 이길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명목상 왕조국가인 일본에서 임금이 정치하겠다고 나선다면, 최소한 명분상으로는 신하인 쇼군이 막을 방법이 없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런 문제 때문에 대권을 반환하는 대정봉환을 감행하였고 이후 보신 전쟁 동안에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천황에게 저항하면 역적이라는 논리가 먹혀서 군사들의 사기도 바닥이었다.[14] 이것 때문에 '서계 거부 사건'이 터지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다. 이 문제는 강화도 조약 내내 조일 양국이 팽팽하게 대립한 끝에 조선 측에 유리한 쪽으로 매듭을 지었는데, 조약을 '조선 국왕'과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가 아닌 '대조선국'과 '대일본국'의 이름으로 체결했다. 이렇게 되면 이익이 지적한 것과 같은 수직적인 '황제와 왕'이 아닌 수평적인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된다는 논리. 실제로 조일 양국은 실상이야 어쨌든 이후로도 경술국치 그 순간까지 위계상으로는 대등한 국가로서 교류하였다. 다만 그 이외의 조항들이 시망이라 조선이 멸망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15] 신숙주가 이미 해동제국기에서 천황의 계보를 자세히 적어 두었고, 용재총화에는 당시(15세기~16세기) 조선에서 딱히 쥐뿔도 없으면서 괜히 떠받들어지는 존재를 두고 "니가 왜황이냐"라고 놀려 부르는 말도 있었다고 언급될 정도다. 조선에서 천황을 '왜황(倭皇)'이라는 굳이 일본이 그토록 컴플렉스로 느끼는 '왜'라는 단어를 가져다 조어를 만든 것만 봐도 조선이 일본 천황의 존재를 얼마나 같잖게 봤는지 알 수 있다.[16] 가마쿠라 막부 멸망(1333) 이후 남북조 합일(1392)까지 일본 내정이 어수선한 상태에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발생했고, 그 왜구 진압을 통해 이름을 쌓고 인망을 얻어 개국의 단초를 마련한 인물이 조선의 창업주 이성계였다. 징비록에는 신숙주가 사망할 때 성종에게 "부디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마시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마냥 일본에 굽히라는 의미가 아니라 일본의 정세를 예의주시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여기에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조선이 얻은 경험이 반영되어 있었다.[17] 심지어 전국 시대의 시작이라고 평가되는 오닌의 난이 발발한 당시 조선은 세조 치세였고, 신숙주 역시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18] 실제로 당시 시점에서는 천황막부를 무너뜨리고 친정을 행했지만 워낙 정치와 괴리되어 살던 탓에 제대로 된 통치 경험이 없어 결국 몇년 안 가서 말아먹고 도로 막부가 세워진 전례도 있었고 말이다.[19] 그 메이지 유신으로 수립된 신정부마저도 완벽하게 천황이 주도하는 정권은 아니었다. 패전 뒤에는 말 그대로 상징의 지위밖에 없이 모든 걸 잃고 GHQ가, 그리고 내각의 총리가 실제 일본의 국정을 주도했다.[20] 4만석[출처] 이익, <성호사설> 상3[21] 다만 이익이 남인이었고 당시 남인은 율곡 이이를 모시던 서인 계열 붕당인 노론과 정치적 마찰이 있었음을 감안하자.[22] 다만 그렇다고 이익의 주장이 합리적인 얘기가 아니라는것도 물론 아니다. 당시 조선은 주변국 가운데서도 유독 1인당 곡물 섭취량이 많은 국가 중 하나였고 따라서 타국보다 군대를 유지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갔던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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