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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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현황
3.1. 현재 남아 있는 곳


1. 개요[편집]




조선 고종 때 문호 개방에 부정적이었던 흥선 대원군이 서양과 양인()과의 교류 및 접촉을 배제하고, 서양의 침범에 대비하여 싸우지 아니함은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세웠던 석비().

2. 역사[편집]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1871년에 처음 건립했는데 비문은 아래와 같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작은 글자로 왼쪽, 또는 뒷면에 이런 내용을 병기했다.

' '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우리 자손 만대에 훈계하노라.

병인년(1866)에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

원래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흥선 대원군의 명령하에 처음 만들었는데, 1871년 신미양요까지 겹치면서 더 이상은 서양 오랑캐들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흥선 대원군과 위정척사파 및 유림들의 확고한 입장을 드러내었다.

신미양요 이후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널리 세웠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이 1882년 청나라로 납치되어 정치에서 실각하고, 명성황후 민씨가 환궁하여 실권을 잡은 뒤 문호 개방을 가속화하면서 일본 공사의 요구에 따라 철거되거나 매장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삼전도비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역사의 증거라는 이유로 종종 척화비를 페인트칠 등으로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3. 현황[편집]


똑같은 척화비를 여러 기 만들어 세웠지만, 상당수는 통상 수교 거부정책(쇄국정책)이 끝난 뒤에 의미를 잃어 폐기 처분되거나 방치, 훼손되었다. 그래도 워낙 많이 만들었다 보니 지금도 전국 각지에 여럿 남아 있다.

3.1. 현재 남아 있는 곳[편집]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 척화비 30여 개가 남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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