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선대원군/평가 (문단 편집) ==== 이에 대한 반론 ==== 흥선대원군이 [[쇄국|쇄국정책]]을 하기 전에, 이미 [[정조(조선)|정조]] 때부터 이양선이 오면 식량과 물을 주되 적절하게 쫒아냈으며 거기에 1832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선 암허스트호가 조선으로 와서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이때 흥선대원군이 처한 바와 다르게 암허스트호는 아무런 무력적 압박 없이 평화로운 요구였는데다, 머무르는 동안 감자를 재배하는 신농법을 알려주거나 의료 봉사를 해주는 등 우리가 그간 조선 말기에 당해온걸로 무작정 나쁜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당시 서양 세력들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결국 세도정치와 교조주의로 치닫던 조선의 당시 상황과 겹쳐 이러한 평화적인 요구에도 매몰차게 조선은 거부한적이 있는 등 이미 통상에 대한 거부는 이미 관례대로 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정조때의 일도 사실 이전부터 해오던 일에서 약간 수정한 정도에 불과한게 인조 때 온 [[벨테브레]]와 [[헨드릭 하멜|하멜]]의 사례를 보고 '조선은 외국인이 오면 살려는 주지만 보내지는 않는 나라' 라고 인식하기 쉽겠지만 사실 원래는 중국으로 보냈다. 아마도 '중국은 큰 나라고 큰 나라니까 여러 나라랑 접촉할테고 그러니 중국으로 보내면 귀찮을 일 없겠지' 라고 생각해서 일듯한데 문제는 벨테브레가 왔던 때는 명청교체기라 선뜻 중국으로 보내기 뭣한 상태였고 하멜은 아예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이미 [[임진왜란]]으로 개판이 된 적이 있던 조선으로서는 하멜을 일본으로 보내기는 뭣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하멜 일행이 탈출에 성공한 이후 조선에 딴지를 걸었으니까 즉 조선이 외국인을 만나면 되도록이면 내보낸다는 정책은 수백년간 지속된 정책이었다. 또한 근대라는 개념이 생소한 당대에 당장 개항해서 근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지만 이 시기엔 서양이 잘나간다는 사실은 두번의 아편전쟁으로 충분히 알려져 있을 때다 필요성 정도는 충분히 인식하였다.] 사회 전반이 명나라 이후 유일하게 자신들이 중화 문명의 전통을 이었다는 소중화주의에 젖어있어, 당시에도 청나라를 멸시하고 나아가 서양을 양이라고 멸시했다. 거기에 천주교는 [[진산 사건]]과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조선사회에서 인식이 최악으로 떨어진 상태. 물론 일부 개화파들을 위시해 개항을 해야한다는 목소리도 있긴 했었지만 이들은 정치적 역량이 없는 소수 비주류들이었고, 그들이 직접 서양에 대한 문물을 접하는게 아니라 청나라에 있던 서양 문물과 서양 사람들과 접촉하는게 한계였으며, 개항을 한 이후 어떻게 근대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다만, 진산 사건과 백서 사건 때문에 정조 때 꽃 피우던 실학과 [[천주교]]의 사상이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이건 그들의 자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세한 것은 [[진산 사건|항목]] [[황사영 백서 사건|참조]]. 이것 때문에 조선은 한동안 척화와 [[조선의 천주교 박해|천주교 박해]]라는 폐쇄 정책이 펼쳐졌고 만일, 이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적어도 개화를 할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역사는 만약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적어도 조선의 개화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든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설령 개항이 되었다고 해도 근대화를 시키는 과정은 별개의 문제다. 근대화는 단순히 제도의 개혁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국가의 전체적인 법, 제도, 문화, 과학기술, 학문, 시민들의 의식 등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 이미 세도정치로 인해 당시 조선은 상당히 피폐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설사 근대화가 진행된다고 해도 기존의 있던 세력들이 기득권을 잃을 우려로 크게 반발하여 불미스러운 일로 트집잡아 흥선대원군을 실각시켜 근대화가 저지당할 경우와, 그간의 전통과는 파격적으로 달라 근대화 자체를 반기지 않는 일반 백성들, 그리고 그러한 난리통에서 자국의 이득을 꾀하려는 외부세력에 의한 간섭도 고려해야 한다. 반발세력을 통제하면서 각종 불미스러운 일과 변수들에 잘 대처하고 넘보는 외부세력까지 잘 견제하며 전체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 하지만, 그냥 글로 읽어만 봐도 알 수 있듯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일본처럼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당시 조선 외에 근대화를 급속 추진했던 많은 나라들 또한 실패의 길을 걸었다.[* 당장 단발령을 시행하려고 하자 조선 백성들이 반발했다거나 화장을 거부하는 등의 사례를 보면 근대화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즉 개항을 한다해도 근대화는 이미 불투명한 상태였다.''' 당장 청나라에서도 양무운동이 실패하자 광서제가 캉유웨이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꾀하나 이에 보수파들이 서태후의 원조 아래 반발하여 결국 좌절된 사례가 있다. 이렇게 되면 개항만 하고 근대화는 해내지 못해 사실상 서양세력의 식민지로 직행하는 꼴이고, 이러한 광경을 옆에서 보고들은 대원군이니만큼 개항과 근대화가 별개라는 것은 몰랐을 리 없다. 하물며 당시 상황조차 도움을 주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미 내부세제 등 개혁에 집중하느라 개항 준비에 힘을 쏟기 힘든 상황이었고 거기에 ___이미 개혁으로 인해 양반의 세력들이 불만이 엄청나게 쌓여있는 상태였는데, 이들이 서양을 혐오하기까지 하는 상황에서 개항을 추진한다면 결사적 반대에 직면할 것은 뻔한 상황___이었다. 이 반대를 누르려면 개항에 마땅한 명분이 필요했는데, 위에 언급한 천주교 관련 사태들로 사실상 개항의 명분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고, 이 상황에서 개항과 근대화를 강행하면 반대 세력들이 "대원군이 양이와 손을 잡아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려고 한다"는 식의 명분으로 오히려 실각을 당할 수 있었다. 실제 광해군 때 중립외교로 인해 서인들에게 덜미를 잡혀 인조반정이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광해군은 겉으로는 중립외교였지 사실상 속으로는 명과는 친하면서 청을 서서히 압박하는 식으로 후미를 위협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광해군]]참조.][* 거기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서로 둘 다 기득세력 층과 맞서는 정치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물론, 조선의 이익을 위해서. 광해군은 중립외교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저 야만족 청나라보다는 계속 동맹이었던 명이 낫지."라는 생각에 청나라한테는 아무 탈없이 지냈지만 북방에 군사를 주둔시키며 후미를 위협했고, 흥선대원군도 초기에 프랑스 선교사와 정치적으로 손을 잡으려던 시도가 있었다라는 야사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기에 충분했지만 두 사람의 판단은 거의 국제 정세상으로는 현명한 판단이었고 당시 군사제도가 엉망인 조선 입장에서는 현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해야 했었다.][* 사실 대원군은 [[러시아]]가 [[청나라]]에게서 [[연해주]]를 받게되어 국경을 접하게 되자, 이에 대한 대항책으로 [[조선]]에 와있던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성직자)|신부]]들을 통하여서 [[프랑스]]와 대화를 하고자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신부들과의 대화가 늦어지고, 상황이 아주 급박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행동을 진행하였다는 것이 드러나게면서 정치적 어려움이 오게 되자 오히려 박해를 하게되었다.(다시 말하자면 대원군은 執政할 그 어떠한 정당성이 없는 상태였으며, 사실 대원군은 천주교와의 관계가 다른 양반들보다는 비교적 가까운 상황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