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대한제국)/즉위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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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고종과 선왕 철종과의 관계
3. 철종 승하 당시 왕실 상황
3.1. 은언군가
3.2. 은신군가
3.3. 은전군가
4. 인평대군파의 종가에서 택군[1]하는 선택지?
5. 그럼에도 흥선군의 로비가 즉위에 영향을 미쳤다


1. 개요[편집]


조선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즉위 배경을 다룬 문서이다.

굳이 별도로 문서를 분리해 작성해야 할 정도로 고종의 즉위 배경은 매우 복잡하다. 이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왕실의 잦은 절손 현상에 기인하며,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2. 고종과 선왕 철종과의 관계[편집]


파일:IMG_0262.jpg}}}
2018년 9월 9일에 방영된 KBS 〈역사저널 그날〉에 등장한 철종-고종 가계도
어질어질하다

고종은 선왕 철종과 즉위 전까지는 법적(양자제도)으로 9촌이었고[2][3], 실제 혈통상으로는 무려 17촌(고종의 철종의 17촌 조카=7종질=7종조카[4])이었다. 고종은 원래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 8대손으로, 효종(인평대군의 형) 후손들로 이어진 왕실 직계와는 정말 너무나도 멀고 먼 방계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여 가까운 직계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그래도 17촌이나 9촌이나 둘다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먼 친척이었다.


3. 철종 승하 당시 왕실 상황[편집]


그래서 "흥선군의 정치공작으로 철종과 가까운 다른 왕손을 제치고 고종이 왕이 되었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파일:조선후기 왕실 가계도(혈통).png}}}
양자 관계를 배제하고 혈통 계보만 그린, 철종 사망 당시(1863년 음12월) 효종 계열 남계 자손 가계도.
연한 노란색 바탕 인물은 친아들 없이 사망한 사람들이며, 저 표의 인물들 중 1864년(고종 즉위년) 1월, 고종의 즉위하는 달 기준 영평군경은군(이재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했다.

그 전에 알아둬야 할 것은 왕위 계승의 법칙 상 후임 왕은 반드시 선왕의 아랫대나 최소한 같은 항렬에서 나와야 했고[5][6] 저 당시 철종의 후계자가 될 종친들 중 핏줄상 가장 가까운 게 17촌이었다. 5촌 조카 이재성(경은군)이 있긴 했지만 밀려났다. 이유는 후술. 그리고 이재성과 영평군을 제외하면 효종의 실제 남자후손이 아예 없었으며 그래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핏줄이 효종 형제들(소현세자, 인평대군)의 후손들인데 그들 중 철종의 조카 뻘인 사람들은 혈연상 실제로 철종과 촌수가 무려 17촌인 것이다.

철종이 사망할 당시 왕손들은 전부 족보상 사도세자의 후손들, 정확하게는 서자 3명 은언군, 은신군[7], 은전군의 후손들이었다. 당시 철종의 조카뻘 항렬인 왕손들은 은언군 계열인 이재덕(덕안군), 이재성(경은군), 은신군 계열인 이재원(완림군), 이재긍(완영군), 이재면(흥친왕), 이명복(고종), 이재선(완은군), 은전군 계열인 이재근(인양군)이 있었다.[8][9]


3.1. 은언군가[편집]


먼저 은언군를 보자. 이재덕이재성은 은언군의 장손 익평군의 아들이었다. 이 중 이재덕은 은언군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종손이었으며 양자였다. 그런데다 실제로는 중종 때 갈라진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었기에 혈통적으로 너무 멀었으며 입양 시기도 철종이 죽기 바로 직전이었다.

이재성익평군의 친아들로 철종의 이복형 영평군을 제외하면 철종과 혈연상 가장 가까웠지만 고작 3살밖에 안 된 너무 어린 아이인데다 서출이었다. 여기서 서출이 왜 문제인가?하고 의아해 할 수 있다. 왕족의 서출이면 일반 사가와는 다르게 왕족으로 대우받고 왕이 된 경우[10]가 이전에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왕의 4대손까지만 적용되는 것이었고, 이재성은 왕의 5대손을 넘어갔기 때문에[11] 일반 사대부가의 서얼과 같은 위치로 간주되었다.

애당초 이재성이 저런 결격 사유로 인해 은언군 가문을 잇지 못했기 때문에 이재덕의 입양이 이뤄진 것이었다. 그래서 이재성이 혈통 기준으로만 보면 최우선 순위였지만 밀려났다. 저런 상황 때문에 은언군 가문에서는 왕을 배출할 수 없었다.


3.2. 은신군가[편집]


그 다음 은신군를 보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바로 이 은신군의 하나 뿐인 양자인데, 남연군과 그의 자손들은 실제로는 인조의 아들(효종 바로 아랫 동생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이었기 때문에 혈통상으로도 그나마 왕통과 가장 가까웠다. 또한, 후손들도 나름 많이 있어 현실적으로도 가장 안정적으로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집안이었다.


3.3. 은전군가[편집]


은전군의 경우는 서열상 은신군가보다 낮았으며, 실제 혈통으로도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라서[12] 실제 왕통과의 거리가 위의 은신군가보다도 더 멀었다. 즉, 법적으로든 실제 혈연상으로든 은신군가에게 계승권이 밀리면 밀렸지 결코 앞서지 못하는 처지였다.


4. 인평대군파의 종가에서 택군[13]하는 선택지?[편집]


파일:인평대군 종가 수정2.png}}}
양자 관계를 배제하고 혈통 계보만 그린, 철종 사망 당시 인평대군 종가 남계 자손 가계도.
이진익의 후손만 표시되었으며, 연한 노란색 바탕 인물은 남연군의 일가이고, 밑으로 계보가 이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들없이 죽었거나 아직 아들을 못 낳은 사람들이다.
빨간색 테두리는 철종의 조카뻘 항렬, 즉 다음 왕 후보가 될 수 있었던 항렬이다.

어차피 실제 효종계가 끊겼고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후손들이 전부 양자라면, 차라리 그냥 가장 가까운 혈통인 인평대군파의 종손을 왕으로 세우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져도 남연군 집안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왜냐하면 남연군은 상술했듯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인데, 그중에서도 인평대군 4대 종손 이진익의 차남 이병원의 차남이기 때문이다. 종손을 옹립하자면서 중간에 갈라진 집안에서 고른다는 말이 모순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본 문단의 요지는 양자 입적 등 법적 요소를 다 배제하고, 오롯이 종가의 적장자 혈통만을 따졌을 때도 남연군 집안이 최우선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인평대군 종가 자체는 이진익의 장남 이병순(즉 남연군의 큰아버지)의 후손으로 이어졌지만, 철종 사망 당시 이병순의 후손들 중 철종의 조카뻘 항렬은 없었으며, 당시 인평대군의 종손인 이연응은 철종과 같은 항렬이었다.[14]

그러면 차순위인 이병원의 후손들 중에서 골라야 했는데, 이병원의 장남 이도중 계열은 3남 이휘중의 장손 이재윤이 고종 즉위 후에 양자로 들어가 이었다.

그래서 이병원의 차남 계열이 가장 적절했다. 그런데 그 차남이 바로 남연군이다. 즉, 족보 상으로든, 혈통 상으로든 어떻게 따지고 들어가도, 은신군 - 남연군 후손들 중에서 다음 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5. 그럼에도 흥선군의 로비가 즉위에 영향을 미쳤다[편집]


하지만 남연군 후손들은 많았고 그 중에서도 굳이 이명복이 국왕으로 선택받은 것은 순수한 흥선군의 정치적 로비 결과이다. 심지어 흥선군의 형인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에겐 모두 아들이 1명씩 있었으며, 흥녕군과 흥완군의 자식은 양자였지만 이들도 다 친동생들의 자식이었기에 혈통의 문제는 없었다.[15] 종법상 이명복보다 서열이 높은 저들을 제치고 이하응은 자신의 친자를 다음 왕으로 옹립한 것이 여러모로 자기한테 이득이 되니까 내세운 것이다.

사실, 원래 종법제하에서 적통 아들이 1명뿐인 경우에는 다른 계통으로 입양시키지 않고 그 다음 순위 서열에 해당하는 사람이 입양 가는 관습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었으며, 이를테면 새로 입적하는 집안이 본가보다 서열이 더 높은 경우에는 적통 아들, 심지어는 차기 종손을 입적시키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로는 대표적으로 경창군의 10대 종손이 될 예정이었으나 흥완군에게 출계한 이을경(훗날 완순군 이재완), 경창군의 증손 연은군 가문의 7대 종손이 될 예정이었으나 영평군에게 출계한 이순달(훗날 청안군 이재순) 등이 있다. 그런 점을 볼 때 이재원, 이재면, 이재긍철종 혹은 익종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선택지였다.

이재긍의 경우 생모가 안동 김씨 세도 가문이였기 때문에 안동 김씨 세도를 경계하던 차기 왕위 지명 최종결정권자대왕대비 신정왕후(효유대왕대비)이재긍을 후계자로 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무리 형 흥완군에게 양자로 보냈다지만 자신의 적장자인 이재면을 놔두고[16] 차남인 이명복을 왕으로 추대한 것에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철종이 사망할 당시 이재면은 19살로 당시 기준으로는 성인이었다. 따라서 이재면이 왕위에 오르면 흥선군이나 신정왕후(효유대왕대비)섭정(대리청정)하며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는게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흥선군은 나이가 찬 이재면 대신 아직 어려 당분간은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둘째 아들, 즉 어린 12살 이명복을 다음 왕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혈통 문제 및 흥선군의 사전 작업으로 이명복조선의 제26대 임금 고종으로 정식 즉위했다. 흥완군의 양자로 갔던 형 이재면(후의 흥친왕)은 동생인 고종의 즉위로 인해 본가로 돌아가 본래 가문인 흥선대원군의 대(운현궁)를 다시 정식으로 이었다.

[1] 擇君. 더 나은 임금을 선택하다.[2] 철종이 순원왕후에 의해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정조의 손자가 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형 효장세자의 양자였으므로, 법적으로 사도세자의 현손(4대손) 고종과 효장세자의 증손(3대손) 철종은 영조를 공통조상으로 한 9촌 간이다.[3] 고종이 순조의 손자(익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이 되었으므로, 즉위 후에는 철종과 3촌 지간이다.[4] 종질5촌, 재종질7촌, 3종질9촌, 4종질11촌, 5종질13촌, 6종질15촌, 7종질17촌[5] 사실 유교적 종법상 같은 항렬도 안된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직접 왕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철종과 항렬이 같았기 때문이다.[6] 철종은 예외적으로 항렬상 선왕 헌종의 숙부 뻘이었지만 본인의 가계를 제외한 나머지 왕족들이 너무 먼 왕족들이라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법도를 어기고 즉위시킨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법도를 어기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나이가 다소 어리더라도 가급적 (헌종과는 같은 항렬인) 철종의 아들뻘 항렬(이'재'O 돌림) 중에서 다음 왕을 정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같은 항렬에서 고르더라도 선왕보다 연상을 후계자로 세우면 안 되었다. 철종 사후 철종의 형 영평군이 즉위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7]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奉嗣孫)이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지명받았으며 항렬상 계보가 명확하지 않아서 당시에는 모두들 은신군을 그냥 사도세자의 친자로 인식하고 있었다.[8] 철종의 형 회평군(懷平君)은 자식없이 죽었고 영평군(永平君) 또한 후사가 없었다. 영평군은 훗날 양자를 들이는데, 고종 즉위 이후의 일이다.(어른의 사정 때문에 회평군의 후사는 두지 않았다.)[9] 은전군파의 이재근에겐 동생 3명이 있었지만 다 고종 즉위 이후에 태어나서 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10] 서출로서 국왕이 된 대표적인 예가 영조, 순조.[11] 그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임금이었던 사람은 5대조 영조였다. 4대조(고조부) 사도세자가 장조 의황제로 추존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한참 뒤인 대한제국 수립(1897년) 이후의 일이었다.[12] 정확히는 은전군의 양손자로 입적한 완평군(이재근의 아버지)이 경창군의 9대손이었다.[13] 擇君. 더 나은 임금을 선택하다.[14] 이병순의 차남 이화중의 손자 이재하가 생존해 있긴 했지만 그는 원래 광평대군파 출신으로 나중에 입양 왔다. 그리고 훗날 인평대군파의 종가를 잇는 이병순의 장증손이자 이연응의 아들인 이재극은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 태어났다.[15] 흥녕군의 아들(양자)은 이재원(흥완군의 친자)이었고 흥완군의 아들(양자)은 이재면(흥선군의 친자), 흥인군의 아들은 이재긍이었다.[16] 심지어 고종 즉위 후 다시 불러들여 본인의 후사를 잇게 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사실상 흥완군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건 배제할 이유는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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