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의 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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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삼정의 종류
3.1. 전정(田政)
3.2. 군정(軍政)
4. 이후
5. 기타
6. 같이보기


三政의 紊亂


1. 개요[편집]


19세기 조선 왕조에는 국가 재정 수입의 3대 요소로 전(田政)·군(軍政)·환(還政)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틀어 삼정이라고 하고 삼정의 문란이란 바로 이 제도가 문란해져 올바르게 운용되지 않았던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상술한 환정, 즉 환곡(還穀)은 조세 제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였던 데다 환곡의 부정부패도 전정, 군정의 부정부패와 양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 당대부터 삼정의 문란이라고 묶여서 불렸다.

2. 상세[편집]


세도정치 시기에 발생한 문제라고 오해하기 쉬우나 역사적으로는 조선 중기부터 있었던 정치 변동과도 큰 관련이 있다.

첫째로 조세의 전세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다. 조선 전기의 세금은 전세, 공납, 역 셋이었다. 전세는 말 그대로 밭에 할당된 세금이고 공납은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 역은 요역과 군역이다. 이 중 공납은 대동법에 의해 베 아니면 쌀, 그것도 아니면 돈으로 납부하는 것으로 대체되었고 요역과 군역은 군포, 결작, 삼수미로 대체되어 역시 베 아니면 쌀로 납부하는 것으로 통합되었다. 결국 백성들이 나라에 내는 세금은 거의 다 쌀, 포, 돈 셋으로 된 셈이다.

둘째로는 조세의 중앙집권화 경향이다. 이렇게 조세가 미곡으로 통합되자 비총법이 시행되었다. 비총법은 세수 총액을 미리 정해 놓고 각 지방에 할당하는 세법이다.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운 공납과 부역이 전세에 통합되자 세수를 정확히 액수화해서 운용하는 제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한 혁신처럼 들리고, 이전 시대에 비해서는 혁신이 맞지만 사실 실제 시행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란 조선 왕조 내내 있었던 관아분권적(?) 조세재정구조였다. 현대인들은 중앙에서 세금을 걷고 그 예산을 중앙에서 결정하고 그 돈을 각 국가기관에 분급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조선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 각 관아가 각자 알아서 세금을 걷었고 알아서 굴러가고, 중앙에서 관아들에게 얼마를 내라고 하는 것만 내면 나머지는 해당 관아가 관료 및 아전들이 가지는 구조였다.

각 관아는 둔전이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각 관아가 자체적으로 설정한 세율이나 운영 방식에 따라 굴러갔다. 이런 관아 소속 둔전을 관둔이라고 한다. 원래는 관에 소속된 관노비를 부려 경작하는게 원칙이지만, 실제로는 백성을 강제 동원하여 경작하는 일이 흔했고, 그나마 관대하게 굴러가도 양민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4할의 높은 소작료를 받았다. 이러한 관둔은 조선 토지의 30%에 달했다.

또 군정 역시 마찬가지로, 군역을 질 수 있는 양인으로 여겨지면 군적에 등록되고 대부분의 경우 군포를 내는 것으로 퉁쳐지는데, 이 군적 역시 중앙이 모든걸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각 관아가 자기네 앞에 양인들의 군적을 등록하면 각 관아가 양인들에게서 알아서 군포를 걷고, 그 관아들이 각자 먹은 군적의 군포들을 제외한 나머지만이 중앙의 호조 재정으로 들어갔다.

이 때문에 조선의 중앙과 각 지방 관아들은 자기네 앞으로 할당될 토지와 군적을 가지고 경쟁하는 관계(...)였고, 자기네 앞으로 할당되는 토지와 군적을 늘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세금을 내리는 괴이한 상황이 연출된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좋았겠지만, 관아와 조정 입장에서는 언제까지나 세금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덕분에 재정에 한계가 닥치자 왕권이 강력했던 숙종이 결국 시행한게 비총법인 것.

교과서 수준의 이야기에서는 비총법은 아예 언급도 없고 그냥 매관매직한 탐관오리 때문이라는 식으로 써 놓았지만 사실 세도정치가 극심하다던 철종 시기에도 하류층에서 과거급제자가 무려 50%에 달했을 정도로 다양한 계층에서 유학 정신을 탑재한 인재가 조정으로 들어왔고 암행어사들도 수령에 대해서 긍정평가하는 비율이 절반을 넘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단순히 탐관오리라는 개인적 문제로 인해서 광범위한 사회 문제가 생겼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원래 조선 조 초기의 세법은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으로, 농사의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눠 전세를 걷는 것으로 일종의 정률제 세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정이 매해 농사 풍흉을 조사하기 번거로워서 조사관 파견을 관두고 지방에 알아서 신고하게 했는데 무조건 하중하, 즉 농사 상태가 최악이라고 보고하는 일이 생긴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로 그냥 하중하로 고정하는 영정법이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재정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되자 숙종이 비총법을 실시하여 중앙에서 세수 총액을 미리 정하고 각 지방에서 신고되어 있는 결수에 따라 각 지방에 비례 할당을 하는 방식으로 바꾼다. 이러면 각 지방 관아들이 비례 할당한대로 그대로 세금을 바쳐야 했다. 그리고 실무에서는 기존의 각 관아가 둔전이나 군적으로 '합법적'으로 얻은 세액 중 상당수가 그대로 중앙에 삥뜯기게 된다. 하지만 관아들이 돈이 어디서 튀어나와서 지방 행정을 굴릴 수 있는건 아니라, 어디서라도 뜯어와야 했다. 그 문제는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가됐다.

지방관들은 이렇게 중앙에서 현지 상황을 보지도 않고 그냥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할당해 버리는 세액을 위로 바쳐야만 했다. 안 내면 인사고과에 당연히 악영향이 있었다. 그렇다고 중앙이 이런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서 해결해 줬냐고 하면 또 아니라 이런 문제로 지방관이 세금을 수취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또 암행어사가 와서 수령을 조졌다. 정조가 암행어사를 잘 활용하여 백성을 보살핀 명군처럼 알려져 있지만 위에서 말했듯 신고 토지 결수를 생까고 액수 고정하는 무지막지한 제도를 도입한게 정조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본문이 이하에서 설명하는 삼정의 문란이 고착된 것이다.

이러한 비총법은 군현에서도 동리, 즉 마을 단위로 할당하여 거뒀기 때문에, 백성이 토지에서 이탈하거나 사망하는 일이 있어도 과세가 소멸하지 않고 주변인들에게 이중 삼중의 과세로 들러붙었다. 한 농민이 도망치면 그 옆의 네 가구(오가 작통법)에게 징세하고, 이를 버티지 못한 농민이 또다시 이탈하고, 결국 다섯 가구 내의 인원이 다 이탈하면 친척을 찾아가고, 그 친척이 다시 이탈하고, 다시 그 이웃에서 번지는 식의 도미노가 반복되었다.

3. 삼정의 종류[편집]



3.1. 전정(田政)[편집]


전세, 즉 농사짓는 땅에 매기는 토지세를 말한다.

대개의 경우 전세를 말한다면 토지 1결당 매기는 세금 20.2두[1]를 칭한다.

엄밀히 말하여 토지세는 농민의 부담이 아니고 지주의 부담이다. 현대 사회에서처럼 건물주가 세입자에게 자기 세금을 전가하는 문제는 조선 시대에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전세의 부과 대상은 지주였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비총법의 시행 과정에서, 세액을 동리별로 할당하고 그 뒤 아전과 향리들이 징세 실무를 담당하게 되는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다. 동네 사람들과 가까운 아전과 향리들은 강약약강의 처세로 지역의 권세가들에게서는 전세를 걷지 않고 농민들에게서는 수취하는 행태가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혁파하려면 면세 토지를 줄이고, 토지 조사를 통해 실제 경작 토지(起田, 기전)과 황폐화 된 토지(陳田, 진전)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했으나, 이것을 위한 양전(量田, 토지 조사)은 1720년 숙종의 마지막 양전 이후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 백지징세(白地徵稅): 토지가 없는데 장부를 허위로 조작하여 세금을 걷거나 세(稅)를 부과할 수 없는 황폐한 진전(陳田)에 대해서 과세하는 것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 진결(陳結): 백지징세의 일종. 진결의 '진'은 황무지를 뜻하는 것인데 말 그대로 황무지에다 세금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경작하지 않고 놀고 있는 땅에 세금을 걷는 것도 역시 진결에 해당한다.
  • 은결(隱結): 양안(量案: 토지 대장)에 양전(量田)을 실시할 때 비옥한 전답의 일부를 원장부에서 누락시켜 그 조세를 빼돌리는 것이고, 비슷한 것으로 여결(餘結)이란 것이 있는데 그냥 합쳐서 은결이라고 불렀다.
  • 도결(都結): 앞서 말했듯 조선 후기에 전정은 1결 당 미곡 4두인데 이를 2배인 8두로 걷는 등 정액 이상으로 징수하는 것을 도결이라 한다.

3.2. 군정(軍政)[편집]


군역을 지지 않는 16세 ~ 60세의 남성들이 내는 군포(조세 제도)(軍布)를 말한다.

조선 초기부터 군역은 실제 군복무를 하는 사람(번상병番上兵)의 급여를, 실제 복무를 하지 않는 사람들(보인保人)에게서 포를 수취하여 지급하는 것으로 나눠져 있었다. 하지만 초기부터 다들 실제 군복무는 정말 하기 싫어했는데 그도 그럴게 여진이나 왜구가 쳐들어오는 최전방을 빼면 군인을 거의 대부분 수령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노동력 취급해서 부역과 노역에 동원하는 데만 썼기 때문이다. 군역이 사실상의 노역화 된 수준이었다. 현대 한국군도 작업이 태반이라고 하지만 진지공사나 장비점검 등 전투랑 관련이 있는 작업인데 조선은 그런 것도 없이 무기가 녹슬고 갑옷의 찰을 빼돌려 팔아먹는 지경이었다. 이런 기강 문란은 조선군의 약체화에도 동시에 기여했다. 조선보다 2천년 전에 쓰인 손자병법에도 병졸을 노역에 쓰지 말라고 하는데...하여간 이 때문에 번상병조차 다른 사람을 내세워서 그 사람에게 포를 주고 대신 복무를 시키는 관습(대립,代立)이 퍼진다. 그리고 이 대립조차 한명이 투잡 쓰리잡을 뛰면서 조선 중기 무렵부터 장부 상의 군인만 많고 실제 병력은 대립을 서는 소수만 남아버리자, 국가가 아예 대립을 제도화하여 대역납포제를 시행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거치고 영조 무렵에 5군영이 설치되어 병사들은 실질적으로 거의 다 이러한 직업군인으로 변했고, 대부분의 백성들의 군역은 군포 납부로 변한다. 이러한 군포는 군영마다 달랐으나 숙종 때 보인 1명 당 2필로 고정되었다. 이것도 영조 시기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되어 기존 1년에 2필의 군포를 걷던 것을 1년에 1필, 즉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를 왕실[2], 지주[3], 상류층[4]이 보충하는 형태로 바꾸는 동시에, 결작이라고 하여 밭에 결 당 2말을 징수하는 것으로 바꾼다.

이렇게 군역이 대체가 되었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군복무는 될 수 있으면 안하려고 드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보니 다양한 수단으로 군역을 피해서 군역에 대한 대체 세금도 피하려고 했다. 향교에 등록하는 방법, 서원에 원생으로 들어가는 것, 향직(鄕職)을 맡는 것, 향안(鄕案)에 올라 면역하는 방법, 아전들의 계방촌(契房村)에 등록하는 법 등 다양했다.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궁방전이나 관둔전에 투탁하기도 했고, 지방의 아문도 군포가 필요하다며 자기들 앞에 군적을 돌려놓고는 했는데 이런 지방 아문들이 군포를 더 싸게 할당했기 때문에 지방 아문 앞으로 군적을 등록하기도 했다.

그래도 상놈이 서원 앞에 학생으로 등록하긴 쉽지 않을테니 이런 꼼수로 인한 조세회피는 적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서원은 그 회피된 군포를 자기들 앞에 대신 내라고 주장하는게 일반적 관습이었기 때문에 서원이 직접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기들 앞의 학생으로 등록해놨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조선 후기에 양반의 수가 인구의 70% 에 달했다고 서술한 글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실제 양반 수가 아니라 이러한 꼼수로 유학호로 등록된 수를 다 양반으로 쳐서 나온 집계다. 즉, 조선의 느슨한 인구 집계로조차 30% 가 군역을 부담하고 70% 는 군역을 빠졌다. 군역을 지고 군포를 내는게 병신이었던 수준이다. 이렇게하여 군적에 등록 된 인구 수는 조선 후기 장부상 700만 인구 중 100만에 불과했고[5] 실제 병사 수는 2만 5천에 불과했다.

이렇게 세금으로 대체된 군역들 역시 비총법이 적용되어 징세되었다. 또 위에 말했듯 정조 시대에 비총법을 통한 수취에서 더 이상 장부 상의 세수를 줄이지 않기로 결의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농민의 도망이나 탈세로 인해 걷을 대상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징세 대상자들에게 없는 군필을 걷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수령들은 장부 상의 조세를 걷지 못하면 평가가 깎였기 때문에 별 희한한 방법을 통해서 군포를 걷어야 했다. 결국 이런 폐단은 순조 이후 세도정치 시기에 극에 달하게 된다. 군정에서 나타난 폐단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백골징포(白骨徵布): 백골이란 말 그대로 죽은 사람을 뜻한다. 죽은 사람은 당연히 군역을 질 수가 없지만 사망자의 호적에서 사망 사실을 고의로 누락하고 계속 산 사람처럼 꾸며서 군포를 징수했다.

  • 황구첨정(黃口簽丁): 황구(黃口)는 어린이를 말하는데[6][7] 앞서 말했듯이 군역을 지는 대상은 정(丁) 즉, 16~60세 남성들이었다. 그런데 16세가 안 된 어린이의 나이를 허위로 올려서 16세 이상의 정으로 만들어 군포를 징수하였다.

  • 강년채(降年債): 위에서 언급한 황구첨정과는 반대 개념이다. 군역을 지는 대상은 16~60세 남성들이므로 60세를 초과한 노인들 역시 군역 대상이 아니므로 군포 징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60세를 초과한 노인들의 나이를 억지로 내려서 60세 이하의 정으로 만들어 군포를 징수하였다.

  • 족징(族徵): 만약 납세자가 이것을 못 버티고 도망칠 경우 연좌제를 적용하여 친척이 대신 내도록 하는 것이다. 친족이 대신 납부하도록 했다고 하여 족징이라고 부른다.

  • 인징(隣徵): 당시 조선 사회는 5가구를 묶어서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였는데 만약 한 가구가 도망칠 경우 다른 4가구에게 감시를 똑바로 못한 책임을 물어서 그 도망자 가정의 과세분까지 몽땅 떠넘겨 대신 내도록 하는 것이다. 이웃이 대신 납부하도록 하였다 하여 인징이라고 부른다.

  • 이 외에도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정약용목민심서에서는 딸을 아들로 서류를 위조해서 징수하거나, 집에서 키우는 개와 곡식을 찧는 절구를 사람이름으로 올려서 징수한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약용이 내용을 꾸미지 않았다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폐단들은 당시의 농민들에게 커다란 부담이자 고통이 되었다. 농민들은 한겨울에 집안에 불을 때우지도 못하고 옷도 입지 못한 채로 서로가 부둥켜 안으며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8], 당시의 군포 부담을 견디지 못한 가장이 자신의 그것을 자르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정약용의 시, 애절양(哀絶陽)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 밖에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 심지어는 절굿공이까지 군적에 올려 군포를 걷었다는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3.3. 환곡(還穀)[편집]


환곡이 흔히 구휼제도라고 말은 하고 실제로 그런 목적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목적은 곡식(穀)을 갈이(還)하는 것이다. 관아들이 군량미 건 재정 목적이건 쌓아두고 있는 쌀을 계속 내버려두면 썩기만 하니 오래된 쌀을 갈이할겸 백성들에게 뿌리고 새로 채워넣으면 구휼 겸 쌀 관리가 된다. 이런 목적 상 초기부터 토지를 보유해서 쌀을 갚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백성들에게만 환곡을 줬는데다가 풍흉이랑 관계 없이 오래된 쌀이면 방출했기 때문에 구휼이 온전히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환곡은 조선 초기부터 지방 재정 상의 이득을 위해 운용된 면들이 여럿 있다. 세종 시절부터 쌀로 갚기 어려우면 베, 구리 등으로 납부하게 했고, 나중에는 그걸 선불로 내야 환곡을 지급했다. 한마디로 세종 시절부터 이미 그냥 쌀을 파는 행위(...)로 변해 있던 것. 또 세조 시절에는 빌려준 환곡에 이자를 붙여 받는 취모법이 시행된다.

이러다가 16세기 중엽 명종 때 중앙재정이 파토가 나자 각 지방 관아에서 운영하던 환곡에서 취식한 10분의 1을 호조에 회록(會錄: 국가 회계에 편입시키는 것)하는 일분모회록 제도가 제정되었다. 이게 좋게 말하면 위에서 말한 지방 재정의 중앙 편입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돈이 없어서 지방 관아 재정을 삥 뜯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왜란과 호란을 치르면서 재정이 극도로 어렵게 된 17, 18세기에 이르러 더욱 확산되어갔고, 결국 환곡은 세금에 준하게 된다.

또 부세화되어가자, 해마다 일정한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서 강제로 대여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서 환곡의 운영은 정약용이 “국가 재용의 절반은 부세에 의존하고, 나머지 절반은 환자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로 구빈·구휼보다는 세입에 치중하는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또 환곡의 이익이 점점 국가 재정으로 뺏기는데 중앙은 지방관아로 예산을 따로 분급하지 않았던 조선의 재정구조 상, 지방 관아들은 자체 운영비 조달을 위해 환곡을 더욱 강력하게 돌리게 된다. 환곡의 문란은 이런 점에서 생겨난다. 환곡에서 나타난 폐단은 세 문란 중 가장 심각했는데 그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늑대(勒貸): 환곡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백성들에게 강제로 곡식을 빌려주는 것을 뜻한다. 형편이 어느 정도 나아서 안 빌리려는 경우 혹은 '차라리 그냥 굶어죽을란다.' 하는 마음으로 안 빌리려는 경우 이런 것들 모두 막론하고 그냥 강제로 곡식을 떠넘기거나 빌릴 때까지 죄인으로 몰아 고문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놓고 받아낼 건 다 받아챙겼다.

  • 장리(長利): 사실 본래 환곡은 곤궁한 농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시행된 복지제도였기 때문에 처음엔 이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상평창에서 담당하면서 이자를 조금씩 받기 시작하였다. 환곡을 되받을 때 붙이는 모곡은, 처음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에 2할(20%, 연리 40%)였고, 조선 후기에는 6개월에 1할(10%, 연리 20%)였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 점점 조선 사회가 부패해지면서 탐관오리들은 제멋대로 이율을 올려버렸다. 그리하여 제멋대로 1/5, 1/3로 올리다가 급기야 말기에 가면 이자를 6개월에 5할(50%, 연리 100%) 이상으로 걷어가기까지 했는데 이 경우를 장리라고 불렀다. 환곡의 폐단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부류이다.

  • 분석(分石): 빌려주는 곡식에다 쌀겨, 모래, 등을 섞어서 주거나 물로 불려서 양을 속이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농민 A가 환곡으로 쌀 1섬을 대출받았다고 치면 실제 포대 안에 들어가 있는 쌀 양은 반 섬밖에 안 되고 나머지 반 섬은 쌀겨, 모래, 돌 등이었다는 식이다. 사실 이건 환곡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횡령의 방법 중 하나인데 이 분석의 행태가 제대로 터진게 조선후기 왕조몰락의 시발점인 임오군란이다. 그 때에도 13개월 치 봉급을 체불한 후에 겨우 1달 치 봉급을 주었는데 그 봉급으로 나온 쌀에 모래와 쌀겨 등이 잔뜩 섞여 있었다.

  • 반작(反作)[9]: 장부를 허위로 조작하는 것을 말한다. 이 역시 분식회계의 일종인데 분식회계 사실이 들통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실물과 맞아야 하는 법이므로 역시 그 차액분을 농민들에게 억지로 징수하였다. 그리하여 그 농민이 곡식을 안 꾸어먹었는데도 곡식을 꾸어먹은 것으로 날조하여 걷어내기도 했고 빌린 양을 날조하여 걷어내기도 하였다. 이 형태를 반작이라고 부른다.

  • 허류(虛留): 전임(前任) 관리나 지방의 아전이 결탁하여 창고에 있는 양곡을 횡령, 착복하고 장부상으로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기재하여 후임 관리에게 인계하는 것을 말한다. 국법에는 이러한 경우 엄격한 처벌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허위 문서의 작성자와 인수자가 서로 공모하여 은폐시켜서 환곡의 폐단은 국가 재정의 궁핍화를 가속화시켰다. 위의 반작과 차이점은 반작의 경우는 장부 조작이긴 한데 그건 '환곡 출납 대장'을 조작한 것이고 이것은 창고 내 보관 중인 장부를 조작한 것을 말한다.

4. 이후[편집]


파일:철종-고종기 농민 봉기.png
철종~고종기의 농민 봉기를 나타낸 지도.

결국 삼정의 문란을 참지 못한 백성들은 폭발하여 농민 봉기에 가담하거나 도적의 무리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어영부영 계속 방치된 삼정의 문란은 조선 후기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는 홍경래의 난과 진주 민란으로 대표되는 임술농민봉기의 원인이 되어서 조선은 급속히 막장으로 달리게 된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철종 대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 만들어져 환곡을 전정으로 대체하여 걷자는 결론을 냈다. 하지만 당시 관례상 환곡에서 나는 이득은 지방관아의 아전과 수령이 성과급으로 나눠먹는 구조였고, 각 지방 관아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시행되지 못했다. 결국 민란이 대충 가라앉자 결국 현상유지를 내세웠다. 삼정이정청 자체가 임시 관청으로 만든거라 3개월만 운영되고 폐지된 탓에 해결이 될리가 없었으며 진주민란 이후에도 민란이 지속되었다.

흥선대원군 때 와서야 겨우 적극적인 시정이 이루어졌는데, 양전사업으로 은결(隱結)[10]을 색출하면서 전정을, 호포제(戶布制)[11]를 실시하면서 군정을, 마을 단위로 주민이 관리하는 사창제(社倉制)[12]로 되돌리면서 환곡을 해결하여 그나마 사정이 나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당백전으로 전부 개박살이 나 조선의 재정은 그 뒤로 망할 때까지 정상화되지 않았다. 결국 임오군란동학농민운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때부터는 수령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처단하기 시작한다. 조선 정부 또한 주동자 처형에서 대충 정리했던 이전과 달리 대량학살을 감수하고 양반들의 무차별적인 보복을 묵인하는 등 무자비한 진압을 벌였으나 결국 떠나간 민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일본의 침략과 더불어 조선 멸망의 여러가지 이유들 중 하나가 된다.

이 삼정의 문란이 정말로 끝난 것은 조선이 근대적 개혁을 시작한 갑오개혁이 되어서야의 일로, 모든 세금을 금납화하고 조세법정주의가 시행되었으며 환곡은 그냥 폐지하고 전세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전결의 파악은 여전히 미진하였으며, 개혁의 성과가 다 나타나기도 전에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휩쓸린 조선은 일본에 병탄되어 멸망한다.

5. 기타[편집]


21세기에 과세, 세무조사와 징집이 막장으로 이루어지는 경우 삼정의 문란에 빗대기도 하는데 실제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집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족징과 인징을 '불법적인 사회적 폐습으로의 보증연대'로 서술하고 있다.


6.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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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정법의 기본적인 전세 4두+균역법의 2두(결작)+삼수미(훈련도감)세의 2.2두+대동미(대동법)의 12두[2] 어염, 선박세[3] 결작, 토지 1결당 2두[4] 선무군관. 1필. 여기서 말하는 상류층은 경제적인 지위를 뜻한다. 봉건제적 신분질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경제적 상류층에 양반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예외도 존재한다.[5] 1729년 기준으로, 실제 인구는 1700만~1800만 정도로 추산된다.[6] 당나라 개원지(開元志)에 의하면 갓 태어난 아이를 황(黃), 4살을 소(小), 16살을 정(丁), 60살을 노(老)라 한다고 적혀있다. 구(口)는 인구, 호구에서 쓰는 용법과 같이 사람을 셀 때 쓰는 단위다. 통감절요 주석에 의하면 황은 어린아이의 머리카락이 누런 것에서 왔다고 한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참새의 새끼가 부리가 노란 것에서 따왔거나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은 음식을 먹고 입을 잘 닦지 못해 누런 입(黃口)으로 보여서 그렇게 불렀다는 주장도 있다.[7] 이 황구첨정, 백골징포는 이미 숙종때 호포제 실시 논의에서 윤휴가 언급할 정도로 오래되었다.[8] 정약용도 유배 생활 중 이를 보고 '큰아들 5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 2살 된 둘째 아들도 군적에 올라 있어 세금이 지나치니 가족 모두가 차라리 빨리 죽어 버리기를 바랬다. 이런 상황에서 옷이 다 무엇이랴' 라고 묘사하였다.[9] '번질'이라고 읽어야 한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0705&cid=40942&categoryId=33383[10] 등록을 하지 않고 숨긴 토지[11] 쉽게 말해서 유학호(儒學戶: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한다는 제도. 1명당 2냥씩 징수했다.[12] 요즘으로 치면 국가가 관리하는 생활안정자금대출이 하도 엉망으로 운영되어 민폐만 끼치자, 차라리 그 동네 사람들과 거래를 많이 튼 착한개미저축은행에서 돈을 꿔주는 걸로 전환시켰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창제를 실제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은 결국 그 지역에 계속 살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양반인 경우가 많았고 지나친 이득을 보려다 인심을 크게 잃는걸 몇년 하다 가버릴 관리보다는 껄끄러워했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 사창제를 했다가 폐단이 너무 심해서 폐지했던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