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조선~대한제국/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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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왕 어진
1.1. 조선 태조
1.2. 조선 정종
1.3. 조선 태종
1.4. 조선 세종
1.5. 조선 문종
1.6. 조선 단종
1.7. 조선 세조
1.8. 조선 예종
1.9. 조선 덕종(의경세자)
1.10. 조선 성종
1.11. 연산군
1.12. 조선 중종
1.13. 조선 인종
1.14. 조선 명종
1.15. 조선 선조
1.16. 광해군
1.17. 조선 원종(정원군)
1.18. 조선 인조
1.19. 조선 효종
1.20. 조선 현종
1.21. 조선 숙종
1.22. 조선 경종
1.23. 조선 영조
1.24. 조선 장조(사도세자)
1.25. 조선 정조
1.26. 조선 순조
1.27. 조선 문조(익종, 효명세자)
1.28. 조선 헌종
1.29. 조선 철종
1.30. 대한제국 고종
1.31. 대한제국 순종
2. 왕후의 그림
3. 기타 왕족의 그림
4. 외척의 초상화
5. 신원을 알 수 없는 초상화
5.1. 신정왕후(추정)
5.2. 명성황후(아닐 가능성 매우 높음)


1. 국왕 어진[편집]



1.1. 조선 태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선태조어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조선 정종[편집]


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도움을 준 공신(정사공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어진이 같이 제작되었다. 중종실록 35년 10월 12일자를 보면 정종의 어진이 네 점 있었는데, '용모가 긴 듯하고 수염이 많고 왼쪽 뺨에는 모두 황지(黃痣, 누런 사마귀)가 있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1.3. 조선 태종[편집]


태종의 어진은 1402년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도움을 준 공신(좌명공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같이 제작되었다. 살아있을 당시 태종은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논지로 자신의 어진을 없애라고 지시하였지만, 아들인 세종이 차마 그럴 수 없어 보존해두었다고 한다. 이후 세종 때 태조, 태종, 세종, 소헌왕후의 어진을 한꺼번에 새로 그려 선원전에 봉안하였다.

선조실록 27년 9월 5일자에 보면 어진이 '다 삭아서 조각조각 떨어져 그림이 하나도 완전한 것이 없기에' 명종의 어진과 함께 처리하였다고 한다.


1.4. 조선 세종[편집]


세종실록 16년 4월 15일자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선현(先賢)이 유상(遺像)에 대하여 의논하기를, '어쩌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게 되면 진(眞)이 아니니,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이 오리려 나을 것이다.' 하였으나, 이제 내가 문소전(文昭殿)에 위판(位版)을 배설(排設)하여 선령(先靈)을 봉안(奉安)하고, 그 옛날의 문소전에 봉안하였던 태조(太祖)의 쉬용(晬容)-을 평양(平壤)으로 옮기고자 하여 경 등에게 의논을 하매, 모두 말하기를, '오직 한 벌뿐인 쉬용을 만일 먼 곳에 봉안(奉安)하게 되면 잃어 버리거나 훼손할까 두렵습니다. 만일 잃거나 훼손되면 후신(後臣)들이 어찌 성안(成顔)을 알겠습니까.' 하므로, 내 그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노라. 과연 이 화상(像)이 아니면 후손들이 무엇에 의거하여 선왕의 얼굴을 뵙겠는가. 또 역대(歷代) 제왕(帝王)이 상(像)을 그려서 자손에게 남겨 준 이가 있으니, 나도 또한 진용(眞容)을 그리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화상은 모름지기 나이 젊어서 그려야 하노라."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공자와 회암(晦庵)도 모두 유상(遺像)이 있사오니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지당하시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64권, 16년 4월 15일

요약하자면 세종은 조금이라도 다르게 그리면 초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릴 생각이 없었으나, 신하들이 어진이 없으면 후대의 사람들이 선왕의 얼굴을 어떻게 알겠냐는 말에 생각이 바뀌어 그리기로 했다, 그리고 기왕 그릴 거면 젊을 때 그리는 게 낫다고 말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기록 직후에는 어진 제작 관련된 기록이 없어 이 직후에 그림을 그렸는지는 의문.

확실한 기록은 1443년 태조와 태종, 소헌왕후의 어진을 한꺼번에 그렸다는 기록뿐이다.


1.5. 조선 문종[편집]


문종 당대에는 어진 제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나, 인조실록에 문종의 어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조실록 13년 5월 14일자를 보면 문종의 어진을 확인했다는 기록이 한 번 나온다. 그러나 그 외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1.6. 조선 단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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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군 영모전에 봉안돼있던 단종 승마 영정
복원한 승마 영정

강원도 영월에서는 단종을 태백신으로 여겨 지금도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이 근방의 사찰 들이 그 추모제를 열고 있다. 원래 그 전에는 용포를 입으며 단상에 앉은 모습의 단종 영정, 또는 나무인형으로 영모전에 봉안 되어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훼손이 심각해졌고, 1927년 영월 군수 이규진이라는 사람이 목상은 불태우고, 불교 탱화기법으로 다시 제작해 만든 민화 형태의 영정이다. 단종을 끝까지 모셨던 충신 추익한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머루달래를 바치는 모습이다.

이 영정은 6.25 전쟁때 영모전[1] 이 폭격을 맞으며 소실이 되었고, 운보 김기창 화백에게 복원을 의뢰하여 다시 만들었다. 지금은 여러곳에서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많아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3~4개 버전이 있는듯하다.) 현재는 다시 세운 영모전에 붉은 용포 모습의 승마 영정이 봉안 되어있으며 이 영정을 표준삼아 추모제를 연다고 한다.
파일:단종의어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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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00호
권오창 화백 작
단종 김호종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그린 어진
이외에도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단종의 어진과 김호종 교수가 그린 어진이 있지만 이 둘은 어디까지나 상상도이다. 표준영정은 제작할 때 고조할아버지(태조), 큰증조할아버지(익안대군), 큰할아버지(효령대군), 삼촌(세조)의 초상을 참고했다고 한다.


1.7. 조선 세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세조(조선)/어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 조선 예종[편집]


성종 3년 5월 25일 소헌왕후, 세조, 의경세자의 어진과 함께 제작되었다.


1.9. 조선 덕종(의경세자)[편집]


성종 3년 5월 25일 소헌왕후, 세조, 예종의 어진과 함께 제작되었다. 이때의 덕종 어진은 추사본으로, 덕종 사후 13년만에 그려진 것이다. 참고로 의경세자는 성종의 아버지인데, 성종이 태어난 지 두 달만에 죽어서 성종은 아버지의 얼굴을 이때 처음 봤다고 한다. 성종은 '내가 화공(畫工)으로 인하여 부왕(父王)의 진면(眞面)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며 울었다고 전해진다.[2]


1.10. 조선 성종[편집]


성종의 어진은 성종의 사후 이듬해 2월에 추사본이 제작되었다.


1.11. 연산군[편집]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


1.12. 조선 중종[편집]


김안국이 생전에 어진 도사를 권하였지만 중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중종 사후에 추사되었다. 인종실록 1월 18일자를 보면 두성령 이암 등 당대 유명 화가들을 같이 제작에 참여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말을 탄 영정과 전신이 나온 좌상 두 점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물이 그리 좋지는 않았었는지, 어진이 중종과 닮지 않아 봉안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후 명종 때에도 중종과 닮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 것을 보면 생각만큼 결과물이 좋지는 않았었는 듯.
그리고 임진왜란 시기 선정릉 도굴 사건으로 중종의 정릉에 성명불명의 유골이 발견되자 조정에서는 출처불명의 유골이 중종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조정은 생전에 중종을 봤던 사람들을 수소문해 몽타주를 작성했다.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키가 큰 편이였고 얼굴이 좀 얽었으며 보통의 체격이었는데 정릉의 시신은 풍채가 장대하고 키가 포백척으로(150정도)으로 작고, 체격도 다른 편이였다고 한다.


1.13. 조선 인종[편집]


본인의 뜻에 따라 생전이나 사후에도 어진이 제작되지 않았다.


1.14. 조선 명종[편집]


선조실록 27년 9월 5일을 보면 '진양(眞樣)이 희미하며 조각이 떨어져 고찰할 만한 표적이 없'으므로 처리해버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1.15. 조선 선조[편집]


선조의 어진은 기록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조실록 25년 7월 2일자를 보면 중국측에서 데려온 화사가 '데리고 왔던 화사(畫師)가 어용(御容)을 몰래 그려 가지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어진이 아래의 어진과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파일:선조.jpg

윤탁연이 소장한 선조 어진

윤탁연(1538 ~ 1594)이 소장한 선조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한 점 전해진다. 임진왜란 직후에 그려진 것으로 전립(戰笠)과 융복을 입은 그림이다. 곤룡포가 아닌 것으로 보아 몽진 와중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윤탁연이 직접 그린 것은 아니고, 선조는 평생 어진 그리기를 싫어했다는데 전란의 혼란 와중에 누군가 몰래 선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발견, 이를 입수하여 비밀리에 보관해 왔다. 윤탁연은 직후 전란의 초기에 사망했다.[3] 그가 보존한 어진은 후손들에 의해 전해져 왔으며 1974년 윤탁연의 후손 가문을 발견한 이은상에 의해 발견되었다. 윤탁연의 후손들도 선조의 초상화가 전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가, 이은상의 방문으로 실체를 확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감정사들은 전복 차림이 측면의 좌세이고 좋은 필치가 못 되며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점을 들어 이 그림을 선조의 어진으로 확정짓지는 않고 있다. 흉배에 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선조가 아닐지라도 특정 국왕의 모습을 그린 어진일 가능성은 높지만, 딱히 이 그림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가 전무한 편이라 좀 더 전문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 밑에 나오는 원종의 어진과 굉장히 닮아서 진짜 선조의 어진이 아닐까 하고 추정만 가능하다. 선조의 어진이 맞다면 광해군과 덕흥대원군의 얼굴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설령 선조가 아니라 해도 다른 조선 역대 왕 중 한 명일 가능성은 매우 높은데, 우선 갓 위에 옥로 장식이나 귀를 뚫은 걸 보아 확실히 조선의 고위층 중 한 명을 묘사하고 있으며, 가슴의 흉배이 그려져 있는데, 상식적으로 조선에서 흉배에 용을 그려넣을 수 있는 남성은 왕 밖에 없기 때문. (왕 이외의 왕족 중에서 대원군거북, 부원군두루미, 왕자대군기린을 그려넣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왕이라면 흉배가 원형이어야 하는데 이 그림의 주인공은 신하들이 하는 사각형 흉배를 하고 있는 점이 또 문제다.


파일:이베이선조액자.jpg

이베이에 올라온 선조 추정 어진 모사본

원본은 아니고 누군가 20세기경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조 어진이 이베이에 떴었다. 현재는 판매된 상태. 이 어진은 선조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이 역시 당대에 그려진 실제 어진을 보고 모사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어진 역시 원종의 어진과 닮았으니 진짜 선조 어진이 아닐까 하고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원종 어진을 보고 그린 상상화로 추정할 수도 있겠으나, 원종 어진의 주인공이 원종으로 판명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므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1.16. 광해군[편집]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


1.17. 조선 원종(정원군)[편집]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의주까지 호송하는데 공이 있는 호성공신이 된 바 있기 때문에 공신상이 같이 그려졌다. 또 광해군 때 임해군의 역모를 제보한 공으로 익사공신에도 오른 바 있어 이 때도 공신상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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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부분이 소실된 정원군(원종) 어진

원종(정원군)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이 공개되었다. 부산 용두동 대화재 때 살아남은 신원 미상의 어진 4점 중 하나다. 신원 미상의 어진 2점은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불에 타 들어갔기 때문에 오른쪽 윗 부분에 써있는 문구가 타버려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선원전 어진 목록에 원종의 어진이 머리에 쓴 사모와 단령을 입은 차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어진 양식이 17세기 초상화 양식인 점으로 보아 원종의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되었다. 그리고 2015년 이 어진이 원종(정원군)의 것으로 최종 판명되었다.기사

위의 선조 어진과 함께 인조나 덕흥대원군의 얼굴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표제만 남은 채 얼굴 부분이 모두 타버린 원종 어진이 한 점 더 존재해서 1870년대에 이모된 형식으로 복원을 진행하였다. 현재 본 어진의 복원본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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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복원된 정원군(원종) 어진

2016년 9월, 원종의 어진이 완전 복원됐다. 복원 과정이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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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원종 초상화

선원보감의 초상화는 같은 그림으로 보이며 실제 어진과 비교하면 복식은 비슷하지만, 용모는 대충 그렸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엉망이다.


1.18. 조선 인조[편집]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


1.19. 조선 효종[편집]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


1.20. 조선 현종[편집]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


1.21. 조선 숙종[편집]


파일:숙종추정어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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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어진 (추정)
열성어진에 실린 숙종 초상화

일제강점기 당시 2종류의 어진이 원본+이모본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으나, 6.25 전쟁 이후 관리 실수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위의 왼쪽 그림에서 보듯 숙종 어진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는데, 이것이 숙종 어진이 맞다고 해도 얼굴을 포함한 2/3 부분이 타버려 사실상 복원은 불가능하다.

성균관대학교 조선미 교수에 의하면 숙종 어진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용포를 입은 것으로 보아 곤복본 어진이다. 2) 바닥에 용문이 깔려 있는데, 승정원일기 숙종 39년 4월 13일을 보면 이전에는 바닥에 채전[4]을 용문석으로 바꾸자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숙종 이후의 어진이다. 3) 용문석의 크기와 문양이 순조 어진에서 철종 어진을 보면 후대로 올수록 작고 정교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용문석의 양식으로 보아 적어도 순조 이전의 어진이다. 4) 정조의 경우 1934년 편찬된 선원전영정수개등록을 보면 이미 이때 익선관본 어진이 없었으므로 아니다. 5) 결국 숙종 아니면 영조인데, 곤룡포의 표현 기법이 18세기 초반에 잠깐 등장했던 기법과 유사하다. (남구만 초상, 김석주 초상 등) 결론적으로 18세기 초에 그려진 숙종의 어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선원보감에는 숙종의 초상화가 실려있지 않아 숙종의 얼굴을 알 길이 완전히 없어졌나 싶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열성어진'(列聖御眞)에는 숙종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숙종의 대략적인 모습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는 조선조 왕들의 간략화된 어진을 실어놨는데, 태조, 숙종, 영조의 어진의 간략본도 있다. 다만 열성어진에 실린 어진들 자체가 워낙 실제 어진과 동떨어진 그림 수준이기에, 신뢰도는 많이 떨어진다.


1.22. 조선 경종[편집]


어진 제작 기록이 없다.


1.23. 조선 영조[편집]


파일:attachment/yongjoseja123.jpg
파일:영조어진.jpg
연잉군 시절 영조
조선 영조의 어진[5]

연잉군 시절 영조의 어진은 다른 어진들과 달리 오른쪽 부분만 조금 불타고, 표제가 오른쪽에 있었으면 신원을 밝힐 수 없었는데도, 표제까지 남아있어 매우 운좋게 살아남은 어진이다. 이 어진은 숙종 40년인 1714년, 영조가 21살 되던 해에 화사 진재해가 그린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 1491호이다. 홍룡포를 입은 영조 어진은 51세때의 모습으로 대한제국 광무 4년인 1900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이 모사한 것이다.

MBC에서 방영했던 사극 '이산'에서 이순재가 영조 역으로 출연했는데, 실제로 위의 어진과 외모가 상당히 닮았다.


파일:영조_전신상.png

전주 어진박물관에서 복원한 영조 전신어진

전주 어진박물관에서 위 어진을 바탕으로 한 전신 어진을 만들었다.

파일:tA7ctno.png
열성어진의 영조의 초상

열성어진에 실린 영조[6]의 초상은 위의 어진과 매우 다르게 그려졌다. 연잉군 어진이나 고종 때 이모된 어진과는 전혀 다르다. 그나마 눈매가 치켜올라간 것이나 비슷한 정도이다.

다만 영조는 어진 화사를 자주 했었고, 일제강점기까지도 어진이 6축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2축 외에 다른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도 있다. 수염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잉군 시절과 51세때의 어진의 중간에 그려진 어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1.24. 조선 장조(사도세자)[편집]


일성록 정조 20년 1월 24일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의 초상화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760년 온천에 행차할 때 군복을 입었었는데 이때 그린 영정의 초본과 모사본이 의주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자신이 원행을 갈 때는 반드시 군복을 입는데, 이는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경모궁에 면복본 하나, 현륭원에 군복본 하나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둘 다 전해지지 않는다.

파일:사도세자상(思悼世子像)_19세기_작자미상.jpg
사도세자의 초상화

당대에 그려진 초상화가 아니다. 다만 사당에 모셔진 신격화시킨 초상화인 것으로 추정한다.


1.25. 조선 정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조 어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6. 조선 순조[편집]



파일:순조어진1.jpg


파일:순조어진2.jpg


파일:순조어진3.jpg

순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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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모습
순조 30년(1830년) 43세 기념으로 화가 유당 김하종이 그린것을 시작으로 채용신이 모사한 것이다. 순조 어진은 원유관본 2점과 익선관본 2점 총 4점이 있었고 현재남은 어진은 원유관본 2점과 익선관 대본 1점, 익선관 소본으로 추정되는 어진 1점이 남았다. 원유관본은 얼굴의 반이 불타 복원은 불가능하다. 아니, 최소한 귀와 눈썹이 남은 효명세자와 달리 이쪽은 구레나룻과 귀 일부분 외에는 남은 부분이 없다.

파일:qynzNvZ.png
파일:순조추정어진..jpg
그동안 대중들에게 순조의 어진은 원유관본만 알려졌지만 2016년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수장고를 잠시 공개할 때 작게 사진으로나마 나왔었다. 다만 순조 추정 어진이라 학계의 연구 결과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 것이라 참고만 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그렇지만 순조의 어진일 가능성이 매우 높긴 하다. 어진의 용안 중 입술만 남은 상태이며 용보는 정면상이다. 하관이 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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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순조 초상화
유일하게 남아있는 어진의 얼굴이 타버려 구레나룻 외에는 확인 할 수 없으니 선원보감에 남아 있는 간략한 초상화로만 순조의 얼굴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 실제 어진과 선원보감에 남아있는 초상화가 많이 다르듯 선원보감에 남아있는 초상화를 신뢰할 수는 없다.


1.27. 조선 문조(익종, 효명세자)[편집]



파일:익종어진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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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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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모습
왕들의 족보인 선원계보에 의하면 문조(효명세자)는 어진이 8축이나 제작되었음을 알 수가 있지만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1826년(순조 26년)에 제작한 면류관 곤복본과 이를 1900년에 모사한 모사본뿐이다. 둘 다 얼굴 부분이 모두 소실된 상태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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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선원보감에 실린 효명세자의 초상화가 20대 초반에 죽은 세자의 모습 치고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이게 묘사되었다. 그나마 눈썹 각도가 남은 부분과 거의 같긴 한다.


1.28. 조선 헌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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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가 추정한 헌종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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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헌종 초상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매우 미남이었다고 한다.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궁녀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궁녀들과 놀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해버린 데다 어진마저 남아 있지 않기에 미남이었다는 헌종의 얼굴은 선원보감에 남은 간략한 초상화로 추측해 볼 수 밖에 없다.[7] 하지만 아버지인 효명세자처럼 20대에 요절한 왕치고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인다.

별개로 맨 위의 어진을 위키백과에서는 신원 미상의 어진을 헌종의 어진으로 소개했는데, 익선관이 조선 후기의 긴 모양인 것과 어린 외모로 묘사한 것을 보면 그럴 듯 해보이지만 어진의 용보가 조선 전기의 형태와 유사한 점을 고려하면 정확히 헌종의 어진인지는 알 수 없다.

성균관대학교의 조선미 교수에 의하면 이 어진은 순종의 1902년 익선관본으로 추정하는데,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형태가 흥선대원군 초상에 있는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고, 돗자리의 높이가 낮은 걸로 보아 조선 말기의 양식인데, 조선 말기라면 황세자 신분인 순종의 그림이 아닐까 한 추정이다. [8]

다만 순종의 경우 쌍꺼풀이 상당히 뚜렷한데 반해 이 어진에서는 쌍꺼풀이 뚜렷하지 않아 순종의 어진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추정 어진에 남은 귀의 모양, 크기가 순종 어진이 아니라 선원보감 헌종 어진과 유사한 것을 보면 순종보다는 헌종의 어진일 가능성이 더 높다.


1.29. 조선 철종[편집]



파일:attachment/chuljong12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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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의 어진
복원본
철종의 31살 때 모습을 담은 구군복본 어진으로 철종 12년인 1861년 3월에 제작되었다. 《어진도사사실(御眞圖寫事實)》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도사를 담당했던 이한철, 조중묵이 주관화사였고 김하종, 박기준, 백영배, 백은배[9], 유숙, 이형록이 도와 1개월 동안 제작했다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1492호이다. 또 구군복본 외에 원유관본과 면복본도 전해지지만 묵서만 남고 태반이 소실되었다. 얼굴까지 소실된 다른 어진들과는 달리 얼굴 부분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 1987년, 복원본을 제작할 수 있었다. 다만 완벽하게 복원하지는 못했는데 입 부근이 소실돼서 추측으로 그리다보니 입술이 두터워져 전체적으로 얼굴상이 맹해보이는 효과를 가져왔고 어좌 밑에 깔려있는 용화문석의 용의 방향도 오류가 나 복원품에서는 재현되지 못했다.

파일:철종(조선).jpg
2013년 재복원한 철종 어진

결국은 2013년에 전주 어진 박물관에서 철종 어진을 재복원을 하였다


파일:철종어진2.png


파일:철종어진1.png

면복본
원유관본

파일:f4t8Ftg.jpg
선원보감에 실린 철종 초상화

정원군과 함께 선원보감에 실린 초상화와 실제 어진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한데 정말 많이 다르게 생겼다. 다만 코 모양이나 수염은 간략한 묘사나마 모양이 어느 정도 잡혀있으므로 여타 어진 복원 시 참고해 볼만 할 듯하다.


1.30. 대한제국 고종[편집]






파일:대한제국 용보.svg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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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 ·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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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제국 국장.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rtrait_of_Gojong_01.jpg
파일:attachment/gojongurjin22.jpg
파일:attachment/gojongurjin33.jpg
파일:external/file2.instiz.net/c0b85c9c05a140efd75df1def489950d.png
조선 고종 어진

고종의 어진은 1872년 군복대소본, 익선관본, 복건본, 면복본등 모두 5본이 도사했는데 그 중 2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10년 채용신이 그린 고종 어진의 모사본 및 오른쪽 부분이 불탄 1872년에 제작된 20세의 고종 추정 어진뿐이다. 또한 위 사진 오른쪽 아래에 있는 통천관 강사포본의 경우는 배경에 휘장을 치는 등 일본식 화법이 가미되어 있는게 특징이다. 역대 제왕 중 유일하게 외국인이 그린 어진이 있다. 휘베르트 보스(Hubert Vos, 1855~1935)라는 네덜란드 화가가 그린 것.# 물론 고종의 경우는 비교적 최근의 왕이고 개인적으로도 사진 찍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진 자료가 풍부하다.

파일:고종추정어진.jpg
1872년에 제작된 20세의 고종 어진으로 추정되는 초상화이다. 신선원전에 고종 어진은 다른 왕들보다도 많은 무려 9축이 보관되었지만, 이들 중 현존하는 것은 다른 어진들보다도 훼손 상태가 극심한 이 1축밖에 없다.

파일:hBKZdp9.jpg
최근 한국인이 찍은 가장 오래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이 발견돼 화제다.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으로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작가인 해강 김규진이 촬영했으며, 촬영한 해는 1905년이고 촬영장소는 덕수궁 중명전이다. 고종이 외교사절로 방문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보인다.국외소재문화제재단 보도자료


1.31. 대한제국 순종[편집]


파일:external/blog.joinsmsn.com/4b186ae64e18c.jpg
파일:attachment/sunjong11.jpg
대한제국 순종 어진[10]
순종 어진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35414102AgWnRgccKN4cuBh3yNuKVR73mJFN5s.jpg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35414122o1boJBMFvrk5Z8M67p98I4E7uyh4ch.jpg
순종 어진(1916년 作) 당시 사진
이당 김은호 화백의 순종 어진 화사

파일:external/www.iusm.co.kr/631805_232813_2033.jpg
파일:P24G8Vf.jpg
절반 소실된 어진(1928년 作)
2014년 복원한 황룡포본 순종 어진#
전통적인 기법보다 서양화적 요소가 가미된 어진이다. 1916년 어진이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 순종 어진 유지초본으로 마지막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익선관본은 황룡포, 홍룡포본 총 3점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1954년 용두동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황룡포본 1점이 표제가 훼손된 채 살아남아 2014년에 복원본을 만든 후 2015년 문화재청에 의해 공개되었다.

그림의 표제가 적혀있던 오른쪽 부분이 탔지만, 순종 생전에 촬영했던 제국 군복 사진을 토대로 김은호 화백이 그렸던 어진과 같고, 고종과 더불어 유일한 황룡포를 입은 모습인 점으로 알 수 있었다.

현 공개된 순종 어진은 김은호 화백이 1928년 서울 영희전에서 제작 한 것이고, 위의 흑백 사진에 순종 어진 홍룡포본은 이왕직의 요청으로 1916년 제작되었다.


2. 왕후의 그림[편집]


조선 초기만 해도 왕후의 초상화 역시 그렸다는 기록이 확인되지만, 임진왜란 이후로 초상에 대한 기록이나 제작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내려오지 않는다. 숙종실록 21년 7월 27일을 보면 왕후의 초상화를 그리자고 숙종이 제안하였으나 승정원에서 ' 종신(宗臣)도 아니고 척신(戚臣)도 아니면서 그림 그리는 일을 집행하여 지극히 엄숙하고 지극히 경건(敬虔)한 곳에 가깝게 하는 것은 한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그 예(禮)가 아님'을 주장하며 반대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는 남녀칠세부동석 등의 이유로 왕후의 초상화가 그려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2.1. 신의왕후[편집]


신의왕후는 고려시대 사망하였지만 조선이 건국된 이후 추사되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다수 있다.


2.2. 신덕왕후[편집]


1398년 신덕왕후의 어진이 봉안된 기록이 있다.


2.3. 정안왕후[편집]


세종실록 2년 5월 11일자에 어진을 제사한 기록과 중종실록에 정안왕후의 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2.4. 원경왕후[편집]


생전에는 제작되지 못했으나 아들 세종이 주장하여 초상화가 추사되었다.


2.5. 소헌왕후[편집]


생전인 1443년 초상화가 제작되었으며, 이후 모사 기록과 이안 기록이 있다.


3. 기타 왕족의 그림[편집]



3.1. 경신공주[편집]


파일:external/test.narangdesign.com/img2_2.jpg
조선 태조 이성계신의왕후의 장녀. 현재 유일하게 신원이 분명한 여성 왕족의 초상이며, 초상화의 몽고풍 의상을 통해 여말선초의 의복문화에 대해 유추 해 볼 수 있는 자료다.


3.2. 완산부원군[편집]


파일:external/e23d059a3d3c1f4e3e19beca42caf098df28d17f2bea311a3434e17707767fbd.jpg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 완풍대군 이원계의 차남이자 태조의 조카이며, 태종 이방원의 사촌형이 된다.


3.3. 익안대군[편집]


이성계의 3째 아들로 야심이 적어 '왕자의 난'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으며, 태종 즉위 후에 대군의 지위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와는 부자지간이므로 현재 남아 있는 태조의 어진과 용모를 비교해 보면 좋을 듯 싶다. 더불어 정종과 태종의 모습을 유추 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 이씨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0년 1월 도난을 당했다가 그 해 4월 회수에 성공하여 보관하던 중 2009년 재도난을 당하여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진범은 잡혔지만 해외에 반출을 해버려 안타깝지만 돌아오기가 어려울 듯 하였는데...
문화재청의 끈질긴 노력으로 2018년 다시 회수에 성공했다!기사


3.4. 효령대군[편집]


경기도 과천시 연주암 경내 효령각에 소장되어 있는 효령대군의 초상화다. 1978년 11월 10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화면이 다소 거칠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여러 번 옮겨 그린 탓으로 보인다. 비록 중모본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거의 전해오지 않는 현 시점에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작품이다. 문화재청 링크

윗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동생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아서 양녕대군이 비행을 일삼을 때 자신을 효령이라고 사칭했다는 기록도 있고, 3형제의 동생인 성녕대군이 죽자 아버지 태종이 "성녕은 내 아들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아이였다"고 회상하는 기록이 있어 이 그림은 태종과 세종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초상화이기도 하다.


3.5. 안평대군[편집]


신숙주의 비해당진찬 안평대군초상(보한재집 권 16)을 보면 안평대군의 초상화를 안견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초상화가 전해져 내려오지는 않는다.


3.6. 이원익[편집]


오리 이원익은 가까운 왕족은 아니지만 태종의 8번째 서자이자 유복자익녕군 치의 4대손이다. 익녕군 치는 세종대왕이나 효령대군의 이복동생이 된다.

태종 이방원의 5대손으로 왕실 방계로는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3.7. 금산군 이성윤[편집]


이미지 링크

성종의 9번째 서자 익양군 이회(益陽君 李懷)의 증손자 금산군 이성윤(錦山君 李誠胤 1570∼1620)의 초상화이다. 익양군 이회의 아들이자 청원도정 이간의 아들로, 촌수로는 성종의 현손이다. 광해군과 8촌 형제 간이 된다.

그는 성종의 현손으로, 종친 작위가 부여되는 비교적 가까운 방계 왕족이었다.


3.8. 연령군[편집]


아버지 숙종이 8개월 동안 병상에 있을 때 곁에서 간호해준 영조와 연령군의 초상을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초상화가 전해 내려오지는 않는다.


3.9. 흥선대원군 이하응[편집]


파일:fsumvFL.jpg
와룡관학창의본, 복건심의본, 금관조복본, 흑건청포본, 흑단령포본
보물 제 1499호 이하응 초상

5점의 초상 모두 복식이 다르며 의관과 기물이 매우 화려하고 성대할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 이한철[11]이 그려 수준 높은 묘사력과 화격을 보여주는 최상급의 걸작들이다. 더구나 뛰어난 필력을 자랑했던 이하응의 친필 표제(表題)와 영정함 안에 써넣은 별폭의 홍지표제(紅紙表題), 궁중 표구장의 족자표장(簇子表粧), 유소(流蘇), 영정보, 향낭, 영정함, 영정함보 등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조선 말기 왕실의 아름답고 격조 있는 초상화 문화를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다. 5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미지 링크
권오창 화백이 복원한 대원군 초상

이미지 링크
흥선대원군 초상화 초안, 작자미상


3.10. 흥친왕 이재면[편집]



파일:external/www.museum.seoul.kr/img_05_23.gif


완흥군으로도 불리며 흥선대원군의 맏아들이자 고종의 친형이다. 친일 행적으로 비판을 받고있다.
화가는 철종, 흥선대원군 등을 그렸던 이한철의 작품이다.


3.11. 영선군 이준용[편집]



파일:external/www.sculturein.com/1_L_1317495190_9.jpg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조카이며 흥친왕의 아들, 순종의 사촌형이 된다.


4. 외척의 초상화[편집]



4.1. 신풍부원군 장유[편집]


파일:장유 초상.jpg
장유의 초상화

효종의 장인이자 인선왕후의 아버지, 현종의 외할아버지이다.


4.2. 청풍부원군 김우명[편집]


파일:김우명 초상화.jpg
김우명의 초상화

현종의 장인이자 명성왕후[12]의 아버지, 숙종의 외할아버지이다.


4.3. 영풍부원군 홍봉한[편집]


파일:attachment/홍봉한/Example.jpg
홍봉한의 초상화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정조의 외할아버지이다.


4.4. 영안부원군 김조순[편집]



파일:attachment/a0215_002.jpg


파일:노년.jpg

젊은 시절의 김조순 초상
노년의 김조순 초상

순조의 장인이자 순원왕후의 아버지, 효명세자의 외할아버지이다. 효명세자는 헌종의 아버지이므로 외증조할아버지인 셈.

참고로 가계를 거슬러 보면 김조순의 할머니 한산 이씨가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이모이므로, 혜경궁 홍씨의 5촌 조카이자 정조의 6촌이기도 하다.


4.5. 풍은부원군 조만영[편집]


파일:/20150718_103/1437145624885pwuTa_JPEG/1a28e9fd-f37f-4f.jpg
조만영의 초상화

효명세자의 장인이자 신정왕후 조씨의 아버지, 헌종의 외할아버지이다. 참고로 아래의 신정왕후로 추정되는 초상화와 눈매가 많이 닮았다.


5. 신원을 알 수 없는 초상화[편집]



5.1. 신정왕후(추정)[편집]


파일:nWz5dwE.png
전(傳) 신정왕후 초상화
신정왕후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어서 현재로서는 신원 미상의 초상화다. 신정왕후는 효명세자(문조)의 왕후로 헌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철종 사후 흥선대원군의 차남[13] 즉 고종을 양자로 삼아 보위에 올려놓았다. 이 초상화의 존재는 1990년대에 이미 알려졌으나 모습이 공개되지는 않았었다가 문화재청이 최근 발간한 '한국의 초상화'에 '조선 말기 여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


5.2. 명성황후(아닐 가능성 매우 높음)[편집]


파일:민씨부인 초상.jpg
전(傳) 명성황후 초상화

2017년 민씨 부인의 초상화가 발견되었다. 그림 뒷면에는 적외선으로 조사한 결과 민씨(閔氏)라는 글자가 발견되어 명성황후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상 명성황후는 아니고 그냥 평민 민씨 여성의 초상화일 가능성이 높다.

[1]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강원도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어있다.[2] 명종실록 3년 10월 10일[3] 또다른 얘기로는, 피난 직후 선조가 분조를 맡게된 임해군한테 자신을 그린 어진을 주면서 아비를 잊지 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임해군은 행패를 부리다가 왜적과 손잡은 국경인 일당에 붙잡혔고 이 어진은 임해군을 호종했던 윤탁연이 가까스로 챙겨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4] 중국에서 유래한, 기하학적 문양이 반복된 바닥에 까는 것[5] 1900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모본 영조 어진이 있다.https://blog.naver.com/mygrandeurxg/221249252074.[6] 영종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영조의 원래 묘호는 영종이었다. 후대에 영조로 바뀐 것. 정조 역시 원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후대에 정조로 바뀌었다.[7] 그래도 이마 쪽을 자세히 보면 남아있는 왼쪽 눈을 볼 수 있다.[8] 또한 용보의 모양도 이전의 원형이 아닌 고종, 순종의 어진에서 볼수 있는 물결 외곽 모양의 용보이다.[9] 임천 백씨로 현종, 숙종 때 어의였던 백광현의 종잉손자이자, 백광현의 형 백광찬의 직계후손(잉손)이다.[10]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11] 고종 어진 외에도 흥친왕 이재면의 초상도 그렸다.[12] 조선 후기의 명성황후와는 다른 사람이니 주의[13] 서형이 한 명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3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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