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어찰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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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 御札牒.
1. 개요
2. 내용
3. 관련 영상
4. 외부 링크
5. 보물 제1923호


1. 개요[편집]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가 1796년 ~ 1800년 사이에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 3백여 통지. 현재 경매를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대한민국 보물 제1923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편집]


정조가 당시 노론 벽파의 영수로 좌의정 등을 역임했던 심환지에게 1796년 5월부터 1800년 윤4월까지 보낸 비밀 간찰 3백여 통으로, 2009년에 발견되었다. 본래 이 간찰들은 심환지의 가문인 청송 심씨 문중에서 보관했던 듯하지만,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엔 심씨 문중과 무관한 개인이 소장하였다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을 통해 공개한 것. 이후 2013년 K옥션에서 경매에 부쳐 12억에 낙찰되었으나 사실은 K옥션 측에서 재구매한 것으로, 이후 K옥션 측에서 보관한다. 이 어찰첩은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6년 11월 16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 정조가 심환지에게 공식적으로 보냈던 편지들 중 이전부터 알려진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정조어필(正祖御筆) 2첩과 정조신한(正祖宸翰) 중 정조어필인데, 여기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36통이 있다.[1]

그러나 2009년에 발견된 편지 3백여 통은 이전에 알려진 공식적인 문서가 아니라,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오고 간 사적 서찰로 당사자 이외의 누구도 그 존재를 모른 비밀 편지이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편지가 사후에 누설되지 않도록 읽은 후에는 바로 폐기하라고 거듭 당부했지만, 지금까지 편지가 남아있으므로 심환지가 정조의 당부를 지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훗날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를 대비하여 이른바 '보험'으로 쓸 생각으로 남겨둔 듯하다. 아래에도 나왔듯이 노론 음모론이 이 편지 때문에 힘을 잃게 되었으니 2백여 년 후 그 의도대로 된 셈이다.

정조는 이 편지에서 "내가 사류(士流)의 두목이니, 지금 사류의 전형을 구한다면 형편상 경을 먼저 꼽을 것이다. 경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나의 마음은, 서야(徐也)에게보다 열 배가 넘는다."고 하며 자신을 사류의 두목으로, 심환지는 사류의 전형으로 불렀다. 이는 정조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는 감독이 되고, 심환지를 주연 배우로 삼아 정국을 끌고 가겠다는 의미. 이 때문에 심환지가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두렵지만 자신이 그를 늘 잊지 못하고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크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감독인 자신이 의도한 대로 심환지가 움직이도록 그에게 여러 주의해야 할 행동을 각별히 부탁하면서 심환지가 중진(重鎭)으로서 ‘준엄한 기상’으로 위엄을 보이며,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외에 정조 자신의 대소사나 몸의 아픔 등을 여과 없이 호소하는 내용 또는 심환지의 잘못된 행동을 통렬히 꼬집으며 꾸짖는 내용 등이 있다.

편지가 공개되자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긍정적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이전까지 잘 알려졌던 정조와 심환지의 관계 및 각각의 이미지와는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심환지는 평면적인 형태의 오늘날로 치면 야당의 정적이 아니라 협력과 대립을 오가는 복잡한 위치에 있었음이 밝혀졌고, 그러한 심환지와 협력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정조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의지 강한 개혁 군주나 학자 군주로만 알려졌던 정조가 실제로는 욕설과 막말도 제법 잘 구사하는(...) 독설가이자 다혈질 면모도 있었음이 드러났다.[2]

또 기존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다른 사서에서 공식적 의견으로만 단편적으로 나타난 내용들의 뒷배경도 알 수 있는 등 역사를 볼 때 그 내면까지 따져볼 만한 계기도 된다. 한편으로는, 이 내용을 통해 노론 음모론정조 독살설이 논파된 부분도 있다. 정조가 심환지를 신뢰하며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자신의 병환과 증세, 처방법을 편지에 상세하게 설명했으며, 이를 심환지에게 직접 언급함으로써 굳이 정조를 독살할 이유가 없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3]


3. 관련 영상[편집]







4. 외부 링크[편집]




5. 보물 제1923호[편집]



<정조 어찰첩>은 정조가 1796년~1800년 사이에 좌의정 등 고위직을 역임한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로 300통에 달하는 다양한 내용의 어찰이 6첩으로 장첩되어 있다. 이 어찰의 내용은 대부분 정사(政事)와 관련된 것들이어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어찰에 사용된 종이 또한 도침이 잘된 고급 간지(簡紙) · 태지(苔紙), 심지어 저급의 용지로 취급되는 피지(皮紙)까지 일부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인 서간문의 격식과는 매우 다른 서간문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선 시대 서간문의 형식을 연구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어찰의 전체 내용이 자세히 구명되면 정조의 통치술이나 학문 세계 등에 대한 연구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정조 어찰첩>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가치가 있는 유물인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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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편 정조신한에는 정조의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정조가 보낸 편지 30통이 수록되었다.[2] 정자체의 한자로 적어 내려가다가 화가 나자 갑자기 초서체로 흘려 쓴 것도 모자라 한문 중간에 한글로 "뒤쥭박쥭"이란 표현이 갑자기 등장하는 등, 지금 보면 키배 비슷한 부분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결국 임금도 사람 문체반정까지 일으키면서 조정에서 품위 있는 문체를 강조했던 정조이기에 더 아이러니한 부분. 그래서 편지 불태우라고 신신당부했나 보다[3] 다만 이런 설들의 빈약한 스토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정조가 비밀 편지를 쓴 건 심환지뿐이라 다른 노론들하곤 직접적인 상관은 없긴 하다. 확실하게 밝혀진 건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정조와 적대할 이유는 없다는 것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