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조선)/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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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1.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2.1.2. 꿈 해몽
2.2. 불교 관련
2.3. 친족 공동체 관련
2.4. 명나라 관련
2.4.2. 황제와의 사돈 논의
3. 기타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2.1. 무학대사 일화[편집]



2.1.1.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편집]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야사에서 유래한 듯 하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보고 장난 삼아 "내 눈에는 대사가 돼지처럼 보이는구려."라고 놀리자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소승은 전하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성계가 "허허, 나는 대사를 돼지라고 했는데 대사는 왜 나를 부처님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무학대사는 "돼지 눈에는 돼지처럼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처럼 보이는 법이지요"(猪眼觀之卽猪 佛眼觀之卽佛)라고 받아쳐 이성계가 크게 웃었다고 한다.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조사의의 난 직후 이성계를 설득하러 찾아온 무학대사와 만나서 나누는 말로 나온다.

근데, 이 일화를 잘못 써먹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돼지 눈에는 돼지로만 보인다'나 '돼지 눈에는 돼지처럼 보인다'로 '단지 욕을 한 너의 눈이 잘못되어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반론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잘못 쓰고 있다. 이건 '돼지인 너의 눈에 내가 보이는 것은 너도나도 다 돼지기 때문이다.'는 뜻이 되어 상대를 돼지라고 까면서 스스로도 돼지라고 자학해버리는 꼴이 된다.


2.1.2. 꿈 해몽[편집]


유명한 '집 무너지는 꿈'의 해몽 이야기 등으로 무학대사와 평생 동안의 우정과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역사상으로도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좋은 상담자이자 벗이었고 이성계에 의해 유교 국가 조선에서 고려의 불교 제도인 '왕사'로 무학대사를 임명했을 정도였으며 수도 한양의 위치를 정할 때 둘이서 같이 골몰하기도 했다. 봉우리가 딱 100개였는데 하루 아침에 하나가 그냥 언덕으로 닳아버려서 명당에서 탈락했다는 원통이 고개 이야기도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주인공이다.


무학대사가 종묘를 28간만 짓게 해서 조선이 28대까지 갈 것을 예언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있다. 현재 종묘는 확장하고 별전인 영녕전까지 지어서 지금은 이성계 윗대의 추존 군주까지 포함하여 38군주 1황태자를 모시고 있다. 전설은 그냥
전설일 뿐이다.

2.2. 불교 관련[편집]


조사의의 난 전의 이야기지만 실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연회 중에 태종과 신하들이 "불교를 좋아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불공을 꼭 밖에서 드리셔야 합니까?"라고 묻자 이성계는 다음과 같이 쏘아붙여 태종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태조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대들의 뜻은 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1]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서방 정토로 가고 있다!" -《태종실록》태종 2년(1402년) 1월 28일


이성계가 불교에 매달린 것은 모든게 허상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교리에 감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변방의 장수로 시작해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한 나라를 세우는 임금이 되었는데 말년에는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아들과 싸우다가 감시받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안사가 함흥으로 이주할 때부터 고려인이던 이씨 일가의 종교는 불교였는데 이는 고대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주위 여진족과는 대별되는 점이다. 비록 조선이 숭유억불을 기치로 삼았지만 이는 전조 고려에 대항하기 위한 구실이었고 실제로는 이 당시 원나라 황실로부터 들어온 티베트 불교의 잔재가 일소되고 고려 본래의 선종 중심의 불교로 일신되었다. 승려로서 조선 왕실의 국사가 된 무학대사는 바로 이런 저류를 반영한 것이며 이후 이성계는 조선 왕실의 원찰이면서 행궁 역할도 가능한 회암사를 창건하여 이런 친 불교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당시 사대부들처럼 외적으로는 왕도 정치와 도학 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집에서는 시침떼고 불교를 숭상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업보를 받았느니 그래서 불교를 믿으며 참회했느니 하는 다양한 해석도 있다. 그래도 말년에는 왕실에서 더이상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태종이 왕실의 사돈이었던 이거이 부자를 숙청할 무렵 이를 태상왕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는 하늘을 한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2.3. 친족 공동체 관련[편집]


"네 뜻대로[2]

결정했겠지만, 회안이 이미 쫓겨나고, 익안군이 이미 죽고, 상왕이 출입하지 않으니, 친척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몇 사람이냐?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돕는 자가 많지만, 일이 낭패할 때에는 돕는 자가 적다. 사생지간에 돕는 자는 친척 같은 것이 없다. 네가 그들을 보전하면, 국가의 재앙이나 천변(天變)·지괴(地怪)가 적어질 것이다. 이 일은 큰 것인데, 나는 장차 큰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10월 20일

저 말은 '방간이는 폐인이 됐고, 방의는 죽고, 방과는 찌그러져 있는데, 우리 친척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그래도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은 친척 뿐이야. 사돈네는 살려줘야지 그러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누구한테 도와달라 할래?'라는 요지의 훈계.

이성계의 아들 8명 중 5명이 이성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래저래 자식복은 없었다.[3] 태조의 이 말을 들은 태종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실록의 이 날 기록은 전한다. 결국 이거이 집안은 폐서인이 되고 고향으로 낙향하는데 그치는데 이렇게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은 태조의 절절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4] 사실 자식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에서 이성계가 보여준 비통한 절규나 그래도 어려울 때 믿을 사람은 친족뿐인데 친족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훈계는 자신의 육친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을 벌이는데 대한 분노와 고통으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성계의 성장 기반을 볼 때 아주 실용적인 처세 원칙이기도 하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성계는 변방 국경의 반독립적 호족 출신이었고 국경 밖에 살던 이들은 주로 유목민이었으며 이성계의 일족 자신도 그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는 점,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주변의 여진족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일단 유목민의 경우 떠돌아 다니며 방목하는 특성상 지연이나 학연 등의 의미가 없고[5] 따라서 사회적으로 혈연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1번 갈라주면 끝인 토지와는 달리 유목민의 재산인 가축은 형제가 많으면 각자의 몫이 좀 줄어들더라도 잘 키우면 쑥쑥 새끼를 낳아서 불어나기 때문에[6] 형제간의 유산 갈등이 농경민보다는 덜한 편이다. 이 때문에 거친 유목민 사회에서는 유사시에 의지가 될 수 있는 친족[7]과의 관계를 그만큼 중시하게 되는 것. 더구나 주변의 여진족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빠지기 쉬운 변경의 호족 입장에서는 그만큼 친족들의 강한 유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성계가 젊었을 적 함부로 다른 장수들을 무시하는 실책을 범하다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도와준 것도 종중의 다른 어른들이 보내준 병력이었고 그의 아들들 역시 군사 활동이나 개국 과정 전반에서 아버지의 심복 부하로서 큰 활약을 했다. 결국 이성계의 세력 기반은 일족 공동체였고 이성계 일족은 전주 이씨 친족 집단을 중심으로 고려계 유이민들이 뭉쳐 있는[8] 형태였다는 것. 이런 집단의 경우 친족간의 유대가 극히 중요할 뿐 아니라, 친족의 수[9]가 그 일족의 세력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한 것.(이자춘이 유목민의 풍습을 받아들여 여러 부인을 맞아 많은 자식을 둔 것 역시 이런 상황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보면 왕권을 탐내 서로[10] 죽여대는 아들들의 행태는 이성계가 성장하고 활약한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완전히 미친 짓이고 당장 배고프다고 제 살 깎아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인 셈. 물론 육친이 육친을 죽이는 것 자체가 이미 끔찍한 짓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아예 일족의 자멸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일족 공동체에서는 다른 형제에게 가장 자리가 넘어가더라도 그냥 덮어놓고 협력하는 쪽이 현명하다. 내분을 벌이면 일족의 힘이 약해지고 그만큼 외부의 위협에도 취약해지겠지만 계속 힘을 합치고 있으면 형제 계승이나 숙질 계승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으니까. 물론 조선 왕조는 이후 500년 이상 유지되었고 그 기간 동안 조선 왕실의 정치적 논리는 이성계에게 익숙했던 일족 논리와는 많이 달랐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 <조선 말 나라가 멸망해가는 와중에도 일족들끼리 싸움 때문에 집안이 힘을 합치기는커녕 알아서 소모해가며 몰락을 가속화시킨 것을 생각할 때 이성계의 우려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주장은 애매한 도덕론에 기댄 공론(空論)일 뿐, 역사적 상황과 사건을 진지하게 평가한 결과라 보기는 어렵다. 일단 조선 말 나라가 멸망해가던 와중에 특별히 왕족의 내분이 그 원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은 그 유지 기간 내내 강력한 왕과 왕가의 권위 아래 권력의 집중을 통한 중앙집권체제와 정치적 안정성을 잘 확보한 편에 속하며 조선 말의 몰락상은 왕가의 내분과는 딱히 상관이 없다. 말하자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많은 경우에 유익한 도덕적 조언이지만 그렇다고 이 조언을 아무데나 가져다 붙여서 <뭉치지 않아서 망했다>고 설명하려 드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라고는 할 수 없는 것. 특히 이러한 해석이 부적절한 것은 실제 조선시대의 역사와 비교할 때 이성계의 사고 방식은 틀린 것이었다고 볼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성계의 행동 원칙은 정복 등을 통한 세력 확장이 용이하고 중앙 권력이 가진 영향력과 구속력이 느슨한 변경의 일족 공동체에 어울리는 것이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조선 왕조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변방의 일족 공동체라면 친족들간의 관계에 따라 형제 계승이나 숙질 계승도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농경 민족의 중앙집권국가라면 형제 중 하나가 왕이 되면 왕은 대대로 그 자식들에게서만 나오고 다른 형제들은 대대로 그 신하가 된다. 이것을 뒤집으려고 하면 그때야말로 골육상잔의 비극이 터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가 그리 비통히 여긴 형제간의 참상에 대해서는 씁쓸하게도 이성계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 자신은 마치 동북면 이씨 일족의 수장처럼 가볍게 세자의 자리를 막내 이방석에게 주었지만 이성계의 창업에 앞장섰던 장성한 아들들의 입장에서 이는[11] 가혹한 선고였던 것. 차라리 장자의 명분을 세워 이방과를 세자로 세우거나 가장 유능한 아들을 택하여 이방원을 세자로 세웠다면 방간-방원 라인으로써도 반기를 들 명분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어리고 세력과 경력도 없는 막내를 굳이 죽이기까지 해야 할 이유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안 그래도 변경의 반유목 일족보다 훨씬 빡빡하고 가혹한 중앙집권국가의 계승자 자리에 명분도 약한 어린 막내를 박아놨으니 누가 이기건 피 한바가지 쏟지 않으면 정리하기 힘들도록 상황이 꼬여버린 것. 이성계는 이방원과 이방간이 벌이는 참극에 절규했지만 사실 이성계의 의도대로 정말 이방석에게 왕위가 전해졌다면 그 과정에서 이방과, 이방간, 이방원 등에 대한 숙청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다. 이성계의 사고 방식 중에서 어려울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친족-혈연동맹뿐이라는 부분 역시 이후 조선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썩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변경의 이씨 호족에게는 동등한 혈연동맹이 가능하고 이것이 일족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이씨 왕가는 조선 내에서 다른 가문과 동등한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후 조선사에서도 왕비를 배출한 외척의 득세는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이는 왕조 국가의 논리에서 왕실의 권위를 위해 억누르고 제어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지 권장하여 왕가와 상조하도록 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이성계에게 익숙했던 동북면의 호족인 이씨 일족의 논리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이것이 왕조 국가 조선의 이씨 왕실의 논리에서는 적절치 않았다는 내용의 일부분만 잘라내어 모호한 도덕적 공리공론으로 만들어 현실을 그에 끼워맞추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2.4. 명나라 관련[편집]



2.4.1. 주원장 관련[편집]


주원장키배를 뜬 적이 있다. 항목 참조. 또 주원장과 이성계 사이에는 희한한 전설이 하나있다. 주원장 집안이 원래는 한반도쪽 가문인데 어릴 때 이성계 아버지와 명당을 다투다 주원장이 차지한 명당으로 주원장은 명 태조가 되고, 옆에 명당을 차지한 이성계는 조선 태조가 되었다는 전설.

구체적으로 해당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이성계의 선조가 황해도 모처에 자손이 황제가 될 묏자리와 왕이 될 묏자리를 두고는 선친을 묻으려고 했더니, 주씨 성의 노비가 몰래 묏자리를 바꾸어서 후손들이 각각 명 태조, 조선 태조로 뒤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12] 우연히 만난 스님과 장수가 훗날 각각 명 황제, 조선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이야기다. 그것도 한 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이성계와 주원장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탁발승에 도적 출신 주원장과 군벌 가문 출신 이성계는 출신은 다르지만, 변방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명당 이야기를 떠나서 사실 명 왕조가 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객관적인 근거들은 꽤 있다는 주장도 있다. 명나라가 국가사업으로 편찬한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명 태조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주장.

또한 주원장의 아들 명 성조 영락제의 생모가 고려사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즉 영락제의 생모가 효자고황후 마씨가 아닌 고려에서 원나라로 온 공비(貢妃)라는 기록. 명나라 황실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곳의 기록인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는 영락제의 생모는 공비(碽妃)라고 하였다.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에는 "여러 비빈들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비(妃)만이 서쪽에 있다. 성조(영락제)를 낳았기 때문에,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권근도 이를 언급한 걸 보면 조선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으니, 조선과 명나라가 유독 가까웠던 데는 기저에 이러한 이유들도 있었을 것이다.

2.4.2. 황제와의 사돈 논의[편집]


이와 별개로 주원장사돈을 맺을뻔한 적도 있었는데 잘 안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그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 맺으려고 했는데 니가 X같이 굴어서 파투났다 씨X아!"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파투가 났다고 한다.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아마도 정황상 주원장은 "결혼까지 하면 이성계가 지랄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고 이성계는 "결혼까지 할 정도면 요동정도는 지참금으로 챙겨먹을 수 있겠지" 하고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파투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13] 그리고 이렇게 혼담이 완전히 파투나자마자 조선에서는 거의 곧바로인 1397년 6월부터는 요동정벌 논의가 본격화돼서 조준이 반대하니까 남은이 조준은 셈은 잘 세도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디스한다거나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1397년 9월에 심씨를 공식적으로 세자 이방석의 현빈으로 삼으면서 관련 논의들은 완전히 끝이나게 되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실제로 저 국혼이 성사되었다면 그 이후의 나비효과가 대단히 흥미진진했을 것이다라는 점인데 일단 주원장이 1398년 5월에 사망하기에 저 때 저 국혼만 성사됐으면 주원장이 죽자마자 8월에 터지는 정난의 변과, 마찬가지로 8월에 터지는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선의 입장이 너무너무 재밌어 진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처갓집이 명나라 황실이 되면 원래 막내였고 나발이고 세자 이방석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질 테니 함부로 비비기도 힘들고, 공식적으로 명나라랑 척지고 요동정벌 하자는 것도 아니니 그거 핑계로 쿠데타도 무리니 1차 왕자의 난은 아무래도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고 대신 그렇게까지 명나라 황실이랑 가까워진 상태라면 아무래도 정난의 변에서는 조선이 건문제의 편을 안 들수가 없어진다. 주원장도 말년에 번왕들 따로노는거 눈치 못챈것도 아니니 저 시점에 조선이랑 결혼동맹 했다 치면 당연히 건문제랑 가까운 혈연으로 맺었을 질테고 그렇다면 장인의 나라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정난의 변에 조선이 개입을 할 수 밖에 없어질테니 말이다.

3. 기타[편집]



  • 아들인 이방원과의 사이는 매우 안 좋은 편이었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같이 연회를 가지거나 같이 식사를 하는 등 나름대로 화해를 하고 부자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고 조사의의 난이 진압되자 끌려오다시피 한양으로 귀환한 후에는 태종의 감시를 받고 유폐되다시피 했다는 말[14]이 있지만 조사의의 난 이후에도 온천에 요양을 가거나 왕실의 원찰(대표적으로 경기도 양주시회암사) 등 사찰로 행차하는 등 야외 활동을 한 여러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돌아온 이후 죽을 때까지의 기록을 살펴 보면 수라를 헌수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드리거나, 놀러 나갔다가 으로 돌아오는 태조를 마중나가거나 하는 일들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이방원은 고려 변방 시절부터 과거에 급제해 가문의 빛이 되주던 아들이었으니[15] 그런 아들을 아꼈던 마음은 어디 가지 않았을 것이다.
  • 함흥차사 야사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함흥부에서 돌아올 때 마중나온 태종을 죽이려 했던 이야기도 유명하다. 태종이 이성계를 마중나가기 전 아버지를 맞고 나서 열 연회의 가건물을 설치할 때 태종의 참모인 하륜이 태종에게 건물의 기둥을 굵게 할 것을 주문했고 태종은 그 말을 따랐다. 이윽고 이성계가 도착하고 태종은 절을 올리려 했는데 이성계는 갑자기 을 들어 아들을 향해 쏘려고 했다. 놀란 태종은 재빨리 기둥 뒤로 피했고 화살은 굵은 기둥에 박혀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연회를 여는데 하륜이 또 귓속말로 태종에게 "전하께서 태상왕께 직접 을 올리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통해 올리십시오"라고 진언했다. 태종은 그 말을 따라 아랫사람을 시켜 이성계에게 술을 올렸는데 이를 본 이성계는 "이 모두가 천운이구나"라며 허탈하게 웃더니 철퇴를 품 속에서 꺼내 상에 올려놨다고 한다.[16] 야사의 기록이고 조사의의 난 이후 편히 살았지만 이 이야기는 태종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이 에피소드를 충실히 구현하여 태조를 연기한 김무생과 태종을 연기한 유동근이 정말 태조와 태종이 살아돌아온 것 같은 명연기를 펼쳤다.
  • 전라북도 전주시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 어진.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시대 어진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어진이다. 태조 재위 당시에 제작된 집경전의 어진을 1409년(태종 10년)에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한 것을 1872년(고종 9년)에 다시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청룡포 어진이 당대로부터 전해지는 유일한 어진이며 홍룡포 버전은 후대인 헌종 대에 왕명에 따라 홍색으로 용포 색깔을 바꾸어 모사한 것이다. 참고로 홍룡포 어진같은 경우는 한국전쟁 당시에 부산광역시로 옮겨왔었는데 보관 도중에 화재로 얼굴을 포함해 절반 부분이 날라가버렸고 복원을 통해 2011년에 공개됐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태조어진 문서 참조.
  • 경상남도 남해군금산 꼭대기에 있는 보리암에는 이성계에 대한 전설이 현재도 전승되어 오는데, 아직 장군이던 시절의 이성계가 이 곳에서 백 일간 기도를 드린 끝에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비록 역사적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꽤나 유명한 이야기로, 절에서 산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간 곳에 일명 '이성계 기도처'가 있다. 이전부터 보리암 자체가 이름난 수행 도량이자, 무속에서도 금산 일대는 소위 '기도빨'이 잘 받는 영험한 기도처로 여겨져 왔으므로 이런 전설이 생겨난 것으로도 본다.
  • 일설에는 금산의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쓰게 된 것도 이성계가 원인이라고 전한다. 기도처에서 치성을 올리며 "왕이 된다면 이 산을 비단으로 감싸겠다"라고 말을 남겼는데 실제로 왕이 되고 나니 현실적으로 그 큰 산을 모두 비단으로 감쌀 수가 없어 금산으로 개명했다는 것이다. 보리암은 과거에는 상주해수욕장[17]에서 거의 700고지인 금산 꼭대기까지 험난한 바위산을 따라 등산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산마루 뒤쪽 저수지 골짜기로 올라와서 능선까지 접근하는 자동차 도로가 뚫려 매우 가기 편해졌다. 그러나 기도처는 보리암에서부터 또 산길을 따라 수백 미터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도 접근이 마냥 편한 곳은 아니다.
  •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주장이 한때 제기되기도 했으나, 당시 기록, 사회적 풍습, 명나라의 기록을 종합하여 교차검증 결과 신빙성 없는 설로 판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성계 여진족설 문서 참조.
  • 단순히 무용만 믿고 싸우는 인물이 아닌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려 말 1377년 서해도(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날뛰던 왜구를 토벌하러 갔을 때 1차례 격퇴한 왜구가 험한 지형에서 섶으로 방벽을 만들고 버티기에 들어가자 느닷없이 풍악을 연주시키고 을 마시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병사들에게 왜구의 진 주변에 을 질렀다. 왜구들은 그냥 당할 수 없어서 진에서 뛰쳐나와 고려군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를 예측하여 사방에서 왜구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왜구들의 저항도 격렬해 왜구가 쏜 화살이 이성계의 술병까지 깼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고 부하들에게 소탕을 명령해 이성계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구워먹으며 왜구들이 타서 죽거나 무기에 맞아 죽는 모습을 구경했다. 자세한 전공 기록은 태조실록 1권, 총서태조(조선)/생애 문서를 살펴보면 관련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성계는 도 잘 타고 도 기가 막히게 쏘는 체육인이었으며 당시 무인들의 스포츠격구에도 능했다. <태조실록>에 그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데 가히 묘기급이다.

말을 달림이 너무 빨라서 벌써 수양이 되었는지라, 공이 문득 돌에 부딪쳐 놀라 거꾸로 달아나 말의 네 발 뒤로 나왔다. 태조는 즉시 위를 쳐다보고 누워 몸을 돌려서 말 꼬리에 부딪쳐 공을 치니, 공이 도로 말 앞 두 발 사이로 나오므로,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이를 가리켜 방미라 하였다. 또 공을 운행해 칠 때는 또한 벌써 수양이 되어 공이 다리 기둥에 부딪쳐 말의 왼쪽에 나가므로, 태조는 오른쪽 등자를 벗고 몸을 뒤집어 쳐서 이를 맞히고,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가리켜 이를 횡방이라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 고대에는 '수정포도'라 불린 청포도를 즐겨먹었다고 한다. 조선 임금 중 후대의 연산군과 더불어 청포도를 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임금.
  • 이성계는 또한 보리를 좋아하여 보리밥을 즐겨먹었다고 한다. 후대의 영조와 더불어 보리밥을 즐겨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임금.
  • 2020년대부터 한국 로판계에서 '북부 대공'이라는 북방에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주로 이민족을 상대하는 쿨계 남주 타입이 곽광받기 시작했다. 왕좌의 게임스타크 가문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이 클리셰를 장르소설 마이너 갤러리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까 한국사에서 북부대공 클리셰에 정확히 맞는 인물이 바로 이성계라는 결론이 나온 적이 있다.# 얼굴만 미청년계였으면 로맨스 사극 주인공으로 딱이라는 평가도 나올 정도.
  • 고려 말기 이성계의 준동을 우려한 반이성계파가 명나라 조정에 '윤이(尹彛)', '이초(李初)'를 첩자로 파견해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다"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명나라 내에서도 크게 믿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불씨는 태조 즉위 후에 터졌다. 조선이 계속 명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일 낌새가 보이자 명나라에서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사신이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거짓말로 알 거라고 생각했던 태조는 그 사신에게 "나는 이인임이 아니라 이자춘의 아들이다"라고 일러 보낸다. 자세한 내용은 종계변무 문서 참조.
  • 조선의 왕들과 왕족 중에서는 태조처럼 기골이 장대하거나 명궁인 사람들, 무예가 있는 왕들이 많았다. 연산군때는 이제까지 태조 이성계를 닮아 기골인 왕들이었는데 이번 왕은 그렇지 않다고 특별히 언급하기도 했다.[18]

  • 한국사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창업군주인만큼 대한민국 해군의 함선이름으로 쓰였으면 하는 역사인물로 계속 거론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쓰이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것 때문에 위화도 회군으로 반역을 저지른 전과가 있어 쓰이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19]
  • 70대 초반까지 살며 장수했지만 그 때문에 두 아내, 장남과 사남, 육남과 막내, 딸, 의형제 겸 전우, 왕사, 정도전을 비롯한 듬직한 개국공신 일부를 먼저 보냈다.
[1] 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방번과 방석, 사위인 흥안군 이제를 말한다.[2] 실록 원문에도 '너 여(汝)'자가 쓰여 있다. 태종을 '주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사가에 있을 때처럼 격의 없이 '너'라고 부르기도 했던 듯.[3] 장남 이방우는 술병으로 죽었고 3남 이방의는 이 해 9월에 이미 병사한 뒤였다. 6남 이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요절했으며 7남 이방번과 8남 이방석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되었다.[4]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태종의 외척 가문인 민씨 집안은 이거이 입장에서는 폐서인이 된 자신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박살이 났다.[5] 지연은 물론이려니와 학연은 거의 없다. 학연이나 교육이라봐야 자기 부족 내에서 말은 이렇게 타라 하는 식의 교육뿐.[6] 물론 한파라도 찾아오면 확 줄어들기도 하고.[7] 특히 형제 등의 가까운 친족.[8] 이들 유이민 집단 중에서 이씨는 아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신들이 나왔을 것이다.[9] 특히 제몫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수.[10] 역시 중요한 혈연 동맹인 사위까지.[11] 그나마 권력만 빼앗기면 양반이고 이미 세력과 공적이 탄탄한 형들이 세자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보여지면 숙청까지 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12] 비슷한 전설을 가진 곳이 전국에 꽤 있다. 전라남도 해남 '한영정'이라는 사람 집의 머슴이었는데 주인 딸인 '한여비'와 눈이 맞아 지나국으로 도망갔다던지. 경상남도 진해시의 천자봉 이야기라든지.[13] 다만, 설령 이방석이 명나라 공주와 결혼했어도 무사히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대다수 사대부들은 자질이 검증된 이방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는 데다가, 명나라에서도 정난의 변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터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14] 실제로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제 아무리 왕이라도 친아버지를 감시하는 것은 혹시 모를까 유폐했다가는 언관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친아버지가 대원군도 아니고 태상왕에까지 오른 초대 국왕이었으니 제 아무리 왕자의 난으로 수족이 다 잘려나갔다고 해도 권위는 결코 무시못할 수준이었다. 조사의의 난 때 조사의가 이끌던 반군이 1만명인데 정계에서 딱히 특출한 입지에 있지도 않던 조사의 혼자서는 모을 수 없는 숫자라 실제로는 난의 주모자인 태조의 권위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15]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 동생 이방연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던 경력이 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하자 이성계는 기뻐해서 이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방원이 급제하면서 고려 조정에 몸을 담게 되었고 이 일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16] 철퇴가 아니라 던지는 무기인 철구(鐵球: 쇠공)였다는 이야기도 있다.[17] 해수욕장이란 말인즉 해발 0m부터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다.[18] 연산군은 키가 컸으나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고 한다.[19] 다만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세종과 정조는 이미 함선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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