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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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긍정적 평가
3. 부정적 평가
3.1. 통치 능력 부족
3.2. 실패한 경제 정책
3.3. 이중외교의 파탄
3.4. 두 번의 호란과 굴욕
3.5. 비정한 군주 - 강빈 옥사
4. 총평


1. 개요[편집]


인조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긍정적 평가[편집]


인조에 대한 재평가를 대중에게 처음 알린 것은 오항녕 교수의 평가로 알려져 있지만 오항녕 교수가 아니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인조 시기 치세에 대한 연구는 다른 학자들 역시 심도 깊게 진행해 왔다. 이를 염두에 두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우선 권력의 쟁취와 전체적인 국가 안정 면에서 인조의 능력은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특히 광해군이 벌였던 대규모 토목공사는 사대부와 백성들 모두가 비난일색이었는데, 인조는 토목 공사는 중단하는 한편 대동법을 개정하고[1] 확대시키기도 했다.[2] 물론 대동법의 범위 확대도 적잖은 한계로[3] 1년만에 강원도를 제외하고선 취소되었다지만,[4] 당시 조선의 경제사정상 이는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기에 대동법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 만으로 비난 받는 것은 옳지 않다.

소현세자에 대한 박대도, 그 과정이 지나치고 개인적인 악감정이 섞였을 여지도 있긴 하나, 나라의 통치자 입장에서 볼때 소현세자 본인의 의사와는 별개로 그를 왕세자로 남기는 것 부터가 청의 영향력을 조선에 행사할 수 있었던 만큼, 소현세자를 얌전히 둘 수 없는 것도 맞았다. 소현세자의 죽음의 전말이 확실하진 않긴 하나 그 뒤 인조가 강빈을 강하게 압박하며 사사시킨 것으로 볼 때 인조 측에선 소현세자측 세력 전체를 절대로 곱게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5]

봉림대군이 옹립될 당시 김자점과 소용 조씨의 힘을 너무 키워주어 나중에 효종이 그들을 내쫓을 때 나라가 한바탕 난리가 난게 흠이라면 흠인데 이것도 효종이 즉위 후에 김자점을 순식간에 개박살내는 거 보면 과연 인조가 김자점에게 얼마나 권세를 몰아줬는지도 사실 의문이다.[6] 뭐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 입장에서는 토사구팽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인조는 인조반정을 성공시킨데서 알 수 있듯 순수하게 무능한 왕은 결단코 아니다. 스스로 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인목대비를 앞세워 명분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인조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원익, 최명길, 정충신 같은 중요 인사들도 보호해주었다.[7] 즉, 정치적 세력의 안정과 관리의 측면에서는 광해군보다 확실히 나았다. 자기가 친 사고를 보며 통곡하거나 개선해야 한다는 의식도 가져서, 1623년 즉위 초의 대동법 개정[8] 확대[9] 그리고 1633년 상평통보 발행과 1634년 삼남 일대 양전[10][11][12] 그리고 어영총융수어 경군 삼청 설치 등 군사개혁 같은 업적을 남겼다.[13] 대외정세에 대해서도 신하들보다는 인조의 판단력이 그나마 우월한 수준이었다.[14]

당시 승정원일기에는 인조와 신료들이 명의 사정을 의논하는 대화들이 있다. 인조가 명나라에서 환관이 권세를 부리고 있다며 명나라를 침략하려 하는 후금의 발호를 걱정하자, 이정귀는 (어차피 환관이 권세를 부리니)후금의 개입이 없어도 어차피 중국 내에서 반드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명나라 내의 광범위한 부패에 대해 이야기한 뒤, 최내길은 명나라는 반드시 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627년 5월 명나라에 다녀온 김상헌은 명나라는 후금을 토벌할 기세가 없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김지수는 심지어 중국인들이 명나라는 천명이 다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지수의 이 말에 인조는 "천조국의 일은 역시 한심스럽다"라고 답했다. 이후 인조는 명나라에 조공하는 나라들의 숫자가 줄었는지 묻자, 김상헌은 이에 "지금은 조공하는 자들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는것에서 명나라가 희망이 없고 망할것임을 알게되었다. 인조실록에는 모두 첨삭되어 있는 이 기록들에서 볼 수 있듯, 인조와 신료들은 부패와 내란, 외침으로 몰락하고 있는 명나라의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런 명나라의 편에 서서 후금과 전쟁할 생각이 없었다.[15] 이후에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전쟁이 난건 인조 책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인지부조화

현대의 인식이나 미디어에선 유독 지나치게 무능 이미지를 뒤집어 쓰는 왕이기도 하지만, 상술했듯 광해군과는 일장일단이 있기는 했다. 광해군은 정치와 경제에 밝지 못해 그때그때 자신의 생각과 기분에 따라 일을 추진하는 자기중심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했고, 실제로 예산을 모으겠다고 매관매직을 허락하거나 마음대로 대동법이나 토목 사업을 밀어붙여 직위고하 안가리고 광해군의 치세가 마냥 정상적이진 않았다. 심지어 왕이라면서 지나치게 민간신앙에 의존하기도 했다.[16]

특히 광해군은 백날천날 첩보원 보내서 홍타이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긴 했으나, 문제는 문제라는걸 알면서 그걸 막거나 해결하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상술한대로 자금을 버는 대로 궁궐공사에 쏟아부어 낭비해버렸고, 정보수집을 해놓고도 국방에 쓸 화약까지 궁궐 기와 굽는데 쏟아부었던 것이다.[17] 차라리 모르면 몰랐으니 실드라도 칠 수 있지 홍타이지의 대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려한다는 것도 다 알고 후금이 분명 훗날에 조선을 쳐들어올 수 있단것도 다 알면서도 쌀이고 돈이고 화약이고 궁궐에만 쏟아부었다. 광해군은 외교만으로 신하들에게 청나라 못 막는다고 징징거리기만 했지 제대로 막으려고 했다면 내치를 그렇게 엉망으로 해선 안되었다.

전후복구도 광해군은 그 흔해빠진 양전조차 실시할까 실시할까 하다가 결국 실시하지 않아서 인조대에 양전을 다시 실시했고[18][19][20] 대동법은 주구장창 반대만 했다. 광해군이 전후복구라는 개념이 있었으면 임진왜란으로 망가진 나라에 궁궐을 뚝딱뚝딱 지어올리는 짓은 안했을 것이다. 정충신이나 장만 같은 인물들 뽑아서 북쪽에 올려놓아봤자 정작 한양에서는 북쪽으로 올려보내야 할 물자와 인력을 착실히 갉아먹고 있고 또 그렇다면 북쪽에 올려보내는 물자와 병사를 줄이던가 아니면 궁궐공사를 중단하든가 둘 중 하나를 했어야 하는데 광해군은 둘 다 실시해서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의 고혈을 갉아먹었다.

인조는 경제를 살피고 김육, 이원익 등의 실무자들을 방해하지는 않아, 정말 필요한 개혁 자체는 그럭저럭 진행했다. 덕분에 호란 이전까지 몇 가지 개혁의 진전이 있었고, 아들 효종부터는 그럭저럭 국가가 돌아가는 기틀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군사 쪽으로 정충신과 남이흥이 받은 고난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며, 이괄의 난 직후 후금에 대비해 방비책을 제시하는 둘을 면전에서 모욕을 주고 심지어 남이흥은 사실상 소모품 취급으로 사지로 몰아넣기까지 했다.

광해군의 실패를 딛고, 청나라 숭덕제에게 털리긴 했지만 정강의 변처럼 나라를 아예 멸망시키진 않았으며,[21] 죽기 전에는 효종(세자) - 현종(세손)이라는 바른 선택으로 후계자들을 깔끔히 한 것이 인조의 최대 업적이다.[22] 어쨌거나 왕조의 재건에 성공했고, "여민휴식與民休息" 정책을 통해서 경제와 민생을 모두 재건해낸 것이다. 즉, 인조의 치세는 외치나 인사 관리로 따지면 암군의 칭호를 절대 피하기 어려우나, 주목받지 않은 후반기에는 양란 전쟁의 여파를 막아내면서 숨을 돌릴 기회를 준 것으로 요약된다.

인조는 반정한 바로 그날에 영건, 나례, 화기 등 12개 도감을 폐지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조도사 6명과 제주 목사의 처형을 명했다. 이러한 조치는 어느 정도 정치적 과장이 있기는 하겠지만, 백성의 고통에 대한 반정세력의 응답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극심한 흉년으로 재정난이 예측되는 시점에 광해군의 조도성책을 불살랐던 것, 조도관이 민간에 흩어져 비축해둔 미, 포를 백성들에게 나눠주도록 지시했던 것도 그 연속선에 있는 조치였다. 또한 인조는 즉위 후 6개월 만에 민에게서 거둘 예정이었던 원곡 11만 수천 석을 삭감했다. 이 원곡은 진헌, 제향, 어공에 쓰일 예정이었는데, 광해군 13년 이전의 미납 공물이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인조 말년 공식적인 공물가 원곡의 총량이 5만 석이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때 삭감된 양은 대단히 많은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급한 대로 이런 조치를 통해서나마 광해군대의 '일탈' 을 '정상화' 해야 했다.[23]

예컨대 중국사에서는 명·청 교체기인 1640년대를 소빙기가 가장 활성화된 시기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한국사에서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1670년 ~ 1700년 무렵이었다. 중국 역사학계가 1640년대를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 시기로 이해하는 까닭은 바로 이 무렵 왕조 교체를 포함한 대규모의 정치 경제적 변화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24] 반면 같은 수준의 이상 저온의 충격을 받은 1640년대 즈음의 조선은 도리어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이는 인조 정권이 1636년 병자호란에서의 패배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긴축 재정, 세금 부담의 완화 등을 통해 농민들의 사회 경제적 안정을 위해 매진했던 덕분이다.[25]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여민휴식을 국정 운영 모토로 하여 국가재정 규모 감축, 긴축 재정, 세금 부담 완화 등의 조치를 시행한다. 그리고 광해군 대에 완전히 180도 돌아서 일탈했다가 병자호란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국정을 운영한다. 덕분에 중국이 왕조 교체라는 격변으로 이상 저온의 충격을 가장 강하게 받은 1640년대를 무사히 넘기고 제도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들이 이뤄진다. 아무리 효종이 명군이라도 처음부터 기반없이 좋은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운 법이고 인조는 꽤 의미있는 성과들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여민휴식이라는 것은 본래 중국 전한의 황로학파가 내세운 사상으로서 전한 초기 문제와 경제의 정책이었다.[26] 여민휴식 정책은 왕실이 주도하는 철저한 절약과 절검,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 과감한 경세 정책,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 형벌 완화 등에 정책의 초점을 맞췄으며 이는 한나라 초기의 상태가 임진왜란이 갓 끝난 조선의 그 것과 같다는 점에서 이뤄진 생각이었다. 선조는 임란 이후 이 정책을 실행했고 이 정책은 인조가 계승하여 효과를 거두게 된다. 효종 3년에, 전 판서 조경이 '중국의 능화지로 벽을 바르고 능단과 금수로 만든 옷을 해 입고, 최상의 말을 타고,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 풍조'가 서울 고관 뿐만 아니라 시정의 하층민들에게 까지 만연했다고 한탄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한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역 사족들까지 편승 하는 등, 사치 낭비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그러나 사치현상에 대한 지적은 광해군때도 심지어 병자호란 직후나 경신대기근 같은 극한상황에서도 나타나는 기록들이며, 오히려 부패로 인해 민심을 얻지 못하는 부정적인 기록들도 많다. 인조 - 효종기의 국가 사정은 오늘날의 생각보다 상당히 나은 것이었고 이런 자유주의에 가까운 조정의 태도는 민간의 중흥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정책은 현종 때까지 이어졌지만 민간에 대한 비개입은 점차 지배층의 부의 독점화와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사회 양극화 현상을 크게 일으켰으며 현종 말기부터 숙종 시대에 이르는 소빙기로 인한 기근의 연속은 더 이상 민간이 모든 것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것은 숙종, 영조, 정조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왕권을 지닌 왕들이 등장하는 원인이 되는데.이는 한나라의 여민휴식 정책으로 호족이나 지주 계급이 성장했고 이로 인한 사회 양극화로 인해 한무제가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국가 주도, 국가의 사회 경제 개입과 법가적인 통치책을 쓴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또한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인조의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놀랍게도 병자호란 이전까지 광해군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의리를 떠나서 이익 관계로 생각해도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인조이든 광해군이든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친명 정책을 유지하되, 청(후금) 자극은 자제'이다. 이는 과거 고려가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유지했던 노선과 똑같다. 왜냐하면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그 순간까지도 청나라는 산해관에서 막혀있었고, 정말 심각한 내분으로 명나라가 자폭하지 않는한 자력으로 청나라는 도저히 명나라를 끝장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과연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태였다. 물론 당시 명나라가 대체적으로 청나라에게 밀리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송나라는 그보다 더 심하게 털리면서도 압도적인 생산력으로 요나라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대세가 청나라이니 실리를 위해 청나라에 붙어야 한다는 것도 결국 후대의 결과론에 불과한 것이며[27], 조선의 입장에서는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명나라의 멸망은 이자성의 난 때문이므로[28] 청나라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어렵다고 본 조선의 판단은 들어맞았다. 이 반란의 성공은 청군 때문에 명의 전력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에 원인이 있지만, 어쨌거나 청은 명나라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산해관에서 오삼계에게 막혀있었다. 더군다나 명나라는 남송으로 살아남은 송나라 때의 교훈을 살려 강남에 많은 물자와 지방군으로 이민족이나 반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문제는 이렇게 세워진 남명이 숭정제의 대책없는 자살과 후계의 불안정 때문에 내분이 일어나 망해버렸다.[29] 따라서 조선이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유사한 상황에 있었던 고려의 대응책이 된다.[30]

물론 이괄의 난은 그의 실책이다. 정쟁에 의해 발생한 이괄의 난이 없었다면 정예군이 배치되었던 북쪽지역 방어가 허술하게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서북지역 군관들은 이괄의 난 이후로 역적으로 몰릴까봐 진법 훈련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3. 부정적 평가[편집]



3.1. 통치 능력 부족[편집]


인조는 국가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비전이 부족했다. 그리고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에 가닥을 잡아주지 못했다. 자신의 등극 자체가 반정을 통한, 사실상 찬탈이었기 때문에 역모에 대한 불안감으로 북인 인사들도 많이 숙청하거나 죽였다. 특히 광해군 시절에 수많은 옥사로 경험했던 터라 반정 뒤에는 경계심이 편집증에 가까워졌다.[31]

인조와 서인 정권의 경계로 인해서 북인들 중에서 권신이거나 실력자,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측근 세력들은 숙청됐다. 이이첨과 대북 세력들은 악행을 많이 저질렀기에 죽음을 당해야 마땅했지만, 류희분과 기자헌의 경우에는 서인들 내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죽었으며, 북인의 권신이었던 박승종은 아예 자결할 정도였다. 유몽인이 광해군을 복위하려 했다는 유응형의 모함을 받아들여 이미 폐모론에 반대해 조정을 떠나 재야에 은둔한지 오핼인 유몽인을 죽였다 경세가로 이름 높은 유형원은 아버지 유흠이 인조에 의해 연좌제로 역적 취급당하고 죽자 정치판의 막장스런 현실에 환멸감을 느끼고 재야로 내려갔다. 이러한 북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벌로 반발이 일어났는데, 박홍구 유효립 임취정등이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 같은 종친들을 왕으로 옹립할 거사를 꾸밀 정도였고, 이후에도 북인잔당들은 후금과 내통하려 쌨던 양경홍의 역모사건과 정한추대사건[32]등을 꾸미는 등 인조 정권에 반격을 가하려 하였다.

인조 시대의 인재풀은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 세조, 중종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빈약하다. 게다가 대표적인 주화론자인 최명길이나 행정의 달인 김류 같은 인재를 보유하고도 제대로 활용 못하거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김류는 비실무직인 청요직을 역임했을 뿐이었다. 조선 시대에 유일하게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한해에 모두 급제한 괴수에 가까운 최명길은 신료로서 뛰어났는데, 인조 정권에서 군계일학의 현실주의자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고, 그러면서도 청의 파병 요청을 극렬 반대하여 부결시켰으며, 명나라와 몰래 연락을 취해서 조선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하고, 환향녀 박대에 반대하고, 강빈 사사도 반대하는 등 종종 인조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고 결국은 축출당했다. 그마저도 인조 반정에 가담하여 왕위에 앉힌 무리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등용된 것이다. 다만 2번의 호란으로 트라우마를 입어 전쟁을 꺼리던 인조가 주화파인 그를 푸쉬를 해줬지만, 이는 같은 공신그룹이었던 심기원과 김자점을 인조가 더 총애하는 바람에 역시 마찬가지로 최명길은 당시 정승이었던 홍서봉, 심돈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애당초 인조가 서인과 손잡고 광해군을 쫓아낸 이유가 가족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었던 탓도 있다. "폐주보다 잘해보자. 그러니까 당쟁, 동기 살육은 안 돼" 정도의 관념은 있었어도, 태종이나 세조처럼 정권을 잡고 난 다음 나라를 어떻게 이끌겠다는 비전은 없었다.

그래도 왕이 된 후에는 재위 전반에는 신흠, 오윤겸, 윤방 등을 등용하며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보자!라고 했지만 결과는 알다시피로 병자호란으로 인한 삼배구고두례로 대표되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이후에 나라를 이끌 의욕을 잃었는지 재위 후반에 접어들면 심기원김자점을 주축으로 해서 무능하고 부패한 공신들로 하여금 나라를 이끌고 갔다. 심기원과 김자점은 무능했지만 아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총애를 얻어 권신이 됐고, 이들 이외에 주변에 예스맨들만 채우려 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광해군 시절 못지 않은 권신 정치를 펼쳤는데, 막상 심기원과 김자점은 나중에 자기 이익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하며 역모를 일으키다가 처형됐다.

인조는 신하들이 반대하는 추숭에 매달릴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곤 그 권력을 즐기는 데에만 썼을 뿐 2차례의 호란을 초래했고, 가정적으로는 맏아들 소현세자를 박대했고 맏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손수 죽이며 손자들에게 "그 개새끼 같은 것들을 왜 신경 써야 되냐"라고 욕하며 죽였고, 강씨 일가까지 박살내는 등 반성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두고두고 까인다. 과거 서인들이 주류이던 시절에는 반정을 일으켜 즉위하고 침략자 청에 맞서 싸웠다는 명분으로 인조대왕이라고 칭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사실 이 때도 전반적인 평가는 좋지 않았다.

당장 위에서 나왔듯이 인조가 총애했던 심기원과 김자점의 경우에는 자기 권력이 견제받자 바로 역모를 일으켜서 정국을 불안정하게 했고, 결국에는 이 두 사람의 역모 사건으로 인해 인조가 세운 공신들의 상당수가 갈려나가고, 그가 만든 정책은 전면 재검토되어 그나마 쓸만한 것들만 추가됐다. 전반적인 치세가 치욕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본인이 문제가 많은 군주임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다만 인조는 운이 좋았다. 백성 50만이 요동으로 끌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어도, 자식들이 볼모로 끌려 갔어도, 서인 정권이 북인의 권신들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을 깔끔하게 정리를 했기 때문에 국내외에 인조가 가진 권력 탈취를 도모하는 세력이 없었다.

제 식구 챙기기와 우유부단함으로 3번이나 나라를 결단을 낸 암군이면서 자기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장남 소현세자ㆍ강빈과 손자들을 핍박하고 죽게 만든 패륜적인 면과 백성들 입장에선 광해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군주였던 인조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이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날린 군주였던 셈이다.

3.2. 실패한 경제 정책[편집]


이괄의 난 이후 정예병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킬까봐 10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전후 복구라는 명분하에 병력 재건을 안하는 바람에 인조 정권은 정작 힘을 길러서 한 번 써먹어야 할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는 인조 정권의 '컨트롤 타워'로서 한계가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비판자들로 하여금 "애초에 옹호론자들의 주장대로 힘이 길러지긴 길러졌나?", "국가를 재정비해서 뭘 했다느니 하는 게 전부 허울만 그럴싸한 조치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이기도 하다.

경제 쪽에 대해서 살펴보면, 광해군 때의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해 망가지던 민생경제를 인조 정권이 살렸다는 주장에서 사치근절 주장을 기록을 그 근거로 제시하는데, 정작 사치근절 기록은 광해군 집권기에도[33], 인조 즉위 직후에도[34] 있었던 기록이다. 심지어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박살난 직후[35]나, 조선 최악의 기근이었던 경신대기근 때도 사치가 심하다는 주장이 나온다.[36] 결국 사치기록이 있으니 조선 경제가 나아졌던 거라는 주장은 끼워맞추기도 안 되는 주장이다. 오히려 민생경제 문제와 제대로 된 인과관계가 없는 사치기록과 달리, 오히려 당시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만한 일은 많이 일어났다.

이날 밤에 흉격서(兇激書)가 군영(軍營)에 투입되었는데 아마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몰래 흉계를 품고 이런 망측한 일을 한 듯하다. 그러나 단서를 잡지 못하여 인심이 불안해 하였다. 군영은 곧 훈신 대장 신경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직숙(直宿)하는 곳이다. 흉격서 가운데 어휘(御諱)를 바로 썼기 때문에 보는 자가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이때 여염 사이에 또 상시가(傷時歌) 한편이 떠돌고 있었는데 대개 시사를 풍자하고 훈신을 지척한 것이었다. 그 가사는 이렇다.

아, 너희 훈신들아

스스로 뽐내지 말라

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그의 말을 타며

그의 일을 행한다면

너희들과 그 사람이

다를 게 뭐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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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9권, 인조 3년 6월 19일 을미 2번째기사

당대 집권자들이 광해군 시절의 북인들과 똑같이 백성들을 수탈하며 부귀영화를 누렸음을 풍자하는 시이다.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수탈 때문에 집권 3년차에 이미 민심이 돌아서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 중 하나다.

그나마 양심이 있다면, 위와 같은 역사기록에 손을 대지는 않아서 그대로 남겨두었고 종종 반성하는 모습 정도는 보였다는 점이다. 이전의 비판과는 달리, 공서파들은 권력이 점차 회복되자 할수있는 선에서는 최소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도 많이 했는데, 사정만 허락한다면 아예 막장까지 가려고 했던 모습은 아니어서 대북파의 꽉 막힌 모습과는 달랐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어진 덕화로 다스리지 못하여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했고, 시행하고 다스리는 방도는 형정(刑政)의 말단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두서가 없이 어지러워도 가닥을 찾아 다스리지 못하며, 번다하고 과중한 부역이 중첩으로 나오는 것은 대체로 백성들의 신의를 잃은 데서 나온 처사로써, 천심(天心)을 어기고 인심에 거슬린 것이 많으니, 위란(危亂)의 조짐일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어진 마음과 어진 명예를 지니셨지만 선왕의 도와 정사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위에서 은혜를 베푸는 방도가 넓지 못하고 아래에서 덕화를 이어받아 널리 교화하는 일을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신은, 전하께서 마음의 천리를 다 밝히지 못하시고 위임한 신하가 혹은 적임자가 아니기도 해서 치도(治道)의 요령을 터득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여깁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대중을 잃고서 오래도록 국가의 번영을 누린 경우는 없었으니, 이괄의 역변 때에도 조금은 증험이 되었습니다.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던 날 따르는 백성이 없었으니, 어찌 백성들만의 죄이겠습니까. 삼가 비교하건대, 백성은 창자이고 나라는 몸통입니다. 창자가 병들면 몸통은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고, 외부로부터의 병의 감염이 바로 그러한 때를 타게 되는 것은 형세나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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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14권, 인조 4년 12월 15일 계축 2번째기사

이 상소가 나온 것이 인조의 집권 4년차의 일인데, 이때도 민생 안정은커녕 민심을 못 잡으니 나라 사정이 형편없어지고 이괄의 난 때도 왕 따라 나서는 백성이 없지 않았냐고 신하가 상소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비판에 별달리 화를 내거나 무시하는 모습까진 보이지 않고, 최소한 이후의 국정은 양전 같은 대민지원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저걸로 끝난 떡밥이 아니라, 상소의 비판을 보완하는 과정으로 볼수도 있긴 하다.

인조 초기에는 모문룡에게 매년 군량미로 인한 경제적 피해도 있었다. 정묘호란 1년 전인 1626년, 실록에는 "남한산성 군량미가 모자라니 대책을 논의하자"는 기사가 나온다. 비변사에서는 이때 이미 '모문룡의 군량 보급으로 조선의 물력이 바닥났다'라며 일반적인 대책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보고하고 있다. 어쨌든, 2차례 호란이 벌어지기 전에도 이미 조선의 경제 상황이 그닥 녹록치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사다.

3.3. 이중외교의 파탄[편집]


인조는 반정 명분 중 하나는 명에 대해 충효스럽지 못했던 '광해군의 망은배덕[光海忘恩背德]'이었다. '중 하나' 정도가 아니라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 교서에서 광해군의 부덕함을 질책한 분량의 절반 가량이 대명 사대 소홀과 친후금 정책을 성토하는 내용이었을 정도다.[37] 일부 현실적인 주화파들이 이중외교를 주장했다고는 해도 이들을 인조 정권이 이를 거국적으로 밀어주기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의 추장은 한낱 하찮은 자일 뿐이다. 우리 나라 수천 리의 지방에 어찌 적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으랴마는,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하므로 쉽게 얻지 못할 뿐이다. 지금 장신(將臣)들이 모두 들어가 지킨다는 것으로 말하면서 출전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하니,

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14일 무진 1번째기사

이는 정충신, 남이흥 같은 당대 명장들과 국방 정책을 논의했을 때 인조가 한 말이다. 그때 조선의 국방력은 평안도 안주 같은 북방의 주요 군사 거점을 지키는 것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사르후 전투(1619년)에서 조·명 연합군을 궤멸시킨 후 한 번의 패배도 없이 기울어가던 명나라 군대를 박살내고 있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였다. 무신들이 그런 점을 기껏 알아듣게 설명해 줬더니, 인조란 자는 "어째서 고위 장성이란 자들이 지키기에만 급급하고 먼저 나가서 적을 치겠다고 하는 패기가 없냐"고 나무랐던 것이다. 그만큼 인조 정권은 대중국 문제에 관한 한,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때 조선의 집권 세력도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했다느니 하는 말은 저러한 사료들을 죄다 무시하고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물론 저것은 집권 초기의 일로, 나중에는 인조도 현실을 파악하고 저런 정신나간 주장을 하지 않기는 했다. 그렇다고 그러한 발언을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이, 이는 대내적으로 후금에 대한 적개심을 반복·강조해야 정당성이 확보되는 인조 정권의 태생적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런 정권이니만큼 실제로 전쟁으로 맞붙어 참패하는 일을 겪지 않고서는 후금 중심의 질서에 결코 순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집권 세력이 후금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거나 할 정도로 미쳐돌아간 것은 아니었고, 상대의 강대함에 밀려 개시(開市) 요구 등을 들어주긴 했으나, 누가 봐도 하기 싫어하는 티 팍팍 내며 최소한의 성의만을 보이는 정도였지, 적극적인 화친 정책을 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명나라에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니다. 인조 반정 소식을 접했을 당시 명나라는 되려 광해군은 우리한테 협조적인데 왜 내쫓았는지 모르겠네란 반응이었다[38][39]. 이 때문에 조선은 동아시아 3각 외교에서 거의 호구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엄청난 뇌물을 바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백성들 고통은 심해졌다. 이렇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명나라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정통성을 위해서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격다짐으로 아버지 정원군대원군이 아니라 아예 왕으로 추존한다.

후금으로 개편한 이후의 북방 외교는 더 심각했다. 물론 당시 조선에서 전쟁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어차피 조선이 명의 조공국 지위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청나라는 침공할 것이 뻔했고, 설사 전쟁을 하지 않아도 막대한 공물과 군사를 요청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전쟁이 필연적이라 해도, 아직 임진왜란의 상처와 이괄의 난의 후폭풍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조선에겐 전쟁을 늦출수록 유리했다. 그런 이유로 이귀, 최명길, 박로 등의 신하들은 아직 청나라와의 적대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인조는 결정적인 상황일 때마다 결단을 내리지 않은채 얄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제대로 된 답변을 마련하지 않은 채로 목소리만 높이며 뒤로 빠졌고, 그 결과는 병자호란의 처참한 실패와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결국 인조는 국력을 객관적으로 본 주화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전파들 주장에 동조하여 이중외교보다는 친명배금 정책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노골적인 적대 정책과 푸대접으로 일관하자 불만이 폭발한 나머지 압록강을 건너 정묘호란이 터지고, 이괄의 난으로 약체화된 조선군은 계속 밀려서 정묘화약을 맺기에 이른다.

정묘호란으로 조선은 후금을 이기지 못한다는게 판명되었으나, 이는 인조 정권이 그 나라에 대해 적극적인 화친을 모색하는 계기가 전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은 요구를 들어줄 만큼 들어줬는데 침공한 후금에 대한 적개심만을 키웠을 뿐이었다. 정묘호란 발생 9년 후에는 인조 정권이 조선을 방문한 잉굴다이, 마푸타 이하 청 사신단을 푸대접하고 박대해서 발걸음을 돌리게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귀국하는 사신단에 분노한 백성들이 돌을 던지는 일이 발생했는데도, 인조는 잉굴다이 등을 달래기 위한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바로 그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렇게 사신단을 박대한 것만으로도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어렵게 하는 치명적인 실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조는 이를 뛰어넘는 강경책을 일삼았으니, 제일 대표적인 것이 조선의 비타협적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는 청 태종에게 협박장에 가까운 국서를 보낸 것이다.

지금 명나라는 곧 2백여 년간 중국을 통일해 다스려온 주인인데 우리 나라가 어떻게 한번 요동과 심양 한쪽 땅을 잃었다 하여 문득 다른 마음을 품고서 귀국이 하는 바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

옛날 왜구가 우리 나라에 길을 빌려(가도입명) 중국을 범하고자 했으나 우리 나라가 의리로써 배척하고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전쟁을 일으킨 단서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구는 우리 나라 팔도를 함락하고 우리 백성을 잔멸(殘滅)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계책을 얻었다고 여겼습니다. 얼마 뒤에 수길(秀吉)[40]

이 죽자 그 뒤로 자중지란이 일어나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는데, 머리가 떨어져 죽은 자들은 모두 전날에 우리에게 독기를 부렸던 장사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원씨(源氏)(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평씨(平氏)(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축출하여 멸망시키고 우리 나라와 통호(通互)한 지 3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부하고 백성이 성한 것이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시대보다 배나 됩니다. 천도(天道)가 전쟁을 싫어하며 선을 돕고 악을 벌(권선징악)한다는 것이, 이것이 그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41]

...

그리고 천심이 매인 바는 실로 백성에게 있는 것이니, 설사 우리 나라가 의(義)를 지키다가 병화를 입어 그 병화가 비록 참혹하더라도 원래 그 임금의 죄가 아니면, 민심은 반드시 떠나지 않고 국명도 혹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42]

지금 귀국이 공갈 협박을 하면서 요구와 책망을 해서 백성의 재산을 모두 긁어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면, 민심이 반드시 떠나가고 나라가 따라서 무너질 것입니다. 이는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접한 것으로 어둡지도 민멸하지도 않을 도리로서, 서생(書生) 소자(小子)가 간책 위에서 주워온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6월 17일 경인 2번째기사

혹자는 이 국서 전달을 인조 정권의 전쟁 회피 노력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명백한 전쟁 도발이었다. 안그래도 분위기 안 좋은데 조선과 전쟁을 벌인 이후 멸문당했던 도요토미 가문을 들고 온 시점에서 저 글은 그냥 협박이다. 힘이라도 좀 있을 때 이런 협박을 하면 잠시 움찔할 지도 모르지만, 밑천 다 보여준 지 오래인 마당에 저런 협박을 하면 안 처맞는 게 더 이상할 일. 실수였다는 변명도 안 통하는 게, 인조는 이 문서를 격문[檄]이라고 칭했는데, 토황소격문을 비롯한 역사상의 격문들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적대 진영에게 보내는 격문은 항전의 의지를 적극 표명하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다. 결국 인조는 청나라와 한판 붙을 생각으로 문서를 작성한 것이고, 실제로 6개월 뒤에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넘는다.

자신이 도화선이 되어 청의 침공이 가시화 되었음에도 인조는 자기 합리화와 무책임으로 일관했다. '곧 겨울이면 압록강이 얼 것인데 그때 격노한 청군이 넘어오면 어쩌려고 하십니까?'라는 뉘앙스를 전달한 최명길을 필두로 해 주화파들이 적극적으로 청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아무 것도 안 한 채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린 신하들의 갑론을박을 보고만 있었다. 한마디로 무책임의 표본이었다.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사죄하는 문제는 인조의 결정 회피로 7개월이나 끌게 되었다. 결국 박로가 직접 사신으로 출발했으나, 박로가 압록강을 넘기도 전에 병자호란이 터지고 만다.

"조선 측에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더라도 청이 대내외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을 쳤을 것"이라는 주장은 조금도 인조의 책임을 덜어 주지 못한다. 청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조선 침략을 획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런 때에 명분을 제공해서 침공을 앞당긴 인조 정권의 실정은 더욱 엄중하게 질타를 받아야 할 부분이다. 조선이 홍타이지에게 두 번째로 유린당한 병자년(1636년)은, 후금 사신단에 대한 조선 정부의 푸대접 및 조선 민중의 공격, 조선 사신단의 홍타이지 황제 즉위식 참가 거부 및 국서 유기 사태, 인조의 도발적인 국서 전달 등 유난히 후금-청에 대한 적대 행위가 집중되었던 해다. 오랫 동안 밖으로는 명의 무역 봉쇄, 안으로는 기근과 반란에 시달렸던 청이 하필 그 해에 조선을 침공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긴 힘들다. 청의 입장에서 인조 정권이 보인 행태는 그야말로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 격이었던 것이다.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일에 정묘년(1627년)에 쥐어터지고 무릎꿇은 조선 따위가 참견한 자격이 없음은 현실적으로 보나 명분론적으로 보나 당연한 이치다. 홍타이지가 황제임을 천명한 이상, 신속(臣屬)을 거부하고 있는 조선은 천자로서 토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논리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이들이 바로 조선의 관료들이었다. 즉, 당시 조선의 집권 세력은 한족이 아닌 여진족으로 이뤄진 오랑캐 국가에게 신하로 들어가기 거부한다며 전쟁을 각오하고 군신 관계를 거부했던 것이다. 만약 인조 정권이 '진정한 천조는 명나라밖에 없기 때문에' 청은 그런 명분을 앞세워 쳐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그야말로 아이 같은 순진함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물론 인조 이하 조선의 관료들이 그렇게 어리석었을 리는 없다.

호란을 겪은 조선인들은 인조 정권의 대 후금 강경 노선이 병화를 불러들였다는 데에는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었다. 백성·사대부 모두가 말이다.

김류가 아뢰기를,

"불가합니다. 지금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는데, 지금 어떻게 섬과 통하여 다시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류가 도체찰사(道諦察使)[43]

임무를 담당하여 만약 국가의 병력으로는 그들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면, 어찌 그때에 기미책을 극력 주장하지 않고서 국가가 망하고 난 뒤에야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린다.고 말을 하는가. 아, 당시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이 과연 누구였던가. 신진 인사들이 국가의 대사를 경솔하게 논의한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주장(척화론)을 취사 선택한 자는 또 누구였던가.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9일 기묘 5번째기사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북방 방어군의 역량의 심각하게 훼손되는 바람에 두 번의 전쟁(정묘, 병자호란)에서 밀린 거라고 하지만, 본인도 군대로 왕을 쫒아내고 즉위한 인간이 군대를 그렇게 허술하게 숙청했다가 군사반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괄의 난은 '인조의 불운'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닌, 인조가 뿌린 씨앗에서 열린 열매에 가깝다. 조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가 그러했듯 실리를 좆아 후금에게 온건 외교를 이어가고 있던 군주를 내쫓아 후금의 경계심을 샀으며, 기존의 외교 관계에서 저자세를 취해 무너져가는 명에 고개를 숙이고 일어서는 청에는 침을 뱉으며 직접적으로 호란을 일으킬 명분까지 줄 뻔했다. 거기다 내부적으로도 후금에 대한 적대 여론을 자극하는 여건을 조성해서 그 지배층으로 하여금 '조선=적성 국가'라는 인식을 굳히게 만들고, 종국에는 아예 선전포고문까지 먼저 써서 보낸 정치적 격변의 주인공이 다른 이가 아닌 인조 본인이었던만큼, 당시 인조가 처한 외교적인 난제가 '남이 준 불행'이 아닌 것이다. 결국 후금 내부 사정 문제를 제외한다면, 어떤 점을 강조하더라도 호란에 있어 국가가 흔들리고 수많은 민생이 목숨을 잃게 된 만악의 근원은 인조에게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3.4. 두 번의 호란과 굴욕[편집]


인조의 군사적 무능은 두 번의 호란, 특히 병자호란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저지른 주요 군사적 실책은 다음과 같다.
  • 1636년 4월 청 측이 나덕헌과 이확 그리고 호역 박인범에게 12월 25일을 기한으로 최후통첩을 보내고, 조선인 피로인과 병사들을 활용하여 대명전쟁에서 홍타이지의 동생 아바타이(abatai)가 전사했다거나, 청 측이 대명전쟁을 준비하며 조선과는 화친을 바라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자, 인조는 이에 헛된 희망을 가지고 출병이 임박했다는 첩보들을 사실상 무시했다.[44]
  • 청군의 병력 이동에 대한 관측 / 예측에 실패해서 더 안전한 남쪽 변방이나 강화도가 아닌 애매한 곳에 중앙정부가 피신하게 됨
  • 피신처인 남한산성에 군량이 부족한 탓에 장기 농성이 불가능했음
  • 군대의 요직을 김자점, 장신, 김경징과 같은 무능한 이들이 차지한 결과[45] 청군이 쾌속 진군하고 두 왕자가 피신 중이던 강화도가 함락됨
  • 전반적으로 방어군이 지휘 체계 문제보급 미비 등으로 전투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함
이러한 인조 정권의 삽질들에 대해서 옹호 측은 이를 도리어 인조를 옹호하거나 동정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청군의 빠른 진군 속도를 예상하지 못했고, '하필이면' 도원수 김자점이 무능한 자였고, '불운하게도' 남한산성에 군량미가 없어서 인조가 굴욕을 당했다는 식이다. [46]

물론 병자호란에서 조선 정부와 군대가 보였던 모든 추태, 졸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조 못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개별 전투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직접 참여한 각급 지휘관들에게 우선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최종 인사권자이자 군 통수권자인 인조가 책임을 면할 수 없음도 당연하다. 특히 '도원수 김자점'과 같은 최고위급 직책에 대한 잘못된 인사가 불러온 참극엔, 참극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만큼이나 인조의 책임이 무겁다.[47]

인조 정권이 군정에서 보인 한심함은, 병자년 9월에 인조가 비변사 당상관들을 인견(引見)했을 때 영의정 김류와 주고받은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류: 알다시피, 의주의 상황은 예전과는 달리 지킬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데 혹시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병력과 물자가 채워질지도 모르겠어요.

인조: 후방에서 올려보내는 병력이나 의주 자체의 병력이나 모두 줄어들고 있으니 지금은 의주의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기 힘들고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같은 식으로는 안 될 거 같고, 풍년이 들어서 여유가 생겨야 그곳의 전력 강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겠다.

김류: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렇게 하는게 어떨까요? (어차피 지킬 수도 없으니) 의주성 보수 공사 멈추고 정예 병력도 보내지 말고 (여력이 생겨서 의주를 확실히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되어) 보수 공사가 재개되면 그때 병력을 올려 보내면 되지않을까요?[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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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53책 (탈초본 3책) 인조 14년 9월 4일 을사 8/29 기사

즉, 저 작자들은 아예 최전방 의주에 대한 지원을 당분간 하지 말자고 결론내었는데, 의주의 수비군을 아예 해체시키거나 뒤로 물린다는 것이 아니고, 중앙정부로서는 해줄 것이 없으니 당분간 니들끼리 알아서 버티라는 정도지만, 사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황당한 얘기다. 당장 의주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바로 압록강과 가장 근접한 최전방으로, 청군이 도하해 재정비할 쉬운 위치로,[49] 임진왜란의 선조조차 그런 지형판단력은 있었다. 선조가 전쟁에 대비해 많이 공을 들인 지역은 일본군의 공격 제1, 2순위가 될 수 있는 경상, 전라였기 때문. 이중에 경상도 방면은 실패[50]했지만 전라도에서는 성공해서 임진왜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선조조차 '만일 일본이 한양까지 점령한다면?' 에 대응할만한 메뉴얼이나 병력도 없어 부리나케 도망쳤지만, 그 후 집권한 인조는 그 교훈을 바탕으로 청이 쳐들오면 강화도나 남한산성으로 도망칠 메뉴얼과 거점들을 만들거나 보강하긴 했다. 문제는 그 후 그곳들을 지키고 유지보수할 병력들을 완편하지도 않고 보급도 소홀히 해서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의주성 가까운 곳에 성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고, 고려강감찬이 쌓은 것을 1628년 이후에 고쳐 쌓은 백마산성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 적이 쳐들어 올지 모르는 때에 최전방에 방어 거점을 늘리지는 못할망정 있는 것조차 제대로 관리할 여력이 없다고 포기하네 마네 소리가 나오는 것은 제대로 된 국방이라 볼 수 없다.[51]

병자년 11월 중순, 그야말로 병자호란 코앞의 시점에서도 인조 정권은 여전히 의주를 방치하고 있었다.[52] 설사 나중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성 수리와 병력 공급이 재개되었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충실히 방어 시설을 구축하며 군대를 훈련시킬 수 있었겠는가. 의주 같은 곳이 그 지경이었으니 그 전쟁에서 조선의 3도가 유린당했던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결코 '운'의 문제가 아니라 말이다.

의주 수비만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기록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시 인조 정권의 전반적인 전쟁 준비 상태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접반사 이필영(李必榮)이 치계하였다.

"도주하여 돌아온 한인(漢人) 왕언과(王彦科) 등이 말하기를 노적(奴賊)은 10월 1일에 이미 소굴로 돌아갔는데, 서쪽을 침범했을 당시 장령(將領) 2명이 전사했으며, 겨울쯤에는 동쪽 고려(高麗) 지방으로 가려고 지금 말을 먹이고 있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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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33권, 숭정 9년 11월 4일 갑진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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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동지경연 이성구(李聖求)가 나아가 아뢰기를,

"돌아온 호역(胡譯)의 말을 들으면 저 도적이 군대를 동원시킬 낌새가 있다 하니, 외방(外方)의 병마(兵馬)를 국경에 불러모아 몇 달 동안 변고에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역이 어떻게 오랑캐의 실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구가 아뢰기를,

"이미 병화를 입을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있으니 민망스럽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어할 준비를 하고자 하면 형세가 이와 같고 기미(覊縻)할 방책을 세우고자 하면 명사(名士)의 무리가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 적은 오고야 말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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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33권, 숭정 9년 11월 12일 임자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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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뢰기를,

"인범(仁範) 등이 격문을 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적의 발동은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있을 것입니다. 얼음이 언 후에 불의의 변고가 있게 되면 하도(下道)의 군사를 징발하는 일은 매우 곤란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이미 삼남(三南)과 강원도로 하여금 정초군(精抄軍) 1만 8천 3백여 명을 단속하여 대기하게 하였으니, 지금 경상 좌·우 병사와 전라·공청도 병사, 강원도 춘천 영장(春川營將)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오는 12월 10일에 각각 필요한 무기를 가지고 경상(境上)에 진주(進駐)하여 해빙되기 전까지 변고에 대비하게 하고, 경유하는 각 관아에서는 산료(散料)를 공궤(供饋)하고, 국경에 유주(留駐)하는 기간은 그 본읍으로 하여금 군량을 운반하여 계속 공급하게 하며, 또 머물러 있을 때는 항시 조련(操練)을 시켜 위기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 뜻을 선전관을 보내어 하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둘지 말라(姑徐). 그리고 각읍이 군량을 계속 대는 것은 참으로 지탱하기 어려우니 해조로 하여금 조용히 다루어 처리하여 미리 첫들머리 고을에 비축하여 큰 폐단을 제거케 하라."

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숭정 9년 11월 13일 계축 1번째기사

홍타이지가 전쟁 계획을 내부적으로 공개한지 한달만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청의 출병이 임박했다는 첩보가 입수됐으나, 인조는 홍타이지의 가짜 출병 기한에 놀아나서 해당 첩보들을 모두 안일하게 넘겨버렸다. 더군다나 이성구의 경고에 대해 인조는 호역 따위가 무슨 남의 나라 실정을 제대로 알겠냐고 힐책하기도 했다가 이성구로부터 일침을 놓였다.

그러자 인조도 쪽팔린 건 알았는지, 더는 침략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꾸역꾸역 방어 준비를 하는데(그럼에도 이성구 말대로 국방 역량 강화엔 다들 무관심하고) 여기에 입만 산 선비란 놈들조차 화친을 결사반대하는 현실을 개탄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이 지경이 되도록 제대로 된 전쟁 준비도, 적극적인 유화책도 마련하지 못한 총책임자인 인조는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으로 아랫것들만 비판하기 시작했다.[53][54]

사실 병자호란 당시 보인 조선군의 지리멸렬한 모습은 북방의 정예 병력들이 이괄의 난에 가담했다가 토벌당해 빈집털이에 취약해진 상태여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등의 주장도 있다. 이괄의 난이 남 탓인가는 넘어가더라도, 그때 날아간 북방의 공백을 10년 동안 복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조가 군사 문제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거나 서툴렀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병자호란 때 황해도에 2만이 넘는 정예군이 있었고, 이밖에 8만 가까운 속오군이 구성되어 있었다지만, 이들이 정말 건실한 군대였다면 충분히 피난할 시간을 벌어주어 황급히 차선책으로 남한산성으로 도피했다가 삼전도의 굴욕을 맞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신이 생각건대, 온 나라의 정병과 무사가 모두 여러 대장의 수하에 모여 있는데, 일이 없으면 농장을 감독하는 역사를 하고 일이 있으면 호위(扈衛)로서 편안함을 취하는 곳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묘 호란에 강도로 피란갔던 일에 대해서는 식자들은 지금까지도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날쌘 군사를 모아 섬속에서 늙히면서 한 명의 병사나 한 마리의 말을 싸움터에 내보내지 않고 수백 보 밖에서 적의 기병을 엿보면서, 내란(內亂)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로 성상의 귀를 현혹시켜 그것으로 자기네의 목숨을 보전하는 바탕으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라와 휴척을 함께 할 훈신들은 부귀가 이미 극도에 이르러서, 살려는 마음만 있고 죽음으로써 지킬 계획은 없는 것이 으레 이와 같으니, 급한 때에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

인조실록 32권, 숭정 9년 3월 2일 정미 2번째 기사

이는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과 더불어 양대 척화파 거두였던 부제학 정온이 위의 용골대 귀국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인조에게 올린 상소다. 정온은 훈신(勳臣) 즉 공신 세력이 조선군의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으로 부리며 야전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현실을 규탄하고 있는데, 그 훈신들 뒤에 누가 있는지는 말 안 해도 다들 알 것이다. 실제로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 등 반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4명은 군관을 각각 400명씩 거느릴 수 있었다. 당시 이귀야 죽고 없었지만 아직 나머지 셋은 살아있던 데서 보면(이후 이서는 병자호란 도중 사망) 무려 12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공신들의 사병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는거다.[55]

그때 사헌부도 훈국(訓局) 즉 훈련도감에서 양성한 정예 병력들이 야전을 회피한다며 비슷한 지적을 했는데, 이에 대한 인조의 반응은 한 마디로 "니들은 나대지 말라"는 거였다.

설상가상으로 인조는 공신 일가들을 챙겨준답시고 실력있는 인재들 대신 3류들이 중책을 맡게 놔뒀고, 심지어 최고위급 지휘관들조차 하나같이 무능하고 형편없는 인물들로 채웠다. 인조가 도원수, 부원수 급으로 선임한 장수가 장만, 이괄, 김자점 등인데, 이 중에서 유능하다고 할 만한 자는 장만과 이괄 정도였으나 이괄은 인조에게 버려졌다고 반란을 일으키고 죽었다. 물론 이괄 역모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인조는 자기 사람인 이괄을 보호하기 위해 그 아들을 붙잡는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들을 역적으로 만들어 놓고 조선의 최정예 부대를 지휘하는 아버지가 가만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특히 인조가 비밀리에 이괄과 접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괄의 난은 반쯤 인조가 부추긴 사건인 셈이다. 믿을 거면 확실히 믿고 내칠거면 확실히 내쳐야 했는데 어설프게 행동해놓고 자기가 바라는대로 되게 해달라고 한 셈.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였던 김자점은 말 그대로 무능 그 자체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노먼 다이크 중위마냥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아, 청군이 국경을 넘은 지 단 7일 만에 한성에 도달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56] 이게 더 문제인데 노먼 다이크는 장교 중 초급장교인 위관인 반면 김자점은 현대로 치면 4성장군급 합참의장이었다는 사실이라서 더 심각한 것이다. 청나라 침입에 대비해 구축해 둔 2만 정예병을 전장에서 이탈시켜 전력 보존만을 꾀했던 것이다. 게다가 정찰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의 전시 수도 격인 강화도의 수비를 맡은 강도유수 장신도 무능했는데 그가 뭔가 결정을 내리긴 했는데, 그게 싸우자는 게 아니라 도망가자는 거였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 싸우기라도 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원래대로라면 강화도 수비에 책임조차 없었을 충청수사 강진흔. 허나 33척의 대함대를 지닌 장신이 도망가던 마당에 고작 7척만을 지휘하던 강진흔이 전세를 뒤집는 건 역부족이었다. 하다못해 이 상황에서 봉림대군 일행이 남쪽으로 도망칠 시간이라도 제대로 벌렸다면 조선은 계속 항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필 그 임무를 맡았던 건 가족마저 찌질하게 버리고 도망친 김경징이었다. 이 두놈의 기가 막힌 활약 때문에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해서 손쉽게 조선군을 격파하고 봉림대군, 인평대군, 세자빈 강씨, 원손 등 왕실의 핵심 인물들과 여러 대신들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남한산성의 중앙정부는 항전 의지가 완전히 꺾여서 성 밖으로 나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치욕을 겪는다.

광해군은 외적 방비를 위해 대규모 병력을 국경에 집중시키고도 국가 예산을 궁궐 짓는 데 낭비해서 국방 강화를 스스로 방해했고[57][58], 인사 관리에 실패해서 훈련도감 장수들이 능양군과 내통하게 만들어 끝내 권력을 잃은 것처럼, 인조 역시 청의 침략에 대비해 뭔가 이것저것 하긴 했는데 본인이 실토한 바와 같이 전투 준비 태세 수준은 형편없었고, 결정적으로 자질이 없는 인물들을 중요 직책에 임명해서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따위로 형편없는 인사는 심지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김경징과 장신은 사약으로 죽게 해주는 자비를 줘놓고, 정작 진짜로 부족한 전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싸웠던 충청수사 강진흔은 갑곶 수비를 맡았던 변이척이라는 장수와 함께 참수형으로 처형해버렸던 것이다. 강진흔이 저 둘과 달리 반정공신과 별다른 인맥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유야 뻔하다. 그 이유가 인조 본인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이건, 이따위 전후처리는 신상필벌에 완전히 실패한 행태로써 난세에 최악의 인재 운용 방식이었다. 도망간 놈들은 덜 고통스럽게 죽게 해주고, 사력을 다해 싸운 애국자는 잔혹하게 처형해버리는데 이런 놈을 누가 군주랍시고 옹위해주고 싶을까?

이러한 인사 실패는 단순히 '인조가 인재 보는 눈이 없음'을 탓할 일이 아니다. 사실 인조도 저 작자들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철저히 인조가 자신에게 왕위를 선사하고 보전해 준 사람들에게 베푼 '보은 인사'였다.[59] 위에서 언급한 정예 병력의 야전 회피 문제도 결국 훈신들의 군대 사유화가 빚어낸 것이었다. 결국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보인 한심함은 인조 반정으로 형성된 공신 세력이 과도한 특권을 누리는 '구조적 문제'의 결과물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 '개인'이 휘하의 대신들에 비해 특별히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다른 혜안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12월 13일에 청군이 안주에 이르렀다는 김자점의 장계를 받고도 적이 깊숙이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 강화도 파천을 유보한 것, 대신들이 청하는 세자 분조를 거절한 것 은 분명한 실책이다.

결국 인조는 그래도 도망은 잘 갔던 런조랑 비교되게 도망도 제대로 못 치고 항복했다며 런도못한조로 미친듯이 까인다. 최근 들어서 한국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숭덕제에 대한 부정적 재평가조차 인조가 까여야 하는 건 맞지만 그래서 우리나라 침략한 게 자랑이라도 되냐? 정도에 가깝지[60] 적극적인 인조 옹호까지는 아니다.

3.5. 비정한 군주 - 강빈 옥사[편집]


당대에 가장 비판받았던 인조의 실책. 그것도 집권 당시 이해관계가 비교적 일치하던 서인 세력이 대놓고 까던 정책이다. 실록을 보면 사관들의 비판이 가득하다.[61]

현대에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상당부분 부정되지만, 그렇더라도 소현세자가 부왕에게 핍박을 많이 받고 일찍 죽은 것이 사실이다.

또 소현세자가 병사하자 원칙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장남이 세손이 되어야 하나 이걸 무시하고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었으며, 소현세자의 정실 민회빈 강씨까지 역모를 꾀했다면서 세자빈을 폐한 연후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때 강빈의 시녀들을 마구 국문해 10명 중 7명이 죽어나갔는데도 1명도 끝끝내 시인하지 않자 추측, 단정과 욕설로 가득 찬 비망기를 내린다. 결과적으로 이때 유일하게 인조의 정책에 동의하던 권신 김자점의, 효종 초의 김자점 역모 사건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원인은 청나라의 압력에 더해, 세손이 어린 상황에서 실권자가 될 다혈질인 강빈의 성품을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세손들은 안 된다 "라는 논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인조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기 힘들다는 것을 예상한 것으로 보이며(4년 뒤 실제로 사망한다.), 강빈 사사 당시 고작 11살에 불과한 장손 이석철이 어머니인 강빈에게 휘둘리지 않을까 경계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단 인조가 주장하는 혈서가 사실이라는 전재하에)[62]인조는 강빈이 죽기 전에 "소숙[63]조씨가 이 애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는 커서 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자녀들과 시비들에게 남겼다고 했는데, 어쩌면 저주가 담긴 유언을 남긴 강빈을 보면서 "죽어 마땅한 년이었다"고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실제 조선 왕조에는 인수대비, 폐비 윤씨, 문정왕후라는 쟁쟁한 사례들이 있었다. 좀 더 설명하면, 인조에겐 새 중전 장렬왕후가 있었으나 장렬왕후가 민회빈 강씨보다 13살이 어려, 후에 대비로 승격할 가능성이 높은 민회빈 강씨가 인수대비나 문정왕후처럼 강경하게 나설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민회빈 강씨가 저런 유서를 남겼다는 건 증거가 전혀 없는, 인조 혼자만의 독단적인 주장이며 정작 이 저주 유서를 신하들이 정식조사하려고 하니 인조가 틀어막기까지 했던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강빈의 수사와 사사 자체가 인조 혼자만의 독단적인 수사로 진행된 일이며 신하들의 개입을 강경하게 막아세우고 혼자서 밀어부친 결과물이다. 만약 강빈이 저와 같은 유서를 남겼다면 이는 인조에게 있어 엄청난 명분으로, 신하들도 사형을 반대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런데 정작 믿는 신하들은 없었다.

더불어 이 혈서 유언를 근거로 강빈의 어린 아들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내버려 한명만 빼고 죽도록 방치해두었다.

주요 명분이 된 소용 조씨의 저주 사건도 소용 조씨의 자작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위의 저주 사건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인조가 먹는 수라의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인조는 이 사건의 배후도 강빈이라 주장했다. 당시 인조는 이미 강씨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감금한뒤 바깥과의 교류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상식적으로 강빈이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독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없었다. 애초에 수라상에서 독이 발견됐다면 당연히 음식을 만든 궁인들부터 심문하는게 순서인데 인조는 심문도 하기 전부터 강빈이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인조의 행동은 사관들에게도 대차게 까였다. 실록에서는 '대개 이 때에 강빈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 소원(趙昭媛)이 더욱 참소를 자행하였다.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라고 쓰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신하들이 당태종의 일을 들고 동정론을 펴자 인조가 '당 태종은 성인이 아니고 강씨는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비답하였고 다시금 신하들이 '강빈이 비록 전하의 자식은 아니지만 빈(嬪)으로 있을 때는 소현(昭顯)의 배필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아닙니까'라 하며 선처를 바라자 인조가 윗전을 모욕했다며 쌍욕을 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다.

답하기를,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答曰: "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하였다.

--

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 2월 9일 병술 1번째기사

이 발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몇 안되는 욕설사례다. 물론 조선의 왕들도 사람인지라 욕을 하기는 했다. 정조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맘에 들지 않는 신하를 가리켜 '호로자식'이라고 한 정도가 기록에 남아 있다. 경종도 영조가 연루된 역모사건과 관련해서 당시 세제였던 영조의 면전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는 언급이 있다. 이런 욕설을 공문서인 실록에 그대로 싣기는 어렵기 때문에 더벅머리 선비 정도의 순한 욕설만 싣거나, 주로 '임금께서 대노하여', '차마 듣지 못할 전교' 등으로 필터링한다. 이렇게 왕이 직접 "개XX"라 욕한 것이 사관에 의해 여과되지 않은 사례는 인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를 감안하면 사실 인조의 저 발언도 '순화'되었거나 듣던 사관들도 빡쳤을 가능성이 크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선비들 상당수가 '당연히 소현세자가 장자고 그의 후손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시각을 가졌고 이 때문에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에 대한 동정 여론이 강했다. 사관이 이런 쪽으로 깐깐하고 원칙주의자인 선비였다면 나라의 국본을 함부로 다루는 이런 일은 설령 왕이라 해도 충분히 부당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조가 자기 며느리 상대로 개새끼라는 패드립을 쳐가며 광분했고, 이런 사실 때문에 그가 독살을 지시하진 않았다고 해도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던져 죽였네 하는 등, 야사의 이야기에서도 좋은 소리 못 듣는 임금 중 한명이다.

당장 이러한 음모론을 제기한 것도 인조 지지세력서인들이고, 이들이 대놓고 사초에 적어 놓았을 정도다.[64] 그리고 인조의 이런 행태는 양반가 전체에 엄청난 반감을 사게되는데 사실 봉림대군의 세자 계승은 성리학적 명분 쪽으로는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한 국토파괴, 혼란스러운 청나라의 관계, 어린 원손(이석견)과 늙은 인조의 나이 등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만했고, 양반들에게도 설득할만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설득이나 회유는 고사하고 오히려 오만 무리수에 누명을 씌워가며 며느리와 손자까지 죽여버린 덕분에 그나마 봉림대군의 세자 계승에 온건적이었던 인사까지 모조리 반감을 가지게 만들어 버렸다.

그 후폭풍은 당연하게도 아들에게 큰 짐이 되었다. 효종은 죽을 때까지 정통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고, 손자 현종 때는 송시열 등의 '체이부중'론으로 이후 예송논쟁이 벌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으며 숙종 초까지 예송이 이어졌다. 자기 욕심으로 자손 3대가 피해를 본 셈이다.

왕비는 2명으로 능양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인열왕후, 그녀가 1635년 늦둥이를 낳다가 사망하고 3년 후 1638년에 간택된 장렬왕후이다. 장렬왕후는 인조가 사망한 뒤에 대비로서 자의대비로 불리었는데 간택 당시 나이가 겨우 14세(1624년생)로 명목상 자식인 효종(1619년생)보다도 5살이나 어렸다. 나이 차이만 따지면 딱 인목대비-광해군 시즌 2이다. 그러나 인조에겐 장성한 적자가 셋이나 있었고, 장렬왕후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인조 사후 그녀는 궁궐에서 국왕들과는 별 충돌없이 지냈다.

그러나 효종이 사망한 뒤 그녀의 입장을 두고 조선 역사상 최대의 정치 격론이 벌어지는데 바로 예송논쟁이다. 물론 예송논쟁 자체에 장렬왕후가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고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이자 내명부를 다스리는 역할을 했으므로 왕비가 필연적으로는 필요하긴 했다. 전쟁 피해를 수습하고 나서 할 일이 줄자 노는 데 집중한 점도 까인다. 궁 내에 연못을 파고 누각들을 화려하게 꾸미고 후원에서 노는 걸 좋아했으며 시녀들이 드는 가마를 타고 다니다 몇 번 넘어져 크게 다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인조는 광해군의 패륜적인 모습을 반면교사 삼겠다면서 오히려 자신은 제대로된 명분없이 광해군보다 더한 패륜을 저지른 내로남불의 군주가 되었다.

4. 총평[편집]


앞선 정권에서 수십년에 걸쳐 정치세력들이 서로 싸우다가 공멸했던 시점에서 운이 좋은 정치세력의 얼굴마담으로 즉위했지만, 청나라의 침공 직전이라는 최악의 시대를 장식한 강운과 악운을 지닌 암군이다.[65]

그러나 인조라는 인물은 성격 자체는 무난하여서, 평범한 고위층 자제가 하루아침에 복수심으로 왕이 되었다가 호란 이전까지 그럭저럭 왕으로서 업적을 쌓아간 사례라고 볼수있다. 즉 인조는 의외로 평범한 애국청년이었지만, 그런 평범한 애국청년 도련님[66]이 위기사태에 왕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케이스이다.

현대에는 선조와 광해군을 내세우며 현대인들이 각자의 정치이론을 주장하고 있는 탓에, 인조는 까일 인물인 것도 맞지만 별별 저주와 욕설까지 받으며 다른 왕을 옹호하기 위한 방패로 남용되는 인물이다. 물론 전쟁을 말아먹은 인조가 까이는 것은 백번 당연하다. 그러나 폭군들이 일으키는 정치싸움의 결말은 인조 같은 뜬금없는 왕의 탄생이라는 교훈을 보여주는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상 이전 정권들의 정치파국에서 탄생한 왕이 인조이기 때문이다.[67] 그런 성격 덕분에 국내외의 혼란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정말 무난한 업적들이 있는 편이다.

인조는 늙어서야 왕으로서 뭔가를 각성했을 정도로 청년 시절에는 준비가 전혀 안 되었고, 그 기간이 용서받기 힘들 정도로 괴악하여 두고두고 비난받지만, 그 뒤로는 정말 무난한 상식인이 왕이 된다면 국가를 위해서 시행하고 후대를 위해서 남겨줬을법한 업적을 이뤘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정치적인 무능력으로 인한 암군, 말년에는 누명으로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들을 사지에 방치한 막장짓[68]으로 비판받아 그나마 있던 업적들도 주목받지 못하게 되었다.

당대 사람들도 인조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인조를 이용해서 조선을 재건하는 수단으로 써먹었다. 당장 아내인 인열왕후부터가 내조 하나로 불안정했던 인조의 초중기 통치도 해내게 만들었고, 인열왕후가 사망하고 난 뒤엔 인조를 다독이든지 해서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 아예 없었기에 인조의 불안정함이 더욱 가속화되어서 강빈 옥사 등의 실책을 말년에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럭저럭 인조는 정말로 맹물 같은 성격 덕에 나름 쓸모있는 왕이었다. 인조의 초기 통치는 피끓는 애국청년으로서 아버지와 청나라에 분노하는 감성으로 거병했던 것 뿐이기 때문에, 당연히 통치에는 초보였다. 하지만, 인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적들에게 물자를 삥뜯기더라도 그만큼의 산업기지와 인구수를 더 많이 늘린다는, 단순무식하지만 당연한 정책을 진행하여, 왕조의 수명이 몇 세대 더 늘어나도록 물리적인 재건에 도움을 주었던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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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분부에 따라 상차하여 민력(民力)을 여유있게 하여 천심(天心)을 기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첫째는 대동법(大同法)을 창설한 뒤에도 각 고을의 출역(出役)은 오히려 전과 같아서 법을 세운 본의에 어긋나니 한결같이 사목(事目)에 따라야 한다. 바치는 면포(綿布)의 승수(升數)와 척수(尺數)는 이미 정해진 법이 있으니 그 넘치는 것을 금단해야 하고, 보병(步兵)의 가포(價布)는 목화가 흉년든 이때에 옛 규례를 준행할 수 없으니 또한 병조로 하여금 승수와 척수를 줄여 정하여 가난한 백성에게 편리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둘째는 경비를 절약하는 방책을 강구하고 조세(租稅)를 거두는 정사를 행하여 위로 제향(祭享)·어공(御供)으로부터 아래로 백관의 늠록(廩祿)에 이르기까지 모두 줄여야 한다. 각 아문(衙門)의 군관(軍官)도 임시 방편으로 혁파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셋째는 모든 포흠(逋欠)005)(註 005)(포흠(逋欠) : 미납 조세.) 에 대해서 제도(諸道)로 하여금 죄다 탕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넷째는 서방을 방수(防戍)하는 군사는 오로지 양서(兩西)에 책임지우고 남방에서 징발하는 것을 우선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이 가납하고 이어 묘당(廟堂)에 내려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묘당이, 그 말대로 시행하되 각 아문의 군관은 가벼이 혁파할 수 없으니 지급하는 수를 적당히 줄이자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인조 2년 1월 12일)[2] 윤방이 아뢰기를, "중외에서 모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들 합니다. 처음에는 호민(豪民)들이 싫어했는데 지금은 잔민(孱民)들도 모두 싫어하고, 처음에는 큰 고을이 괴롭게 여겼는데 지금은 작은 고을도 모두 불편하게 여긴다 합니다. 전일 최명길(崔鳴吉)이 입대(入對)했을 때에 또한 혁파해야 한다는 뜻으로 진달드리자 상께서 혁파할 수 없다고 하셨다는데, 영상이 신에게 글을 보내 속히 들어가 품달(稟達)해서 혁파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방은 수령들이 함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백성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자, 윤방이 아뢰기를, "수령들의 비용이 또한 매우 적어졌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법이 매우 좋아 시행해야 할 듯 한데, 어찌하여 그처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인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그 법이 좋긴 하지만 처음부터 모두들 불편하게 여겼는데, 강원도만은 편리하게 여기고 있으니 강원도는 그대로 시행해도 무방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혁파하면 모두 혁파해야지 어찌 한 도만 혁파하지 않겠는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강원도는 경기와 다를 것이 없으니 그대로 둔들 어찌 방해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심열(沈悅)이 아뢰기를, "대동청(大同廳)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처음에 본직(本職)을 제수받았을 때부터 이미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지금 좌상이 말을 한 것 이외에도 크게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양호(兩湖)는 전결(田結)이 매우 많은데, 공물(貢物)의 경우 1년에 바칠 양을 기한을 정하지 않고 수시로 받기 때문에 들여보낼 것이 많아도 백성이 오히려 지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10두(斗)씩을 모두 받아들인 경우 1호당 바칠 양이 무려 10석에 이르기도 하니, 어떻게 갑자기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배로 운반할 때에 낭패를 볼 우려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 일을 어찌 아이들의 장난처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망설이며 시간 끌 것 없이 속히 혁파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리고 호패법(號牌法)과 양전법(量田法)을 시급히 시행해야 합니다." 하고, 윤방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대동법에 관한 일은 서서히 의논해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험삼아 먼저 갑자년 조(條)의 것을 시행한 다음에 형세를 보아가며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인조 2년 12월 6일)[3] 삼도 대동청(三道大同廳)이 아뢰기를, "대동 사목(大同事目) 가운데 타당하지 못한 것을 참작하여 아뢰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신들이 삼가 성문(聖問)에 따라 다시 헤아려 보건대, 삼명일(三名日)의 진상(進上) 가운데 대비전(大妃殿)의 것은 그대로 두고 줄이지 않아야 할 텐데 잘못하여 아울러 줄이는 대상에 포함시켰으니, 이는 신들이 허술해서 빚어진 소치입니다. 쌀을 잡곡으로 갈음하여 더 받아들이는 수량은 모두 요즘 물가에 따라 짐작하여 마련하였으니, 이것은 백성이 반드시 괴롭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원도가 양호(兩湖)와 두수(斗數)가 같지 않게 된 까닭은 접때 이천(伊川) 사람 고충경(高忠卿) 등이 상소하였을 때에 회계(回啓)하면서 이미 모두 아뢰었습니다. 하지만 성교(聖敎)가 정녕하시어 부역이 고르지 못한 것을 매우 염려하셨으니, 이것은 2두(斗)를 더 받아들이는 수량에서 1두를 줄여야 마땅할 듯합니다. 양호에서 쌀 9두를 거두는 것은 지나치게 많고 춘등(春等)·추등(秋等)에 쌀을 한꺼번에 거두므로 백성이 괴로워할 것이라는 분부는 실로 백성을 사랑하시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신들은 더욱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전결(田結)에서 바치는 것은 경공물(京貢物)이 가장 많고 본도(本道)에서 쓰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또 계해년092)(註 092)(계해년 : 1623 인조 1년.) 조(條)는 기인(其人)의 가포(價布)와 사소한 본색 공물(本色貢物)이 쌀로 환작(換作)하는 가운데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또한 자못 있기는 하나 이번 갑자년 조는 모두 쌀로 환작하였으므로 그 두수를 더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사세가 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경기 선혜청(京畿宣惠廳)은 길이 편하고 가까우므로 한 해에 받아들이는 것을 춘등·추등으로 나누어 추등은 겨울 이전에 와서 바치고 춘등은 초봄에 다 나릅니다. 그러나 호서(湖西)의 태안(泰安) 이남과 쌀로 환작하는 호남의 각 고을의 경우는 수로(水路)가 험하고 멀어서 가을과 겨울에는 배로 나를 수 없으므로 봄이 되기를 기다려서 실어 보냅니다. 그 사이에 방아찧어 장만할 기간이 서너 달이나 오래 되니, 한꺼번에 거둔다고는 하나 등(等)을 나누는 뜻이 그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겨울 이전에는 미곡이 귀하지 않아서 백성이 쌀을 내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고 한 번 장만한 뒤에는 다시 독촉하여 거두는 소요가 없으니, 백성이 처음에는 괴롭게 여기더라도 끝내는 은택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의 정태(情態)는 각각 같지 않으므로 한꺼번에 쌀을 내는 것을 괴롭게 여기는 것도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으니, 성교에 따라 두 등으로 나누어 추등은 9월·10월·11월로 한정하고 춘등은 12월·정월·2월로 한정하여 3월·4월의 바람이 고를 때 남김없이 배로 나르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또 본청(本廳)에서 사목을 마련할 때에는 1결(結)에서 쌀 16두를 거두되 경외(京外)의 모든 역(役)을 아울러 그 가운데에 포함시켰으나, 그 뒤로 흉년에 백성이 굶주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러 번 그 제도를 바꾸었으므로, 이번 갑자년 조 응행 사목(應行事目) 역시 계해년에 이미 행한 규례에 따라서 만들었습니다. 요즈음 잇달아 외방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들으니, 민간에서 요역을 내는 것이 전보다 조금 줄어들었으므로 전에 이 법을 언짢아하던 자도 조금씩 편리하다고 말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법령이 정비되지 않은 것을 괴롭게 여긴다 합니다. 이는 대개 경사(京司)에서 받아들이는 공물 이외에도 삼영(三營)에서 받아들이는 것과 삭진상(朔進上)·관수(官需)·아료(衙料)·쇄마(刷馬) 등의 역이 있는데, 수령이 뜻대로 스스로 받아들여서 그 역에 응하게 하므로 이따금 예전 버릇을 그대로 밟는 자가 있는 것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신들이 다시 상의한 결과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서 양호(兩湖)에서는 15두를 받아들이고 강원도에서는 16두를 받아들이되, 10두는 본청에서 거두어 각사(各司)의 갖가지 공물과 기인(其人)·조례(皁隷)의 예조 진봉지(禮曹進俸紙)·관상감 일과지(觀象監日課紙) 등의 역을 전수 장만하여 제공하고, 그 나머지는 본도에 남겨 주어 진상 방물(進上方物), 본색 공물(本色貢物), 내의원 약재(內醫院藥材), 관수, 쇄마와 본도에서 어쩔 수 없이 제공해야 할 역을 제공하게 하려 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외방의 모든 역 가운데에는 멀리 본청에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있으므로 본청의 낭청(郞廳)을 삼도로 나누어 보내어 본도에 남겨 두는 수량에 대하여 감사, 4장관(長官), 수령과 강명(剛明)한 차사원(差使員) 함께 각 고을에서 순문(詢問)하고 민정(民情)을 채방(採訪)하여 가능한 한 편리하도록 마련하여 회보(回報)하게 한 뒤에, 사목을 정하여 재결을 받아서 반포하여 시행하려 합니다. 그러면 오래 시행되고 폐단이 없는 법이 될 수 있겠는데, 논의가 완결하지 못하였으므로 미처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인조 2년 8월 29일)[4]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려 대동법(大同法)을 속히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차자에, "신이 조정에 있어 온 이래 중외(中外)의 폐단이 대부분 부역(賦役)이 균등하지 못하고 멋대로 방납(防納)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동법을 신이 실제로 처음 착안하여 제신(諸臣)들과 뜻을 결정한 뒤 먼저 경기에서 시험해 보았는데, 몇 년을 시행해 보니 자못 효과가 있기에 강원도에도 병행하려 하다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반정 초에 부름을 받고 올라와 삼가 보건대 성명께서 진실로 백성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시기에, 신은 이 법을 먼저 강원도에 시행하고 이어 다른 도에도 적용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백성의 병폐를 제거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성상의 뜻에 보답하려고 했는데, 처음 의정(議定)할 당시에 수재와 한재가 잇따라 해마다 크게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휴가 중이면서도 깊이 염려되기에 동료에게 통지하여 계달하게 하고 그 뒤에 또 차자를 올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기를 청했는데 상께서 다시 의논하는 것을 윤허하지 않으셨으므로 마침내 그대로 시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날 호남에서 잇따라 상소가 올라오고 중외의 민심이 대단히 불편하게 여기기에 신이 또 동료에게 통지하는 한편 명을 받들어 진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도록 시행하느냐 혁파하느냐의 여부가 불확실한 채 결말을 볼 기약이 없게 되었는데, 고쳐진 규례가 많고 호령도 많이 제한을 받으므로 먼 외방의 민정이 날이 갈수록 더욱 어긋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사정은 양호(兩湖)가 거의 비슷하나 호남이 더욱 심한데, 근심하고 한탄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어디고 할 것이 없이 모두 그러합니다. 국가에서 어떤 일을 실행하려면 먼저 민정을 잘 살펴야 하는데, 민정이 이러하니, 어찌 억지로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본청(本廳)에 명하여 즉시 혁파하도록 하고, 이미 거둔 쌀과 베는 잘 조처하여 모두 민역(民役)의 대가(代價)로 충당하게 하여 중간에서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그러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대동법에 대한 한 가지 일은 당초 부역을 균등하게 하여 민간에 편리하게 하려고 한 것인데, 일단 시행한 뒤로 중외의 민정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조정의 의논이 모두 혁파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영상이 또 이렇게 차자로 진달하였으니, 차자의 내용대로 혁파하여 민정에 순응해야 하겠습니다. 외방에 비록 받아들인 곳도 있고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곳도 있으며 조정에 바쳤고 아직 바치지 않은 곳도 있지만, 이미 상납한 것은 호조로 하여금 거두어 저장하여 공물(貢物)의 대가로 지급하게 하고, 본 고을에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곳과 이미 받아 놓고도 상납하지 못한 곳은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명백하게 조사해서 한결같이 해조의 분부에 따라 시행하게 함으로써 중간에서 소비해 버리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강원도의 경우는 민정이 모두 편하게 여겨 혹시라도 혁파할까 두려워한다고 하니, 이 도만은 경기 선혜청(京畿宣惠廳)에 소속시켜 똑같이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관동(關東)의 민정이 이 법을 편리하게 여긴다면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자세히 헤아려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이 회계하기를, "신이 강원도 공물의 원수(元數)와 전결(田結)의 총액을 계산해 보건대 1결당 쌀 16두(斗)씩 받으면 각종 공물 값을 충당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밖에 내의원(內醫院)의 약재(藥材) 및 본 고을의 경상비, 아록(衙祿) 및 인부(人夫)와 쇄마(刷馬) 등의 역이 있습니다. 이러한데도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을 즐겁게 여긴다면 그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본도 감사로 하여금 민정을 탐문해 보도록 하였다. 감사가 백성이 모두 시행을 원한다고 계문하니, 혁파하지 말도록 명하는 동시에 예전대로 호조가 겸하여 관장하도록 하고 선혜청에 소속시키지 말도록 하였다. (인조 3년 2월 7일)[5] 심지어 그래놓고 아예 구족을 멸족시킨 것도 아니고 일부 핏줄은 살아남아 존속하게 되었고, 정작 인조의 요상한 대처로 봉림대군만이 아니라 그 손자 세대까지도 예송논쟁으로 대표적인 전통성 논란에 휘말려야 했다.[6] 애초에 조선시대의 권신은 고려시대의 권신과 입장이 달랐다. 고려시대가 일반적인 이미지대로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는 아무리 강하다해봤자 왕의 대리인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권력또한 왕의 암묵적 허락으로 휘두를 수 있던 것일 뿐이다. 실제로 고려시대의 이자겸이나 최충헌처럼 실제로 왕의 권위를 능멸하고 왕에게 실질적인 위협을 끼치는 수준까지 다다른 권신은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7] 다만 이들을 말그대로 살려줬을 뿐 적극적으로 신임하진 않았다. 최명길은 조선과 인조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도 믿지 않았으며, 정충신의 경우는 광해군 시절 군사첩보의 핵심 인력이었지만 인조 시대에는 차별대우를 받았다. 정충신은 염탐과 행정, 군사배치 등이 특기인 인물로 외교사절로도 파견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진짜 외교사절보다는 홍타이지를 회유를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후금의 군사 배치 등 여러 정보들을 염탐하기 위해 광해군이 밀명을 내린 것이었다. 현장요원이라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이괄 같은 맹장을 좋아해서 그런 인재를 썩혀둔 것이 문제였고, 후기에는 그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기다가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임경업은 국문을 당하다가 죽었다.[8]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분부에 따라 상차하여 민력(民力)을 여유있게 하여 천심(天心)을 기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첫째는 대동법(大同法)을 창설한 뒤에도 각 고을의 출역(出役)은 오히려 전과 같아서 법을 세운 본의에 어긋나니 한결같이 사목(事目)에 따라야 한다. 바치는 면포(綿布)의 승수(升數)와 척수(尺數)는 이미 정해진 법이 있으니 그 넘치는 것을 금단해야 하고, 보병(步兵)의 가포(價布)는 목화가 흉년든 이때에 옛 규례를 준행할 수 없으니 또한 병조로 하여금 승수와 척수를 줄여 정하여 가난한 백성에게 편리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둘째는 경비를 절약하는 방책을 강구하고 조세(租稅)를 거두는 정사를 행하여 위로 제향(祭享)·어공(御供)으로부터 아래로 백관의 늠록(廩祿)에 이르기까지 모두 줄여야 한다. 각 아문(衙門)의 군관(軍官)도 임시 방편으로 혁파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셋째는 모든 포흠(逋欠)005)(註 005)(포흠(逋欠) : 미납 조세.) 에 대해서 제도(諸道)로 하여금 죄다 탕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넷째는 서방을 방수(防戍)하는 군사는 오로지 양서(兩西)에 책임지우고 남방에서 징발하는 것을 우선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이 가납하고 이어 묘당(廟堂)에 내려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묘당이, 그 말대로 시행하되 각 아문의 군관은 가벼이 혁파할 수 없으니 지급하는 수를 적당히 줄이자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인조 2년 1월 12일)[9] 윤방이 아뢰기를, "중외에서 모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들 합니다. 처음에는 호민(豪民)들이 싫어했는데 지금은 잔민(孱民)들도 모두 싫어하고, 처음에는 큰 고을이 괴롭게 여겼는데 지금은 작은 고을도 모두 불편하게 여긴다 합니다. 전일 최명길(崔鳴吉)이 입대(入對)했을 때에 또한 혁파해야 한다는 뜻으로 진달드리자 상께서 혁파할 수 없다고 하셨다는데, 영상이 신에게 글을 보내 속히 들어가 품달(稟達)해서 혁파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방은 수령들이 함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백성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자, 윤방이 아뢰기를, "수령들의 비용이 또한 매우 적어졌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법이 매우 좋아 시행해야 할 듯 한데, 어찌하여 그처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인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그 법이 좋긴 하지만 처음부터 모두들 불편하게 여겼는데, 강원도만은 편리하게 여기고 있으니 강원도는 그대로 시행해도 무방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혁파하면 모두 혁파해야지 어찌 한 도만 혁파하지 않겠는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강원도는 경기와 다를 것이 없으니 그대로 둔들 어찌 방해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심열(沈悅)이 아뢰기를, "대동청(大同廳)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처음에 본직(本職)을 제수받았을 때부터 이미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지금 좌상이 말을 한 것 이외에도 크게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양호(兩湖)는 전결(田結)이 매우 많은데, 공물(貢物)의 경우 1년에 바칠 양을 기한을 정하지 않고 수시로 받기 때문에 들여보낼 것이 많아도 백성이 오히려 지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10두(斗)씩을 모두 받아들인 경우 1호당 바칠 양이 무려 10석에 이르기도 하니, 어떻게 갑자기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배로 운반할 때에 낭패를 볼 우려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 일을 어찌 아이들의 장난처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망설이며 시간 끌 것 없이 속히 혁파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리고 호패법(號牌法)과 양전법(量田法)을 시급히 시행해야 합니다." 하고, 윤방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대동법에 관한 일은 서서히 의논해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험삼아 먼저 갑자년 조(條)의 것을 시행한 다음에 형세를 보아가며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인조 2년 12월 6일)[10] 경상좌도 양전사(量田使) 신득연(申得淵)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평시 원장부에 올라 있는 전결은 16만 9천 5백 75결인데, 계묘년 양전 때에는 시기전(時起田)·잡탈전(雜頉田)을 합쳐서 6만 8천 5백 60결이었고, 금년에 새로 측량한 것은 진기전(陳起田)·잡탈전을 합쳐서 모두 15만 9천 5백 75결이며, 시기전은 10만 1천 4백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2월 28일)[11] 전라좌도 양전사(量田使) 박황(朴潢)이 치계하였다. "신이 관장하고 있는 좌도 25개 고을의 타량(打量) 총수는 묵는 토지나 경작하는 토지를 모두 합쳐서 도합 12만 3천 2백 60결로서, 평상시의 총수에는 3만 7천 40여 결이 모자라고, 계묘년 양전 때의 총수보다는 5만 3천 2백 20여 결이 더 많은데, 여기에서 면세전 5천 결을 제하고 나면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실수(實數)는 7만 6천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3월 7일)[12] 하삼도(下三道)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였다. 전라좌도는 12만 4천 2백 62결 2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8만 2천 5백 1결 28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전라우도는 21만 1천 43결 28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1만 9천 9백 27결 92부 9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좌도는 15만 9천 1백 80결 65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1천 8백 48결 8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우도는 14만 2천 5백 44결 7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5천 6백 76결 2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좌도(公淸左道)는 11만 7천 7백 34결 13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5만 8천 7백 69결 1부 2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우도는 14만 7백 26결 65부 2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7만 2천 2백 39결 3부 6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다. (인조 13년 7월 24일)[13] 물론 이 모든 업적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흐지부지되어 제몫을 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14] 물론 신하들에 비하면 비교적 낫다는 수준이고 초기에는 조명연합군을 박살낸 후금의 역량을 무시해 오랑캐 집단정도로 치부하거나, 병자호란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 선전포고 격문을 인조의 강짜로 보내는 등 판단력이 현실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15] 조일수 (2017). 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비평, 343-371-[16] 예시를 들어 숙청의 경우 그냥 의심가는대로 닥치고 숙청은 물론 거짓이라도 고변자는 무조건 보호라는 어이없는 행보를 보여서 별것도 아닌데 고변하고 광해군은 거기에 낚여 고변하는대로 사람들을 잡아다 숙청해버렸으며 궁궐공사의 경우 점이나 풍수지리에 의존했다. 예를 들어 인경궁 공사는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시작한 것이고 정원군의 집을 뺏어다 궁궐을 지은 것 역시도 그랬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교하로 천도할 시도도 있었는데 이것도 점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옥사나 토목공사를 계획적으로 한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했다. 문제는 두 행위가 단순히 군주의 취향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게 아니라는것. 광해군도 재위 말엽쯤 되어서야 적어도 옥사가 지나쳤다는건 깨달았는지 옥사를 자제했지만 그 때문에 진짜 반란을 막지 못했다.[17] 이것도 참 어이가 없는게 광해군이 새로 짓는 궁궐에 청기와를 쓰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재정상 궁궐을 한채 짓는것 만으로도 재정난을 걱정해야하는 수준인데, 그 와중에 쓸데없이 멋까지 부리겠다고 한 것. 그나마 전쟁중 무너진 건물을 세운다는 정도라면 왕으로서 명색은 세워야하니 이해라도 하겠는데, 아예 없던 궁까지 새로 지으려 했다.[18] 경상좌도 양전사(量田使) 신득연(申得淵)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평시 원장부에 올라 있는 전결은 16만 9천 5백 75결인데, 계묘년 양전 때에는 시기전(時起田)·잡탈전(雜頉田)을 합쳐서 6만 8천 5백 60결이었고, 금년에 새로 측량한 것은 진기전(陳起田)·잡탈전을 합쳐서 모두 15만 9천 5백 75결이며, 시기전은 10만 1천 4백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2월 28일)[19] 전라좌도 양전사(量田使) 박황(朴潢)이 치계하였다. "신이 관장하고 있는 좌도 25개 고을의 타량(打量) 총수는 묵는 토지나 경작하는 토지를 모두 합쳐서 도합 12만 3천 2백 60결로서, 평상시의 총수에는 3만 7천 40여 결이 모자라고, 계묘년 양전 때의 총수보다는 5만 3천 2백 20여 결이 더 많은데, 여기에서 면세전 5천 결을 제하고 나면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실수(實數)는 7만 6천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3월 7일)[20] 하삼도(下三道)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였다. 전라좌도는 12만 4천 2백 62결 2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8만 2천 5백 1결 28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전라우도는 21만 1천 43결 28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1만 9천 9백 27결 92부 9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좌도는 15만 9천 1백 80결 65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1천 8백 48결 8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우도는 14만 2천 5백 44결 7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5천 6백 76결 2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좌도(公淸左道)는 11만 7천 7백 34결 13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5만 8천 7백 69결 1부 2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우도는 14만 7백 26결 65부 2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7만 2천 2백 39결 3부 6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다. (인조 13년 7월 24일)[21] 다만 이것도 어찌 보면 운이 좋은 것이다. 출성항복을 한 이상 승전국 의도에 따라 나라가 망하느냐 살아남느냐가 갈리는데 천만다행으로 당시 청나라의 사정은 조선을 멸망시키기에 여의치 않았다. 그러니까 청나라의 사정이 나빴던 덕에 멸망을 피한거지 인조가 뭘 잘해서 멸망을 피한게 아니다. 애초에 출성항복을 한 것에서부터 이미 인조는 실패했다.[22] 이것도 당연하지만 원래 있던 소현세자(세자) - 이석철(원손)이라는 기존의 후계 구도를 반 억지로 끌어내버리고 세운 것이다. 당연히 이후 현종 시기까지 이어지는 정통성 논란에 휩싸이는 부작용을 낳았다. 업적이라고 하기에는 당연히 뭣하다.[23]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24] 조영헌, 「'17세기 위기론'과 중국의 사회 변화 - 명조 멸망에 대한 지구사적 검토」, 『역사비평』107, 2014년, pp.183 ~ 192.[25] 김성우.「光海君 치세 3기(1618년 ~ 1623년) 국가 재정 수요의 급증과 농민 경제의 붕괴」(『大邱史學』118, 2015년[26] 쉽게 말해 나라가 너무 힘들고 지친 상태이니 특별한 일 벌이지 말자는 것으로 전한이 등장하기 전인 진나라가 통일전쟁을 끝내고도 토목공사를 여럿 벌이는 등 삽질을 벌인 끝에 멸망하고 그 뒤에 이어진 초한전쟁으로 전중국이 아작이 나면서 전한 초에는 나라꼴이 말이 아니니까 진나라에서의 교훈과 현실을 감안해 내놓은 대책이다. 무슨 일을 벌여봐야 백성들을 더 힘들게 할 뿐이니 차라리 아무 일도 안 벌이며 조용히 지내는게 최선이었던 것.[27] 엄밀히 말하자면 청나라가 천하를 제패한 상태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난 게 아니라, 반대로 천하를 제패할 수 있을지 없을지 미래가 불투명했던 청나라가 병자호란에서의 승리를 통해 가능성을 만들고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알아서 자멸한 덕에 천하를 제패한 것에 가깝다.[28] 청나라가 멸망시킨 건 통일제국 명나라가 아니라 그 명나라의 망명왕조인 남명이었다.[29] 남명이 빠르게 정권을 안정시키고 온전히 살아남아 중원을 양분 했다면 조선과 남명의 연합으로 청나라가 역관광을 타거나 적절한 힘의 균형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흘러갔을 수도 있다.[30] 여기에 대해서는 '고려는 군사력이 충분했지만, 조선은 아니었잖아?'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삼전도급 굴욕은 아니었어도 제2차 여요전쟁에서 상당한 위기를 겪었다. 정묘호란의 경우는, 서희의 외교 담판 급은 아니더라도, 조선 입장에서는 출혈을 최소화하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도 성공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자면, 고려는 이후 대비를 철저히 하여 제3차 여요전쟁에서 거란을 박살냈고, 조선은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러니 병자호란에서 개털리지[31] 광해군은 살려두어 유배보냈는데 이는 광해군을 살해해 다른 세력들이 임금 살해를 명분을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인목왕후가 광해군이 자신의 가문과 아들인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이유 아래 광해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인조와 서인들이 말렸다.[32] 1631년에 발각 된 역모사건으로 정인홍의 조카들도 참여하였다.[33] 광해군일기(중초본) 92권, 광해 7년 7월 17일 임술 1번째기사[34]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26일 병진 1번째기사[35] 인조실록 40권, 인조 18년 6월 21일 신미 1번째기사[36]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5월 12일 정묘 2번째기사[37] 반면에 인터넷 역덕 커뮤니티의 광해군까들이 인조 반정의 결정적인 원인인 양 부각시키는 궁궐 공사를 비판한 내용은 20자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산 상태에 이르러 10년이 훨씬 지난 후인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전쟁 수행 능력에까지 심각한 지장을 주었다. 그러니까 양 호란의 졸전도 인조 잘못이 아니라 광해군 탓이다'(이런 얘기는 인조 정권의 인사들도 한 적이 없다)라는 몇몇 네티즌들의 주장과 달리, '국가 경제에 대한 악영향'을 지적한 내용은 전무하고, 민가를 다수 철거했다는 것과 공사를 제때 마치지 못했다는 것을 문제삼았을 뿐이다. 문서 나머지에서도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를 강조했을지언정, 정부 재정의 위기를 암시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오항녕이 광해군대 궁궐 영건 비용을 국가 재정의 20% 이상으로 본 것은 당대의 명확한 통계 수치를 인용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추론에 불과하며, 설사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이를 '국가 재정 파탄'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반정 세력은 '재정 파탄'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적어도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 여기지는 않았단 얘기다.[38] 광해군의 이중외교는 그 자체에 의의가 있지만, 조선이 명의 조공국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내부적으로는 명나라를 돕고 있었다. 광해군 당시에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조선 정벌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약조를 받은 뒤부터는 대대적으로 위협이 되는 후금을 견제해왔다. 그리고 사르후 전투 당시에도 징병칙서로 인해 지원군을 보냈으며, 청에게 전면전을 하지 않기 위해 강홍립을 보낸 것 뿐 실제로는 당시 난장판이었던 명군보다도 치열하게 청군과 맞서 싸운 것이 조선군이었다. 때문에 강홍립 등을 보냈음에도 청은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다. 조선이 겉으로는 청나라와 친하는 척만 했지 후방에서 계속 칼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북방에 군사들을 배치시키고 각종 군사 기지를 설치하는 등, 대외적으로 우호를 천명하면서도 후금을 견제하고 압박하는 등의 노력을 한 덕분에, 명나라는 차차 후금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39] 또한, 청나라에게도 조선과 굳이 전쟁할 명분조차도 없었다. 광해군을 서자 취급을 해도 엄연히 선조에게 인정받은 왕이며, 명나라에게도 인정을 받았었다. 거기다 이중외교에 명국에 군사들을 보냈어도 적국에 가까운 자국의 사신들에게 무례하게 대하지도 않고, 군사 동원도 2번의 왜란에 도움을 받은 것이 주요 명분이 되어 명나라의 요구로 간 것이기에 청태조 누르하치에게 이런 사정을 이야기해 어쩔수 없이 파견한 것 뿐이다 라는 의사를 전해 이를 무마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인조가 이런 전후사정을 고려치 않고 그냥 복수에 눈 멀어 정변으로 구실을 만들어 놓았으니 어떻게 보면 조선이 스스로 일을 만든 셈이다. 이괄의 난에서 살아남아 압록강을 넘은 몇몇 잔당들 역시 조선 침공을 종용했고, 조선의 청에 대한 외교 스탠스가 변하자 이전부터 조선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홍타이지가 칸이 되자마자 이 명분을 잡고 조선에 압박을 가하게 된다.[40] 도요토미 히데요시[41] 실상 전쟁을 일으킨 너희 청나라가 악이고 조선과 명이 선이며, 도요토미가 그러했듯 너희도 우리한테 찝적대면 하늘의 뜻대로 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42] 이 부분 때문인지 청은 조선을 침공한 후 조선 백성들에게 보낸 포고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쳐들어온 것은 다 너네 임금 때문이다.' 라는 내용을 적는다. 즉, 이 당시 인조가 보낸 도발성 격문을 읽고 그대로 받아쳐준 셈.[43] 도체찰사라 하면, 종이품의 고위 관직으로서 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군 전체를 군령으로 통솔할 수 있는, 현재로 따지자면 합참의장 정도 되는 파워를 가진 군의 최고 사령관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도체찰사라는 직책이 결코 가볍지 않다.[44] 구범진(2020),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東洋史學硏究》 150.[45] 이괄의 난의 원인이다. 이괄을 2등으로 밀고 1등에 앉힐 사람이라면 임경업쯤 되는 재원이어야 했지만 문제는 이괄보다 못한 놈들에게 이괄보다 높은 계급장을 쥐어준 것이며 이괄은 그게 빡쳐서 난을 일으킨 것이다.[46] 저 논리들도 반박이 가능한 게, 이미 광해군 시기에 적들이 성을 놔두고 바로 수도로 직행하면 어쩌냐며 비변사에 대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한 적이 있던 것, 도원수 김자점의 헛소리를 인조 본인이 박살낸 적 있으니 무능한 자인 걸 인지하지 못할 리 없다는 것, 남한산성 군량미 부족을 야기한 한명욱이 다름 아닌 인조 때 광주목사에 임명된 인물이라는 것 등으로 반박이 가능하다. 특히 김자점 직전에 있던 이들은 유능한 이들이었으므로 더 비판 받을 만하다.[47] 덧붙여 위에 옹호한 저 세 가지도 인조의 책임으로 반박이 가능한데, 첫 번째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 보이는 데도 각 성에 군량미를 쌓아두지 않았다는 것. 두 번째는 강화도에 왕자들이 피난을 가면 그만큼 인망이 깊은 사람들로 심의 있게 뽑아야 하지만 그냥 이름으로 뽑았다는 것. 세 번째는 전쟁을 초래 했으면서도, 인조 본인이 지휘 체계 문제나 보급 미비 같은 병과 관련된 것을 많이 축소한 탓에 문제가 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런 문제가 많았는데도 인조는 청나라에게 무례한 교서를 보내 전쟁하자는 정신나간 배짱을 보였던 것이다.[48] 이 대화 앞에는 안주의 방어에 대한 논의가 오갔고 이 대화 다음에는 최명길이 "기어이 척화를 하려거든 의주를 어떻게든 사수해야지, 북방 방어 거점이 안주 하나여서는 안 된다. 기왕이면 정부가 의주까지 나가서 그 곳을 거점으로 삼아 전투 태세를 취하자."는 요지의 진언을 올렸다. 최명길의 말에 인조는 깜놀해서 "너님이 의주를 반드시 지키자는 건 너무 막나가는 말 같다"고 했다.[49] 그래서 오늘날의 한국에 비교하자면 파주철원과 같은 북부 전선의 거점이었다.[50] 그렇다고 경상도를 내던진 건 아니었다. 경상도에 배치된 송상현, 정발, 김시민 등은 충분히 유능한 인재들이었고, 평소 일본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하던 사람들이었다.[51] 해당 회의 기록은 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백마성의 병력과 물자를 옮기면 의주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김류의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 식 대책에, 인조가 "지금 대책을 마련해 놓은 것도 아니면서 말로는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거 아니냐
[今不能預加措備, 而徒曰可守, 豈不異乎]
"며 황당해 하는 반응으로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1. 의주를 지키기 위한 제대로 된 대책도 없으면서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건 "이상하다"와 2. 의주를 지킬 수 있는 제대로 된 대책이 없으니 지키는 거 일단 "포기하자" 둘 중에 어떤 것이 저 회의의 결론에 가까운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52]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1월 15일 을묘 1번째 기사, 2번째 기사 참조.[53] 이는 인조정권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광해군은 정통성 있게 왕위를 물려받은지라 나름대로 중립정책을 할 수 있었다지만 인조는 광해군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했고 그 '찬탈'한 명분은 폐모살제와 재조지은이었다. 문제는 폐모살제는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대충 실천에 옮겼는데 재조지은은 명나라에 도움이 되어야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인조나 인조정권의 수뇌부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괜히 후금-청을 건드렸다가는 우리나라만 망할 거 같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청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또 재조지은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일이다. 결국 인조정권 성립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명확했다. 인조정권이 그렇게나 청을 건드리진 않으려고 했음에도 인조정권 자체가 청나라에 호의적이진 않은 건 청이나 명이나 다 알았다.[54] 다만, 그럼에도 이것은 후대에도 평가가 좋게 받기가 어려운데 다름 아닌 인조가 나라를 위해 정권을 잡았다기보다는 권력을 위해 정권을 잡았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태생적인 한계여도 누가 보든 간에 청나라를 간섭하지 않고 이것은 명과 청의 싸움으로 두는 것이 가장 현명했다. 거기다 광해군의 정책처럼 자신들은 그냥 배후교섭을 통해 청에게 잘해주는 척, 명을 도와 청을 위협하는 정도로 정책을 나아갔어야 하는데 인조는 그저 정치적 명분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그냥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가 나라에 전운을 감돌게 한 것이다.[55] 전쟁에서든 군대에서든 야전은 필히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성웅 이순신도 야전이나 정찰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를 소홀히하면 곤장을 때렸다는 기록도 있었다. 거기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야전군 중 한 명이 보초를 서다가 졸자 자신이 대신 서서 그 병사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듯이 야전과 정찰 및 보초는 전장에서 제일 중요하다.[56] 이건 좀 논란이 있다. 김자점이 이후 간신으로 타락한 건 맞는데, 적어도 도원수 시절엔 상식적으로 업무를 봤던 그럭저럭 괜찮았던 지휘관이다. 실제로 병자호란 시기엔 도르곤의 군대를 격퇴해내기도 했을 정도. 자세한 건 김자점 문서 참고.[57] 하지만 국방 강화를 이때 얕볼 수 없는 것이 정충신이 광해군 대의 절반만 해도 후금의 방비를 막을 정도라고 최소한의 조건의 2배 이상의 방어를 해둔 상태였다. 즉 수비전에 필요한 전력은 충분하다못해 넘치도록 해둔 상황이었다.[58] 하지만, 이 공사는 어떻게 보면 왕권강화를 위한 시각도 있는데 흥선대원군경복궁 재건을 보면 왕권 강화라는 목적을 두고 있었다. 즉, 신하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것이 어떻게 보면 서서히 강해지는 왕권에 대해 경계하기 위해서 인조를 추대한 것이고 인조는 자신을 왕으로 올려준 사람들에게 계속 작위를 퍼주다 보니 이 꼴이 난 것일 수도 있다.[59] 패전의 결정적인 요인을 만든 작자들 중 보은인사라고 보기 힘든 건 광주목사 한명욱 정도인데, 이 인간이 내린 멍청한 결정을 보면 그마저도 능력을 보고 뽑았다고 보긴 힘들다.[60] 사실 인조의 실책을 가지고 청나라 숭덕제 정권의 조선 침략을 옹호하는 논리대로라면, 인조의 후손인 고종의 실책을 가지고 일본 제국의 조선 침략을 옹호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이 숭덕제를 조선에 자비를 베푼 인물로 미화한 것도 결국 자신들의 조선에 대한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61] 인조가 죽은 이후 실록을 쓴 이들이 공신들에 비판적이었던 서인 청서파 산림들임은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차자(효종)에 대한 정통성을 빌미로 왕권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는 것. 그러나 동시대에 실시간으로 쓰여진 승정원 일기에도 인조의 땡깡과 그걸 말리려한 신하들의 분투는 명백하게 기록된 내용이다. 즉 이미 동시대에도 인조의 행태는 옹호받지 못하고 있는게 확인되는 부분이다.[62] 후술하겠지만 이 혈서를 처음 주장한 인조 본인이 주장한 자리에서 신하들이 정식조사를 요청하자 조사를 못하게 막아서 신빙성이 의심되는 내용이다[63] 인평대군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많았으나, 후대엔 대놓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을 저격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후술하듯 애당초 인조가 독단적으로 주장한 것이라면 봉림대군을 저격했다고 퍼트리는게 아귀가 맞는다.[64] 실록에서 나온 욕설에 따르면 인조는 스스로를 라고 셀프디스를 한 꼴이다. 사관들이 왕을 개라고 조롱한거.[65] 인조를 옹립한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일으켰을 당시 오래전에 괜찮은 인물들이 숙청당하여 무시받은 세력이었고, 당시의 조정에서는 남인과 소북, 대북이 싸워댔다. 일찍 쫓겨났기에 수많은 인간들이 숙청당했던 개싸움 정치판과 멀어져 재야에 있다가 최후의 승자가 된 세력이 서인들이다.[66] 인조는 정말 평범한 애국청년 고위층 자제라고 밖에는 볼수없는 타입이다. 인조가 즉위했을때 외교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초기에 명나라 만세를 주장했던 것도 전형적인 고위층 청년의 모습이다. 인조의 남동생이 너무나 소문난 천재라서 모함을 받아서 억울하게 처형당할 정도의 재능꾼이었던 것과는 달리, 인조는 정말로 평범한 청년이었다. 다만 그토록 개판이었던 초기 통치를 보면 상당히 열혈스럽고 청년스러운 대사를 많이 남겼다. 무능하지만 의도와 의지는 순수했던 청년이라는 것.[67] 광해군과 북인정권이 일으킨 내치의 파국이 아니었다면, 인조는 애시당초 왕이 될 생각조차 없이 평범한 왕족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100%를 초과한다. 당장에 인조반정도 협력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는데, 인조반정에서 이전의 정권을 끌어내린 협력자의 대다수가 국가를 이끌던 중책과 영웅들이었다.[68] 현대의 인조반정에 대한 저평가의 원인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명분 중 하나였던 폐모살제는 반정 당시에는 충분히 공감받을 만한 명분이었으나, 나중에 인조가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저지른 패륜을 잘 알고있는 후대인들 입장에서는 "넌 뭐가 그리 잘났길래 폐모살제를 들먹였나?"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