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조선)/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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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의 평가
2. 고려 말의 토지 문제와 과전법 실시
3. 무신경, 혹은 무책임
4. 대한민국의 평가
5. 북한의 평가




1. 당대의 평가[편집]


조선 왕조의 개국자였기에 조선 시대에 쓰인 기록에서는 행적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신격화도 많은 편이지만, 전반적인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천하 제일의 전쟁영웅이요, 당대 최강의 군인인 동시에 전설적인 용장이자 맹장, 명장이었다. 또한 적군인이나 오랑캐라고 해서 무조건 베어죽이지 않고 가능한한 항복시켜 휘하 군인으로 포섭하는 관대한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가히 전쟁에는 영웅이라 할 만했던 것이다.

그리고 군왕으로서는 행정적이나 정치적으로 정도전, 조준 등을 재상으로 세우고 신 국가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충실하게 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군인 출신답게 시원시원한 면이 강해서 전쟁이나 군사력 강화 같은 각종 국가 중대사들을 회의하는 국가 공식 조회 때에도 "번잡한 예절은 생략하고, 할 말 있는 대신은 빨리 나와서 의견을 말해 봐!"라는 식으로 말한 적도 많았으며, 시원하고 격의 없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나라를 세운 한고제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1] 국왕이 되던 날 아침으로 먹은 것이 물에 만 밥 한그릇이 전부였었다고 한다.[2] 때문에 실록에는 "평소에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번 여러 장군이나 휘하 군인들, 부하들과 어울리면 하나의 화기(和氣) 덩어리가 되어 많은 이들이 태조에게 충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방에도 힘써 고려 말을 지옥으로 만든 왜구들의 침략대마도 정벌 등을 통해 사실상 대규모 침략은 조선 건국 이후로는 완전히 종식시킴으로서 새 왕조의 안보를 튼튼하게 만든 것으로도 평가된다. 일단 병력 규모부터 본다면 태조 시기에 조선은 조선군의 총 규모가 20만명이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병력 규모로 봤을 때 확실히 태조는 조선의 국방력 강화에 많은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3]


2. 고려 말의 토지 문제와 과전법 실시[편집]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 기사 【홍무(洪武) 22년.】 , 이때에 토지 제도가 크게 허물어져서 겸병(兼倂)하는 집안에서는 남의 전지(田地)를 빼앗아 산(山)과 들[野]을 둘러싸고 있으니, 고통이 날로 심하여 백성들이 서로 원망하였다. 태조가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과 더불어 의논하여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겸병을 막고 백성의 생업을 후하게 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하고 민심이 더욱 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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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실록 1권, 총서 96번째기사 사전을 혁파하다


대표적으로 고려 말의 재정 파탄을 초래했고, 전시과의 붕괴를 가져온 고려 말의 토지겸병(土地兼倂)과 사전(私田) 문제 해결이 바로 이성계의 대표적인 개혁이자 업적들 중 하나인데 고려 말의 지배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발생한 이 토지 겸병의 문제는 이후 권문세족들의 끝없는 토지겸병 확대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세족들이 가진 농장의 비정상적인 확대와 함께 토지를 잃은 양민들이 권문세족들에게 노비로서 위탁하는 일명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 현상이 폭발적으로 발생하여 노비비율이 폭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고위 관료층들조차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막장 상황이 초래되어 일반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이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까지 발생하였고 심지어 군대조차 제대로 유지할 재정도 없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 초래될 정도로 국가 시스템 전체에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때 권문세족들이 소유한 토지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는데 어느정도였냐 하면 고려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을 경계로 할 정도로 매우 광대했다. 당연히 세족들의 이런 토지확대는 필연적으로 고려 백성들이 먹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토지들 마저도 권문세족들이 몽땅 강탈해가는 바람에 백성들 입장에서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는 도탄의 지경으로 계속 내몰리게 되었다. #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이 고려 말 문제가 매우 많았던 토지겸병(土地兼倂) 문제와 함께 국가가 아닌 개인이 조세를 거두는 사전(私田)까지도 모두 과감하게 혁파하고 경작자를 전객(佃客)으로 삼아 토지에 대한 권리를 합리적으로 보장한 것은 분명 혁명적인 변화였으며 이성계의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 등이 사전 개혁에 찬성하자 이성계가 토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여, 중앙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고 도의 양전(量田)을 시작하였으며, 또한 반대하는 자는 탄핵·추방하고, 1390년(공양왕 2년) 음력 9월 공사 전적(公私田籍)을 소각하여 철저한 개혁을 실시했다. 이듬해 음력 5월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科田法)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로써 강력한 왕권의 부재를 틈타 중앙 조정의 국사를 관장하는 도평의사사(도당)를 좌지우지하며 나라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대농장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세족들에게 속해있던 투탁노비들 상당수 또한 다시 양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추가로 고려 말 토지제도 문란의 3대 요소로 평가받던 토지겸병과 병작 반수제, 지주전호제는 이후 경국대전에서 이 3가지를 모두 법적으로 금지했는데 이유는 당연히 그만큼 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었다.


3. 무신경, 혹은 무책임[편집]


다만 정치가로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신한 것인지 상식적으로도 뻔한 정치적 변수에 무신경한 기질이 있었다. 이게 기록에는 덕있는 사람의 면모로 포장되어있지만, 사실은 정치적 무능의 일종이다. 이성계란 사람 자체가 머리 복잡한 정치에는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성품을 볼 수 있는 일례로 전세가 아군측으로 기울어 승기를 잡았는데도 여진족 군인이 왜구를 마구 죽이자 불쌍하니 이제 그만 죽이고 생포하라고 할 정도로 이를 인간적인 면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모진 면이 없기도 했다.[4][5] 이런 면이 있어서 낙마사고 이후 결국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정몽주를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차마 손을 대지 않고 질질 끌기도 했다.[6]

단순히 무신경할 뿐만 아니라 실로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모습도 종종 보이는데, 아들이 7명이나 있었는데도 젊은 왕비를 생각해서 그런지 고집스럽게 막내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무리수를 남발하다가 1차 왕자의 난을 당하고 말았다.[7] 대중들에게는 흔히 신의왕후파와 신덕왕후파 간의 대립으로 알려져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는 역시 신덕왕후의 소생인 세자의 동복형 이방번부터 죽게 내버려두겠다는 선포나 다를 바 없었다. 효령대군처럼 정말 욕심이 없어서 양보한 것도 아니고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국왕의 친형은 존재 자체가 위협이다.[8] 하물며 동북면 가별초의 계승자인 이방과나 정치적 활약이 두드러졌던 이방원, 야심 하나는 엄청난 이방간은 위협 그 자체인 만큼 신덕왕후가 장수했다면 한 편이 다른 편을 반드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내가 왕이 되면 그 형들이 모조리 다 끝이 좋지 않게 될 것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신만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과신한 탓인지 막무가내로 막내를 세자로 밀었다.[9] 결국 이 셋 중 이방원은 형제들의 생존을 위해 난을 일으켰고, 이방우의 아들 이복근까지 그런 숙부 이방원을 열렬히 지지했으며[10], 이방번조차 자신의 자리를 뺏어간 친동생의 위기를 수수방관하다가 함께 목숨을 잃는다.

4. 대한민국의 평가[편집]


14세기 말, 사방팔방에서 위기에 처한 고려 말기에 전국 각지의 반란군과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 원나라 황제가 보낸 군대, 나하추 같은 멸망한 원나라의 군벌, 남쪽에서 패악질을 부렸던 대규모의 왜구, 북쪽의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당대 동아시아 최대의 혼란기 속에 고려를 지탱한 신흥 무인 세력의 대표주자였으며 마지막에는 자국인 고려마저 멸망시켜 버림으로써[11] 당대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들과 싸워서 이긴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12] 물론 위화도 회군역성혁명으로 대변되는 그의 행보는 끝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남은 최영, 정몽주와 대비되어 까이기도 하고 말년의 우유부단함과 때로는 냉혹해 보이는 몇 가지 사례들, 왕씨 몰살[13] 등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한다. 이성계의 집안은 고려 -> 원 -> 고려로 이어지는 배신을 저지른 주제에 백성과 신하들에게 충성을 강요했다고 조롱 받는 것은 덤. 나아가 조선은 끝내 외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추태를 부리며 망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반감이 이성계에게 전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태조 본인이 보여준 군사적 역량과 행동력, 측근 관리와 비범한 일화 등 개인 차원의 영웅적 면모 뿐만 아니라 시대적 관점에서 볼 때 홍건적, 왜구, 원나라 세력 등 빈발하는 외침 속에서 최영과 더불어 반평생에 걸쳐 수많은 전투를 통해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켜낸 위인이라는 점에서 국가민족에 대한 그의 헌신과 업적은 폄하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치력을 빼면 나라를 개창할 만한 역량은 넘치게 갖췄다는 평. 역성혁명에 대해서도 그 과정에서 발생한 유혈과 희생, 고려에 대한 충정의 관점에서 비판적 시각이 일정 부분 정당성이 있는 부분이지만 어쨌거나 당시 고려가 체제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바이기에 고려를 붕괴시키고 정도전 등 개혁파의 의견을 대폭 수용하여 새로운 체제의 나라를 건국한 것은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바가 분명히 적지 않다고 평가된다. 무엇보다 그 아들인 태종과 손자인 세종이 한국사를 통틀어서 손꼽히는 먼치킨들이다보니 이성계의 과오들은 극복하지 못한 한계 정도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다만 최근 학계에선 당시 권력교체라고 여겨지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고 조선이 고려와 이어진다는 조선중세설이 이미 다수설이 된 점, 새로운 개혁인 과전법이 왕조 교체 전에 이미 시작된 점 등을 종합했을 때 태종과 세종의 치세라는 결과를 모르는 당시 상황에서는 많은 피를 불러일으키며 왕조교체를 한 점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편이다.


5. 북한의 평가[편집]


고구려고려를 긍정적으로, 신라조선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이 확고한 북한[14]에서는 이성계를 역사의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의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에서는 이성계를 고려를 배반한 역적이라고 규정하고 리조 봉건 시대의 괴수라면서 엄청나게 폄하한다. 북한 역사서적의 '리성계' 서술

김일성 생전에는 그가 금야군에 지나가고 있을 때 열차 커튼을 닫아서 보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한다. 나라 이름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북한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조선은 단군 조선을 의미하는데 1948년 북한의 국호 선정 과정에서 고조선을 염두에 두었을 리는 없고 대내외적으로 한민족 공동체를 부르는 호칭이 조선이라 국호를 조선이라 한 것이다. 문제는 한민족 공동체가 조선이라 불린 이유는 2천 년도 더 전에 망한 고조선이 아닌 최근 왕조인 조선이라는 점. 북한의 이러한 역사 해석은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매도하여 당시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뤄졌다고 보는 시각이 있기에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15][16]

이성계가 정도전, 조준 등의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정치 방식을 시도한 혁명가적 면모도 보였고 민본주의에 기반한 정책도 펼쳤지만 동시에 한국사에서는 드문 대규모 학살자이기도 했다. 새 왕조가 건국되고 전 시대의 기득권 세력인 왕족이나 귀족 세력이 숙청당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한국 전근대사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전대 왕족과 기득권 귀족들을 몰살했다고 기록된 사람은 이성계가 유일할 것이다.[17] 정작 김일성도 이성계를 아득하게 넘는 학살자였던게 함정이다.

하지만 동시에 근세사 파트가 붕 떠버린 북한 입장에서는 마냥 백안시만 할 수는 없어서 애매한 상황에 놓여있다. 남북이 각자의 영역 내에서 한반도의 역사적 정통성을 제시하자면 남한은 진-삼한-신라(+가야)/백제(+마한)-통일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상고-고대-중세-근세-근현대의 흐름을 완성할 수 있지만 북한은 용을 써도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으로 남북국시대와 근세 조선시대가 공백이 된다.[18][19]

삼국시대 고구려의 경우를 보아도 고려가 대놓고 고구려 후계국을 자처한데다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삼국시대의 역사서들도 죄다 남한에 남아있고(북한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원본을 1권도 가지지 않았다.) 중국 현지 조사와 연구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결과를 축적해 온 상태이기 때문에 남한은 북한 사학계의 믿는 카드라 할만한 고구려에 대해서도 나름 할 말은 있다. 그 고구려조차도 영토 면에서는 북한 지역이 고구려 역사 704년을 다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만주 지역이 463년을 가지고[20] 북한 지역은 평양에 도읍한 나머지 241년만을 가질 뿐이다. 이는 지리적으로 신라 991년사와 백제 677년사가 모두 온전히 귀속되는 남한과 확연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고구려 유민들이 익산시 지역으로 이주해 고안승을 중심으로 보덕국을 건국해 왕계의 맥을 잠깐이나마 이었고 고구려의 왕성인 횡성 고씨 역시 본관도 집성촌도 남한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남한 지역 역시 고구려와의 지리적, 인적 연관성이 신라, 백제보단 다소 느슨할지언정 분명히 존재한다.

고구려는 군사 뿐만 아니라 기술, 문화 등 골고루 많은 분야에서 발전한 700년 선진강국이었지만[22] 북한은 그나마 있는 군사를 빼면 아무것도 없으며, 다수의 기업들을 배출한 남한의 기술은 물론이고 문화(소프트파워) 조차 한류를 일으킨 남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게다가 동북공정 문제 마저도 조상들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국제적으로 고군분투하는 남한과 달리 북한은 언제나 소극적으로 아닥 상태이면서, 옛 고구려 영토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고구려 정통성을 들먹이는 북한의 모습을 저승에서 광개토대왕이 지켜보고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참으로 궁금할 지경이다.

이후 조선 왕조로 오면 빼도박도 못할 남한 영역인 서울을 수도로 삼은 정권이라 북한 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평양이든 삼수갑산이든 서울에 종속된 지방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23] 지방을 놓고 보더라도 남한의 경기와 하삼도는 전통적으로 명문 세가의 근거지로서 조선 조정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진 반면 북삼도는 명문가의 부재와 지역 차별로 인해 조선조 500년 중 조선초와 구한말을 제외한 400여년간 당상관, 고위관료를 저대로 배출하지 못했다. 북한이 괜히 6.25 전쟁 중에 그렇게 욕하는 <조선왕조실록>을 통째로 실어간게 아니다.

욕을 하고 해봤자 한반도의 500여 년을 조선 왕조가 통치했음은 부인할 수 없고 창업 군주로써 북쪽 출신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북한 입장에서는 근세사에 자기 지분을 들이밀려면 이성계 말고는 딱히 내세울 건덕지가 없다. 고려 이전 유적은 작살났고 조선시대 유적은 별 볼 일 없고 궁궐 유산이 전무하다시피 한 북한 입장에서는 이성계 덕에 남겨진 함흥본궁만 해도 엄청난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지금 함흥본궁만 해도 6.25 전쟁 때 파손된 것을 없는 돈 들여 거의 완전히 복구해 놓고 함흥력사박물관으로 쓰면서 귀중한 문화재라고 띄워주고 있으니, 이중적인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1] 물론 동네 깡패 출신이라 근본적으로 예의가 없었던 유방과 한 나라의 무장이고 격식도 차릴 줄은 알지만 그냥 그게 싫었을 뿐인 이성계 사이에는 차이가 좀 있긴 하다. 어찌됐든 둘 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고, 그게 지존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유지됐다고 보면 될 것 같다.[2] 알아두면 좋은 사실은 그때 수반은 군인들이나 선비들에게 있어 간편식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도 국왕이 수반을 들었다는 기록이 꽤 있고 목은 이색이 시중 직에 초대받아 갔다가 수반을 들었다는 기록이 그의 문집에 있다. 일국의 국왕의 식단으로 기준을 잡으면 꽤나 소박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21세기 현대인의 생각만큼 자린고비인 것은 아니다. 물론 수반이 간소한 식단이었던 것도 맞다. 성종 때 가뭄이 심하자 40일간 수반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신하들이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간언하는 내용이 있다.[3] 이런 조선의 국방력이 정점을 찍게 된건 바로 세조 때부터다. 군사들 중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에 정예는 10만 명에 용맹한 군사는 3만 명 총합 43만 명이었다 .[4] 그렇지만 황산대첩 때는 살육당하는 왜구들의 비명소리가 마치 일만마리 소의 울음소리 같았다고 할 정도로 사실상 몰살시켰다. 수십년간 왜구로 고려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은만큼 원한이 쌓일대로 쌓였던 듯하다.[5] 이런 물러터진 면은 차남인 정종 이방과와도 비슷했다. 우연히도 정종 역시 태조와 마찬가지로 모진면은 없지만 신체가 매우 크고 강건한 무인이었다. 반면 태종 이방원은 신체 자체는 태조가 "병약하다"고 걱정할 정도로 아버지나 형에 못 미치지만, 정치적으론 매우 냉철하고 단호한 인물이었다.[6] 이때도 결국 이방원이 이성계를 부상이 치료되지 않았는 데도 개경으로 끌고와서 막 이성계의 당여들을 처형하거나 귀양보내려던 정몽주를 데꿀멍시킴으로써 종결되었다.[7] 하필이면 또 막내였다. 7명 중에서 6번째인 이방번은 그래도 신덕왕후의 장남이니까 '어쨌든 장남' 이라는 논리로라도 밀어붙일 명분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 이방석은 7명 중에서도, 신덕왕후의 아들 둘 중에서도 막내였다. 오죽하면 이 조치에 신덕왕후의 조카들조차 지지는 커녕 반대하거나 무인정사때 이방원을 돕기도 했다.[8] 정작 이러면서도 이방번에게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 군사력을 이방번에게 몰아줬다. 이를 두고 그래도 친동생 챙겨주겠지? 의도로 그랬을 것이란 추측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방번도 아버지 통수를 쳤다. 이방번은 이방원에게 협조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방원이 뭘 하든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9] 결과적으로 본인이 70대까지 장수해서 제1차 왕자의 난만 없었다면 이방석이 왕위를 계승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겠지만 당초에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 자체가 너무나 무리수여서 본인이 세상을 하직하기도 전에 아들들끼리 왕위를 두고 죽고 죽이는 사건이 두 차례나 일어난다.[10] 사실 이복근 뿐만 아니라 형들인 방과, 방의, 방간과 의숙부 이지란, 그리고 아버지의 오랜 신하들이었던 조준, 권근, 김사형 등도 전부 방원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신덕왕후의 외조카들조차 대놓고 이방원을 지지했다.[11] 사실 원나라도 이성계가 원나라의 재침공을 막아낸 게 멸망의 원인들 중 하나로 작용했으므로 이성계는 사실상 원나라도 자기가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없다.[12] 그 점에서는 최영과도 비슷한데 최영은 고려만 빼고 나머지 세력들과 전부 싸워서 이겼으며 이성계의 출현 전까지 모든 적들을 상대로 고군분투했다.[13] <연려실기술> 같은 조선 후기 야사 기록을 현대의 인터넷 매체들이 몇 배나 자극적으로 양념을 치고 퍼날라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매우 멀어졌다.가령 왕씨가 수십만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과연 이게 연려실기술에 근거한 내용인지는 의문이다.일단 당대 인구를 감안해 보면 설득력이 없다.[14] 북한의 수도가 평양이다.[15] 물론 남한에서도 조선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조선 시대를 무조건 당쟁이나 벌이던 뒤떨어진 시대로 매도하기도 했다. 남한 사학계도 단일한 공동체가 아니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며 사상적으로 남한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을 어느 한쪽으로 맹목적으로 평가하던 사관이 지배하던 시절은 없었다.[16] 현대적인 관점에서 약간의 변호를 해주자면 당쟁은 민주주의에서 필수이다. 권력이 한 쪽으로 몰리면 독재로 변하기 쉽기 때문.[17] 당장 왕건만 봐도 여러 호족들을 혼인 정책 등으로 아우르는 정책을 썼다. 이렇게 된데는 이성계가 고려 무장 시절 비주류 출신으로 고려의 기득권 세력에 무시받은 증오가 쌓였다는 것과 정도전이 이를 적극 추진했던 탓도 컸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18]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바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427년까지 534년간이 비어있다. 한사군 기간이 대부분이지만 정작 북한에서는 한사군이 북한에 위치한 것을 부정한다. 남북국시대에서도 신라와 발해의 변경에 불과했으며 남경남해부가 북청에 설치된 정도가 고작이다.[19] 지역별로 따지면 남한도 고려를 빼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고려의 수도 개경은 완전 접경 지대로 역사적으로 경기수도권에 속했던데다가 개성의 전통적인 교외 지역인 장단 일대도 남한이 꽤나 수복했으며 개성 자체도 원래 남한 땅인 것을 6.25 전쟁으로 북한이 뺏어간 것이라 남한에서도 지분을 요구할 수 있다. 또한 고려 부수도 2곳(동경-경주, 남경-서울)이 남한에 위치해 있고 대몽항쟁 시기에는 남한 영토인 강화도로 38년간이나 수도를 옮긴 전적도 있는데다가, 조선 왕조는 고려의 승계국가로 기존 자산을 거의 흡수했기 때문에 다시 서울을 점유하고 <고려사>와 같은 서지 자료들 등의 자산을 물려받은 남한이 북한에 비해 월등히 연구 성과가 높다. 고고학적으로도 광복 후 6.25 전쟁 이전까지 개성시가 남한에 속했던 관계로 개성 박물관에 위치한 양질의 고려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주요 유물 문화재는 북한이 아닌 남한에 위치하고 있다. 서희, 강감찬, 최영, 정몽주 등 고려시대 주요 인물들도 남한 지역 출신이고 묘소도 남한에 위치한다. 그리고 지방 행정까지 놓고 보면 성종 대 설치된 12목 중 황주, 해주를 제외한 무려 10곳이 남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슬아슬하게 개성이 북한령으로 편입됐다는 것만 제외하면 역사적, 지리적으로도 남한의 지분이 더 높다고 볼 여지가 있다. 이는 프로이센 시절부터 수세기 간 수도였던 베를린을 점유한 동독이 정작 시골 촌동네 본을 수도로 삼은 서독에 비해 독일사의 정통성 측면에서 큰소리를 치지 못한 것과도 비슷하다. 정작 독일인들의 역사적 주 무대는 동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엘베강 이서 지역이었고 동독의 역사적 정통성을 세워줄 프로이센은 본거지였던 동프로이센이 모조리 소련과 폴란드에게 합병되어버렸기 때문이다.[20] 단, 개성이 남북 접경지대인것처럼 국내성 일대도 북중국경인 압록강과 가까이 있기는 하다[21] Theophylactus Simocatta라는 동로마 역사가가 한창 로마-페르시아 전쟁 중이던 7세기 초 저술한 사서에 고구려가 등장하는데, 통일신라가 유럽 및 중동세게에 알려진 시점보다 당연히 제법 앞선다[22] 고구려/문화, 고구려/경제, 고구려/건축 문서 참조. 고구려는 당대 중국이 두려움을 느꼈을 정도로 거대한 하드 파워와 소프트파워를 갖춘 동방의 강국이자, 백제와 신라, 말갈 및 북방민족 등 전방위적으로 멸망한 뒤에까지 문화적 영향력을 끼치며 중화 문명과 대등하게 겨루는 구도를 구축했던 거대 문명국이었다. 현대 한국어 역시 다수의 외국 사학자들은 고구려어를 전신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서방권 역사서에서 처음으로[21]이름을 남긴 한민족 국가 역시 고구려였다. 후백제 외의 후신을 가지지 못했던 백제나, 멸망 후 다시는 부흥운동을 벌이지 않았던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발해, 태봉, 고려에 걸쳐 계속해서 후계 세력을 만들어냈고 마침내 동시대에 한국계 세력으로는 단 하나뿐인 최초의 통일왕조에 이르렀다.[23] 고려는 삼경제 같은 부(副)수도 제도도 운영했고 지방 토호 세력의 권세가 막강해서 수도치고 개경의 위상이 막강한 편은 아니었다. 반면 조선은 부수도 없이 한양에 권력을 몰빵한 나라였고 지방 행정력도 고려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막강했다. 그나마 전기 조선은 개성 한 곳만을 유수부로 삼아 사실상 부수도로 대우하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유수부가 최종적으로 다섯 곳까지 늘어나면서 그저 수도권 북부의 거점도시 수준으로 위상이 상당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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