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선)/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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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분야별 업적
5. 기타


1. 개요[편집]


세종대왕의 업적을 정리한 문서.


2. 역사[편집]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太宗)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書籍)을 거두어 감추게 했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매일 사야(四夜) 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經筵)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 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며,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했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 했다.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했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했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느즈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했다.

세종실록 세종 32년(1450) 2월 17일자 첫 번째 기사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중에서.


여기서 '하늘이 내리신 성인'의 원문은 天縱之聖(천종지성). 이 말은 공자나 제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관용구이다. 딱히 세종에게만 쓰인 독특한 표현은 아니지만[1] 정인지는 물론 당시 신하들이 세종에 대해 가졌던 공통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 농사직설: 조선 풍토에 맞는 농서 편찬 지시.
  • 대마도 정벌: 이종무 장군에게 명해 왜구를 토벌.[2]
  • 4군 6진 개척: 최윤덕 장군(4군)과 김종서 장군(6진)에게 명해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
  • 집현전: 정책, 학문 연구 및 국왕자문기구 설립.
  • 고려사 편찬.
  • 훈민정음 반포: 수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업적.
  • 정간보: 박연이 음악 정리, 새로운 악기 개발.
  • 속육전, 등록 등의 법전 편찬 및 정리.
  •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등 발명.(장영실과 함께)
  • 유교 사상 발전.
  • 전세 제도 확립.
  • 총통, 신기전, 화차를 비롯한 각종 화약 무기 대대적 개발, 개량.
  • 한성을 기준으로 한 역법칠정산 편찬.

쉽게 말하자면 당대 모든 분야, 즉 농학, 문학, 사학, 언어학, 음악, 법학, 수학, 과학, 공학, 철학, 경제학, 재무학, 회계학, 천문학, 물리학, 지리학은 물론 군사적인 측면과 인권에도 신경 쓴 임금. 간단히 요약해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을 한 번에 몇 단계씩 끌어올린, 괜히 대왕 수식어를 받은 왕이 아니다. 극단적인 평가로는 조선은 사실상 세종대왕 집권 대에 다 만들어졌고, 이후 수 백 년간 그 틀을 거의 바꾸지 않고 약간씩 보수만 하면서 흘러갔다는 말도 있다.

사실상 신하와 왕의 학술 토론회인 경연도 고려 예종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상설화된 때는 조선 세종부터다. 경연이 상설화됨은 그만한 능력이 있어서였는지, 세종은 경연 때마다 신하들 공부 안 했다며 잘 굴려댔다. 이 신하들도 대과 합격=전국 33위 이내의 영재들이건만. 재미있는 점은 세종 시절이면 왕권이 충분히 강화된 시점인데 왕권 강화책을 강조하지 않고 신하들과 나라를 어떻게 꾸려갈지 매주 이야기 했다는 것. 이것으로 세종이 왜 성군이고 어떻게 이 치세 때 좋은 인재들이 나왔는지 유추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전세 제도의 확립 과정에서 토지 질이나 풍흉에 관계없이 똑같이 세금을 내는 세법인 '공법'을 제정하려 할 때에는 관리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행하기도 했다. 재위 12년(1430) 전국의 17만여 가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반 년 남짓 소요되었는데 공법 찬성은 9만 8천여 표, 반대는 7만 4천여 표였다. 또 추가로 반대표가 더 많았던 지방에 대해 어떤 점에서 반대했는지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했다고 한다.[3]

과학 기술을 보자. 1983년 이토 준타로를 비롯한 일본 도쿄대 연구진이 편찬한 ‘과학사기술사 사전’에 따르면 1400년 ~ 1450년 사이의 세계 과학 기술 주요 업적으로 올라온 건수가 한국 21건이나 되는데 거진 세종 시대 업적들이다. 동시기 중국은 4건, 일본 0건, 동아시아 이외 전 지역 19건이다. 기사관련 포스팅. 글 밑부분 참조

재위기간 동안에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었으나, 세종대왕 집권 후기에는 왕권 강화 - 종친에게 적극적으로 정책을 맡기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사실 왕권 / 신권 대립 문제가 애초에 존재 자체부터 문제시 되는 떡밥 중 하나. 예컨대 신권의 대표자였던 정도전은 막상 태조가 없으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태종의 방식은 정도전 방식보다 특권층의 권한을 확장시켜주는 식이었다. 세종 중기를 거치며 특권층이 짝짓기를 시작하면서 세종의 정책에 반발할 세력을 키웠기에 세종도 맞불을 놓은 것이다.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4]에게 주는 묘호라고 한다.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이다. 원래는 정인지 등이 문치에 공덕이 있는 왕에게 올리는 묘호인 '문종(文宗)'으로 묘호를 정하자 했으나 나중에 그 묘호를 받게 되는 아들이 반대하면서 '4군 6진의 업적이 있으므로 세종으로 묘호를 정해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세종이 되었다. 아무튼 세종은 대내외적으로 전성기를 이끌어 낸점이 인정받아 아들 문종이 세종이란 묘호를 올렸다.

정리하자면, 어쩌다 왕의 운명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마치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집권할 때의 상황 또한 정말로 하늘이 내린 군주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세종이 선정을 펼치기에 좋았다. 당시 조선은 건국 후 혼란기에서 안정기로 접어들었으며, 선대 왕이던 태종의 엄청난 왕권 강화로 무리 없이 정책을 집행하며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점[5], 신생 국가답게 진보적인 인재들이 재야에 많았던 점, 빼어난 인용술로 개성넘치는 관료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한 점, 젊은 세대들 또한 고려 때 태어나 자라난 세대들에서 조선 건국 이후 태어나 자란 세대들로 교체되어서 백성들이 사실상 조선으로 동화되었다는 점, 대외적 / 대내적으로는 국가급 스케일의 큰 위협이 될만한 요소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은 죽은 후에도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모든 왕과 문무백관 그리고 백성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고, 조선 왕조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존경받는다.


3. 분야별 업적[편집]



3.1. 농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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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경작 면적은 약 150만 ~ 170만 헥타르인데, 이 수치는 조선 시대 내내 뛰어넘지 못하다 약 500년 후 1910년 ~ 1918년 동안 진행된 일본의 동양 척식 주식 회사의 토지 조사 사업 때 뛰어넘게 된다. 이때 조사된 토지 조사량이 약 200만 헥타르가량 된다. 교과서에서 조선 농업 관련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조선 세종 때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농업 개혁들과 이앙법이 없는 상당히 뒤떨어지던 시대였는데도 저런 수치가 나온 것이다. 심지어 조선 세종 때 저 수치는 실제 측정량보다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종 땐 토지의 등급을 1등급 ~ 6등급으로 매겼는데 6등급 이하 토지는 농지로 취급을 안 했기 때문이다. 즉, 큰 의미까진 아니지만 실 측정량은 좀 더 많았다는 말이다. 이는 평화기와 더불어 농사직설 편찬 등 농업에 힘쓴 결과물이기도 하다.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세종 시기의 생산량이나 토지 결수가 조선 중후기보다 무조건 많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실제 생산량은 분명히 기술력 차이 등을 감안해보면 조선 후기가 조선 초기 세종 치세보다 높았을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6] 그런데도 왜 저런 수치가 나왔냐하면 그만큼 세종 시기 정부의 호적과 세수 파악이 제대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로 인한 진짜 세종의 업적은 생산량 증가를 논하기에 앞서 철저한 토지 관리로 인한 세수의 증가로 봐야 한다. 특히 숨겨놓은 토지인 은결을 세종 시기에는 전수조사를 해서 제대로 장부에 표기해 놓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양안에 표시되지 않는 결수가 많아지게 된다. 또한 실제 수세 결수와 전체 결수가 차이나는 것은 내수사나 지방 관아, 그리고 서원 소유의 토지 때문으로, 이들은 중앙 정부에서 수세 대상 토지가 아니었다. 지방 재정 운용을 위해서 지방 수령들이 운용하는 토지들이 필요했기 때문. 특히 대동법이 시행된 인조 ~ 정조 시기의 수세 결수가 늘어나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3.2. 교육[편집]


세종은 경학에도 뛰어나서, 본래는 왕이 신하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경연을 되레 신하들이 왕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자리로 만들어버린 인물이기도 했다. 궁궐에서 왕에게 직접 아뢰면서 일할 정도면 상당히 높은 관직인데, 그 관리들이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라 조선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사람들임을 생각해보자. [7]. 그래서 여태껏 일단 과거에 붙어서 관리가 되면 당연하게 관리들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지만, 세종 때에는 왕의 높은 학구열 때문에 붙어도 계속하여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관리들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본인들은 물론 국가를 위한 노력이었다.

이렇게 나라 최상부에 면학의, 면학에 의한, 면학을 위한 분위기가 조성된 결과 불꽃 튀는 경연이 툭하면 벌어졌다. 당시 경연은 정책 토론장의 역할도 겸했는데, 세종대왕의 정책 수립방식은 대단히 복잡했다. 예시를 들자면, 간식으로 롯데리아맥도날드 중 하나를 선택을 하려면 두 업소의 메뉴판을 늘어놓고 각 메뉴의 칼로리를 계산하고 영양학적 분석, 맛, 포만감, 가격대 성능비, 재료의 산지, 소화 불량 가능성, 먹어본 사람의 의견[8], 법적 근거, 재료 생산 관리, 가공 공장의 위생상태, 지배인의 경영철학 등의 생각해 낼 수 있는 관련된 사안들을 다 검토한다. 그리고 길고 복잡한 검토를 마치고 간식을 선택하면 때는 이미 저녁 먹을 시간이다. 이런 식으로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정책을 시행하다 보니 금방 시행되는 국정은 지극히 드물었고, 의심가는 고칠 점이 보일 때마다 재검토하다 보니 국정을 완성하고 시행하는 데 연 단위로 시간이 걸리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결과를 거쳐 나온 정책들의 완성도는 당연히 매우 높아서 세종 대에 입안된 거의 모든 정책이 세종 후의 조선을 지탱하는 제도가 되었다. 예를 들어 농지개혁은 입안에서 시행까지 13년이 걸렸지만, 대한제국이 근대 양전사업을 시행하기 전까지 400년 넘게 조선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오히려 18세기 ~ 19세기에 가서 수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성리학자(+실학자)들이 '도대체 이거 어떻게 만들었지?' 하고 경탄했을 정도였다. 이런 신중함과 철저함은 현대보다도 더 나은 부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격무를 전부 도맡아서 했으니 당연히 몸이 안 아프고 배길 리가 없었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승하하기 3일 전까지 온갖 격무에 시달렸다.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세종대왕이 밤늦게까지 글을 읽고 있었는데 멀리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었다. 궁금하게 여긴 세종대왕은 내관에게 어떤 학사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아오게 했다. 내관이 말하기를, "집현전 학사 신숙주가 공부를 하고 있사옵니다." 감격한 세종은 자신도 계속 글을 읽었다. 닭이 두 홰를 운 뒤에야 집현전의 불이 꺼졌고, 세종대왕이 거동하여 보니 신숙주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종대왕은 손수 자신의 곤룡포신숙주의 등에 덮어 주었다.[9]

세종의 자상함을 설명할 때 주로 드는 '훈훈한' 일화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공부하던 세종대왕의 학구열을 증명하는 일화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입장을 바꾸어 신숙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왕은 일어나서 책 보고 있는데 자기가 먼저 곯아떨어졌으니 오싹한 이야기다. 내리갈굼이 뻔히 보이니. 물론 일하다 일하다 결국 정신 놓고 자 버릴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그랬겠지만.

음운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실제로 배울 수 있는 것은 극한까지 배우려고 했다. 그것은 현명한 임금의 배움이라기보다도 거대한 한 지성으로서의 영위라 할 만한 것이었다.

-노마 히데키 저, <한글의 탄생>에서


이뿐만 아니라, 왕자 시절 하루종일 책만 읽어서 건강을 해칠까봐 우려한 아버지 태종이 충녕 대군 방의 책들을 모두 치우게 했는데, 우연히 딱 하나 남은[10] <구소수간(歐蘇手簡)>[11]을 주야장천 읽어댔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며, 밥을 먹으면서까지 손에서 책을 뗄 줄을 몰랐다고 한다. 또한 명이나 왜에 사신으로 가는 신하가 있으면 가기 전에 꼭 이들을 불러들여 "왜에 뭔 책이 있다는데 오는 김에 좀 구해보시오.", "명나라에 국내에 없는 뭔 책이 있다는데 갔다 오는 김에 겸사겸사 좀 알아보시오." 이런 식으로 구매대행을 시켰을 정도였다.

사실은 신숙주책을 읽고 싶어서 당직을 다른 사람과 바꿔 자기가 대신 근무를 서 가면서 독서를 하고 아무리 을 퍼먹고 놀았어도 조금만 이 깨면 다시 일어나서 책을 읽을 정도로 지독한 책벌레였지만, 세종대왕은 더 심했으니 신숙주가 먼저 뻗어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종대왕 본인도 "내가 궁궐에 있으면서 손을 놓고 가만히 있을 시간은 없다."라고까지 말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3.3. 복지[편집]


세종은 조선의 국왕 가운데서도 특히 애민(愛民) 정신이 강했던 군주로 평가받고 있으며, 여러 기록에서 그에 관한 사실을 찾을 수 있다.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무거우며 굳세였고 점잖고 후덕했다.

크고 너그러웠으며 어질고 사랑했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다.

(英明剛果, 沈毅重厚, 寬裕仁慈, 恭儉孝友, 出於天性)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국조보감》의 기록에 의하면, 왕자 시절부터 가난하고 굶주린 자가 있다는 사정을 알면 반드시 태종에게 아뢰었다고 한다. 조회에서 태종은 이미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여 굶주림이 없도록 벼슬 자리를 두었는데, 죽게 된 백성이 왕자를 보아야만 먹을 것을 얻는다면 도리가 아니고 관리들의 일 처리가 잘못되었다면서 주관하는 자에게 벌을 주었다.

  • 노비
당시, 관청에서 일하는 여자 노비(즉 관비)들이 출산을 할 때 산후 휴가가 1주일이었는데, 세종대왕은 출산이 예정된 달을 포함해 출산 후 100일을 쉴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고 (1426년 4월 17일) 출산 1개월 전부터 산모의 복무를 면제시켜 주는 조치를 취했으며(1430년 10월 19일), 또 산모만 쉬게 하면 누가 산모를 돌보겠느냐며 그 관비의 남편에게도 산후 1개월간 쉬게 해 주었다(1434년 4월 26일)는 사실은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대부들이 "저희한텐 출산 휴가 제대로 안 주시고 왜 천것들에게만 주십니까?"라고 불평하자 "니들은 집에 마누라랑 애 돌봐줄 사람들 있잖아?"라며 철저하게 면박을 줬다. 현재 한국의 근로기준법으로는 출산 휴가는 총 90일 이상, 그 중 산후 휴가는 45일 이상을 주게 되어 있고, 이마저도 공무원과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자유롭게 쓰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하면 요즘보다도 훨씬 관대한 출산 휴가인 셈이다.
또한 노비의 인권 향상에도 힘썼는데 1427년 8월 24일, 집현전의 응교였던 권채가 여종이 자신들의 허락도 없이 병든 할머니를 문병했다는 이유로 집안에 가두고 구더기가 섞인 똥과 오줌을 강제로 먹였다는 보고가 올라왔는데 권채와 그 아내 정씨는 뜬금없이 형조판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반성하지 않은 기색을 보이자 "양민과 천민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며 권채 부부를 형벌로 심문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후 1444년 7월 24일엔 "노비는 비록 천민이지만, 다 같이 하늘이 내린 백성이다. 노비가 죄를 지었는지 유무와는 별개로 관에 알리지 않고 구타 및 살인을 한 자는 옛 법령에 따라 엄중하게 처단하라."라는 지시를 내린다.
태종대에 시행된 노비종부법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종부법을 폐지하고,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시행했다. [12] 양천교혼(良賤交婚) 또한 금지함으로써 노비의 급증을 예방했으며, 종친과 관료들과 40세 이상인 백성들의 자손에게는 예외 규정으로 적용되었음으로 노비 인구가 늘지 않게끔 제재 장치를 걸어놓기도 했다. 실제 세조실록에 따르면 공노비의 수는 노비종모법 시행 이후 줄어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신분을 변경할 수 있는 소송 제도가 존재했었는데 노비종모법은 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를 예방하려는 측면이 있었다.[13] 계급과 그 역할이 구별되어 있던 시대상, 무조건 양인이 늘어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개판이 된 신분 기록과 더불어 너도나도 군공을 내세우거나 양반 자리를 구매하는 등 이런 저런 사건들로 인해 양반만 엄청나게 많아지자 이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국가 운영에 큰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양인의 수만큼 세수가 그대로 확보되는 것도 아니고, 특히 이 시기 사노비가 아닌 공노비는 관청에 고용된 계급으로 잡무를 처리하는 인력이었기에 무작정 그 수를 줄일 수는 없었다.

  • 노인
세종은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궁궐로 초청하는 연회인 양로연도 자주 베풀었다. 《세종실록》 세종 14년(1432) 8월 17일 기사를 보면 승정원에서 "노인으로서 출신이 천한 자들은 양로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상소를 올렸는데, 이에 대한 세종대왕의 답변이다.
"양로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참예하게 하고, 그 장죄(贓罪: 뇌물죄)를 범하여 죄를 입어 자자(刺字)한 자는 참예하지 못하게 하라."

《세종실록》 세종 14년(1432) 8월 17일
그리고 100세가 넘은 노인에게는 나라에서 쌀과 옷을 내려 주었다. 한번은 강원도 감사가 경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00세가 된 김씨 노인에게 주는 쌀 10석을 5석으로 줄이자고 청하자 세종은 "100세가 넘은 노인은 세상에 항상 있지 않으므로 의리상 당연히 후한 구휼이 필요하다." 하며 요청을 기각하고 그냥 종전대로 쌀 10석을 주도록 했다. (1436년 7월 27일) 그리고 고봉현의 107세 된 노인에게도 옷과 양식을 하사했는데, 이 노인은 당시 병석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옷과 양식이 도착하자 감격해서 세종이 하사한 옷을 몸 위에 덮고 눕더니 곧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1420년 4월 26일). 나랏님도 어른 대접을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 죄인
어린이와 노인이 죄를 범했을 때 얼굴이나 팔에 죄명을 표시하는 문신 '자자'형(얼굴이나 몸에 죄목을 새기는 형벌)을 금지했다. 세종대왕은 "어린아이는 뒤에 허물을 고칠 수 있고, 늙은이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자이므로 자자는 옳지 않다."고 의견을 말했고 형조 참판 유계문이 "자자는 그 죄를 표기하는 것이니 노인이나 어린아이라도 면제할 수 없다."고 반론을 펼쳤지만 허조가 "노인과 어린아이는 장형도 안 받고 속전을 받는 것인데, 자자의 고통은 태형, 장형보다도 더하니 어찌 자자를 할 수 있겠느냐?"고[14] 세종대왕의 의견에 찬동했다고 한다(1429년 7월 30일).
더위가 심한 날에는 유배형 이하의 죄수를 모두 사면토록 지시했으며, 석방되지 않은 죄수가 불편함이 없도록 잘 돌봐주라며 죄수의 인권을 챙겨주기도 했으며[15], 1448년 8월 25일자 실록에는 4월부터 8월까지는 냉수를, 5월부터 7월 10일까지는 목욕 시간을 따로 배정하라고 지시했으며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 안에 짚을 두텁게 쌓아 추위를 막아주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죄수들의 자식 중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 아이는 국가가 나서서 이들을 부양해 줄 사람을 지정해 주기도 했다.
옥에 갇힌 죄수 가운데 홀아비와 과부의 어린 자식들을 돌보지 않으면 아이들이 굶주리고 추워서 죽음에 이를 것이 아닌가. 지금부터는 (죄수들의 어린 자식들을) 그 친족들에게 주고 젖먹이 아이는 젖 있는 사람에게 주어라 또 친족이 없으면 관가에서 거두어 보호하고 기르도록 하라. 잘 돌보는지 서울에서는 사헌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규찰하라.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 7월 28일
또한 현재의 귀휴 제도와 유사한 제도를 시행토록 지시했으며 귀휴 일수를 복역 기간에 포함시키는 교지를 하달하기도 했다.
주상께서는 일전에 유배 중인 도형수 가운대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들에게는 휴가를 줘서 1년에 한 번씩 만나보게 허락하고, 그 휴가 일수는 모두 복역 일수에 통산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 7월 12일
사형수에 대해서도 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도입하여 의금부에서 사형수를 결정할 때 반드시 3심을 거쳐 판결하도록 했다.


3.4. 음악[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간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영조: 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는가?

원경하: 영묘조(英廟朝)[16]

땐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최고의 선비들만 배출한 게 아니라 예법과 음악을 만들고 정비하던 시대였습니다. 비상한 재능을 가진 박연 같은 기술 인재들도 이 시대에 태어나 경쇠[17]도 그때에 나왔고, 법율을 만드는 기장도 그 시대를 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원경하, 《영조실록》 영조 26년(1750) 1월 9일 원문


이날 기록을 보면 원경하가 선조 때의 인재들(이순신, 류성룡, 이원익 등)을 열거했는데 이 말을 들은 영조가 "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냐?" 물었다. 이에 대한 원경하의 대답.

개인적으로 음악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음악적 소양은 꽤 되었고 악기도 나름대로 잘 다룰 줄 알았는지 양녕대군에게 악기 다루는 법을 알려줬다는 기록도 있다.[18] 또한 절대음감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박연이 만든 편경을 시험할 때의 모습을 보면

중국의 경(磬)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磬)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는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夷則) 1매(枚)의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월 1일 원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KBS <한국사 전>에서 실험해보니 편경 음의 차이는 지극히 미세해서 일반인이 그냥 귀로 듣고 음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알기가 어렵다. 세종의 앞에서 편경을 시연했던 박연 또한 당대 음악적 재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는데, 그런 사람도 듣지 못한 음의 차이를 한 번에 알아맞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표음문자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이 음감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종 본인의 이런 음악적 감각은 정간보 간행이나 조선의 음악 정리에도 큰 도움이 되었으며, 아예 종묘제례악 중 몇 곡과 여민락 등은 세종이 주장 막대를 땅바닥에 두드려 박자를 맞추며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장바티스트 륄리가 서양 바로크 음악에서 처음 지휘봉을 도입했을 때의 사용법과 유사하다. 아무튼 인류 고금을 통틀어 흔치 않은 군주이자 작곡가. 한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자 작곡가인 다른 사례로는 독일인들이 존경하는 왕 프리드리히 대왕과, 오스만 제국 후기의 개혁군주 셀림 3세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3.5. 언어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세종대왕이 만든 위대한 업적이 바로 한글 창제다. 오늘날 《훈민정음》을 창제한 공로는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업적 가운데 하나이지만, 사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부터 언어와 음운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이 부분을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훈민정음》이 아직 기밀 사안이었을 시절에도 중국어 관련 서적을 탐독하자 신하들이 "전하, 중국어 책은 왜 자꾸 보십니까?"라고 질문한 적이 있으며, '내가 지금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던지[19], "중국어 공부를 좀 해놔야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질문을 했을 때 미리 답변을 생각해 놓지 않겠는가?" 라며 핑계를 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는지 최만리,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반포[20]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매우 크게 분노하면서 일갈을 했다.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 뜻이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난 뒤. 원문

이처럼 이례적으로 반대하는 신하들을 처절하게 면박줬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니들이 음운학에 대해 뭘 알고 하냐는 소리다. "니들이 나보다 음운학을 잘 알아? 운서 알아? 사성칠음에 자모 몇 개야? 아는 거 없으면 빠져." 라는 말을 우아하게 한 것. 당대 한반도 최고의 언어학자라고 보아도 무방한 만큼 학문적 성취에 대한 자존심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벌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했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變)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했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罷職)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세종 26년(1444) 2월 20일. 김문, 정창손 등을 비판한 뒤. 원문

이어서 위와 같이 명했는데, 쉽게 풀어 쓰자면 "내가 그냥 좀 물어보려고 불렀는데 니들 꼴을 보니 안 되겠다."며 정창손을 제외한 모두를 하루 동안 의금부에 투옥한다. 김문은 투옥에 추가로 감히 임금 앞에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죄로 의금부 도사의 심문을 받게 되었고, 정창손은 짤렸다.

  • 김문은 이전에 세종이 "말 소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글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했을 때 "안될 것 없지요"라고 대답했던 사람인데, 이번 상소에서는 언문 제작을 반대했으니 그걸 기억한 세종에게 찍혀서 일종의 괘씸죄로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 참고로 정창손만 파직된 이유는,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성인군자는 타고나는 것이라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번역씩이나 해주면서 교육시켜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21]"는 요지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공자 이후로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다. 유학의 핵심은 한마디로 "수양을 열심히 한다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 시대 내내 명목상 천민(노비 등)만 아닌 양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문반, 무반을 합쳐 양반이라며 계급화된 것은 양란 이후의 일이고, 조선 전기에는 농사꾼 출신 과거 응시자, 합격자도 있었고 세종 대에도 천한 이들 중에도 장영실 등 뛰어난 인재들을 손수 픽업해오기도 했으니 철저한 유학 군주 세종이 대노할 만했다. 정창손의 말대로라면 빈민이던 안회나 양아치 출신의 자로를 제자로 삼아 가르친 공자는 헛짓거리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유학 최고의 성인이자 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공자 자신이 직접 "가르침에 부류란 없다(有敎無類)"(논어 위령공편)고 말했는데도 말이다. 이때 세종대왕은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22]한 선비"라며 정창손을 강하게 비판했다.[23] 그리고 파직시켰다. 여담으로 정창손은 후에 김질과 함께 사육신을 고변했다. 세종의 선견지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신하들의 반대도 이해가 될 수도 있는 점은,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대단한 일이지만 외교적으로는 엄청나게 부담되는 일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 체제, 즉, 화이 체제에서는 중국은 곧 '문명', 나머지는 오랑캐로 여겨졌고, 조선도 역시 그 '문명'의 기준에 충족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고, 정치적으로도 그 문명 세계의 일원이라는 것으로 나라의 권위를 강화했다. 따라서, 중국의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를 쓴다는 것은 문명세계를 벗어난 오랑캐의 문화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24]

사실, 《훈민정음》 반포와 관련된 일에서 세종은 이전보다 훨씬 신하들에게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데, 신하가 반대한다고 감옥에 가두거나 파직까지 시키는 과격한 대응을 한 것은 다른 사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유교 군주로서 유교적 명분론을 완전히 어길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강경하게 나가서 입을 틀어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고집스럽게 강하게 나간 것으로 보이며, 또한 오랫동안 연구를 한 끝에 문자를 새롭게 만들어낸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발현된 결과로도 보인다. 오랫동안 연구해서 시간과 노력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가면서[25] 고생한 끝에 훌륭한 문자를 만들어서 반포하려고 하는데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으니 당연히 화가 났을 것이다. 그나마 최만리 등은 기술적 문제, 사대 문제 등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근거라도 꺼냈지만, 정창손은 유학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해가며 반대를 했으니 더욱 화가 났을 것이다.

아버지 태종도 신랄한 독설가였는데, 세종대왕 또한 아버지의 습성을 잘 물려받은 듯 하다. 실제로 이때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토론달인으로 방대한 자신의 지식과 매우 논리적인 언변과 화술로 논쟁에서 신하들을 꼼짝 못 하도록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경연이나 정책회의 등에서 준비도 안 하고 대충 참석했다간 《훈민정음》을 반대한 신하들이 먹은 갈굼처럼 처절하게 논박을 당해야만 했다. 그래서 신하들이 과거에 붙어도 매일 경전과 서적을 외운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의 저 꾸짖음에 가까운 논박은 그의 화술 능력을 나타내는데, 원래부터 세종대왕 본인은 경연, 즉, 토론의 달인이었다. 거기다가 본래 세종대왕은 한 번 적재적소에 썼던 인물이라면 그대로 데리고 쓰는 이른바 종신 고용에 가까운 인재 사용을 보여주는데, 황희 정승의 사위사건이나 박연의 부정 축재 등 생각보다 규모가 큰 사건이라도 적당히 덮어주거나 하는 등의 사례를 세종대왕이 집권하던 시기에 더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세종이 신하를 다룰 때 웬만큼의 상소문 같은 건 오히려 논쟁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훈민정음에 대한 논박은 열린 마음으로 대하던 것에 반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평소 화법은 신하들의 의견에 제대로 경청을 했다가 유교 경전이나 고사 등을 인용하여 학문적 우위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면, 저 논박은 주요 논점을 슬며시 회피하면서 피장파장의 오류권위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인다. 흔히 권위주의라고 하면 민주적인 현대적 사고 방식으로는 매우 찝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나, 조선시대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위엄과 위협 모두를 드러내는 제왕식 화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평소 세종대왕의 화법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이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만리의 상소문 6개항 중 4개 항이 모두 중국에 사대를 해야 된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도, 잘 보면 세종대왕은 중국에 대한 사대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이두와 구결도 어차피 한자로 만든 오랑캐 문자인데 니들은 퍽이나 오랑캐 문자 안쓰고 중화 운운하냐? 그래서 내가 니들이 못하는 음운학 마스터해서 그거보다 편리한 발음기호 좀 만들었는데 그게 그렇게 아니꼽냐?" 라는 식으로 억지를 쓰고 있다.

즉 '중국에 대한 사대'라는 논점을 건드리면 문제의 상소에 이름을 올린 자들을 처벌하더라도 다른 선비들의 반감을 사게 되고, 이는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함을 알고 있는 세종대왕이 다소 억지를 써서라도 일부러 평소와는 다른 화법을 구사한 걸로 추정할 수 있다. 화도 잘 안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정말 무섭듯이 세종대왕이 평소의 설득 화법을 치우고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것을 본 신하들은 깨갱할 수밖에. 왠만해선 화내지 않는 세종대왕이 신하들에게 화를 낸다는 건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주특기인 숙청 스킬을 발동하겠다는 뜻이며[26],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사형을 열 번 구형 가능한 수준의 뇌물 수수죄를 저지른 조말생을 끝까지 보호하고 귀양만 보냈다 다시 등용했을 때이다.

흔히 세종대왕이 집현전에다가 "너희들, 새로운 문자를 좀 만들어 봐라." 라고 명령을 해서 집현전에서 뚝딱뚝딱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훈민정음에 이미 세종대왕 본인이 창제했음을 밝히고 있고, 훈민정음 발표 이후 놀란 집현전 학자들이 크게 반대를 했다는 점 등만 보더라도 사실상 집현전과는 전혀 무관하게 세종대왕 홀로 한글을 발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해당 내용은 단 한번도 정설로 여겨진 적이 없음에도 모종의 이유로 인해 과거 국정 국사교과서에 마치 집현전이 참여한것처럼 서술되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 혼자 한글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27][28] 학계와 산업계 모두에서 프로젝트는 관리와 실무 담당이 협업하는 것이 상식인 20세기, 21세기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훈민정음 창제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세종대왕 개인이 국왕으로서의 관리 업무와 학자로서의 실무를 동시에 처리하며 진행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프로젝트의 구상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뛰어난 학자였고, 그와 동시에 평상시 정무를 보면서도 남는 시간에 음운학과 관련된 실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하는 일 중독자였기 때문에 문종으로부터 받은 실무 도움만으로 대형 프로젝트를 사실상 혼자서 진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집현전의 수뇌부 중에서도 훈민정음을 창제해서 반포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사람들 중에는 집현전 출신도 많았고, 실제로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최만리는 집현전의 실질적 수장인 부제학이었다. 또한 신숙주 등 젊은 집현전 학자들 몇 명과 함께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것도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 때문에 시중에 유포된 많은 세종대왕 위인전에서는 집현전 학자들한테 훈민정음을 만들라고 해놓고, 집현전 학자들이 항의하니 다시 잡아가두는 모순적인 모습도 자주 보인다.

때문에 젊은 집현전 학자들조차 훈민정음 창제에선 한 일이 없다. 흔히들 신숙주가 세종의 어명을 받아 중국의 유명한 언어학자를 만나러 중국에 건너갔다는 기록을 보면서 신숙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도움을 줬다고들 하는데 사실 신숙주가 중국에 건너간 것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1년 6개월 뒤이고 언어학자를 만난 이유도 중국어 음운론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간 것이다. 그렇다면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 세종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내가 글자 28자를 만들어 놨으니 그것의 쓰임새와 해설을 좀 달아봐라." 라고 명령한 것이고 그 결과물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즉 《훈민정음》의 해설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만든 거고, 훈민정음 자체는 세종대왕이 직접 만든 것이 맞다.

이렇게 왕이 직접 한글을 창조한 증거로 한글의 완성도를 들기도 한다. 만약 신하를 시켜 만들었을 경우, 기한에 맞추어 최대한 빨리 내기 위해 꼼꼼하게 만들기 힘들었을 것 아니냐는 말이다.

세종대왕이 언제부터 훈민정음을 만들겠다 마음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문자 창제는 한반도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결단 중 하나로 남아있다.

한글 창제의 부수적인 효과이기도 하지만 한글로 외국어를 표기하기가 간편해져서 세종대왕은 중국어 발음을 조사한 뒤 한글로 외국어 표기를 하여 외국어 교본을 만들었다. 덕분에 혼자서도 외국어 발음 공부가 가능하게 되어 회화 중심의 외국어 교육의 기초가 되었다.[29]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문법과 독해 중심의 교육으로 변경되었고 지금까지 영 좋지 않은 영향이 남아있다.


3.6. 역사[편집]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했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했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3월 13일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우리의 문물이 신라를 계승했으니 신라 시조에게만 제사 지내죠."라는 허조의 상소에 대해 세종 본인이 몸소 삼국이 나란히 서서 서로 막상막했는데 어떤 건 버리고 어떤 것만 신경을 쓸 수는 없음을 언급했는데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를 조선의 옛 조상으로 인식했던 세종의 균형 잡힌 역사 감각과 혜안을 보여주는 대목.[30][31]

또한 재위 기간 내내 《고려사》 편찬에 직접 개입하여 퇴짜와 수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결국 생전에는 《고려사》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고려사》의 초기 버전은 고려가 제후국이었다는 이유로 고려 왕들이 쓴 태조, 현종 같은 묘호를 전부 으로 격하시켜 태왕, 현왕 하는 식으로 쓰여 있었고, , 태후, 태자 등의 용어도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이라 하여 과인, 대비, 세자 등 제후의 용어로 고쳐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편찬자들에게 "그 시대 역사는 그 시대에 실제로 쓰던 말로 써야 한다"며 다시 만들도록 했고, 이렇듯 꼼꼼한 과정을 거친 탓에 《고려사》는 세종 사후 문종 1년(1451)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과연, 이런 역사관을 왕조 초기에 실록에다 명시해놓으니 나아가 고종 때 삼한을 합쳐 대한으로 하자는 의견이 쉽게 취합될 수 있었으리라.[32]


3.7. 수학, 과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과학사/한국/조선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영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과학 기술 발전에도 힘썼는데 이순지,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해 대간의, 소간의, 혼천의 등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고 물시계자격루옥루도 만들어 흠경각을 세워 그곳에 설치했다.

또한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수표교 등을 만들어 설치를 담당하게 했다. 의학에도 관심이 많아 집현전 학자였던 김예몽, 유성원 등에게 명해 의방유취 초본을 만들게 했고 이후 김문, 신석조, 이예, 교리 김수온에게 명해 의관을 모아 편찬케 했으며 세종 27년인 1445년에 365권으로 이루어진 조선 최대의 의학 백과 사전 '의방유취'를 편찬케 했다. 이게 얼마나 자료가 많았냐면 성종 8년 때 30부가 편찬되었다.

금속활자도 새로이 만들어 이전 이천에게 명해 불편하던 활자를 개량하여 '경자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하루에 30부씩 찍어 낼수 있는 '갑인자'와 세계 최초의 납 활자인 병진자를 새로이 만들었다.

또한 천문, 역법을 연구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직접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의 세종 12년(1430) 10월 23일 기사를 보면 계몽산이라는 중국의 옛 수학 서적을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정인지가 세종이 산학계몽을 공부하는 자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세종이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에 대한 질의를 받았다고 한다. 정인지가 세종의 특별 과외 선생이었던 셈이다. 정인지의 주요 업무는 역법 등의 계산이였고 이 분야에서 정인지의 역할은 독보적이였기 때문에 수학 실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上, 學 <啓蒙算>, 副提學鄭麟趾入侍待問, 上曰: “算數在人主無所用, 然此亦聖人所制, 予欲知之.”

“임금이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鄭麟趾)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

세종실록 12년(1430) 10월 23일

실제로 당시 34세였던 정인지는 우리 나라 최초의 독자적 역법서 ‘칠정산 내편’에 참여했던 탄탄한 실력의 수학자였다. 정인지는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역법을 개정했으며 새로운 조세 징수 체계인 공법(貢法) 시행을 위해 삼남 지방의 모든 토지를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한 사람이기도 하다.

세종 25년(1443) 11월 17일 기사를 보면 신하들에게도 수학 공부를 시키려고 승정원에게 "산학을 예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집현전에 상고해 보도록 하라"고 명하기도 했으며, 결국 세종 30년 1월 23일 기록을 보면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커리큘럼과 이들의 관리 서용 기준까지 직접 짜서 승정원에 전교한 기록이 있다.

결국, 세종 26년(1444) 이순지에게 명해 정인지 등과 함께 칠정산 내편과 외편이라는 역법서를 편찬시킨다. 이게 《세종실록》 부록에 내편, 외편 두 개 다 실려 있다. 덕분에 《세종실록》 두께는 대단히 두꺼워졌다. 그 오차는 1년에 -1초. 거의 140년 뒤에 나와 현재까지 쓰이는 그레고리력의 오차가 1년에 +26초다. 그레고리력 이전까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 비교해보자. 칠정산이 나올 때 쓰던 양력인 율리우스력은 1년에 11분 14초, 그러니까 674초라는 어마어마한 오차이다. 칠정산의 정확도가 대충 짐작될 것이다. 이 칠정산 내편과 외편의 역법서의 역법[33] 대신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레고리력의 날수가 매우 규칙적이고 일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전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 보편성에 따라 사실상 표준이다 보니 한국도 따라가는 것이다. 그레고리력을 거부하고 독자 달력을 쓰는 에티오피아력(에티오피아)과 페르시아력(이란)같은 경우 날짜 계산 자체가 틀어져서 자국 달력과 그레고리력 달력, 달력을 이렇게 두 개씩 달아놔도 사람들이 헷갈릴 정도다.

3.8. 군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4군 6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마도 정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기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화포를 설비했다가 적이 침입하거든 시기(時機)에 응하여 쏘면 열 사람이 적 1백 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22년(1440) 5월 13일 기사 중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화포의 수를 조사하여 아뢰도록 전지하다

세종 시기의 치적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 하나는 바로 병기 공학에 대한 투자이다. 세종은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 등을 기용하여 화약 무기에 대해 연구하게 했다.

이미 태종 대에 일발 다전법을 시도했지만 기술이 부족해서 이루지 못했는데 이 당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병사들의 훈련을 높여 연사력을 높이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을 때다. 그런데 세종은 독자적으로 기술력을 확보해 일발 다전법을 재위 15년(1433)에 완성했다. 초기 화약 무기의 발사체는 화살 1발이었지만 세종 재위 시절에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한 덕에 재위 27년(1445)에는 이총통, 삼총통, 잘전총통, 사전총통, 사전장총통 등 구경이 8.1 mm~29 mm짜리 소형 화기가 독자적으로 발전되었고 세종이 총통을 직접 시험해 위력을 확인한 후 평가를 내린 뒤에 평안도 일대에 보냈다. 동시에 일발 다전법이 수립되어 발사체가 1개에서 2~12개로 증가했다. 여기서 발사체는 화살(피령목전)이라 철환이 아니다. 초기의 화약 무기들은 강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중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화살대와 화살깃을 이용해 안정적인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가도록 했다. 철환이 본격적으로 탄환으로 이용된 것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화포의 개량과 체계적인 생산 체계가 충분히 이뤄지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다.

세종은 화기 운용 부대를 증편하고 화기 사격술을 개량했다. 재위 23년(1441) 6월에 세종은 사수는 사격만 맡고 다른 사람이 많은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수에게 연속적으로 보급하는 방법을 도입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전투원의 수요를 폭증시켜 세종은 다시 재위 27년(1447) 11월에 총통군을 오 단위로 편성해 사수와 장전수를 분리해 운영하는 사격술 개혁을 실시한다. 즉, 화기 사격수인 총통군은 5명을 1오로 편성해 4명은 사격을 담당, 나머지 1명은 장전만을 전담하게 했다. 오 내에서 화약의 양, 발사체, 격목의 크기를 착각하지 않도록 병과별로 선정하고 사수는 총통 외에 궁시와 도검을 들고 다니게 함으로써 전투력을 극대화시켰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재위 30년(1448)에 <총통등록>을 저술해 화약 무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준화 및 규격화했으며 매화법 등 지뢰를 매설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했다. 매화법은 지뢰를 매설한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일반적인 매설 지뢰와는 다른 클레이모어와 유사하다. 그 중에는 화학 물질을 이용해 생화학 공격을 하는 방법도 있다.

이 때 개발된 화기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화살을 대신하여 철환을 발사했고 세종이 개척한 일발 다전법은 <신기비결>이 저술된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다음과 같이 사격할 것을 권장한다. 포신 안쪽부터 화약 - 종이 - 격목 -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포탄의 구조로 대략 입구까지 꽉꽉 채우고 발사한다. 대체적으로 세종 집권 시기의 화약 무기를 문종화차로 압축하는 경향이 있으나 세종이 이뤄낸 진정한 화약 무기의 의의는 세계 최초로 화약 무기의 규격화 및 일반화시켰으며 사격술과 부대 편성에 있어서 화약을 운영하는 부대를 수립하고 그 부대의 운용 방법을 법제화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포병이라는 새로운 병종을 탄생시킨 것이다. 다만 이런 중세 화약 무기들은 근현대처럼 화학 대량 제조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화약이 매우 비싼 상태에서 많은 화약을 요구했고 때문에 야인들과의 실전에서 화력 덕후의 기상을 보여주기 어려웠다는 단점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화력전을 표방하기 시작한 사례는 임진왜란. 그 외에도 유황이나 초석은 조선에서 생산이 거의 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하는 등의 문제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비중있게 쓰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막강한 과학의 힘은 매우 잘 구현되어 현대에도 남아있다.

거기에 더해 군대 및 부대에 대한 선구안도 상당했던 것이 즉위 15년에 조선의 특수부대 및 부서인 체탐인을 신설했는데 이들이 하는 업무는 조선과 명을 오가며 여진족의 동태를 파악하거나 국방에 위해가 되는 요소를 조사 및 처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이였으며 현대로 치면 미국의 CIA,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 혹은 HID의 업무를 하는 부대를 만든 것이다. 이 덕분에 여진족의 침략 등을 막아낼 수 있었고 그만큼 세종의 군사부대에 대한 선구안이 얼마나 뛰어난 지를 보여준다.성종 때 이후로도 체탐인이 사라진 적은 없다.

"임금의 도리는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고, 장수의 충성은 적개심(敵愾心)이 귀하다. 무지한 이 야인이 시랑(豺狼) 같은 마음으로 벌같이 쏘는 독기(毒氣)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 국경을 침략하고, 우리 백성의 생명을 살해하여, 고아(孤兒)와 과부(寡婦)가 원한을 일으켜서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니, 이것은 과인이 불쌍하고 슬퍼함을 마지 않는 소이이며, 또한 경들이 가슴을 치고 이를 가는 바이다. 군사를 일으켜서 그 죄를 성명(聲明)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경에게 아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기를 명하노니, 모두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주장(主將)의 방략(方略)을 듣고 적을 쳐서, 꺾는 공을 이룩하여 변경 백성들의 소망에 보답하게 하라."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1433) 3월 22일 을해 2번째기사 집현전 부제학 이선을 보내어 북정의 장졸에게 교서를 반포하다.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해야 했다. 당시 명나라의 요동 지역은 몽골족에게 위협을 받았다. 세종 5년(1423) 요동 방면으로 이주했던 오도리의 수장 동맹가첩목아는 몽골족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명나라와 조선의 허락을 받아 무리를 거느리고 옛 거주지인 두만강 유역의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회령(會寧)) 지역으로 돌아왔다. 세종 6년(1424)에는 이만주(李滿住)가 이끄는 1천 호가 달단에 쫓겨 압록강 중류의 파저강(婆猪江)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조선은 두 집단 중에 명나라와 더욱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이만주가 이끄는 집단을 이주 초기부터 경계하여 입조·교역 등의 접촉을 제한했으며 따라서 양측의 관계는 순탄치 않게 전개되었다. 조선은 여진족이 부리던 노비가 도망해 오면 조선인은 원래 거주지로 보내고 중국인은 요동으로 송환했는데 이것이 여진족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세종 14년(1432) 12월, 여진족 수백 여 명이 여연(閭延) 경내에 쳐들어 와서 사람과 물건을 약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이만주는 홀라온(忽剌溫) 올적합(兀狄哈)이 조선인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던 것을 자신이 빼앗아 보호하고 있다고 조선에 알려 왔다. 그러나 세종은 여연 습격에 이만주가 관련되었다고 확신하고 이만주 세력에 대한 정벌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월 19일에는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최윤덕(崔潤德)을 보내어 사전 조치를 강구하도록 했다. 조정에서는 파저강 야인을 정벌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정벌을 감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세종은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정벌을 단행토록 했다. 최윤덕이 이끄는 원정군 1만 5천 명은 4월 10일 강계에 모여 부대를 7로로 나누었다.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이순몽(李順蒙)에게 2515명,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 최해산(崔海山)에게 2070명,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 이각(李恪)에게 1770명,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징석(李澄石)에게 3010명, 김효성(金孝誠)에게 1888명, 홍사석(洪師錫)에게 1110명을 맡기고 최윤덕이 스스로 2599명을 통솔하여 7개 단위로 편제를 마쳤다. 부대는 4월 19일 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여진인 267명을 죽이고 238명을 생포했으며 우마 177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귀국했다. 기습을 당한 파저강 여진족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만주의 처도 사망했고 이만주 자신도 부상을 입고 도주하는 처지에 놓였다. 반면 조선군은 4명 전사, 25명 부상에 그쳤다. 이것이 제1차 파저강 야인 정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방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원정군의 철수 후 이만주는 다시금 세력을 회복했으며 조선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수 차례 수백~수천 명을 동원하여 조선의 국경을 침범했다. 한편 제1차 파저강 정벌이 이루어진 세종 15년(1433) 10월 두만강 하류의 여진족 추장 양목답올(楊木答兀)이 건주좌위(建州左衛)의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자 건주좌위의 잔여 세력은 올적합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이만주가 있는 파저강 지역으로 이동하여 합세하려는 기색이 보였다. 조선은 이에 긴장했는데 세종 19년(1437) 5월 올량합(兀良哈) 기병 3백여 기가 다시 조명간구자를 습격해오고 비슷한 시기에 건주좌위에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전하기 위해 이만주가 두만강 하류까지 직접 내려오자 세종은 김종서의 건의를 바탕으로 이만주를 토벌하자고 제의했다. 신료들이 명나라와의 관계 및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대어 정벌에 반대했으나 세종은 조정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측근 신료들과의 의논을 바탕으로 평안도도절제사 이천(李蕆) 등과 함께 가을을 목표로 실질적인 정벌 준비를 개시했다. 제2차 파저강 정벌은 9월 7일 개시했는데 정벌군 총 8천여 명은 3로로 나뉘었다. 도절제사 이천은 여연절제사 홍사석(洪師錫)과 강계절제사 이진(李震)과 더불어 4772명을 거느리고 옹촌(甕村)·오자점(吾自岾)·오미부(吾彌府) 등지를 향해 강계에서 강을 건넜다. 상호군 이화(李樺)는 좌군 1818명을 거느리고 올라산(兀剌山) 남쪽 홍타리(紅拖里)로, 대호군 정덕성(鄭德成)은 우군 1203명을 거느리고 올라산 남쪽 아한(阿閒)으로 향하여 모두 이산(理山)에서 강을 건넜다. 정벌군은 이렇게 세 갈래로 나뉘어 여진족의 본거지를 습격하고 불태운 뒤 16일에 돌아왔다. 조선군은 적군 6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동안 단 1명만이 전사했다.

제2차 파저강 정벌은 여진족의 근거지에 타격을 주는 데는 성공했으나 제1차 파저강 정벌보다 전과도 적었고 이만주 제거에도 실패했다. 이는 파저강 야인들이 정벌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정벌의 성과에 대한 평가 및 이천을 비롯한 정벌군 장병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둘러싸고 세종과 신하들 간에 논란이 있었으나 세종은 적을 징계하는데 성공한 것이라고 단정함으로써 논란을 봉합했다. 2차례에 걸친 파저강 정벌을 통해 조선은 압록강 건너의 여진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이용하여 압록강 중류에 4군을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건주본위의 지휘자 이만주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불만족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이만주 제거라는 목표는 결국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


4. 과로[편집]


세종은 일 중독이 심하여 하루에 5시간 수면을 제외하고는 재위기간 내내 업무를 쉬지 않았다. 애초에 지나치게 강한 학구열과 과로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시력이 많이 좋지 않았으며, 결정적인 타격은 자치통감훈의 편찬이었다. 세종은 이 작업에 굉장한 열의를 보이며 임했는데, 자치통감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의 양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그런 책의 해설서를 만드는 작업이 작은 일일 리가 없다. 게다가 완벽주의자 세종은 사소한 문제점도 내버려두지 않아 결국 거의 모든 업무를 본인의 관할 아래 추진했다. 그 때문에 책 편집과 세종 자신의 시력을 맞바꾸었고, 말년에는 시력이 매우 나빠져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자치통감훈은 세종이 죽고 문종 2년(1452)이 되어서야 겨우 완성된다.

세종실록에도 언급되었듯이 세종대왕이 소갈증(당뇨병)을 앓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합병증 중 하나인 당뇨성 망막증 등이 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세종이 야채보다는 고기를 매우 좋아했던 식성 때문이다.

결국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세자에게 섭정을 하게 했으며, 실제로 세종대왕 말년의 업적 대부분은 문종의 손으로 이루었다. 그래서 신병주 교수는 조선의 황금 시대를 세종과 문종이 함께 만들었다고 본다. 세종대왕이 죽은 원인도 과로인 듯하다. 할 수 있는 한 자신이 할 일은 모두 자기가 다 했기 때문. 심지어 죽음을 맞기 3일 전까지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직접 정무를 보았는데 이때 "몸져누운 동안 밀린 정무를 물 흐르듯 한치 오차도 없이 깨끗이 처리하고 다시 병석에 누웠다."라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다. 괜히 과로사한 것이 아니다. 《세종실록》해당 부분

이 정도라면 능히 성군이란 소리를 들을 만하다. 그 즈음 문종이 종기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기도 했다. 《세종실록》기사

왕이 이런데 신하들이라고 멀쩡할 리는 없다. 오죽하면 세종대왕 좌우명이 "신하들이 고달파야 백성들이 편하다." 라고 하겠는가. 말 그대로 휘하 신하들을 미친 듯이 굴렸다.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아버지 같은 나랏님이고 하늘이 내린 임금이었지만, 신하들에게는 악덕 상사도 이런 악덕 상사가 없었다. 물론 신하들은 좀 쉬고 싶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만인지상이자 한 나라의 지존인 상사가 앞장서서 날밤 새워가며 일하고 있는데 쉬고 싶어도 눈치 보여서 쉴 수도 없었을 것이고, 언변으로도 신하들 위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반박도 못하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황희, 조말생만 봐도 죄를 짓고 파직되어도 다시 불러들이고 황희는 모친 삼년상 치른다고 낸 사직서는 죄다 반송 처리. 아예 3년상을 치르는 중에 고기를 보내서 3년상 중에 고기를 안 먹는다는 법도를 어기게 했다고 하니.[34] 노년이 되어 치매가 온 것 같다, 귀가 안들리는 것 같다 등 온갖 사유를 들어 퇴직 요청을 해도 불허했다. 아예 재택 근무 하라고 하고, 짚고 다닐 지팡이에 출퇴근용 가마까지 하사하며 사직을 막았다. 황희가 사직한 건 세종대왕이 세상을 뜨기 넉 달 전이었다. 그나마 황희는 3년간 일에서 해방되어 살다가 90살에 죽기라도 했지, 조말생은 업무 중에 과로사했다. 이로 인해 세종이 신하를 극심하게 부려 먹는다는 오해를 받지만, 애초에 조선에선 이러한 일들이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면 조선 정치는 노환으로 판단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신하는 그 소임으로서 일생을 국가에 바치는 것이 정치문화였다.그 말인 즉슨 다른 신하들도 큰 과가 없는 이상 죽을때까지 굴려졌다는 것이다 다만 황희와 조말생처럼 특정 관직(영의정, 병조판서)에 오래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맞다. 조선은 관직 회전율이 극히 높아서 정승, 판서는 돌아가면서 역임하기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정승, 판서 평균 재임기간은 원래 1년보다 좀 적거나 약간 긴 정도였다.


5. 기타[편집]


현재 세종대왕의 어필로 전해지는 글씨인 '가전충효 세수인경'. 세종이 친히 전의 이씨 이정간에게 하사한 가훈이라고 한다. '가정에서는 충효의 법도를 전승하고 사회에서는 인자하고 공경하는 기풍을 지키도록 하라'는 뜻이다. 다른 어필로는 2005년 10월 9일 서지학자인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공개한 '세종대왕 어사 희우정 효령대군 방문(世宗大王御賜喜雨亭孝寧大君訪問)'이란 제목의 친필 고문서첩이 있다. 세종 7년(1425) 4월 가뭄이 극심해 기우제를 지낸뒤 형 효령대군이 있던 합강정을 방문했을 때 쓴 글이라고.

독서토론, 공부는 광적으로 좋아한 임금이었지만, 의외로 짓기나 서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35] 그래서인지 조선 왕들의 어필이 많이 남아 있지만 세종대왕의 어필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세종실록》에서도 '예기(藝技)에 정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원래 왕자들은 동물을 키우는 것이나 화초 가꾸기, 바둑과 같은 잡기에 흥미를 갖도록 교육받기 마련이었는데도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는 게 신기하다. 《세종실록》 곳곳에는 '사슴이나 화초 기르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난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라고 언급하거나, '두시(당나라 두보의 시)와 같은 것은 풍월을 읊조리는 것이니 유자의 정식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러 기록으로 보면 이런 '잡기'들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는 있었으나 취미로 삼지는 않았던 듯하다.

덧붙여 뛰어난 추리력을 자랑했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 맹사성이 관리 여럿과 짜고 황희의 사위가 저지른 살인 사건을 은폐,[36] 조작한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조작되어 올라온 상주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사건 정황에 의심을 느끼고 의금부에 명하여 진상을 규명해냈다.[37][38] 결국 황희, 맹사성은 파직. 감사, 5현의 현감, 수사관원, 형조판서는 경중에 따라 처벌받았다. 당사자인 서달은 사형당할 뻔 했지만 형조판서의 아들이 서달 하나 뿐이라 낮은 등급으로 처벌당했다.

돌로 서로 때려죽이며 인력을 낭비하는 석전이 야만스럽게 보였던 건지 석전을 금지했다. 하지만 뒤에서는 왕명을 어기고 몰래 했던 건지 이후로도 석전의 명맥은 끊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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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현종도 당대에 요순에 비유했음이 현화사비에 기록되었다.[2] 다만 이는 세종 단독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이 기획하고 주도했다.[3] 공법은 기존의 조세 징수 체계인 답험 손실법의 폐단을 막기 위해 새로이 시행한 조세법으로, 공법 시행으로 탐관오리의 횡포를 막고 더욱 예측가능한 조세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로서 국가가 세금으로 징수한 미곡의 양은 훨씬 늘은 반면 백성들의 세부담은 한결 가벼워지게 되었다. 이때, 공법에 대해 일찍부터 세종과 그 뜻을 함께했던 정인지는 공법 시행 논의를 부활 시키고 실제 실무책임자가 되어 삼남 지방의 토지 등급을 정하는 등 공법 시행에 실무적 일익을 담당했다. 공법과 관련한 더욱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기사를 참조하라.[4] 다르게 표현한다면 그 국가의 전성기를 이끈 임금에게 주는 묘호다. 보통 어떤 국가의 전성기라면 으레 영토의 확장도 따라오는게 일반적이기에 특별히 이상할 건 아니다.[5] 태종은 세종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종의 외척을 처내어 감히 누구도 세종의 왕권에 도전하지 못하게 했다.[6] 무조건은 아니고 추정의 영역이다. 조선 중기는 왜란, 호란에 경신대기근 등까지 겹치면서 실제로 생산량이 대폭 떨어졌을거라고 추론이 가능하다.[7] 세종 이후 이런 식으로 경연을 한 조선 임금은 정조. 그래서 농담삼아 조선의 왕들 가운데 이과 1등은 세종, 문과 1등은 정조라고.[8] 실제로 법령을 만들기 전에 백성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한 경우가 있다.[9] 다른 이야기로는 내관이 신숙주가 공부 중이라고 얘기하자 세종이 "그럼 지켜보다가 그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를 알아보고 오라."고 한 뒤 자신도 글을 읽고 있다가 닭이 두 홰를 운 뒤 내관이 들어와 지금에야 잠이 들었다고 하자 자신의 곤룡포를 내관에게 건내주며 "이것을 가져다가 신숙주에게 덮어주라."고 했다는 것도 있다.[10] 병풍 뒤에 숨겨져 있었단 이야기도 있다.[11] 11세기 북송구양수소식 사이에 오갔던 편지를 묶은 책[12] 이외에도 실록 통합 검색으로 '양민'과 '천인'을 같이 검색하여 세종실록과 태종실록 등으로 다 참고할 수 있다.[13] 공비나 사비였던 여성이 양민 남성 명의를 끌어다가 호적상 남편으로 삼고, 실질적으로 조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증언만으로 자식을 양인으로 올려달라는 경우가 있었다.[14] 실제로 자자형을 당하면 평생 간다. 대놓고 남들에게 "나 전과자임" 이라고 하는것과 같았다.[15] 1443년 7월 12일[16] '영묘조(英廟朝)'란 세종의 능호인 '영릉(英陵)'에서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선대 왕 치세를 가리키는 말로 이런 식의 표현을 쓰기도 했다. 대충 번역하면 '어느어느 릉에 묻히신 선대왕의 치세' 정도의 뜻. 가령 세조 시대는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에서 따 '광묘조(光廟朝)'라고 불렀다. 다만 이는 세종과 세조의 묘호의 시자(諡字)가 세(世)로 겹쳐,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폭넓게 사용된 면이 크다. 보통 -묘조(-廟祖)로 지칭하는건 묘호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예)선조→선묘조. 이 경우엔 '무슨무슨 묘호를 받으신 선대왕의 치세' 정도의 뜻이다.[17] 편경을 만드는 옥[18] 근데 양녕 본인은 그 기술을 배워서 뒹굴거리는 데 쏠쏠하게 써먹는 바람에 세자 자리를 세종에게 뺏겼으니 어찌 보면 아이러니이다.[19] 명나라에서 조선이 새 문자를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즉시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명나라는 정통제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정통제는 능력은 별로면서 폼은 증조할아버지인 영락제 못지않게 부렸던 황제였다. 정통제는 가오를 살리기 위해 오이라트에 쳐들어갔다가 토목의 변으로 역으로 참패, 황제 본인이 오이라트로 끌려가서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매우 춥고 물도 없는 서역 오이라트에서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정통제 본인의 황제 놀이(...)를 반성하고 탈문의 변으로 간신히 명나라 황제에 복위하고 나서 본인의 정통제 시절을 부끄러워하며 '천순제'로 연호를 갈아치웠다. 이후 천순제(정통제)는 순장제를 폐지하고 전횡을 부리던 간신이나 환관을 숙청하고 부정부패를 줄이는 등 여러가지 업적을 이뤘지만, 이는 조선 세종 사후의 일이다. 천순제(정통제) 본인부터가 복위 이후에 "오이라트에 끌려가 있어 보니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 지 보이더라"고 했다. 그만큼 반성을 많이 했던 듯.[20] 흔히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이 상소는 사실 훈민정음의 '반포'를 반대한 것이다. 상소를 올렸다가 욕 먹은 때가 1444년 2월이고, 훈민정음을 완성한 때가 1443년 12월이었다.[21] 서구권에서도 귀족이 출신 성분의 차이를 들먹이면서 백성을 무시하는 근거로 잘못 쓰이기도 했다.[22] 평범하고 속되어 이렇다할 특징이 없다.[23] 사극에서도 정창손을 꾸짖는 장면이 재현되는데, 대왕 세종에서 정창손이 삼강행실도의 편찬, 보급을 반대하며 백성이 강상의 도리를 지금까지 배우지 못해서 패역한 짓거리를 한 것이 아니라며 타고난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자 차분히 반대 토론을 진행하던 세종이 분노하며 벌떡 일어나면서 曰 "감히 네 놈이 과인의 백성을 능멸하고 나와! 사람의 천성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면 네 놈이 정치를 왜 해! 단지 백성 위에서 군림하며 권세를 누리기 위해선가!"라 일갈한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소재로 한 픽션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서 "사람의 천성은 타고나서 바뀌지 않는 것인데 글자까지 새로 만들어가며 백성들을 교육시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론에 대해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대왕은 "네놈이 (그러고도) 선비냐?"며 매우 강하게 비난한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는 정창손이 등장하지 않아서 역사와는 달리 이순지정창손의 발언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24] 조선보다 약 6세기 먼저 고유문자인 '가나' 를 만든 일본조차도 한자를 '마나' 라 부르며 한자가 진짜 문자이고, 가나는 부인이나 천민들이나 쓰는 문자라는 인식이 강했고, 외교문서나 기타 공식적 문서에서는 반드시 한자를 썼다. 대륙과 바다로 떨어져 있는 일본에서조차도 한자를 쓰며 중국의 눈치를 봤는데, 직접 붙어있는 조선에서 느끼는 외교적 부담감은 말할 것도 없었다.[25] 당시 세종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맡겨야만 했고 눈은 거의 멀어있던 상태였다.[26] 사극의 영향으로 세종이 마치 성인군자 내지 철인처럼 여겨지는 인식과 달리, 세종은 정치 방식에 있어 온건한 게 강경한 것보다 나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온건했던 것 뿐, 실제 정치감각만큼은 태종에게 밀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일례로 세종은 태종의 처가 공세에 찬동했고, 자기 입으로 상왕과 자신 사이에 있는 간적들을 처단하라 명하기도 했다. 북방정벌 때는 장수들의 밥그릇 싸움을 역이용해 전략을 도출하기도 했으며, 심온 사건(자신이 찬동했음에도 불구하고)을 의도적으로 공론화시키지 않음으로서 정치적 최종 방어선을 확보하고 신하들의 목줄을 움켜쥐었다.[27] 문명 5의 세종대왕 설명문에서도 집현전 개발설을 채택했을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이긴 하다.[28] 사실 집현전 개발설이 맞다고 해도, 세종대왕의 업적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고 위대함도 전혀 퇴색되지는 않는다. 왕 본인이 직접 새로운 글자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명령했으며, 이를 적절한 인재들에게 맡긴 결과, 뛰어나고 완성도 높은 결과가 나온 셈이 되니 말이다. 정복군주명장들을 시켜 정복활동을 한 것처럼. 왕이 알맞는 신하들에게 일을 맡겨 성과가 나오면 왕의 업적으로 인정받는 것과 같은 이유다. 사실 왕이란 존재는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일에 알맞는 인재를 투입시키는 사람이다. 아마 세상에 집현전 개발설이 더 많이 알려진 이유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29] 이로 인해 조선시대, 특히 구한말 사람들 중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영어를 꽤 잘했다는 풍문이 있었다.# 저걸 보고 몇몇 사람들은 한국 영어교육에 있어 조선시대 교수법을 채택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30] 다만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달리 중앙 집권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어차피 신라에 합병되었기에 따로 논할 필요는 없었던 듯하다.[31] 그러나 역사귀속의식이나 선조인식과 무관하게 당시 조선이 따르고 있던 법제는 신라에서 이어져 왔다는 허조의 의견이 일견 합당하다. 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식 법제와 관등을 거부했으며, 백제는 중국보다는 고구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조선 문물 전반이 따르는 예는 근본적으로 당나라의 것이 한국에 들어와 로컬라이징된 것이기 때문에 당나라와 가장 많은 교류를 했던 통일신라 체제에서 이어진 것이다.[32] 공자춘추를 저술한 이래 그 서술방식을 좇아 사서를 저술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이를 '춘추필법'이라고 했는데, 각 문자 하나마다 대상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담는 엄격함은 곧 위정자에게 도덕적 고결함을 요구하고 책임지우는 데에 기여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평가가 당대의 사실적 기술을 저해하는 문제도 있었다. 따라서 근대까지의 역사저술에서 사실적 기술과 도덕적 기술 사이에서의 논쟁은 꾸준히 있었던 바, 고려사 편찬자들은 춘추필법을 따르고, 세종대왕은 사실적 기술을 중시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33] 기본적으로 칠정산도 태양력이다. 우리가 음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 태음태양력, 태양력을 기반으로 의 움직임을 계산한 역법이다. 칠정산은 음력의 영향력이 많이 줄여놓고 일중행차(즉 태양의 하루 움직임)에 기반한 태양력 위주로 계산돼 있다.[34] 당장 세종 본인도 이걸 안 지켰긴 하지만, 이는 태종의 유언을 따른 것이라 참작되었다.라기엔 황희는 고기 먹고 건강을 되찾는게 어명이라 고기를 안 먹기도 난감했다[35] 조선 초기 대표 명필은 아들인 문종과 안평대군이다.[36] 경위가 어땠느냐면 황희의 사위이자 형조판서의 아들인 서달이 어머니를 모시고 가고 있었는데 한 아전이 자기에게 인사도 안올리고 갔다며 그 아전을 두들겨 팼다. 그러다가 동료 아전인 표운평이 "언놈이 아전을 패느냐?"라고 했는데 그 때문에 표운평도 얻어맞았다. 문제는 이 표운평이 다음 날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그의 아내가 고소했고 정황은 금세 드러났다. 그러나 황희는 동료 정승이자 친구이기도 한 맹사성을 찾아가서(왜냐면 그 일이 일어난 곳이 맹사성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도와달라고 하자 맹사성이 피해자 가족을 불러다가 설득하고 고을 현감에게 조용히 처리해달라고 했는데 피해자 가족들은 표운평의 아내를 어르고 달래고 했고 고을 현감도 서달을 무죄로 하는 기록을 만들었다.[37] 조선 최고의 지성 둘이 모여서 만들어낸 사건에, 그들이 직접 썼든 검수를 했든 명백히 손을 거쳤을 보고서를 단 하나 읽고 미심쩍어 수사를 명한 것이다. 이 정도면 인간이 아니다(...).[38] 후대의 같은 성군이었던 강희제, 옹정제도 비슷한 추리력을 보인 기록이 있다. 특히 옹정제는 가히 빅 브라더급으로 밤늦게 마작한 신하가 마작한거 다 알고 그가 잃어버린 마작패 하나를 몰래 입수해 그 신하에게 던져주질 않나 한 신하에게는 출근하는 부서가 잘 돌아가냐고 대답에 잘 돌아간다는 대답을 받자 조금 뒤 거기 현판도 잘 걸려 있냐고 묻자 역시 잘 걸려 있다고 대답했는데...그 신하에게 그 관청의 현판을 집어던졌다. 신하가 진짜 말을 잘 한건지 확인하기 위해 밤늦게 몰래 사람을 시켜 현판을 떼어낸 건데 그것도 모르던 신하는 대충 예 예 거리다가 된서리 맞은 것. 결국 현판은 한 동안 그 관청에 돌아가지 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