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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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력과 초기
2. 역성혁명의 행동대장
2.2. 부친과 당여들의 목숨을 구하다
2.4. 국조의 눈 밖에 난 왕자
3. 피도 눈물도 없이, 용상을 향하여
3.3. 세자에 책봉되다
4. 왕조의 기틀을 다지다
4.1. 사병 혁파
4.2. 관제 정비
4.3. 경제 정책
4.4. 외척 말살
4.4.1. 신덕왕후 강씨 격하
4.4.3. 광산 김씨 숙청
4.5. 공신 숙청
4.6. 인재 등용
4.7. 지방 행정
4.8. 대명 외교
4.9. 여진 정벌
5. 퇴위와 상왕
5.1.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
5.2. 최후


1. 내력과 초기[편집]


이방원1367년 6월 13일 고려국 금오위상장군 겸 동북면상만호 이성계의 향처 한씨의 5남으로 태어났으며 실질적으로 가문의 막내였다.[1] 16살이던 1382년, 민제차녀이자 두살 연상이던 민씨와 혼인. 이듬해 과거에 응시하여 병과 7등[2]의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우수한 성적이냐면 전국의 과거 응시자들 중 전국 10위의 성적이다. 그것도 불과 17세의 나이로, 고1이 고등고시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격.

과거에서 김한로(金漢老) 등을 급제시켰는데 우리 태종(太宗)께서 병과(丙科)에서 7등으로 뽑히셨다.[3]

고려사』 권135, 열전48 우왕9(1383년) 4월

조선 건국 이후의 행적들을 보면 과감하고 패기가 넘치기에 흔히 야성적, 무인적인 인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면 본질은 엘리트에 가까웠던 셈이다.[4] 훗날 이방원이 명나라에 입조(入朝)하러 갈 때 이성계가 이방원을 걱정하며 한 말도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한데 만 리[5]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다.[6] 한창 젊을 나이인 20대 때 이야기가 이 정도라는걸 근거로 이방원이 허약한 체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연산군이 왕좌에 올랐을 때 <조선왕조실록>에 '태조 이후로 역대 왕들은 다들 태조처럼 덩치가 우람했는데 연산군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빈약한 체형의 왕이 나왔다.'라는 기록이 있기에 이방원도 뛰어난 학식을 바탕으로 엘리트 문인으로 진로를 잡았을 뿐, 타고난 체격 자체는 아버지와 형제들처럼 우람했을 듯하다. 그런 연산군도 성격은 무인 기질이 있고, 말을 잘타서 무려 말 위에서 '처용무'를 출 정도였다고 하니 어찌보면 집안내력. 태종이 사냥과 군사 훈련을 즐기는 기록이 조선 왕들 중에 굉장히 많기에 인간흉기이자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아버지 이성계 기준에서 허약해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는 건장한 체격에 가까웠을 것이다.

또한 위의 이성계의 발언은 당시 조선명나라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방원도 반쯤은 목숨을 걸고[7] 그것도 자원해서 명나라에 갔기에[8]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마음이 섞여 나온 말에 가깝다. 정몽주 암살이나 여러 행동으로 인해 아무리 미운 털이 박혔다고 한들 자식이니 애틋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강씨의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막내였던 데다가 과거 급제를 통해 가문을 드높인 자식이니 원래는 상당히 총애받는 아들이기도 했다. 태조가 한 네가 몸이 허약한데 먼 길을 떠나니 걱정된다는 투의 말도 정말로 몸이 허약해서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당시 상황과 태조의 온갖 감정이 다 섞여서 나온 말일 가능성이 높다.

태종은 조선 국왕 중 유일무이하게 '친정(親政)'을 한 왕이며 중증 사냥 덕후라서 기분 전환을 위해 잔머리를 굴려 사냥을 나가려다 신하들이 말린 기록이 여럿 있다. 만약 태종 본인이 정말 파리한 체격에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학문 연구를 일삼는 것만 좋아하는 성향이었다면 사냥을 그처럼 자주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종은 한국사 전체를 통해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왕이다. 한국사를 통틀어 국왕이 등장한 이래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왕은 태종이 유일무이하다. 사실 한국사에 등장했던 국왕들 중에는 1차 과거시험에도 떨어질 만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국왕은 혁명이나 쿠데타를 통해 또는 세습에 의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과거시험을 볼 기회 자체가 없기도 했지만, 만약 과거시험을 보았더라도 합격할 만한 왕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태종은 정식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당당하게 합격한 유일무이한 왕이었던 것이다.

태종이 과거시험을 준비할 때 공부한 것은 주자학이었다. 태종은 주자학으로 과거에 합격했기에 주자학에 일가견이 있었고, 나아가 정신적으로 도참과 불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왕을 위한 변명』 | (공)저: 신명호


이방원은 조선의 국왕 가운데 유일하게 과거(오늘날 행정고시) 급제와 관직 근무 경력 둘 다 가진 임금이다.[9] 이방원의 과거 급제를 알리는 관교를 받았을 때 아버지 이성계는 너무 기뻐서 사람을 시켜 관교를 몇번씩 읽게 했고 궁궐을 향해 절을 했다고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로 귀부한 이래 최초이자 기록상 역대 최연소 합격자였다. '변방의 신흥 무인 가문'에서[10] 나온 최연소 과거 합격자 아들에 대한 이성계의 상당한 기쁨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집안에 무신정권 초기 당시 문신들의 대표격 인물이던 문극겸[11] 피가 섞였으니 기본적으로 머리는 있는 집안일테지만 이방원은 이자춘 대에 고려로 귀부한 이후 최초로 배출한 과거 합격자인데다 고려시대의 과거는 그 악명높은 조선 후기의 과거보다 진입 장벽이 훨씬 높아서 준비 단계부터 수도 개경의 중앙 귀족의 자제들이나 볼만한 수준이었던걸 감안하면[12] 이성계가 그렇게 기뻐한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13] 이방원의 형들인 이방우나 이방과 등도 관직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음서를 통해 진출한 것이기에 이방원의 과거 합격 그것도 최연소 과거 합격과 비교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과거 합격 후 이방원은 개경에서 지낼 때 문신으로서 주로 인사 교류를 통해 이성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14]


2. 역성혁명의 행동대장[편집]



2.1. 위화도 회군을 돕다[편집]


1388년, 22세의 젊디 젊은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일으킨 위화도 회군 당시 전리정랑(典理正郞)[15] 직위를 맡아 개경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방원은 아버지를 지원하러 간 형님들 대신 아직 개경에 있는 어머와 동생들을 구조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들을 무사히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사태가 수습되자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방원이 이 임무에 실패했다면 정변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경처 강씨는 물론 방번, 방석까지 분노한 최영에게 발견되어 잡혀서 죽었을 것이다.[16][17]


2.2. 부친과 당여들의 목숨을 구하다[편집]


이후 창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돼서 이색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한 제안을 이성계가 받아들임으로써 서장관 자격으로 이색과 이숭인을 따라 명나라로 가거나, 공양왕 2년에는 우부대언이 되었는데 다음 해인 공양왕 3년에 대간이 우현보의 유배를 요청한 것에 반발한 공양왕과 이런 그의 태도에 사직을 청한 이성계 사이에서 그들의 의사를 전달한다든지, 이성계가 강씨와 더불어 공양왕을 위해 연 연회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두 사람을 피신시키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1392년(공양왕 4년) 3월에 친어머니의 삼년상(1391년 사망)을 치르고 있었는데[18], 아버지 이성계가 공양왕의 세자인 왕석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한 뒤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중상을 입고 벽란도에서 머무는 일이 발생했다. 하필 그 때가 이방원의 친모인 향처 한씨의 3년상 중인 관계로 이방원을 포함한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도 죄다 발이 묶여있었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반(反) 이성계 세력(온건파 신진사대부)은 이성계가 낙마로 중상을 입어 잠시 무력화된 틈을 타 고려 왕실의 위협이던 이성계 일파들을 숙청하고 종국에는 이성계도 최종적으로 암살하려 하였다. 이 때 정몽주는 공양왕의 암묵적인 지원 하에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이성계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모두 귀양 보냈다. 이렇게 이성계 일파가 모조리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이 이제를 통해서 이 위기 소식을 듣고는, 곧장 삼년상을 접고 벽란도로 달려가 이방원은 큰 부상을 입은 이성계를 개경에 직접 데려오고 군사를 일으켜 전세를 다시 이성계 쪽으로 역전시킴으로써 이성계파를 몰락 위기에서 구했다고 태조실록에서는 전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이성계가 살면서 가장 큰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형제들 중 홀로 나서서 아버지를 지켜낸 셈이다.


2.3. 고려의 마지막 숨통을 끊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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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포은 정몽주
비록 이성계의 개경 귀환으로 이성계 일파 숙청에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여전히 정몽주 일파는 성현의 관리들을 시켜서 정도전, 조준의 사형을 주청했고, 공양왕도 이성계가 두려워 대놓고 승인을 못할 뿐 사실상 정몽주에게 동조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직접 제거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돌아가서 어머니 3년상이나 마치라고 강하게 핀잔을 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방원은 형 이방과, 숙부 이화, 매제 이제, 의숙부 이지란 등을 모아서 정몽주 제거를 주장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성계의 반대 때문에 이지란처럼 정몽주 제거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도 나왔지만, 이방원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며 정몽주 살해 계획을 단독으로 강행하였고, 직후 조영규, 고여, 이부, 조영무에게 지시를 내리고 도평의사사를 살해 장소로 계획하는 등 살해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해나간다.

한편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서 자신의 살해 계획을 듣게 되는데 이에 정몽주는 1392년 음력 4월 4일 이성계의 집에 문병을 오게되고 이성계에게 환대를 받았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화가 이성계의 환대에 정몽주 살해를 주저하자 이방원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살해를 강행했고, 처음에는 정몽주가 사는 동리 입구에서 살해할 계획을 잡고 근처의 이방과의 집에서 무기를 준비한다. 정몽주가 유원(柳源)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늦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선죽교에서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런 냉혹한 정치적 결단을 내렸을 당시 이방원의 나이는 겨우 만 24세였다.

다음은 실록에 기록된 당시 내용이다.

정몽주가 성헌을 사주하여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 정도전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와 아우 , 사위인 이제와 휘하의 황희석, 조규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 대간은 조준이 전하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시켰다고 논핵하니,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하여,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전하께서 몽주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상왕과 이화, 이제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 등을 국문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면서, 우리 전하에게

"속히 여막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를 마치게 하라."

고 명하였다. 전하가 남아서 병환을 시중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하는 수 없이 나와서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에 이르러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급히 나가서 보니, 광흥창사 정탁이었다. 정탁이 극언하기를,

"백성의 이해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을 일으킴이 저와 같은데 공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와 장상이 어찌 혈통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간절히 말하였다. 전하가 즉시 태조의 사제로 돌아와서 상왕과 이화, 이제와 의논하여 이두란으로 하여금 몽주를 치려고 하니, 두란은 말하기를,

"우리 공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매, 전하는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중략) 영규, 조영무, 고여, 이부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하고는, 이에 노상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의 저택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 유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 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영무가 돌아와서 전하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전하가 들어가서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전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렇게 하니, 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매, 전하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公)은 항상 대장군으로서 자처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19]

전하는,

"마땅히 휘하의 인사를 모아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되겠다."

하면서, 즉시 장사길 등을 불러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빙 둘러싸고 지키게 하였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31번째기사,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 일설에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회유하면서 둘이 만나 술자리를 가졌고, 이 자리에서 이방원이 하여가를 불렀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지만 당대에 기록된 태조실록이나 고려사에는 둘이 따로 만났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애초에 정몽주는 살해당하던 날 이방원이 아닌 이성계를 만나러 온 것이었으며, 살해 당일이 아니라 해도 당시 이방원은 고작 26세로 정계 거물인 정몽주와는 정치 연배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즉, 새파랗게 젊은 이방원과 정몽주가 독대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일설[20]에는 이 시조는 후대에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는데, 하여가의 만수산이라는 산은 그 시절에는 없었던 산이라는 것. 따라서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후대 창작이라는 가설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다만, 이 내용이 매우 극적이기 때문에 관련 작품들에서 이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 정몽주 암살을 정말 이방원이 주도했는지, 이방원만의 소행인지는 확실치 않다는 설도 있다. 태조실록의 정몽주 암살을 다룬 부분을 보면 공양왕 즉위 후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자 한 정몽주의 시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이성계가 방과, 이화, 이제와 휘하 부하들을 보내 공양왕에게 계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이후 암살 모의가 벌어지는데 이 모의에 참여한 이방원, 이지란, 이방과, 이화, 이제, 조영무 중에서 가장 실권에서 멀었고 발언권이 약했던 사람이 방원이다. 특히 정몽주 암살 이후 공양왕을 압박해 정몽주 측 인사들을 쳐낸 사람이 방과인데 그런 그들을 가장 입지가 약한 이방원이 전부 끌고 갔다는 공식이 도출된다. 지위와 연배를 고려하면 방원은 실행조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애초에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몽주 척살을 건의했다거나 척살 모의를 주도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방원이 책임을 스스로 안고가기 위한 윤색일 가능성이 있다.

  • 그리고 이방원이 실권과 발언권이 적었을 거라고 하는데 애시당초 이방원은 과거에 급제했을 정도로 능력도 출중했고 인맥도 많았다.[21] 더구나 이성계가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방원이 몇 번이나 해결사로 나선 적이 있던 점만 봐도 단순히 막내라고 해서 실권이 적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애시당초 모임에 나간 인물들 면면만 봐도 당시 이성계 가문에서도 최중요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방원은 가장 적극적으로 정몽주의 주살을 주장했으니 발언권이 낮다고 보기도 어렵다.[22]

  • 즉, 이는 어디까지나 썰일 뿐이다. 왕자의 난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방원은 충분히 정몽주를 암살할 실행력을 갖고 있었다.[23] 그리고 이방원이 모의에 참가한 사람들 중 가장 실권 및 발언권과 멀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정몽주 한사람을 살해하는데 고작 장사 몇 명만으로도 충분했고, 이성계 일파는 고려의 군권을 꽉 쥐고 있어서 정몽주 및 공양왕와는 세력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껏 정몽주를 암살하지 못했던 건 결국 정몽주가 아니라 이성계의 분노가 두려워서였다. 그렇다보니 결국은 이방원이 나설 때가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이방원은 실행조에 불과하고 이방과나 다른 사람들이 주도했다고 하면 아무리 그래도 이성계나 정도전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 또한 이성계가 이를 알고 나서 이방원을 질책했을 때, 이방원이 집안의 어른들과 형님들의 말이라 따랐다고 변명하기는 커녕 같이 논의했다는 이야기조차 일절 꺼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누가 결정하고 실행했는지와 별개로 이성계의 분노를 혼자서 감당하기로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이성계의 분노는 내내 이방원에게만 집중되었다.[24]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몽주가 죽었음을 알리자 이성계는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크게 대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함께 왜구를 토벌하고 후에 손자 손녀들끼리 혼인시킬 만큼 친분이 돈독했으며 공양왕 즉위 때까지 정치적으로도 동지 관계였다. 더구나 고려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당장이라도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할 수 있는 이성계가 정몽주를 물리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대립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정몽주는 단순한 이성계의 정적 수준이 아니었다. 당대의 대학자요 군자이며 백성들의 지지와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고려 왕조를 떠받친 마지막 충신이었다. 이런 인물을 은밀한 암살도 아니고 자기 자식이 대놓고 살해했다는 것은 이성계의 위신을 엄청나게 깎아먹는 행위였다. 이성계로선 이방원은 참으로 '고얀 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이후 수십 년간 두고두고 지속된 이성계와 이방원 간 갈등의 시발점이라는 해석도 있다.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정몽주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자 조선 건국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중간에 공양왕이 이성계와의 동맹을 추진하고 이방원과 사예이자 사관이었던 조용을 불러 맹서의 초안을 짓게 했으나#, 역성혁명파는 반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고나서 정도전, 조준 등을 복귀시킨 후, 최종적으로는 공양왕을 퇴위시키고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가지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불과 석달만의 일이었다.#


2.4. 국조의 눈 밖에 난 왕자[편집]


아버지 이성계가 왕이 되자 이방원도 왕자로서 군작호를 받아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지지만, 정작 실권에서는 점점 배제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정몽주 척살로 인해 이성계에게 미움을 산 것이 크게 작용했다.

정몽주 척살 모의에는 둘째 형 방과와 매제 이제, 숙부 이화도 참가했으나 아무도 실행에 옮기려하지 않았고 결국 척살을 실제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이방원이었다.[25] 무엇보다 당시 이성계가 정몽주 살해 건으로 이방원에게 대노했을 때 사죄나 변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리에 있던 신덕왕후(당시는 경처 강씨)에게 자신을 변호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역전의 용사이자 용장이며 유사 이래 최고의 신궁인 아버지가 그토록 정몽주를 아꼈다는 것과, 그 앞에서 그렇게 대들다가는 그 날로 아버지 손에 끝장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방원이 몰랐을 리 없다. 단지 아들이기 때문에 살려두기에는 이방원이 죽인 인물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는 이방원이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를 죽이고 감정적 동요도 없는 사이코패스였거나, 자신이 아버지의 분노를 감당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26][27]

이렇게 돼서 고려가 끝내 멸망하고 결국 조선이 세워지자 첫째 형둘째 형도 자신도 아닌, 문중의 적장손인 이복근보다도 새파랗게 어린 막내 이복 동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적장자 대신 후처에서 얻은 막내를 편애해 나라를 흔드는 전형적인 창업 군주의 실책이었다는 주장과 이성계가 보기에 가장 적절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 방석이었다는 주장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방석 문서 참조.[28]

그러나 문제는 이게 태조와 신덕왕후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방원 등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토사구팽이었다. 아들들과 고려의 기득권층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한 후, 조선 개국 후 인척 관계를 들어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몬 것이다.[29] 또한, 장자세습 왕조 국가에서 막내가 왕위에 오른 경우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이 있기에[30], 장성한 형제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곧잘 숙청이 벌어지곤 한다.

방석이 세자가 된 것이 어찌보면 이방원에게 큰 행운으로 작용했다. 만일 장자 계승의 원칙 따라 방우나 방과가 세자가 되었다면 이방원은 왕좌에서 완전히 멀어졌을 것이다. 정변을 일으킬 명분도 사라지며 방우나 방과에게 적자가 없어도 서열상 손윗형님인 방의와 방간이 있으니 그 다음 대에도 세자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31]

다만 당시 방우는 정계에서 배제된 상태였고 방과와 방의와 방간에게는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32] 거기다가 방과와 방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방간은 힘만 좀 셌을 뿐 능력은 없는데다가 방원의 도발에 정치적으로 자멸당할 수 있는 인물이기에[33] 동생들 중 다음 왕을 고르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능력도 뛰어나고 추종자도 많은 방원이 선택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34]

3. 피도 눈물도 없이, 용상을 향하여[편집]



3.1. 무인년, 거병하다[편집]


이후 정안군으로 봉해지자마자 동북면으로 파견되어 사대선조의 능실에 제사를 지내고 능호를 올린다든지, 태조 2년에는 전라도로 파견되어 왜구를 방비하는 임무를 맡기까지 한다. 이 와중에 태종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그의 입을 통해 언급된 정도인데다 정확한 시기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태조 즉위 초 궁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겨우 들어갔고, 이에 태조에게 이를 밝혔으나 질책만 들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상술되었듯 태조 3년 6월에 홍무제이성계의 장남 혹은 차남을 명으로 보내라는 요구를 하여 태조의 걱정 속에 남재, 조반과 함께 명나라에 입조하는 사신으로 가기에 이르게 된다. 다만 태조의 우려와는 달리 명 홍무제로부터 우대를 받았고, 명나라 선비들은 태종을 보고 모두 조선의 세자라 부르면서 존경하였다고 하며,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 주체와 만나기도 하는 등 그로서는 적지않은 이득이었을 경험을 하고 11월에 무사히 귀국하게 된다.[35] 그런데 태조 5년에는 명국 사신인 우우가 사저를 찾아와 이마를 바닥에 대는 큰절을 올려 친세자파로부터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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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의 난으로 살해당한 정도전

태종이 그러는 사이,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세자 이방석의 지지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貞陵)을 도성 내에 조성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사수하려 했다. 그러나 신의왕후와 마찬가지로 망자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다.[36]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등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전주 이씨 문중의 종친, 고려의 구 세력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37][38]

그리하여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종친, 사병 혁파 등 정도전의 급격한 개혁에 반발한 이들이 모의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목숨을 빼앗고 세자 이방석도 죽여버렸다. 귀양을 보냈는데 이거이가 손을 써서 죽였다는 것은 실록의 기록이고, 사실은 쿠데타 당일에 자비없이 그냥 죽여버렸다.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군대의 중진이었던 이제도 이날 살해당했다. 물론 실록에는 "나는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아랫사람들이 멋대로 그런 것이다!"라고 기록됐지만 정말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39]

1차 왕자의 난에 관련된 기록은 전반적으로 곡필이 심하다. 예를 들면 방원 측의 병력은 무기 수도 모자라서 부러뜨려 둘로 나눈 몽둥이와 창자루 든 군사 몇십 명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나라의 정궁인 경복궁을 그냥 발라버린다. 실록에 따르면 세자(방석)가 친위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려 하나 광화문부터 남산까지 횃불이 가득 차 있어서 두려워했다는 서술이 있다. 즉, 몇십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지어낸 말이고 동원된 군사가 수천에 이르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이방원의 직속 사병은 수십명 정도고 이후 친이방원계 관군 부대들이 합류해 대규모 군세를 형성한것으로 해석하면 그닥 이상할 것은 없다. 이 때는 사병이 혁파되어 관군으로 편입된지 십수일이 지난 시점이니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이방원 휘하에 수백 수천의 사병이 우글우글 모여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40]

또한,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과 남은이 나이 어린 세자 방석을 끼고 다른 왕자들을 모두 죽이려 했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군사를 일으켰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정도전 본인은 그런 어마어마한 계획이 실행되던 당일에 판만 짜 놓고 태평하게 남은의 첩실의 집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다가 잡혀서 죽었다고 한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아도 말이 안 되는 부분 투성이니 이때의 실록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정도전은 오늘날에 알려진 것만큼 이방원을 경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사극이나 영상물을 보면 조선 건국 후 대놓고 이방원과 정도전이 대립하고 부딪치는 내용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태조 초기부터 실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태조는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며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 군사력을 재편성했다. 이때 신의왕후 소생 중에서는 방과가 아직 살아있던 방우를 제치고 방번, 이제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었다. 방번과 이제는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싣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아예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41][42] 대신 방원을 비롯한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는데, 태조 3년 2월에 당시 판의흥삼군부사였던 정도전이 군제 개편을 청하면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로 하여금 이를 맡게 할 것[43]을 제안한 것으로 봐선 아마도 그때쯤으로 보인다.[44] 그런데 실록의 무인정사 기록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이방원이 전라도 절제사로 임명된 동시에 동북면 가별초를 받게되는데, 이방원이 이를 사양하며 가별초를 동북면을 맡은 방번에게 넘겨주었고 방번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별초를 소유하게 된다. 겉보기엔 훈훈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즉, 정도전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경계했다면 방우가 배제된 이후 장남의 위치를 차지했고 이성계가 일개 무신일 때부터 보좌하여 공도 크며 중앙 군권을 쥔 실력자인 방과를 더 위협적으로 여겼으면 여겼지 방원을 집중 경계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정도전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권신이 아니라 국왕 태조의 비호 아래 모든 일을 추진한 총신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비슷해서 정도전이 힘을 얻은 것이지 정도전이 주도해서 국가를 끌고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둘 사이에 의견이 갈릴 경우 태조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했다. 세자 책봉, 공신 책봉, 천도, 불교 정책을 전부 자기 뜻대로 한 임금이 왕권이 약할 리가 없으며 오히려 왕권이 튼튼했다. 따라서 정도전 일파는 사극에 나오는 것 마냥 종실 인사들과 대놓고 척을 질 수는 없었다. 쿠데타 발생 석 달 전까지 저서(이때 완성한 것이 불씨잡변.) 작업에 몰두했던 것을 보면 쿠데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론이다.

반론하자면 정말로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 이방과는 비록 전쟁 경험이 많은 장수긴 하지만 정치적 야심은 없었으며 아버지의 말에는 절대 복종했던 사람이었다. 조선 건국에 생각보다 공이 컸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변에 당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 이방원은 과거 급제자 출신으로 아버지 이성계가 개성의 주류층에 편입되는 것을 도왔고 위화도 회군 이후에는 공양왕을 견제하고 정몽주를 척살하는 등 조선 건국에 큰 공이 있었으며 정치적 야심도 컸고 세자 자리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더구나 능력 면에서는 결코 정도전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고 거기다 인맥은 왕자들 중에서도 가장 빵빵했다.[45] 또한 주위에는 측근으로 하륜,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조영규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46] 이방원이 조선 건국 후 명나라에 갔을 때도 이방원 본인이 갈 생각이 있었기도 했지만 정도전 일파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47] 정도전이 방심한 건 태조가 자신의 편이어서 이방원을 누를 수 있을 거라고 보았고, 무엇보다 당시 사병 혁파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서 안심했기 때문이지 정말로 이방원을 경시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48][49]

태조가 1차 왕자의 난 당시 중병에 걸려 있었다는 주장 역시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걸핏하면 골골대며 드러눕는 말년의 태조라면 모를까 당시 태조의 행보와는 꽤나 거리가 있다. 죽기 직전에 딸까지 얻을 정도로 건강한 사람이 태조였다. 태종의 반란군들이 제일 처음으로 들이친 곳은 정도전이 친구들과 놀고 있던 술집이 아닌 태조가 있던 경복궁이었고 태조는 태종의 반란군들에 의해 체포, 구금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만 이를 두고 와병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고 중병은 아니어도 감기 같은 가벼운 병을 앓고 있어서 그 때문에 경계가 흐트러졌을 수도 있다. 태조가 멀쩡한 상태에서 경복궁으로 쳐들어온다? 그러면 직접 반란 진압을 시도했을 수 있어 명분에서 한참 밀리고 방원의 군사들은 태조를 마주치는 즉시 살아있는 과녁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태조는 양력 9월 중순 쯤 되는 음력 7월 27일 우박이 내리는 날 흥천사 거둥을 강행했고, 그것도 실내 법회가 아니라 야외에서 부도탑을 참관하는 일정이었다. 이로부터 며칠 뒤 태조의 지리한 와병 기사 릴레이가 시작된다. 환갑 먹은 노인이 이런 악천후에 외출을 하면 감기몸살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고, 항생제가 없던 시절 감기를 치료하는 방법은 영양을 섭취하며 푹 쉬는 것 뿐인데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 태조는 요동정벌, 사병혁파 등 골치아픈 국정현안들이 겹겹이 쌓인 상황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3년상 마무리까지 직접 챙기면서 제대로 휴식을 취할 상황이 아니었다. 실록에 나타나는 당시 태조의 행보를 보면 조금 나으면 정무를 보고 3~4일 쯤 있다가 또 병이 도져서 드러눕는, 전형적인 회사에 자기 몸 갈아넣는 직장인의 패턴 그 자체다.

태조같은 무인이 무슨 병이냐 하는 주장들이 제법 보이는데, 현대 사회에서 건강으로는 탑티어일 20~30대 프로운동선수들도 까딱 잘못하면 감기몸살로 며칠 결장하는 경우는 부지기수니 전장을 떠나 중앙 정치인으로 변신한지 이미 10년이 된 환갑의 이성계라고 여기서 자유로울 리는 없다. 아니 애초에 전장에서 평생을 산 무장들이 자리보전을 하거나 심지어 병사하는 경우는 부지기수이니[50] 그저 선입견에 근거한 아무 의미 없는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그나마도 단순히 면역력 문제인 감기가 아니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즉 독감이면 예방주사도 없는 당시로써는 무인이고 자시고가 없고 그 고통도 무시할 게 못된다. 심지어는 병환 기사만 3번이나 나고도 또 흥천사 법회 참여를 강행하기까지 했는데, 이후 터진 병환이 그대로 약 보름 뒤 무인정사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3.2. 2차 왕자의 난 진압[편집]


이후 적자가 없던 정종의 계승자 자리를 넷째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이 탐내어 박포와 손을 잡고 자신을 노리자 이방원은 이들마저 가차 없이 진압하였다.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인데, 앞선 1차 왕자의 난이 소수 정예병에 의한 궁궐 점거 쿠데타였음에 비해 이 쪽은 거의 시가전의 양상이었던 듯하다. 1차 왕자의 난 당시 수도는 한양이었는데 1차 왕자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것 때문에 잠깐 개성으로 옮겼다. 개성으로 수도를 잠시 옮긴 이후 2차 왕자의 난이 발생, 선죽교를 사이에 두고 화살이 오가는 양측의 교전이 있었고 여기에 밀린 방간이 패했다. 결과는 이방원의 압승. 다만 역시 방번/방석과는 달리 동복형제를 죽이기는 싫었던지 박포만 악당으로 몰아 죽여버리고 방간은 유배만 보내는 선에서 끝냈다. 사실 동복형제라는 사적인 이유도 있지만, 공적인 이유도 충분히 있었다.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복동생들과 아버지의 측근들을 대거 살해하면서 이미지를 크게 깎아먹었는데, 여기서 동복형제인 방간까지 죽였다간 이방원의 이미지는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본인의 이미지로 끝나지 않고 건국 초기인 조선 왕실 자체의 이미지도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될 수 있었다. 이방원으로선 숙청은 하더라도 형님의 목숨만은 살려야 자신과 왕실에게도 정치적, 대외적 이득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동복형제라는 덕을 봐서 방간 자신은 유배되어서도 그럭저럭 잘 살다 죽었다. 그러나, 방간의 아들 맹종은 아버지를 돕는다고 이방원과 이방원의 가족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혐의가 혐의였던지라 태종 사후 세종이 자살하라고 어명을 내려 죽는다. 이방간의 자손들은 숙종 때에 복권되기 전까진 대대로 역적의 후손에 폐서인으로 취급돼서 평민과 똑같이 군역과 노역이 부과되었다.

한편 이 2차 왕자의 난은 태종 측에서 눈엣가시였던 방간이 '반란을 일으켜 자멸하도록' 유도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당시 방간이 유리한 점은 하나도 없다시피 했다. 개국에 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력이 뛰어나거나 곁에 유능한 무리들이 많다거나 혹은 군사적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넷째라 다섯째인 방원보다 서열에서 앞서는 게 좀 유리한 편이었지만, 이미 방원은 정종의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이 점 역시 방원이 방간보다 못 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형을 죽이겠다고 난을 유도할 이유도 없고 이미 동생들을 죽인 이상 굳이 형을 건드려봤자 본인만 손해다. 오히려 방간이 방원이 세자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고 유일한 잇점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열받아서, 혹은 몸이 달아서 성급하게 난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더 높다.


3.3. 세자에 책봉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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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정종
태종
[[1차 왕자의 난|

]] 이방석
(의안대군)
이방과
(정종)
이방원
(태종)

이제
(양녕대군)
태종
세종
문종
세조
이도
(세종)
이향
(문종)
이홍위
(단종)
이장
(덕종)

왕세손

이홍위
(단종)
세조
성종
연산군
중종
이황
(예종)
이융
(연산군)
[[중종반정|

]] 이고
이호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이부
(순회세자)
이혼
(광해군)
[[인조반정|

]] 이지
이왕
(소현세자)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이호
(효종)
이연
(현종)
이순
(숙종)
이운
(경종)

왕세손

이연
(현종)
경종
영조

왕세제

이금
(영조)
이행
(진종)
이훤
(장조)

왕세손

이정
(의소세자)

왕세손

이산
(정조)
정조
순조
고종
이양
(문효세자)
이홍
(순조)
이영
(문조)
이척
(순종)

왕세손

이환
(헌종)
순종
이은 (의민태자)

위패 존령 · 선원선계 · 국왕 · 대군주 · 왕태자
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작위
정안공(靖安公) / 왕세자(王世子)

방원(芳遠)

유덕(遺德)
세자 책봉
1400년 2월 4일
국왕 즉위
1400년 11월 13일

태조 이성계의 세자였던 형 이방과가 조선의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 이방원 본인은 형인 정종의 세자가 되었다. 이 당시에 형의 뒤를 잇는 것이니 '세제'가 맞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들어왔지만 그냥 무시한다. 정종 본인도 "오늘부터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라며 화통하게 반박을 물리치고 동생인 이방원을 곧바로 세자로 책봉해준다. 사실 동생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건 대놓고 "우리 왕 심영이예요."라고 광고하는 꼴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긴 하지만 정종은 정치에 별 관심은 없었는지 크게 개의치 않고 동생을 세자로 책봉해준 것이다.[51][52]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자 책봉 당시의 상황과 발언들은 아래와 같다.

임금의 아우 정안공을 책립하여 왕세자로 삼아 군국의 중사를 맡게 하였다. 임금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이(儲貳)[53]

를 세우는 것은 국본(國本)을 정하는 것이요, 위호(位號)를 높이는 것은 인심을 정하는 것이다. 이에 전장(典章)에 따라서 책례(冊禮)를 거행한다. 너 정안공 【휘(諱).】 은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하고, 덕이 영명(英明)한 것을 갖추었다. 태상(太上)께서 개국(開國)하던 처음을 당하여 능히 대의(大義)를 주장하였고, 과형(寡兄)이 정사(定社)하던 날에 미치어 특히 큰 공을 세웠다. 하물며, 구가(謳歌)의 돌아가는 것이 있으니, 마땅히 감무(監撫)를 맡겨야 하겠다. 이로써 너에게 명하여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고, 자식노릇하기도 또한 어렵다. 지친(至親)으로 택현(擇賢)으로 이미 대통(大統)을 잇는 자리에 처하였으니, 오직 충성하고 오직 효도하여 이로써 정사하는 방도를 도우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마땅히 다 알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중략……)

이때에 대신으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를 봉하였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 하였다.

(冊立弟靖安公<諱>爲王世子 句當軍國重事 王若曰……時大臣獻議者 以爲自古帝王 立母弟則皆封皇太弟 未有以爲世子者也 請立爲王太弟 上曰 今予則直以此弟爲子)

- 정종실록 권제3, 9장 뒤쪽~10장 앞쪽, 정종 2년 2월 4일(기해) (1400년) 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립하여 군국의 일을 맡기다.


사실 정종과 태종의 나이는 겨우 10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다이묘들이 자식이 없어서 동생을 양자로 들이는 사례는 꽤 흔했고, 심지어 덴노 중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 그렇게 이방원은 정종의 양자로 들어가 형의 세제가 아닌 세자가 되게 된다. 아마도 형인 정종은 어차피 자신은 별로 중요치 않은 인물이니, 위안으로 삼으려고 동생 방원을 자신의 아들로 삼음으로써 자신을 태조 이성계의 유일한 '아들'이자 '세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54]

더불어 정종 스스로도 자식들에 대한 보신책을 겸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과거 후궁인 가의옹주 유씨의 아들을 원자라 하였다가 # 다시 이방원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상황이니 이후 서자들이 상왕의 아들 운운하며 반란 같은 골치아픈 문제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아예 이방원을 확고부동한 계승서열 1위의 적장자로 못박아버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정종은 세자 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며, 문제의 원자 이불노는 이후 줄기차게 정종의 친자가 아니라고 부인당했다. 사실 더 버티고 있었으면 본인의 안위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마도 임금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자기 야심을 부리려고 했다면 이방간과 같은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정치적 판단력이 먼치킨인 이방원답게 정종이 정치에는 관심이 크지 않다는걸 이미 알아채고 형인 이방과를 내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실록에서도 정종은 정치 업무는 거의 보지 않고 열심히 놀았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물론 애초에 이방원 쪽에서도 세자 타이틀을 원하고 있었다. 2차 왕자의 난이 끝나자마자 이방원의 책봉을 밀어붙인 남재, 하륜 등이 모두 하나같이 '세자' 책봉을 요청했지 '세제'는 거론도 하지 않았다. 태종 본인의 입장에서는 세자 타이틀에 대한 욕심이나 위의 두 형들과의 순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세자' 책봉을 택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형들의 순위 문제는 이미 이방의와 이방간 모두 알아서 자진사의나 반란실패 등으로 해결을 해 준 상태라 큰 의미가 없고, 보다 실리적인 측면을 찾아보자면 태상왕인 아버지 이성계의 개입 가능성을 최소화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제'라면 태종 본인도 태상왕의 아들 자격이니 이성계가 책봉부터 즉위 이후의 정무까지 대놓고 아버지 지위를 들먹이며 개입하려 든다면 어쩔 도리가 없지만, '세자'라면 태상왕이 뭔 얘기를 하건 '아버지' 자격인 상왕 정종을 우선 방패막이로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인세이에서 이와 반대의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스토쿠 덴노는 이복동생 나리히토 친왕을 양자로 들여 양위, 코노에 덴노로 즉위시키고도 양위문에서 '황태제'로 명시하는 바람에 '아버지'로서 법황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도바 덴노가 실권을 휘두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55]

더해서 형들이야 이미 나가떨어졌으니 그렇다손 쳐도 형 정종의 서자들과도 서열을 정리할 필요는 있었고 이런 점에서는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정종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 당시 지식인층인 사대부들의 지속적인 지지를 받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려면 세제보다는 세자 쪽이 정통성 면에서 더 좋았다. 일단 '종법'을 들고 무인정사를 일으킨 이방원으로써는 어떻게든 형제승계가 아닌 부자승계의 틀을 갖춰서 대종의 적장자 세습을 강조하는 종법을 존중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게다가 과거급제 출신의 유학자 이방원의 입장에서 종법제의 확립은 신생국가 조선이 - 개차반 고려와 확연히 차별화되는 - 중화 유교천하의 확고부동한 문명국으로 자리매김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이기도 했다. 실제로 종법제 자체가 한대 이후 약화되었다가 송대 들어 재발굴되면서 성리학의 근간을 이룬 제도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든 현실적 필요로든 간에 이방원은 무조건 종법제에 맞춘 승계가 필요했다.[56] 특히 고려왕조에서 적장자 세습을 무시하고 형제승계를 시도하면서 벌어진 수많은 개판을 익히 아는 이방원과 신진사대부들로써는 종법의 확립을 곧 국가의 존속요건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57][58]

그래도 태종은 동생으로서 형에게는 매우 깍듯해서, 자신이 즉위한 뒤에도 정종을 형이자 상왕으로서 톡톡히 대접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는 둘이서 명절날마다 같이 장난도 치고 사냥도 같이 나갔다는 기사가 실록에 있을 정도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종과 태종이 첫눈이 내리는 날 서로 장난을 친 이야기가 있다.[59]


4. 왕조의 기틀을 다지다[편집]



4.1. 사병 혁파[편집]


우선 왕족과 대신들의 사병을 모조리 없애 군권을 일원적으로 재편하여 삼군부에 주었다. 아버지와 본인이 사병을 이용해서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사병을 철저히 분쇄하고 인원을 국군으로 재편했다. 이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60][61] 정도전 역시 1차 왕자의 난 이전에 판의흥삼군부사로서 사병 혁파를 통하여 태종에게 결정타를 날리려다 역으로 살해당했음을 상기하면 태종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인물이 이거이다. 이거이는 태조와 사돈 관계에 있던 인물로 왕자의 난 때에는 태종에 붙어서 공신까지 되었던 인물이지만 정종 때에는 사병 혁파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복귀 후에는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나중에 이와는 다른 '불충'이라는 이유로 귀양을 가고 그 뒤에 그곳에서 죽게 된다. 이 귀양이 태종의 공신 견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슷하게 사병 혁파를 반대했지만 처신을 잘해서 죽을 때까지 별탈없이 산 조영무와는 반대되는 모습. 사실 정도전은 뛰어난 사상가이자 이념가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수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62]


4.2. 관제 정비[편집]


태조 때만 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오늘날의 언론에 해당되는 대간과 사관 등의 기관에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다.[63] 전제 개혁도 이 시절에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간언하는 간관들이나 사관을 귀찮아 했고 틈만 나면 잡으려고도 했지만 조선의 기틀을 이루는 유교의 근간인 이들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태조 시절에는 거의 준 내관 취급이었던 사관의 대우를 격상시켜 주었다. 간관의 비판에 시달리던 대신들이 간관들을 좀 자제시켜달라고 하자, "간관들이 없으면 무능력하고 악독한 자들을 어찌 걸러내라는 것인가?"라며 물리치기도 했다. 이는 간관을 통한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간관이 왕에게 간언을 하기도 하나, 관리의 비리 등에 대해 간함으로서 대신들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였다.[64] 실제로 조선 시대의 삼사가 확립된 것은 태종 시절이다. 관리 감찰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 기관으로 만들어서 간쟁 기능을 담당시킨 것이 태종이기 때문이다.

태조 시대에는 제대로 된 제도를 정비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다. 국초의 도평의사사는 고려의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고, 정부 구조는 개국공신들의 사적 지배 중심의 느슨한 체제였다. 정도전과 조준 등은 이 체제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이 추진했던 개혁은 이 사적 지배를 혁파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제 국가로 이행하는 것이었다. 태조가 정도전을 전폭적으로 밀어줬던 것은 그저 측근이라서가 아니라, 이 개혁이 결국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임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 드라이브에서 소외되었던 다른 공신들과 혁파 대상이었던 사병 소유자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정두희 '조선 전기 중앙통치체제의 성립', 1994) 정도전 개혁을 신권주의니, 재상중심주의 등의 용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도전의 개혁안은 오히려 국왕권 강화와 더 연관이 크다.

태종은 집권을 위해서 구 보수파 및 사병혁파에 반발한 무장들과 손잡았긴 했지만, 근본적인 지향은 정도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옛 고려의, 조선과는 성향이 맞지 않는 인물들까지 대거 포섭해 가면서 정국을 꾸렸음에도 개혁안들을 보면 상당히 과감한 것들이 많다. 고려 시대의 도평의사사비로소 폐지되고, 의정부가 설치되는 등 국가 운영 방식의 기본 골격이 만들어지고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이다. 태종은 의정부에 자문기능만을 부여하고 실무 관청인 6조를 왕이 직접 관할하는 6조 직계제를 시행했다.


4.3. 경제 정책[편집]


명의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저화라고 불리는 일종의 지폐를 통용하기 위해 화폐 개혁을 실시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당시 조선은 교역이 상당히 미약한 수준이었고 물물교환이 주를 이뤘다.[65] 그리고 이 화폐개혁은 아들인 세종이 재추진했으나 역시 실패. 이 화폐 개혁은 많은 시도를 거친 후 조선 후기에 상업이 활발해진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상평통보로 꽃피게 된다. 그러나, 비록 화폐 개혁은 실패했으나 태종 때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백성들은 평화로웠고, 산물이 풍부해 창고가 가득 찼다.”라는 1422년 태종이 승하했을 때 받은 최종 평가를 보면 당대 태종의 경제정책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말 80만결이던 전국의 경작지가 태종 시대에 들어 120만결로 증가했을 정도였다. 서울과 지방의 창고가 가득 차서 물로 주변을 에워싸 의 침입을 막아야 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개국공신, 처가식구도 쳐내… ‘태종 리더십’에 국가경영 답있다 때문에 다음 대의 왕인 세종이 대규모 사업이나 계혁을 시행할 수 있게 한 기본적인 재력과 발판을 마련한 것도 어떻게 보면 태종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4.4. 외척 말살[편집]


태종이 공신들을 숙청할 때에는 죽이기보다 적당한 곳으로 귀양을 보내놓고 방치하거나 직위를 강등시키는 등, 간접적인 수법으로 실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왕실의 외척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자비가 없어서 처가인 여흥 민씨 네 명의 처남을 다 죽여버렸고, 나중엔 사돈 가문(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마저 박살을 내버렸다.

죽인 사람 자체는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대숙청을 벌인 군주라는 이미지가 있는 이유가 바로 외척 말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숙청은 대체로, '평소 절친한 인척들을 갑자기 불문곡직하고 잡아들인다 → 뜬금없이 역모 혐의를 뒤집어 씌운다 → 혹독하게 고문해서 강제로 자백을 받아낸다 → 일사천리로 죽인다'는 과정으로 진행됐다.

정작 유배형에 그쳐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진 것은 실제로 잘못한게 있는 이거이와 김한로 정도였고, 자기가 보기에 나중에 왕실을 위협할 권세를 가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가문이라면 아무 잘못이나 욕심이 없어도 가차없이 박살을 내놓았다.

능력있는 신하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던 태조와 달리 직접 나서길 좋아하던 태종이니 확실히 발 밑에 둘 수 있는 신하가 아닌 장차 후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척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하륜 등 부패한 신하도 능력 좋고 권력에 방해되지 않으면 놔뒀는데, 나름 죄목이 있는 민씨 형제들과 달리 심온은 죄도 짓지 않았고 납작 엎드렸음에도 죽였다.

원래 좋은 가문과 혼인하는 것은 인맥도 넓히고 동맹을 맺는 가장 흔한 방법이고, 왕의 세력이 빈약할 때는 왕의 가장 강력한 아군이 되기도 한다. 실제 이방원도 왕위에 오를 때 민씨 가문의 사병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점차 정국을 안정시키고 왕에 대한 별도의 위협이 없는 상황이 된 이후로는 무엇보다 왕위계승률을 어지럽힐 수 있는 외척의 존재를 밟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태종의 이런 우려는 얼마 못 가 다시 현실이 되어 외척의 권위로 계승자를 선택하거나 외척이 나라를 말아먹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4.4.1. 신덕왕후 강씨 격하[편집]


아무래도 외척의 발호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수준의 경각심을 갖고 있었던 듯 한데, 이에 대해선 계모였던 신덕왕후 강씨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66] 실제로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적개심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두 번째 아내인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해서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을 서울 도성 안에 조성했다. 왕릉은 도성 안에 조성할 수 없는 것이 조선 왕조의 법이지만 태조가 강씨를 사랑한 탓에 법률을 어긴 것이다.[67]

태종은 정릉 근처의 땅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특히 최측근이었던 하륜이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68] 신덕왕후의 능 근처에 공신들의 집이 지어지는 것을 보곤 태조는 그저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나중엔 신덕왕후의 기일이 되어도 조회를 파하지도 않다가,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형식적인 제사만 올리고 끝내기까지 했다.

태조가 죽은 뒤에는 신덕왕후를 대하는 예우를 왕비에서 후궁의 격으로 완전히 격하했다. 원래 신덕왕후의 능은 오늘날의 중구 정동에 있었지만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렸고, 한 술 더 떠서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또한 신덕왕후 능의 석상과 석물, 그리고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할 때 쓰이는 광교의 재료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 버렸다. 그래서 광교를 잘 보면 석물에 새겨진 문양이 뭔가 화려한 걸 볼 수 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와 정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분명히 정식 부인이었고, 이 때문에 신덕왕후는 왕비에 책봉되었다. 명백히 태종의 개인적인 감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69] 신덕왕후는 현종대에 가서야 송시열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무덤 또한 능으로 복구되었다.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기록에 따르면 정릉이 태종의 손에 의해 파헤쳐지던 날 많은 비가 쏟아져 당시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이 신덕왕후의 눈물이라고 수근거렸는데 훗날 250여년이 지나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 송시열에 의해 신덕왕후가 복권되던 날에도 엄청난 비가 왔다고 한다. 이때도 사람들은 신덕왕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신덕왕후가 대체 의붓아들들과 첫 번째 부인에게 무슨 지독한 짓을 했나 싶은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씨 부인과 의붓 아들들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와 신덕왕후가 막내 아들 의안대군을 세자로 올리는 과정에서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정종 이방과가 아버지를 도와 전장을 누비며 아버지를 도왔고, 태종 본인은 위화도 회군 당시 신덕왕후 강씨와 그의 소생 아들들을 대피시켰고, 정몽주를 격살하는 등[70]의 공로를 세운 일등 공신이다. 태조가 세자로 장남 이방우나 차남 이방과를 세자로 삼았다면, 아무리 권좌에 대한 야심이 강한 태종이라 해도 자기가 왕위에 오를 명분을 찾는 데 엄청 애를 먹었거나, 아니면 끝내 권좌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장남 이방우는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첫 번째 아들로, 장자 승계 원칙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적장자였다. 이방과는 이방우가 일찍 죽은 후[71] 실질적인 적장자의 위치를 가졌으며 군사적인 전공 면에선 태종을 능가했다. 하지만 그런 형들도, 자신도 아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이복 막내가 세자 자리를 차지했고 이후에 정도전 등이 사병 혁파를 통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세력을 빼앗게 된다. 몹시 적개심이 일었을 것이다.

태종실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신덕왕후의 일을 논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릉(貞陵)은 내게 조금의 은의(恩義)도 없었다. 내가 어머니의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父王)이 애중(愛重)하시던 의리를 생각하여 기신(忌晨)의 재제(齋祭)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72]

다만, 태조가 어째서 장성한 아들들을 건너 뛰고 가장 어린 막내 아들을 세자로 삼은 것에 대한 책임을 태조가 아니라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파에게 몰기 위해 태종이 일부러 저렇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73] 또 원한도 원한이지만 정통성의 문제도 걸려 있는데, 신덕왕후를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면 의안대군은 적자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고 이는 태종과 그 후손들의 정통성 확립에 좋을 게 전혀 없다. 그러나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면 의안대군은 후궁의 자식이 되므로 정통성도 없이 세자위를 차지한 것이 된다. 이렇듯 개인적 원한으로만 보이는 일이지만 깊게 보면 정통성의 문제와도 밀접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4.4.2. 여흥 민씨 숙청[편집]


여흥 민씨 일가, 특히 조강지처인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 처남들인 민무구, 민무질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태종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인척들이자 동시에 태종의 즉위에 제일공신들이며 또한 심복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공이 있고 힘이 있었기에, 결국 이들에 대한 태종의 숙청은 애초부터 예고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왕권을 최우선시한 야심가이자 숙달된 정치가인 태종이 외척을 크게 경계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찌기 양녕대군의 혼인과 관련해서 민씨 일족이 본의 아니게 태종에게 위기감을 느끼도록 한 사례가 있었다. 양녕대군이 세자빈 김씨와 혼인하기 전, 명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어떨지에 대한 검토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의 사신과의 논의가 영 진전이 되지 않자 흐지부지되는 듯 했고 태종도 이를 포기한 채 위에 언급한 김한로의 딸과의 혼인을 진행했다. 그런데 공부, 이현 등이 민제를 찾아가서 세자와 명 공주와의 결혼을 다시 추진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때 민제는 태종의 압력에 못 이겨 사직한 상태라서 자신은 감히 주상에게 아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민제의 아들들인 민무구, 민무질도 "말할 자신이 없다." 하며 논의 자체에서 빠지려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안[74] 태종은 사사롭게 국가의 큰 일에 관여하려 했다며 공부와 이현을 처벌하였다.[75]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태종에게는 민씨 가문의 위세를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된 사건이었다. 물론 앞서 말했듯 민제와 아들들은 논의 자체를 버거워하며 신중하게 처신했다. 하지만 왕세자의 혼인이라는 중요한 국정 문제를 국왕이나 현직 대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씨 가문에서 논의하려 한 것 자체가 그들의 위상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민무구와 민무질이 너무 젊고 야심이 컸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즈음하여 늙어 자연사한 장인 민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처남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은 매형의 동생들을 죽이는 일에까지 기꺼이 가담한 사람들이다. 공신에 책봉되어 큰 권세를 누리던 4처남 중 맏이인 민무구가 태종 앞에서 '세자 이외의 영특한 왕자는 없는 게 낫다' 운운하며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을 숙청한다는 식으로 어그로를 끈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태종으로서는 '내 동생들을 죽이는데도 가담해 놓고도 태연하게 권세부리는 자들인데, 이권을 위해서 내 아들들을 죽이는데 가담 안 하리란 법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물론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당장에 정도전이 종친모해죄로 살해당했는데 저런 것과 딱 똑같은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종 앞에서 말했다면 제발 숙청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바보다. 기록에 의하면 민무구와 민무질은 "우리를 이거이처럼 여기는 것 같다.", "우리를 살려두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이숙번이 불충한 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했는데 나를 겨냥하고 한 말 같다.", "나를 꺼릴까 두려웠는데 병권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하다." 등 충분히 태종이 자신들을 숙청하지 않을까 버로우타고 있던 마당인데 저런 폭탄발언을 태종 앞에서 직접 할 리가 없다.

덤으로 왕위계승권자 또는 그에 근접한 3형제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모두 어린 시절을 사가, 외할아버지 민제와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의 집, 즉 외갓집에서 보낸 시간이 무척 많았다. 이는 여흥 민씨 집안이 당대의 명문가이며, 동시에 민제가 당대의 대학자이였기 때문이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자신을 얼러주고 업어주고 과외도 수시로 해 주었을 친숙하고 친밀하기 짝이 없는 외삼촌들인데, 양녕이든 충녕이든 그들을 배척하고 숙청한다는 게 그들에게 과연 쉬운 일일까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토록 가까운 왕자의 외숙이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일국의 왕자를 없애니 마니하는 말은 그 누구라도 입초에도 절대로 올려서는 안 되는 반역성 발언이다. 차라리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이 나중의 수양대군 마냥 정변을 일으켜 양녕대군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려고 하는 정황과 증거라도 있었다면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었겠지만, 단지 세자가 아닌데 영특하다는 이유로 제거해야 한다는 참람한 발언을 한 것이다. 더구나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에 비해서 인품과 학식이 뛰어났어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달리 기질적으로 평생동안 무력행사나 혈겁과는 담쌓고 산 사람들이었으니 더더욱 무리한 주장이었다. 특히 효령대군은 뼛속까지 불교에 매료된 사람이라 야심도 없고 성격도 둥글었다.[76]

그러니까 총명한 두 왕자를 죽여서라도 확실하게 멍청한 세자를 왕위에 앉혀서 꼭두각시로 부리며 권세를 누리겠다는 저의의 표현밖에 안 되는 것이다. 원경왕후는 본인의 남동생들을 죽인 남편을 원망했지만, 인간성으로 따지면 오히려 그 형제들이 태종보다 못한 자들일 수도 있다. 용의 눈물 등 사극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실록에서 보이는 민무구, 민무질의 행보가 그렇게까지 오만하지는 않았다는 평도 있지만, 이 한 번의 언행으로도 그러한 평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끝도 없이 야심만만한 생각이 아니고서야 입초에 올리기는 커녕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왕권국가에서는 정말로 위험한 큰일날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민씨 형제에 대한 변호도 없지는 않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등장한 해석으로, 당시 시대인 여말선초에는 당장 민씨 형제가 매형 태종과 함께 주도한 왕자의 난처럼 옥좌를 노리고 왕족들간의 유혈 충돌이 비일비재했다. 옆나라인 명에선 아예 대규모 내전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 외에 유능한 왕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향후 왕위 계승에 위협이 되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즉 민무구를 비롯한 민씨 형제의 의도는 '똑똑한 왕자들은 당장 죽여도 된다'가 아니라 '원칙상으론 처음부터 없는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일반론적인 우려 수준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 역시 민씨 형제가 다른 방향으로 경솔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의도 자체야 어쨌든, 당장 왕권 강화와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태종 입장에선 현실적인 권세를 가진 민씨 형제들이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태종의 입장과 의도를 너무 몰랐던 것.

그리고 태종은 아버지를 왕위로 이끌 정도로 치맛바람이 드세었던 계모 신덕왕후와 이로 인한 아버지의 실수를, 즉 신덕왕후의 치맛바람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극혐했으며, 이로 인해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사람이다. 문제는 아내 원경왕후 또한 당대의 여걸이자 치맛바람을 천성으로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태종이 보위에 오르게 된 데에 바로 이 치맛바람이 크게 도움이 되었으나, 그대로 방치하면 정국에 영향이 미칠 것이며 외척이 날뛰게 될 것이었다. 그 때문에 여흥 민씨를 이중 삼중으로 박살내고 말았다. 조선이 전주 이씨의 나라에서 여흥 민씨의 나라로 변해버릴 가능성[77]을 모조리 잘라낸 것이다.[78]

굳이 민씨 형제가 잘못 얻어걸린 부분이 있다면 하필 세자(나중에 양녕대군이 되는)의 자질이 개판이어도 너무나 개판이었다는데 있었을 것이다. 효령과 충녕이 당대의 가장 이상적인 군자와 사대부의 모델이었던 반면에 세자는 자기 가족들은 안중에도 없이 술과 놀이와 음욕만 탐했다. 이런 상황에선 효령과 충녕에게 야심이 없어도 세자가 폐해진 후 결국 살해될 것은 거진 뻔한 순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세자를 살려서 보위에 앉히려면 효령과 충녕을 미리 죽여서 택현론을 원천 봉쇄할 수밖에 없고, 유교윤리 때문에 장자의 상징성이 굉장히 강력했던데다 아들을 여럿 잃고 처음으로 겨우 살려서 키운 귀하디 귀한 장자인 세자를 어떻게든 살리고자 하는 고민은 원경왕후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79] 그런데 차남과 삼남보다는 장남을 살리는 일에 원경왕후가 직접 나서면 모양새가 안 좋으니까 민씨 형제가 끼어들기는 했는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양녕에게 믿음과 기회를 줄 정도로 아들바보였던 태종이었지만, 공과 사의 구분은 철저했다.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보다 조선의 국왕으로서의 책임감을 더 중시한 결과, 결국 폐세자를 택하였다. 즉, 민씨 숙청은 이러한 세자의 막장 행보의 막간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그 문제의 세자 양녕대군은 외삼촌 네 명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데 크게 일조하였으면서도 끝내 모른 체 하였고,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도통 망나니짓을 끊지 못했으며, 그토록 세간의 욕을 먹고 대신들에게 탄핵까지 당하면서도 잘나고 착한 동생이 끝까지 지켜준 덕분에 평생 잘 먹고 잘 살았으며, 그 착한 동생의 손자, 즉 자신의 조카손자를 폐하고 죽음까지 이르는 데에 크게 일조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민무구와 민무질은 그렇다고 쳐도 민무휼과 민무회는 조금 억울한 감도 있다. 태종도 그들을 숙청하면서 이숙번과 나눈 대화에서는 이숙번이 그들이 형들이 당하자 이에 복수심을 품은 것이냐고 묻자 그렇진 않다며 다만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봐 두려웠던 모양이라고 답했다. 즉 민무구와 민무질이 제거당한 상황에서 이들은 그냥 버로우타고 쥐죽은듯이 지내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만큼 이들이 딱히 힘을 쓸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 숙청을 피할 순 없었다. 물론 양녕대군이 말한 것에 따르면 민무회도 딱히 억울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들도 본래는 "형님들이 억울하게 죽은거 같긴 했지만 다행히도 전하께서 우린 살려주셨는데 우리가 앞으로도 잘 섬기려 하니 세자저하께서 좀 우릴 봐주십시오" 라는 자기들 말마따마 형 둘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반항은 커녕 '말 잘 들을테니 우리 좀 살려줍쇼 헤헤' 라는 비굴해보이기까지 한 언사를 전달하고자 하다가 저리 된 것이다.


4.4.3. 광산 김씨 숙청[편집]


양녕대군이 혼인을 할 때, 즉 첫 번째 세자빈을 고를 때도 태종은 상당히 신중을 기했다. 세자빈 김씨의 아버지는 태종의 과거 시험 동기인 김한로였다. 장원 급제를 한 수재이긴 했지만 조선 건국에 딱히 세운 공도 없고, 확고한 신념이나 정치적 야심도 없을 뿐더러 처세술에도 잼병인 책상물림형 관료였다. 남의 말을 빼앗아 타거나, 남이 사냥에서 잡은 사슴을 자기 집 개가 물어 죽인 것이라며 빼앗으려 드는 등 추태를 부렸으나 일처리를 잘한 흔적은 딱히 없다. 옹졸하지만 큰 사고를 치진 않는 소인배라 할 만한 사람.

태종이 이런 인물을 굳이 임용한 이유는, 그가 훗날 국구(임금의 장인) 자리에 오른다 해도 딱히 권세를 휘두를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또 오늘날 고시 합격생들끼리 동기로 묶여 교류하곤 하는 것처럼, 이때에도 같은 기수 과거 합격생들끼리는 매우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김한로뿐 아니라 태종의 과거 시험 동기 가운데 많은 수가 고관에 임용되었고 인간적으로도 태종과 젊을 때부터 가까웠다. 이 점에서도 김한로는 태종의 친위 세력이 되기에는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기에 그 능력이나 성품과는 별개로 세자의 장인씩이나 될 수 있었다. 태종의 과거 동기들은 주로 간관으로 임명되거나, 군사와 관련된 사무를 맡아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모두 왕권의 강화와 관련이 있는 방책이다. 김한로가 이런 케이스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80], 그는 딸을 세자빈으로 들인 지 단 이틀 뒤에 좌군동지총제에 임명되고 5년 뒤인 태종 12년에는 아예 중군도총제가 된다. 요즘으로 치면 3군사령부 참모장과 1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최고위 군직이다.

이렇듯 김한로는 국왕이 병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에 유용하게 쓰인 인사였지만, 김한로 역시 외척 숙청의 칼날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폐서인되어 고향으로 쫓겨났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난행을 견디다 못해 폐세자하는 과정에서 김한로가 자기 사위인 양녕대군에게 불륜을 주선하는 등 난행을 저지르도록 유도한 혐의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결국 태종의 분노를 사서 자손들까지 전부 영구 공직추방 및 등용금지 크리를 먹고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태종과 과거 동기이며 역시 상류층 수재 출신이라 친분관계가 돈독했고 사돈까지 맺었던 김한로가 양녕대군의 타락을 부추긴 정황에 태종은 막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김한로는 나와 급제(及第)의 동년(同年)이요, 서로 안 지도 가장 오래된다. 태조(太祖) 때에 있어서는 침체(沈滯)되었다가, 내가 즉위하자 이에 승선(承宣)을 제수(除授)하여서 재보(宰輔)에 이르렀고, 또 혼인(婚姻)을 하였는데, 금일에 이에 이러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18년 5월 15일 갑자 1번째 기사


그래도 직첩만 거두고 유배로 그쳤으니 숙청당한 외척들 중에서는 그나마 온전한 편이었다. 억울하게 정치공학에 입각해 숙청을 당했다기보다는, 양녕대군을 아꼈던 태종의 배신감이 강하게 작용한데다 김한로 자신이 행동을 잘못했기에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는 인상을 준다. 다만 태종이 숙청을 해도 생명을 거두는 것은 최대한 자제한걸 생각해보면 야심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국구가 될 뻔했는데 국구가 될 일조차 없어진 옛 친구를 처형해봐야 정치적 이득도 없기에 천수를 누리게 해 준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물론 아들사랑이 지극한 태종이 양녕대군의 세자위를 최대한 지켜주려 했던 노력들을 생각해보면 '본인의 의중을 무시하고 세자에게 휘둘려 세자의 탈선을 부추긴데 대한 아버지로서의 서운함'이 반영되어 귀양을 보냈을 가능성은 있지만 태종은 이미지와 달리 향후 왕권에 상관관계가 있을 때를 제외하면 생명 박탈은 거의 하지 않았기에 김한로가 오랜 벗이 아니어도 처형이 되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81]


4.4.4. 청송 심씨 숙청[편집]


세종이 즉위한 직후엔 측근인 강상인까지 이용해 세종의 장인이자 태종 본인의 또다른 사돈인 심온의 집안까지 숙청했다. 당시 병조 참판이었던 강상인은 군사 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했다가,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군권을 가지고 있던 태종의 명을 어긴 죄로 파직 후 관노로 강등됐는데, 이후 다시 강상인을 고문해서 태종과 세종을 이간질시키려 했으며, 여기에 심온이 동조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뒤 심온을 체포해 사약을 내렸다.

또한 심온의 아들들과 아내는 변방에 관노로 보냈는데, 이들은 태종 사후에야 복권되었다. 이들을 복권할 당시 세종은 "사실 이들을 복권시키는 것은 아바마마께서도 내심 원하신 건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못한 것"이라고 했다. 즉, 정리하자면 딸이 조선의 정실 왕비이고, 사위는 왕인데 정작 그 장모와 처남들은 변방에서 노비로 굴렀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만든 사돈이 죽고도 친정을 시작한 사위가 자기 아버지가 하신 일이니 선뜻 고치질 못하고 한동안 그렇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

외척인 민씨 형제나 이숙번과 같은 공신들을 처리한 것은 그나마 이들은 왕권에 대해 위험분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 심온 숙청만큼은 조금 도가 지나쳤다는 평가가 있다. 심온도 양녕대군의 장인인 김한로와 같이 집안 배경이 좀 좋은 것 외에는 그저 과거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전형적인 행정 관료였지 주변 세력을 결집시켜 파벌을 이루려는 권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82] 되려 자신의 딸이 충녕대군과 맺어지자 다소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83]

그나마 이 시기의 세종은 그냥 똑똑한 왕자였을 뿐 권좌 코스가 예정된 세자가 아니었으니 별일 있겠냐는 식으로 넘어갔지만, 세종의 큰형 양녕대군이 온갖 비행을 저지른 끝에 세자 자리에서 폐출되면서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심온의 숙청 직후 박은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소헌왕후 또한 역적의 딸이니 폐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적들에게 온갖 이유를 다 엮어대며 숙청하던 태종도 며느리의 폐출만큼은 대놓고 거부했다. 역적이면 삼족을 멸하는 게 원칙인데도 딸은 출가외인이라 연좌할 수 없다느니, 옛 경전에도 자식은 죄를 안 받는다고 나온다느니, 예전에 민씨 일가가 역적죄로 죽어나갈 때는 폐비 소리는 꺼내지도 않더니 왜 이제 와서 난리냐고 온갖 억지를 써가면서 말이다. 소헌왕후와 금슬이 좋던 세종 또한 결사반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이때 당시 소헌왕후는 세종의 아들을 셋이나 낳으며 내명부의 수장으로 입지를 공고히 했고, 이미 심온의 숙청으로 인해 친가가 박살나면서 왕후로서 국정에 간섭할 힘이 없었다. 더군다나 태종 입장에서도 소헌왕후는 나름 신경써서 택한 좋은 며느리였으니[84], 자신의 외척 숙청 때문에 소헌왕후까지 폐출시키는 건 너무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소헌왕후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의 친정을 박살냈다고 보는게 맞다. 자기 아들이 외척때문에 고생하지 않으라고 사돈가를 박살낸건데 소헌왕후를 폐출시키면 그 모든 살육이 무의미해진다.

게다가 어차피 소헌왕후를 폐출하고 세종이 새 왕비를 들이면 그 새 왕비의 가문도 또 어느 정도 박살내야 하는데다가[85] 이 새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소헌왕후의 자식들 때문에 정통성이 문제가 된다. 당장 자신과 자신의 동복 형, 그리고 자신이 죽인 의안대군이 겪었던 복잡한 상황을 본인 손으로 자식에게 대를 이어 물려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태종으로선 소헌왕후의 폐출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다만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의 금슬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행여나 태종 사후에 세종이 소헌왕후의 한을 풀어주려고 하다 정국이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하긴 해서 가례색을 설치하고 세종에게 억지로 후궁들을 뽑아 들여보냈다.

고로 소헌왕후의 입장에서는 친정이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남편은 다른 여자들하고 밤을 보내고 있으니 오히려 차라리 자진해서 폐출당하고 싶었을 심정인데도 막혀버렸으니 시아버지 태종이 배로 원망스러웠을 것이다.[86] 소헌왕후가 불굴의 의지로 국모의 자리를 지켰기에 망정이지, 보통 여인이라면 홧병으로 병사했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소헌왕후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이렇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서 왕위 계승과는 상당히 멀어보이는 왕자결혼했는데 갑자기 세자가 되고 그 3개월만에 왕이 되어 자신의 신분이 불과 1년도 안 되어 일개 왕자의 부인에서 왕비로 올라갔는데, 그 다음 1년 사이에 시아버지가 아버지를 사사시키고 자신의 가족들을 관노로 보냈다고 쳐 보자. 그리고 소헌왕후가 알았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안다면? 딱 사람 미치기 좋은 환경이다.

물론 정말로 소헌왕후가 죽게 되면 태종 입장에서는 빅엿을 먹은 기분이겠지만...조선시대의 왕에게 왕비는 단순히 왕손을 낳아주는 기계가 아니라 내명부의 수장이기도 했기에, 왕은 아무리 싫다 해도 왕비를 얻을 것이 거의 의무이다시피 했다. 훗날 영조환갑을 넘긴 이후에 정순왕후를 맞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문종을 제외한 조선의 역대 왕들은 왕비가 일찍 죽으면 전원 예외없이 재혼하여 계비(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였다. 단, 예외적으로 고종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후에도 새 왕비를 맞지 않았다.

각설하고, 다시 태종 쪽으로 돌아와 보면 소헌왕후가 만약 갑자기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기껏 소헌왕후의 친정을 개작살냈더니만 덜컥 왕비가 죽어서 다시 왕비를 맞아야 하고 그 새 왕비의 친정도 또 개작살내야 한다는 심히 뒷골이 당기는 상황이 온다. 더욱이 이 시점에 이르면 "전 왕비 친정을 박살 내서 전 왕비가 죽게 했는데 이젠 새 왕비 친정을 박살 내서 새 왕비를 죽게 할 셈입니까?"라는 반대론이 나올 수도 있으니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 게다가 인륜상으로도 결국은 시아버지가 며느리네 집안을 박살 내 며느리도 죽게 만든 것이니(그것도 며느리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결코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따라서 위에 언급했듯이 태종 입장에선 소헌왕후 본인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결국 태종의 사돈들 중에서 숙청을 피한 쪽들은 불교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계승에서 배제된 효령대군어른도 못 되고 요절해버린 성녕대군, 그리고 서자들의 처가 정도였다.[87]

단 심온의 가문이 마냥 억울하지만은 않다는 것은 심온 문서에도 잘 나와있다. 심온 본인은 청렴한 사람이었고, 심온 개인 한정으로만 보자면 태종에게 잘못한것도 없고 정사를 처리한 면에서 잘못한 것도 없다. 단 심온의 가장 큰 죄는 집안 관리를 잘못했다는 것이었고 외척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는 태종의 심리를 이전에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제처럼 자신의 집안을 다그치고 태종에게 자신의 집안을 쳐내달라고 간청했으면 태종이 심온 자신만은 민제처럼 어떻게든 구명해줄 수까지야 있었을것이나 심온 자신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심온에게도 결국 화가 끼치게 된 것이다.[88]


4.5. 공신 숙청[편집]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손자 세조와 가장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으로,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을 싹 숙청했다. 심지어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자신의 처갓집, 사돈집마저 사정없이 숙청했다.

이숙번은 왕자의 난에서 시작해 조사의의 난에서까지 맹활약하며 태종의 옹립을 도운 최측근이었다. 그런 이숙번의 죄목은 거만하다는 것이었다.[89] 이숙번은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복권이 안 되었고, 세종대왕 때 태종실록의 일부 기록들을 보완하기 위해 자문이라는 명목으로 한양에 잠깐 불렀다가 기록 보완이 완성되고 나서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90]

그래도 태종이 권력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손에 피를 많이 묻혔을지언정, 공신 숙청에 한해서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태종의 치세에는 사화나 환국 같은 대형 사건들은 없었고,[91] 태종은 피를 보는 것을 최소화하려 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숙청의 방식도 대체로 살생보다는 유배를 보내거나 실권을 빼앗는 비교적 온건한 방법을 주로 썼다. 여타 다른 공신들도 직접 숙청하기보다는 나이 등의 이유로 품계는 높지만 실권은 없는 명예직으로 보내거나 명예 퇴직을 권유하는 식으로 그만두게 하였다.[92] 세조도 이 방법을 사용했어야 했는데 끝내 사용하지 못하였다.

반면 명나라의 시조 홍무제는 중원을 통일한 이후 호남의 옥을 필두로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1등 공신 이선장을 비롯한 수많은 공신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죽였는데, 최대 9만 명 정도가 처형되거나 연좌되어 유배 혹은 관노로 떨어지거나 고문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93] 여기에는 문자의 옥을 일으켜 온갖 구실로 문사들을 살육하고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으며 재상직을 폐지하고 황제가 기분 내키는대로 시행하는 태형인 정장을 불문법화하는 등 황권에 걸리적거린다 싶어 제거한 사람이 모두 포함된다. 더구나 그 뒤를 이은 영락제 또한 태종과 비슷하게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태종에 비하면 집권의 명분이 지극히 부족했고,[94][95] 끓어오르는 반대 여론을 십족을 멸하는 대숙청을 통해 잠재워야 했다. 명나라의 홍무제는 숙청을 너무나 많이 한 나머지, 역으로 후계자인 건문제를 봐줄 후견인이 없어져버려 제대로 된 숙청에 실패한 반면, 태종은 직접적인 위협 대상만 아니면 건드리지 않았다. 세종대왕 때의 주요 정승들이었던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은 모두 세종대왕 즉위 이전부터 조정에서 일하던 관료들이다. 그야말로 아들에게 알짜배기 인재들을 물려준 셈.

태종의 공신들 중 숙청의 칼날을 피하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하륜조영무 정도였다. 이 중 조영무는 처신을 철저히 잘해서 피했고,[96] 특히 하륜은 20세 연상의 고령이라 나이가 많은 점이 작용했는데, 여러 삽질을 일으켜도 태종이 억지까지 부리며 보호했다. 하륜은 태종 16년, 조영무는 태종 14년에 태종보다 일찍 사망하였다.[97]

그리고 태종은 사건이 터지면 주모자와 주요 관련자들 위주로 처벌하는 편이었기에 그 흔한 학살이나 피의 대숙청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시대 왕이 친정한 유일한 난인 조사의의 난에도 주모자급 십수 명 정도만 처형하는 자비로움을 보여 주었다. 이 정도의 난이면 관련자의 구족을 멸하는 게 일반적인데다가, 조선 역사의 후대에는 창칼이 부딪힌 진짜 반란에는 한참 미달되는 단순 썰, 소문, 모의, 참소 등으로도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던 것을 생각하면 자비로운 것이 맞다.[98] 물론 관련자 중 선대 왕이자 자기 아버지인 이성계가 있는지라 막 처형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99]

이후에 세조, 연산군,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 숙종, 경종, 영조를 비롯해서 심지어는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정순왕후조차 태종 때보다 훨씬 많은 숙청을 했다. 이들은 더 많이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음에도 태종보다 안정적인 왕권과 정치 안정을 얻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조선에 악영향과 정치혼란만 가중시켰다.[100]

조선의 통치 체계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성종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훈구파들 좀 잡아보겠다고 사림파들을 불러들였다가 역으로 사림파들에게 쥐락펴락 당하며 좋아하는 한 마리 마음대로 날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과 비교해보면,[101] 결과적으로 태종의 숙청은 아들 세종의 치세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학계에선 “태종은 오명(汚名)은 자신이 받고 영광은 모두 세종에게 물려줌으로써 세종이 아무런 짐 없이 홀가분하게 국가 경영을 시작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줬다”고 평가한다. #


4.6. 인재 등용[편집]


개국공신, 처가식구도 쳐내… ‘태종 리더십’에 국가경영 답있다

태종은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사람을 평가해 적재적소에 썼다. 정적(政敵)의 혈친이라도 필요하면 중용했다. 정몽주의 두 아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줬고, 정도전의 아들 정진은 판서까지 올렸다. 태종실록에 나주목 판사 임명을 앞두고 두 사람을 고민하다가 좌의정 성석린에게 의견을 구하는 대목이 나온다. 성석린이 ‘일을 처리하는 재주는 정진이 낫다’고 하자 태종은 곧바로 그를 임명했다. ‘정도전아들’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 개국을 반대한 목은 이색의 자식과 문인들도 품어 안았다.

태종이 인재를 쓰는 안목은 세종·세조 시대까지 영향을 미친다. 세종 시대 주역인 황희, 맹사성, 조말생, 장영실은 모두 태종이 발탁해 키운 사람이고, 세조 때 정승이 된 정인지는 태종이 장원급제자로 직접 뽑았다. 태종실록엔 “내가 전라도 절제사를 했다고 해서 전라도 사람만 등용해야 되느냐”고 신하들에게 따져 묻는 태종의 육성이 나온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람을 보는 눈. 태종은 사람을 판별할 때 ‘곧음[直]’ 여부를 잣대로 삼았다. 곧음이란 스스로의 원칙에 입각해 덕(德)을 기르고 의(義)에 따라 행동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에 따르면 “태종이 ‘직’을 말한 사례를 전부 검색했더니 강직(剛直), 공직(公直), 충직(忠直), 눌직(訥直·말은 어눌하지만 마음속은 곧음) 등 열세 유형이 나왔다”고 한다. 이중에서도 최고의 ‘직’은 순직(純直)으로 이는 마음속에 간사함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곧다는 뜻으로, 아들 세종의 품성을 이렇게 평했다. 태종 18년(1418) 세자 충녕에게 전위(傳位)할 뜻을 밝히며 “세자는 순직하니 임금을 맡을 만하다”고 말하였다. 측근인 하륜조영무를 중용한 것도 ‘질직(質直·바탕이 곧음)’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신하들이 하륜에 대해 불평하자 태종은 “하륜이 다질소문(多質少文)하다”고 달랜다. 바탕은 곧은데, 그걸 부드럽게 잘 표현해내지 못하는 성미이니 이해하라고 편을 들어준 것이다.

이렇듯 태종은 사람보는 눈이 뛰어났고 인재 등용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군주였다.


4.7. 지방 행정[편집]


조선의 지방 행정 제도 정비는 태종이 거의 다 했다고 보면 된다. 태종은 지방 행정 조직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팔도다. 태종은 고려 시대의 특수 행정 구역이던 향, 부곡, 소를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켰다. 이어 태종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목•군•현을 두었으며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했다. 아울러 유향소를 통제하는 경재소도 설치했다.


4.8. 대명 외교[편집]


애초에 제2차 요동정벌[102]에 참여하여 명나라를 침략할 뻔 하다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여 왕이 된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요동 정벌을 계획하던 정도전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던만큼 명은 이방원을 친명파라 여겨 그를 친근하게 대했다. 그 전부터 태종 본인이 명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던 적이 있고,[103] 홍무제영락제도 모두 접견해본 적이 있다. 심지어 영락제와는 서로 보위 계승자의 신분으로 길거리에서 만나 아래와 같이 서로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104]

태종이 연부(燕府)를 지날 때는 연왕(燕王) 【즉 성조 황제.】 이 친히 대해 보았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우대를 받고 돌아오다. #

이렇게 궁합이 좋았던 두 사람의 통치 기간이 겹친 시기였던 만큼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영락제와의 개인적인 친분도 어느 정도 작용하여 조공 무역을 1년에 3회[105]로 늘리는 파격적인 환대를 받게 된다.[106]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무과(武科)에 합격한 자는 항상 스스로 병서(兵書)를 숙독(熟讀)하는가? 숙독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들으니, 황제(皇帝)가 안남(安南)을 정벌할 때에 안남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고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다." 하니,

공조판서(工曹判書) 이내(李來)가 대답하기를, "천하(天下)의 군사로 이 조그마한 나라를 정벌하니, 누가 감히 대적할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안남 국왕(安南國王)이 황제에게 달려가서 고(告)하였으니, 황제의 거사(擧事)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황제가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나라가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는다면,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죄(罪)를 물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편으로는 지성(至誠)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여긴다."

편전에서 병조판서 윤저 등과 궁방 대책에 관해 의논하다. #

하지만 마냥 태종이 영락제와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어서 여진족 관련 문제로 명과 충돌한 적도 있었다. 조선 초기엔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조선과 명나라의 대립이 있었는데 당시 두만강 인근 변경 지역의 여진 부족은 조선의 지배를 받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사신 '왕교화적'을 보내 여진족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그곳 여진족들은 이미 조선을 섬기기로 회맹하며 맹약을 맺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들 여진 부족에 대한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힘 없는 약소한 여진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의 질서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초유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 태종은 곧바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길주도찰리사 조연이 이끈 1천여 명의 조선군 기병 부대는 올량합 부족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가옥과 논밭을 불태웠고, 수백여 명의 부족민을 참수, 이어 무기로 무장한 여진족 군사 1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또 참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상국인 명나라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조선군의 일방적인 토벌이었고, 태종도 이를 의식했는지 신하들과 대처 방안을 논의하여 명나라 황제를 상대로 속이기로 하며 무려 정보공작(...)을 시전하기로 했다. 그래서 황제에게 고한 즉 '명나라 영토를 침공한게 아니라 치안대가 우리 백성 죽이고 도망간 살인강도놈들 쫓아가다가 거기 추장이 도적놈들 협공하자고 해서 걔네 땅에 들어간건데, 추장놈이 막판에 쌩까고 안나와서 우리만 덜렁 남아서 도적놈들 잡은거임. 아? 죽은 도적 두령들이 명나라 관직을 받았었음? 우린 전혀 몰랐음요. 유감임.'[107]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다행히 계책이 성공해서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조선을 배반하고 명나라에 붙은 여진족들을 명나라를 속이면서까지 곧바로 토벌할 정도로 태종은 명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는 전혀 하지 않았으며 태종의 사대외교는 냉철한 현실적 국익판단에 따른 실리외교였다.

그 외에 정도전제3차 요동정벌을 계획하던 시기는 명나라도 내부 사정으로 한창 혼란스러웠던 시기라서, 정도전의 발안대로 했다면 요동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태종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벌여서 좌절되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긴 하다. 그렇지만 영락제가 명나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였던 걸 생각해보면... 어차피 정벌해봤자 다시 빼앗겼거나 오래 유지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요동 정벌을 일시적으로 성공했다가 여러 한계로 인해 다시 포기하고 철수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역시도 요동 정벌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모를 리 없었다.


4.9. 여진 정벌[편집]


조선 최초의 여진 정벌은 태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태종 즉위 이후 명은 조선의 북방에 건주위(建州衛)·모련위(毛憐衛) 등의 위소(衛所)를 설치하고, 오도리(吾都里)·올량합(兀良哈)·올적합(兀狄哈) 등 여진족 부족의 추장들을 위소의 수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조선의 영향력 내에 있던 여진족들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여진족에 대한 명의 관직 수여를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405년(태종 5) 유력 추장이었던 동맹가첩목아는 명의 건주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파아손(把兒遜)은 모련위 지휘첨사(指揮僉事)로 임명되는 등 명의 관직을 받았다. 조선이 보복으로 여진족과의 무역을 일시적으로 단절하자, 이에 분개한 올적합(兀狄哈) 김문내(金文乃) 등이 1406년(태종 6)과 1410년(태종 10) 두 차례 경원을 침공하여 병마사(兵馬使) 한흥보(韓興寶)를 포함한 장병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혔다. 출처.

사건을 보고받은 태종은 즉각 올적합에 대한 정벌을 명하였다. 하륜(河崙)· 성석린(成石璘) 등의 정벌 반대가 있었으나, 태종은 조영무(趙英茂)· 유량(柳亮) 등의 찬성론을 따라 길주찰리사(吉州察理使) 조연(趙涓)을 주장(主將)으로 삼고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신유정(辛有定)·전 동지총제(同知摠制) 김중보(金重寶) 등을 부장으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게 하였다.

조연은 신유정·김중보· 곽승우(郭承祐)와 함께 원정군 1,150명을 이끌고 2월 29일 길주(吉州)를 출발, 3월 9일 모련위의 두문(豆門)에 도착, 모련위지휘(毛憐衛指揮) 파아손(把兒遜)과 아고거(阿古車)·착화(着和)·하을주(下乙主) 등 4명의 수장 및 여진족 160여 명을 죽였으며, 가옥을 불사르는 등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돌아왔다. 이를 통해 조선은 모련위의 핵심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출처.

태종의 모련위 정벌은 단순히 약탈에 대한 징계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조선을 배신하고 명의 관직을 받은 여진족 세력들에 대한 보복전으로 이루어졌다. 정벌의 결과 여진족들이 조선을 불신하게 되고, 조선의 정벌에 대한 복수로 수 차례 조선의 변경을 침략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련위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건주위의 주요 세력이었던 동맹가첩목아는 조선의 원정군을 피하여 1411년(태종 11년) 오도리를 이끌고 압록강 북쪽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태종이 죽을 때까지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 침입은 거의 사라졌다. 출처.


5. 퇴위와 상왕[편집]



5.1.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편집]


十八年騎虎 亦已足矣

18년 동안이나 호랑이 등에 탔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태종실록> 태종 18년 8월 8일 을유 2번째기사, 세자에게 국보를 주며


1418년에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서 스스로 양위한 사람은 태종이 유일하다.[108][야사] 하지만 군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었고 세종이 30세에 넘길 예정이었다. 그런데 세종이 30세가 되기 전에 태종이 승하하면서 세종은 더 이른 시기에 군권을 쥐게 되었다. 일부 분야에 대해 대리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세종의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막기 위해 박은 등을 시켜 세종의 장인 심온을 사사하고 그 집안을 박살냈다. 이 때문에 심온의 가문인 청송 심씨에서는 박은과 그의 가문 반남 박씨를 열렬히 비판하였다. 태종을 대놓고 비판할 순 없으므로 대신 심온 숙청을 주도한 박은을 비판한 것.[109] 또한 세종 즉위 초기에 이루어진 이종무대마도 정벌(기해동정)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그렇게 상왕이 되어서도 조선의 안정과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놀러 다니려고 각지에 정자를 짓고, 좋아하는 사냥을 다니는 등 신나게 살았지만[110][111], 해야 할 일만큼은 꾸준히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세종대왕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명의 사신들이 세종대왕을 극찬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기도 했다.

"주상이 효양하는 가운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니,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구하겠느냐."


"내가 진실로 본디 현명한 줄은 알았지만, 노성(老成)[112]

함이 여기까지 이른 줄은 알지 못하였구나."


"주상은 참으로 문왕(文王) 같은 임금이다."


"내가 나라를 부탁해 맡김에 사람을 잘 얻었으니, 산수간에 한가로이 노닐기를 이처럼 걱정이 없는 자는 이 천하에 오직 나 하나 사람 뿐이다. 중국 역대 제왕의 부자 사이도 진실로 나의 오늘과 같지 못하였고, 고려 때의 충숙왕과 충혜왕 사이에도 또 비평할 만한 것이 많으니, 내 어찌 이 천하에서 뿐이랴. 고금에도 역시 나 한사람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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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5월 16일 계미 1번째기사

정리하면 역대 중국 황제들도 후계자와의 사이가 좋지 못해 고생했고, 한반도에서도 충숙왕과 충혜왕 등 부자간에 사이가 좋지 못해 고생한 군주들이 많았는데, 자신은 매우 뛰어난 후계자를 얻은 덕분에 아무 고생도 안한다며 자신만큼 후계자 덕을 잘 본 군주는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세종의 뛰어남을 극찬하는 발언이다. 이렇듯 태종은 세종을 후하게 평가하는 발언을 많이 남겼다.


5.2. 최후[편집]


태상왕이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에서 훙(薨)하니, 춘추가 56세이었다. 태상왕은 총명하고 영특하며, 강직하고 너그러우며, 경전과 사기를 박람(博覽)하여 고금의 일을 밝게 알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 사물의 진위(眞僞)를 밝게 알며, 한 가지 재주와 한 가지 선행(善行)이 있는 자도 등용하지 아니한 일이 없고, 선대의 제사에는 반드시 친히 참사하고, 중국과의 교제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재상에게 〈국사를〉 위임하고 환관을 억제하며, 상줄 데 상주고, 벌줄 데 벌주되, 친소(親疎)로 차등을 두지 아니하고, 관직을 임명하되, 연조로 계급을 올려 주지 아니하고,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며, 검박한 덕을 행하고 사치와 화려한 것을 없애어, 20년 동안에 백성이 편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창고가 가득 차 있고, 해적들이 와서 굴복하고, 예의가 바르고 음악이 고르며, 〈모든 법의〉 강령이 서고 조목이 제정되었다. 성품이 신선과 부처의 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사사(寺社)를 개혁하여 노비를 거두고 전답을 감하였으며, 원경 왕태후의 초상에 유학의 예법을 준행하고 불사(佛事)는 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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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5월 10일 병인 1번째기사

이렇듯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세종과 매사냥을 돌아온 직후 갑자기 몸이 안좋아지더니 1422년 5월 초10일, 한성 연화방(지금의 서울 종로구 원남동 주변)의 이궁에서 향년 56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공교롭게도 원경왕후랑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원경왕후가 태종보다 2년 먼저 태어났으며, 태종보다 2년 일찍 사망했다). 아직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세종에게 자신이 과거 유배를 보냈던 황희[113] 다시 불러 중히 쓰라고 충고하였고, 태종이 숨을 거두었을 때는 황희가 도착한 지 얼마 안된 후였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獻陵)이다. 애증의 관계였을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리고 이 능역 근처에 23대 국왕 순조의 인릉(仁陵)이 있는데, 이를 묶어서 흔히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헌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두 봉분을 이어주는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선의 왕릉 중 헌릉만이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왕과 모후가 저세상에서라도 서로 화해하고 잘 지내기를 바란 세종의 뜻이었다고 한다. 세종의 효심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태종도 생전에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하자 "거긴 장차 내가 들어갈 곳이고 내가 불교를 싫어하는데 절은 왜 짓냐?"며 반발했던 것으로 보아 본인도 죽으면 원경왕후의 곁에 묻히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종은 이후 자신이 죽으면 아버지 무덤 옆에 묻히겠다고 생각을 하고 헌릉 주변인 현재의 국가정보원 일대에 미리 무덤 자리를 보았는데, 여기와 관련해서는 영릉 문서 참조.

[1] 밑으로 동생 이방연이 있었으나 태조 2년(1393년) 환조의 비를 세울 당시 이미 “조몰(早歿)”하여 원윤(元尹)으로 증직(贈職)하였다는 내용이 보여 개국 이전에 일찍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2] 당시 과거 시험의 최종 등급은 1~3등은 을과, 4~10등은 병과, 11~33등은 동진사로 구분되었다.[3] 이 대목에 숨은 함의 중 하나는, 고려사는 엄연히 조선에서 편찬된 관찬사서인 만큼 당연히 조정의 공식적인 역사관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는데, 고려시대 과거 합격의 효력이 조선으로 그대로 승계되어 인정되었다는 것이다.[4] 오히려 조용하고 유약한 이미지가 강한 둘째형 이방과야말로 실은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고려 말의 숱한 전장을 누빈 무장이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이 고증을 적절히 살려 이방원은 무장 병사 한명도 제대로 제압하기 힘든 문과 선비에 가깝게 묘사되고, 형 이방과는 반대로 칼든 동생도 한번에 제압해버리는 무장으로 묘사된다.[5] 서울부터 부산까지의 거리가 천리가 조금 안된다. 그에 10배 정도 되는 거리인 셈.[6] 태조실록 태조 3년 갑술(1394년) 6월 1일 기사.[7] 물론 명나라에 도착한 후에는 당시 실세였던 정도전을 견제하기 위해 주원장으로부터 잘 대접받았고 또, 영락제와 안면을 트는 등 득이 실보다 많았다. 하지만 그거야 결과론이고 당시에는 관계가 상당히 험악했던 만큼 목숨을 장담하기 쉬운 건 아니었다.[8] 정도전이 일부러 이방원을 명의 손을 빌어 없애기 위해 보내려고 했으나 이방원 역시 하륜의 충고를 듣고 한번 모험을 걸어볼 겸 자원했다는 말도 있다. 사실 당시 갈 만한 인물이 그리 많지 않아서(정도전이 꾀하던 요동 정벌을 변명하기 위한 사신이었기 때문이다.) 고위급 인물들 중에서도 정도전, 조준급 인사를(이 둘은 당시 조선 조정의 투탑이었다.) 보냈어야 했는데 정도전은 애시당초 문제의 근원이라 갔다간 바로 사망이라 태조가 보내기 싫어했고 그렇다고 정도전으로 인해 벌어진 문제에 조준을 보낸다는 것도 문제가 있어서(정도전과 조준은 둘 다 태조의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정적에 가까웠다. 당장 조준은 왕세자 책봉 당시 이방석을 지지한 정도전과는 달리 이방원을 지지했기도 했고.) 누굴 보내기도 애매했다. 그런데 거기에 장성하고 정치력이 뛰어난 왕자를 보낸다는 건 위험도를 제외하면 매우 적절한 인사라고 할 만했다.[9] 수양대군영의정에 오른 적이 있지만 과거는 치르지 않았다. 이후 왕족 종친이 벼슬에 임하는 제도는 성종 대에 구성군(영의정 역임)을 끝으로 폐지되었으나 훗날 고종 때 중부(仲父), 즉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이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기도 했다.[10] 고려 시대에 무신에 대한 문신들의 차별은 상당해서 무신정변이 일어날 정도였다. 게다가 한글도 없어서 지식의 차원이 아닌 글자(한문)를 아는 자체가 힘인 시대였으며, 무과가 따로 있어서 무신도 유교 소양과 글쓰기 역량은 갖고 있어야 했던 조선과 달리 고려의 무신은 무과가 따로 없어서 일종의 수시채용 형태로 임용되어 글이 짧고 인문 소양이 부족했었다. 무신정권에서 서방이라는 별도의 문신 자문기관을 둔 이유도 이때문이었다. 그래서 실록에도 (최영 장군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지만) 최영을 '불학(不學)' 즉, 못배웠다며 디스할 정도였다. 무과가 도입된 조선에서는 그나마 무신들이 먹물을 좀 먹어서 사정이 나아졌지만 임진왜란에서도 문신들이 무신들의 공신 책봉 등을 견제하려고 은근히 무신의 공을 깎으려는 등 그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다.[11] 다만 문극겸은 이방원의 8대조로 너무 먼 조상인데다가 문극겸 또한 과거에 3연속 낙방하여 결국 음서로 관직에 나간 인물이므로 이방원의 뛰어남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12] 최충의 9재 학당과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학 12도를 생각해보면 고려시대의 과거는 전문적인 사학에서 배우지 않고서는 합격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학들은 단순히 교육 수준만 문제가 아니라 좌주와 문생 관계로 인맥을 쌓고 족보를 대대로 전해온 사학 출신 지공거(감독관)와의 인맥 문제까지 엮여서 공고한 이너서클을 형성하고 있었으니 이런 살벌한 경쟁을 뚫어볼 수 있을까 싶었을 것이다. 스승은 원천석으로 알려져 있다. 모 드라마를 근거로 정몽주 밑에서 배웠다는 루머도 떠돌지만 관련하여 드라마 이상의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후일 장인이 되는 민제에게도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13] 오늘날에도 가문 최초로 고시에 합격하면 충분히 문중의 자랑거리가 될 만하다.[14] 이성계가 직접 "내가 손님과 함께 즐김에는 네 힘이 많이 있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15] 지금으로 치면 중앙부처에서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록 아버지인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권신 이인임과 그의 잔당 제거에 동참하여 수문하시중이 되었다는 것을 감안해봐도 어린 나이에 꽤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6] 훗날 이 이복동생들을 본인의 손으로 직접 죽이고, 계모인 신덕왕후는 그녀의 능에 설치된 석물을 뭉개는 고인능욕을 시전했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라 하겠다.[17] 이방원의 동생 이방연이 이때 우왕의 손에 처형당한 게 아닌가라는 의혹이 있다.[18] 여말쯤 가면 국가의 기강 전체가 흔들리는 혼란상 때문에 3년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지킨 사람이 별로 없었다. 굳이 말기가 아니더라도 고려시대에는 숭불 사상 때문에 유교의 영향력이 조선시대만큼 높지 않았다. 성리학 이전의 유학은 대체적으로 성리학처럼 철학적이며, 형이상적인 복잡한 심상세계를 논하지 않고, 국가체제 운용방식에 집중하였다. 그러하였기에 편의에 따라서 도가적인 사상과도 결합되었고, 이후에 불교를 국교로 하면서도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방원은 시묘살이까지 하면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19] 즉, 이 상황은 방원이 강씨더러 내 편을 들어달라고 징징대자 강씨가 정말로 태조를 타박하고 방원을 편들어준 것이다.[20] 강전섭 저, 단심가와 하여가의 소원적 연구, 동방학지, 1983년 & 박규형 저, 단가 정형의 발생기 재고, 한민족어문학, 1988년[21] 애시당초 조선의 명군 중 한 명이니 능력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22] 물론 이 자리에서는 이성계를 두려워해서 결국 아무 것도 못 하지만...[23] 애시당초 이성계가 부상으로 잠시 리타이어한 상태에서 정몽주가 이성계의 당여들을 숙청하려 했을 때 당장 아버지한테 달려가서 억지로 모셔온 사람이 방원이었다. 이후 태종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방원의 정치력과 판단력은 아버지 태조나 정도전보다도 위였다. 괜히 건국 직후 막강한 공신들 권력을 죄다 견제하고 세종이 마음껏 치세를 펼치도록 한 사람이 아니다.[24] 결국 범인임이 훤히 드러난 이방원도 죽이지 못했는데 범인을 몰랐다고 자기 당여들을 마구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정작 정몽주가 죽고 나자 공양왕을 협박해서 그대로 고려를 멸망시킨 것만 봐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할 수 있다.[25] 앞서도 나왔지만 이방과, 이지란, 이제, 이화 등은 정몽주를 척살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했지만 태조 이성계의 분노가 두려워서 함부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26] 사실 진짜로 억울하고 열받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뻔히 고려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목표인 정몽주에 대해서는 물러터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원래 정몽주를 죽이든가 설득하든 이방원이 아니라 이성계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27] 물론 세자 자리를 주지 않아서 열받은 것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형 방과를 세자로 삼았다면 순서대로였으니까 열받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삼는다는 말은 한씨 소생들은 아들로 보지도 않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열이 안 받을 수가 없었다.[28] 문제는 방석은 막내고 그 사실만으로도 절대 적절한 조건을 가졌다고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 방석이 즉위하는 순간 그 위의 형들은 전부 사망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반면 방석은 형들 중 누군가가 왕위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왕위에 오른 형이 어지간한 폭군이거나 혹은 방석 본인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목숨을 위협받을 일은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 특히 원래라면 왕좌와 가장 가까웠던 방과나 방원은 신덕왕후 강씨와 사이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으므로 더더욱 그렇고 또, 개국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므로 왕위다툼이 아닌 이상 그리 쉽게 왕족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29] 세자위의 안정을 위해 여타 왕자가 세자가 되었더라도 나머지 왕자들의 권력에서의 배제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차기 왕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세자가 아닌 왕자이기 때문이다. 제 1차, 2차 왕자의 난을 보면 바로 이해가 가능하다.[30] 기본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종법제를 따르므로 적장자가 가장 우선권이 있고 이후 차남, 삼남... 순으로 계승권을 가지게 되며 적자가 없으면 서장자가 우선권을 갖고 다시 차남, 삼남... 순이 된다.[31] 세상을 떠난 순서는 태종이 가장 나중이나, 바로 이전에 죽은 회안대군1421년 타계하였다. 이는 태종이 승하하기 1년 전이다.[32] 사실 방과는 무장으로서는 뛰어났지만 정치 능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반면 방원은 과거를 급제한 문관 출신인 만큼 유학자들 중에서는 방원과 관련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당장 장인인 민제가 유학자로 이름높은 사람이라 그 제자들도 많았는데 그들 전부가 사실상 이방원의 당여라고 할 정도였고 정도전과 사이가 안 좋은 조준도 세자 자리에 방원을 거론할 정도였다.[33] 결국 방간은 승산이 전혀 없음에도 박포의 꼬임에 넘어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정치적으로 자멸당하고 만다.[34] 아니면 1, 2차 왕자의 난 못잖은 내란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방원만 나서지 않고 다른 왕자들까지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35] 태조 3년 11월 19일 을묘 2번째기사[36] 태종이 훗날 정릉을 파헤치고 석물을 청계천에 거꾸로 처박은 것에 이러한 이유도 있을 수 있다.[37] 본인이 와병 중이라 일선에 나설 수 없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구 세력의 불만으로부터 왕실을 보위해줘야 할 왕자와 종친들이 그들과 결탁해버려 왕실에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친위세력이 제대로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태조가 나서서 명분을 가져오고 반군의 사기를 꺾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38] 다만 와병 중이라 일선에 나서지 못한 게 아니라 와병 중인 상황을 캐치하고 바로 그 시점에 난을 일으켰다는 말도 있다.[39]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정변은 죽일 사람과 살려서 끌고 갈 사람까지 미리 정해두는 것이 원칙이다. 게다가 이제를 살려두면 후대에 문종의 사위인 정종이 문종의 하나뿐인 아들 단종의 복위사건을 도모한 것처럼 잡음이 생길 여지도 많았기 때문에 본인의 승인이 없었다고 부인하였으나, 사전합의 하에 실행하였을 것이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이 기록을 언급할 때 '퍽이나 그럴 마음이 없으셨겠어.'라는 식으로 디스했다.[40]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 두 가지 기록을 모두 반영했는데, 전자의 경우 이숙번이 이끄는 나무 몽둥이를 든 병사 수십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무기고를 습격하는 장면으로, 후자의 경우 충청도 관찰사 하륜이 이끄는 병력이 이숙번의 원군으로 등장하여 숙위병들을 무찌르고 삼군부를 장악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41]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42] 군권 개편 후에도 방우에게 남아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된다. 태조 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43]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5번째 기사[44] 다만 상술된 이방원이 왜구방비를 위해 전라도로 파견된 기록과 후술된 이방원의 전라도 절제사 임명 기록을 보면 좀 전일 수도 있다.[45] 문관 출신이고 뛰어난 학자인 민제의 사위다보니 학맥부터가 엄청났다. 심지어 처형이 둘 처제가 하나 처남이 넷이나 되는 탓에 혼맥 또한 엄청났다.[46] 거기다 이들은 대부분 단독으로 군사를 부리는 것이 가능한 인물들이었는데, 문관 출신이라 군무는 알아도 직접 군사를 부린 경험은 일천한 정도전 일파와는 대조적이었다.[47] 당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상당히 험악했는데 거기에 이방원을 보낸 것인 만큼 의도가 뻔했다. 사실 당시 상황이 꼬이는 바람에 왕자나 정승급이 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는데 그렇다고 정도전을 보내는 건 논외였고(가면 바로 사망이니까. 사실 당시 상황이 꼬인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정도전의 요동 정벌이었다.) 그렇다고 조준을 보내면 그것대로 불만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일은 정도전이 벌였는데 조준더러 가라고 하면 좋아할 리가 없다.)[48] 애시당초 이방석에게 걸림돌이 될 한씨 소생 왕자가 넷인데(이방우는 진작에 탈락했고 조선이 건국되고 바로 사망했으며 이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이미 사망했다.) 그 중 둘째와 셋째는 야심이 그리 크지 않았고 넷째는 야심은 많지만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하지만 다섯째만큼은 능력, 야심, 인맥 등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으니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 할 것이다.[49] 당장 직전에 명나라에 보낼 사신으로 정도전이 이방원을 콕 찝어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말로 방원을 경시했다면 위에 있는 형들을 냅두고 굳이 신의왕후 소생 중에서는 실질적 막내격인 방원을 보내려 했을 리 없다.[50] 기린아라 불리던 곽거병은 20대 초반에 요절해서 썩은물 마시고 죽었다는 전승이 내려오는 판이고, 그 자연재해께서도 지병으로 위장병을 달고 사셨다. 영락제도 원정 중에 병사했다.[51] 정종의 경우는 적자가 없어서 그렇지 서자들은 매우 많아서 고자 의혹은 확실하게 피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국모인 정안왕후가 완벽한 석녀라는 소리가 되기 때문에 곤란하기는 매한가지였다.[52] 그리고 이후 조선에서 정식으로 '왕세제'에 책봉된 사람은 경종의 이복동생 영조밖에 없게 된다. 당시 청나라에서도 "왕이 아직 젊은데 왜 동생을?"이라고 묻기도 했는데 당시 경종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보니 사신으로 간 노론 신하 이건명이 "심약하셔서 자손을 못 보셨음."이라고 실제로 이렇게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훗날 이런 불경한 언사를 한 업보로 이건명신임옥사 당시 목이 잘리는 비참한 운명을 맞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순종황제의 이복동생 영친왕이 순종황제의 황태제가 아니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즉 왕조의 초창기와 말기가 완전히 데칼코마니인 셈.[53] 저이(儲貳) : 세자.[54] 이게 단순히 호칭에서 끝난 게 아니라 훗날 정종이 붕어하고 국상을 치를 때에도 정종의 서자들이 아니라 태종이 아들 지위로 상주를 맡았다.[55] 물론 실수 같은 게 아니고, 애초에 스토쿠 덴노가 실권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도바 덴노의 강압이었다.[56] 원명교체기 한족 중화국가의 회복에 발맞추어 왕조를 교체한 조선 유학자들의 관념에 비추어 보면 고려는 형제상속, 근친혼, 외왕내제 등 참담하기 그지없는 개판오분전의 비문명 국가였고, 이걸 유교, 특히 성리학 사상에 맞게 하나하나 뜯어고쳐 명실상부한 기자의 후예, 소중화 선진문명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 할 수 있었다.[57] 원간섭기 이전 마지막 형제승계였던 의종-명종-신종은 매번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폐위/옹립한 것이고, 공식적으로 마지막 형제승계였던 공민왕-공양왕(16촌 동항렬) 사례는(우왕, 창왕은 애초에 왕으로 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자신들이 옹립한 것이다. 원간섭기야 그냥 흑역사고... 이쯤되면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형제승계에 노이로제가 걸릴만 한 일이다.[58] 이렇게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결국 그 고려 최악의 종법 파괴 사례판박이인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으니, 후대인들이 그 망할 손자놈과 자신을 비슷하다 평하는 말을 들으면 이방원은 지하에서 피를 토할지도 모르는 일이다.[59] 정확히는 고려의 옛 풍습에 첫눈을 보내는 심부름꾼을 서로 먼저 잡으면 한턱을 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세종 즉위년(1418) 10월 27일 기사.[60] 정도전도 사병을 혁파해야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61] 이후 조선은 태종 ~ 문종 때 계속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62] 아직 고려가 남아있던 시절에는 반대파 대신을 탄핵하려던 중 그 계획이 발각되어 자신이 역으로 곤란에 처했다. 이는 정도전이 30대 시절에 벼슬에서 밀려난 이후 40대에 되어서야 복귀한 것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남들은 20, 30, 40대에 걸쳐 벼슬을 역임해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반면 이쪽은 30, 40대에는 자신의 이상과 이념을 다지는 데 보냈고 정치적으로는 배제되어 있었으니 정치적 수완이 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도전에 가려졌지만 같은 동료였던 조준이 정치력이나 실무능력면에서는 정도전보다 뛰어났다. 게다가 외골수였던 정도전과 달리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일관해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63] 태조 때, 세자빈이 쫓겨나고 내시 이만이 처형되는 사건이 생겼는데, 이유가 둘이 정을 통해서란 소문이 있었다. 이에 대간에서 제대로 수사를 해서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태조에게 간하자 태조는 대노하여 "지금 왕실을 능멸하는것이냐?"라고 하면서 공신을 제외한 대간 전체를 죄다 유배 보냈다. 이러니 대간이 제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64] 이처럼, 태종은 설령 심기를 건드리는 일일지라도 필요하다면 유지하고 참아내었다. 왕위를 향한 욕심으로 자주 비교하는 세조와 마찬가지로 그 과정에 여러 사람을 죽였으나 동시에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정확히 알았으며, 이를 관철시킬 정치력이 있었다. 설사 본인이 질색하는 일이라도 공적인 목표를 위해서라면 감수하였고, 당장 이롭게 구는 이라도 추후 나라에 해를 끼칠 위험이 있으면 내쳤다. 이 때문에, 태종 대에는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재정이 흑자를 기록했으며, 다음 대에 세종이라는 성군이 나올 수 있었다.[65] 이는 당시 조선의 경제가 상업이 아닌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고, 교통로가 황폐화돼서 고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본래 고려에는 원과 만주, 그리고 류큐와 일본까지 이어주는 국제 교통로가 활성화 되어 있었으나, 흑사병으로 중심 국가인 원나라가 망해버리고 교통로가 비활성화됨과 동시에 홍건적, 왜구가 한반도 전체를 털어버리면서 안 그래도 안 써서 묻혀가던 교통로가 완전히 파괴된다. 때문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시전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대규모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는 조선 후기에 민간 경제가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해결된다.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바로 금난전권 폐지이다.[66] 게다가 정릉이 묘로 격하되어 버린 때도 심온 숙청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67] 신덕왕후가 죽고 뒷배가 사라진 세자 방석에게 권위를 실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68] 하륜은 자신의 사위들까지 동원하여 노른자 땅을 가장 먼저 자기 것으로 삼았다.[69] 태종으로서는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신덕왕후는 이방석의 위치를 다지기 위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지속적으로 경계했으며, 그중 가장 많이 견제당한 사람이 바로 태종이었다. 비록 방석을 세자로 삼은 일에는 태조의 의중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했던 신덕왕후를 태종으로서는 좋게 볼 수 없었다.[70] 이 일로 인해 이성계의 진노를 샀지만 말이다. 사실 이성계가 깨어난 후로 정몽주가 이성계를 어찌할 방도는 막힌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였고, 정몽주는 역적으로서 저잣거리에 매달렸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의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이상 그 사정이 어찌되었냐를 떠나 이방원은 정몽주라는 방해물을 제거한 일등 공신이 되는 것이다.[71] 창왕 폐위와 공양왕 즉위 이후 후계구도에서 배제됐다는 견해도 있다. 이방우가 창왕의 책봉을 위해 명으로 가는 사신단의 수장이었는데, 이 창왕이 폐위되면서 이방우는 버림패가 됐다는 것.[72] 자신은 신덕왕후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를 봐서 제사만은 지내주겠다는 말이다.[73] 실록에서도 이방석 책봉 당시의 기사에서는 일관되게 태조가 직접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관철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정도전조차도 원래는 이방석 지지자가 아니었다.[74] 이 일이 소문이 퍼져 김한로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김한로도 은근히 자신의 딸이 세자빈이 된다니 좋았는지 이걸 듣자 형조판서에게 가서 하소연했고 형조판서는 다시 태종에게 가서 아뢰었다.[75] 다만 곧 공부와 이현은 다시 석방되었다.[76] 장자승계원칙에 따라서 만약 세자가 폐해지면 바로 그 다음 아들인 효령대군이 세자가 되어야 했다. 형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동생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고 해버렸기 때문에 1차 왕자의 난이 터진 것이기도 하다. 태종이 아들바보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장자계승원칙을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한 사람이었는데도 태연하게 '효령 걔는 도 못 먹고 뭔 말을 하면 웃기만 하니 왕은 도저히 못 시키겠는데.' 하고 승계 순위가 밀리는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부연하자면 왕자들 사이의 권력 쟁탈전에 아주 통달한 태종 같은 왕이 보기에도 앞으로 태종 사후에 효령대군이 보위에 오른 충녕(=세종대왕)의 권세를 노릴 가능성이나 세종대왕이 효령대군을 제거하려 할 가능성은 제로였다는 뜻이다.[77] 실제로 한고제 유방이 죽은 후에 여후가 한나라를 얼마간 여씨의 천하로 만들어버린 사례도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78] 하지만 결국 조선왕조 말기에 여흥 민씨의 나라가 되어 망국을 맞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79] 임금이 내전으로 들어가서 여러 신하들의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청(請)을 왕비에게 말하니, 왕비가 불가(不可)한 것을 말하기를,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禍亂)의 근본이 됩니다." 하였다." 태종 18년 6월 3일 임오 1번째 기사[80] 이런 인물이 이외에도 더 있는데,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된 박습 역시 태종의 동기였다가 간관직을 거쳐 병조판서를 역임한다. 심온의 옥사에 휘말리면서 끝이 좋지 못했다는 것도 김한로와 닮았다.[81] 처형당한 대표적인 인물들인 민씨 형제는 양녕과 세종의 외숙부, 심온은 세종의 장인이다. 태종 사후 왕이 인정에 이끌려 복귀시킬 가능성도 높으니 아예 죽여서 여지를 없애버렸지만, 김한로는 세종이 형의 장인에게까지 그런 인정을 베풀 이유는 없으니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 외척이 아닌 공신인 이숙번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유로 정치 생명만 끊는 것으로도 충분했기에 목숨을 거둘 필요는 없었다.[82] 다만 심온의 가문 자체는 상당히 빵빵한 명문가문으로, 그 아버지가 개국공신이었다.[83]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로 박은은 세종이 충녕대군이던 시절에 심온에게 '사위 관리 좀 잘 하라.'고 말했지만, 심온은 그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박은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에게 자꾸 딴지를 걸었기 때문. 이 말에는 '이대로 세자가 즉위하면 당신이 왕에게 무사할 것 같냐.' 혹은 '충녕대군께서 왕이 되면 태종께서 당신을 가만히 놔둘 것 같냐.'는 의미다. 이를 두고 심온이 자기 사위가 왕이 되는 걸 보고 싶어했다는 해석도 있다.[84]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세종대왕이 조선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았다면 소헌왕후는 최고의 왕비로 평가받았다. 더 말이 필요한지?[85] 간단히 말해서 폐출 후 새 왕비를 들이면 또 숙청, 그리고 다시 또 폐출하면 또 숙청, 말 그대로 폐출 - 숙청 - 폐출 - 숙청의 무한루프의 시작을 끊을 수 있었다.[86] 물론 태종이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라도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데는 왕비 자리를 지키는 게 유리하긴 하지만, 당장 아버지는 억울하게 역적 누명을 쓰고 심한 고문을 받고 자살, 어머니는 노비로 떨어지고 가문이 날라갔는데 자식 입장에서 계속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유리할 때를 기다릴 생각은 못 하는 게 정상이다. 원경왕후 정도라면 민무구/민무질이 죽은 직후엔 후일을 도모한다는 생각을 해 볼 법도 했겠지만, 소헌왕후는 그만한 결기는 갖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소헌왕후가 원경왕후 같은 성품이었으면 태종이 며느리로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87] 성녕대군의 처가의 경우에는 성녕대군이 너무 일찍 죽어서인지 좀 많이 우대 받았다. 세종 때 바뀌긴 하였지만, 태종 때만 해도 사위는 군에 책봉되는 등 나름 우대받았다.[88] 다만 민씨 사형제의 아버지였던 민제와 달리 심온은 집안에서는 심덕부의 후처의 아들이고 굉장히 늦둥이라서(심덕부가 1328년생, 심온이 1375년생으로 부자간 47년의 터울이 나는데 결혼을 빨리 했던 당시로서는 거의 부자간이 아니라 조손간 뻘이다), 터울이 많이 지는 이복형들을 원활하게 단도리하기에는 어려윘을 것이다. 심온도 태종의 외척 경계에 대해서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었는지, 사위인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오른 후 은퇴의 뜻을 밝혔다.[89] 감싸준 것도 대개 전반부 한정이다. 이 거만하다는 죄목에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큰 사건이 있는데, 이숙번이 사는 집 앞으로 길이 놓인다는 걸 안 이숙번이 길길이 날뛰며 태종의 형님이자 2대 국왕인 정종이 사는 인덕궁 앞에 길을 내라고 반협박을 가해 결국 정종이 물러서며 인덕궁 앞에 길이 났다. 왕권을 건드리는 짓을 절대 용납 안 하던 태종이 나중에 이숙번을 숙청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90] 그래도 세종대왕은 이숙번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해서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세종대왕은 선왕인 태종이 내렸던 결정들은 웬만해선 존중했다.) 경기도에서 사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이 이숙번에게는 조금은 다행이었는데 원래의 유배지는 경상도였다. 유배지는 죄의 경중과 이전의 공적을 고려해 도읍지인 한양과 얼마나 가까울지, 멀지가 결정된다. 과거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마지막엔 경상도보다도 더 머나멀고 육지와도 동떨어진 그 유배지가 제주도로 옮겨진 것만 보더라도 이숙번의 유배지가 경상도에서 경기도로 보다 도읍지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진 것은 그의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1] 오히려 후대의 영조 31년에는 무려 총 200명이 죽는 대형 옥사가 터진다. 물론 이미지가 그렇지 죽인 숫자 자체는 태종이 더 적다. 차라리 태종은 자비로울 지경. 물론 중후반대로 가면 태종과는 사정이 약간 달라지지만...[92] 대표적으로 태종의 공신들이었던 이천우, 조온 등이 이런 식으로 실권을 상실하였다.[93] 물론 이는 홍무제가 중국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역대급 흙수저 출신 황제이다 보니 자신을 무시하는 기존 권력층을 때려잡아 왕권을 확보해야 할 이유도 있었다.[94] 애초에 1차 왕자의 난은 잘못된 왕위 계승 문제가 주 원인이었고 2차도 태종이 유도한 것으로 추정되긴 하지만 어쩄든 방간이 선빵을 때린 거라 명분이 있었다. 문제는 영락제 쪽은 건문제가 선황의 적장손이다보니(조선으로 옮겨서 보면 이방우의 장남이 왕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명분에서 딸릴 수밖에 없다.[95] 다만 영락제는 건문제가 왕족들을 숙청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제거하려 해서 발악을 한 것이긴 했다. 명분 이전에 목숨이 날아갈 처지였던 것. 그런데 생각 외로 황제 측이 전력은 빵빵했어도 그 전력을 운용할 장수가 없고(전부 홍무제가 숙청했다) 건문제도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96] 사관은 대개 무신들을 깔보기 쉬운 문신인데도 조영무의 졸기에는 '소박하고 공정하며 바른말 하기를 잘했다.'라고 평가했다.[97] 다만 그렇다고 해도 하륜은 어떻게 보면 태종의 예상보다도 오래 살았다고도 볼 수 있다. 앞서 하륜은 태종보다 20세 연상이었는데, 그 하륜이 숨졌을 때 나이가 70세로, 당시에는 60세까지 살아도 "죽었다고? 살만큼 살았네!"라고 넘어갈 나이인데, 그 나이에서 10년을 더 산 것이니 상당히 장수한 것이다.[98] 단, 구족은 중국에서 매번 벌어진 일이고, 조선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안 했다.[99] 다만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은 주동자가 자기 가족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들의 죄를 뒤집어씌워 죽인 탓에 처형도 참형으로 깔끔하게 끝냈다. 역적은 기본적으로 극형에 처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걸 감안하면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었으니 죄인들은 죽더라도 깔끔하게 죽게 해준 것.[100] 물론 본인이 악역을 자처하고 벌인 일이지만, 손에 많은 피를 묻혀 성군으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본인도 말년인 상왕 시절 최측근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면 "과인은 덕이 없으므로..."라고 자조하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101] 물론 성종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우동의 사형은 간통의 원인이 강간인데다 강상죄 등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료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성종이 밀어붙였으며, 정 처형할 거면 추문에 가담한 자도 색출해 처형하자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종이 기본적으로 신하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명군이지만 밀어붙일 때는 본인 뜻대로 밀어붙히는 강단있는 군주였다.[102] 고려는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오녀산성을 비롯해 아주 잠깐 요동을 점령하였다. 이 때 큰 활약을 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 그리고 위화도 회군과도 관련이 있다.[103] 한번은 사신이 아니라 명나라가 왕자를 보내달라고 요구해서 간 적도 있었다.[104] 심지어 나중에 성조로 고쳐지기는 했지만 영락제가 처음 받은 묘호가 태종이었다.[105] 실제로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이었다.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로 손을 뻗기 전까지 중국은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강대국이었기에 조공 무역은 말 그대로 우리가 이만큼 성의를 보였는데 천자국으로서 설마 빈손 대접을 할 거냐고 은근히 압박하는 거라 어쩔 수 없이 선물을 줘야 했다. 명나라의 선물 대부분은 조선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귀중품이나 발전한 물건들인지라 조선은 이걸 받아서 자체적으로 발전에 필요한 재료 및 국고로 활용이 가능했다. 쉽게 비유하면 설날에 조카삼촌에게 세배하고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 세뱃돈을 두둑히 주는 것과 같다.[106] 명나라 입장에서는 변방국인 일본은 조공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10년에 1회(...)가 최대였다. 명나라는 이후에는 조선에게 조공 좀 그만하라고 했지만 조공 무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이득을 조선이 포기했을 리가...[107] 사실은 태종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몰랐던 척하라고 실록에 나와있다...[108] 형식상 스스로 양위한 왕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세조, 중종, 고종 총 7명이 있었다. 그 중 태조와 정종은 태종의 무언의 압박과 권력에 대한 환멸을 이유로 양위하고, 세조와 중종은 죽기 하루 전에 물려줘서 사실상 양위라고 볼 수 없으며,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인해 일본이 강제로 쫓아냈다. 단종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야사] 즉위식 때 세자인 충녕이 아직 왕이 되고 싶지 않아 세자가 사용하는 양산을 집어들었는데, 태종이 굳이 왕의 양산을 손에 들려준 후에 절하며 '주상, 이 조선을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예를 갖추니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이 감격하여 엎드려 통곡했지만, 충녕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위엄을 지키기 위해 울음을 꾹 참았다는 이야기가 있다.[109] 황희에 대한 비판이 올라오자 "정승이라고 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륜은 욕심많고 박은은 아첨하기 좋아하고 이원은 이(利)만 알고 의(義)는 모르는 인간이었다." 라고 반박했다.[110] 여담으로, 상왕이 됐음에도 신하들은 사냥다니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태종은 세종과 함께 운동한다는 핑계를 댔다고 한다.[111] 게다가 100간에 달하는 집을 네 채나 짓고 며칠 이 궁 또 저 궁 옮겨다니며 살았는데, 몇몇 이들에게는 안 좋게 보였는지 누구는 "저렇게 놀고 사냥하고 자빠졌으니 우왕 꼴이 날 거야!"라고 말했다가 참수되기도 했다.[112] 1. 많은 경험을 쌓아 세상일에 익숙하다. 2. 나이에 비하여 어른티가 나다.[113] 양녕대군 문제로 인해 유배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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