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선)/특이한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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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자빈 문제
2. 며느리 문제
3. 건강 문제
4. 사직할 수 없는 직장
5. 자손


1. 세자빈 문제[편집]


세자는 첫 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를 멀리하고 효동과 덕금이라는 궁녀들을 더 총애하였다. 야사에 휘빈 김씨가 박색이었다고 한다. 휘빈 김씨는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압승(壓勝)이라는 주술을 쓰다가 발각되어 폐위되었다.[1]

세종대왕은 두 번째 세자빈을 뽑을 때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순빈 봉씨를 간택했다. 하지만 순빈 봉씨도 세자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을 좋아해 무단으로 궁중에 술을 반입해 즐겼으며, 성격도 난폭하기 짝이 없는데다 질투까지 심해 궁녀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했다. 세자는 순빈 봉씨의 투기가 한나라 여후 못지 않다고 하였다. 처음엔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던 순빈 봉씨는 그렇게 되지 않자 궁녀와 동성애를 하는 사건까지 일으켜 폐위되었다.

세 번째 세자빈 권씨는 행동에 흠이 없었으나, 단명하였다. 세손을 낳고 다음날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이후 정실 부인을 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문종은 즉위 기간 동안 중전이 없던 유일한 조선 국왕이다. 그리고 이 결정이 결국 계유정난을 막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된다.

2. 며느리 문제[편집]


의외로 세종은 며느리 복이 참 없는 왕이었다. 세자 시절 문종의 정실 두 명 이외에 지차 왕자들의 부인 중에도 손수 이혼시킨 며느리가 두 명이나 더 있다. 4남 임영대군과 8남 영응대군의 처로, 이들은 몸이 병약하여 쫓겨났다.

임영대군의 첫 부인인 남씨는 단종 초에 좌의정을 지낸 남지의 딸로, 정신이 약간 온전치 못했던 듯 하다. 1433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황을 파악한 세종이 본인 주도로 신하들과 논의 끝에 이혼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영대군을 최승녕의 딸과 재혼시켰다.

막내 아들로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영응대군 역시 처음 들인 대방부부인 송씨[2]를 병이 있다 하여 쫓아내고 정충경의 딸과 재혼시켰다.[3] 그러나 영응대군은 첫 부인 송씨를 잊지 못하고 계속 찾아가 딸 두 명을 낳았고, 계유정난 이후 결국 정씨를 쫓아내고 송씨와 재결합하였다. 대방부부인 송씨는 질투심이 많고 사나워 나중에는 영응대군이 두려워 했다. 첩들이 영응대군의 얼굴을 거의 못 보고, 영응대군이 세상을 떠날 즈음 첩이 낳은 아들에게 송씨 몰래 숨겨놨던 보물을 물려주었는데 송씨가 알고 이것을 빼앗아 절을 지었다.[4]

실제 이들의 의중은 알 수 없어도, 세종의 적자들 중 계유정난을 기준으로 차남 수양대군과 4남 임영대군, 8남 영응대군 VS 3남 안평대군, 6남 금성대군의 구도가 이뤄진 상황이었다(장남 문종과 5남 광평대군, 7남 평원대군은 이미 죽은 뒤였다). 세종대왕의 은혜를 입었기에 단종을 위해 옹호하였다는 단종 계열 신하들을 보면 임영대군은 몰라도 영응대군 역시 쉽게 수양대군 편을 들 상황은 아닌데 이랬던 걸 보면 원치 않은 이혼으로 내심 아버지를 원망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3. 건강 문제[편집]


세종은 편식, 운동부족, 과로, 스트레스, 고된 정사와 같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생활 습관으로 인해 각종 질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특히나 많은 왕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세종의 어진은 상상화이며, 실제로는 상당한 비만이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고 세종이 운동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종의 건강을 걱정한 어의들이 억지로 조금이라도 시켰을 것이며, 세종도 좋아했던 스포츠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 스포츠는 조선식 골프라고 할 수 있는 격방이었다.(...)[5][6] 물론, 세종이 정말로 비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도 없고 어진도 소실되었기 때문에 세종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현대의 해석이 가미된 것이다.

즉위 말년에는 당뇨에 인한 합병증으로 온갖 통증에 시달렸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나, 해당 통증들은 당뇨가 아닌 강직성 척추염 때문이란 주장도 있다. #, #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시달렸다는 안구 통증. 당뇨병으로 인한 망막증은 통증이 없으나, 세종은 수 차례 안구 통증을 호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이 강직성 척추염을 앓았기 때문에 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여기에 편식 등 안 좋은 식습관과 과로[7] 때문에 온갖 질병과 통증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종의 생활 습관을 살펴 보면, 둘 다 앓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세종이 고기 마니아였던 까닭은 집안 내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씨 집안은 여진, 몽골 같이 육식을 자주하는 이민족들과 부대끼며 살던 동북면 장군 집안으로 할아버지한반도 전역을 넘어 요동까지 누빈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고, 큰아버지 역시 할아버지를 따라 일찍이 전장을 누볐으며 사냥과 스포츠를 즐긴 무골로 사냥한 짐승을 태조에게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그나마 집안에서 문관 출신이었던 아버지조차도 조선 왕조에 손꼽히는 사냥 마니아였다. 집안 자체가 부유한 상류층이었는데, 아예 왕족으로 올라선만큼 사가에서 지낼 때부터 자연스럽게 육식과 가까울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조부와 부친, 큰아버지는 격구, 활쏘기, 말타기, 사냥 같은 운동을 즐겨 육류 위주의 식습관을 가져도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세종은 독서를 매우 좋아했는데, 몸을 움직이기 싫어해서 방에서 들어 앉아 꼼짝도 않는 지금의 비만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수라상에 고기반찬이 없으면, 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어지간히 편식이 심했던 모양이다. 아버지인 태종은 정종의 3년 상을 치를 때, 세종이 잠시 고기를 끊는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도[8] 한편으로는 아들 걱정이 또 발현되어서 본인이 승하하기 직전 남긴 유언 중에 '주상이 고기를 좋아하니, 내 상을 치를 때는 고기를 먹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9]

임금이 허손병(虛損病)을 앓은 지 여러 달이 되매,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서 육찬(肉饌) 자시기를 청하여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듣지 아니하고, 병세는 점점 깊어 약이 효험이 없으니, 유정현 · 이원 · 정탁 등이 육조 당상(六曹堂上)과 대간(臺諫)과 더불어 청하기를, “평인(平人)들이 만사를 제폐(除廢)하고 상제(喪制)를 지켜 행하여도 3년 안에 병에 걸림을 오히려 면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전하께서 지존(至尊)하신 몸으로 소찬(素饌)만 진어(進御)하시고 만기(萬機)를 보살피시면서 3년의 상제(喪制)를 마치고자 하신다면, 병이 깊어 치료하기 어렵게 되시리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이를 위하여 산 사람을 상해(傷害)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육즙(肉汁)으로서 구미(口味)를 돕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제 세자(世子)가 어린데, 전하께서 상경(常經)만 굳이 지키어, 병환이 깊어져서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시게 된다면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의 복이 되지 않습니다. 태종의 유교(遺敎)에도 또한 말씀하시기를, "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10]

고 하셨으니, 이는 곧 전하께서 예법을 지키시고 지나치게 슬퍼하시므로, 앞으로 건강을 해하실까 미리 아시고 염려하셨사오니, 어찌 위로 조종(祖宗)의 영(靈)을 위로하시고, 아래로 신민(臣民)의 바람에 좇지 아니하십니까.”

세종 4년(1422년) 11월 1일(갑인)


하지만 애초에 이 유언이 알려진 계기가, 세종이 3년상을 치르던 도중 고기를 안 먹어서 신하들이 건강을 해친다며 올린 상소에서 인용한 것이어서, 안 먹을 땐 안 먹었다. 물론 아예 밥 자체를 먹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서 영양실조로 죽은 인종을 제외하면, 3년상 중에 임금이 고기 안 먹는다고 신하들이 기겁하며 말리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 까짓거 고기 한번 안 먹는다고 안 죽어요~” 라고 하면 안 되니까 빈말로라도 챙겨드셔야 한다고는 했겠지만 말이다. 이 편식만큼은 고치지를 못해서, 임금이 초가집에서 살고 고기 반찬을 금함으로써 하늘에 속죄해야 하는 가뭄 때에도 고기 반찬을 거르지 않았다. 설렁탕도 세종이 선농단 제사를 올릴 때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선농단에 발이 묶이게 되자 배가 고파서 친경[11]에 쓰인 밭 가는 를 보고 그 자리에서 잡아 만든 데서 유래한 음식이라는 야사가 있을 정도. 사실 설렁탕몽골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음식이지만 여기에는 설렁탕과 같은 형태의 요리 자체가 몽골의 영향으로 생겨나기는 했으나 설렁탕이라는 이름과 구체적 형태는 선농단에 어원이 있다는 의견이 있으니, 설렁탕을 무조건 몽골 요리라고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졸곡(卒哭) 뒤에도 오히려 소선(素膳)을 하시어, 성체(聖體)가 파리하고 검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바라보고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또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시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시는 터인데, 이제 소선(素膳)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되나이다. 옛날 원경왕후(元敬王后) 초상에 태종께서 육선(고기반찬)을 권하시면서 이르기를, ‘주상의 한 몸이 종사(宗社)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니,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셨나이다. 신 등의 오늘날 청하는 것도 또한 종사와 생민(生民)을 위하는 것입니다.”

세종 4년(1422년) 9월 21일(을해)

"졸곡(발상 후 3달) 후에도 오히려 드시지 않아 몸이 여위시고 검게 된 모습을 보면서 신하들 가운데 뵙고 놀라지 않은 사람들이 없으며 또 평소에도 고기 없이는 식사를 하지 못하시는 분인데 드시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 건강이 심히 염려됩니다. 옛적 원경왕후께서 돌아가신 날 태종께서 고기반찬을 권하시며 말씀하시길 '왕의 몸은 왕조의 평안과 관계되는 일이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의 청하는 이유 역시 왕조와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다.

현대어 번역본


그리고 태종이 직접 세종의 건강관리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지만, 몸이 비중하니 가끔 밖에서 놀기도 해야 하므로 사냥을 함께 하면서 무사(武事)를 강습하려 한다."

세종 원년 10월 9일 기사.


다만 여기에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의 생활이 심심하니[12] 아들 핑계로 사냥을 즐기며 놀러 다니고 싶은 태종의 꼼수도 있기는 하다. 세종의 이와 같은 고기 사랑은 본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역사적인 성군이 고기만 먹는 편식의 대표주자였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들려서인지, 오늘날에는 세종 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훈민정음 다음에 고기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런 세종도 유독 입도 안 댄 고기가 하나 있는데, 바로 양고기다. 당시 조선에서는 양고기가 나오지 않아 수입을 해야 했는데, 세종은 수입할 돈으로 더 많은 백성을 먹여살릴 수 있다며 거부한 것이다.
다만 세종 초기 영락제가 세종에게 잔치하라고 양과 거위를 하사하는 기록이 있는 걸[13] 보면, 적어도 양고기 맛을 본 적은 있을 가능성은 있다.

세종이 고도 비만까지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이 김종서에게 이런 말을 한다.

"30살 전에 매던 띠(帶, 허리띠)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 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과인의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년) 8월 18일.


젊었을 때 매던 허리띠가 헐거워져서 허리둘레가 줄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데다가 살쩍에 흰 터럭이 나 있다고 말하는 장면. 이걸 보면 재위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젊었을 때보다 살이 빠져 버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다만 이 부분은 당뇨병에 의한 체중 감소로 보기도 하는 편이다.

게다가 식욕뿐만 아니라 성욕도 왕성해서 후궁 포함 7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보았다. 부부간의 금슬도 좋아 그 중 8남 2녀가 정실부인 소헌왕후와 사이에서 나온 자식으로 조선조에서 2번째로 많은 정실 자손을 보았다. 문제는 태어난 왕자들도 죄다 아버지를 닮아 능력이 매우 뛰어나 그들에게 국사를 맡기는 바람에 문종이 승하한 이후 조선의 정치에 큰 파란을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14] 그래서인지 세종은 임질에도 걸렸다. 이 임질이 성병이냐 아니냐에는 많은 말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실록을 검토한 한의사들은 성병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한의학에서 말하는 임(淋)은 현대 의학 기준으로는 요로결석, 혈뇨 등을 포함한 배뇨장애의 총칭이며 크게 5가지의 오림(五淋)으로 나뉜다. 육식을 즐기고 비만했던 세종의 기록을 보면 고림(膏淋)[15]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임질의 기록을 찾아봐도 증상이 요도에 발생할 질환에 가깝게 설명되고 심지어 아버지의 그 곳을 빨아 임질을 낫게 했다는 효자 이야기도 있다. 현대 의학 용어로 굳이 적자면 신경성 방광염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세종대왕이 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유명해서인지 이런 패러디 영상도 있었다. 이 영상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등장하는 세종대왕 배역을 맡은 한석규가 나왔다.#[16] 스펀지에서도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고기가 없다고 반찬투정을 하는 세종의 화면을 내보냈는데, 이혁재[17]가 세종으로 분해 상당히 그럴싸하게 역정을 냈다. 반면 식생활이 검소하기로 유명한 영조는 패널 중 한 명인 홍지호 박사가 연기했다. 간장 한 종지를 아껴서 내년에 또 먹는다는 대사로 패널들의 배꼽을 뺐다.

단순한 식습관과 운동 외에 과로 역시 몸을 망친 주범이었다. 세종은 수면 시간이 상당히 적었다고 할만큼 그만큼 일을 많이 했고 수면 부족과 과로가 이중으로 겹쳐 가뜩이나 젊었을 때부터 안 좋았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킨 것. 신숙주가 밤늦게 책을 보다 잠들어 세종이 덮을 것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시간까지 왕이 잠도 안 자고 일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아래의 "평생직장"과 함께 생각하면 신하 입장에서는폭군, 암군보다는 훨씬 낫지만 만나고 싶지 않을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또 세종은 비만 때문에 심각한 시각장애수전증을 앓고 있었다. # 세종은 지화에게 종3품을 작록할 때 이미 눈병을 앓고 있었다. 질병의 원인이 당뇨[18]라는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신빙성 있는 주장은 아직까지 딱히 없는 상태이다. 눈병을 오래 앓아 눈이 침침하였고, 말년에 가면 지팡이 없이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실록을 보면 세종 23년 2월에는 “내가 안질을 얻은 지 이제 10년이나 되었으므로 마음을 편히 하여 조섭(調攝)하고자 하니 매월의 대조회와 아일(衙日)의 조참(朝參)과 야인들의 숙배(肅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없애게 할 것이며, 향과 축문도 친히 전하지 말게 하라”, 4월에는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서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서는 걷기에 어려웠다.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더니, 어젯밤에 이르러서는 한방 약물학 책의 주석(註釋), 작은 글자를 보았는데도 볼 만하였다”고 하였다. 현대의 시각장애 등급으로는 약 4~5등급으로 예상된다. 이 정도의 시각장애는 시력검사표에서 제일 윗 글자를 읽을까 말까 하는 시력이다. 그래서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아버지 태종이 독서를 좋아하는 세종의 책들을 한 권도 남김없이 다 수거해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얘기는 아주 유명한 일화.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도 당뇨와 심각한 눈병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격무에 시달렸다고 한다.

4. 사직할 수 없는 직장[편집]


파일:attachment/황희/retirement.jpg
황희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 세종을 그린 만화.[19]

* 1431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20]

* 1432년(세종 14)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 같은 해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1435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 1436년(세종 18)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1438년(세종 20)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 1439년(세종 21)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같은 달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 1440년(세종 22)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 1443년(세종 25)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 1449년 10월 5일 황희를 영의정부사로 그대로 치사(致仕, 벼슬을 두고 물러남)하게 하다.

* 1452년(문종 2) 2월 8일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卒記/사망).


실록에 나온대로 세종을 신하들의 사직도 윤허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부려먹은 왕으로 인식한다면 조선왕조실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생긴 오해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은 인물들이 밟은 행적의 원인과 정치적 의도를 모두 고려하여 해석해야 하는데 액면 그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이렇게 오해가 발생한다. 조선의 역사를 연구한 교수들은 세종이 신하들의 사직을 반려한 이유를 신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판단한다. 황희처럼 오래 재직한 재상들은 다른 신하들에게 언제 그 자리에서 물러나냐는 의문과 질투를 받기 마련인데 이를 막고자 신하는 사직을 원하지만 왕인 내가 윤허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또한 3년상을 정석대로 치르느라 관직에서 물러나는 경우 경쟁이 심한 조정에서 거물이 아니고서야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래서 신하들의 앞날이 막히지 않도록 상중에도 한양에 남겨두는 정치적인 배려를 한 것이다. 시국에 따라 3년상을 줄이거나 상복을 벗고 직무를 수행하도록 지시하는 기복은 세종이 갑작스럽게 만든 제도가 아니다.

그래서 신하가 죽기 전까지 부려먹는 악덕 왕이라는 유머도 존재한다. 출중한 능력을 발휘할 의지를 가진 신하를 신뢰하여 고용하면 마지막까지 고용한 세종 특유의 인사 스타일로 나온 이야기이므로 사직도 윤허하지 않으면서 부려먹은 왕으로 보는 건 오류이다. 조선 왕조에서 사직의 횟수와 사유를 그대로 해석하면 오류가 일어난다. 사직서만 모아도 한 권 이상의 분량이 나오는 류성룡은 누가 보더라도 사직의 이유가 이순신인데도 불구하고 사직서에서는 건강을 이유로 든다.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파직된 1597년 2월부터 정탁과 이원익의 구명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으로 풀려나는 4월까지 류성룡은 칭병하고 자택에 칩거해서 10번의 사직서를 올린다. 실록에는 사직서의 일부만 기록된 것. 선조는 류성룡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다가 이순신을 풀어주고 나서도 사직서를 올리는 류성룡에게 병든 몸으로라도 당장 조정에 나오라고 어명을 내린다. 그렇게 류성룡은 강제로 조정에 복귀하게 된다.

휴식을 모르고 일하기 바쁜 세종의 신하들이 격무에 시달린 것은 당연하다. 황희, 조말생, 김종서 등 세종 치세의 신하들은 사직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노년기에도 관직에 머물렀고 건강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해도 모두 반려당한다. 황희도 노환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하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는 것으로 응수한다. 이징옥을 비롯한 다른 신하들도 수많은 사유를 말하며 사직을 요청하나 역시 윤허하지 않는다. 그래서 황희는 세종 치세에 80대의 나이에도 정승으로 일하였다. 포기하지 않고 사직을 요청한 황희는 결국 사직에 성공하지만 그때는 세종이 승하하기 4개월 전이다. 사실 황희는 유능하지만 비리를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바람에 여러 번 탄핵을 당한다. 세종도 황희가 저지른 비리를 알지만 황희의 능력이 출중하고 왕권에 위협을 가하는 비리를 저지른 것도 아니어서 황희가 사직을 요청해도 반대하는 입장만 피력해서 황희는 권력욕이 없어서 물러나려 하지만 내가 관직을 유지시키는 것이니 더는 거론하지 마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이러한 세종의 모습은 아버지인 태종과 유사한데 태종도 뇌물을 많이 받은 하륜을 탄핵해야 한다는 상소를 받고서도 하륜이 왕권을 위협하지 않는 신하라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넘어간다.

물론 세종의 치세에는 신하들이 세종의 뜻을 따라서 막중한 업무를 하였으므로 현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사직하려는 걸 세종이 알고 막은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게다가 후대를 위해서 과거로 뽑은 젊은 신하들을 세종이 집현전에서 무자비하게 굴리는 바람에 고령의 중신들이 고생이 심하였다. 일이 너무 힘들지만 3년상을 치른다고 사직서를 내도 세종이 핑계로 여기고 윤허하지 않을 상황이니 장영실이 업무에서 벗어나려고 고의로 가마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말도 나온다. 조선에서 3년상을 치르다가 사망하는 사람도 많았을 정도로 3년상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의 신하들은 3년상을 치르려고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이순신도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3년상을 마치고 복직하였다. 그렇게 신하들을 굴리면서도 신하들이 지치지 않고 일하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 왕이 세종인데 황희가 노환으로 힘들다고 사직을 청하니 가마를 지원하였다. 신하들이 질병으로 사직하거나 제수를 거절하는 건 보통 핑계인데 황희에게 가마를 내리고 집에서 근무하라고 지시한 기록을 보면 황희의 경우 정말 순수하게 병을 앓은 것이 이유로 보인다. 그렇다면 세종은 조정으로 출근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아픈 황희에게 일을 시킨 왕이 된다.

신하들도 세종이 세자에게 업무를 넘기는 것을 막으면서 받은만큼 보답하였다. 물론 태종처럼 조선에서 임금이 대리청정이나 양위를 한다고 선언하며 왕권을 확인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순조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기 전에는 대리나 양위를 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이 단체로 "아니되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면서 거둬달라고 고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아픈 시기에 세종이 창제한 것이 훈민정음. 조선 시대를 통틀어 세종만큼 개성이 강하고 튀는 신하들이 많은 왕도 드물다. 황희, 맹사성, 허조, 조말생, 최윤덕, 정인지, 최만리, 김종서, 황보인, 정분, 이예, 이징옥, 박연, 장영실, 이천,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이 세종 치세의 신하들인데 이렇게 성향이 분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신하들을 데리고 국정을 운영하여 조선을 발전시킨 세종은 인재를 발탁하는 감각과 용인술이 매우 뛰어난 것이다.

5. 자손[편집]


세종이 수립한 기록에서 또 다른 특이한 부분은 조선 왕조 역사상 정실 왕비후궁 소생을 막론하고 아들을 많이 낳은 기록(18남)[21]과 정실과의 사이에서 2번째로 자식을 많이 낳았던 기록(10명, 8남 2녀)이다. 중전 소생이 많은 기록으로는 태조와 태종이 공동 1위(11명)지만, 사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 8명(6남 2녀)과,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3명(2남 1녀)을 합친 것이므로, 정실부인 한 사람만 놓고 보면 세종과 소헌왕후가 2위다. 1위는 아버지인 태종이다. 사이 안 좋은 원경왕후와 8남 4녀를 낳았다.[22]

특히 소헌왕후와의 금실이 좋았는데, 소헌왕후의 사후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을 시켜서 편찬한 것이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불경 언해서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23] 그리고 세종대왕이 그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감명받아 직접 쓴 것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24]

또한 아내와의 금슬이 좋았기 때문에, 후궁들을 들이기 시작한 시기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고 한다. 아마 앞에서 말한 태종이 상왕일 때 장인 심온을 사사했던 과거가 미안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종에 관한 후궁 기록은 세종 4년에 태종이 간택령을 내리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 후 태종의 죽음으로 인한 장례 등으로 실제 후궁이 들어온 것은 세종 6년이니 상당히 늦은 편이긴 하다. 게다가 후궁 소생의 첫 아들은 세종 7년[25]에 태어났다. 2008년에 방영된 사극 대왕 세종의 인기와 관련해서 나오기 시작한 세종 관련 역사소설들은 대부분 이 기록에 따르고 있다.

그 외 자세한 사항은 세종대왕/가족관계 문서를 참조.

[1] 이 주술이라는 것도 보통 주술 수준이 아니라, 궁녀들의 신발을 잘라 태운 재를 술에 타 세자(문종)에게 먹이려 하거나, 뱀이 교접하여 나오는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지니고 다니는 등 선을 심각하게 넘은 것이었다.[2]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송현수의 누이이다.[3] 영양위 정종(부마)의 누이이다.[4] 예종실록 8권, 예종 1년 10월 6일 병진 3번째기사[5] 격방의 규칙은 현대의 골프와 굉장히 유사하다.[6] 알다시피 골프는 선수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운동이라기보단 비지니스나 레저에 가까운 스포츠다.[7] 애초에 조선시대 왕의 업무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일만 해야 할 정도로 많다. 조선 왕들의 태반이 40대에 단명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과로이다. 특히나 움직임이 적은 업무는 당뇨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세종의 일 중독 기질을 보았을 때 특히나 심한 과로에 시달렸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8] 주상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였는데, 이제 초상을 당하여 소찬(素饌)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내가 어찌 어엿비(가엾게) 보지 않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8월 29일[9] 조선시대에도 고인이 생전에 상주나 유족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라는 유언을 했다면, 예법에 상관없이 그 유언을 따르는 것이 도리였다.[10] '권도(權道)'란 '수단은 옳지 않으나 결과로 보아 정도(正道)에 맞는 처리 방도. 목적을 이루기 위한 편의상의 수단'을 뜻한다. 대충 "그 아이는 고기 없이는 밥을 못 먹으니, 내가 죽고 나서도 (장례 기간에 육식은 안 된다고) 너무 따지고 들지 말고 융통성을 발휘해서 장례를 마쳐라"라는 뜻. 숨을 거둘 때조차 아들이 자기 상 치르다가 몸 상할까 염려하는 태종의 자식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이 아들이 왕인지라 몸 상하면 나라가 큰일난다는 점도 있겠지만, 태종은 세간의 호랑이 임금님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지극한 아들바보이기도 했다.[11] 親耕. 선농단 제사 행사 중 하나로 왕이 직접 땅을 갈며 농사를 권장하는 행사였다.[12] 은퇴하고 나서 할 게 갑자기 없어지니 이해가 안 되는 처사는 아니다. 태종은 상왕치고 권한이 적은 편은 아니었으나 당연히 현역 시절과 비교하면 할 게 없어지는게 당연하다.[13] "황제께서 신에게 이르시기를, 중국에 술이나 과일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길이 하도 멀다 하시고, 생견(生絹) 3백 필과 안팎 옷감 30필과 양 1천 마리를 하사하시어, 술과 과일 값으로 하라 하시었으니, 이상의 물건들을 왕이 받으시고, 왕의 나라에 있는 것으로 잔치를 차리게 하시오."하고, 사신이 먼저 태평관으로 돌아가니, 병조 참판 이명덕과 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을 보내어, 채백(綵帛) 15필, 채견(綵絹) 15필, 생견 3백 필, 양 8마리, 거위 16마리, 《음즐서(陰騭書)》 1천 권을 받아 오게 하였다.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8017_001[14] 사실 이건 어린 단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해 줄 대비나 대왕대비가 없었다는 점도 컸다. 대비나 대왕대비, 즉 선왕의 정실부인은 중전 시절부터 내명부를 총괄해야 했으니 정치적 감각이 어느 정도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줄 수 있고, 설령 감각이 좀 부족하다고 한들 왕자 출신 종친 입장에서는 법적으로 혹은 실제로 어머니/할머니/형수이기 때문에 대비가 어린 왕을 감싸면 함부로 무시하기 어려웠다.(여담으로 그렇기에 반대로 대비가 왕에게 등을 돌리면, 그건 왕을 갈아치울 명분까지 될 수도 있다.) 물론 숙종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수렴청정을 받지 않은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이 쪽도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살아있었던 상황이였기에 4세 아니면 5세 정도에 즉위 했더라도 충분히 수렴청정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15] 소변이 쌀뜨물 같고 기름기가 많아 점성이 높은 상태. 당뇨병의 초기 증상이기도 하다.[16] 영상에 쓰인 곡은 고칼로리다.[17] 재미있게도 세종(조선)과 같은 전주 이씨다.[18] 악명높은 합병증으로 망막병증이 있다.[19] 원본은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이다.[20] 이 당시 이미 만 68세였다.[21] 덧붙이자면 자녀복 많은 조선 왕조 군주 랭킹 5위다.[22] 다만 양녕대군 위로 태어난 아들 3명과 1412년에 태어난 아들은 모두 일찍 요절하여 그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23] 석보상절석가모니를 다룬 책이다.[24] 후일 수양대군은 즉위 이후 두 책을 하나로 합쳐 월인석보(月印釋譜)로 펴냈다. 초창기 훈민정음으로 쓰인 것 뿐만 아니라 권1에 훈민정음 언해본까지 실려있는 국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다.[25] 이 시점에서 세종은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 무려 5남 2녀를 얻었었고(이 중 큰딸 정소공주는 요절했다), 그 시점에서 또 금성대군을 임신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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