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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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103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光陽 中興山城 雙獅子 石燈


소재지
광주광역시 북구 하서로 110, 국립광주박물관 (매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석등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시대

파일: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1.jpg
사진 출처 : 광주매일신문 - [문화도시가 품은 국립광주박물관 이야기]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4. 국보 제103호



1. 개요[편집]


光陽 中興山城 雙獅子 石燈. 현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소재 중흥산성 내의 사찰에 소재하고 있던 통일신라시대 석등.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대한민국 국보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편집]


파일: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2.jpg

높이 2.7m.

통일신라시대에 현 전라남도 광양시 지역에서 만들어진 석등으로, 백색의 석질과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빼어난 형태의 작품이다. 원래는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 백계산(白鷄山) 중흥산성(中興山城)[1] 안의 암자에 3층석탑[2]과 함께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경복궁에 옮겨 놓았던 것을 훗날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회수하여 전시하고 있다.[3]

석등이란 돌로 만든 등기(燈器)를 말한다. 불교에서 등기는 예불을 올리는 의식에서 기본적인 도구일 뿐 아니라 사찰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 가운데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도구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석등을 간주석(竿柱石)[4]의 형태에 따라 일반형 석등과 고복형(鼓腹形) 석등, 쌍사자 석등의 3가지로 크게 구분하고 있는데, 이 중 고복형 석등은 간주석의 평면이 원형이고 중앙에 굵은 마디를 두었으며, 쌍사자 석등(雙獅子石燈)은 중간에 간주 대신 두 마리의 사자를 배치해놓았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5] 다양한 고대 쌍사자 석등 유물이 현존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이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2점은 훼손된 부분 없이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어, 2점 모두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상태다.

이러한 쌍사자 석등이 지닌 가장 큰 조형사적 의미는 한국 외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같은 양식의 조형물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독창성에 있다. 늘씬한 간주석이 지지하던 석등에 사자를 배치해 기존에 확립된 고정 관념을 일거에 깨버린 작품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던 중국을 비롯해 전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다보탑과 같은 유형의 조형물을 찾아볼 수 없듯이, 쌍사자 석등 역시 통일신라인들이 창안해 낸 한국 만의 고유한 조형물이다.네이버 지식백과 : 통일신라시대 쌍사자 석등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이러한 국보급의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에 상당히 나쁜 처우를 받아왔다는 민족사의 아픔이 있다.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일본인들에 의해 조각난 채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반출될 뻔 하였고, 이후로도 1990년대에 국립광주박물관으로 들어와 보존되기까지 여러 곳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정리한 상황은 아래와 같다.

  • 원래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 안에 있는 남북국 시대 절터에 3층석탑과 함께 있었다.
  • 일제강점기 1930년 당시 중흥산성이 있는 옥룡면 옥룡보통학교 후원회에서 기금을 마련하고자 이 석등을 땅 주인 모르게 부산의 골동품상에게 매각하려고 했으며, 골동품 상은 이 석등을 대구의 일본인 부호이자 유물 컬렉터인 '이치다 지로(市田次郞)'에게 팔기로 했다.[6] 보통학교 후원회에서 석등의 가치를 따로 알아 보니 자신들의 예상가보다 7~8배 많아 군청 당국과 이 일을 상의하는 중에 자신들의 행위가 위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결국 매각은 무산되었다.
  • 이듬해 대구의 유명한 골동품 수집가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 부산 골동품상의 사주로 석등을 분해하여 옥룡면사무소 앞으로 옮기는 모습이 주민들에 발각되어 석등 반출은 미수에 그쳤고 면사무소에 보관하게 되었다.
  • 이러한 사실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뒤에 석등은 우선 전남 도지사 관사로 일단 옮기게 되었고 다시 이듬해 경복궁 자경전 앞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된 뒤에 이승만 대통령이 있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옮겨졌는데 그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 1961년 5. 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뒤 석등은 청와대에서 덕수궁으로 옮겨진다. 역시 옮겨진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 국립중앙박물관이 1972년 경복궁으로, 다시 1986년 옛 중앙청 건물(조선총독부 건물)로 옮겨갈 때마다 석등도 이사를 했다.
  • 1978년 국립광주박물관이 개관된 이후 1990년에 이 석등은 광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파일: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3.jpg

이러한 막장 상황으로 인해 국보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을 가지고 있었던 사찰은 본래의 사찰명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형편이며, 발굴조사 없이 현재의 사찰이 들어서게 되어 최소한의 단서들조차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7] 다만 현존하는 삼층석탑과 쌍사자 석등을 통해 볼 때 신라 하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선각국사 도선이 35년간 주석했던 광양 옥룡사와 함께 전라남도 내에서는 꽤 거대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일단 옥룡사 통진대사 경보(869〜947)의 비문에 옥룡사의 상원(上院)에서 그가 입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상원인 옥룡사 이외에 여러 사찰들을 하원(下院)으로 거느렸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1,300여년 전에 전라남도 광양시 지역에서 만들어진 화강석제 불교 공예품으로, 당시 전남 지역의 고도로 발전한 석조공예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현존하는 쌍사자석등 중에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함께 가장 완벽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더욱 문화재적 가치가 큰 중요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에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편집]




4. 국보 제103호[편집]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 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을 이루는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이 석등은 큼직한 연꽃이 둘러진 아래받침돌 위로 가운데기둥 대신 쌍사자를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두 마리의 사자는 뒷발로 버티고 서서 가슴을 맞대어 위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실적이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어 주목된다. 8각의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이 뚫려 있고,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장식이 번잡하지 않아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수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그다지 크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조각기법과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는 걸작이라 하겠다. 원래는 중흥산성내에 있었으나, 일본인이 무단으로 반출하려 하여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다가 지금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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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양 중흥산성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다.[2]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이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3] 3층석탑은 본래 자리에 계속 남아 있다.[4] 간주석은 석등의 기둥돌을 뜻한다.[5] 각각 보물 제282호, 제353호, 제389호로 지정되어 있다.[6] 이치다 지로는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의 형제 불상을 일본으로 반출한 인물이기도 하다.[7] 현재 이 곳에 들어선 사찰은 중흥사(中興寺)다. 본래의 사찰은 창건 이후 여러 위기를 넘기면서 면면히 명맥을 이어왔으나 1943년에 결국 폐사가 됐는데, 1963년에 중흥사라는 이름으로 재건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중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