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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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들을 독살하는 클레오파트라. 알렉상드르 카바넬.[1] 1884년 작(作).

1. 개요
2. 상세
2.1. 자위
2.2. 근친혼
2.3. 동성애


1. 개요[편집]


고대 이집트성문화에 관해 정리해놓은 문서.


2. 상세[편집]


고대 이집트는 남녀가 평등한 대접을 받았던 사회였다. 남녀의 경우에는 거의 비슷하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그 대우가 공평했는데, 타 문명권들과는 다르게 여자에게도 계약을 체결할 권리, 재산을 사고팔 권리, 결혼하거나 이혼할 권리, 상속받을 권리, 소송을 걸 권리 등이 인정되었다.[2] 또한 결혼한 이후에도 아내에게 독자적인 재산을 따로 축적하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남편들에게는 부인과 제 자식을 부양할 의무가 분명히 존재했다.[3] 동시대 그리스메소포타미아, 심지어는 몇천 년 후의 로마 시대의 여성 인권보다도 크게 진보한 부분이 있었던 것. 하트셉수트클레오파트라 같은 여성 파라오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여성에게 개방적이었던 고대 이집트 사회의 분위기 덕분에 가능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일반적인 부부형태는 핵가족이었다. 남자는 오직 하나의 아내만을 가지는 게 가능했고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이집트 신화만 봐도 오시리스는 오직 아내 이시스 하나 뿐이며, 네프티스가 일부러 오시리스에게 '접근'해서 그를 유혹했다는 내용이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아내를 제외한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는 건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뜻. 다만 유일한 예외는 지존의 권력이던 파라오였다. 파라오는 수 십에 달하는 첩들을 거느렸고 호화로운 하렘에서 제 하고싶은대로 여자들을 끼고 살았다.[4]

당시 이집트에선 순결이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5] 고대 이집트어에는 처녀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혼전 성관계 역시 사회적으로 크게 지탄받지 않았던, 고대치고는 굉장히 자유로운 사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반드시 제 배우자에게만 충실해야했고, 간통을 저지를 시 채찍질, 신체 절단형, 사형에 처해질 수있었다.[6] 다만 남자에게는 그 처벌의 정도가 훨씬 미약해서 남편이 미혼 여자와 불륜을 저질러도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정도로 끝났다.

이집트인들은 결혼식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맞거나 집안에서 짝지어주는 상대랑 한 집에 들어가서 같이 살면 그게 곧 결혼생활의 시작이었다.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살기만 하면 부부로 간주되었던 것. 보통 고대 이집트에서 여자들은 13~14세에 결혼했고 남자들은 16~20세 사이에 결혼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여자 측에서는 보통 결혼할 때 여러 가구와 지참금을 챙겨왔는데, 이 지참금은 여자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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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무희들.

마찬가지로 이혼도 굉장히 자유로워서 원한다면 남자나 여자나 양측 모두가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혼이 성립되면 재산은 공평하게 반으로 갈라갔다. 결혼 생활 도중 생겨난 재산은 물론이고 심지어 결혼 이전부터 남편의 재산이었던 것들 일부도 여자 측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만약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거나 귀책 사유가 아내에게 있는 경우 아무 것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쫒겨났다.

시간이 흐르며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혼 절차도 점점 복잡해졌다. 나중에는 점점 공권력이 이혼 절차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때문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이혼 관련 공문서도 많다. 이 문서들에 따르면 당시 여성들은 이혼 시 그녀가 가지고 왔던 지참금들을 모두 돌려받았다고 한다. 아니면 전처에게 이혼 합의금 명목으로 한 번에 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심지어 전처에게 자녀가 없더라도 그녀가 재혼할 때까지 매달 봉급으로 위자료를 보내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역사에 기록된 세계 최초의 펠라치오도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 등장한다. 엄밀히 따지면 이집트인들이 아니라 이집트 신화에 등장한다. 오시리스가 세트의 농간에 넘어가 살해당하자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가 남편의 조각난 시신들을 하나씩 다 모아서 그를 부활시키려 했는데, 웬 거대한 물고기가 하필이면 오시리스의 남근을 삼켜버렸다고. 이시스는 어쩔 수 없이 점토로 남근 형상을 만들어 붙인 뒤 그 안에 입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다.

고대 이집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미라와 관련해서도 추잡한 일화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젊은 여성 시체가 죽으면 일부러 시체를 약간 방치해 어느 정도 썩혔다가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유는 미라장이들이 젊은 여성의 시체를 강간하는 경우가 있어서. 물론 모든 미라 제작자들이 이런 짓을 한 건 당연히 아니었고, 시체를 능욕하는 짓은 그때도 사람 취급을 못받았다. 만약 음심을 품고 시체에 손을 댄 미라 제작자가 있으면 당장 곁의 동료들부터 나서서 그 사람을 비난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동물을 숭배했다. 그들이 모시던 신들이 대부분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 신들을 숭배하는 과정에서 수간이 행해지는 경우가 잦았다. 대표적으로 헤로도토스테베의 아름다운 여신관들이 염소와 수간을 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악어세베크 신의 현신이라 믿기도 해서[7] 악어와 수간을 하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물리는 걸 피하기 위해서 등을 뒤집어 놓은 다음에 거사를 치렀다고 한다. 악어와 수간을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이집트 신화에서 세베크 신은 이시스가 오시리스 신을 부활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었는데, 이걸 믿은 이집트인들은 악어와 관계를 가지면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병세가 심각한 남성들은 한가닥 희망이라도 건지기 위해 악어를 뒤집어놓고 관계를 맺었다. 물론 병이 나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 쪽과 달리 신전 매음을 터부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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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데라 신전하토르 여신 부조.[8]
실제 당시 여성용 옷의 모습.[9]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무희들의 모습. 당대 이집트 무희들의 모습을 짐작 가능하다.
제18왕조 시대에 들어서는 여성들의 옷이 파격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당시의 옷을 보면 천은 오직 허리 아래만을 가리고 있고, 상체 부분에는 얇은 끈 두 개가 어깨에서 내려와 가슴에 걸쳐진 후 허리 부분과 연결되어 고정되어 있었다. 현대의 가는 끈 비키니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편하다. 문명 온라인에 등장하는 하트셉수트의 모습이 오히려 고증이었던 것. 상체 앞부분을 가리는 것이 가슴 앞으로 걸쳐진 가느다란 끈 2개밖에 없었기에 여자들은 가슴을 그대로 노출하고 다녔는데, 다만 유륜과 유두는 가리는 게 예의여서 끈에 캡을 달아 그 안에 간신히 넣어 가렸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속이 비치는 시스루, 망사를 입거나 헐벗고 다녔다면서 성적 판타지가 구현된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일단 이집트 여성들이 안의 실루엣이 비치는 반투명한 옷감으로 옷을 지어입었던 건 맞다. 그리고 실제로 일부 여성들이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는 노출이 굉장히 심한 옷차림을 하고 다닌 것도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집트는 워낙 더웠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벽화에서 묘사되듯이 이집트 무희들은 아예 벌거벗은 상태로 궁정에서 춤을 추기도 했고, 그 외에 망사로 만들어진 드레스나 몸에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허나 이는 오직 고위층들만 가능한 옷이었다. 주로 부유한 젊은 귀족 여성들 정도가 이렇게 얇은 옷을 입고 다녔고, 그럴 여유도 경제력도 없는 일반 평민들은 이런 옷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이집트에서는 여성들도 고된 육체 노동을 했기에 지나치게 얇은 옷을 입고 다니면 오히려 찢어지기에 딱 좋을 뿐이었다. 고대 벽화에도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은 인물들을 보면 대개 신화의 여신이거나 왕족들이다.

이집트인들도 사람이었기에 춘약을 썼다. 살해당한 사람의 두피에서 나온 비듬, 검은 개에 붙어 있는 진드기의 피, 남편의 왼손 약지에서 나온 피 한 방울, 그리고 남편의 정액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춘약을 아내가 마시면 다시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효과는 믿거나 말거나. 발기부전 치료법도 있었다. 아카시아을 섞어서 남성기 주변에 문지르면 발기부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만약 이게 안먹히면 힘센 종마의 입에서 나오는 거품을 성기에 묻히는 방법을 썼다. 종마의 입에서 나온 거품을 묻히면 이 종마의 힘을 빌어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

여성들은 피임을 하기 위해 아카시아와 악어 똥, 대추야자와 꿀을 섞어 만든 피임약을 질과 자궁 입구에 발랐다. 아카시아의 경우 피임 성분인 젖산이 들어 있어 실제로 피임 효과가 있었는데, 악어 똥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똥 때문에 감염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0] 아니면 아카시아와 꿀을 짓이긴 물에 면직물이나 천을 담갔다 빼낸뒤, 이 천을 질 안에 넣어두고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이 경우 면직물에 젖어있는 아카시아의 젖산 성분이 임신을 막아주었다고. 석류 씨앗을 으깨어 밀랍과 섞은 뒤 일종의 탐폰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고대 이집트 여성들은 보리소변을 누는 방법으로 임신 여부를 판별했다. 보리에 싹이 나면 임신한 거였고 싹이 안 나면 임신한 게 아니었다. 의외로 상당히 과학적인 방법이었는데, 임신한 여성의 소변 속에 들어 있는 에스트로겐이 발아를 촉진해 싹이 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정확도는 무려 70%에 달했다. 이 원리는 현대까지도 거의 그대로 사용되어 이제는 편의점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임신 테스트기의 기원이 되었다. 또 이집트인들은 여성이 소변을 눌 때 보리에서 먼저 싹이 나면 남자아이, 밀에서 싹이 먼저 나면 여자아이라고 믿었는데 안타깝게도 이건 별로 근거가 없었다.

종종 그 곳이 우람하게 직립한 모습을 한 이집트 신의 모습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존재했던 신이다. 이름은 으로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다. 크고 아름다운 음경으로 유명한 편이다. 검은 피부가 특징이고 왕권의 상징인 도리깨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원에 새겨진 민 부조의 남근 부분을 문지르면 불임을 해결하고 정력이 좋아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실제 유적을 보면 하도 많이 만져서 부조에 남근 부분만 반질반질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아예 그 부분이 닳아 사라진 곳도 있다고 한다.

2.1. 자위[편집]


고대 이집트의 자위행위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진 루머가 많다.

유명한 여성 파라오 클레오파트라가 세계 최초의 바이브레이터를 만들어 썼다는 썰이 있다. 상자에 들을 집어넣은 다음 그 상자를 클리토리스에 갖다대어서 그 쾌락을 즐겼다는 것. 벌들이 안에서 붕붕거리면서 생기는 진동이 바이브레이터처럼 기능했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거짓이라고 한다.

파라오가 나일 강이 범람했을 때나 가뭄이 들었을 때 나일 강변에서 공개적으로 자위를 하는 의식을 치렀다는 소문도 유명한데, 이 역시 명백한 거짓이다. 이 이야기는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기자 출신 조나단 마르골리스가 2005년 출간한 책에 쓰인 내용을 대중들이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와전된 이야기다. 애초에 헛소문의 근원지가 영국이어서 구글에 검색을 해봐도 죄다 영미권 문서들이 줄줄이 뜨는 바람에 한국인들도 그렇구나 하고 믿게 되어버린 탓이 크다.

자위행위가 이집트에서 신성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 역시 루머이다. 이집트 신화에서 자위가 중요하게 묘사되는 장면이 있기는 하다.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태고의 바다 '누(Nu)'만이 존재했다. 이 바다 속에서 작은 언덕이 솟아올랐고 창조신 아툼이 누에서부터 스스로를 창조해서 태어났다. 그리고 아툼이 자위를 통해서 공기의 신 과 습기의 여신 테프누트가 태어났고, 세계의 질서가 확립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신화들이 그렇듯 이집트 신화도 하나로 정립된 게 아니라 기록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내용이 통일되지 않는다. 어떤 판본에서는 자위를 해서 테프누트와 슈를 창조했다고 나오지만 어떤 판본에서는 침을 뱉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판본에서는 말로써 창조했다고 나오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자위가 신성한 행위로 여겨졌다는 확실한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


2.2. 근친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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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바문의 무덤에서 발굴된 기원전 1350년 경의 벽화.[11]
남매 사이인 투탕카멘안케세나멘의 모습.

고대 이집트인들이 근친혼을 좋아했다는 루머가 있는데, 이는 파라오와 왕족들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을 경우 웬만하면 최소한 사촌보다는 촌수가 먼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권장되었다.

파라오호루스 신이 지상에 현현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파라오와 왕족들은 여기서 예외였다. 왕족의 피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외척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정치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근친혼을 했던 것이다. 이집트 신화에서 서로 남매지간인 오시리스이시스가 결혼한 것을 파라오가 지상에서 다시 재현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평민들은 그딴게 없었고, 평민들 사이에서 근친혼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파라오와 왕족들의 경우 근친혼이 대단히 잦았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아내도 그의 이복누이였던 안케세나멘이었고 이 둘은 10살에 결혼했다. 근친혼이 워낙 많아서 파라오들은 유전병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았는데, 개중 최악의 경우가 아멘호테프 1세였다. 아멘호테프 1세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가 모두 남매 사이인 케이스였다. 그래서 살아있을 당시 상당한 유전적 결함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나마 투트모세 3세하트셉수트 등은 근친혼 핏줄이 섞여있긴 했지만 다른 파라오들보다는 약간 양호해서 유전 결함이 덜했다. 참고로 이집트 파라오들의 미라를 모조리 측정해본 결과 파라오들의 평균 키가 약 165cm, 왕비들의 평균 키는 156cm 정도였다.


2.3. 동성애[편집]


파일:003-niankhkhnum-and-khnumhotep-wiki.jpg
크눔호테프와 니앙크크눔의 무덤 벽화.

고대 이집트에서는 세계 최초로 동성애를 묘사한 작품이 발견된 바 있다.[12]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동성애자 커플이 이 고대 이집트에서 등장한 것이다.[13] 기원전 2400년경 크눔호테프와 니앙크크눔이 바로 그 주인공. 둘다 제5왕조 시대의 왕실 매니큐어 관리사들이었는데,[14] 이들의 무덤에서 서로 코를 맞대고 있는 벽화가 발견되면서 굉장히 친밀한 관계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 둘이서 저러고 있는 모습을 새겨놓은 벽화는 수많은 고대 이집트 유적들 중에서도 이게 유일하다. 조사 결과 크눔호테프가 여자 쪽이었고 니앙크크눔이 남자 쪽이었다고. 아마 크눔호테프가 먼저 죽고 혼자 남은 니앙크크눔이 그를 추모하며 같은 묘를 만들어 함께 묻힌 걸로 추정된다.

심지어 파라오였던 페피 2세[15]가 동성애자였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페피 2세는 그가 크게 신임하던 신하였던 사세네트 장군의 집을 자주 들락날락거렸다고 한다. 이 관련 기록에 '왕이 사세네트의 집으로 들어가 왕이 원하는 대로 행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당시에 '원하는 대로 행하다'라는 뜻은 성관계의 대표적인 은유였다. 이때문에 파라오 페피 2세와 사세네트 장군이 연인 관계가 아니었을까 의심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있다. 이 기록은 단순히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오시리스의 관계를 비유한 것에 불과하고,[16] 이걸 동성 연인 관계로 보는 건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

이집트 신화에도 동성애적 요소가 등장한다. 바로 세트호루스의 관계. 당시 세트와 호루스가 이집트의 왕위를 두고 한창 다투고 있을 당시, 세트는 일부러 호루스에게 술을 가득 먹이고 그가 취한 틈을 타 호루스를 강간하려 들었다. 호루스가 세트 아래에 깔렸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무도 호루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루스는 일부러 취한 척하다가 세트의 정액을 손으로 받아 강에 던져버렸다. 이후 호루스의 어머니 이시스가 세트가 먹는 상추에 호루스의 정액을 뿌려[17] 세트 몰래 먹게 하면서 역으로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한다.

세트는 자신이 호루스를 취했다고 생각하고 모든 신들이 모인 앞에서 이를 밝혔다. 지혜의 신 프타가 만일 호루스 몸 안에 세트의 정액이 있다면 그가 불렀을 때 이마로 정액이 나올 것이라 단언하고 호루스 앞에서 세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세트 앞에서 호루스의 이름을 부르자 호루스의 정액이 세트의 이마에서 튀어나왔다고 한다. 앞서 상추에 묻혀 몰래 먹인 이시스의 속임수가 통했던 것이다. 호루스는 이렇게 세트를 이기고 왕이 될 수 있었다.[18]

탈무드에서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방탕과 타락의 대명사로 소개된다. 탈무드에서도 자유로운 성생활과 성적 방탕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게 이집트인데, 하나의 여자가 여러 남자들을 첩으로 거느린다는 내용까지 등장한다. 레즈비언을 '이집트인들이나 할법한 행위'라고 멸시하는 내용도 있다.[19] 다만 의외로 남성간 동성애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이건 보통 소돔이나 고모라의 특징이다. 탈무드에서 주로 등장하는 이집트의 성적 타락 내용은 일부다처나 여성 간 동성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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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화가로 오리엔탈리즘적 그림들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1884년 발표한 위의 작품으로 평론가들에게 대호평을 받았다. [2] 현대에야 당연해 보이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 성경만 보아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가 남성에 비해 크게 제약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고, 실제로 개신교 신자인 여성들 중에서도 성경에서 여성들이 대놓고 차별받는 구절들을 거북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예 여자가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았다.[3] 사실 이건 당연하기도 하다. 가장으로써 식구들을 부양하는 것은 수많은 의무들 중에서도 기본적이기에..[4] 다만 현실에서는 돈과 권력이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싶어했기에 일부다처제가 파라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고, 사실상 권력이 많은 귀족이면 누구나 아내를 많이 거느릴 수 있었다.[5] 순결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순결을 종교적인 신성함으로까지 인식했던 고대 로마 시대부터다.[6] 성문법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확립되지 않은 고대 이집트였기에 법률로 간통죄나 형벌을 정해놓고 그런 건 없었다. 하지만 한 기록에 따르면 한 여자가 간통을 저지르자 남편이 그녀를 관리에게 신고했고, 여자가 기둥에 묶인 채로 불타 죽었다는 내용이 있다.[7] 이집트의 세베크 신전에는 아예 신성한 악어를 길렀다. 이 악어는 세베크의 화신이라고 여겨졌기에 황금으로 치장하고 정말 신 같은 대접을 받았다. 죽은 후에도 미라로 만들어서 계속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올렸다.[8] Temple of Dendera. 사랑의 여신 하토르를 기리기 위해 기원전 2000년 경에 지어졌다. 해당 부조는 어린 파라오에게 젖을 먹이는 하토르의 모습이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수유가 성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신성한 의미이기도 했다. 생명을 기르는 여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9] 실제 고대 이집트 여성들이 입던 옷이다. 푸른색과 검은색의 원통형 구슬과 실, 리넨 등을 꿰어 만들었다. 체부(Tjebu)의 제5왕조 시대 무덤에서 발굴됐다. 현재는 런던의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10] 동물 똥을 사용해 피임하는 건 고대 이집트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풍습이다. 중동이나 고대 인도에는 코끼리 똥으로 블록을 만들어서 질에 넣어 피임을 했다.[11] 무희들이 제례용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다.[12] 기원전 8000년경에 시칠리아에서 중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동성애 비슷한 걸 묘사한 벽화가 발견되었지만, 이게 동성애가 아니라 곡예, 사냥, 제례 의식 등 다양한 걸 상징한다는 해석이 분분해서 확실하진 않다. 학계 대부분이 동성애를 묘사한 게 맞는다고 합의한 작품은 이게 세계 최초다.[13] 물론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어서 쌍둥이나 형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학계의 정설은 동성애자가 맞다고 보는 쪽.[14]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매니큐어와는 조금 다르다. 당시 고대 이집트에서 매니큐어 관리사들은 왕실 시종이나 보물 관리인들과 비슷한 역할이었다.[15]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다. 무려 94년 동안 왕좌를 지켰다. 하지만 그 재위기간에 비해 능력은 영 그닥이어서 결과적으로는 이집트 고왕국의 몰락을 초래했다.[16] 이집트 신화에서 라 신은 밤에 부활하기 위해 오시리스의 궁전에 들러 오시리스의 축복을 받는다. 라 신이 곧 파라오 페피 2세고 오시리스 신이 사세네트 장군이라는 것이다.[17] 이 과정에서 이시스가 직접 아들 호루스의 정액을 뽑아냈다는 내용도 존재한다.[18] 여담이지만 이 이야기 때문에 이 둘을 엮어 만든 BL물이 상당히 많다. 호루스와 세트를 구글에 검색하기만 해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웹툰 엔네아드.[19] 그러나 막상 '레즈비언'이라는 명칭은 이집트가 아닌 그리스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유명한 여성 동성애자 시인인 사포가 여자들과 함께 그리스의 레스보스섬에 살았다는 전승에서 나왔다. 원래는 레스보스섬의 여인이라는 뜻인데, 사포를 포함한 여성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이루어지며 지금의 뜻을 갖게 된 것이라는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