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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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의 미라에 대해 설명해놓은 문서다.


2. 상세[편집]


파라오들의 무덤은 이미 고대에 죄다 털려나갔고 투탕카멘의 무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을 제외하면 멀쩡히 남아있는게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의외로 가장 중요한 파라오들의 미라는 상당수가 보존되어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이는 도굴꾼들이 무덤에서 돈이 될만한 보물과 부장품들만 빼가고 미라는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이다.[1] 신관들은 도굴당한 무덤에서 파라오들의 미라만 간신히 수습해 데이르 엘 바하리 인근의 TT320 무덤에 한꺼번에 묻었다.


3. 목록[편집]



3.1. 아흐모세 1세[편집]


이집트 신왕국의 첫 왕조인 제18왕조의 초대 파라오 아흐모세 1세의 미라다. 이집트에 혼란을 불러일으킨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고대 이집트의 전성기인 신왕국을 연 업적을 남긴 파라오다.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의 합장묘에서 발견됐다. 이미 예전에 도굴당한 탓에 머리는 부서져서 목과 분리되어 있었으며 코는 부러져 눌러진 상태였다. 독특하게도 팔이 가슴 위로 교차되어 접혀있지 않았고, 두 손은 허벅지 안쪽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뻗었다. 미라를 검사한 결과 머리 속 를 제거할 때 콧구멍이 아니라 대공공[2]을 이용해 제거했다고 한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생전에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다고.


3.2. 아멘호테프 1세[편집]


제18왕조의 2번째 파라오이자 아흐모세 1세의 직계 후계자다. 남쪽의 쿠시 왕국을 정벌하고 서부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정복하는 등 이집트의 영향력을 국외로 확대한 파라오였다.

아멘호테프 1세의 미라는 단 한번도 개봉된 적이 없다. 이유는 아멘호테프 1세의 미라를 감싸고 있는 붕대가 워낙에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붕대를 풀다가 자칫하면 미라의 붕대를 훼손하거나 귀중한 사료를 잃어버릴까 우려해서 아직 미라를 풀지 않은 상태다. 대신에 1967년 엑스레이와 CT 장비를 동원해 관 내부의 모습을 추정했는데, 안에는 구슬로 된 목걸이와 부적 따위가 들어있다고 한다. 오른쪽 팔 아래에는 골절 흔적이 있고[3] 팔은 전통적인 미라의 안치 자세인 교차로 팔짱 낀 모습이다.


3.3. 투트모세 1세[편집]


제18왕조의 3번째 파라오다. 아버지 아멘호테프 1세의 뒤를 이어 활발하게 정복 활동을 펼친 군주였으며, 누비아로 대군을 파견해 남쪽으로도 국경을 확장했다. 심지어 저멀리 메소포타미아유프라테스 강까지 친히 군대를 몰고 진격하기까지 했다. 죽은 이후 처음으로 왕가의 계곡에 묻힌 파라오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나 무덤이 고대에 도굴당했고 데이르 엘 바하리의 합동묘에 묻혀있다가 1881년에 발견되었다.

미라를 분석한 결과 죽을 당시 이미 50세가 넘은, 당시로서는 고령의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딱딱한 빵을 먹고 살다보니 앞니는 이미 부식되어 마모된 상태였다. 몸집 자체는 꽤 작은 편에 속하지만 근육량이 웬만한 장정보다도 많았다고. 이 미라를 처음으로 분석한 이집트학자 가스통 마스페로는 투트모세 1세대머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투트모세 1세의 미라는 세련된 분위기에, 입이 기민하고 얄썅해 보였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3.4. 투트모세 2세[편집]


제18왕조의 4번째 파라오인 투트모세 2세의 미라다. 13년 정도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어머니가 정실이 아닌 후궁 출신이었던데다가 아내인 하트셉수트가 대신 통치했다는 의혹이 있을 정도로 딱히 남긴 업적은 없다. 그나마 시리아시나이 반도에 몇 여차례 군사 원정을 벌였다는 것 정도가 업적이다.

가스통 마스페로가 1886년 7월 1일에 투트모세 2세 미라의 붕대를 풀었고, 부검 과정에서 투트모세 2세가 아버지인 투트모세 1세와 상당히 닮았던 것을 밝혀냈다. 투트모세 2세의 미라는 도굴군들에 의해 심각하게 파손된 상태였는데, 왼쪽 팔이 어깨에서 완전히 빠져 탈골된 상태였고 오른쪽 팔은 팔꿈치 아래로 아예 잘려버렸다. 흉곽과 갈비뼈 역시 도굴꾼들이 도끼 등으로 내려쳐서 아예 내려앉았으며 오른쪽 다리 역시 심각하게 파손됐다.

투트모세 2세 미라의 피부는 완전히 생전에 생긴 흉터와 얼룩덜룩한 상처들에 뒤덮여 있었다. 사제들이 장례 과정에서 최대한 흉터들을 없애려 했지만 워낙 피부 상태가 안좋아서 가리는 게 불가능했던 걸로 보인다. 학자들은 투트모세 2세가 생전에 심각한 피부병이나 전염병에 걸려있었다고 추정한다. 게다가 투트모세 2세가 생전 입은 수많은 상처와 수축된 근육[4]으로 미루암아 31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파라오가 생전에도 딱히 건강한 삶을 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5. 투트모세 3세[편집]


제18왕조의 6번째 파라오이자 이집트 역사상 가장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친 위대한 정복군주들 중 하나다. 2살에 왕위에 올라 56세에 죽을 때까지 무려 54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이집트를 다스렸다. 다만 재위 22년째까지는 부왕 투트모세 2세의 아내였던 하트셉수트와 함께 공동통치하느라 제 기를 펴지 못했고, 하트셉수트가 죽은 이후에야 독자적인 통치를 펼칠 수 있었다. 최소 17차례에 달하는 대원정을 펼치며 이집트의 영토를 역대 최대로 넓혔으며 시리아, 누비아, 리비아 등 웬만한 땅들은 모두 정벌했다.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데이르 엘 바하리의 합장묘에서 발견됐다. 발견된 미라는 1880년대에 미라 해체 작업을 통해 감싸고 있던 붕대가 모조리 풀려나갔고, 1886년에 다시 붕대를 감아 원상태로 되돌려놓았다. 당시 미라의 붕대를 풀었던 가스통 마스페로의 말에 의하면 이미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이미 도굴꾼들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도굴꾼들은 붕대 사이사이에 숨겨진 부적이나 보물들을 찾기 위해 미라에 흠집이 나는 것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고 마구 미라를 헤집거나 내동댕이쳐댔다.

게다가 불과 몇 년 전쯤에 데이르 엘 바하리의 무덤을 발견한 아마추어들이 호기심에 미라의 붕대를 마음대로 찢고 풀어버린 탓에 미라 자체에도 심각한 흠집이 가있었다. 그나마 투트모세 3세의 미라는 파라오를 위해 제작된 목재 관에 들어있었고,[5] 얼굴 부분은 그나마 봐줄만한 상태였다. 현재 그의 미라는 카이로의 이집트 문명 박물관에 있다. 참고로 그의 키는 대략 161.5cm 정도였다고 한다.[6]


3.6. 하트셉수트[편집]


제18왕조의 5번째 파라오이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가장 유명한 여성 파라오인 하트셉수트의 미라다. 원래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 2세의 왕비였는데, 타고난 야심과 탁월한 능력으로 투트모세 2세를 막후에서 조종하며 권력을 거머쥔 여장부였다. 누비아, 레반트, 푼트 지방에 원정을 보내며 이집트 왕국의 전성기를 이어나갔고 내치나 경제 역시 나름대로 잘 통제했다. 데이르 엘 바하리에서 가장 유명한 장제전도 바로 이 하트셉수트의 것이다.

하트셉수트의 미라는 하워드 카터가 처음 발견했다.[7] 1903년에 하워드 카터가 왕가의 계곡 KV60 무덤에서 2구의 미라를 발견했는데, 하나는 하트셉수트의 유모로 밝혀졌으나 나머지 하나의 신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던 중 2007년 하트셉수트의 이름이 적혀있는 항아리에서 발견된 치아와 미라의 없어진 치아 부분이 정확히 일치함에 따라 그 미라가 하트셉수트임을 알게 되었다. 미라는 꽤 보존 상태가 좋은 채로 남아있어서 165cm의 키에 살짝 살집이 있는 체형의 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연구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50대에 즈음 암의 일종인 골종양이 전신으로 퍼졌기 때문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 관절염, 치주염을 비롯한 충치가 발견되었다.

미라 중에서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 축에 속한다. 특히 미라의 머리카락도 그대로 남아있어서 다른 파라오의 미라들과 확연히 구분이 된다.


3.7. 아멘호테프 2세[편집]


제18왕조의 7번째 파라오이자 투트모세 3세의 후계자. 아버지 투트모세 3세가 지극히 호전적인 파라오였다면 아멘호테프 2세는 상대적으로 외교적인 방법을 선호했다. 덕분에 그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적대국 미탄니와 나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적대적 공존 상태에 머물렀다.

그의 미라는 1903년에 가스통 마스페로가 하워드 카터,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비싱, 피에르 라카우와 함께 처음으로 분석했다. 1907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연구팀이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를 따로 연구하기도 했다. 연구 결과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는 키가 167cm였고, 아들인 투트모세 4세와 굉장히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멘호테프 2세는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팔은 가슴 위에 겹쳐져서 얹혀져 있었고, 오른손은 꽉지고 있었던 반면 왼손은 상대적으로 더 풀어진 상태였다. 그의 몸 전체의 피부에 검은 결절들이 돋아 있었는데 생전의 병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미라 처리 과정에서 생겼는지는 확실치 않다. 미라에 생긴 자국을 통해 한때 목걸이와 반지 등이 미라에 끼워져 있었던 것을 알아낼 수 있었지만, 도굴꾼들의 약탈로 모두 사라졌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그가 대략 4-50대에 죽었다고 한다.


3.8. 투트모세 4세[편집]


제18왕조의 8대 파라오. 별다른 업적도 남기지 못한 파라오지만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모래 속에서 파낸 일화로 유명하다. 투트모세 4세가 왕자 시절 모래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 속에 스핑크스가 나와 자신을 꺼내주면 파라오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왕자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스핑크스를 모래에서 파냈고 결과적으로 파라오에 등극했다는 이야기다.[8]

투트모세 4세의 미라는 왕가의 계곡 KV43 무덤에 묻혔다. 그러나 이후 도굴꾼들에게 무덤이 파헤쳐진 것을 확인한 신관들이 미라를 다시 염한 뒤 그나마 상태가 괜찮았던 아멘호테프 2세의 KV35 무덤에 재안장했다. 이후 KV35 무덤이 1898년에 빅토르 로렛에 의해 발굴되면서 투트모세 4세의 미라도 함께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의 미라를 분석해본 결과, 미라의 키는 대략 164.6cm였지만, 미라가 도굴꾼들 때문에 발이 부서져 버린 것을 고려하면 아마 생전에는 이보다는 훨씬 컸을 것이라 한다. 팔들은 오른팔이 위쪽에 오도록 가슴 위에 X자로 겹쳐서 올려져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약 16cm 정도의 길이였으며 어두운 붉은 기가 도는 갈색머리였다. 생전에 귀를 뚫어 귀걸이를 하고 다녔으며, 그가 죽을 때쯤 약 25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2012년에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연구팀에서 투트모세 4세, 투탕카멘 등을 포함한 제18왕조 파라오들의 사인을 분석한 결과, 측두엽에 뇌전증이 와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다른 말로는 간질이라고도 하는데, 뇌신경 세포가 불규칙하게 흥분하여 가끔씩 이유없는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학자들은 투트모세 4세가 꿈속에서 스핑크스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도 간질의 영향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는 중이다.


3.9. 아멘호테프 3세[편집]


제18왕조의 9번째 파라오이자 신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위대한 파라오들 중 하나다. 팽창에 집중하던 선대 파라오들과는 달리 경제 발전과 문화 성장에 전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이집트는 39년에 달하는 그의 재위기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지킬 것은 지키고 내줄 것은 내줄 줄 알았다. 또한 혼자서 사자 10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일신의 무력도 굉장했기에 여러모로 위대했던 파라오.

제18왕조 시대에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더 생생하게 보이기 위해 안에 내장재를 과할 정도로 꽉꽉 채워넣곤 했다. 아멘호테프 3세의 미라 역시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안타깝게도 보존 상태는 썩 좋지 않다. 다른 미라들은 피부도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과는 달리 아멘호테프 3세의 미라는 거의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삭아버렸다.

고고학자들이 미라를 조사한 결과 아멘호테프 3세는 말년에 상당한 비만이었다고 한다. 말년의 그를 묘사한 벽화들도 그를 늙고 병든 인물로 묘사하는 것들이 있다. 파라오를 웬만하면 건장하게 묘사하는 게 일반적이던 이집트 벽화에서조차 그정도였다면 정말 죽기 직전에는 산 송장에 가까울 정도로 건강이 나빴다는 얘기다. 아멘호테프 3세는 심각한 관절염이 있었을 뿐더러 게다가 이빨이 크게 마모된 것, 그리고 엄청난 양의 충치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노년기에 상당한 고통을 달고 살았을 걸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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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미라가 멀쩡히 남아있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의 미라를 싸고 있는 붕대 사이사이에도 보물들을 끼워넣었는데, 이를 잘 알고 있던 도굴꾼들은 미라의 붕대를 마구 풀어헤쳤고 이 과정에서 미라가 상당히 훼손됐다.[2] 대공공(foramen magnum)은 두개골 의 후두골에 있는 크고 타원형의 구멍.[3] 제21왕조 시대에 도굴된 무덤에서 다시 미라를 붕대로 감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4] 아마 생전 편하게 걷거나 운동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5] 다른 파라오의 미라들은 바닥에 나뒹구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처참했다. 고고학자들이 붕대를 풀다가 미라가 부서질까봐 함부로 손을 대지도 못할 정도였다.[6] 다만 미라화 과정에서 키가 쪼그라든 것을 감안하면 161cm보다는 훨씬 컸을 것이다.[7]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그 하워드 카터가 맞다.[8] 고고학자들은 이게 투트모세 4세의 부족했던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일화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