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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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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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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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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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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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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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 왕조
테티 우세르카레 페피 1세 메렌레 1세 페피 2세 메렌레 2세 니토크리스 네체르카레 네페르카 네퍼
제7 왕조
멩카레 네페르카레 2세 네페르카레 3세 제드카레 셰마이 네페르카레 4세 메렌호르 네페르카민 니카레 네페르카레 5세 네페르카호르
제8 왕조
네페르카레 6세 네페르카민 아누 카카레 이비 네페르카우레 네페르카우호르 네페리르카레 와지카레 쿠이케르 쿠이 이체누
제9 왕조
케티 1세 네페르카레 7세 네브카우레 케티 세투트 임호텝
제10 왕조
메리하토르 네페르카레 8세 와카레 케티 메리카레
제11 왕조
멘투호테프 1세 인테프 1세 인테프 2세 인테프 3세 멘투호테프 2세 멘투호테프 3세 멘투호테프 4세
누비아 왕조
세게르세니 카카레 이니 이이브켄트레
제12 왕조
아메넴헤트 1세 세누스레트 1세 아메넴헤트 2세 세누스레트 2세 세누스레트 3세 아메넴헤트 3세 아메넴하트 4세 소베크네페루
제13 왕조
소베크호테프 1세 손베프 네리카레 세켐카레 아메니 케마우 호테피브레 이푸니 아메넴헤트 6세 세멘카레 네브누니 세헤테피브레 세와지카레 네제미브레 소베크호테프 2세 렌세네브 호르 세켐레쿠타위 카바우 제드케페레우 세브카이 세제파카레 웨가프 켄제르 이미레메샤우 세헤테프카레 인테프 세트 메리브레 소베크호테프 3세 네페르호테프 1세 시하토르 소베크호테프 4세 메르호테프레 소베크호테프 카호테프레 소베크호테프 와히브레 이비아우 메르네페르레 아이 이니 1세 상켄레 세와지투 메르세켐레 이네드 세와지카레 호리 소베크호테프 7세 이니 2세 세와헨레 세네브미우 메르케페레 메르카레 세와자레 멘투호테프 세헤켄레 산크프타히
제14 왕조
야크빔 세카엔레 야아무 누부세르레 카레흐 아아호테프레 셰시 네헤시 카케레우레 네베파우레 세헤브레 메르제파레 세와지카레 3세 네브제파레 웨벤레 아위브레 2세 헤리브레 네브센레 셰케페렌레 제드케레우레 산키브레 2세 카케무레 네페리브레 카카레 아카레 아나티 제드카레 베브눔 아페피 누야 와자드 셰네흐 셴셰크 카무레 야카레브 야쿠브-하르
제15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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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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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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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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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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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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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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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32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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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14~16대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
Cleopatra VII


파일:Kleopatra-VII.-Altes-Museum-Berlin1.jpg

클레오파트라의 두상[1]
이름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
Cleopatra VII Philopator[2]
출생
기원전 69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A]
사망
기원전 30년 8월 10일 (향년 39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A]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51년 ~ 기원전 30년
(약 21년)
전임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후임자
프톨레마이오스 15세
부모
아버지 :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어머니 : 클레오파트라 5세
배우자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3]
자녀
카이사리온,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신장
152cm
종교
이집트 다신교

1. 개요
2. 외모
3. 생애
3.1. 초기, 실각
3.2. 카이사르와의 관계
3.3. 안토니우스와의 관계
3.4. 사망
4. 평가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파일:클레오파트라_7세_동전.jpg
파일:클레오파트라 7세 이미지 1.jpg
클레오파트라 7세를 묘사한 동전
클레오파트라 7세의 얼굴을 그린 1세기 초상화[4]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

고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실질적 마지막 군주이자, 사실상 마지막 파라오다.[5][6]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 또한 고대 이집트에서 공식적으로 파라오로 즉위한 마지막 인물이다. 이 인물을 끝으로 독립 국가 이집트의 군주로서의 파라오는 완전히 명맥이 끊긴다. 이집트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이집트에선 파라오의 칭호를 사용하고 이집트의 파라오식 즉위 행사를 행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였으며, 이마저도 훗날 기독교의 확산에 따라 중단되었다. 또한 로마 제국 이후 이집트를 다스린 군주들은 파라오 칭호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서 남자 통치자들은 전부 프톨레마이오스란 이름을 썼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 베레니케, 아르시노에라는 이름을 돌려썼다. 그러다보니 당대에는 이름 뒤에 붙이는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별칭 테아 네오테라새로운 여신이라는 뜻이다.


2. 외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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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누워 있었는데,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림속의 비너스와 같았다.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25


현대 대중 문화에서 그려지는 클레오파트라의 모습들은 당시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일 가능성이 높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 왕국 출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부터 이어져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출신이므로의 그리스계 소아시아 혈통이다. 이집트 관광-고고부의 논평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갈색 피부색[7]을 가진 고대 그리스 계통의 여성이고 그 판단에 분명한 근거인 그림과 석상들이 있다.

상단에 올라온 당대의 동전이나 두상 따위에서 묘사된 모습을 보면 뽀글뽀글 곱슬머리에 우뚝 솟은 우람한 매부리코, 푹 들어간 눈두덩이 등은 전형적인 그리스 외모이다. 물론 그런 물건들에서 군주를 묘사할 때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기법이 사용되거나 당대 미 의식에 입각한 보정이 들어가게 마련이니, 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이집트 방식으로 묘사된 클레오파트라 유물을 보면 생김새가 딴판이지만, 고대 이집트의 인물 묘사는 정형화의 극치를 보여주기로 유명하다.

흔히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졌고 실제로 빼어난 미모와 매혹적인 목소리, 재치와 지성을 갖추어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미모로 로마를 좌지우지하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패하여 독사로 자살했다는 이미지와 오리엔탈리즘이 어우러져 마녀, 색기 넘치는 요부, 팜므파탈 같은 이미지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클레오파트라가 미녀로 묘사된 유물과 작품들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관한 이야기가 성립되고 난 뒤에 만들어진 것이고, 실제로 클레오파트라가 살았던 시대 유물에 묘사된 외모는 커다란 매부리코와 살집 있는 목덜미 등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또다른 견해로는 중세시대의 미의 기준은 풍만하고 둥글둥글한 원형미를 갖춰야 미인으로 평가받은데 비해, 현대에서는 날씬한 몸매와 날카롭고 각진 상의 여인들이 미인으로 대접받기 때문에, 당대와 현재의 미의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상기한 이미지와 이집트 벽화, 혹은 서구인들의 "동양 미인"(중동 쪽의 아랍계)에 대한 환상 때문인지 근현대 창작물에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들은 대개 "이국적인 동방 섹시녀"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특징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에 샤프한 이목구비, 짙은 눈화장이 깔린 길고 째진 눈, 윤기 흐르는 직모 흑발,[8] 늘씬한 몸매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노출도 높은 패션 등이 있다.

동양 미인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으로 흔히 생각하는 서유럽 계통의 유럽인 이미지였을 것이라는 오해 또한 존재한다. 일례로 일부 커뮤니티나 유튜브 채널에선 '클레오파트라의 복원도'라는 이름의 빨간머리의 백인여성의 ai사진이 역사적 사료인 마냥 돌아다니는 것이 있다. 이는 사실 복원도가 아니라 전혀 고증이 되지 않은 근거없는 창작물이다. 해당 사진은 클레오파트라의 조각상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전형적인 진저의 리퍼런스로 짜집기 되어있는데, 정작 클레오파트라의 가문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계층에선 전형적인 백인의 금발, 빨간머리와 하얀 피부를 야만과 미개의 증거(=켈트족)로 여기며 멸시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이집트에서 금발벽안 외모를 지닌 사람들도 무역상이나 군인으로 분명히 유입은 되었지만, 최상류층은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빨간머리를 가졌다는 낭설과 마찬가지로 일각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여왕이었다는 이유로 흑인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이는 이집트의 인종비율이 무시된 주장이다.[9] 이집트인들 가운데서 흑인이 아주 없는 건 아니고,[10] 남부 지역에 흑인 혼혈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아랍인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는 윗 문단에 서술되어있다시피 유럽계(정확히는 그리스계 백인이라, 흔히 생각하는 게르만족이나 슬라브족계의 유럽인과는 다르다.)지 중동계 백인도 중동계 흑인도 아니다. 중동계 중에서도 아랍인 같은 셈계 민족보다는 차라리 튀르키예인에 더 가까운데, 오스만 제국 시절 그리스인튀르크인(정확히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인 오구즈인) 사이에서의 통혼이 잦아서 양쪽의 외모가 큰 차이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11] 그러므로 사극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 역에 올바른 캐스팅을 한다면 그리스계 배우나 튀르키예계 배우가 맡는 게 좋다. 이는 다른 그리스계 인물들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서양화 속의 클레오파트라들은 보통 전형적인 중근세 유럽계 백인 왕족의 모습과[12] 현대에서 상상하는 검은 머리에 전형적인 오리엔탈 화풍으로 그려놨다. 당시 화가가 이국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얻기 힘들었던 힘든만큼 유럽의 옷차림을 하고 동양적 이목구비와 하얀피부를 가진 유럽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유럽화가들이 그리스 신화를 재현한 그림에서 신들이 서북유럽인의 금발과 붉은머리, 유럽왕족의 복식을 갖추고 있는 고증적 오류와 동일하다. 잘못된 역사지식과 환상으로 인해 외모가 입맛에 맞게 변형된 건 현대의 클레오파트라도 마찬가지며 결국 클레오파트라의 외모는 사실적 고증보다는 소설, 영화의 영향을 받아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어 전해져 왔다.[13]


3. 생애[편집]



3.1. 초기, 실각[편집]


기원전 51년, 부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집트의 당시 전통인 근친 결혼에 따라 18세 나이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미 멸망의 징조가 보이고 있었다.

넓게 볼 경우 망조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타국과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정작 내치에 부족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여서 측근들의 부정부패를 막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급사하여 어린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정세는 더욱 복잡해져서 셀레우코스 왕조안티오코스 3세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외 영토들을 차지하기 시작하는걸 시발점으로 해서 해외 영토들을 야금야금 빼앗긴다.

와중에 로마의 개입과 동맹으로 한숨 돌리나 싶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 시절 기원전 170년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다시 패배한 후 로마 덕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는데 성공했지만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왕위를 주장하며 서로 다투는 통에 또 다시 로마의 개입을 초래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고, 외세가 자꾸 개입하다보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더욱 막장이 되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왕위를 지켰으나 그도 다른 전투에서 전사한 후 사실상 로마의 보호국 수준으로 전락할 정도였다.[14][15] 거기에 더해 피지배인인 기존 이집트인들이 무려 20여 년에 걸친 장기적인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고,[16] 피지배층과 이렇게 지나치게 괴리된 상태에서 지배층 내에서도 암투와 내분이 난무했고 부정부패와 착취도 많았다.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부터 이 사단이 일어나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라의 망조가 거의 확실하다시피 해진 것이 다름아닌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였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바로 전대에 왕위에 앉았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역시 선대 왕들의 실정으로 어려워진 내치를 수습하기는 커녕 더욱 악화시킨 암군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기 시대에서 점점 거세지는 로마의 압력이나 내정의 혼란을 신경쓰지 않고 태평하게 지냈기 때문에 '피리 부는 사람'이라는 뜻인 아울레테스라고 불리며 야유받았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정통인 후계자가 아니며 권력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로마의 세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고려해야 한다.[17] 그런데도 로마에 뇌물을 주거나 많은 공납을 바치는 행위 등은 이집트 사람들의 세금부담을 가증시켰다.[18]

또한 남동생이 통치하던 키프로스의 섬을 로마에 빼앗기는 것을 방치했는데 결국 시민들의 쌓였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왕은 이 와중에 로마로 튀었고, 딸인 베레니케 4세[19]가 잠시 즉위해서 비어버린 본국의 왕좌를 채웠으나, 그는 폼페이우스 빽으로 돌아와서 베레니케 4세를 처형이란 방식으로 치워버리고 자기가 다시 왕좌를 찾았으나 크게 한 건 없었다. 그리고 아들(프톨레마이오스 13세)과 딸(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이 연신 누적된 덕에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일단 남동생과 함께 왕좌에 올랐으나, 이후 어린 남동생을 배제하고 전권을 차지하려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정치적 움직임은 큰 반발을 샀다. 그 결과 권력 투쟁에서 패하여 지방으로 쫓겨났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전권을 차지했다.[20][21]


3.2. 카이사르와의 관계[편집]


기원전 47년에 이집트를 방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만남으로 재기의 발판을 얻었다. 마침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로마의 내전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에 피난 왔던 자신의 정적 폼페이우스를 암살한 것이 "비겁한 행동"이라며 분노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만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때 카이사르의 나이는 50대 초반, 클레오파트라 7세는 20대 초반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융단을 선물 받았는데 그 융단을 풀어보니 안에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눈을 속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잠입한 것이다.[22][23] 그리고 카이사르는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분쟁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를 지원했다. 이를 알렉산드리아 전쟁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이 야사가 드라마틱하긴 하나, 사실 정치적으로 따져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하는 결정을 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죽기 전에 '남매의 공동 통치'를 유언으로 남기고, 로마인들에게 유언의 집행을 맡겼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현직 집정관으로서 부왕의 유언대로 공동 통치로 되돌아갈 것을 결정한 것이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패장이었다고는 하나 로마의 전직 집정관이었고, 전직 집정관(프로콘술)은 공화정 로마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지도층 인사였다. 이런 사람을 살해한 왕을 동맹국(사실상 속국)의 단독 국왕에 앉혀놓는 것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고 또 신용하기 어렵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카이사르의 집행에 앙심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 측은 펠루시온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 2만 명과 갤리선 72척을 활용해 카이사르가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것을 노려 그를 공격했으나, 로마에서의 원군 도착으로 패배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살해당했고, 아르시노에 4세는 포로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막내 남동생과 재혼하여 그를 명목상의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세운 뒤 실권을 장악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나이가 10세에 불과했기에 권력은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것이었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24]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후 카이사르를 따라 귀빈으로써 로마에 방문하기도 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참석한듯 하며 카이사르는 코끼리 40마리를 대동하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내려왔다 한다.

자국의 최고 권력자와 내연 관계라는 타국의 미인 여왕의 방문에 로마 시민들은 흥미를 보인 사람들도 많았지만[25]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키케로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동맹국인 이집트의 국왕이 로마 최고권력자의 손님으로 온 것이니 명분은 충분했다. 키케로에게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은 오히려 키케로가 쓸데없이 로마와 이집트의 관계를 훼방놓는 말을 한 거라고 해석하기도 할 정도. 카이사르 자신도 공사 구분에는 꽤나 철저해 클레오파트라 때문에 본처를 버리거나 큰 정치적 악수를 둔 것은 없었기에[26] 그냥 사람들이 좀 수군거리는 정도에서 그쳤다.[27]

그러나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카이사르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으나[28] 이집트에서 공동 통치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이집트로 급히 돌아와서 자기 아들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세웠다. 또한 로마 내의 카이사르 파와 반 카이사르 파의 내전에도 관여하여 카이사르 파를 지원하려 했지만 폭풍으로 실패하였다.


3.3. 안토니우스와의 관계[편집]


기원전 41년에는 킬리키아의 타르소스에서 제2차 삼두정의 선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으며, 그 역시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에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쓰일 자금을 얻기 위해 만남을 요청했으나, 곧바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다. 이후, 둘 사이에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태어났다.

옥타비아누스와 관계가 틀어진[29]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7년,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동방을 다시 방문했고, 아예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동방 원정을 지원한 공으로 "알렉산드리아의 기증"을 통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 자녀들에게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전부 나눠주었는데,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으로 선언하고 카이사리온과 함께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도록 했으며, 쌍둥이 중 남자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주었고 쌍둥이 중 여자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에게 크레타와 키레나이카, 막내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에게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주었다.(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클레오파트라가 한 세기의 연애에 대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일절 인정하지 않았고, 유언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나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로마에서 단지 구설수에 오르는 정도 이상의 문제는 겪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로마에서의 카이사르와는 달라서[30] 아들 이름을 대놓고 작은 카이사르라고 짓고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열심히 이용했지만, 카이사르 입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에서의 지위를 안정시키는 것이 유리했으므로[31] 이 관계는 양쪽 모두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었으며, 카이사르는 언제나 그랬듯이 바람둥이 노릇과 정치가로서의 입장을 잘 조화시켰다.

그녀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꽃을 피우고 지성이 힘을 발휘하는 나이에 안토니우스를 향해 갔다.[32]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그녀는 언제나 관능적인 쾌락을 새롭게 찾아냈고, 그것으로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으며 잠시도 그가 한눈을 팔지 못하게 했다. 함께 주사위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냥을 했다. 안토니우스가 훈련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늘 함께했다.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반면 안토니우스는 정말로 홀렸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안토니우스도 여색에 빠져 모든 것을 맡기는 한량은 아니었다. 안토니우스가 추진했던 파르티아 정벌을 위해 군자금이 필요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풍부한 경제력을 지원하는 대신 안토니우스의 군사력을 원했던 것이다. 서로 정치적인 계산 하에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런 정치적인 계산만으로 보기에는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에서 너무 많은 것을 퍼주었다. 로마에서만 하게 되어 있는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었고, 클레오파트라의 세 아들[33]이 로마를 분할하여 공동 통치하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워서 로마에서 정치적으로 강한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였던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소 옥타비아와도 이혼했고, 유언장에서는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개인적 인망 역시 크게 잃었다. 더구나 사실상의 마지막 전투가 된 악티움 해전에서의 전개를 보더라도 자신이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전쟁 지휘 경험이 없다시피 한 클레오파트라에게 끌려다녔다. 따라서 안토니우스가 처음에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접근했을지 몰라도 정말로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렸다고 할 만하다. 반론으로는 안토니우스가 정치적으로 너무 무능해서 단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카이사르 생전에 군사적으로만 훌륭했을 뿐 정치적인 면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았으므로 무리는 아니지만,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딱 빠지지 않고서야 그 정도로 무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34][35][36]


3.4. 사망[편집]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렸고[37]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 침공을 선포한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섰으나, 군사적 무능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패착을 저지르는 바람에[38]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막강한 경제력으로 패배를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긴 듯 하지만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악티움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측의 몰락이 확정되자, 안토니우스 휘하의 로마 군인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향하면서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그럼에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왕위에서 물러날테니 카이사리온을 비롯한 자식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며 회유하려고 했고, 안토니우스 역시 은퇴한 뒤 소시민으로 살겠다고 협상을 제시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두 사람 모두에게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급기야 최후의 동맹인 안토니우스마저 클레오파트라가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하는 바람에 로마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도 끊어지게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자결한 뒤에도 클레오파트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탄원하고자 영묘에서 나와 궁전으로 갔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로마에서 개최될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내세울 계획이라는 게 분명해지자 결국 모든 희망을 잃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최후는 코브라가 자신을 물게 하여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명한데, 이집트 코브라를 과일 바구니에 숨겨 가져왔다 한다. 다만 이는 후대에 붙인 이야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집트 코브라가 2m나 되어 숨기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린다고 해서 즉사하는 것도 아니고, 독사한다고 해도 2시간 뒤에나 사망하기에 말이 되지 않는다고. 그외에 음독 자살이라는 설, 안토니우스와 동반 자살했다는 설, 옥타비아누스가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이 난무하지만 대표적인 떡밥거리다.

사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안토니우스와의 자녀들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도 로마로 압송되어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 강제 참석해 어머니가 독사를 붙잡은 채 자살하는 모습이 새겨진 조각상 뒤로 끌려가는 수치를 당했다.[39] 클레오파트라의 나라 이집트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하면서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옥타비아누스가 개선식 때 꼭 클레오파트라를 내세워야만 했느냐면 실제로 선전 때 로마를 멸망시키려 한 요부로 포장했으니 엄청난 효과를 낳을 수도 있겠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이복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가 카이사르에게 끌려왔을 때는 로마 시민들의 동정을 받아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처럼 죽이지 못하고 귀양을 보낸 일이 있었다. 즉, 로마에서는 여자를 이겼다거나 여자를 앞세워서 영광을 얻으려 한다고 여론이 좋지 않게 조성될 수도 있었기에 죽는 것도 나름대로 유리했다는 것이다.[40]

4. 평가[편집]


클레오파트라 7세는 큰 야심을 가진 정치가였다. 권력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능력도 출중했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이집트어 배우기를 거부하고 그리스어만 사용했던 반면, 토착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파라오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통역이 필요없을 정도였으며, 정치 수완도 뛰어나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을 휘어잡는 한편 이시스의 현신을 자처하며 토착 이집트 백성들로부터도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또한 카이사르파에 가담하여 자칫 내전에 휘말릴 수도 있는 처지에서 안토니우스가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나선다는 점을 현명하게 파악하여 직접 타르수스까지 가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안토니우스를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후견인으로 삼은 예리함도 있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첫 만남장면을 보면 클레오파트라가 나름대로 호화롭게 기획한 흔적이 역력하다.[41]

하지만 다재다능한 여군주도 다 망해 가는 막장 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다. 고립된 소수 그리스 - 마케도니아인 지배층의 인적 자원이 완전히 고갈되고 부정부패와 권력 암투에 빠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는 나라를 건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군사력조차 없었다.[42]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외세를 이용해 생명연장의 꿈을 노릴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악티움 해전에서 군사적 무능을 드러내기도 했다.[43][44][45][46] 막대한 돈을 쟁여놓고 돈과 정치적 술수를 주 무기로 삼으며 혈육도 가차없이 제거하는 냉정한 모습은 전형적인 고대 서아시아 전제 군주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당시 그녀가 처한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인물들을 살펴보면 정말 클레오파트라 말고는 답이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무능한 인간들 투성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내정과 외치 모두를 말아먹다가 반란이 터져 왕위에서 물러나 로마로 망명을 간 적이 있을 만큼 막장이었고, 뒤를 이은 클레오파트라의 언니 베레니케 4세는 한 술 더 떠 지나친 사치를 부리고 내정을 말아먹다가 로마의 지원을 받고 돌아온 아버지에게 패해 처형당한 막장 군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도 정치적인 능력을 보여준 게 없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이집트로서는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5. 여담[편집]


사치스러움을 과시하기 위해 진주식초에 녹여먹음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안토니우스와 하루에 20만 세스테르티우스 상당의 돈을 다 써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내기를 걸어서 진주를 식초에 녹인 다음 원샷으로 승리했다는 일화다. 그런데 사실 진주는 식초 정도의 산도에는 그렇게 빨리 녹지 않고, 강산을 들이부어야 순식간에 녹는다고 한다. 황산이나 염산을 쌩으로 들이켰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마 거짓과 과장이 상당히 많이 가미된 에피소드일 터이다. 역사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진주를 식초에 녹인 척 하고 그냥 삼켜버렸을 것이며 그 진주는 나중에 자연스러운 배출 과정을 통해 회수되었을 것이라 한다. 전승에 따라서는 양 귀에 진주 귀걸이를 달고 나와서 연회 끝무렵에 시종에게 식초를 두 잔 가져오게 해 우선 귀걸이 한 쪽을 떼어서 식초에 넣어 마셔버렸다. 그리고 다른 한 쪽도 떼어내려 했는데 놀란 안토니우스가 패배를 인정하고 두 번째 진주를 먹는 것은 제지했다고도 한다.

양귀비여지를 좋아한 만큼 클레오파트라무화과를 좋아했는데 굉장한 대식가여서 하루에 먹어 치우는 무화과나 식사량이 엄청났다. 클레오파트라가 시원시원하게 먹는 모습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반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 중 카이사리온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살해되었고, 안토니우스와의 사이 두 아들도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요절한 것으로 보이지만[47],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지금의 리비아인 누미디아의 왕 유바 2세와 혼인하여 자손을 남겼고, 이들의 자손들은 로마 귀족들과 오랫동안 통혼했다고 전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식초에 녹여마셨다는 진주 일화에서 쓰인 식초와인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48] 그 중에서도 마레오틱 와인(mareotic wine)이란 고대 이집트산 화이트 와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49][50] 이외에 그녀가 와인 목욕을 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남녀 태아의 발육에 속도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여자 노예 여럿을 임신시킨 뒤 산 채로 배를 갈라 아이의 발육 정도를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막 갖다붙이는 '폭군의 악행' 내러티브의 스테레오타입이라 믿을만한 출처가 없는 한 걸러 듣는 것이 좋다. 중국 상나라제신달기,[51][52][53] 일본사부레츠 덴노, 그리고 더 고대의 파라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등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붙어있다.

이미지로만 본다면 고대 이집트 문명 출신처럼 생각되고 또 그렇게 묘사되지만, 기원전 69년 출신으로 이집트 역사에서는 중간기 정도의 인물이다.[54]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지어졌던 기원전 2560년보다 오히려 현대에 더 가까운 인물이며, 고대 이집트 문명보다 나중에 생겨났던 고대 그리스 문명보다도 더욱 나중에 생겨난 고대 로마 문명(지중해권 완전 통일 이전)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굳이 말하자면 고대 이집트 말기의 인물이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시기라는 것이 한 시기로 묶이긴 해도 사실 여러 왕조를 거치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 동안 존속되어 온 시대로, 최초의 이집트 통일은 기원전 3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현대 이집트 역사학계에서는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을 보통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로 입성한 연도인 639년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주된 견해로, 역사과목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반영되어 클레오파트라의 일대기를 고대사로 가르치기는 한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오늘날 모로코에 위치한 로마의 클리엔테스 왕국 마우레타니아(오늘날의 모로코)의 왕 유바 2세와 결혼해 왕비가 됐다. 어머니를 닮아 총명했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교양인으로 유명한 현군 유바 2세와 함께 마우레타니아의 부국강병을 이끌어냈고, 마우레타니아의 번영은 클레오파트라의 외손자(유바 2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의 아들)까지 이어졌다. 이 외손자가 바로 '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로 불리는 프톨레마이오스인데,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신격화시키고 스스로를 살아있는 신으로 자처하면서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군사원정을 벌이며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외할머니처럼 로마의 친구라는 칭호 속에서 마우레타니아를 지중해 서부의 부유한 국가로 이끌면서, 로마 내 유력자들과의 친분 속에서 그 영향력을 확장한다. 그는 자신이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고, 어머니의 이복자매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와 어릴 때부터 함께 로마에서 자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족들과 원로원 귀족을 남편으로 둔 여동생 드루실라 및 현직 원로원 의원들인 조카들을 통해 인맥으로 이어진 원로원 주요인사들과의 친분을 철저히 이용했다.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는 60년을 갓 넘은 원수정 체제의 한계와 로마 내 권력구도를 기회삼아 로마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까닭에 클레오파트라의 외손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당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로 당시 황제였던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로마 원로원 및 당시 집정관 등 최고위층들에게 과거 클레오파트라처럼 위험인물, 경계의 대상으로 제대로 찍히게 됐다. 따라서 그는 서기 40년 로마를 방문했다가, 이를 크게 경계한 황제와 원로원 수뇌부들의 지령에 따라 암살됐다. 이후 로마는 이집트를 병합할 때처럼 마우레타니아를 속주로 만들 준비에 들어가는데, 이에 베르베르인들은 크게 반발해 무려 3년 가까이 전쟁이 지속됐다. 당시 로마군은 프톨레마이오스 암살 이후 몇 달 되지 않아 공화정 복귀를 원한 원로원 일부 의원과 공모한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및 휘하 20명에게 가이우스 황제가 서기 41년 피살된 상황 속에서 잠시 헤맨데다 베르베르인들의 저항이 거세어 초반에는 고전했다. 그렇지만 애당초 로마의 국력은 피살 전 칼리굴라의 판단처럼 큰 무리가 아닌 까닭에, 다음 황제로 즉위한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우스 1세가 공화정 복귀 움직임을 제압하고 원로원을 물갈이해버린 이후 반격하면서 기어이 마우레타니아를 굴복시킨다. 이때 로마는 칼리굴라 시대때 계획한 전략에 따라 이 왕국을 두 개로 쪼갠 다음 속주로 병합시켰다.

2023년 새로 발행되는 이집트 20파운드 폴리머 지폐의 도안이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클레오파트라 7세/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미 생존해 있을 때부터 고대 서양사에서 제일 유명한 여성이었고, 수도 없이 많은 전설과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연장자들에게 클레오파트라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이다. 1963년 개봉한 초대형 사극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리즈 테일러가 주인공을 맡았는데, 세기의 미녀 배우가 펼친 뛰어난 연기력과 관능적인 외모로 클레오파트라 연기에 전 세계 대중을 사로잡았다. 재색겸비의 인물답게, 로마군이 도서관을 태워 먹자 야만인들이라고 빡쳐 하는 장면이 나온다.

초선, 양귀비처럼 시대와 국가를 대표하는 미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인, 이국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마케팅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당장 '클레오파트라가 먹은', '클레오파트라 화장품' 키워드로 검색하면 클레오파트라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음식과 화장품 재료가 나온다. 물론 까마득한 먼 옛날 유명 사람이 사용한 재료라고 해서 그것이 그 재료가 좋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예인이 광고하는 물건이라고 그 물건의 품질을 연예인이 보증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

2023년 5월부터 넷플릭스에 등록된 퀸 클레오파트라에서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배역에 흑인이 캐스팅되어 아프로센트리즘에 의한 역사 왜곡 논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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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를 방문했을 즈음인 기원전 1세기 경에 제작되었다. 아피아 가도 인근의 한 빌라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그러나 곽민수 소장의 발언에 따르면 이것이 클레오파트라의 두상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방문 시점에 제작된게 확인되었기 때문이지 이 조각이 클레오파트라를 표현한 것이라고 명시하는 표시나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가능성이 높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 두상은 현재는 독일 베를린 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이명은 '클레오파트라 테아 네오테라(Κλεοπάτρα θεα νεωτερα)'.[A] A B이집트 알렉산드리아.[3]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으로 유명하지만 그건 연인 관계일 뿐 실제로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2년에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4] 1세기 고대 로마의 고대도시 헤르쿨라네움에서 전시된 초상화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머리카락이 갈색인 것을 알 수 있다.[5] 정확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그녀의 친아들인 카이사리온이 족보상으로는 최후의 파라오지만 카이사리온은 단독재위기간이 없고 평생 어머니와 공동 즉위의 형태로 파라오 생을 보냈으며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족적을 남기지 못했기에 일반적으로는 이래저래 인상이 강한 클레오파트라를 최후의 파라오로 치는 편.[6]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상은 이집트 최후의 왕조인 이집트 왕국 메흐메드 알리 왕조에서도 반복되었다. 이집트 최후의 군주는 푸아드 2세였으나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했고 재위 기간도 극히 짧았던지라 아버지인 파루크 1세가 사실상 마지막 왕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모자의 관계와 흡사한 구석이 있다. 공교롭게도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이집트 왕국 메흐메드 알리 왕조 모두 유럽계 왕조다. 전자는 그리스계, 후자는 알바니아계[7]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계층에선 그리스인들의 그을린 갈색 피부색을 지성인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이를 켈트족등의 유입민족과의 차별성으로 여기며 왕권을 공고히 하는데 쓰였다. 다만 아프로센트리즘에서 말하는 피부와는 다르다.[8] 높은 확률로 칼단발이나 히메컷으로 묘사된다[9]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남부 아프리카로 나뉘는데 전자는 백인계 아랍인이 주류인 화이트 아프리카, 후자는 흑인계 아랍인이 주류인 블랙 아프리카로 부른다.[10] 고대 이집트 역사에 누비아계 흑인 왕조가 들어선 적도 있다! 당연히 이때는 파라오도 흑인.[11] 고대 이집트의 후기 왕조들은 외부에서 유입된 경우가 많이 있다(아시리아, 페르시아, 누비아, 그리스) 물론 지배층만 교체되었을 뿐 인구의 대부분은 아랍계인 기존 이집트인이었으며, 클레오파트라의 부계 조상이다 왕조의 창립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확실한 마케도니아인(그리스인)이었다. 아무리 당시 왕조 내 근친혼이 흔했더라도 수백년간 수도 많지 않은 그리스인들끼리만 결혼해 이어오는 건 무리니, 클레오파트라의 밝혀지지 않은 모계혈통을 통해 그녀가 주류 인종이었던 이집트인과 혼혈이었을 가능성은 있긴 하다. 그러나 인구비가 높은 편도 아니었을 중남부나 서아프리카(흔히 흑인이라 불리는) 출신 혼혈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당연히 이집트가 흑인 문명이었다는 건 그냥 대놓고 헛소리다. 흑인이 지배층이었던 적은 누비아가 정복한 25왕조 뿐이며 백년도 못 갔고, 이 지배층도 결국 이집트화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란 주장을 동양에 비유하면 중국의 주류 민족이 한족이고 비교적 짧은 시간 몽골계, 여진계 왕조들이 존재했는데, 과거에 몽골이 잠깐 제국을 새웠었다고 한참 후인 청나라 황제 인종을 몽골계일 수 있다고 추정하는 꼴이다.[12] 옷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위 상상하는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 스타일이 아니다.[13] 사실 이상한 것도 아닌 게 백일야화에 나오는 중국 왕조도 실제 중국과는 전혀 다르게 아랍풍으로 그려져 있다.[14] 이렇게 된 데에는 군사력이 급속도로 축소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그리스-마케도니아 군인들에게 각지의 땅을 주어 정착시켜서 예비 군사력으로 삼았다. 셀레우코스 왕조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런 정착 군인들을 카토이코이(Katoikoi) 혹은 클레루코이(Klerouchoi)라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군대의 주력인 팔랑기타이로 복무했다. 그리스의 유입 인구가 줄어들자 그 대신 갈라티아의 켈트 병사들과 같은 여러 용병들을 적극 유치, 정착시켰다. 클레루코이들과 마찬가지로 땅을 주어 정착시켰는데, 그 땅(파윰 분지)엔 아직도 켈트 혈통의 후손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한 재원은 이집트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충당했다.[15] 하지만 왕조에 유입되는 그리스인 인구가 거의 단절되고 용병 고용에도 한계가 찾아오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사력은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거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시도때도 없는 전쟁은 그 한정된 병력 자원마저 빠르게 소모시켰다. 나중에는 도저히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하여 라피아 전투 때처럼 이집트 병사들을 대거 훈련시키거나 이집트인들을 클레루코이에 받아들이는 등의 시도도 있었지만, 이미 불신과 반발심이 팽배하여 그다지 좋은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만약 승리한다면 승리에 공을 세운 이집트 병사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고, 이를 그냥 받아들여 주면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의 배타적 권력 독점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 그러다보니 지배층은 공을 세운 피지배층인 이집트인 병사들의 요구에 불성실하게 응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피지배층인 이집트 원주민들의 불만도 누적되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20년 동안 이집트인들의 반란 시달리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런 구조로 일이 진행되다보니 이집트 내에서 군대를 만들어 강력하게 유지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며 자연히 이는 군대의 급격한 축소로 이어지게 되었고 당연히 국력도 이에 맞춰서 축소되었다. 중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몽골족의 정복왕조인 원나라만주족의 정복왕조인 청나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정복왕조의 태생적 한계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16] 앞 각주에서 언급된 피지배층인 이집트인들이 공을 세워도 처우를 제대로 안 했던 게 문제였다. 게다가 이들의 요구사항도 지배층 입장에선 들어줄 수 없는 난제였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4세 무렵 라피아 전투에서 팔랑크스의 주력이 된 이집트 병사들이 분전하여 승리를 거뒀지만, 승전 후 독립을 주장했는데, 저 독립이 누구에게서 독립을 원하는건지 생각해보면 왜 수용되지 않았고 반란으로 이어졌는지 알 수 있다.[17]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경우 선대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의 직계자손이 아니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아들인데 프톨레마이오스 10세 혹은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되지 못했었다. 이유는 그의 아버지였던 프톨레마이오스 9세 다음엔 9세의 남동생 겸 아울레테스의 작은아버지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로 즉위했고 그 다음엔 자신의 사촌이 프톨레마이오스 11세로 즉위했다. 계보상 그는 방계여서 정통성이 부족했지만, 먼저 왕위에 앉은 사촌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제대로 자기 후계에게 왕위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딱히 즉위시킬만한 사람도 없자 왕위에 앉게 된 것이었는데 여기엔 로마의 영향이 컸다.[18] 그리고 이런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성 정치는 이미 전 세대 왕들이 꾸준히 누적시켜오고 있었다.[19] 즉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매이다.[20] 참고로 이런 지배층간의 정치적 내분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연신 반복되는 고질적인 문제점들 중 하나였다.[21] 사실 동격의 왕을 둘이나 둔다는 점에서 이미 예고된 파탄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22] 참고로 이는 전설일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집트의 더운 날씨에 오랜 시간 동안 융단 안에 들어가 있었으면 열사병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클레오파트라가 융단 속에 숨었으면 나왔을 때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그렇기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들 '설마 미쳤다고 저 안에 숨었겠냐'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리고 이 일화를 다룬 옛날 서양 그림들을 보면 클레오파트라를 나체로 그린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감상자의 눈요기를 위한 것이지만 화가들은 열기 때문에 옷을 다 벗은 거라고 핑계를 대기는 했다. 뭐 어차피 카이사르를 유혹하러 간 거니 나체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긴 하겠지만 말이다.[23] 이 시기를 다룬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는 현실성을 위해서인지 새벽에 궁으로 들어간다. 실제 양탄자에 들어가 있던 기간도 그리 길지 않고.[24]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 풀 네임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였다.[25] 이때 카이사르는 이미 12년 전 혼인한 정실부인 칼푸르니아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 문화는 가부장제가 강한 편인 데다 카이사르는 온 로마가 알아주는 유부녀 킬러(...) 바람둥이로 유명했기에, 클레오파트라와 연애 좀 해도 '아, 카이사르 또 저러네' 정도의 가십거리 이상으로 떠오르지는 않았다.[26] 오히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죽음으로써 로마의 내전도 끝났고, 이집트의 혼란스러운 정세를 평정해 확실하게 로마 세력권에 두고, 폼페이우스 살해범의 세력과는 관련이 없는 클레오파트라를 옹립함으로써 나름 정의도 세우는 등 정치적 업적도 얻었으니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님도 보고 뽕도 딴 셈. 게다가 죽을 때까지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을 로마 정계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안 해 별달리 반발도 안 샀다.[27] 카이사르가 죽은 후 클레오파트라의 남자가 된 안토니우스도 정적으로부터 비슷한 비판을 받게 되지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달리 본처 옥타비아를 버리고 정치적으로도 잘못된 선택을 연이어 하는 바람에 여론이 등을 돌린 것은 물론이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해 몰락하고 만다.[28] 카이사르 사후 유산을 기대했던 듯하지만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에 대해 유언장에 단 한 마디도 적어놓지 않았고 클레오파트라는 급 실망했다고 한다. 물론 클레오파트라가 돈이 없어서 카이사르의 유산을 기대한 건 아니었을 테니 사실상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인정하는 내용이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물론 노회한 정치가인 카이사르가 공사도 구별하지 못하고 로마 정계에 초위험인물인 클레오파트라를 끌어들일 일따윈 없었다. 무엇보다도 카이사르가 이미 마음을 정해 유언장에 적어 둔 후계자는 아직 젊지만 그렇다고 주변 인물들에게 마구 휘둘리지 않을 만큼은 나이를 먹었고 그만한 자질도 있는 양자 옥타비아누스였다.[29] 다만 파르티아 원정까지 둘의 관계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파탄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소 옥타비아의 간곡한 청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소 옥타비아는 남동생과 남편이 결별하는 것과 전쟁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아서(소 옥타비아는 이미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두 아이가 있었고 안토니우스의 전처 풀비아의 아이들까지 맡아서 키우고 있었다.) 남동생을 설득했고 결국 누이를 무척 아끼던 남동생은 이 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국 안토니우스가 저지른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고 로마에서 안토니우스의 명성도 바닥까지 추락해 버렸다.[30] 이 당시 카이사르는 원로원파를 싹쓸이하고 로마 정계의 정점에 올랐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정적들에 비해 약세였고.[31] 로마가 소비하는 밀의 대부분이 이집트에서 생산되었으므로 당연히 친로마파인 클레오파트라가 정권을 잡는 것이 유리했다.[32] 당시 클레오파트라의 나이는 28세였다.[33] 1명은 카이사르의, 2명은 안토니우스의 아들이었다.[34] 애시당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사후 카이사르 파와 원로원 파를 조정해서 로마의 내전을 막는 등 정치가로서 나름 능력을 보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관 카이사르의 정적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투쟁에서는 상당히 무능한 모습을 보였던 건 사실이다. 상술한 대로 로마 내전을 막긴 했지만 키케로의 술책과 원로원파의 공작으로 인해 로마의 적으로 찍혔을 정도니 말이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적잘한 시기 원로원파를 배신하고 안토니우스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안토니우스는 로마와 전쟁을 벌였을 수도 있었다.[35] 또한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인 카이사르가 삼두정치 당시 정치의 중심인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를 자신의 지배하에 둠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내전에서 승리한 것을 보고도 정치의 중심지 로마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부유한 동방에서 사치를 누리면서 정작 로마의 일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어떤 고생을 하든, 자기 마누라와 친동생이 뭘 하건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는 지중해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점령한 상태에다 풀비아가 안토니우스를 등에 업고 계속 정치적 공격을 계속하던 도중이라 안토니우스와는 정반대로 그의 일생 중 가장 위험한 순간 중 하나였다고 할 정도고 특히 폼페이우스는 시칠리아에 눌러 앉아 로마의 밀 수입을 방해했고 그로 인해 하마터면 로마인들이 들고 일어나 쫒겨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안토니우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옥타비아누스를 도와서 정치적 빚을 지우고 생색을 낸다거나 혹은 그를 공격해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고 때에 따라서는 숙청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이 황금 같은 기회를 그냥 넘겼을 뿐 아니라 2개 군단을 꽁으로 넘겨주기까지 하였다.[36] 이외에도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정치공세에 밀려 로마에서 쫒겨나 위험한 상황에까지 몰렸던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해방자 내전에 승리하고 다시 로마 정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줬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바로 직전까지 싸우던 사이였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키케로를 팽한 뒤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레피두스까지 끌어들여 제2차 삼두정치 체제를 실현시켰다.[37]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누나 소 옥타비아를 매우 아꼈는데 안토니우스가 삼두정치의 결속의 일환으로 옥타비아와 결혼했으면서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재혼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하자 더욱 격분했다고 한다.[38]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모두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와중에 성급하게 뱃머리를 돌려 멋대로 도주해버렸다. 이로 인해 아군의 전선과 사기마저 말아먹은 건 당연지사.[39] 그러나 로마에 당도하기 전에 요절한 걸로 추정되는 필라델포스를 제외한 나머지 두 아이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이자 안토니우스의 전처인 소 옥타비아가 친자식처럼 길러주었다. 다만 헬리오스도 로마에 온 지 몇년 안되어 요절한 걸로 추정된다.[40] 물론 그렇다고 이를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살해했다는 근거라고 하기에는 많이 미흡하다. 전리품으로 가치가 있음은 사실이므로 카이사리온과는 달리 일부러 죽일 이유는 되지 않기 때문. 이 때문에 두 설을 절충해 '일부러 죽일 이유는 없었지만 알아서 사라져 주는 게 편했기에, 클레오파트라의 자살을 막을 수도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설도 있다. 아마도 옥타비아누스의 입장은 클레오파트라를 데려와서 로마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자살해도 좀 아쉬울 지는 몰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는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이미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 사후 그의 유언장에 자신과 카이사리온의 이름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마에 온 적이 있기도 하고.[41]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금으로 장식된 뱃머리, 은으로 된 노를 갖춘 호화로운 선박에 비너스처럼 장식한 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별실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주위는 큐피드 신을 닮은 아이들이 부채질을 하며 서 있었다. 바다의 요정 네레이드처럼 꾸민 시녀들은 키와 돛줄을 잡아 배를 몰았다. 이 배에서부터 풍겨나는 야릇한 향기는 강기슭까지 퍼져 나갔다. 클레오파트라가 도착하자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초대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배를 방문해줄것을 요구했다. 안토니우스를 맞이하기 위해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도 성대한 준비를 했다. 안토니우스를 놀라게 한 것은 엄청나게 밝은 실내였다. 천장에 매달린것, 가지각색의 방식으로 벽면에 비스듬이 세운 것,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 등 사방 가득 등불이 놓여있었다."[42] 물론 이집트 군대를 모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 군대의 구성원은 대부분 토착 이집트인들이었고 그들은 아쉬울 때만 자기들을 찾고 정작 전쟁 후에는 봉급도 제대로 안 주는 이방인 왕조에 대한 충성심 따위 그리 많지 않았다.[43]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가 탑승했던 선박이 아직 전투가 어느 한 쪽의 판정승으로 흘러가기도 전에 중도 탈주해 버린 것이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 세력이 패배한 원흉이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선박은 후미에 위치해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황에서 다른 배들의 해전과 그 판도를 모두 관망할 수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그런 선박이 튈 경우, 지휘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우리 세력이 지는가?" 생각해서 튀기 마련이고 안토니우스 역시 클레오파트라의 오판을 그대로 따라가버렸다. 그런데 정작 클레오파트라가 튈 당시의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중 어느 쪽도 크게 유리할 것은 없는 상황이었다는게 후대 역사가들의 분석이며, 클레오파트라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뱃머리를 돌려 튀어버린 건 그냥 전쟁이 익숙치 않아서 그 상황을 오래 견디지 못 했기에 성급하게 행동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애초에 클레오파트라는 암투에는 능했지만 전쟁을 직접적으로 현장에서 경험한 건 악티움 해전이 처음이었다.[44] 반면 안토니우스의 경우 카이사르 밑에서부터 경험을 쌓은 유능한 2인자이자 군인이긴 했으나 그 역시 악티움 해전에선 너무나도 큰 오판을 두 개나 저질렀다. 하나는 후미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배가 도망치는 모습을 보곤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졌다고 판단해서 철수하기 시작한 것. 클레오파트라와는 달리 노련한 군인인 안토니우스의 입장에선 후미의 배가 먼저 튄다면 경험이 경험인 만큼 상황이 나빠졌다고 계산할 법도 했지만, 정작 상황은 정반대로 아직 옥타비아누스와 대치 구도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모든 걸 각오하고 승부를 확실하게 내기 위해 좀 더 싸웠다면 상황이 훨씬 나았으리라는 부분이 최대의 함정.[45] 또한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이 중요한 전쟁이 아니라고 여기며 좀 져도 나중에 만회하면 그만인 사소한 항쟁이라고 판단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는데, 옥타비아누스 쪽이 보다 견고한 지지를 얻고 승리의 기반을 닦는데 너무나도 큰 도움을 주고 말았으며 안토니우스는 살아생전 악티움 해전에서 말아먹은 부분을 만회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사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막대한 재산과 경험 많은 군대를 쟁여두고 있어서 설령 해전 한번 졌다고 해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듯하지만, 세상에서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둘 뿐이었고 그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악티움은 모든 승패를 좌우하는 결전의 전장이었던 것이다. 당장 안토니우스군의 병사들은 원래 로마인이므로 안토니우스의 군에 소속된 것만으로 반역자라는 자신들의 처지에 큰 불안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이미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적으로 선포되었고 그렇게 여겨질 만한 짓을 저질렀다) 로마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집트의 여왕에게 충성을 바칠 의리 따윈 눈곱 만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와해되지 않고 로마와 전쟁을 치룰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이집트의 막대한 부와 안토니우스 개인의 능력 덕분이었고, 결국 안토니우스는 상어가 물속에서 움직임을 멈추면 죽듯이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할 경우 휘하의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될 것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로마와 이집트 사이에 낀 그리스 계열 도시들도 과거 카이사르의 내전 때 경솔하게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었다가 학살당한 경험이 있어서, 이번만큼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쪽에 둘 다 발을 걸치며 입장을 애매하게 유지하다가 이후 승리가 확실해진 사람에게 붙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만큼 이들에게 악티움 해전은 자신의 미래와 생명까지 결정할 중요한 방향키였고, 여기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자 미련없이 그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향한 것이다.[46] 또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보면 로마의 정치인 중 1인에 지나지 않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군인들의 힘으로 이룩한 영토 중 대부분을 임의로 타국에게 할양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에, 명분 및 정당성 자체가 크게 결여되어 힘의 우위를 본인들 능력으로 증명하는 것만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어진 대안이었는데 바로 그 힘의 우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악티움 해전에서 보여주었다.[47] 일부러 죽였을 가능성은 적다. 옥타비아누스의 입장에서 카이사리온은 유일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남기 위해서 반드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위험분자이자 라이벌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아들들은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이쪽은 어차피 정치적으로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안토니우스의 전 부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가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48] 그런데 이 시절 와인들은 죄다 유통기한이 길지를 못해서 1년만 넘겨도 와인 상태를 유지한다면 상등품으로 취급받았다. 왜냐하면 고대 시절 많은 와인들은 기껏 만들어놔도 1년도 못 넘기고 상하거나 식초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 저장기술과 숙성기술 등이 발전한 현대는 10년 이상 묵힌 와인도 판매되고 있다는거랑은 천지차이.[49] 현재 이 고대 와인의 이름을 따온 마레오틱 와인이란 현대 이집트산 와인이 생산되고 있고 재배지도 두 와인의 이름 유래가 된 마레오틱 호수 주변이라는 게 공통적이다. 다만 당시의 재배 환경이나 포도 품종 등이 현대와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서 맛이 같진 않을 거라고 한다.[50] 그녀가 와인을 마셨다면 그 와인은 달았을 가능성이 높으리라고 현대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 # 클레오파트라가 살던 고대 시절엔 어떻게든 당도를 높이고 알콜도수도 높인 와인들이 고급으로 취급받았으며, 당도를 높이겠답시고 끓인 포도즙과 을 넣는 건 물론 을 써서 포도주의 단맛을 올리려는 시도까지 했다. 납으로 된 잔을 쓰거나 납 용기에다 포도주를 끓이거나 아예 납을 직접 넣어버리기도 했다고. 이 때 납이 동원된 이유는 포도주 속 아세트산과 납이 반응할 경우 아세트산 납이 만들어지는데 이게 단맛이 나기 때문. 그리고 납은 일단 방부제 역할도 해서 넣었던 걸로 보인다. 당연히 납 중독의 위험이 따라다녔지만.[51] 주왕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상나라 마지막 군주 제신과 그의 아내 달기에 관련된 흉악한 기록들은 주나라가 크게 과장했다라는 설이 현재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여기서 소개되는 클레오파트라의 악행들도 이와 비슷한 사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토록 망국의 군주들에 관한 고대의 기록들은 왜곡되거나 과장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52] 단, 원래 상나라는 인신공양이 상당한 규모로 일어났던 나라다. 이는 과장이 아니며, 갑골문 유물들로 증명이 된다. 오히려 갑골문과 고고학적으로 추적할 경우, 제신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혹형들을 뛰어넘는 짓들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파악된다. 기록 자체가 마냥 거짓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 책임이 마지막 군주와 그 아내에게만 집중되는 기록이 문제가 되는 경우다.[53] 또한 주를 비롯한 변방국가들은 은나라가 행하던 인신공양의 희생용 공물을 마련하는 곳이었으므로 주나라에서 은나라에 이런 면에서 원한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은에 대해 좋은 말을 써 줄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54] 물론 이집트 기준이다. 기원전 69년은 박혁거세가 출생했다고 알려진 해이니, 전세계적으로 보면 21세기 시점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어마어마하게 옛날 사람임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