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문명/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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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의 결혼시장. 에드윈 롱.[1] 1875년 작(作).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메소포타미아 문명성문화에 관해 정리해놓은 문서.


2. 상세[편집]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모든 종류의 질병에 대해서 치료법을 적어놓은 토판이 있는데 개중에서 딱 하나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사랑의 열병이었다. 니네베에 있는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토판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온다.

환자가 지속적으로 목을 가다듬을 때 종종 말을 잃었다. 혼자 있을 때는 늘 혼잣말을 하고, 들판에서 이유 없이 웃으며, 상습적으로 우울하고 목이 조여오고, 먹거나 마시는 일이 즐겁지 않고, 큰 한숨을 내쉬며 '오 나의 불쌍한 심장이여!'라는 말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다.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그것은 모두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 보테로 102-103

결혼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자 관례였다. 집안의 계보를 잇고 사회안정을 위한 중대사로 여겨졌던 것. 단순히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와 후계가 걸린 일이었기에 신랑신부가 결혼 직전까지도 단 한번도 만나보지 않고 바로 가문 간 합의로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바빌로니아의 결혼풍습에 관해서 가장 유명하게 인용되는 기록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학자 헤로도토스의 기록이다. 헤로도토스는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잘 알려지지 않은 풍습을 그대로 써놨는데, 그게 바로 처녀들의 매춘 풍습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바빌론의 처녀들은 생애 한번씩은 반드시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의 신전 밖에서 매춘을 해야만 했다. 처녀들이 신전 앞에 앉아있으면 아무나 남자 하나가 걸어와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지목했다. 그러면 여자는 마음에 들든말든 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야만 했다. 이 풍습은 사회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헤로도토스의 주장이 썩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일단 헤로도토스의 기록들이 전반적으로 상당히 역사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은 차치하고도, 일단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처녀성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 메소포타미아에서 결혼도 아직 하지 않은 처녀들이 아무에게나 몸을 내어준다는게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되기 때문. 이미 결혼을 마친 유부녀들이라면 차라리 이해라도 가겠지만 헤로도토스는 분명히 '모든 여자들이'라고 써놓았다. 그래서 현대 학계에서는 이슈타르 신전의 여사제들이 매춘을 하던 풍습을 헤로도토스가 과장해서 적었을 가능성을 오히려 더 높게 친다. 헤로도토스는 이 외에도 '처녀 시장'이라는 다소 경악스러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아래는 헤로도토스의 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1년에 한번, 모든 마을에서 결혼 적령기의 어린 처녀들은 한 곳으로 불러모인다. 그러면 남자들이 처녀들 주위를 원모양으로 둘러싼다. 마을의 경매꾼이 모인 처녀들의 외모 순위를 모두 매긴 뒤, 가장 아름다운 처녀부터 한 명씩 경매를 시작한다. 처녀가 비싼 값에 팔려나가면 그 다음으로 아름다운 처녀를 다시 경매에 붙인다. 그곳에 모인 모든 처녀들이 그날 당일에 아내로 팔려나간다. 바빌로니아인들 중에서도 부유한 자들은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손에 넣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는 한편, 일반인들은 얼굴에 신경쓰지 않고 못생긴 여자들 중에서 제 경제형편이 되는대로 고른다... 원하는 남자들은 모두 경매에 참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도 찾아와 여자를 다투었다. 이는 그들의 관습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이었지만 현재는 쓰지 않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메소포타미아와 바빌론 지방에서 생각만큼 로맨틱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없었다. 결혼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계약과 합의에 가까웠고 신부의 아버지가 계약을 맺고 신랑에게 신부를 넘겨준다는 의미였다. 수메르어로 '결혼'이라는 단어는 '토지를 잰다', 혹은 '땅을 측량한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결혼을 토지나 땅을 측량하는 것처럼 계약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연애결혼에 성공하는 경우는 웬만하면 없었으며 모두 철저히 가문과 가주의 이익에 따라서 결정되는 구조였다. 결혼 당사자들의 의사보다는 가문 양가의 의사가 백배 중요했다. 그나마 신랑의 의사가 반영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신부의 뜻이 결혼 상대에 반영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양가와 결혼 당사자가 1차적으로 결혼에 합의하고 나면 다음과 같이 5단계를 걸쳐 결혼식을 치렀다. 마치 계약의 절차와도 같은 느낌. 일단 1단계로 결혼 합의, 2단계는 신랑신부 가문이 서로에게 지참금을 주는 단계, 3단계는 결혼식, 4단계는 신부를 신랑 쪽 집으로 인도하는 절차, 5단계는 신랑신부와의 하룻밤을 통해서 임신하고 아이를 가지는 단계였다.[2] 만약 위의 단계들 중 하나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혼을 무효처리할 수도 있었다. 또한 신부가 결혼 전에 이미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명날 결과 당장 외가로 내쫒아 돌려보내기도 가능했다. 다만 이경우 신부 쪽에서 신랑에게 지급한 지참금은 다시 돌려주어야 했다.

바빌로니아에는 약혼 제도도 있었다. 특히 마음이 자주 바뀌는 사람들을 대비하기 위해서 마련해놓은 제도가 바로 약혼이었다.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이미 약혼을 한 신랑 측 구혼자가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면 미리 지급한 지참금은 물론이고 신부값을 모조리 빼앗겼다. 반대로 예비 장인 측에서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면 실망한 구혼자에게 신부 값을 두 배로 지출해야 했다. 특히 라이벌 구혼자가 예비 장인을 꼬드겨서 약혼 파기를 설득했다는게 드러난 경우에는 예비 장인 뿐만 아니라 라이벌 구혼자도 벌금을 물었다. 그리고 이 경우 라이벌 구혼자는 절대로 예비 장인 쪽에게 장가가는 게 불가능했다. 물론 가문이 정말 높거나 권력이 컸다면 몰래 우회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아예 법령에 딱 적혀있는 것을 대놓고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가문 간의 합의를 통한 결혼이 우세했다지만 사람들의 본성상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하는건 당연했다. 젊은이들 입장에서는 나이든 어른들이 가문만 보고 짝지어주는 결혼이 마음에 찰 리가 없었고 원하는 상대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문학 속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잘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여신 이안나는 부유한 농경의 신 '엔킴두'와 결혼하기를 종용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가난한 양치기 신 '두무지'와 결혼했다. 가문의 강요에서 벗어나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에 성공한 것. 이 커플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유명했고 이 둘을 주제로 해서 이야기나 노래도 많이 만들어서 부르고 다녔다. 어른들은 자유연애를 막기 위해 통금 같은 벌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성교를 묘사한 수메르 토판. 노골적인 모습이 있으니 열람시 주의 [펼치기ㆍ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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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섹스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였고 현대만큼 겉으로 내보이기에 부끄러운 행위도 아니었다. 갓 결혼한 부부는 대를 잇기 위해서라도 당장 성교를 통해 아이를 가질 것을 요구받았고 그렇지 않은 부부는 손가락질 받았다. 남성간 관계에 대한 내용이 토판이 실려있는 것을 보면 동성애도 크게 지탄받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다양한 체위를 사용해서 관계를 맺기도 했다. 토판에 대놓고 '서서', '의자에 앉아서', '침대나 파트너 위에 누워서' 등 수많은 가지각색 체위들이 적힌 걸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러 방법으로 관계를 맺었던 모양. 특히 '그녀를 뒤에서 갖는다'라는 표현은 항문 성교를 뜻하는 표현이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불임 부부는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가지려 노력했다. 자녀가 없는건 대단한 불행이었고 사회적으로 최악의 벌이었다고. 여자가 불임인 경우 남편은 두 번째 아내를 들일 수도 있었다. 두 번째 아내나 첩을 들일 때에는 본처와의 상의가 필요했지만 부계적인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 부인의 입장은 그다지 크게 반영이 되지 않았다. 본처가 불임이 아니어도 첩을 들이는 게 가능해서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첩이 매우 흔했다. 첩이 들어와 아이를 낳았다면 남편은 본처와의 합의 하에 그 아이를 본처의 아이로 입양시키는게 가능했다. 의외로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본처를 내치는 건 불가능했다. 본처는 죽을때까지 본처였고 기존의 본처가 죽어야만 첩을 본처로 승격시키는게 가능했다.[4] 그래서 종종 본처를 죽여버리는 경우도 흔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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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신 이슈타르
아시리아 왕비의 재현도
니네베에서 발견된 '푸아비' 여왕의 장신구와 재현도
이혼은 사회적으로 대단히 끔찍한 행위였고 실제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번 이혼하면 낙인이 찍혀서 재혼은커녕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마저 힘들었기 때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결혼 생활이 성에 차지 않아도 평생 함께 살아야만 했다. 다만 이혼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이혼을 통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원하면 바로 이혼을 통보가 가능했지만 여자는 '남편의 폭력, 학대 행위가 인정될 경우'에만 이혼 통보를 할 수 있었다. 남자가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이혼하면 외가에게 결혼할때 받았던 지참금을 모두 돌려줘야 했기 때문. 여자가 불임인 경우에도 이를 근거로 이혼이 가능했다. 남자가 불임일 경우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아예 생각을 못했거나 신경쓰지 않았던 모양.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언제나 여자의 몫이었다.

이혼 제도 자체가 남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기에 여자들은 스스로 이혼하는 경우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자발적인 이혼을 선택하는 아내들이 있기는 했다. 하도 남편들에게 학대를 당하다가 못견디고 탈출한 것에 더 가까웠는데, 이런 경우에는 무일푼으로 벌거벗은채 집에서 쫒겨났다. 이혼녀라는 낙인이 찍혀버려서 기존에 살던 도시나 마을에서 살지도 못했고 저먼 도시나 마을로 이사가야만 했다. 법전에는 아이들을 부양할 수 있도록 재산을 조금씩 여자에게 나누어주라고 명시되어있었지만 실제로 재산이 분할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근친상간은 미친 짓이었다. 남자가 자기 딸을 취했다면 도시에서 쫒겨났고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관계했다면 묶어서 물속에 처넣었으며[5] 아들이 어머니와 놀아났다면 화형에 처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사망 후에 자녀를 낳았던 자기의 계모의 품에서 붙잡혔으면, 그를 아버지의 집에서 추방한다는 비문도 있을 정도니 정말 온갖 종류의 근친이 일어났음이 짐작 가능하다. 어쨌든 확실한 건 근친 자체는 절대로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으며 고대 이집트와는 달리 왕족들 사이에서도 근친혼은 금기시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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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트나피쉬팀과 그의 아내를 묘사한 조각상.[6]
불륜을 저지르는 경우는 흔했다. 차이점이라면 남자는 첩을 여럿 둘 수 있었기에 불륜을 저지르는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평생 한 남자만 보고 살아야 했던 여자들은 더더욱 빈도가 많았다는 것이다.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동침한 여자는 연인과 함께 묶어서 강에 던져버리거나 칼로 찔러죽였다. 다만 아내의 남편이 이들을 용서하기를 바란다면 모두 용서받았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탁해서 제 남편을 죽인 경우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결탁한 남자에 대한 처분은 안나와있지만 아마 같이 죽임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자가 불륜을 저지른 경우, 아내보다는 형량이 낮지만 그래도 강하게 처벌받았다. 단순히 남녀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불륜 여성의 남편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여겨졌기 때문. 불륜남은 불륜녀 남편의 명예를 대놓고 먹칠한 거나 다름없었기에 똑같이 강에 던져지거나 맞아 죽기도 했다.

위의 설명만 보면 메소포타미아인들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던 것처럼만 보이지만 평생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도시 마리의 왕 짐리림과 십투 왕비 사이에서 오고간 토판 편지에는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줄줄이 읊는 내용이 한가득이고, 수메르 속담에는 '아내가 나에게 8명의 자식을 낳아주었고 나는 아직도 그녀와 사랑을 나눌 준비가 되어있다'라고 자신하는 남자의 말도 나온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2700년 경에 만들어진 한 수메르 부부의 상은 하나의 석고로 깎았는데 남자의 오른팔이 여자를 다정히 감싼채 왼손은 여자 오른편에 넣은 상태의 모습을 묘사하기도 했다. 결국 메소포타미아의 결혼 생활은 현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현대와 똑같이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하게, 불행한 사람들은 불행하게 살았다고 보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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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의 화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묘사한 바빌론의 결혼 풍습의 내용을 감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 당대 금욕적인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을 도발적인 모습으로 그려서 주목받았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현재는 왕립 홀로웨이 대학에서 소유 중이다. [2] 특히 이때 신부는 처녀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것을 기대받았다. 그래서 위의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녀성을 중시하던 사회가 그런 짓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3] 참고로 여자가 항아리에서 빨대로 마시고 있는건 맥주다.[4] 첩과 본처의 격차가 확연했다는 증거다. 함무라비 법전을 보면 본처는 마음에 들지 않거나 아이를 못낳은 첩을 팔아버릴수도 있었다.[5] 며느리가 이미 남편과 관계했을 경우에 물속에 넣어 죽였다. 아직 관계를 하지 않았을 경우, 일단 지참금을 모두 신부에게 되돌려준뒤 예비남편과 예비 시아버지 중 그녀의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새로 시집보냈다.[6] 대홍수 신화의 주인공으로, 방주를 만들어 그 안에 동물들을 태워 홍수에서 살아남았다. 이후 인류의 조상이 된다. 이야기가 익숙하겠지만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원조가 이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