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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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드
Akkad
𒆳𒌵𒆠


파일:아카드 제국.png

아카드 제국의 진격 경로[1]
기원전 2334년 ~ 기원전 2154년
위치
메소포타미아
수도
아카드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인구
36,000여 명 (기원전 2300년)[2]
언어
아카드어
수메르어
종교
메소포타미아 종교
주요 사건
기원전 2334년 건국
기원전 2340년 ~ 기원전 2284년 사르곤 대왕의 정복 전쟁
기원전 2154년 멸망
면적
800,000㎢ (기원전 2250년)
성립 이전
초기 왕조 시대
멸망 이후
구티 왕조
현재 국가
[[이라크|

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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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시리아|

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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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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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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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튀르키예|

튀르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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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쿠웨이트|

쿠웨이트
display: none; display: 쿠웨이트"
행정구
]]
[3]

1. 개요
2. 역사
2.1. 사르곤 대왕
2.2. 혼란기
2.3. 전성기
2.4. 멸망
3. 경제
4. 문화
5. 언어
6. 여담
7. 역대 왕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처음으로 통일한 국가이자 인류 최초의 제국이다.[4]


2. 역사[편집]


원래 아카드는 메소포타미아 중부에 있던 도시들 중 하나로, 사르곤 대왕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는 도시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아카드의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으니 당연히 관련 조사들도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기본적으로 지나치게 옛날이다보니 남아있는 자료들도 많이 없어 사르곤 이전의 아카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사르곤 이전의 당시 메소포타미아 시대는 한창 초기 왕조 시대의 끝물이었는데,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난립하며 패권을 겨루던 시대였다.


2.1. 사르곤 대왕[편집]


파일:sargon-of-akkad-2.jpg
파일:sargonthegreat.jpg
사르곤 대왕의 청동 두상
신하들을 접견하는 사르곤
이렇게 고만고만한 도시였던 아카드는 사르곤 대왕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패자로 등극한다. 사르곤은 제사장의 아들로 원래 키쉬의 왕이었던 우르자바바의 신하였다. 당시 사르곤이 우르자바바 왕 아래에서 맡고 있던 관직의 명칭은 '랍샤케'로, 번역하자면 '정원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관직의 명칭과는 달리 랍샤케는 단순한 정원사 따위가 아니라 도시의 수로를 관리하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였으며, 수로 개수와 정비에 많은 인력이 필요했던만큼 사르곤은 이 관직을 통하여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휘하에 만들 수 있었다. 결국 충분히 세력을 모은 사르곤은 우르자바바 왕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아 새로운 왕에 등극했고, 이후 본격적인 정복 원정을 펼치면서 분열되어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통일하기 시작한다.

당시 이미 아카드의 통치자였던 사르곤은 키쉬를 집어삼킨 다음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움마의 왕 루갈작게시가 통합하였던 수메르를 공략해 도시들을 하나씩 함락시키고 결국 통합된 수메르의 수도인 우루크마저 정복하면서 수메르 전체를 정복하였다.[5] 사르곤은 수메르 정복 후에도 여러 전투를 치러 지중해 연안과 엘람을 정복하고 비문에 아카드어 사용을 장려하여 아카드어의 입지를 확대했다. 사르곤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하였다. 이렇게 활발한 정복 활동 덕에 사르곤은 당대 최고의 정복군주들 중 하나로 칭송받았으며, 아카드 제국의 세력은 갈수록 강대해졌다. 다만 56년에 달하는 사르곤 재위 말기에는 기근과 반란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제국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르곤은 이 모든 반란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했고, 결국 죽을 때까지 엘람, 마르하시 등 인근의 광활한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였다.

사르곤의 업적은 단순히 외치나 정복 활동에 그치지 않았다. 사르곤은 정복한 도시에 대한 동화 작업과 내치에도 신경을 굉장히 많이 쓴 군주였다. 기본적으로 새롭게 정복한 도시들의 엘리트층을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아카드 출신 귀족들로 갈아치워 안정을 꾀했고, 제국 내에 여러 무역로들을 개통하여 곳곳에 물류가 빠르게 흘러가도록 했다. 사르곤의 무역 장려 정책 덕분에 아나톨리아의 광산부터 현대 아프가니스탄청금석, 레바논백향목 등 수많은 물품들이 제국 내부에 유통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경제는 분열되어 있던 시절보다 훨씬 가파르게 성장했다. 사르곤 대왕의 모습을 묘사한 석비들이 제국 곳곳에 세워졌고, 그의 영광을 기리는 신전들과 도시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다. 종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던 사르곤은 스스로를 아누의 대신관이자 엔릴의 선택을 받은 자라고 불렀고, 난나 여신에게 자신의 딸인 엔헤두안나[6]우루크 지방에 특별히 임명하여 막대한 보물들을 봉헌하는 등 사제 계급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다.


2.2. 혼란기[편집]


사르곤 말기, 제국 곳곳에 기근과 흉작이 겹치면서 불만이 쌓여 이미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으나,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던 사르곤은 이 모든 반란들을 부수는 데에 성공했다. 사르곤은 심지어 5명의 왕들이 연합하여 만든 연합군들마저 깨뜨렸고, 덕분에 흉흉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르곤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계자들은 그만한 군재가 없었다. 사르곤 사후 즉위한 아카드의 제2대 왕인 리무쉬 왕은 즉위하자마자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봉기들을 막아야만 했다. 기원전 2278년부터 기원전 2270년까지 약 9년 간 재위한 리무쉬 왕은 반란들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잔혹한 학살을 펼쳤다. 리무쉬 왕은 우르, 아다브, 라가시, 데르 등 수많은 도시들에서 발생한 반란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 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학살했고,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도시들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신전을 밀어버리는 등 굉장히 탄압적인 정책을 폈다. 그러던 중 리무쉬 왕은 궁정에서 신하에게 살해당했고,[7] 그의 뒤를 이어 사르곤의 아들이자 리무쉬의 형이었던 마니쉬투슈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다.

아카드 제국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한 마니쉬투슈는 초대 왕인 사르곤과 타쉬룰툼 왕비의 아들이었다. 기원전 2270년에 왕위에 오른 마니쉬투슈 왕은 역시 제 형제와 똑같이 즉위하자마자 수많은 반란들을 다스려야만 했다. 마니쉬투슈 왕은 선대 리무쉬 왕과 마찬가지로 잔혹한 방법으로 반란을 억눌렀다. 이러한 방법은 효과를 내었고, 결국 곳곳의 반란과 불만들을 잠재우는 데에 성공한 마니쉬투슈 왕은 국외로 원정을 나가며 영토를 확장하는 업적을 내기도 했다. 아카드 측의 기록에 의하면 마니쉬투슈 국왕은 페르시아 만으로 거슬러 내려가 32명의 왕들로 구성된 연합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도 한다. 또한 리무쉬 왕 시절에 쇠퇴했던 무역에도 다시 신경을 써서 티그리스강을 통해 총 37개의 도시들과 무역을 진행했으며, 니네베에 있던 이슈타르 신전을 복구하는 등 잦은 전란으로 지친 제국 백성들을 달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렇게 제국을 안정화시켜나가나 싶었던 마니쉬투슈 왕은 기원전 2255년에 궁정의 신하에게 살해당한다. 마니쉬투슈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나람신이 즉위한다.


2.3. 전성기[편집]


파일:naram-sinstele.jpg
파일:shutterstock_1836610099.jpg
나람신의 석비[8]
아카드 제국의 군대
아카드 제국은 제4대 국왕인 나람신 왕 시절에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다. 사르곤의 손자이기도 한 나람신 국왕은 할아버지 사르곤의 군사적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은 뛰어난 지도자였다. 나람신의 즉위 직후에 수많은 도시 국가들이 서로 연합을 맺어 반란을 일으켰다. 우르, 쿠투, 티바, 카살라, 아이브라트 등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한꺼번에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나람신은 군대를 이끌고 대부분의 반란군들을 성공적으로 격파했고 9명의 왕들이 이끌던 군대를 깨부수었으며 3명의 왕들을 포로로 잡으며 제국이 건재함을 알렸다.

나람신은 이후 자그로스 산맥, 타우루스 산맥, 아마누스 산맥 북쪽에 살던 부족들을 정벌했고, 아카드 제국의 영토를 지중해에서 아르메니아 지방에까지 대단히 넓게 확장했다. 나람신은 끊임없이 아카드에 반란을 일으키던 엘람의 군주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국경을 안정시켰으며 결혼동맹을 통하여 왕국 간의 결속을 다졌고, 수사 지방에 총독을 파견하는 등 제국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 덕분에 아카드 제국은 나람신 왕의 재위기에 역대 최강의 세력과 최대의 영토를 자랑할 수 있었다.

나람신 왕은 그 외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할아버지인 사르곤을 본따서 제국 곳곳에 자신의 모습을 새긴 석비들을 연달아 세웠으며 혼란기 동안 침체되었던 무역을 재개하고 저 멀리 인도와도 교류를 트는 등 제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또한 단순히 새로운 영토들을 정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정복한 지역들 곳곳에 지방관들과 총독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니네베, 나가르 등에 궁전과 행정기구들을 따로 만들어 수도 아카드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치적으로 내정을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곳곳에 신들을 모시는 신전들을 지어 종교를 통한 국가 통합에 힘썼다.

특히 나람신 왕은 종교를 왕권 강화에 대단히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이전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왕을 신의 대리자 정도로만 인식하였으나 나람신 왕은 자신을 인세에 강림한 현인신으로 부르도록 하면서 신격화하였고, 신을 섬기는 것을 곧 자신을 섬기는 것과 동일시하면서 왕권을 신권과 함께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신전에 막대한 재화들을 봉헌하고, 사제 계급들에 대한 우대를 통하여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으며 덕분에 사회는 이전과 비할 바 없이 안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카드 제국은 나람신의 재위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처럼 많은 업적을 남겼던 덕에 나람신은 인근의 백성들에게 네 방위의 영토들을 모두 정복하여 다스린다는 뜻의 사계왕(四界王)으로 불리기도 했다.


2.4. 멸망[편집]


파일:220px-Utu-Khegal,_Prince_of_the_Summerian_city_of_Erech,_imploring_victory_against_the_Gutian_king_Tirikan.jpg
파일:The_Gutians_capturing_a_Babylonian_city.jpg
구티족의 모습
무너지는 아카드의 도시
이토록 강성했던 아카드 제국도 나람신 대왕 사후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근 자그로스 산맥에서 기원한 유목민족인 구티족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아카드 제국은 이미 사르곤 대왕 시절부터 구티족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었고, 이들을 위험한 적으로 여기고 있었고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격퇴하기도 했다. 당시 아카드 제국의 힘이 워낙 강성했기에 구티족 역시 함부로 아카드 제국의 국경을 침범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으나, 나람신 대왕 사후 아카드 제국이 갈수록 약화되자 점점 제국에 침략해 들어오는 횟수가 잦아졌다. 이미 농경과 정주 문화를 일찍이 습득했던 아카드인들과 달리 구티족은 여전히 유목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에 농경과 도시에 대한 미련이 거의 없었다. 구티족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태우고 심지어 가축화된 동물들을 모두 들판에 풀어버리는 등의 행동을 하며 빠른 속도로 아카드 제국의 도시들을 함락시켜 나갔고, 아카드 제국의 경제는 오래 가지 않아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

나림신 대왕 사후 왕위에 오른 아카드 제국의 제5대 국왕 샤르칼리샤리 왕은 점점 심각해져가는 국난에 직면했다. 북쪽에서는 구티족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부 도시들 대부분을 농락하고 있었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세금 인상이 필요했으나 대부분의 도시들이 세금 인상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심지어는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와중에 끔찍한 기근과 흉작이 연이어 겹치니 중앙정부는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9] 구티족 외에도 서쪽에서 셈족의 한 일파인 아모리인이 등장하여 아카드 제국을 공격했고, 내부에서는 우루크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불순한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우루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드 제국에 반기를 들고 떨어져 나가자 나머지 도시들도 우루크를 따라 아카드에게서 독립을 선포했다.

샤르칼리샤리 왕이 사망한 후 아카드 제국은 거의 무정부 상태와 비슷한 상황에 빠진다. 왕이 사망한 직후 이기기, 이미, 나눔, 일루루, 이렇게 네 명의 후계자들이 동시에 왕위를 주장하면서 아카드 제국은 극심한 내홍에 빠졌다. 결국 사르곤 왕조의 혈통이었던 두두가 이 내홍을 통합하고 왕위를 얻어내면서 왕위 계승 분쟁은 일단락되었으나, 이미 제국은 망해가는 상황이었고 나람신 대왕 시절의 성세는 찾아보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두두 왕은 이전의 봉신국이었던 움마엘람의 도시국가들과 맞서싸워야 했으며, 그와중에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구티족과도 맞서야만 했다. 수도인 아카드를 제외하면 그 어떠한 영토도 남지 않은 아카드 제국은 이미 제국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두두 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자 아카드 제국의 마지막 왕인 슈투룰이 왕위를 이었다. 슈투룰 왕은 필사적으로 무너져가는 아카드 제국을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군사적 재능도 나름 가지고 있었던 슈투룰 왕은 활발한 군사 활동을 벌이면서 키시, 투툽, 에슈나 등 이전의 도시들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였으며 심지어는 대도시인 우루크를 다시 아카드 제국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카드 제국의 꺼져가는 불꽃을 살리려던 슈투룰 왕의 노력도 북쪽에서 밀려내려오는 구티족의 군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구티족은 막강한 기동성을 활용해 수도인 아카드를 함락시켰으며, 슈투룰 왕의 생사는 이후 확인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아카드 제국은 사르곤 대왕이 건국한 이래 180여 년 만에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수메르 왕들의 기록》에 의하면 아카드가 멸망한 직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헤게모니가 다시 일시적으로 우루크에게 돌아가 약 6명의 우루크 왕들이 더 재위했다고 하지만 실제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으며 통상적으로 아카드 제국 멸망 이후 구티족이 들어섰다고 본다. [10]


3. 경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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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드 제국의 경제는 당연히도 농업 중심적인 구조였으며, 농업을 주로 하는 대신에 서로 물물교환 형식의 상업 역시 번창했다. 특히 아카드 제국은 무역을 활성화하는 방향의 정책들을 주로 폈다고 한다. 당시 아카드 제국에는 크게 2개의 경제 중심지가 있었는데, 하나가 인공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하는 이라크 남부의 대단히 비옥한 곡창지대였으며[11] 나머지 하나는 빗물을 통해 물을 공급하는 이라크 북부 지역의 곡창지대였다. 아카드 제국 시기 이라크 남부 지방은 1년 강우량이 20mm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빗물의 양이 적었기에 이 지방에 사는 농부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인공 수로를 만들어 밭에 물을 댔다. 그러나 당시 부족했던 수로 기술로 인하여 점차 밭들에 염류가 집적되었고, 이때문에 높은 염도를 상대적으로 더 잘 견디는 보리를 재배하는 경향이 차츰차츰 늘어갔다.

아카드 제국이 출현할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이미 기원전 2600년 경에 인구 밀도가 최고치를 찍고 과잉인구로 신음하던 상황이었고, 때문에 군국주의적인 도시국가들이 다수 출현하면서 곳곳에 전쟁과 기아가 끊이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출현한 것이 아카드의 건국군주 사르곤이었다. 당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이집트나일강과는 달리 강물 범람의 주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강물이 범람하는 정도도 매년 달랐다.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매년마다 강물이 어디까지 범람할 것인가에 대하여 정밀한 측정을 요했고, 사르곤이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결국에는 왕위를 빼앗을 정도의 세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르곤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농업에 신경을 많이 쏟아부었고, 그의 후임자들도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곡물 재배와 생산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 수확은 늦은 봄과 건조한 초여름 기간에 이루어졌다. 북서쪽에서 건너온 유목민들은 사람들이 수확을 다 끝마치고 난 이후에 수확이 끝난 밭에 가축들을 풀어 남은 것들을 뜯어먹게 하면서 농부들과 공생관계를 유지했다고도 한다. 유목민들은 이에 대한 대가로 가축의 고기나 가죽, 치즈 등을 인근의 신전이나 농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물론 이는 작황이 풍작이고 모두에게 먹을 것이 풍부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수확이 좋지 않거나 유목민들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수확을 채 끝마치지도 않은 밭에 함부로 가축을 풀어놓거나 아예 농부들이 기른 작물들을 훔쳐 가버리는 경우도 대단히 잦았다고 한다. 특히 제국의 남부 지방에서 염류 집적이 일어나면서 식량의 생산량이 줄어들자 이런 경우가 더욱 잦아졌고, 도둑질이나 농부와 유목민들 사이의 갈등이 지나치게 자주 일어나자 중앙 정부에서는 북부에서 기른 여유분의 밀들을 남부로 보내 구호 작업을 벌이면서 일부 진정시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사막지대가 많은 현대와는 달리 당대에는 굉장히 비옥한 땅이었다. 때문에 기본적인 이나 보리 등 곡식은 전반적으로 타 지방보다도 훨씬 많을 정도로 풍요로운 편이었으나, 그 외의 자원들은 부족했다. 보석, 질좋은 대리석, 백향목, 향료 등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나지 않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때문에 아카드 제국은 어느 나라보다도 무역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고, 주요 수입품은 백향목이나 보석처럼 사치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나톨리아 반도 지방에서는 풍부한 을 가져왔고, 아프가니스탄 지방에서는 청금석 등을 포함한 보석들을 수입했으며 오만 지방에서는 구리와 같은 금속들을 들여왔다. 아카드 제국은 단순히 인근 지역 뿐만 아니라 머나먼 인도인더스 문명과도 무역을 행했다. 사르곤 대왕은 인더스 문명의 도시들 중 하나인 '멜루하'에 대한 언급을 남긴 적도 있다.[12]


4. 문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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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400px-Adda_Seal_Akkadian_Empire_2300_BC.jpg
아카드어 비석
아카드 제국의 석조 인장[13]
아카드 제국의 문화는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굉장히 유사하다. 다만 제4대 군주인 나람신 대왕 때 왕을 현인신으로 숭배하는 문화가 생겨나면서 이전보다 더 왕에 대한 강조가 더 많이 들어간, 다르게 말하면 왕을 찬양하는 성격이 짙은 문화가 형성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아카드 제국 관련 유물들은 대부분 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들로 가득한 석비들이나 석조 인장들이다. 아카드 제국의 모든 왕들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업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혹은 영토나 국경을 확립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습을 새긴 석비들을 나라 곳곳에 세워놓았기에 이들 중 몇몇이 수 천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남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석비들을 보면, 이전의 수메르 문화가 인체의 비율을 현실과 동떨어지게 묘사하거나 일부 정교하지 못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에 비하여 아카드 문화는 굉장히 사실주의적이고, 인물의 모습들도 훨씬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카드 제국의 문화에서 굉장히 독특한 것이 원통형 석조 인장이다. 이 인장은 보통 도장과 비슷한 기능을 했는데, 그냥 한 면을 종이 등에 대고 찍어누르는 현대의 도장과는 달리 올록볼록한 장식이 새겨진 원통의 옆면을 점토판 등에 대고 그대로 굴려서 점토판에 문양을 남기는 방식이었다. 아카드의 제2대 군주인 리무쉬 왕은 이 석조 인장에 맞아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왕 바로 앞까지 무기를 대놓고 휴대하여 들어오는 것이 불법이었기에 이 인장으로 왕을 시해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아카드의 석조 인장들을 보면 사냥, 전투, 왕의 알현 등 주제도 굉장히 다양하며 그 묘사 역시 현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섬세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석조 인장은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유행하게 되어 바빌로니아아시리아, 훨씬 후대인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제작되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그림보다는 왕의 선언을 세겨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한, 보다 실용적인 목적의 인장이 주로 제작되었다.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문으로 불리는 '키루스의 원통'이 대표적이다.

문학 역시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아카드 제국에는 기록에 남은 최초의 시인이 있었다. 수메르 지방의 달의 여신인 난나 여신을 모시는 여사제였던 엔헤두안나가 그 주인공이다. 엔헤두안나는 사르곤 왕의 딸이자 우르의 대신관이었는데, 난나 여신에게 바치는 찬송가나 시구들을 지어 점토판에 적어 남겼다. 엔헤두안나의 시를 보면 처음에는 3인칭 화자로 시구를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시점이 1인칭 화자로 바뀌는 등 상당히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아직 감정이나 개념들을 뜻하는 단어들이 완전히 만들어지지 못해서 원시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던 아카드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들의 사용이 타 동시대 기록들보다 훨씬 유려한 편이다. 그녀가 남긴 대표작은 <난나의 환희>라는 이름의 시이다. 이 시에서 엔헤두안나는 인류를 강하게 보살피는 난나 신의 영광을 찬미하며,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신전을 파괴한 자들을 징벌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14]


5. 언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카드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사르곤 이후 아카드어는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아카드인들은 오랫동안 고급 문화어의 지위를 누린 수메르어를 다짜고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카드인들은 수메르어를 계승하면서도, 포용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이러한 수메르 계승 정책은 문자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아카드어 쐐기문자는 수메르어 문자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

결국 아카드 제국에서는 아카드어와 수메르어가 서로 병립하게 되었다. 일상적인 구어로는 아카드어를 사용했지만,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수메르어에 익숙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 순수하게 아카드적인 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아카드인들의 언어는 곧 고대 근동의 국제 공용어가 되어 중세의 라틴어, 현대의 영어와 같은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심지어 당시 강대국이었던 고대 이집트도 외국과 소통하기 위해 아카드어를 배워야 했다. 아카드어는 고대 근동의 행정문서나 종교문서 등의 표준이 되었다.

아카드가 멸망한 이후에도 아카드어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아카드어는 크게 남부 바빌로니아어 계통과 북부 아시리아어 계통으로 나뉘었고, 기원전 16세기부터는 표준 바빌로니아어, 기원전 10세기부터는 남부 신바빌로니아어와 북부 신아시리아어가 병행했다. 그러므로 사실상 신바빌로니아어나 신아시리아어는 특정한 지역과 시대에서 사용된 아카드어의 변형일 뿐이었다.

6. 여담[편집]


  • 세계 최초로 제국적인 면모를 보인 국가로 인류 최초의 제국으로 여겨진다.



  • 아카드 제국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우편 제도를 실시한 국가였다. 점토판에 수신인의 이름을 쓴 다음, 싸개로 싸서 우편을 전달하는 전문 심부름꾼에게 들려 보냈다.

  • 아카드 제국의 수도였던 아카드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15]

  • 영화 <미이라 2>, <스콜피온 킹>의 스콜피온 킹은 바로 이 아카드 출신의 암살자로 훗날 이집트 파라오의 자리에 오르지만, 타락해 아누비스 신에게 영혼을 팔고 그의 제국은 순식간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묘사된다.


7. 역대 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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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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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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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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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재위 기간(년)
초대
사르곤
기원전 2334년 - 기원전 2279년
제2대
리무쉬
기원전 2278년 - 기원전 2270년
제3대
마니쉬투슈
기원전 2269년 - 기원전 2255년
제4대
나람신
기원전 2254년 - 기원전 2218년
제5대
샤르-칼리-샤리
기원전 2217년 - 기원전 2193년
제6대
두두
기원전 2189년 - 기원전 2169년
제7대
슈투룰
기원전 2168년 - 기원전 2154년

8. 둘러보기[편집]


수메르의 역사
움마

아카드 제국

구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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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중해 연안까지 정복했고 속국화한 도시국가들도 많았으니 최대 판도는 지도에서 표시된 것보다 넓었다.[2] 이는 수도인 아카드의 인구만을 말하는 것이다. 아카드 제국 치하에 있던 수메르의 대도시인 우루크의 인구만 해도 6만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아카드 제국 전국의 정확한 인구는 불명.[3]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메르와 아카드 제국 시절 현 쿠웨이트의 위치에는 바다가 있었다. 이후 오랜 시대를 거쳐 페르시아만 일대가 퇴적되어서 육지가 되어 현재의 해안선이 형성되었다.[4] 정확히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타 왕국들을 정복하여 지배하는 제국의 형태를 갖춘 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일부 학계에선 아카드 제국을 정확히 인간이 세운 첫 제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약간의 논쟁이 있다. 이전에 수메르 문명에서도 인근의 도시들을 공격해서 병합한 경우는 몇번 있어왔기 때문.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처음으로 통일하고 다른 지역까지 진출한 국가는 아카드 제국이며, 대부분의 경우 아카드 제국을 세계 최초의 제국으로 본다.[5] 이때 사르곤에게 패배한 루갈작게시는 산 채로 붙잡혀 목줄에 묶인 채 엔릴의 문으로 끌려 가는 치욕을 당했다고 한다. 루갈작게시의 최후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기원전 2300년경에 제작된 아카드 제국의 승전비에 루갈작게시가 감금되어 사르곤에게 철퇴로 맞는 묘사가 있는 걸로 보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감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6] 참고로 이 사람은 기록에 남은 최초의 시인이다. 난나 여신에게 바치는 여러 찬미시들을 썼으며, 후에 우르크가 사르곤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을 쫒아내자 신에게 자신을 구하고 반란군들을 징벌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의 시도 써서 남겼다.[7] 왕 앞에서는 무기를 휴대하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돌로 된 인장에 맞아 죽었다는 설이 있다.[8] 맨 위쪽에 서있는 인물이 나람신 왕이다.[9] 당시 고대 이집트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가뭄과 흉작을 겪었다는 기록을 보아 단순히 아카드 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10] 참고로 수메르인들은 아카드 제국이 멸망한 후 구티족들을 몰아내고 우르 제3왕조를 세웠지만 엘람에 의해 멸망했고, 엘람인들은 다시 수메르인들에 의해 쫓겨났으나 그 이후로 수메르인들은 다시는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했다.[11] 밀 한 알을 뿌리면 서른 알을 수확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생산량이 많았다.[12] 현대의 발루치스탄 일대의 도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3] 저 원통형 인장을 점토판에 굴려서 문양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썼다.[14] 이 시를 지을 당시 엔헤두안나는 자신이 거주하던 도시 우르에서 쫒겨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르곤 왕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우루크의 왕 루갈란이 사르곤의 딸인 그녀를 도시 밖으로 추방한 것이다. 엔헤두안나는 도시 밖으로 쫒겨나 신에게 자비를 호소하며 이 시를 지어 바쳤다.[15]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요 도시 중 거의 유일하게 아직도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다. 티그리스강 동부의 현재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인근의 땅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위치는 불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