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발언에 대한 식민사관 논란/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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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실관계에 대한 평가
3. 조선 멸망의 원인에 대한 인식
3.1. 옹호
3.2. 비판
4. 일제강점기에 대한 인식
4.1. 옹호
4.2. 비판
5. 현대 한국에 가해지는 위협에 대한 인식
5.1. 옹호
5.2. 비판
6. 식민사관 논란
6.1. 옹호
6.1.1. 일본의 책임 긍정
6.1.2. 객관적 서술
6.1.3. 일제강점기 미화 없음
6.1.4. 귀납적 반증
6.1.5. 조선을 부정적으로 인식한 것 ≠ 식민사관
6.1.6. 정리
6.2. 비판
6.2.1. 식민사관의 이론적 고찰
6.2.2. 일제의 침략 객관화 및 책임 축소
6.2.3. 자국사 혐오와 이익추구를 위한 역사관
6.2.4. 논리적 부실함
6.2.5. 정리


1. 개요[편집]


정진석 발언에 대한 식민사관 논란에 관한 여러 쟁점과 평가들을 다룬 문서이다.


2. 사실관계에 대한 평가[편집]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 조선 왕조는 무능하고 무지했다. 백성의 고혈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다가 망했다.

  • 조선의 멸망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경중 분석과 평가는 다음 소제에서 하술한다.

일본은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쓰러져가는 조선 왕조를 집어삼켰다. 조선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다. 구한말의 사정은 그러했다.

  • 일본제국의 대륙 진출이 대한제국의 멸망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과, 조선·대한제국이 그러한 일본제국의 국권 침탈 시도를 막을 역량을 갖추지 못했던 것은 모두 사실이다.
  • 일본제국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국운을 걸어야 했다[1]는 것, 그리고 조선왕조를 집어삼켰다는 것[2]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

  • 문자 그대로 보면,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조선일본의 전쟁은 존재한다.
  • 그러나 발언의 맥락상, 구한말 시점의 대한제국 정부를 주어로 한다면, "일본 제국과 전쟁을 벌인 적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다. 심지어, 당대 대표적인 근왕파 유림인 최익현조차도 "수치와 더럽힘을 당하면서 망하느니 종묘사직을 위해 함께 죽은 일화를 듣지 못했느냐", "저들의 협박으로 폐하께서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해도 이미 망한 판에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느냐"며 대한제국고종이 일본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음을 강하게 질타한 바 있다.
[ 최익현의 상소문 펼치기 · 접기 ]

심지어 회의석에 나가서 폐하께서 비록 곤란한 처지에 처한다 해도 한차례 큰 위엄을 떨치기를 마치 토로장군 손권이 탁자를 쪼개며 단안을 내리듯 하고, 참정 및 여러 대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완강히 배척하기를 마치 선정 김상헌이 문서를 찢어버리면서 머리는 얻을 수 있어도 조약은 얻지 못한다고 한 것처럼 한다면, 저들이 비록 군병을 배열하고 억지로 협박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어찌 하겠습니까?

...... 설사 저들이 흉악한 짓을 그만두지 않고 감히 대포를 가지고 일을 치르려 한들,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며 수치와 더럽힘을 당하면서 망하는 것이, 어찌 한바탕 기력을 떨쳐 부자군신 모두가 성을 등지고 싸우다 종묘사직을 위해 함께 죽기를 북지왕 유심의 말처럼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일본이) 우리나라의 이익을 약탈하고도 걸핏하면 한국과 일본 양국이 서로의 우의를 더욱 친밀하게 한다고 말한 것이 또한 몇차례입니까? 그 사기와 모욕을 헤아릴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지금 저들이 이른바 황실을 보전한다는 것을 폐하께서는 과연 깊게 믿으십니까?

.... 이제 만일 계속 위축되고 만다면 위축된 자는 망할 뿐입니다. 지금 이미 망한 판에 다시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가령 이로 인해서 저들의 노기가 증대되더라도 폐하께서는 명나라 의종이 사직을 위해 순국한 의리를 듣지 못했습니까?...(후략)

을사조약체결 후 고종에게 올리는 최익현의 상소.[1]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장은 <현재 역사학계에선 조선 멸망 전 크게 세 차례에 걸쳐 발생한 의병 전쟁을 일본과 조선 왕조의 사실상의 전쟁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12일 TBS라디오 <신장식의 신장개업>에 출연해 위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내용적으로 보면 조선 왕조가 직접적으로 일본과 맞서 싸울 능력이 없다 보니 의병 전쟁이라고 하는 걸 매개로 해서 전쟁을 한 거고 그 과정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8] 다만 현대의 국제법으로 당시의 의병투쟁이 전쟁으로 성립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 운요호 사건의 경우 일본군이 조선의 영해와 영토를 침공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고,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져 외교의 재개부터 군사작전이 수반되었기에 조선 조정과 분명한 연관성이 있었다.
    • 또한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이나, 남대문 전투를 비롯한 대한제국군 각지 시위대/진위대/분견대의 일본군과의 전투, 남한대토벌작전의병과의 전투도 꾸준히 있었다.
      • 을사늑약과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에는 그 규모가 더욱 커졌고 의병들은 각국 공사관에 자신들을 국제법상 합법적인 교전단체로 인정해달라고 요청#[3] 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역사 연구자들 대부분은 을사늑약('05) 이후의 의병활동이 전쟁 양상으로 전개·격화되었다는 점에 동의한다.[출처]
      • 하지만 학계에서도 최근 들어서 "의병전쟁"이라는 단어 사용이 대두된 것으로, 원래는 '의병운동', '의병항쟁'이라는 단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아직까지도 학계 내에서 구한말 의병활동을 지칭하는 부분은 통일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의병활동의 시대구분에도 학자별 견해가 다르다.[4][5] 의병활동은 기본적으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한 것이기에 '의병전쟁'은 어법상 형용모순이라는 견해,[6] '의병전쟁'은 사회과학적 용어가 아닌 의병운동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이라는 견해 등 다양하다.[출처] 학계에서도 아직 견해가 갈리는 만큼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8가지 역사 교과서 중 금성, 교학사, 비상교육 세 교과서에는 '의병전쟁'이라는 말이 들어있지 않다. # #
      • 한편 고종은 을사조약 이후 바로 조약이 부당하다는 의사를 발표하고 # 의병들을 은밀히 지원하였기 때문에 대한제국 황실이 일본과 전쟁할 의사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 #
    • 상술한 내용은 모두 '의병전쟁'에 관한 것이고,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제국 정뵈의 충돌은 현대적인 기준에서도 '전투'일 뿐 '전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조선/대한제국의 군대 및 의병과 일본의 무력 충돌[7]은 분명히 있었으나 당대의 국제법 및 서구적인 외교관례에서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 이러한 논쟁은 본질적으로 '전쟁(war)'의 정의 자체가 학술적인 부분보다 정치적인 부분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미 헌법은 전쟁을 (A) 전쟁 선포 (B) 선전포고 유무와 무관하게 둘 혹은 그 이상의 국가 간 무력 충돌 (C) 근본에 무관한 군사 집단 간의 무력 충돌로 정의#하면서도,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법의 적용을 피하기 위해 테러는 '전쟁'으로 정의하지 않고 있다. 현대 국제연합 헌장은 전쟁에 대한 정의를 따로 하고 있지 않으나, "타국의 영토 보전 및 정치적 독립을 해치거나 기타 국제연합의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된" 모든 무력 충돌(armed conflict)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한다.#

일본군은 조선 관군과 함께 동학 농민 혁명군을 진압했다. 수십만의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의 기관단총에 학살당한 동학 농민전쟁 최후의 결전장이 내 고향 공주 우금치다. 고종은 일본에 러시아에 미국에 차례로 손을 내밀었다. 1905년에는 조선을 찾은 테오도르 루즈벨트의 딸을 공주처럼 맞아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녀와 함께 일본 그리고 조선을 방문했던 미 육군 장관 테프트는 일본 총리 가스라 다로와 ‘가스라 테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다.

3. 조선 멸망의 원인에 대한 인식[편집]


정진석은 "조선 왕조는 무능하고 무지했다. 백성의 고혈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다가 망했다."라고 조선 왕조를 비판하였는데, 조선 왕조가 정말로 혹은 얼마나 무능하고 무지했는지, 그리고 정말 백성을 착취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나름대로 민생을 생각했지만 국내외 환경의 한계로 실패했을 뿐인지는 학문적으로도 결론이 나지 않은 논쟁거리이다. 또한 정진석은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라고 발언하였는데, 조선의 멸망 과정에 영향을 미친 각 원인들의 경중을 두고도 역시 갑론을박이 있다.


3.1. 옹호[편집]


조선의 독립이 위태로운 이유는 현재의 국제정세가 “국가 경쟁이 더욱 더 왕성하여 잠시라도 퇴보하면 호랑이에게 물려 씹히며 조금이라도 미약하면 매발톱에 긁혀 죽게” 되는 열국 경쟁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신채호,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


무릇 우리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의 여하에 있을 따름이다. 아한이 종전에 자강지술을 강구하지 않아 인민이 스스로 우매함에 묶여 있고 국력이 쇠퇴하여 마침내 금일의 곤란함에 다다라 결국 외인의 보호를 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자강 지도에 뜻을 다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대한자강회 취지서(대한자강회 월보 제1호, 1906년 7월)


대한제국은 러․일 양국이 각축하는 가운데 벨기에를 모델로 삼아 비무장 영세중립의 길을 모색하는 등 다양한 외교전략을 통하여 생존의 길을 모색했지만, 번번히 열강에 의해 외면당하였다. 이같은 중립화 전략의 실패는 외교력의 부재를 논하기에 앞서, 자주 국방을 지켜낼 최소한의 군사력조차 담보하지 못했던 점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7천여 명의 대한제국의 군대는 치안 유지를 겨우 담당할 정도로 쇠락해 있었고, 용병제를 고집하면서 더욱 무력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군사적 자위력의 부재는 멸망으로 치닫는 원인으로 작용되었다.

대한제국의 멸망에는 열강의 각축과 일제 침략이라는 외적 요인과 함께 한국사회가 지닌 모순을 비롯하여 외교전략의 실패 및 국력 약화로 인한 군사적 자위력의 부재 등 내적 요인 등이 복합적이며 중층적으로 어우러져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억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군사적 자위력이 있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중립 유지는 실현 가능성이 무망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한제국 성립 이전의 한국 군대는 외국 침략에 대비하기는 커녕 국내 치안도 담당하기에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리고 이들 한국 군대는 이무렵 전국에서 일어나던 의병 탄압에 동원되는 것이 주요 임무가 될 정도였다. (...) 징병제를 실시하지 못한 것은 정작 예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징병제 실시로 신분질서의 혼란과 파괴를 두려워한 집권 세력층의 반대와 기피가 더 큰 문제였다.일본과 러시아 양국이 한국의 영토에서 개전할 때, 이를 억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멸망 요인으로서, 외교상의 실책이나 한계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민력(民力)을 정부 차원에서 끌어안지 못한 과오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용병제를 고집한 집권층의 명백한 잘못이었다.

장석홍, "대한제국의 멸망 과정과 동북아시아 질서의 개편", 한국사학회(2007)#


Joseon Korea, on the other hand, was suffering from massive internal conflicts while Japan was shedding its old skin and transforming into a world power. Just as Japan was undergoing technological advancements, Joseon Korea was at its most hectic period in Korean history. In the year 1882, there was a military uprising from traditional military forces due to unfair treatment; included were the suffering poor who opposed government officials and their policies.36 Additionally, from 1892 to 1894, there were constant uprisings from peasants who were suffering from famine due to the tyranny of regional government officials. These constant internal uprisings diverted the nation’s scant efforts to modernize, preventing Joseon Korea from achieving the technological advances Japan had made. Moreover, due to the Confucian ideal of loyalty, Joseon Korea even refused to admit that Japan had outgrown Korea through modernization.

The very cause of Joseon Korea’s failure to modernize was its attachment to a myopic Sino-centric worldview. Joseon Korea maintained loyalty to China according to neo-Confucian ideals. On the flip side, Joseon Korea failed to acknowledge Japan’s modernization, believing that it was still an island full of indigenous people who required cultural aid. As a result, Joseon Korea made itself vulnerable to annexation, erased from world history for 35 years. It was the neo-Confucian concept of loyalty that had blinded Joseon Korea and permitted a skewed, Sino-centric worldview, leading Korea to a gloomy history.

반면에 조선은 일본이 낡은 껍질을 벗고 세계 강국으로 변모하는 동안 대규모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일본이 기술의 발전을 이룩한 것처럼 조선도 한국 역사상 가장 분주한 시기였다. 1882년, 부당한 대우를 받던 구식 군인들과 정부 관리의 정책에 반대하는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군사 봉기가 일어났다. 또한 1892년부터 1894년까지 지방 정부 관리의 폭정으로 인해 기근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봉기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끊임없는 내란은 근대화에 대한 국가의 부족한 노력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조선이 일본이 이룩한 기술 발전을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더욱이 조선은 유교적 충성의 이상으로 인해 일본이 근대화를 통해 한국을 넘어섰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근시안적인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집착이었다. 조선은 성리학 사상에 따라 중국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반면 조선은 일본의 근대화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토착민들이 모여 사는 섬으로 문화 원조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 결과 조선은 스스로를 합병에 취약하게 만들었으며, 35년 동안 세계사에서 지워져야만 했다. 조선의 눈을 멀게 하고 중국 중심의 편향된 세계관을 허용하여 한국을 암울한 역사로 이끈 것은 성리학의 충의 사상이었다.

Hyoung Ook Wee, "Confucian influence on the annexation of Joseon Korea by Japan", The Concord Review (2011)#


먼저 분명히 해 두자면, 조선 패망과 일제강점기책임은 분명히 일본 제국에 있는 것이 맞으며, 정진석의 발언 역시 일본 제국의 역사적 책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일본 제국이 없었다면 나라가 엎어지든 혁명이 일어나든 어쨌든 조선인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을 조선의 운명을 일본 제국이 강제로 개입하여 '식민지배'라는 방향으로 이끌고 갔으니,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일본 제국에 묻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임과 원인은 다르다. 정진석과 이완용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완용은 실제로 일본 제국대한제국을 팔아먹은 매국노, 즉 역사의 당사자인 반면, 정진석은 후대의 입장에서 역사를 평가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구한말의 조선사와 일본사를 다루는 여러 연구들에서 드러나듯, 구한말조선은 근대화라는 세계의 조류에서 뒤쳐진 채 방황하고 있었고, 외세가 침략해오는 데도 "자신을 지키지 못할 만큼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이완용은 스스로 나라를 팔아먹은 주제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기에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일제강점기를 자국의 아픈 역사로 기억하고 반추하는 대한민국에서 구한말의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성찰하여 국가 역량을 키우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합리적인 주장이다.

일본 제국은 자신들의 대전략 목표를 대륙 진출로 확고하게 설정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인정받고자 이와쿠라 사절단 등으로 "일본의 내정보다 서구와의 관계를 더 중요시"[9]하면서까지 서구 열강들의 외교 무대에 데뷔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일본 제국흑선개항으로 똑같이 불평등 조약에서 시작했지만 그레이트 게임의 구도를 재빠르게 파악하여 같은 해양국가인 영국과 동맹을 맺은 뒤 한 체급 위인 청 제국러시아 제국을 제압하였고, 국가를 빼앗기기는커녕 오히려 포츠머스 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대한제국청에 붙겠다는 건지 간도로 진출하겠다는 건지 중립을 지키겠다는 건지 대전략 목표를 명확히 세우지도 못했고, 영일동맹이 체결되는 와중에 영일관계에 불신을 심어 이간질시키지도 반대편의 러시아 제국 편에 확실히 붙어 지원을 얻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국제 외교가에서 버림받았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국제사회가 얼마나 냉엄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조선미국에게 어떠한 것도 제공할 능력이 없었고, 일본 제국미국에게 반대급부를 제공할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의 차이미국조선을 버리고 일본 제국을 택하게 만들었고, 옳고 그름을 따지며 탓해 봐야 결국 미국인이 '황금의 시대'를 누리는 동안 그 '능력'을 키우지 못했던 조선인은 잔혹한 식민지배를 당해야 했다.

조선은 자국을 지킬 충분한 군사력도 보유하지 못했으며, 그나마 있는 군인들조차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다. 19세기 말의 정치적 불안정과 내란 자체는 대한제국일본 제국에서 비슷하게 일어났지만, 무진전쟁 등 일본 막부 말기의 내전들은 대부분 국가의 방향성과 관련된 것이었고, 대정봉환은 적어도 외세를 끌어들이지는 않고 결론이 났다. 반면 조선에서도 지사들이 국가의 방향성을 두고 다툰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도 있었지만, 그 외 임오군란을 비롯한 수많은 민란으로 개혁 역량을 낭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임진왜란이나 후일 일본 제국이 국권을 강탈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의병활동이 벌어졌을 정도로 성리학적 '충(忠)'의 관념이 강했던 나라에서, 국가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조선 민중들이 민란을 일으키게 할 만큼 민생은 혹독했고, 그 와중에 정부는 타협과 양보는 커녕 청나라일본 제국이니 온갖 외세를 끌어들여 자국민을 진압할 만큼 조선의 통치자들은 무능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은 A급 전쟁범죄자[10]이며, 마찬가지로 조선을 합병한 일본 제국은 전범국이다. 그러나 국제 사회가 아무리 전쟁을 멈추라고 호소해도 푸틴을 물리적으로 제지하지 못하며, 푸틴이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한다고 해서 전쟁은 멈출 수 없다. 결국 전범 푸틴의 러시아에 맞서 싸울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이며,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전범국 일본 제국에 맞서 싸울 힘을 길렀어야 하는 것은 조선이다. 우크라이나볼로디미르 젤렌스키압도적으로 여겨졌던 적의 전력에도 도망가거나 항복하지 않고 자국의 역량을 결집하여 조국을 지켜내고 있기에 구국의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나치 독일프랑스 침공에서 고리타분한 군사 전략과 내분으로 6주만에 속절없이 무너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사례에서, 프랑스의 그러한 어리석은 전략을 패망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비판한다는 것이 나치즘을 긍정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다.

한국인일본의 국민이 아니며, 일본의 총리를 두고 투표할 수도 일본의 정치적 방향을 결정할 수도 없다. 즉, 일본 제국의 침략이 조선의 멸망에 가장 큰 기여를 했을지라도, 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일본의 외교적 방향성에 선택권을 가진 일본인들이 스스로 통제하도록 강제해야 하는 변인이다. 그리고 상대가 스스로의 '제국주의 야욕', '국익 추구', 혹은 여타 무엇이든 우리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그 행동을 했을 때 이익보다 손실이 더 크도록 역량을 기르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정치현실주의의 귀결이며, 정진석의 발언이 담고 있는 함의이다.

정치현실주의를 근거로 당위성을 논하는 것이 실제로 정치현실주의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부분이다. 정치현실주의는 힘의 논리를 '인정'하지만, 외교의 최우선 목표가 주관적이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인 가치들 대신 국익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일 뿐 그 도덕적 당위성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심과 보이지 않는 손을 긍정하듯, 현실주의는 국가의 이기심과 보이지 않는 균형을 긍정한다. 강대국이 아무리 약자에게 횡포를 부려도 힘이 없는 피해자는 가해국을 응징하기는커녕 막아세우지도 못하며, 정작 그 피해국들도 상황이 호전되면 자국의 이익에 따라 더 약한 국가들에게 똑같이 횡포를 부리는 것이 국제사회이다. 거기서 약소국이 살아남으려면 아무리 '불합리한 현실이라도 일단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강대국들의 외교적 이익을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법이 없는 사회니까 야생같이 약육강식에 순응하고 살라는 게 아니라, 법이 없는 사회에서 살아 남으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의 사대주의가 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었음을 지적하며 계몽 운동을 벌이기도 했고, 개중에는 물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사람들도 있지만 본문 서두에 작성한 단재 신채호를 비롯하여 안창호, 여운형 등 마지막까지 일본 제국에 저항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처럼 조선 패망의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일본을 손가락질할 시간에 자강을 선택하며 후학을 양성했던 독립운동가들 덕분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최소한 국가지도부에나마 친일파를 앉히지 않고도 행정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판적인 관점에서는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은 죄다 일본 제국이 조선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이니 여기에 조금이라도 동조하면 모두 일본 제국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북한이 반체제 운동이라는 이유로 5.18 민주화운동대한민국민주화 운동에 우호적인 발언을 했다고 해서 민주화 운동이 나쁜 것이 되지는 않듯, 적의 지적에도 일리가 있으면 그것을 받아들여 스스로 발전하여 적을 꺾으면 그만인 것이다.


3.2. 비판[편집]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구한국이 힘이 없었기 때문이며... 역사적으로 당연한 운명과 세계적 대세에 순응키위한 조선민족의 유일한 활로이기에 단행된 것이다.

매일신보 1919년 5월 30일 이완용의 글 # - 즉 3.1 운동이 한참동안 일어나던 중에 저 글을 낸 것이다.


이처럼 식민지에서 제국에 의한 역사학의 성립 확산은 아시아, 아프리카 사회의 식민지, 반식민지화를 그 사회의 '역사적 숙명'으로 고착화하는 것이자 식민지에 대한 제국의 차별을 식민지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것으로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제국에 의해 왜곡된 식민지에 대한 역사상을 보통 '식민사관'이라고 통칭하며,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 제국 일본 역시 조선을 비롯한 침략지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각종 기관을 만들어 전문적인 학자와 연구들을 양산하였다. 일제의 당시 연구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다양한 이유를 들어 조선의 역사를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 것으로 그려내어 조선이 식민지화된 원인을 자신들의 침략이 아닌 조선의 역사적 과정에서 도출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식민사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연구와 역사학 #


근대 일본의 조선사에 대한 관심과 그에 따른 역사왜곡은 청일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기쿠치, 쓰네야 등은 조선에 대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들이 조선사를 저술한 의도는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와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조선의 타율성과 식민성 등을 역사적으로 밝히는 데 있었다. (중략) 기쿠치는 조선의 멸망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양반 때문이라고 봤다. 그는 왕실의 존재도 "정치상 무능력자"로 내부 통일을 주도할 수 없었고, 국민이 악정에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왕에 대한 충의심이 결핍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의 멸망요인을 부패한 왕조와 양반 탓으로 돌려 일본의 침략 사실을 왜곡시킨다.

근대 일본의 한국사관과 역사왜곡, 최혜주, 201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298~301 페이지


일제는 통감부 때부터 한국의 제도와 관습을 조사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였고, 1915년부터 '반도사'편찬에 착수하였다. 반도사 편찬의 목적은 ① 조선과 일본이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② 한국사의 정치적 혼란과 쇠퇴를 부각시키고 병합 이후 한국인이 일본에게 받은 혜택을 기술하는 것이었다. (중략)... 대원군의 집권 이후 근대사를 다룬 부분에서는 병합을 정당화하는 일제의 전형적인 논리를 담고 있다. 즉, 병합의 원인은 한국에 있다는 것이다. 보충교재의 평가에 따르면 한국의 외교적 실패는 일본에 불이익을 안겨주고 동양의 평화를 저해하였다. 또한 "통감부가 정치를 개선하는데 힘썼지만 오랜 기간의 정치적 폐해로 백성은 피폐해지고, 새로운 정치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으며, 도적들이 사방에서 배회하여 도저히 국력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오랜 기간의 정치적 폐해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한국 정치의 당파성, 사대성이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보충교재에는 근대 정치사를 대원군과 민비, 독립당과 사대당의 정쟁 구도에 입각하여 서술하였으며, 청과 러시아에 대한 의존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방을 배회한 도적'이란 '의병'을 뜻한다. '의병'은 병합을 저해하는 요인이었지만, 식민통치자들의 관점에서는 병합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중략) 또한 일본의 침략은 객관화되거나 왜곡되었다. 왜구는 침략자가 아닌 시대적 산물로 규정되었으며,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조선의 책임과 명의 침략상을 강조하였다.

조선총독부 편찬『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의 편찬 배경과 역사 인식, 박찬교, 2016, 역사교육연구 24, 한국역사교육학회 # 125, 139, 143 페이지


정진석 위원장의 주장을 근대 일본 역사가들과 통감부 및 조선총독부가 내놓은 식민사학과 대조해 보면,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걸까?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 (...) 조선 왕조는 무능하고 무지했다. 백성의 고혈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다가 망했다."

라는 문장은 상술된 일본인 기쿠치의 주장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고종은 일본에 러시아에 미국에 차례로 손을 내밀었다~가스라 테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 일본은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쓰러져가는 조선 왕조를 집어삼켰다. 조선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다."

는 문장은 조선왕조의 외국에 대한 의존성을 부각하고 임진왜란 침략에 대해 조선의 책임을 강조해 일본의 책임을 도외시한 조선총독부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정진석의 논란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식민지배 피해국가의 여당 대표가 식민지배의 책임을 두고 가해국인 일본보다 피해 당사국인 조선을 겨냥했다는 점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6.25 전쟁, 나치의 전쟁 범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사안들에서 피해자의 책임론을 과하게 내세우는 것은 가해자의 책임은 은폐될 수 밖에 없고, 이번 발언 역시 유사한 맥락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당장 이재명 민주당 당대표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가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재명 대표를 비판했던 국민의힘 내부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발언이 나온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은 우크라이나러시아라는 외국의 이야기가 아닌 조국 대한민국의, 그것도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이야기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조선이 망할 만해서 망했고 일본의 식민지가 될만해서 됐다'는 정진석의 주장은 한일합방의 불법성과 강제성, 범죄성을 부인하고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식적 근간을 뒤흔들만한 논리다.

조선 말기 왕실의 무능과 관료들의 부패만 놓고 본다면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다'는 말은 맞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부패가 반드시 조선의 멸망으로 이어졌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장 북한같은 실패국가들이 버젓이 UN 회원국으로 살아남아 있는 현실만 봐도, 체제 내부의 문제점과 국체의 붕괴는 별도의 문제이다. 조선이 망한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문제는 조선, 대한제국의 국민들이 해결해야할 문제인 것이지 타국이 마음대로 군대를 진주시키고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황후를 살해하고,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국체를 좌지우지 할 만한 정당한 근거가 결코 될 수 없다. [11] 조선의 흥망이 어떻게 되든 타국인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 지배를 해도 되는 이유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정진석의 발언을 보면,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

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내부의 문제만을 강조하며 마치 일본의 침략은 조선의 멸망 원인이 아니라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물론 일본 외에도 한반도를 노리는 열강은 많았으나, 독립을 보존했던 태국처럼 조선이 쇠락한다 해서 '어느 한 나라의 식민지가 될 운명'이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당대의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영국프랑스는 지리적인 접근성의 문제로 동남아시아처럼 핵심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 아닌 이상 완전한 식민지배보다는 영향력 행사를 선호하던 상황이었으며, 실제로 중국에서도 홍콩이나 광저우만 등 조계지로 만족했다. 미국먼로주의로 역시 미서전쟁의 전리품으로 얻은 필리핀 정도를 제외하면 제국주의는 추구할지언정 영토 합병을 동반하는 과격한 팽창에는 관심이 없었고, 청나라러시아 제국은 현실 역사에서도 그러하였듯 신생 열강인 일본 제국에도 무너질 정도로 자신들의 처지부터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실제 사례를 보더라도 태국을 비롯하여 이란,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등 여러 내부 문제에도 불구하고 보호국 처지로 떨어질지언정 어떻게든 국체는 보존한 나라들도 있었고, 심지어 서구 열강들의 입장에서 조선은 상술한 국가들보다도 더 군사적 진출의 가치가 없는 위치였다.[12] 이같은 사례를 볼 때, 조선이 비록 느리고 서툴렀을지라도 점진적으로나마 근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상황에서 당장의 개혁에 실패했다 해서 반드시 식민지배를 받을 운명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오히려 일본제국의 간섭이 없었거나 침략이 아닌 긍정적인 방향[13]으로 이뤄졌다면 일제강점기보다 훨씬 빠르게 훨씬 공리주의적인 근대화[14]를 이루었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었다.

또한 분명 구한말 조선 조정과 대한제국 정부는 근대화를 위한 갑오개혁, 을미개혁, 광무개혁 대한제국군 확충 등의 노력을 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언급 없이 고혈만 짜다가 망했다고 발언했다.

정진석의 이런 논리를 인정하면 단순히 한일관계 뿐만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도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가 있다. 예컨대, 6.25 전쟁의 책임을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권과 국군, 그리고 애치슨 라인을 그은 미국에 전가할 수 있게 되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는 폐기되고 많은 비판을 받는 남침유도설이다. 현재 러우전쟁을 일으킨 러시아가 침공당한 우크라이나와 NATO, 미국 등에게 침략전쟁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지속적으로 무력통일을 천명하는 중국의 대만침공 또한 이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영토주권이 해당 지역 원주민들의 구성에 있음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북한 체제의 문제점을 들먹이며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영향력을 늘리는 시도를 해도 반대할 명분이 없어진다. 실제로 정진석 위원장은 일전에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우크라이나를 방문하며 논란이 되었을 때도 러시아가 주장하는 힘의 논리에 동조하여 설전을 벌인 전적이 있어, 역사 인식 전반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4. 일제강점기에 대한 인식[편집]



4.1. 옹호[편집]


정진석의 발언이 식민사관이 아니라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증거이다. 식민사관이 식민사관이 되려면 결과적으로 식민지배층인 일본 제국의 통치를 미화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조선에 대한 비판이나 한민족에 대한 비판과 식민사관이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

(일본군은) 곧바로 고종이 거처하는 경복궁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조선 관군과 함께 동학 농민 혁명군을 진압했다.

수십만의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의 기관단총에 학살당한 동학 농민 전쟁


그러나 실제 정진석의 본문에서 나온 표현은 일본 제국에 대한 미화와는 거리가 있다.

또한 그 소위 '일제가 만든 왜곡된 인식'이라는 것이 실상은 일제강점기 이전인 구한말 당대를 살았던 지사들조차 가졌던 인식이며, 광복 이후 다수의 역사학자 및 국제정치학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사안 중 하나라는 점에서 명백히 논파된다.

논란이 된 후 정진석이 공유한 만해 선생의 글을 보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망국(亡國)의 한이 크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정복국만을 원망하는 자는 언제든지 그 한을 풀기가 어려운 것이다. 망국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이상 제이, 제삼의 정복국이 다시 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불행도, 자기 행복도 타에 의하여 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련하기도 하지만 가증스럽기가 더할 수 없다.

정진석은 원문에 이 글을 부연함으로써 자신의 발언의 요지, 즉 '일본 탓만 하지 말고, 멸망 원인을 정확히 인식하고 더욱 발전하여 이를 제거하자.' 를 더욱 명확히 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식민사관 - 옹호'에서 후술한다.

4.2. 비판[편집]


식민사관의 가장 큰 구성요건은 왜곡된 조선인식을 통한 일제 통치의 정당화이다. '조선은 저절로 망해가고 있었으며, 일본에게 지배받는 것은 필연'이라는 것이 바로 일제가 주입하려 했던 식민사관이다. 그리고 정진석의 발언을 살펴보면, 구한말이 그러했다면서 위 논리와 상당 부분 부합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인식》 이 항목에서 '일제 강점기의 도래를 조선에 미루는 것이 정당한가'(정당화 논란)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는 좋은 시절이었는가'(미화 논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면, 정진석의 글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1910)에서 조선왕조의 무능/무지와 구한말 사정을 논하며 식민사관을 드러냈지, 일제강점기(1910~)자체를 다루지 않았으므로 논쟁에 의미가 없는 부분이다. 원문을 눈 씻고 봐도 일제강점기(1910~)에 대한 인식을 정진석 위원장 본인이 무엇이라고 언급한 부분은 없다.

정진석의 원문은 분명 일본은 조선멸망의 주요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의도를 보든 맥락을 보든 '조선에 문제가 있어서 망한 것이지 일본 탓이 아니다'라는 의도로 작성된 글임은 명백한 것이며, '진공', '점령', '진압', '학살' 등의 표현을 아무리 많이 사용해도 이러한 기본인식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잘 쳐줘도 학살이라는 단어가 가장 부정적이고 나머지는 의미를 최대한 배제한 무미건조한 단어다. 일본의 극우입김이 들어간 야마카와 출판, 다이이치 학습사의 교과서들도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을 다루면서 제목을 ‘일본의 아시아 '진출’로 표기했다. # 이 부분은 뒤에서도 설명한다.

정진석은 논란이 된 후 해명을 하였지만, 해명이란 기본적으로 추가적인 비판을 피하기 위해 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그런 뜻이 아니었다'라는 식으로 주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명에서 밝힌 정진석의 발언의도가 꼭 발언 당시의 의도와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정진석이 논란 후 해명에서 보다 온건한 주장을 내놓았다고 해서 본 논란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진석 위원장은 만해 한용운의 글 일부를 가져와 자신의 의도와 동일하다는 투로 방패막이하였을 뿐, 자신의 잘못된 조선 멸망에 대한 인식을 철회한 것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식민사관 - 비판'에서 후술한다.

5. 현대 한국에 가해지는 위협에 대한 인식[편집]


정진석은 “대한민국이 세계군사력에서 6위를 차지하는 군사강국”이라면서 "일본이 오늘부터 무비자 관광객 입국을 전면 허용한다. 일본 간사이 공항을 통해 오사카로 들어가는 우리 젊은이들이 “일본과 해상 훈련을 하면 욱일기를 단 일본군이 우리 땅에 진주한다. 구한말 같은 상황이 일어난다”는 주장에 과연 공감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즉 "대한민국의 군사력이 강하고[15] 외교적 정세가 달라졌으므로[16] 일본군이 우리 땅에 진주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찬반 의견을 다룬다.


5.1. 옹호[편집]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대일 적대감은 순전히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생존이 외교 정책의 주요 관심사라고 가정할 때, 이들 국가가 직면한 공통의 위협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국과 예측할 수 없는 북한의 부상이다. 현실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두 국가가 중요한 안보 이익을 공유한다면,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둘러싼 갈등이나 전시 만행에 대한 먼 기억과 같이 중요하지 않고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 대한 정치적 갈등은 무시할 만한 곁가지이다.

제도적 장치와 국제경제적 상호의존성을 국가간 지속적인 협력의 핵심요소로 보는 자유주의적 관점도 한일 분쟁을 설명하는 데 있어 현실주의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들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인 두 국가 중 하나이며, 유엔 총회와 같은 국제 기구에서 선호하는 정책 및 투표 행동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일치를 보인다(Chun and Kim 2014). 그들은 비교 우위의 고전적 개념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동아시아의 거대한 공급/생산 사슬에 속한다(Obashi and Kimura 2018).

From a realist point of view, Korean antagonism against Japan is understood as purely emotional and irrational. When survival is assumed to be the primary concern of their foreign policies, the common threat facing these countries is undoubtedly the rise of China and of the unpredictable North Korea. According to the realist perspective, if two states share vital security interests, political discord over seemingly non-vital and trivial issues, such as the conflicts over the contents of history textbooks or remote memories of the wartime atrocities, are ignorable anomalies.

The liberalist perspective that views institutional arrangements and international economic interdependence as the key factors for persistent cooperation among nations is not much better than realism at explaining the disputes between Korea and Japan. They are among the two most democratic countries in Asia and display high levels of congruence in terms of their policy preferences and voting behaviour in international organisations, such as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Chun and Kim 2014). They belong to the gigantic supply/production chain of East Asia, in which the classical notion of comparative advantage has been working perfectly (Obashi and Kimura 2018).

Jungmin Seo, "Diagnosing Korea–Japan relations through thick description", Third World Quarterly (2021)# [17]


대한민국일본은 각기 한미동맹미일동맹으로 묶인 미국의 동맹국이며, 북한을 공동의 적으로 두고 중국을 견제하는 입장이다. 실제로 한일 두 나라는 일제강점기 이후 국지적 전투조차 벌인 적이 없으나, 북한과 중국은 여전히 종식되지 않은 6.25 전쟁의 적대국이며, 특히 북한각종 도발로 대한민국에 끊임없는 인명·재산피해를 내고 있으며 이는 2022년 10월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인용한 논문 외에도 여러 안보 관련 서적과 논문들에서 지적하듯, 현대 한국과 일본이 직면한 공통적인 안보 위협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국과 예측할 수 없는 북한의 부상"이다.

동맹국 및 우방국과 적성국은 단일한 기준으로 판단하여 나누기 어려우며, 각국의 외교적 위치, 군사적 역량, 동맹관계, 침공의 손익, 지정학적 조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일본은 미국의 외교로 배향(align)되어 있다고 여겨지며, 대부분의 연구자들에게 일본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권 추구자의 지위를 상실했다고 평가받는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 모두 서로를 적대한다고 서로를 쉽게 제압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등한 국력을 가졌으며, 서로보다 명백히 더 강대국인 중국의 위협에 당면해 있다. 즉,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두 나라 모두에게 서로를 공격할 동인(動因)이 없으므로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상기하였듯이 한일 양국은 둘 모두 민주주의지수에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OECD에서 선진국으로 분류될 뿐 아니라, 서로의 경제적 연관성은 물론이고 민간 단위에서의 교류가 다른 주변국 - 특히 북한 - 에 비해 활발하기에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이 낮다.

마지막으로, 세계 군사력 순위의 신뢰도가 높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해당 순위가 핵무기를 배제한 집계#[18]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왜 한국(6위)에게 일본(5위)는 위협이 아니라면서 북한(30위)은 위협이라고 하느냐"는 반론은 핀트를 잘못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본은 핵보유국이 아닌 반면 북한은 실질적인[19] 핵보유국이며, 따라서 해당 순위를 일본과의 비교로 사용하는 것은 세계 군사력 순위의 신뢰범위 안에서는 합당하지만 북한과의 비교로 사용하는 것은 전제부터 틀렸다는 의미이다. 핵무기는 오늘날까지 핵확산방지조약으로 국제적인 규제가 존재할 만큼 그 파괴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대한민국의 작은 국토는 북한의 핵 위협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뿐만 아니라, 남북한은 육로 경계를 맞대고 있으며, 북한군이 비록 열세이지만 서울특별시휴전선에 가깝기에 제한적이나마 피해를 입을 확률이 존재한다.

반면, "대한민국에 다시 일본군이 들어오고 욱일기가 휘날리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육자대한반도에 들어와서 깃발을 꽂아야 하는데, 육자대대한민국 육군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이다. 반면, 일본자위대를 높은 순위로 올려준 해상자위대는 대한민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없는 전력이고, 어떻게 해상 무역로 차단을 한다고 해 본들 "미국이 묵인하고 일본대한민국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북한중국을 통해 수송하면 그만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느껴지겠지만, 애초에 한일의 충돌은 미국의 묵인을 받아낼 수 없고, 두 나라 모두 미국의 의사를 제압하고 서로를 공격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상상할 필요조차 없는 영역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군사력 순위를 근거로 "한국이 이만큼 강하니까 이러저러한 정도 국가를 상대로는 스스로 지킬 역량이 있다"는 주장은, 그보다 더 강한 국가를 상대로는 "(...) 스스로 지킬 역량이 없으니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로 이어져야지, "(...) 스스로 지킬 역량이 없으니 침공당해도 된다"는 식의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나 정진석의 발언이 이재명 대표의 발언에 대해 '한국이 일본에 의해 점령될 일은 없다.'는 취지로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5.2. 비판[편집]


논란이 된 글은 현대 한국의 국력과 군사력이 세계 6위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통계결과[20]를 언급하면서 한국은 군사강국이기 때문에 구한말과 같이 주권을 잃을 일은 없을 거라는 주장을 했는데, 문맥상 주권국은 정당한 이유 없이 주권과 영토를 침탈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 국제상식인데 마치 한국의 국력이 약했다면 주변 강국이 주권을 침탈해도 정당화되었을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진행중이고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위협하는 현재를 생각하면 부적절한 발언이다. 거기다가 한국의 국력과 군사력이 세계 6위라고 쳐도 중국, 러시아, 일본은 한국보다도 더 강하다. 그런 의미로 보면 이 논리는 '더 강한 주변국들이 한국을 침공한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또한 군사력 순위를 근거로 주권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논리대로라면 같은 지수에서 28위에 불과한 북한을 상대로는 어째서 적화통일을 우려하며 남북군사합의나 종전선언을 반대하고 전면적 상호교류를 거부하냐는 질문이 나올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문제점이 많은 지수를 인용하여 더 이상 주권을 침탈받을 위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6. 식민사관 논란[편집]



6.1. 옹호[편집]


당연하지만, 일본 제국이 조선인을 비하하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식민사관을 설계하였다 한들, 그런 의도를 비판하고 왜곡된 진실을 걷어내어 사실만 검증해 수용하면 된다.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 내에서 스스로도 반성하고 있던 부분을 두고 단지 일본 제국의 조선사 인식과 일정 부분이 겹친다는 이유로 식민사관으로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6.1.1. 일본의 책임 긍정[편집]


정진석은 조선멸망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글에서 배제한 적이 없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라고 언급하기는 했으나, 이는 전쟁이 없었다는 것이지 일본의 책임 자체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게다가 정진석의 발언에서 전쟁이 없었다는 내용은 딱 한 번 언급되었으며, 의병이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의병 전쟁을 일본과 조선왕조의 전쟁으로 보기도 어렵다. 또, 의병의 활동이 전쟁이 아니라 국지적 전투라는 견해 역시 존재하며 학계 내에서도 '의병전쟁'이 아닌 '의병운동', '의병항쟁'으로 보는 견해가 존재하는, 아직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다.(홍순권, 동아대, 2014)

또한 정진석이 '점령', '학살', '진압' 등의 단어를 활용하여 일제의 국권 피탈 과정을 설명했다는 점을 참고해볼 때, 정진석이 '국권 피탈에 일제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상식적으로, 일본군이 동학 농민을 '학살'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국권 피탈에 일제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난징 대학살을 예로 들어봐도 그렇다.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민간인을 '진압 및 학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만주 사변중일전쟁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21] 그렇지 않을 것이다.

6.1.2. 객관적 서술[편집]


역사를 국가주의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본 극우의 역사왜곡이 많은 비판을 받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순조조부터의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100배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구한말 조선 백성들의 삶의 질이 크게 낮았다는 점, 조선의 개혁 노력이[22] 전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점, 집권 세력의 비리 등으로 국가 멸망의 내부적 요인을 조선이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확증편향의 오류에 해당한다.

또한 당시 국제정세상 조선이 멸망 직전이었다는 실제적인 '분석'은 조선 멸망이 정당했다는 '당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국제정치 논리에 대한 분석과 일제강점기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평가를 구분하지 못하고(또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규범에서 사실판단을 도출하게 되면, 도덕주의적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1.3. 일제강점기 미화 없음[편집]


정진석은 조선말기를 비판했으나, 일제강점기를 미화한 부분은 없다. 조선에 대한 비판과 당시 제국주의적 국제질서에 대한 언급을 했던 것을 일제 미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6.1.4. 귀납적 반증[편집]


해당 발언의 구성요소인 조선에 대한 태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타 사관과의 관점을 비교하였다.[23][24][25][26]

정진석의 발언에 대한 귀납적 논증
역사관
조선(한민족)에 대한 평가
조선에 대한 태도
한일병합에 대한 평가
일선동조론
(식민사관)
조선인과 일본인은 동족
다소 긍정적
긍정적
(동족이므로 침략이 아닌 통일)
만선사관
(식민사관)
한반도는 만주에 종속된 지역
부정적
긍정적
(한반도와 만주는 공동 운명체이고, 만주를 병합한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필연적)
반도적 성격론
(식민사관)
조선인은 타율적 민족
(반도에 위치한 조선은 결국 대륙-해양간 휘둘릴 운명)
긍정적
(한일병합을 통해 조선은 타율적 역사를 지양할 수 있어)
당파성론
(식민사관)
붕당정치만 일삼는 조선인은 발전이 없는 민족
긍정적
(합병은 싸우느라 뒤쳐진 조선을 계도한 것)
정체성론
(식민사관)
조선은 발전이 멈춘 봉건국가
긍정적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근대의 일본이 고대의 조선을 도와야 함)
식민지 수혜론
(식민사관)
조선은 근대화되지 않은 낙후된 국가
긍정적
(근대문물 도입 등 일본의 지배가 조선에 도움이 됨)
사대주의론
(신채호)
사대주의로 조선은 주체성을 상실한 국가
부정적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사대주의론 · 정체성론
(조선력사)
조선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대립하던 봉건주의 국가
매우 부정적
정진석
조선은 내부적 모순으로 인해 멸망한 국가[27]
부정적
(학살,점령 등의 표현 사용)
위의 표에서 보듯이, 망국의 책임이 조선에 있다는 주장을 제외하면, 정진석의 발언이 일제가 왜곡한 식민통치 역사관과 일치하는 부분을 찾을 수 없다.[28] 따라서 이 발언이 식민사관에 기반한다고 볼 수 없다.

6.1.5. 조선을 부정적으로 인식한 것 ≠ 식민사관[편집]


플라톤은 인간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라고 정의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닭을 들고 플라톤을 찾아 갔다.

디오게네스는 플라톤 앞에서 닭의 털을 뽑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보시오. 이게 깃털이 없고 두 발로 걷는 짐승이니, 바로 당신이 말하는 인간이오’

모든 개는 포유류다. 사람도 포유류다. 따라서 사람은 개다.

-

식민사관은 조선을 비판한다. 정진석도 조선을 비판한다. 따라서 정진석은 식민사관자다.

식민사관은 조선을 비판한다. 신채호도 조선을 비판한다. 따라서 신채호식민사관자다.

-

모든 X는 Y이다. Z도 Y이다. 따라서 Z는 X이다(또는 X는 Z다)'의 형식의 오류논리를 전개했을 때 생기는 결론.

A와 B의 주장이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A와 B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단순히 "조선을 부정적으로 인식한 것 = 식민사관"이라는 논리로라면, 조선을 사대주의에 빠진 국가로 부정적으로 묘사한 신채호조선력사조차 식민사관 역사가·역사서가 되어버리는 모순이 발생한다. 식민사관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태도이며, 타 식민사학과는 달리 정진석의 글에서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인식은 찾을 수 없다.

즉, '조선의 무능을 부각하는 것'이 '식민사관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전제 자체가 틀렸다. 이런 논리라면, 구한말 조선 내부의 모순을 강조·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이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전부 '식민사관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조선의 무능을 부각하는 것'은 '식민사관과 다를 바 없게 들릴 수도' 있으나, 그 자체로 식민사관에 기반하거나 식민사관이라고 지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2010년 한겨레에 실은 시론에서 "일제와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한 채 고스란히 외적에 나라를 빼앗겼다. 암우한 군주와 부패 교만한 지도층을 만나면 나라가 이런 꼴이 된다는 교훈이다."라며 조선 멸망의 내부적 요인을 지적했는데, 이 논리에 의하면 김삼웅도 식민사학자가 되는 셈이다.

애초 조선 멸망의 원인에 대한 경중을 따지는 것은 본인의 주관에 의한 것으로, 조선 멸망의 원인에 일제의 책임과 조선의 책임이 모두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면, 조선 멸망의 가장 큰 원인으로 내부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또한 발언의 맥락상, 조선 멸망의 원인으로 일본의 침입보다는 조선의 약한 국력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어야만, '조선은 국력이 약해서 일본에 의해 멸망했지만, 대한민국은 조선과 달리 국력이 크게 성장해서 일본이 쉽게 점령할 수 없다.'는 논리 전개가 된다. 이게 정진석이 쓴 글의 핵심이다.

6.1.6. 정리[편집]


정진석의 글은 기승전결이 부적절하게 구성되어 있고, '조선은 내부적 모순으로만 멸망한 국가다.'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나, 그것은 글이 잘못 쓰여졌다는 근거이지, 정진석의 글이 식민사관에 기반한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

글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학살', '점령', '진압' 등 일제의 조선 침략 과정에서의 부정적 인식이 드러나기도 하고, 국권 피탈에서의 일제의 책임을 배제했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묘사된 구한말의 현실도 대부분의 사실과 합치하여 일제가 왜곡한 식민지상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없다.

또, 정진석의 발언이 식민사관에 기반함을 입증하려면, 그 의도가 분명하다고 먼저 전제할 것이 아니라, 발화의 맥락·단어 선택·논리적 인식 등 전체 구조를 분석하여 그런 의도가 있음을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정진석의 발언이 '일제 책임 강조+조선 책임 강조'면 신채호 등의 견해와 유사한 것이고, '일제 책임 부정+조선 책임 강조'면 식민사관으로도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정진석의 원문에는 조선의 책임은 드러나 있어도, 일제의 책임에 대한 정진석의 태도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정진석이 일제의 조선 침탈 과정을 빠짐없이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일제의 침략상을 축소시킨다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다시 반복하지만, 조선 멸망의 원인으로 '조선'을 강조하고 일본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아서 '마치 정진석이 조선 침탈에 대한 일제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들리'는 것이지, 실제로 그러하다는 확고한 근거는 없다.

6.2. 비판[편집]



6.2.1. 식민사관의 이론적 고찰[편집]


식민사관의 여부는 일제가 만든 조선에 대한 왜곡된 역사관과 인식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로 따져야 한다. 또, 대한민국의 현재 국민감정과 국민정서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나 민의를 대변하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라면 이는 의무이자 필수이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고난사에 대한 역사인식감수성을 배제한 역사론은 아무리 객관적이고 맞는 말 같아도 친일 반북 반공 냉전세력의 주장이나 다를 바 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악용되어 왔기 때문이다.[29]

보통 식민사관이라고 하면 일선동조론, 반도적 성격론, 당파성론, 정체성론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식민사관의 하위 요소들이지, 이 4가지 이론만이 식민사관이라고 할 수 없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분명히 ''제국에 의해 왜곡된 식민지에 대한 역사상을 보통 '식민사관'이라고 통칭"한다고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식민지에서 제국에 의한 역사학의 성립 확산은 아시아, 아프리카 사회의 식민지, 반식민지화를 그 사회의 '역사적 숙명'으로 고착화하는 것이자 식민지에 대한 제국의 차별을 식민지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것으로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제국에 의해 왜곡된 식민지에 대한 역사상을 보통 '식민사관'이라고 통칭하며,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 제국 일본 역시 조선을 비롯한 침략지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각종 기관을 만들어 전문적인 학자와 연구들을 양산하였다. 일제의 당시 연구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다양한 이유를 들어 조선의 역사를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 것으로 그려내어 조선이 식민지화된 원인을 자신들의 침략이 아닌 조선의 역사적 과정에서 도출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식민사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연구와 역사학 #


인문/사회학은 방정식과 자연과학 실험처럼 정확한 공식으로 결론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에 현상을 보고 유사성과 공통점이 많을수록 동류라고 간주한다. 그러니, 어떤 주장에 식민사관이라는 정의에 부합하는 경험적 검증과 확률적 진술이 많을수록 그것을 식민사관으로 보는 게 맞다. # 그리고 여기서 경험적 검증과 확률적 진술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의 글과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교과서이고 대상은 정진석 위원장의 원문이다.

정진석의 글을 뜯어보면, "조선은 왜 망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 다음 곧바로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은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이다. 이러한 내용 전개는 누가 보더라도 조선멸망의 책임을 일본이 아니라 조선에게 지우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 뒤에 나오는 "조선 왕조는 무능하고 무지했다.", "조선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다." 등의 문장들은 이러한 태도를 더욱 강화시켜 준다.

정진석은 '조선멸망의 원인'으로 '조선의 내부적 문제'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조선멸망의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인 '일본의 침략'은 축소하여 거의 언급하지도 않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명백히 의도된 것으로, 독자로 하여금 조선멸망의 원인이 일본이 아니라 조선 자체라고 생각하게끔 유도한다. 바로 이러한 구조로 정진석의 글이 짜여져 있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관을 드러냈다고 비판받는 것이고, 그 의도와 역사의식이 의심받게 되는 것이다.

6.2.2. 일제의 침략 객관화 및 책임 축소[편집]


원문에서 정진석 위원장이 일제에 대해 잘못을 비판한 부분이 사실상 없다. 정진석 위원장은 그나마 자신의 고향인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이 '학살'당했다는 표현 말고는[30] 일제에 관한 부분을 상당히 객관화해서 나열했지, 일본의 국권침탈의 책임에 대해 주관적 논평(비판)이 있었다고 할 수 없다.

"일본군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한반도로 신속 진공했다. 곧바로 고종이 거처하는 경복궁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조선 관군과 함께 동학 농민 혁명군을 진압했다"

"수십만의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의 기관단총에 학살당한 동학 농민전쟁 최후의 결전장이 내 고향 공주 우금치다."

"일본은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__했고, 쓰러져가는 조선 왕조를 집어삼켰다. 조선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다."

"조선 왕조는 무능하고 무지했다. 백성의 고혈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다가 망했다. 구한말의 사정은 그러했다."

특히 "일본은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제압했고" 문장은 화자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서지적 정보를 미리 주지 않으면 일본의 입장에서 썼다고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다. 평범한 한국인이 일본의 입장에 서서 국운을 신경 써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고 무능하고 무지하며 백성의 고혈을 짜내다가 망했다며 기승전결을 조선의 책임으로 끝내서 식민지배의 원인이 조선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도록 작성했다.

그리고 일제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왜 굳이 조선대한제국군의병 집단이 일본제국과 벌인 여러 전투들이 존재하고 학계에 의병전쟁이라는 평가가 존재하는데도 # 한사코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며 조선에 더 책임을 전가하는지는 해명이 되지 않는다. 조선 멸망의 원인에 일제의 책임과 조선의 책임이 모두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는 의사가 정진석 위원장의 글에 없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이번 정진석 위원장의 글에 대해 칼럼으로 이렇게 평가했다.

일제가 을사늑약 이래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하는 데 5년이나 걸린 것은 우리 의병들의 치열한 항쟁 때문이었다. 의병의 항쟁은 곧 한일간의 전쟁이다.

비록 조선왕실은 무력하게 굴복했으나 민중은 거세게 저항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의열지사들이 구국전선에 나섰다. 제2기 의병(1905~1907)부터 살펴보면, 최익현신돌석ㆍ민종식ㆍ정환직ㆍ정용기ㆍ유시연 의병장이 있었고, 제3기 의병(1907~1909)에는 이강년ㆍ허위ㆍ민긍호ㆍ전해선ㆍ이은찬ㆍ김수민ㆍ한봉주ㆍ안규혼ㆍ기삼연ㆍ심남일 의병장, 제4기 의병(1909~1910)에는 홍범도ㆍ이범윤 의병장이 크게 활약하였다. 의병전쟁에서 20~30만 명이 희생되었다.

침략자 일본군과 싸운 우리 의병은 한일전쟁인데, 일본은 ‘전쟁’이란 말을 쓰지 않고 ‘출병’이란 용어로 호도한다. 조선출병, 만주를 침략하고도 만주출병 또는 진출이란 둔사로 표현하는 등 늘 그런 속임수를 써왔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한 것일까.

역사를 왕조사로 보느냐 민중사로 보느냐의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의 민중사는 결코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기미년 3‧1혁명을 비롯하여 봉오동청산리대첩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신흥무관학교, 조선의열단, 한인애국단 등의 투쟁은 위대한 독립전쟁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이런 데도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적이 없다”고 할 것인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칼럼》#



6.2.3. 자국사 혐오와 이익추구를 위한 역사관[편집]


정진석 위원장은 10월 11일 해명에서 "조선이라는 국가 공동체가 중병에 들었고 힘이 없어 망국의 설움을 맛본 것"이라면서 자신이 글쓴 진의가 왜곡되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의 침략이 없었으면 근대화와 현대국가로 향했을 거라는 이론이 학계에서 중론이며 이는 서울대 신용하 교수와 이태진 교수, 이덕일 교수, 전용하 교수, 역사전문가인 호사카 유지 교수가 뉴라이트들을 팩트로 논파하여 정론으로 확립시켜버린 전세계에서 인정받는 국제 세계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이를 반영해서 공교육이 이뤄지고 있음에도 정진석 위원장이 조선을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라며 기초 사실관계를 왜곡한 것에서부터 그 역사관이 반성을 위한 중립적인 역사관이라 말하기 힘들다. 당시 조선은 개항 전부터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하여 부르주아 혁명(김옥균 삼일천하)까지 일어난 근대국가로 동아시아 최초로 전철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런 개혁들은 조선의 경제적 저력과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반증이며 정진석 위원장의 말대로 '조선이 안에서 썩어문드러'지기만 했다면 있을 수 없었던 일이다. 서울대 신용하 명예교수에 따르면 근대화의 입구에 다다르고 있었는데 이를 일제가 좌절, 굴복시킨 것이다.[31]

또한, 조선이 '백성의 고혈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다가 망했'다는 인식은 역사에 대한 성찰을 넘어선, 자국 역사에 대한 혐오에 가깝다. 이는 정진석 본인의 인식이 조선사에 중립적이지 않기에 나온 표현들이다. 게다가 정진석 위원장은 상대 정당 대표의 주장을 반박하려고 현재 대한민국 국력의 부강함을 극적으로 대조하기 위해 침략에 의한 조선 멸망을 조선 내부문제로 인한 멸망으로 둔갑시켰다. 정진석 위원장이 지금은 자위대의 침공을 받을 일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면 그냥 현재의 대한민국 군사력만 담백하게 이야기하면 되었을 일이다. 자국사를 혐오적으로 바라보며 정치적으로 쓴 저 글을 보고 정진석 위원장의 의도가 단순히 조선의 실책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같은 정당의 정치인들을 제외하고 언론에 성명을 낸 저명인사들 중 누구도 이 부분을 반성의 의도로 봐주며 옹호해주지 않았다.


6.2.4. 논리적 부실함[편집]


정진석 위원장은 10월 11일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일본의 조선 국권침탈을 정당화했느냐"라면서 식민사관을 부정했다.

그러나 본 논란의 핵심은 조선 멸망원인의 경중을 어디에 두었느냐이다. 구한말 독립운동가들의 논저처럼 '당대의 성찰 과정에서 조선을 비판하는 것'과 식민사관에 영향을 받아 '조선은 스스로 망할만 해서 망했다고 힐난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이 약했다고 인정했으나 일제 책임이 없다고 하지도 않았기에 정진석 위원장의 글과 구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일제강점기를 정당화 하는 것》과, 《일제가 만든 조선에 대한 왜곡된 역사관에 동의 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논점이 다른 문제다. 전자는 일제의 강점 그 자체를 찬성하는데 목적이 있고, 전자와 후자를 함께 가지는 사람을 흔히 이완용 같은 부류라고 한다. 그러나 후자의 생각만 가지는 사람은 일제의 강점 그 자체는 부정적으로 보지만, 식민사관에 영향을 받아 조선을 왜곡해서 본다. 이 같은 예시로 뉴라이트의 학자들처럼 대놓고 일제의 조선 강점을 정당화하지는 않지만, 구한말 조선을 지극히 무능하게 보면서 거기에 더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끼얹는 입장도 있다.#[32] 또한 한국 사학계 역시 오랫동안 식민사관의 잘못된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이 점을 반성하는 학술토론을 여러번 열었던 적 있었다. # # 한동안 한국 사학계에 식민사관의 잔재가 있었다고 해서 선대 한국 사학자들이 일제강점기를 옹호한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식민사관의 영향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즉, 정진석 위원장의 글이 식민사관으로 학자들과 지식인들에게서 비판을 받는 이유는 일본이 만든 논리 및 주장과 매우 연관성 있는 내용을 썼기 때문이지, 일제강점기를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다. 정진석 위원장이 일본의 책임을 쏙 빼고, 식민사관과 다를 바 없이 조선의 책임을 부각했기 때문에 논란이 터진 것이다.


6.2.5. 정리[편집]


《조선 멸망의 원인에 대한 인식 - 문제가 있다》문단에서 다뤘듯이, 정진석 위원장의 글은 근대 일제 역사가들과 통감부조선총독부가 마련한 식민사관과 다를 바 없는 논조로 서술되었다. 조선의 무능과 무지를 강조하고, 일본과 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말로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였다는 점은 모든 학자들이 지적하는 사항이다. 그나마 글에서 나온 일본의 침략과정에 대한 단어들도 '학살' 표현 외에 건조하게 객관화하여 논평을 배제하다시피 했다는 점에서 일본이 편찬한 역사교과서의 객관화 및 둔사적 표현과 다르지 않다.

이후 정진석 위원장은 만해 한용운의 글을 가져와 자신이 쓴 글의 합리화에 쓰기도 하고 그 자체가 역사라면서 인터뷰를 시도한 기자들에게 공부 좀 하라고 질타하기도 했으나, '논란 후의 해명과 의도'가 어쨌든 '논란 전에 페이스북에 올린 원문'은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지적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진석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식의 태도로 일관하며 아무런 사과도 유감표명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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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국가예산의 거의 전부를 전비로 충당했으며, 이해관계가 맞았던 미국영국에서 막대한 차관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발언만 보더라도 당대 일제가 이 전쟁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다.[2] 을사조약, 경술국치, 일제강점기.[3] 논문초록 中 : 13도 창의군이 거병하면서 의병을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각국 공사관에 요청했다 ㅡ 1906~1910년간 일제의 의병 판결실태와 그 성격 / 동국대학교 김항기 2018 ㅡ[출처] A B 홍순권(동아대학교), "한말 의병사 연구에 있어서 용어 사용 및 시기구분 문제와 중등교과서의 서술체계"(2014), p.365[4] 물론 학계 내에서는 이와 같이 구한말 의병활동을 의병전쟁이라고 명명하는 학자도 있지만, 하나의 사례를 갖고서 학계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5] 의병활동을 을미('95), 을사('05) - 정미('07)로 두 시기로 나눌지(2분법), 을미('95) - 을사('05) - 정미('07)로 세 시기로 나눌지(3분법)도 학계 내에서 분분하다.[6] '삼별초항쟁'이 그 예시다.[7] armed conflict.[8] 조선왕조의 명령을 받는 조선관군들은 일본군들과 같이 의병운동을 진압하러 다녔다. - KCI등재논문 장석홍, "대한제국의 멸망 과정과 동북아시아 질서의 개편", 한국사학회(2007) - [9] "Japanese government considered western models so important that Japanese domestic interests could take second priority", Ibid et al.[10] A급 전쟁범죄는 개전의 죄를 의미한다. 말 그대로 전쟁을 일으킨 죄이다.[11] 실제로 체제 멸망의 책임이 온전히 자신들에게 있는 전범국가들마저 전후에 징벌은 당할지언정 그들의 주권은 어떤 방식으로든 보장되었다. 역사적으로도 보통 부패로 망하는 나라는 내부적인 반란을 거쳐 망하거나 아니면 타국에 의한 정복으로 망하는데 전자는 그래도 혼란을 거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지만 후자는 대체로 피정복민들이 핍박에 시달리며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거나 동화되지 않은 채 독립하거나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 압제에 시달리든 셋 중 하나다.[12] 현재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가 된 것은 인접국인 러시아, 중국, 일본이 강대국이고 특히 러시아와 중국은 제2세계의 대표적인 국가이기 때문이지, 일본이 아직 국제적 열강으로 데뷔하지 못하고 중국이 휘청거리던 구한말의 조선에 대한 서구의 인식은 "별로 뽑아먹을 자원도 없고 면적 대비 인구 밀도만 높은 황무지와 다를 게 없는 극동의 작은 후진국이자 변방" 정도였다. 한국에 원정을 왔던 프랑스와 미국이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국력과 군사력이 압도적임에도 전면적인 침략이나 개항을 포기하고 돌아간것은 괜히 그런것이 아니다. 추가적인 국력을 동원해봐야 얻어낼 수 있는 가치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13] 아시아주의의 원래 가치처럼 일본이 조선과 중국의 근대화를 돕는 방향[14] 근대화로 얻어진 성장의 과실을 수탈자인 일본인이 대부분의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조선인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15] 세계 군사력 순위에 대한 언급으로 은유[16] 일본의 무비자 관광객 및 인적교류 언급으로 은유[17] 다만, 이 논문의 전체 맥락을 읽어 보면 위에 서술된 관점들을 ‘지속되는 한일 간의 적대적 관계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라는 전제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옹호측을 뒷받침하는 단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18] the smaller the PwrIndx value, the most powerful a nation's fighting capability is (by conventional means as nuclear capability is not taken into account)"[19] 국제사회에서 법적으로(de jure)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실질적으로(de facto)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20] 세계 군사력 순위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통계는 신뢰성 문제로 논란이 분분하다. 해당 문서 참조.[21] 참고로 일본은 자신의 전쟁범죄를 감추기 위해 난징 대학살을 '난징에 진출했다'며 왜곡하고, 학살이나 진압과 같은 내용을 아예 배제하고 있다.[22]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을미개혁, 독립협회, 광무개혁 등 구한말의 사회 개혁 노력[23] 식민사관 자료 출처 : 이문영(초록불) '그들'이 말하는 '식민사관'이란 무엇인가 원 출처 : 이기백,『신수판 한국사신론』[24] 신채호 사관 출처 : 조선혁명선언, 본인발언(신뢰성 1순위) [25] 조선력사 사관 출처 : 신뢰성 논외(명확한 학문적 자료 없이 나무위키 및 뉴스기사 출처, 원문 접근 어려움) [26] 정진석 발언 출처 : 본인발언(신뢰성 1순위) [27]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28] '일본과 조선이 같은 뿌리'라든지, '조선인은 타율적 민족'이라든지, '식민통치로 조선이 근대화됐다'든지, '당쟁만 하다가 조선이 망했다'든지,... 등등. 그나마 발언과 비슷한 주장은 '조선은 발전이 멈춘 봉건국가"(정체성론)인데, 이것도 정진석은 "구한말 조선은 근대화에 뒤처졌다'라고 말했지, '조선은 봉건국가였다' 혹은 '중세시대에 머물러 있다' 고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명확히 구별된다.[29] 호사카 유지 교수는 대한민국 내에 신친일파가 암약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들은 전범기업의 돈을 받고 친일사상을 퍼뜨리고 있다고 한다. #[30] '점령', '진압' 등의 단어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다.[31] 만일 일제의 침략이 없었다면, 한민족 역시 자체적으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위 3.2문단 참고.[32] 간단히 말해 이들은 일제강점기는 정당하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근대화가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조선왕조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일지라도 친일의도를 가지고 있거나, 친일 뉴라이트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경우에는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