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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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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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탕산 사건
1931년 2월 28일
후한민 감금
1차 양광사변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나카무라 사건
1931년 6월 27일
나카무라 중위 피살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1일
한중 농민 충돌
제3차 초공작전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눈강 전투
1931년 11월 4일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천진사변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관동군의 푸이 옹립
영월합작
1932년 1월 1일
1차 양광사변 종식
진저우 침공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폭탄 투척
마옥산 사건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년 1월 28일~5월 5일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폭탄 투척
송호정전협정
1932년 5월 5일
1차 상하이 사변 종결
이시모토 사건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열하사변
1933년 2월 23일~5월 31일
일본군의 열하 침공
당고정전협정
1933년 5월 31일
열하사변 종결



만주사변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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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九一八(jiǔyībā事变(shìbiàn / 満州事変(まんしゅうじへん
Manchurian Incident

파일:Mukden_1931_japan_shenyang.jpg

날짜
1931년 9월 18일 ~ 1932년 2월 28일
장소
만주 전역
교전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svg 장제스
파일:대만 국기.svg 장쉐량
파일:대만 국기.svg 장쭤샹
파일:대만 국기.svg 장징후이
파일:대만 국기.svg 짱스이
파일:대만 국기.svg 아이신줴러 시치아
파일:대만 국기.svg 마잔산
파일:대만 국기.svg 완푸린
파일:대만 국기.svg 펑잔하이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쇼와 천황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혼조 시게루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미나미 지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이시와라 간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이타가키 세이시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도이하라 겐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아마카스 마사히코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가타쿠라 타다시
병력
약 16만 명
약 3~6만명
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일본 제국의 만주 점령
만주국 건국
1. 개요
2. 배경
2.1.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경제적 위기
2.2. 중국의 혼란으로 침공 기회
3. 전개
3.2. 봉천 공략과 남만주의 함락
3.3. "괘씸하나 어쩔 수 없다"
4. 결말
4.1. 장쉐량의 대응
4.2. 관동군의 북만주 공략
5. 뒷 얘기들
5.1. 국제연맹의 대응
5.2. 만주국의 수립
6. 여파
7. 참고 자료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만주사변의 전개 과정[1]

만주사변(滿)은 만주를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 관동군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일으킨 침략 전쟁이다.

만주를 점령하고 난 후 일본 제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옹립하여 괴뢰국만주국을 건국하였으며, 이후 소련몽골 인민 공화국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사변(事變)은 기본 의미는 '사람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천재(天災)나 그 밖의 중대한 사건.'이다. 그러나 '사변'이라는 명칭이 붙은 여러 사건에 의해 무력을 사용하게 되는 난리 또는 상대국에 선전 포고도 없이 침입하는 일을 뜻하기도 하게 됐다. 일본어, 중국어에도 유사한 쓰임이 있다. 널리 쓰이는 명칭의 경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을미사변(을미년의 변)이라 부르는 예, 1.28 사변과 쑹후(淞沪, 송호)회전을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 부르는 예가 있고, 6.25 전쟁을 6.25 사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어권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날짜에서 따와 9·18 사변(九一八事變)이라는 명칭을 주로 쓰고 선양 사변(瀋陽事變)이라는 표현도 쓴다. 일본에서는 '만주 사변'을 쓰나,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의 제안으로 만주 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서 보는 '15년 전쟁'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었다.


2. 배경[편집]



2.1.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경제적 위기[편집]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양도 받아 간도협약으로 만주, 연해주 등에 관한 권리를 포기했었지만, 일본의 대륙에 대한 확장주의는 제국의 태동기부터 존재했다.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번영을 위해선 만주를 식민화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가 있으며, 후에 삼국간섭으로 무효화되긴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는 등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바가 있었다. 이미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만주 남부 지역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대표되는 일본 자본의 경제적 식민지였다. 한편, 하얼빈을 중심으로 한 만주 북부 지역은 러시아 제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주사변의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사회의 군국주의 물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쟁보상과 할양받은 타이완 섬의 재개발로 경제를 부흥시켰다.[2] 이후 러일전쟁에서도 비슷한 콩고물을 기대했지만 정작 자금이 바닥난 건 일본이라 포츠머스 조약에서 배상금 획득은 없었고 결국 여론은 엉망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전리품인 조선은 통치를 위한 기초 작업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구조에 인구는 너무 많고 석유나 특산품이라고 내세울 것은 없는데 독립운동은 엄청나게 활발해서 그렇게 가혹하게 쥐어짰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해방까지 적자만 본 식민지였고, 타이완이 사탕수수 산업 덕분에 그나마 유일하게 흑자를 내는 식민지였다.

제1차 세계 대전도 떡고물을 노리고 참전했지만, 칭다오 조차와 기존 독일 영토였던 북태평양의 섬 몇개의 할양에 그쳐 생각보다 소득은 없었다. 중국 시장을 노리고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를 들이밀었다가 중국 민중의 반발로 5.4운동이 일어나면서 반일감정이 폭발하였고, 미국을 위시한 여타 열강의 개입으로 제5항[3]을 포기했고 결국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완전히 백지화되었다. 그 대신 엄청난 해운업 성장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경제가 부흥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이 경제회복기로 접어들면서 이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민당의 1차 북벌로 친일적인 북양정부가 무너지고 국민당의 2차 북벌국민정부가 본격적으로 자주외교에 나서면서 더 이상 중국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증가시키기 어려워진데다가 내부적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군부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군축이 진행되면서 군내부, 특히 영관급 장교들의 불만이 축적되어가던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1929년 말 대공황까지 닥치자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극우 정치권에서 위기탈출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1928년 이를 감지한 관동군 장교들이 총대를 메고 황고둔에서 장쭤린죽여버린 것이다. 장쭤린은 미쓰야 협정을 맺고 반봉사건 당시 관동군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가장 일제에게 협조적인 군벌이었음에도 그가 장제스에게 두들겨맞고 도로 만주로 쫓겨난데다 일본이 그에게 제시한 만몽신오로협약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간 만주에 뿌려둔 떡밥들이 헛수고가 될 것을 우려한 관동군은 1928년에 장쭤린을 폭살하고 만주를 무주공산으로 만들어 차지하려 했지만,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은 아버지의 가신이자 자신들의 경쟁자였던 창인화이와 양위팅을 없애고 봉천군벌의 자리를 계승한다. 일본은 장쉐량을 압박하여 만주에서의 일본 이권을 보장받으려 했으나 아버지를 잃은 장쉐량은 그말을 무시하고 동북역치를 통해 장제스 정권에 합류한다.

그렇다고 장쉐량이 급격히 반일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는데, 장쉐량은 일본을 자극하면 만주로 쳐들어올까봐 매우 두려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관동군의 탐욕은 장쉐량이 반일을 하든 친일을 하든 상관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나 관동군의 장쭤린 암살은 천황의 재가도, 내각의 승인도 받지 않은 독단행위였고 이때까지 완전히 군국주의에 미쳐 돌아가지는 않았던 일본에서 관동군의 만행은 큰 비판을 받았다. 더군다나 국제사회까지 일본을 비판하자 관동군은 장쉐량이 만주를 장악하는 혼란기를 이용하지 못하고 방관해야 했고 대만주 정책은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주도했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만주를 중국에서 완전히 분리해서 친일 괴뢰국으로 만들 심산이었지만 장쉐량이 동북역치로 일본의 만주 분리정책에 정면으로 빅엿을 먹이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그나마 일본 입장에서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장쉐량이 자신의 기반인 동삼성과 러허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대신에 무리한 관내 진출에만 몰두하였고 만주 내부의 구파와 신파의 정쟁이 심해져서 결국 만주사변에서 허망하게 무너지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 육군대신 시라카와 요시노리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를 비롯한 월권행위자들을 애국자란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이는 큰 패착이었다. 이후 관동군 사령관이 혼조 시게루로, 참모장이 이타가키 세이시로로 교체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시와라 간지가 등장했다. 관동군 작전참모에 임명되어 만주에 도착한 이시와라 간지는 이시와라 간지 문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일본군 내부에서도 매우 독특한 인물에 속했는데, 미래에 동양의 일본과 서양의 미국이 한판 붙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단아였다. 이시와라는 이에 대비하여 만주와 몽골을 점령하자고 노래를 불러댔는데, 그런 그가 만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이시와라는 일본의 만주 병탄이 절대 일본의 사적인 이익이 아닌, 일본·중국·조선 삼국의 인민들이 평화로이 공존하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시와라만이 그렇게 외쳤을 뿐이지 실제론 땅도둑과 폭군들이 군침을 흘릴 뿐이었다. 애초에 이시와라는 강제로 병탄된 피점령지의 주민들이 품을 반감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예전에 그랬다고 해서 지금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는 궤변을 지껄였다. 어쨌거나 그의 막나가는 주장에 대해서 참모본부는 일본의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우려하여 반대를 표명했다. 하지만 이시와라는 참모본부의 반대를 묵살하고 청년장교들을 선동하여 만주 침략의 길에 나서게 된다.


2.2. 중국의 혼란으로 침공 기회[편집]


이 와중에 중국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최대의 내전이었던 중원대전이 끝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던데다가 1931년 장제스후한민을 감금시키는 탕산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해 광둥 파벌이 격렬하게 반발하여 1931년 5월 광저우 국민정부를 세우고 독자적인 북벌을 선포하며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고, 대공황의 여파도 중국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거기에 장강에선 대홍수가 발생하여 엄청난 숫자의 재산, 인명피해, 이재민이 발생했고 이를 수습하는 것을 두고 국민당 내부에선 격렬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중동로 사건으로 봉천군벌소련전쟁하게 되어 더욱 혼란이었다. 이러한 혼란들은 관동군이 만주를 침공할 적시라고 생각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2.3. 만보산 사건나카무라 사건[편집]


그 와중에 이시와라 간지는 만주에 대한 떡밥을 뿌리기 위해 수면 밑에서 열심히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바로 1931년 6월의 나카무라 사건과 7월의 만보산 사건이었는데, 이시와라는 각각의 사건을 통해 만주 침공 명분 축적과 조중의 관계 악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의외로 장쉐량은 화북 확보에 중점을 두느라 본진인 만주에서 일본군이 벌이는 획책을 무시하고 일본의 모든 요구에 승낙했다. 동북정무위원회 주석 겸 동북변방군 사령관 장쭤샹과 난징 정부의 외교부장인 구웨이쥔이 군대를 물려 만주를 지켜야 한다는 조언과 경고를 모두 묵살하고 일본의 어떤 트집에도 침략 구실을 제공하지 말란 명령을 내린 것이다. 장쉐량이 이렇게 나오자 와카쓰키 내각도 외무부도 일본이 만주에 출병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으나, 문제는 관동군의 생각이 달랐다는 것이다. 이시와라 간지는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결탁하여 유약한 본국 정부의 대처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만주를 장악하자는 계략을 꾸미게 된다. 만약 정부가 이를 끝까지 막을 시에는 쿠데타도 불사할 계획이었다.


3. 전개[편집]



3.1. 류탸오후 사건[편집]


관동군은 9월 28일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 육군참모총장 가나야 한조 등을 중심으로 하는 육군의 후원 하에 만몽을 침탈하려는 계획을 진행중이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인진 알 수 없으나 강경파 혼조 시게루가 8월 1일 관동군 사령관에,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와라 간지 등이 관동군 요직에 배치되었다. 8월 중순 이타가키 세이로는 육군 군사과장 나가타 데쓰잔 대좌, 보임과장 오카무라 야스지 대좌, 작전과장 이마무라 히토시 대좌, 작전과장 다테카와 요시쓰구 소장 등과 회담을 가져 만몽 침탈을 계획했다. 만주로 돌아간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혼조 시게루에게 중국과 충돌하였을 때 중앙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지 독자적으로 행동이 가능한지 문의했고, 혼조 시게루가 군사령관으로서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겠으나 독단전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답변하자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그 계획이란것이 바로 만철을 폭파시킴으로 소동을 일으키고, 관동군사령부 조례 제3조에 의거하여 소동 진압을 위해 관동군을 출동시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히로히토 천황일본 정부는 만몽에 대한 일본의 무력대응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1년 6월 4일 히로히토는 미나미 지로 육군대신에게 군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다스릴 것을 주문했고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에게도 따로 중국과 친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이온지 긴모치 등도 대중 유화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군부의 폭주 기운이 유지되자 히로히토는 9월 11일 미나미 지로를 다시 소환하여 나카무라 사건, 만보산 사건 등이 중국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되었으니 메이지 천황이 만든 군대에 문제가 생겨선 안된다고 엄히 지시했고, 사이온지 긴모치도 미나미 지로에게 만몽은 중국 영토인데 외무대신이 아닌 군이 끼어드는 것이 건방지다고 미나미 지로를 질책했다. 이에 처음엔 관동군의 계획을 지지하던 육군 중앙은 생각을 바꾸어 9월 14일 다테카와 요시쓰구 소장을 만주에 파견하여 계획을 저지하기로 했다. 다테카와는 만몽 침탈계획에 찬성하는 인물이었으나 중앙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만주로 향하였는데, 명령에 불만을 품고 비행기 대신에 기차를 타고 느긋하게 출발하였다. 그가 늑장을 부리는 사이, 참모 본부의 러시아 반장 하시모토 긴고로 중좌는 관동군에 다테카와가 봉천에 도착하기 전에 거사를 해야 한다는 비밀 전문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하시모토의 비밀 전문 3통을 받은 관동군 참모장 등 주요 간부들은 뤼순의 혼조 시게루에게로 달려갔고 봉천에서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와라 간지, 하나야 타다시, 헌병 분대장 미타니 기요시, 주재 분대장 이마다 신타로 등이 모였다. 이들은 작전 실행 여부를 놓고 긴 회의를 가졌으나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9월 16일 9시 반부터 이들은 술을 마시면서 다시 회의를 했는데 17일 오전 3시에 이르러서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이렇게 된 바에야 운을 하늘에 맡기고 나무 젓가락을 세워서 정해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즉 점을 쳐서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중지, 왼쪽으로 구르면 결행으로 결정하고 점을 쳤는데 세번 연속으로 굴렸는데 모두 오른쪽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이들은 처음에는 계획을 중지하려고 했...었다.

이렇게 어영부영 정한 '계획 중지 결정'에 젊은 강경파인 이마다 신타로, 미타니 기요시 등이 반발하여 다시 행동에 옮기자는 주장을 하였고, 18일 오후 7시 다테카와가 도착하자 애주가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다테카와도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기쿠분이란 요정에 데려갔다. 여기서 다테카와가 이타가키에게 설득당했단 말도 있고, 술에 취해 흐느적거렸단 말도 있다. 어쨌거나 다테카와는 이타가키에게 "뒷 일을 자네에게 맡긴다"며 자신은 묵인할 것을 약속했고 이시와라는 혼조 시게루를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는 와중에 관동군은 작전을 열흘 앞당겨 계획에 들어갔다.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20분, 펑톈 외곽 북쪽 7.5km 떨어진 류탸오후[4]에서 관동군 독립수비대 2대대 3중대의 공작으로 철도가 폭발했다. 폭파 규모가 매우 영세해 폭발 30분 이후로 특별열차가 시속 80km로 통과할 정도였으나 애초에 명분용이었기에 폭발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만철을 폭파시키고 그걸 동북군의 소행이라고 거짓보고를 올렸다. 이에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가 즉각 혼조 시게루 사령관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그를 사칭하여 독립수비대 2대대와 5대대에게 동북군 7여단을, 2사단 29연대에게 펑톈성(봉천성)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면서 만주사변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술을 마시던 이타가키는 즉각 요정을 뛰쳐나와 11시에 29연대장과 독립수비보병 2대 부장에게 장쉐량 군대가 공격해온다면서 봉천성과 북대궁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사건 보고를 들은 혼조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의무가 있었다고 한 다음에 봉천으로 이동했다. 이때 이시와라 간지와 미야케 고지 참모장은 만주의 장쉐량 군대가 25만을 넘고 봉천에만 2만명을 넘는데 관동군은 1만을 조금 넘는다면서 조선군을 출동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이시와라 간지는 이미 조선군 작전참모 간다 마사타네 소좌와도 이미 조선군의 출동에 대해 조율한 상태였다. 이에 대해 혼조는 대답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한다. 19일 새벽 1시 7분 관동군은 도쿄에 장쉐량이 선빵을 때렸단 거짓보고인 205호 전보를 보냈다. 오후 6시 가나야 참모총장이 불확대방침을 알려오며 쓸데없는 공격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혼조 시게루는 이에 정전할 것을 명령하며 하얼빈을 공격하려는 이시와라 등의 계획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이시와라는 "이제 내 알 바 아니다."라면서 체념했다. 하지만 이타가키는 실망하여 벌렁 드러누은 이시와라에게 하얼빈이 안된다면 길림성을 공격하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했고 이시와라는 다시 힘을 얻어 봉천을 지키기 위해 길림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길림성 진공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즉각 다테카와에게 길림성의 재류 일본인 보호를 구실로 출병할 것을 제안했고 이들을 말리러 온 다테카와는 그 계획에 감탄하여(...) 미야케 참모장과 함께 그들을 지지하게 이르렀다. 이에 막료 전원이 혼조를 설득하여 길림성 출병을 허락받으려 했지만 돌부처란 별명이 있던 혼조 시게루는 요지부동이었다. 12시 쯤에 이시와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시로를 뺀 모든 막료들이 포기했고 곧이어 이시와라도 포기했는데 이타가키는 새벽 3시까지 남아 혼조를 설득한 끝에 그의 승인을 받아냈다. 이렇게 관동군의 고삐는 완전히 풀려버렸다.

한편 장쉐량의 항의를 받고 경악한 일본 총영사가 장쉐량과는 협상을 해야 한다고 만류하자 소좌 하나가 군도를 뽑아 "이 칼이 아무것도 베지 않고 도로 칼집에 들어가는 일이 없을 것이오.[5]"라고 위협했는데 그가 바로 하나야 타다시였다. 니가 무슨 야쿠자냐


3.2. 봉천 공략과 남만주의 함락[편집]


한편 2대대 3중대 소속 105명의 병사들이 가와시마 다다시 대위의 지휘 하에 북대영을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가와모토 스에모리의 거짓보고가 올라간 이후 그들은 즉각 북대영을 습격했다. 뤼순의 관동군 사령부는 밤 11시에 동북군이 철도를 폭파시켰다는 거짓보고를 받았는데 혼조 시게루 사령관은 의아해하다가 모든 부대에게 만철을 보호하고 동북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9월 19일 오전 8시 30분에 관동군은 조선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쥬로는 천황의 재가도 참모본부의 승인도 팽개치고 1개 여단과 2개 비행중대를 급파했다.

관동군 2사단은 요양에서 봉천으로 신속히 이동, 봉천을 포위했다. 동북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뜻밖의 습격을 받은데다가 일본군의 화력이 동북군에 비해 월등하여 곧 패주하고 말았다. 관동군은 봉천의 주요 정부 청사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20일에 봉천을 완전히 함락시켰다. 관동군 사령부는 뤼순에서 봉천으로 이동했고 펑톈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 대좌가 봉천 임시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20일 오전 7시엔 관동군 독립수비대들이 장춘을 점령했고 21일에 혼성여단이 지린 성으로 진군하자 지린 성 주석대리 겸 동북변방군 참모장 시치아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버렸다. 이리하여 남만주가 통째로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3.3. "괘씸하나 어쩔 수 없다"[편집]


더욱 황당한 일은 9월 21일 오후 조선 주둔 혼성 제39여단 소속 1만여명의 병력이 무단으로 압록강을 넘어간 행동을 본 일본 정부의 반응. 후일 "월경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가 명령도 없이 월경을 했으니 이건 군법재판감이었다.

실제로 사건을 알아차린 참모본부 역시 정부의 방침과 경비, 국제분쟁 등의 문제를 들어서 조선군의 월경을 금지하기로 하는 한편 각료회의 소집을 요청하여 9월 22일 오전 10시에 각료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는 만주사변이 육군의 계획된 행동이었다면서 육군을 규탄했다. 미나미 지로는 우물쭈물하며 대응하지 못했는데 이때 조선군의 월경 소식이 각료회의에 밝혀지게 된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반응은 "씁 어쩔 수 없지." 와카쓰키 수상은 19일에 내각을 소집하여 사태를 확대하지 말라고 관동군과 조선군의 원대복귀를 명령한 바가 있음에도 조선군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단 소식을 듣자 우왕좌왕하면서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이지 못하다가 이런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뭐라고? 이미 만주로 들어갔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예산에서 특별 군사비를 지출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명언이 남게 된 이유는 그 시절 일본 내각 구조와 관련이 있다. 당시 일본의 내각은 대신 하나만 사퇴해도 내각 전체를 해산해야 했기에 강경파 한명이 쿨하게 사퇴하면서 내각을 무력화시키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황고둔 사건 당시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초기에는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단독으로 저지른 것"이라면서 쇼와 덴노에게 처벌을 요청했으나 육군의 강력한 반발로 "묻어둘 수 밖에 없다."라고 말을 돌렸다. 쇼와 덴노는 이에 역정을 냈고 "다나카를 더이상 보지 않겠다, 다나카는 아주 싫다." 는 발언까지 하자 결국 7월 2일, 사건이 터진지 한 달만에 다나카 내각은 총사퇴한다. 뒤이어 그의 후원으로 총리가 된 동창 야마나시 한조 조선 총독도 비리로 물러났다. 이렇게 내각이 단기간에 여러번 무너지자 천황과 궁내대신들은 가급적 군과 내각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려 했던 것이다.

때문에, 내각은 사태 확대를 막아야 한다면서도 강경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중국과 소련의 눈치를 보면서도 조선군의 압록강 월경 소식에 즉각 특별 예산을 승인해주었다. 와카쓰키 수상은 사후 재가를 내려주면 관동군이 남만주를 점령하는 수준에서 진정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고, 남만주를 먹은 관동군은 더욱 미쳐 날뛰며 북만주를 향해 칼날을 돌리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히로히토는 조선군의 월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다가 와카쓰키 수상이 이미 각료회의의 결정이 난 것이라 하자 재가에 동의했다. 이러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책임 추궁도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그러나 이상의 사정만으로 당시 일본 내각과 천황에게 중국 침략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보는 것은 만주사변 전후의 맥락과 맞지 않는다. 당시 관동군의 월권행위는 명백히 사후 승인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오히려 천황과 일본 정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군부, 특히 육군 과격파에게 침략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다. 아래에 언급된대로 만주 점령 이후 일본은 일관되게 중국을 식민지화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했으며, 만주 침략에 있어서 관동군의 독단은 그 시기와 방법에 국한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한편, 이때 군부를 제어하지 못한 일본 내각은 결국 5.15 사건이라는 날벼락을 맞게 된다.


4. 결말[편집]



4.1. 장쉐량의 대응[편집]


당시 장쉐량은 30만의 정규군과 18만명의 비정규군을 거느렸고 중국 군벌 중에 최대 규모의 함대와 300대에 달하는 전투기를 갖춘 공군도 있었다. 게다가 펑톈의 병기창은 2만 5천명의 근로자들이 150문의 대포, 20만발의 포탄, 1천정의 기관총, 6만 자루의 소총, 1억발의 탄환을 생산했다. 반면 관동군은 1만 5천명에 불과했으니 단순 숫자 대비로만 해도 대략 50만 대 1만의 싸움이었다. 숫자도 많고 질도 중국 군벌들 중에서 수준급인 동북군이 이 상황에서 질리가 만무했다.[6]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장쉐량이 측근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대군을 톈진, 베이핑에 주둔시키고 있었단 것이었다. 무엇보다 장쉐량은 일본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줄까봐 두려워했다. 만약 일본이 전격적인 공격을 감행해온다면 장쉐량이 이길 리 만무했고 그렇다면 장쉐량은 기반을 모조리 날리게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장쉐량은 일본이 만주를 통째로 점령할 야욕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간 일본군이 도발을 해온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이번 도발 역시 그러한 도발의 일환 정도로 본 것이었다. 여기에 일본 외무성이 영토 야욕이 없으며 만철을 보호하기 위한 부득이한 출병 운운하며 장쉐량의 오판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사실 일본이 왜 쳐들어왔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것은 장제스 역시 마찬가지라서 난징 국민정부가 일본이 만주를 아예 병탄하기 위해 쳐들어왔다고 확신한 것은 1931년 11월 치치하얼이 함락된 이후였다.

장쉐량은 베이핑의 미국 병원에서 장티푸스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급보를 받고 회의를 소집하고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관동군의 도발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동북군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모든 무기를 병기고에 보관한 채 스스로 물러날 것이며 일본군에게 최대한 협조하라.
2. 난징 정부에 알려 국제연맹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도록 건의하라.
3. 뤼순으로 대표를 파견해 일본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9월 19일에는 외교관 구웨이쥔과 만나 대책을 논의했는데 구웨이쥔은 국민정부에 연락을 취하여 국제연맹에 본 건을 제소하는 한편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와 속히 회담할 것을 제안했다. 구웨이쥔은 냉정한 국제외교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고 국제연맹에 조금도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원론적인 입장에서 일단 제안했고 그것의 효력을 의심하였기에 혼조 시게루와의 면담도 제안했지만 장쉐량은 혼조 시게루와의 면담은 거부했다. 이날 장쉐량은 국민정부 대표 장췬우톄청을 만나 만주사변에 관해 국민정부에 보고했다.

9월 23일 장쉐량은 동북변방군 사령장관 공서와 요녕성 정부를 금주로 이전시키고 26일 휘하의 동북군에게 이번의 무저항주의는 사변을 국제공판에 맡기기 위해서라고 변명했으나 장쉐량의 무저항 지시에 저항하고 있던 많은 동북군 부대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관동군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쉐량과 원수지간이 된 만주 구파는 관동군의 회유에 미운 상전인 장쉐량을 팽개치고 즉각 일본이 내미는 손을 잡았으니, 대표적인 것이 훗날 만주국 수상까지 하는 당시 동삼성 특별장관 장징후이와 지린성 주석대리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위안진카이, 장하이펑 등이었다. 장쉐량에게 충성하던 장쭤샹과 완푸린, 왕이쩌(왕이철) 등은 베이핑으로 달아났다. 외교적 대응의 경우에는, 구미 열강들이 현명한 대응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지만 이미 난징 정부조차 이것이 별 소용이 없을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후 리턴 조사단의 결정을 일본이 씹어버리고 국제연맹 탈퇴를 강행한 막장 행위를 본다면 난징 정부의 예상은 정확한 것이었다. 이미 장쉐량 본인이 난징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걷어찬 바가 있었지만 가령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하더라도 난징 정부의 수장 장제스 역시 이미 후한민을 비롯한 국민당 내부의 갈등에 휘말려서 장쉐량을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장쉐량의 대응은 여러모로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장쉐량은 후일 죽은 뒤까지 부저항(不抵抗)이란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이런 장쉐량의 대응에 대해, 애초에 당시 장쉐량 본인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장쉐량은 아편에 심각하게 중독된 상태였고, 이 때문에 건강을 크게 해쳐서 상황을 판단할 능력도 떨어진게 아니냐는 것.

장제스는 제3차 초공작전으로 공산당과 싸우던 와중에 후한민을 감금한 탕산 사건에 반발한 광둥 군벌들이 광저우 국민정부를 세우고 일으킨 반란인 1차 양광사변을 맞아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만주사변을 보고받았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독단적으로 협상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한편 왕징웨이에게 나라를 위해 내전을 중지하자고 제안하며 광저우 국민정부와 싸우던 병력을 북상시키고 9월 20일, 3차 초공작전도 중지하고 군대를 북상시켰다. 또한 일본 외무성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정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비난만 하였고 일본에게 광둥 정부를 지원하면 만주 점령을 승인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일본에선 왕징웨이가 장제스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여겨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4.2. 관동군의 북만주 공략[편집]


9월 23일 장쉐량은 장제스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협상하려 했지만 관동군은 만주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10월 15일, 투항한 동북군들을 앞세운 관동군이 치치하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헤이룽장 성 성장 완푸린은 달아났고 장쉐량은 마잔산에게 치치하얼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11월 4일 넌장 강 철교에서 마잔산은 일본군을 습격하여 섬멸했고 이에 온 중국이 고무되어 마잔산을 군신으로 칭송하였다. 하지만 마잔산은 1만 3천명의 병력과 30문의 대포밖에 없었는데 반면 일본군은 각종 전차를 앞세우고 진격해왔고 결국 마잔산은 패주하고 만다. 11월 9일에 치치하얼이 함락되었고 마잔산은 중소 국경 지대에서 항전하였다. 그나마 마잔산 정도가 일본의 침략에 저항다운 저항을 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의 저항을 마지막으로 만주는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고 만다.

한편 국제연맹의 대응이 지지부진한 것과 관동군의 도를 지나친 공격을 지켜본 장쉐량은 그제서야 맞서 싸우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베이핑에 주둔한 병력을 만주로 보내기 시작했고, 만주의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5만명의 병력으로 진저우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이 결정을 난징 정부는 전폭적으로 지지하였고 장쉐량은 만주 전역의 동북군에게 저항을 호소했지만 너무 늦은 호소였다. 관동군은 진저우 함락이 쉽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2개 사단을 동원하여 진저우를 공격하려 했다. 국민정부는 진저우 사수와 포기를 놓고 분열되었는데 국민혁명군 참모장 주페이더다이지타오는 철수 후 협상을 주장했고 구웨이쥔은 사수를 주장했다. 그런데 관동군은 생각지도 못한 우군을 만나게 된다. 다름아닌 화북 군벌들이었다.

장쉐량이 진저우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한 것을 본 옌시산을 비롯한 화북 군벌들은 즉각 장쉐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이핑이 위험에 처하자 장쉐량은 진저우 주둔군을 롼저우로 철수시켰지만 갑작스러운 철수와 혼란한 전황 속에 결국 동북군은 와해되어 반란이 일어났고 1932년 1월 3일에 진저우가 조선군 20사단에게 함락되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하얼빈도 1932년 2월 5일 일본군 2사단에게 점령되었다. 그렇게 만주 전체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었다.


5. 뒷 얘기들[편집]



5.1. 국제연맹의 대응[편집]


일찍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배상으로 요동반도를 삼켰다가 삼국간섭으로 도로 토해낸 일이 있었고, 일본이 가장 우려하던 상황도, 중국이 바랬던 것도 삼국간섭 같은 일이 재현되어 일본이 만주를 도로 토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자신들 코가 석자였던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열강은 일본의 만주 침략을 지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이권에 연계되는 일도 아니라 수수방관할 따름이었다.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군에게 원 주둔지로 철수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상정했으나 일본이 상임이사국이라서 무산되었고, 중립 위원을 파견해 일본군 철수를 감시해달라는 중국의 요청도 거부되었다. 미국은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을 제외하곤 더 중요한 교역국인 일본의 비위를 거스를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고 영국도 극동에서 소련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일본을 방패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영국은 장제스의 반제국주의와 주권회복 운동 때문에 장제스를 싫어했고, 그래서 "무능한 중국을 위해 일본과 같은 '활동적 나라'의 발전을 왜 방해해야 하느냐?" 는 소리까지 했다. 소련도 중동로 사건으로 장쉐량과의 감정이 악화되어 중국을 무시했다. 게다가 소련 역시 식량난이오시프 스탈린의 권력 장악 기간으로 혼란스러워 정신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의 북만주 이권을 바탕으로 일본에 협조했다. 결국 국제연맹은 평화적 해결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며 시간을 죽였고 일본이 자발적으로 철병하겠단 말을 어기고 북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도 소극적으로 일관했다.

1932년 1월 17일에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일본 대표는 1만 5천명의 관동군이 어떻게 만주를 먹을 수 있겠냐며 중국 대표의 비판에 대응했는데 이는 장쉐량에 대한 조롱이었다. 대다수 열강들은 일본을 지지하거나 방관했고 국제연맹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일본의 만주 침탈 야욕이 가시화되자 국제연맹은 1931년 12월 10일 영국의 귀족 리턴 백작을 중심으로 하는 리턴 조사단의 파견을 결정했다. 1932년 2월 29일부터 시작된 리튼조사단의 조사는 1932년 9월 4일까지 진행되었다. 리턴 조사단은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며 만주가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만주국을 해체하고 만주에 대한 중국의 명목상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만주를 일본이 관할하는 비무장지대로 만들어 친일 지방정권을 수립할 것을 제안했지만 일본도 중국도 반발했다. 일본은 이에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 탈퇴로 대응했고 국제연맹은 자신들의 무능력함만 드러내며 설립 초반에 받은 기대와 그나마 거둔 성과마저도 빛을 바래게 하고 말았다.


5.2. 만주국의 수립[편집]


사실 일본은 만주를 침탈할 계획은 있었지만 조선에게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 완전히 합병시키거나 만주국같은 괴뢰국을 세울 생각은 아니었고, 그냥 친일 지방정권(역시나 괴뢰는 괴뢰지만)을 세우는 수준에서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즉 중국의 명목상 주권은 존중하겠단 입장이었다. 하지만 관동군 참모장 미야케 미쓰하루 등은 이시와라 간지와 결탁하여 만주를 멋대로 침공했듯이 만주를 멋대로 분리하려 들었다. 그들은 괴뢰국 수립을 위해 장징후이를 비롯한 만주 구파들을 대거 포섭했고 이들에게 감투를 뿌렸다. 괴뢰국 정부의 수족이 될 이들은 포섭했는데 괴뢰국의 권좌엔 누굴 앉힐까 고민하던 관동군은, 자금성에서 추방당해서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거주하던 선통제 푸이를 뤼순으로 데려왔다. 이는 일본이 그간 외쳐온 영토야욕이 없음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행위들이었다. 일본은 만주국 수립을 위하여 중국과 전 세계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또 하나의 만행을 저지르니 바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이었다.

1932년 3월 1일 동삼성을 관할하는 동북행정위원회는 만주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수도는 신징(현재의 창춘시), 집정에 푸이, 총리에 정샤오쉬가 추대되었고 그때까지 장쉐량이 지배하고 있던 열하성도 만주국의 영토로 선포되었다. 일단은 만주인의 국가니 대청제국의 부활이니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실제론 60만 명도 되지 않는 일본인과 관동군이 만주국의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며 모든 것을 자신들의 뜻대로 좌지우지했다.

국제연맹은 리튼 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채택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로 맞섰다. 1만 5천명의 관동군은 1932년 9만 4천명으로 증강되었고 1935년에 16만 4천명으로 늘었다. 이후 일본군은 열하사변을 일으켜 열하성마저도 점령한다. 1934년 만주국은 제국을 선포하고 푸이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허울좋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6. 여파[편집]


"을 죽여라! 적을 죽여라! 모두 일어나 적을 죽여라!"

일본의 만주 침략을 들은 중국시보의 헤드라인.


"일본은 만주를 지키기 위해서 중국 북부를 침략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중국 북부를 지키기 위해서 중국 중부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리하여 결국 아시아 전체를, 나아가 세계 전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결국 불가능을 행하려는 것이며 스스로 짊어진 무거운 짐에 의해 압도되게 되는 것이다."

미키 기요시(三木淸), 1935년 12월.


1차 양광사변제3차 초공작전에 매달리던 장제스에게 그야말로 뒤통수를 제대로 날려버린 사건으로 결국 충격을 받은 장제스는 탕산 사건으로 감금되었던 후한민을 석방하고 남방의 반장파들도 동조하면서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광서파 등 강경한 반장파들이 협력 조건으로 장제스 하야를 요구하였으며 슝시링 등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헌정운동을 벌여 장제스를 압박함에 따라 1931년 12월 15일, 장제스가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뒤를 이었던 쑨커는 한달 만에 버티지 못하고 사퇴해버렸고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합작하여 장왕합작 체제를 구축, 1932년에 군사위원장으로 복귀하였다.

또한 중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군수공업지대를 날려버린 재앙이었다. 만주는 일찍이 열강들과 봉천군벌의 투자로 근대적 통신망과 교통망을 부설하고 공업화를 이룩했던 바, 봉천군벌이 소유한 동3성 병공창 하나에서 생산되는 화포와 탄약이 나머지 군벌 소유 병공창에서 생산되는 화포와 탄약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이게 전부 일본의 아가리로 들어갔으니 국민혁명군의 무장이 더욱 열악해진 것은 안봐도 비디오.

만주 사변으로 중국 본토로 도망친 장쉐랑은 훗날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결국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대륙을 제패하는 복선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국공내전 발발 직전까지만 해도 국민당의 우세는 확정적이었으며 장제스가 잘만 대처했어도 공산당 제압, 최소 만주를 제외한 중국의 지배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후 무리한 만주진공 작전으로 몰락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까지 공산당의 목숨을 붙여둔 1등 공신이 바로 일본의 침략.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은 어떻게 해서든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지만, 중국 공산당의 패퇴 직전이라는 참으로 적절한 상황에 이 짓을 저질러준 덕에 중국 공산당은 기사회생했다. 그야말로 군인들 몇명이 역사를 크게 바꾼 셈이다.

그리고 일본 군부에선 정부 명령을 씹고 행패를 부린 이시와라 간지 등이 처벌받긴 커녕 잘도 진급하고 영전하자 하나같이 저들처럼 한바탕 해보자! 라는 모험주의 열풍이 불게 된다. 이후 타이완의 장교들이 관동군이 만주를 먹었듯이 푸젠성을 먹기 위해 푸저우에서 부랑자들을 매수하여 일부러 일본인 교사들을 살해하는 자작극을 벌이기도 했고 무타구치 렌야루거우차오 사건에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신나게 논 이시와라 간지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 일본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쳤는지 뒤늦게 깨닫고 노구교 사건에 이르러선 일본의 개입에 반대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자업자득이었다. 무엇보다 이시와라 역시 일시적이나마 대중 확전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중국사에 남을 치욕적인 날이다 보니 당연히 중국 전체가 폭발했다. 난징, 상하이 등 중국의 주요 대도시마다 흥분한 젊은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일본을 규탄하면서 일본과 무역하는 자들을 처벌하고 당장 대일선전포고를 해야한다며 목청을 높였고 수천 명의 학생들이 자원입대를 요청했다. 다만 국민당은 해당 공작을 국민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판단해 선전포고를 끝까지 거부하고 대신 장기적인 안목, 군벌 토벌과 경제 안정화에 집중하기로 한다. 자세한 설명은 중일전쟁 항목 참조.[7] 무엇보다 당시 중국은 일본을 상대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 6년이나 더 준비한 중일전쟁에서도 그렇게 큰 피해를 냈는데 군 현대화와 공업화 정책이 시작도 되지 않은 1931년 시점에 일본에 덤빈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였다.

이후 공산당은 "이게 다 장제스 때문이다!" 라고 만주를 일본에 잃은 것이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에드거 스노우 등이 공산당의 일방적 모략을 진실인양 세계에 퍼뜨리면서 장제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웠지만 애초에 중국 공산당도 1935년까지 일본이 침략 좀 하면 어떻냐, 우리 세력권 확대하면 그만이지로 일관하는 막장 세력이었다(...). 정작 공산당은 만주사변과 열하사변 때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이동하는 국민혁명군을 습격하며 이득을 취했고 대장정 이후 섬서성에 정착해서는 기동사변, 수동사변 등 일본군이 내몽골과 화북을 장악하기 위해 도발하는 틈을 타서 '동정항일' 운운하며 국민당 뒤통수나 치고 다니면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국민당군을 습격하는 게 항일이라는 실로 괴랄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뻔뻔하게 하고 다녔다. 이러한 태업을 넘어선 통수는 중일전쟁에 절정을 달렸다.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후 마오쩌둥 본인부터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줘서 고맙다' 라고 했을 정도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항일은 뒷전이고 공산당 토벌에 정신이 팔린 장제스' 때문에 만주를 잃었다는 공산당 측의 비난과 달리 난징 국민정부는 만주의 세력권이 그리 확고하게 자리잡은 상태도 아니었다. 장제스가 정말로 장쉐량에게 만주를 사수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더라도(장제스가 장쉐량의 독자 협상을 금지하고 항전을 지시했다는 점에서 이것 자체가 잘못된 전제지만) 결국 결정은 장쉐량의 몫이었지 장제스가 뭐라고 판단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혁명사관이 국민정부가 군벌들을 통제 못하는 사분오열된 정부라고 비난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앞뒤가 환상적으로 맞지 않는 기묘한 비난이라 하겠다. 한편 장쉐량은 후일 만주사변은 자신의 판단 오류로 인한 참사였다고 일본의 의도를 알았다면 목숨 걸고 싸웠을 것이라면서 대만에서 한탄한 바가 있다.

지금도 이날이면 중국에서 반일 시위가 자주 일어나는 편인데 특히 2012년 9월 18일을 전후한 반일시위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국유화 문제와 국내의 정치적 혼란까지 겹쳐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7. 참고 자료[편집]


  • 중일전쟁(권성욱)
  • 장제스 평전(조너선 펜비)
  • 일본의 전통과 군사사상(하정열)
  • 만주사변기의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남경정부의 대응, 김영신, 원광대학교
  • 쇼와사 전전편, 한도 가즈토시, 루비박스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
  •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사토 요코, 어문학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국방TV 영상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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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사변 뿐만 아니라 이후의 열하사변, 만주의 파르티잔 활동도 나와 있다.[2] 2억 냥 + 삼국간섭 후 랴오둥 반도 반환의 대가로 3천만 냥으로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배였다.[3]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정치 및 재정 고문 등용, 일본 경찰 유입, 일본으로부터의 강제 무기 수입 등의 내용이 담긴 조약으로 일본 자체에서 대놓고(아예 공식 명칭으로) '희망조항'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나가는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의 조약을 받아들인 위안스카이조차 이 조항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4] 오랫동안 류탸오거우(柳條溝, 유조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나 류탸오후(유조호)가 본래 명칭이다. 확실한 원인은 알지 못하지만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의도로 관동군이 일부러 틀린 지명으로 발표했다는 설이 있다.[5] 해석: 너 우리 말 듣고 얌전히 있을래? 아니면 내 칼에 목이 달아나 죽을래?[6] 후의 중일전쟁의 사례만 봐도 무장이 잘 갖춰진 중국군은 항전의지가 뒷받침되는 상황에서 일본군과 1대 1에 가까운 전사자 교환비를 내는 성과를 냈으며 미국의 본격적 지원이 시작된 후반에는 중국군 1대 일본군 3의 교환비를 기록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는 10대 1까지 털리기도.... 전체적으로는 5대 1정도다. 토벌 당한 팔로군들은 미포함이기 때문에 이들까지 고려할 경우 더 큰 차이가 날지도 모른다.[7] 2015년 9월 기준으로 아직 확립이 되어있지 않으며 후일 추가할 예정. 과거에는 해당 판단이 국민정부의 친일성을 강조하였지만 막상 학생들 역시 삼민주의 타도, 국민정부 타도같은 구호를 외치는 단체가 존재하는등 친공적인 성격이 소수 존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