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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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SHIN HUNG MILITARY ACADEMY
파일:20201013_151206.jpg
분류
사립학교, 군사학교
개교
1911년 6월 10일 ,(신흥강습소),
설립자
이회영 · 이동녕 · 이시영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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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강습소
(1911년 6월 10일~1913년 5월)

신흥중학교
(1913년 5월~1919년 5월 3일)

신흥무관학교
(1919년 5월 3일~1920년 7월)

신흥전문학원
(1947년 2월 8일~1949년 2월 15일)

신흥초급대학
(1949년 2월 15일~1952년 12월 9일)

신흥대학
(1952년 12월 9일~1955년 2월 28일)

신흥대학교
(1955년 2월 28일~1960년 3월 1일)

경희대학교
(1960년 3월 1일~ )
 

폐교
1920년 7월 ,(폐교),
재개교
1947년 2월 8일 ,(신흥전문학원),
소재
[ 펼치기 · 접기 ]

청나라 봉천성 류허 현 삼원포(三源浦)
(1911년 6월 10일~1912년 7월)

중화민국 지린성 퉁화 현 합니하(哈泥河)
(1912년 7월~1919년 5월 3일)

중화민국 지린성 류허 현
고산자(孤山子) 하동(河東) 대두자(大肚子)

(1919년 5월 3일~1920년 7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82번지
(1947년 4월 21일~1951년 6월)

경상남도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2가 87번지
(1951년 6월~1953년 10월,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번지
(1953년 10월~ )
 

국가
[[대한제국|

대한제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제국"
행정구
]]
,(명목상),
[[중화민국 북양정부|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북양정부
]][[틀:국기|
]][[틀:국기|
]]
중화민국 ,(소재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1. 개요
2. 연혁[1]
2.1. 신민회의 설립
2.2. 이회영 일가의 만주 망명, 경학사 설립
2.3. 신흥강습소
2.4.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2.4.1. 소배차의 백서농장
2.5. 고산자(孤山子)로의 본교 이전
2.6. 청산리 대첩 참전과 일제의 강제 폐교
2.7. 해방 후 재개교
2.8. 조영식의 인수 과정과 이후
3. 역대 교장
3.1. 재개교 이후
4. 교과과정
4.1. 학과
4.2. 일반교과
4.3. 술과(術科)
4.4. 체육과
5. 교가
6. 후신들
7. 출신 인물
7.1. 가상 인물
8. 기타



1. 개요[편집]


파일:2014081000749_2.jpg}}}
신흥무관학교 교사(校舍)와 재학생
파일:신흥대.png}}}
1950년대 신흥대학 시기의 정문인 등용문(登龍門)[2]



이회영, 이동녕 등이 1911년 6월 10일 만주 삼원보에 설립한 신흥강습소가 발전한 것으로, 신흥무관학교로서 정식 개교한 것은 1919년 5월 3일이다. 사실상 만주, 간도 일대에서의 무장항일투쟁의 초석이 되었던 곳으로 이들은 다수가 독립군의 일원이 되어 각지에서 활약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청산리 전투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거 참여하였다. 30년대 기준으로 졸업생이 3,500명 정도 되었다고 하며 신팔균, 이범석, 지청천 등이 이곳에서 교관을 맡았다고 한다. 의열단 단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원봉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그러나 1920년 일본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이자 잠시 활동을 멈췄다가 1921년 본부를 길림성 액목현(額穆縣)으로 옮겼다. 8.15 광복 이후에는 초대 부통령이시영이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고 1947년 2월 신흥무관학교의 교명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에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했다. 신흥전문학원은 이후 전문학교에서 대학기관으로 승격되어 성재학원 신흥대학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6.25 전쟁을 거치면서 경영난을 겪게 되었고 1951년 5월 18일 조영식이 인수한 뒤 1960년 경희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어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2. 연혁[3][편집]


신흥무관학교 연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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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4월
항일비밀조직 신민회 결성[1]
1910년 3월
신민회 긴급회의[2]에서 국외독립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 결의
1910년 12월
이회영 6형제[3] 등 국외독립기지 선발대로 망명[4]
1911년 2월
이상룡 등 안동의 애국지사들 서간도로 망명
1911년 4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자치기관 경학사 설립
1911년 6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신흥강습소 설립 (1911. 6. 10)[5]
1912년 7월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
1913년 3월
신흥무관학교 교관, 졸업생 등 신흥학우단 조직[6]
1913년 6월
신흥학우단의 기관지 신흥학우보 창간
1915년 1월
쏘배차에 군영인 백서농장 경영
1915년 12월
이주민 통합자치단체 부민단 설립
1919년 3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서 독립축하집회 만세시위
1919년 4월
서간도에 남만주독립운동기관인 한족회와 군정부 수립[7]
1919년 5월
유하현 고산자 하동 대두자에 신흥무관학교 본교 개교
1919년 11월
서간도의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명칭 변경[8]
1919년 11월
김원봉과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길림성에서 의열단 결성[9]
1920년 7월
일제의 탄압으로 신흥무관학교 폐교[10]
1920년 7월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생도, 군인 조직) 안도현으로 이동
1920년 10월
홍범도 부대와 함께 청산리전쟁 참전
1920년 11월
일본군의 보복 학살로 경신참변 발생
1921년 5월
길림성 액목현 대갱자에 검성중학원 설립
1947년 2월
이시영, 해방 후 신흥무관학교 계승한 신흥전문학원 설립
1947년 7월
해방 후 전만주 신흥학우단 신흥전문학원에서 모임 결성
1949년 2월
전문학교에서 대학기관으로 승격되어 재단법인 성재학원[11] 신흥대학 설립
1949년 3월
신흥대학 정규대학으로 승격 인가[12]
1949년 7월
신흥대학 1회 졸업생 배출
1950년 5월
신흥대학 2회 졸업생 배출 [13]
1951년 5월
조영식, 피난지 부산에서 신흥대학 인수 (1951. 5. 18)
1960년 4월
신흥대학에서 경희대학교로 교명 변경[14][15]


2.1. 신민회의 설립[편집]


1907년 국내의 애국지사들이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했다.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신민회는 1910년 12월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열며 국외 독립군기지 장소를 구체적으로 확정짓고 대일 무장투쟁을 공식노선으로 채택했다. 즉 만주 서간도에 신(新)영토로서 토지를 구입하고 여기에 무관학교를 세워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할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각 도 대표들은 지역으로 돌아가 서간도에 갈 이주민과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2.2. 이회영 일가의 만주 망명, 경학사 설립[편집]


가장 먼저 우당 이회영 가문이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망명을 결행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 일부가 이회영 일가가 살던 곳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원(소 값으로 환산) 내지 2,000억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으며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가문에 뒤이어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망명에 앞서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한 석주 이상룡의 예에서 나타나듯 영남의 명문가들이 앞장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경학사의 조직과 신흥강습소의 설립이었다. 이들은 1911년 5월(음력 4월)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대고산(大孤山)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 했다.

2.3. 신흥강습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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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허현 싼위앤푸조선족진 저우지아촌에 위치한 신흥강습소 옛 터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4]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감격적인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이 있었다.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비록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였다.

망명지사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항일독립운동과 그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그것과 직결되는 사업이 바로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따라서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의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처음부터 독립운동 전사들을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2.4.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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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하 신흥무관학교 교사의 3D 복원
1912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봉천부(奉天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5]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 위치는 바로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비로소 서간도 합니하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2.4.1. 소배차의 백서농장[편집]


파일:신흥무관학교1.jpg}}}
신흥무관학교 교사(校舍) 및 학생들의 영농 장면 (1915)[6][7]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은 백두산 서쪽에 있던 봉천성 통화현 제8구(第八區) 팔리초구(八里哨區) 소배차(小白岔, 小北岔)[8]에 군사기지인 백서농장(白西農莊)을 만들었다. 1914년 가을부터 밀림 지역을 벌목하기 시작해 이듬해 수천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군영을 완성했다. 백서농장은 중국 측을 의식하여 농장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사실상의 군사기지나 다름없었다. 백서농장에서는 정예 병사를 기르기 위한 훈련에 주력하고 농사일을 겸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채택했다. 만 4년 간 백서농장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혹독한 군사훈련과 극한상황에서의 경험은 이후 항일 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2.5. 고산자(孤山子)로의 본교 이전[편집]


1919년에는 3.1 운동의 영향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이 넘쳐나자 합니하 지역의 무관학교 시설만으로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턱없이 부족해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유하현(柳河縣) 제3구(第三區) 고산자가(孤山子街) 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大肚子)[9]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기고 기존에 있던 합니하(哈泥河)의 학교를 분교로 삼았다. 이어 통화현(通化縣) 신화향(信禾鄕) 쾌대무자(快大茂子)[10]에도 분교를 두어 모두 세 개의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9년 5월 3일 임시로 빌린 양조장 건물에서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의 본교 개교식을 가지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2.6. 청산리 대첩 참전과 일제의 강제 폐교[편집]



1919년 12월 북간도 지역의 군정부(정의단과 길림군정사의 연합체)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서로군정서(서간도의 군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파견했다. 이후 북로군정서의 핵심 직책을 맡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묘 홍범도 부대의 대한의용군으로 편성되어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이와 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이나 대한의용군의 일원으로 홍범도 부대와 합류하여 청산리 대첩의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일본과 그들의 지원을 받던 만주의 봉천군벌은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제1920년 5월부터 중일(中日) 합동수색을 시작으로 삼원포에서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했으며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부대에 대패한 일본군도 이를 복수하고자 양민학살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앞당겼다. 따라서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결국 1920년 6월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은 잠시 몸을 피하고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400여 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가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1920년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한 '외교독립'의 환상이 깨지면서 민족운동 역량이 강한 만주 지역이 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서간도 군정부도 1921년 5월 본부를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액목현(額穆縣)[11]으로 옮겼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도 독판 이상룡과 부독판 여준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다시 전개하는 한편 이들이 주체가 되어 액목현 황지강자(潢池崗子)[12]에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검성중학원(劍成中學院)을 설립했다.

이밖에도 길림성의 신흥촌에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세우거나 3회 졸업생인 이규동은 길림성 연길도 영안현(寧安縣) 신안촌(新安村)[13]에 신창학교(新昌學校)를 개설하는 등 모교에서 배운 교과목과 교육이념, 그리고 교가까지 신흥무관학교의 것을 따라 하며 그 맥을 이어나갔다.

2.7. 해방 후 재개교[편집]


파일:신흥학우단.jpg}}}
해방 후 신흥전문학원 설립을 자축하기 위해 모인 신흥학우단 (1947)
파일:1253E546501C525D39.jpg}}}
회기역 사거리의 신흥대학 입구 표지판 (1955)
이시영(초대 부통령)은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신흥무관학교의 재건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미군정 아래에서 미흡한 일제 청산과 민족정통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교육이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고 1947년 2월 신흥무관학교의 교명(校名)을 그대로 이어받아 민족교육의 상징인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했다. 이후 신흥전문학원은 1949년 2월 15일 재단법인 성재학원 신흥대학(新興大學)으로 인가받고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1949년 신흥초급대학으로 가인가받을 때의 설립내역이 공개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설 립 내 역

1. 명 칭 : 신흥대학(新興大學)

2.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82

3. 개교년월일 : 단기 4282년 2월 15일

4. 설립자 : 이시영(李始榮)

5. 설립연혁 : 단기 4282년 2월 15일 재단법인 성재학원성립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의거한 고등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신흥대학을 유지 경영함.

6. 설립당시학과개요 :

(1) 법과, (2) 정경과, (3) 영어과, (4) 중어과, (5) 독어과, (6) 불어과, (7) 서반아어과,

(8).노어과, (9) 체육과

7. 참고사항 :

부산피난 당시 문교부에 제출된 학교 현황에 의하면 위의 사실외에 아래사항이 기재되어 있음.

학장 : 이윤영(李允榮)

현항개요 : 시설학과및 학생정원

(1) 법률학과 240명,

(2) 정치학과 240명,

(3) 문학과 160명,

(4) 체육과 160명, 교원수 71명

우당 이회영 기념관 소개

초급대학 시절에는 신흥전문학원 시절 학과들을 주간에 4년제의 체육학부, 야간에 2년제 과정의 외국어학부와 전문부(專門部)로 개편하였는데 전문부에서는 1회 졸업생(1949년), 2회 졸업생(1950년)을 성공적으로 배출했다고 한다.[14] 체육학부에 체육과, 외국어학부에 위의 외국어 6과, 전문부에는 법과와 정경과가 있었다. 참고 다만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화로 모집생 수를 줄였는데 1949년에는 총 1080명[15]으로, 6.26 전쟁 후인 1950년에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150명[16]만 모집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당시 학교측에서 밝힌 학교의 공식적인 창립일은 단기 4244년 6월 10일, 즉 1911년 6월 10일인데 바로 신흥강습소의 개교일이다. #

여기서 외국어 학과가 지나치게 많은 점이 주목할 만한데 이것은 1947년 9월 1일 서울 아현동에 설립된 최초의 외국어 전문학교인 동양외국어전문학원(동양외전)을 신흥초급대학이 1950년 인수하여 해당 외국어 6과의 편제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후 이 외국어 학과들은 개편을 통해 문학과로 이어지게 되며 기존 전문부의 법학과(법과), 정치학과(정경과)와 체육학부의 체육과까지 4개 학과 체제가 성립된 이후 조영식 박사가 인수하여 운영하였다.[17] 아래는 이회영 기념관에서 제공하는 관련 자료이다.

1949년 7월 18일 :

전문부에서 제1회 졸업생 205명 배출

(법과 134명,정경과 71명)

1950년 5월 6일 :

전문부에서 제2회 졸업생 189명 배출

(법과 97명,정경과 92명)

우당 이회영 기념관 소개


2.8. 조영식의 인수 과정과 이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경희대학교/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역대 교장[편집]


  • 1대 이철영 · 이동녕 신흥강습소장 (1911~1912)
  • 2대 이상룡 신흥강습소장 (1912~1913)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경학사 사장, 한족회 회장, 정의부 독판 역임
  • 3대 여준 (1913~?) : 부민단장, 서로군정서 부독판, 검성중학원 교장 역임
  • 4대 이광 (?~1919) :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북경주재외무위원, 해방 후 체신부 장관, 충북지사 역임
  • 5대 이세영[18] (1919~1920) : 주만통군부 군사부장,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3.1. 재개교 이후[편집]


  • 1대 이규창[19] 신흥전문학원장 · 신흥대학 초대 학장 (1947~1952) : 신흥 1기, 순국의열사봉건회 기금관리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감찰위원 부위원장[20]
  • 2대 김인선 학장 (1952.3~1952.5) : 대한국민당(자유당의 전신) 소속 제2대 국회의원 (제주 북제주 갑), 대동청년단 제주도단 단장[21]
  • 3대 이윤영 학장 (1952.5~1953.3) : 평양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민주당 부당수[22], 제헌 국회의원 (서울 종로 갑), 초대내각 무임소장관, 2대 사회부장관, 1952년 국무총리 서리 역임, 1953년 3월 성재학원에서 이연재(李年宰) 이사장과 함께 이사직 해임.[23]
  • 학장 대리 조영식 (1953.3~1954.5) : 이년재와 이윤영이 이사장직과 학장직을 각각 내놓은 후 조영식이 "이사장과 학장 대리직을 싫거나 좋거나 다시 겸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24][25]
  • 4대 조영식 학장 (1954.5~1955.2) : 신흥대학 부학장[26](1953.9~1954.5), 공화민정회(자유당의 전신) 조사국장·사무국 차장 겸 법제사법 전문위원 역임.
1955년 신흥대학을 종합대학인 "신흥대학교"로 승격시키며 초대 총장 역임.

4. 교과과정[편집]


학제는 본과와 특별과(군사과)를 두었다. 본과는 중학교육을 실시하고 특별과는 속성과로서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반 중등과정은 군사교육과 교양교육이 병행되었으며 총 3년 과정이었다. 군사과는 1년 과정으로 군사교육이 중심이었다. 또 군사교육을 담당했던 이들은 대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다수였다고 한다.

1913년 합니하 교사 완공과 함께 4년제 본과, 6개월의 장교반, 3개월의 하사관반, 1개월의 특수훈련반의 체계로 구성하였다. 본과는 3년 중등교육과 1년 군사교육을 합쳐 4년으로 구성되었고 이후 각각 장교와 하사관으로 진로를 택할 수 있었다.

1919년에 고산자로 옮기면서 기존 중학교육 과정은 다른 학교에 위임하고 군사과정에만 집중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름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다.

신흥무관학교를 거쳐간 졸업생은 적어도 2년간은 학교의 명령에 따라 복무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여담으로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은 매우 엄격하여 야간에 비상훈련도 실시하고 취침중 비상나팔로 완전무장을 해야 하는 임전태세도 가르쳤다고 한다.

4.1. 학과[편집]


군사교육의 교과과정에 해당하는데 주요 커리큘럼은
  • 보병
  • 기병
  • 포병
  • 공병
  • 치중(輜重)
의 5개 병과훈련 중 하나의 학과를 선택하는 것으로 구성하였다.

그 외에 내무령, 측량학, 축성학, 육군형법, 징발령, 위술복무, 구급의료, 편제학, 훈련교범, 전술, 전략학 등이 있었는데 이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교과과정으로 신흥무관학교가 이를 잇는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도 하다.

4.2. 일반교과[편집]


본과 중학교육의 교과과정이다.
등의 인문교육과
이학(理學) 교육, 그리고
예체능 교육까지 다양한 교과과정을 제공하였다.

이는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의 쟁취뿐만 아니라 이후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인데 실제로도 8.15 광복 이후 등용된 정부 인사 중에도 신흥무관 출신이 몇몇 있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변영태국무총리외무부장관이다.

여담으로 보통 오전에는 일반교과를, 오후에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4.3. 술과(術科)[편집]


연병장에서 각개교련과 기초훈련을 했고 야외에서는 이 고지에서 저 고지로 가상적에게 공격전과 방어전 등 전쟁연습을 실시.

4.4. 체육과[편집]


유술, 야간도강[27], 통화현 70리 강행군, 빙상운동, 춘추대운동, 격검, 유도, 축구, 철봉 등.

5. 교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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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의 교가

1절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의 영절의[28]

/ 여러 만만 헌원자손[29] 업어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 것들 품에다 품어 /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30]

/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 좔좔좔 결치며 돈다

2절

장백산 밑 비단같은 만리낙원[31]

은 /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 종설움 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 지옥의 쇳문이 온다

3절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 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 자유의 깃발이 떴다

조지아 행진곡의 개사곡이다. 이 교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하나 있는데 이 교가가 폐교 후 만주 각지에서 독립군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같은 곡조의 독립군가로 개사되어 불렸다는 점이다. 즉 신흥무관학교의 교가가 독립군가 가사의 원형을 제공한 셈. 상세 내용은 독립군가 문서 참조.

6. 후신들[편집]


신흥무관학교 및 국외 독립운동단체 타임라인
[ 펼치기 · 접기 ]
신민회
(1907~1911)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1896~1909)

경학사[1]
(1911~1914)
→ 부민단(1914~1919) → 한족회(1919~1920)


신흥무관학교
(1911~1920)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로 군정서[2]
(1919~1922)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무관학교

(1920~1921)
광복군 사령부[3]
(1920~1922)




검성중학원[4]
(1922~1930)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5]
(1924~1929)

대한 통의부
(1922~1924)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1948)
정의부
(1924~1929)

국민부
(1929~1934)

조선민족혁명당
(1935~1938)


신흥전문학원[6]
(1947~1949)

신흥대학
(1949~1960)[7]

대한민국 임시정부 / 한국광복군
(1940~1946)

조선의용대
(1938~1942)






경희대학교
대한민국 정부 / 대한민국 육군

육군사관학교
조선의용군
(1942~1945)
 
 


그야말로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시작이라는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다. 이는 1910년 경술국치의 거의 직후부터 국외에서 투쟁하여 당시 한반도의 상황에 비해 탄압이 적어 세를 키울 수 있었고 교육기관이자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군사학교라는 점도 많은 학생 및 독립운동가를 모집하기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경학사를 위시한 신흥무관학교가 독립 투쟁의 중심으로 자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후신 단체들의 면면을 보면 아예 직접적으로 유관한 단체들[32]만 따져도 정의부, 조선의용대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절반 정도가 그 후신에 해당할 정도다. 이보다는 약하게 연결된 단체들[33] 중 하나는 자그마치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이자 전신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되겠으며 실제 임정 산하 무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고도 한다.

이 외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 졸업생들이 뻗어나간 곳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수백 명의 졸업생들이 김좌진 장군의 남로 군정서에 합류하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으며 김원봉, 나석주 등이 의열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주요 단체들만 열거해도 대한독립군단, 한국 독립군, 신민부, 고려혁명군, 주만통군부 등등 무수히 많으며 이들 졸업생들의 대부분은 8.15 광복 이전까지 계속 투쟁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이에 따라 현재 신흥무관학교를 직접적으로 잇는 단체는 기능과 역할 면에서 크게 경희대학교,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 정부/대한민국 육군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이 세 단체는 신흥무관학교 110주년 기념 후원기관들을 기준으로 현재에 어느 정도의 계승 의식을 갖는 단체들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이외에 역사적 연결성이 있는 용인대학교를 포함하면 네 가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6.1. 경희대학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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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신흥대학 터" 비석
신흥무관학교와 경희대학교 간의 관계를 두 문장으로 압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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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교 당시 신흥대학의 모집공고
창립일과 법적 설립일을 구분하여 창립일에 신흥무관학교의 개교년도인 단기 4244년(1911년)을 적고 설립일에는 단기 4282년(1949년)을 적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육기관 측면에서의 후신이자 가장 직접적인 후신경희대학교다. 8.15 광복 후 원 설립자 이시영1947년에 "신흥전문학원"이라는 학술 전문대학으로 재개교하여 교육기관으로의 역할을 직접 승계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가 직접 재개교하였기 때문에 1949년 당시의 신흥대학은 모집 공고 등에서도 엄연히 신흥무관학교의 후신 학교임을 명시하였다.

신흥전문학원은 당시 문교부의 승인으로 1949년 초급대학인 신흥대학으로 승격되었는데 1951년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에 소속되어 있을 때 자금난으로 조영식 전 경희대 총장이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인수하도록 하였다. 이후 신흥대학은 1955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60년 '신흥'이라는 명칭이 속되다는 이유로 경희대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초급대학 이전 역사는 사라졌다.[34] 그러나 많은 졸업생들이 경희총민주동문회를 구성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이을 것을 학교에 요구하는 등 연혁 회복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으며 경희대 학우들이 교내에 신흥사(史) 복원 청구 대자보를 게재하는 등 재단과 졸업생 및 신흥무관학교 기념회 간의 연혁 논란은 70년에 걸쳐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2018년 이후 경희대학교 학내에서 신흥무관학교와 관련한 의제의 공론화가 많이 이루어졌고 재학생 대표기관인 총학생회와 졸업생 대표기관인 총동문회가 서로 만나 신흥무관학교를 경희대학교의 역사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경희역사 교육을 위한 협약식을 체결하였다. 경희대 재학생·졸업생들이 ‘신흥무관학교’ 이름으로 뭉친 이유는? 이후 이들 단체들은 경희대가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특강 개최, 경희역사연구소 건립 등을 추진하는 등 경희대학교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연결성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다만 이후에도 대학본부 측의 큰 입장 변화는 없었고 1949년 개교를 기준으로 하는 개교 70주년, 72주년 행사를 모두 진행하며 묻히는 듯했다. 그러던 중 2021년에 전향적으로 신흥무관학교 110주년 기념 공모전에서 후원기관으로 (총동문회 등 유관단체가 아닌) 직접 "경희대학교"의 이름을 올렸고 시상에서도 상금 200만원 상당의 "경희대학교 총장상"을 한균태 총장의 명의로 수여하기로 하였다. 이를 통해 본부 측의 입장이 과거의 완고한 입장에 비해 크게 바뀌었음을 볼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경희대의 신흥무관학교 역사 인정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길 것으로 기대된다.

6.2. 육군사관학교[편집]


군사학교로써의 측면은 육군사관학교를 후신 단체로 볼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의 후신 격인 학교였다. 실제로 육군무관학교 졸업생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학생들을 교육했다. 신흥무관학교의 강제폐교 이후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육군무관학교로 이어졌고 다시 이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지만 무관학교의 줄기는 계속 이어져 왔다. 8.15 광복 이후 미군정 산하의 군사학교로써 국방경비대사관학교가 1946년 5월 1일 개교했는데 임시정부 요인 및 다수의 무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그 적통성을 이어가려고 했다. 이는 이후 육군사관학교로 개편되는데 육사는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이전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이례적으로 육사의 뿌리찾기를 실시하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육사의 공식적인 역사로 편입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육사의 뿌리는 신흥무관학교", 70년만에 육사 찾은 독립운동 후손들

그러나 2023년 8월 24일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을 촉발해 신흥무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가 별개의 역사를 잇는 학교임을 스스로 자처하였다.

한편 육군사관학교의 건립에 많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들어갔던 역사상의 배경을 들어서 직접적인 후신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반론도 있는데 역사적 연결성과 계승되는 의식이 희미한데 무리하게 엮으려고 한다는 지적이다. 건군 이래 계속되어 왔던 군의 일제 잔재 일소를 위한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6.3.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육군[편집]


범위를 확장하면 기관 및 단체의 측면에서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육군을 후신으로 볼 수도 있다. 신흥무관학교의 재단 격인 한족회(韓族會) 산하의 군기관인 군정부(軍政府)는 임시정부 출범 이후 임시정부 산하기관인 서로 군정서로 개편되며, 이는 다년간의 이합집산을 거쳐 다시 참의부(육군주만참의부)로 개편되었다. 한족회 자체도 여러 번의 개편을 통해 조선의용대의 성립으로 이어지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조선의용대가 다시 합류했다. 따라서 중추기관의 측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독립군 등 군기관의 측면에서는 한국광복군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게 된다. 이후 8.15 광복을 맞이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신임을 대한민국 헌법 등에 명기하였고 군기관인 대한민국 육군에서는 한국광복군을 계승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만약 신흥무관학교의 운영 주체, 즉 재단의 역사도 포함시킨다면 이와 같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또 신흥무관학교의 모태가 된 단체인 신민회구한말 항일 단체 중에서 최초로 민주공화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는데 이것이 경학사·신흥무관학교를 위시한 간도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거쳐 그 소속 인물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연결되었으니 신흥무관학교와 임시정부의 연관관계는 단순히 독립운동 단체들의 이합집산에 따른 결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민주공화제 대한민국의 직접적인 역사적·사상적 연원이 되는 적통이라고 할 만하다. 육사를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이라고 끼워맞추려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6.4. 용인대학교[편집]


의외로 용인대학교와도 제법 접점이 있다. 우선 용인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유도학교를 살펴보면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을 지냈으며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이 1953년 6월 15일 설립하고 초대 학장으로 재임하였으며 이범석 본인이 신흥무관학교에서 가르쳤던 체육 과목들(유도, 태권도 등)이 초기 대한유도학교의 학과 편제와 교과과정을 편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대한유도학교가 1993년 개칭한 용인대학교 역시 역사성과 커리큘럼 계승의 측면에서 상당한 접점이 있다고 할 만하다. 역사성에서는 오히려 최근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임을 강력히 주장하는 육군사관학교보다도 정통성 있다

그러나 용인대학교는 위의 세 단체의 경우와는 다소 다른 것이, 창립 초기에도 딱히 신흥무관학교와의 관련성을 강조하지 않았고[35] 무엇보다 현재에도 관련성을 거의 주장하지 않는다. 신흥무관학교 관련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으며 110주년 행사에서는 경희대학교, 육군사관학교, 국가보훈처만 후원하였다.

이범석은 조선유도협회(현 대한유도회) 회장으로서 대한유도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족청계 축출 압박으로 1953년 10월 1일 학장직을 사퇴하고 1954년에는 대한유도회 회장직을 사임했으며 1956년에는 학교의 재단마저 대한유도회에서 대명학원(현 단호학원)으로 바뀌어 당시의 경희대학교와 비슷한 흐름으로 가면서 신흥무관학교와의 계승의식은 사라져갔다고 볼 수 있다. 아예 직접적 전신인 경희대마저도 의견이 갈려 계승에 난항을 겪는데 간접적 전신인 용인대학교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7. 출신 인물[편집]


  • 이규창 - 신흥전문학원장 · 신흥대학 학장, 순국의열사봉건회 기금관리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감찰위원 부위원장, 이시영의 장남 (신흥 1기, 1911년 졸업)
  • 변영태 - 제5대 국무총리 (신흥 1기, 특과[36], 1912년 졸업)
  • 채찬 - 이명 백광운. 대한통의부 중대장, 사이토 총독 습격 시도 (군사과, 입학 및 졸업년도 미수)
  • 나석주 - 의열단 단원,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 의거 (1917년 졸업)
  • 이규동 - 대한혁명군 복무, 만주에 후신 학교인 신창학교 설립 (1915년 졸업)
  • 문창숙 - 참의부 중대장. 국내 잠입 작전 도중 순국 (군사과, 1919년 졸업)
  • 권준 - 조선의용대 비서장 (군사과, 1919년 졸업)
  • 오광선 - 서로 군정서 중대장, 대한독립군단 대대장, 오희옥 애국지사의 부친. (군사과, 1919년 졸업)
  • 김원봉 -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 다수의 독립 운동 조직 수립에 참여한 대표적 독립운동가. (군사과, 1919년 입학, 수학 중 자퇴)
  • 김산 - 본명 장지락. 시인, 사상가, 자서전《아리랑》의 주인공 (속성과(하사관반)[37], 1920년 졸업)
  • 신한승 - 태껸 인간문화재 제1호, 태껸 무형 문화재 지정 공헌. (신흥대학 1기, 체육학과, 1951년 졸업)
  • 김좌진 - 대한독립군 소장, 대한광복회 부사령관, 청산리 전투 지휘관 (교관)[38]
  • 지청천 - 광복군 총사령관 (교관)
  • 이범석 - 초대 국무총리 (교관)
  • 신팔균 - 대한통의부 총사령관 (교관)
  • 김도태 - 교육인. 오산학교 등 근무 (교관)
  • 문형순 - 국민부 중앙호위대장. 해방 후 경찰관 재직 (1919년 졸업)
  • 이건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 이석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한 가산 처분으로 유명한 분.
  • 이철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교장으로 재직함.
  • 이회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항일구국연맹 의장
  • 이시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광복 이후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에 당선. "신흥전문학원" 재개교 설립자.
  • 이호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북경에서 독립 운동을 이어감.
  • 이동녕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임시정부 국무령 · 주석에 재임.
  • 이상룡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한족회 총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임시정부 3대 국무령에 재임.
  • 문일민 - 독립운동가. 1919년 7월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후 한족회 명령으로 국내에 침투 작전을 펼침

그 외에 수 많은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있지만 개별 문서가 충분하지 못하여 모두 적지는 못하였다.

다른 신흥무관학교 출신 혹은 관련자는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7.1. 가상 인물[편집]


  • 속사포 (조진웅 扮) - 영화 암살 등장. 본명 추상옥.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점 내 암살 작전[39] 도중 순국 (1920년 7월 졸업)
  • 동규 (지창욱 扮) -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등장. 경술국치에 자결한 유생의 아들로 등장.
  • 팔도 (강하늘 扮) -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등장. 이회영이 거둬 키운 아이로 등장.
  • 나팔 (이태은 扮) -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등장. 대한제국군 해산 당시 홍범도 부대 주둔지에 거주하던 아이로 등장.
  • 혜란 (임찬민, 신혜지 扮) -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등장. 마적단이 데려다 키운 조선 아이로 등장.

8.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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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등장인물인 속사포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나왔는데 속사포 역을 맡았던 배우 조진웅이 신흥무관학교를 널리 알린 점을 감사하는 의미로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측에서 홍보대사로 위촉하였다.[40]

명당(영화)에서 맨 마지막 장면에 쿠키처럼 언급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1] 출처: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2] 현재 경희대학교의 정문이기도 하다. 양쪽 명패에 新興大學校(신흥대학교), 新興大學校大學院(신흥대학교 대학원)이라고 적힌 것이 보인다.[3] 출처: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4]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 저우지아촌(鄒家村).[5]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퉁화현(通化縣) 광화진(光華鎭) 광화촌(光華村) 제7촌민소조(第七村民小組).[6] 사진 왼쪽에 당시 무관학교 건물이 어렴풋이 보이는데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낮에는 군사훈련 및 영농(營農) 교육을, 밤에는 학문을 탐구하는 등 주경야독했다고 한다.[7] 소배차에서 백서농장 경영을 시작한 시점이 1915년이고 사진 속 백서농장에서의 영농교육은 1919년을 전후로 끝을 맺었으므로 이 사이인 1915~1919년으로 추정된다.[8]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량수이허즈진(凉水河子鎭) 샤오베이차촌(小北岔村).[9]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구산즈진(孤山子鎭) 다두즈촌(大肚子村).[10]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퉁화현(通化縣) 콰이다마오진(快大茂鎭).[11]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자오허시(蛟河市).[12]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자오허시(蛟河市) 난강즈향(南崗子鄕).[13]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海林市) 신안조선족진(新安朝鮮族鎭) 신안촌(新安村).[14] 참고로 체육학과 첫 졸업생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8월에 나왔다.[15] 체육과 120명, 영어과 240명, 중국어·불어·서반아어 각 120명, 법과· 정경과 각 120명 등[16] 영어과, 중어과, 체육과 각 50명씩[17] 조영식 박사 인수로 학과 개편이나 지나친 통폐합이 있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조영식 박사는 학교 운영 등에서 가능한 한 신흥의 시스템을 이어갂는데 이는 당시 유일무이한 체육학과의 존재가 그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조영식 박사가 일본 도쿄체육대학 유학생이라 그때의 경험에 따라 체육학과가 있을 뿐이라는 얘기도 하지만 당시 학과 등으로 미루어 본 상황상 근거 없는 얘기에 가깝다.[18] 충무공 이순신의 12대손이다. 그 외에도 충무공의 후손 중에는 독립운동가가 많다.[19] 이시영 부통령의 넷째 형 이회영의 삼남[20] 해임이 문교부로부터 정식 승인된 것은 1952년 12월의 일이지만 1952년 3월경부터 이미 학장 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21] 김인선과 이윤영 학장은 성재학원 재단의 불법장악 문제로 문교부에서 학장직을 정식 승인받지 못하였다.[22] 두 단체의 위원장과 당수를 생각하면 광복 이후 줄곧 조만식의 심복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만식의 사후 줄곧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한국어 위키백과 이윤영 문서[23] 다만 1960년 신흥대학 임대차계약서 임차인 논쟁이 있었을 때 단기4287년(1954년) 2월 26일 당시 임차인 명칭이 "신흥대학장 이윤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눈여겨 볼 만하다. #[24] 경희20년편찬위원회, 『경희20년』, 1969, 30-31쪽[25] 다만 위 책은 주관적으로 서술된 면이 있어 다분히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책에서는 조영식 총장이 학장·이사장직에 1951년 5월 18일부터 겸무했다고 설명하지만 성재학원 법인 등기부(고유번호 1101-1912-228337)에서는 1951년 7월 조영식과 김인선이 이사로 첫 재임한 기록이 전부다. 인용문에서의 "다시" 겸무하게 되었다는 말은 그 의미이며 해당 부분은 그냥 재단에 영향을 끼쳤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봐야 할 것이다.[26] 인사, ≪경향신문≫ 1953년 9월 28일. 『해방 이후 신흥무관학교 부흥운동과 신흥대학 설립』을 쓴 이계형 원장은 해당 신문을 인용하며 "이전에 부학장제도가 없다가 이때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고 주장했다.[27] 엄동설한에 실시했다고 함.[28] 서북쪽의 흑룡강과 태원지역, 남쪽으로는 영파와 절강지역의[29] 중국 신화 속 인물 헌원의 자손=중국인[30] 가사가 만들어질 당시 고조선/단군의 나라를 일컫는 말로 추측된다. 환단고기에서 단군의 '단'을 박달나무 단 자라며 박달나무> 배달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는데 단군의 단은 다른 한자다.[31] 전해지는 바에 따라 만주낙원이라고도 부르며 당시 신흥무관학교의 주축이었던 단군교 신도들은 현재의 백두산은 '백두산', 바이칼 고원은 '장백산'이라 부르며고 바이칼 일대를 잃어버린 배달조선의 북방영토로 여겼다. 바이칼에서 제주도까지가 딱 만리다.[32] 재단 역할인 "한족회"가 이어진 경위[33] 한족회 소속 군정부가 서로 군정서로 이어진 경위[34] 당연히 이는 어마어마한 반발을 낳았다. 교명 변경과 신흥무관학교 역사 삭제 이듬해인 1961년에 무관학교 졸업생 동문회인 신흥학우단, 독립군 유가족 협회인 한족(韓族)혁명선열유가족후원회 등이 조영식 총장 규탄 공동성명을 내게 하는 그야말로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고 할 수 있다. 관련 자료[35] 이는 물론 이시영의 신흥초급대학이 이미 존재함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36] 당시 신흥강습소는 일반교육 과정의 본과와 1년 속성 과정의 특과로 분리되어 있었다. 본과는 청소년의 일반 교육과 기초훈련을 담당했다. 윤기섭, 장도순, 이규봉 등이 교사였고 특과는 전문적인 군인 양성 과정으로 이관직, 이장녕 등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장교가 교관이었다. 특과는 당시 만주에 군사교육을 담당할 교관이 부족했기 때문에 중학 과정을 마친 청년과 성인에게 군사 훈련을 받게 하여 지휘관, 교관 또는 기초 군사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교사로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이를테면 특과 졸업생 변영태는 국내에서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만주로 망명했기 때문에 본과 과정이 없이 특과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신흥중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성주식도 특과 졸업 후 신흥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2년 말에 배출된 11명의 특과 졸업생이 만주 군사교육의 효시라고 하는 것도 이들을 통해 본과 과정의 생도에게 군사 교육을 할 수 있는 재생산구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특과는 1기를 끝으로 마감되었다. 이후 중학과정(명칭도 신흥중학교)의 본과 3년 뒤에 1년의 집중 군사훈련 과정을 두어 신흥무관학교의 4년제 교육 체계가 완성되었다.#, 이정규, <우당 이회영 약전>, <<우당 이회영 약전>>, 을유문화사, 1987, 49쪽. [37] 당시 15세로, 18세 이상 입학기준을 충족하지 못하였으나 700리를 걸어서 학교에 왔다는 것이 알려져 수업료 면제에 3개월 속성반으로 특별입학하게 되었다.[38] 김좌진의 재직 기록은 없지만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는 한족회 산하의 군기관인 군정부(軍政府)에 1918년 12월 부임한 기록이 있고 육군무관학교 선배인 이세영이 당시 교장으로 재임하여 서로 만났다는 바 있으며 북로군정서에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였기 때문에 북로군정서 편성 전까지 신흥무관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 무엇보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대부분이 폐교 후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 보면...[39] 극중 간도참변을 주도한 일본제국 육군 제19보병사단의 사단장이자 조선주둔군 사령관으로 등장하는 "가와구치 마모루"와 친일반민족행위자 "강인국"이 그 타깃이다.[40]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50811.99002002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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