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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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대표적 이론들
2.1.1. 반론
2.2. 고대: 만선사관
2.3. 고대: 타율성론(반도사관)
2.3.1. 반론
2.4. 중세: 정체성론
2.4.1. 반론
2.5. 중세: 당파성론
2.5.1. 반론
2.6. 근대: 식민지 근대화론
2.7. 기타
3. 폐해
4. 어떻게 볼 것인가
5. 주요 식민학자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식민사관()은 지배 국가가 식민지를 정신적으로 굴복하게 만들기 위해 식민지의 주민들에게 역사를 식민지 주민에게 가르쳐서 세뇌 목적으로 만든 역사 관점이다. 대한민국북한에서는 주로 일제강점기일제가 한국사를 대상으로 만든 사관을 가리킨다.

현재 친일 식민사관에 경도된 일부 사람들(뉴라이트)이 식민지 근대화론 등을 주장하지만, 이들은 역사학계의 주류 관점이나 역사교육계 전반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도 역사학계에서는 전혀 그러지 않으나 자민당 일당 독재로 대표되는 일본 정치권과 일반 대중(주로 우익 성향) 사이에서는 만선사관의 영향으로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간주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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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펴낸 조선사
조선사편수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세운 친일 어용 기관으로, 자연스럽게 <조선사>는 정치적 편향성을 띌 수 밖에 없었다. 서문을 읽어보면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일제가 정치적 의도로 집필한 책인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가 망한 뒤 세종대왕~문종 때 "고려사"를 펴냈듯이 조선(대한제국)이 망한 뒤 전대의 왕조로서 펴낸다는 명분은 있었다.[2]


2. 대표적 이론들[편집]



2.1. 고대: 일선동조론[편집]


"일본과 조선의 뿌리는 같다"는 이론으로, 일본 침략의 정당성을 고대사의 오랜 연원에서 찾는 논리다.


2.1.1. 반론[편집]


궤변에 불과하다. 애초에 인종적인 혹은 혈연적인 뿌리가 비슷하다고 해서 오랜 시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살아온 서로 다른 두 집단이 합쳐져야 할 당위성은 전혀 없다. 이렇게 따지면 영국,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모두 게르만족 내지는 바이킹의 혈통적 연원을 공유하고 있으니 이 국가들은 모두 (그것도 가장 경제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강한 국가가 지배하는 형식으로) 합쳐져야 하는가? 더 적나라한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의 토종 유대인[3]과 아랍인은 서로 너죽고 나살자며 싸우지만 혈통상으로는 셈족으로 동일하다. 이처럼 인종의 유사성과 민족적 정체성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또한 한국인일본인의 생물학적인 유사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한반도의 여러 국가와 일본에서 세워진 국가(들)이 명확히 분리된 것은 적어도 초기 삼국시대 이전이며, 이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보다도 이른 시점이다. 한반도의 민족집단과 일본의 민족집단은 1900년대까지 거의 1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를 타자로 인식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면, 일선동조론의 근간이 되는 양국의 "동질성"은 일본이 제국주의를 적극적으로 체화하면서 고안해 낸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허황된 상상일 뿐이다.


2.2. 고대: 만선사관[편집]


"만주와 한반도가 단일한 역사, 문화적 지역이었고 한반도는 만주에 종속됐다"고 보는 관점이다.[4]

일제의 만주 진출에 학문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다. 그런데 조선의 간도 지배설을 진짜로 믿는 사람이 조금이지만 있고[5], 심한 경우 고구려 시대의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넓은 국토를 지닌 군사적 강대국, 다시 말해 위대한 고대사를 말해야 비로소 식민주의 역사학에서 탈피한다는 강고한 믿음이 오히려 식민주의 역사학의 사유인 것이다.[6]

본래 만선사관에선 일제는 고구려, 발해를 만주 세력으로 분류했으며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한반도 세력의 후손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만선사관에 따르면 (대부분의 한국인 입장에서) 고구려, 발해는 한반도에 지배력을 행사한 외부 정복 세력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만선사관을 끌어오되 만주 세력의 구성원을 한반도 세력과 동일시함으로서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수정한게 바로 현대의 '위대한 고대사 타령'이다.


2.3. 고대: 타율성론(반도사관)[편집]


"지정학적으로 반도 국가인 한국 역사는 대륙과 해양세력, 즉 중국과 일본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었다"는 이론.

한반도 북부의 역사는 중국인 위만의 집권과 한사군의 설치로 시작되었고, 한반도 남부의 역사는 고대 일본의 지배[7]를 통해서 시작된 것으로 왜곡하여, 한국을 근본 없는 놈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반도의 주변에서 받게 된 압력과 영향을 모조리 '한민족이 타율적이기 때문이다'라고 규정하는 식이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조선인의 전쟁 동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배포된 내선 일체론 또한 임나일본부설을 비롯한 타율성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2.3.1. 반론[편집]


이것은 인류가 당연히 서로 교류하게 되는 상황을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기면 이라크, 이집트, 인도, 중국 등 그 어떤 문화권이든 문명 초기부터 최근까지 온갖 오랑캐와 정복왕조와 열강에 짓밟히고 털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대역사를 19세기 말에 등장하는 민족국가 개념으로 왜곡하고 있는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민족이라는 개념은 흐려지고 사람들의 집단으로 이주하는 수준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8] 단순히 중국인 위만이 한국인들을 지배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거기에다가 위만은 고조선식 의복과 머리를 하고 왔으며 그 이후에도 국호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위만은 한국을 좌지우지한 중국인 침략자가 아닌 연나라계 고조선인[9]이다.


2.4. 중세: 정체성론[편집]


"한국 역사에는 진보가 없다"는 이론. 여기서 '정체'란 자아를 뜻하는 게 아니라 "느리다", 즉 '교통정체' 할 때 그 정체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중세 부재론이 있다. 또는 봉건사회 결여론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일본의 역사학계는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시대구분론을 적용한 소련 주도의 세계사적 발전법칙에 영향을 받아 동아시아 역사의 시대를 구분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를 소위 유물사관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마르크스가 유럽역사를 보고 사회의 노동력 성격을 기준으로 시대를 크게 5가지로 구분한 것인데, 이에 따라 역사를 원시공산제 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농노/봉건제 사회, 근대 노동자/자본주의 사회, 공산주의로 나눈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토대로 당시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볼 때, 한국은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노예' 신분인 노비가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미 종전부터 사회의 주 노동계층이 노예인 상태로 구한말까지 지속되었으므로 수 천년간 경제생산 및 사회구조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학자들은 조선사회는 수천년간 봉건 및 중세사회로 진입하지 못하여 일본의 에도 막부전국시대처럼 확실히 중세의 봉건제로 치환할 수 있는 시기가 없다, 즉 "한국역사에서는 봉건사회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 외에 조금 마이너한 형태도 있다. 이 인간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사에는 무인(武人)이 왕위를 찬탈한 적은 이성계역성혁명뿐이므로 일본사와 비교했을 때 중세가 없다고 볼 수 있단다. 이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 역시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메이지유신을 비롯한 여러 개혁을 시도하면서 유럽 열강과 자기들을 동일시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연구하며 동아시아에서의 우월감을 강조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사무라이=봉건기사론, 바쿠후(막부)=의회론 등이다. 일본의 세계사적 발전 틀은 강조하며 단지 무인집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선 양반 체제를 폄하했던 것.

어느 쪽이건 조선은 고대이고, 일본은 중세를 거쳐서 근대에 진입한 국가이므로 수준의 차이가 난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조선은 스스로 역사적 발전을 통해서 중세로 진입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내용.


2.4.1. 반론[편집]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는 고려시대를 중세, 조선시대를 근세로 규정하면서 이를 비판하고, 정체성론에 대항하기 위해 내재적 발전론을 통해 한민족의 주체적인 발전이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맹아론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근대 태동기라는 시대적 구분이 존재하며 한국근현대사과목에서도 본격적인 근현대사를 다루기 이전에 근대의 태동이라는 단원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그런데 굳이 역사의 흐름을 반드시 고대, 중세, 근대의 틀로 규정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서양사관의 아류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고려시대를 고려시대라고 하면 되지, 왜 굳이 중세라는 서양개념에 때려맞출 필요가 있느냐는 것. 다만 이러한 왕조사적 시대구분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순환론적 역사관의 함정에 빠지게 되므로 근본적인 문제가 있고, 그렇다고 아직 고대-중세-근대의 3시대 구분법을 대체할 만한 확실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편 종교에 기반한 귀족중심적 국가 체계는 다양한 부족들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중심으로 연합을 했던 고대 국가 체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 구분을 단순히 서양 중심의 역사관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서양적인 관점에서의 '중세 봉건제'의 모습은 애초에 카톨릭 문화권 중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일각에나 들어맞는 것이고, 당장 프랑스 바로 옆의 신성로마제국이나 스페인 만 해도 이들의 사회상과는 일정한 차이점이 있었다. 게다가 그 중요한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이탈리아만 해도 사회적으로 고대 이래의 공화정적 도시국가 전통이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상태였다(베네치아 공화국이라던가). 특히 이런 점에서 근래 주목받고 있는 게 동로마 제국의 사회상이다. 하물며 폴란드나 헝가리와 같은 동유럽의 역사는 어떨까? 즉 일국사에 기초한 정형화된 틀로 중세를 해석하는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일본은 에도 막부의 봉건제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넘어가는 구도가 봉건제의 중세→자본제의 근대로 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10] 고중근 역사관을 덮어씌우기가 쉽지만, 세계의 역사를 획일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더욱이 조선 왕조는 관료제 사회였으므로 정치체제만 놓고 보면 근대 국가로 봐도 될 정도다.[11] 즉 획일화된 잣대를 들이민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일본이 근대화를 하게 된 배경은 자산가 계급의 자발적인 각성과 시민 운동이 아니라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끌어낸 개항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후에 자산가들이 주가 되어 의회를 구성하기도 했지만 막부 체계를 붕괴시키고 나서 귀족 체계를 모방해 도입함으로써 만민 평등에 기반하는 서양의 시민 사회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재산 수준에 따라 차별적인 투표권을 부여해 어정쩡하게 모방한 수준에 그치게 되었다.

당장 그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것을, 왜 현실은 그렇지 못한가"하고 개탄한 현실이 당시 일본 사회가 실질적인 불평등 사회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되려 당시 일본은 근대가 아니라 근대와 중세의 중간 쯤에 있었고, 다이쇼 시대를 거치고 나서야 근대적인 평등주의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패전에 이르고 만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게 된 일본의 내재적인 요인 역시 충분한 것은 사실이다. 이 부분은 본 식민사관 문서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메이지 유신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사실 백번 양보해 이게 사실이라 해서 이것이 일본 제국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해줄 수는 없다.이는 식민사관의 다른 관점에도 적용된다.이것은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자연주의의 오류에 해당한다.

2.5. 중세: 당파성론[편집]


"조선인은 항상 분열하여 당파를 만들고 서로 싸운다"는 이론.

삼국시대에는 3국으로 분열되어 싸우고, 고려 때는 호족으로 분열되어 싸우고, 조선 때는 붕당으로 분열되어 싸운다는 논리. 특히 '조선왕조는 내내 당파 싸움질만 했다'는 주장은 정체성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2.5.1. 반론[편집]


우선 삼국시대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스스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북부지역까지만 미쳤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 등 다른 고대국가들은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았으며, 이후의 신라와 백제도 마찬가지다. 기록상 삼국 간에 통역사 없이 소통한 것으로 보아 언어는 매우 유사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만, 이들 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때로, 남북국시대 이후 남국에서는 구백제, 구신라, (신라에 포함된) 구고구려 정체성을 통합한 "신라인"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백년이 지나 동화가 불완전한 시점에 신라의 국력이 쇠락해 재차 후삼국시대가 벌어졌고, 이를 수습한 고려왕조는 신라가 했었던 삼한일통을 다시 했음을 천명하고 그 노선을 이어받아, 비로소 구삼국유민의식을 초월해 현대까지 이어지는 단일의식 정체성이 정립된 것은 고려시대 중기로 추측한다. 중국의 경우 자국의 문자를 한자(漢字, 한나라의 글자)라고 부르고 삼국지에서 유비 정통론이 등장한 것이 원나라 때인데, 이는 몽골의 지배를 당하면서 역으로 우리 민족(한족)이라는 정체성이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도 마찬가지로 고려의 통일과 원나라와의 항쟁을 거치면서 정체성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간의 싸움을 당파싸움이라고 볼 수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 이전에 일본인들 간에 피터지게 싸운 것도 당파싸움인가? 심지어 얘네들은 칼가지고 싸웠다.

물론 붕당이 완벽한 체제는 결코 아니었고, 식민사관과 무관하게 붕당의 단점과 폐해를 지적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에 대해선 붕당 문서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중요한 것은, 파벌이라는 정치의 보편성과 여기에서 비롯된 붕당의 모습을 마치 '한민족의 특성' 수준으로 폄하했다는 것이 이 당파성론의 문제점이다. 정치에서 당파가 안 생기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12] 독재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다른 주장을 모두 묵살하더라도 그 밑에서 파벌 싸움은 항상 일어난다. 세상 어디에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당파를 유독 한국역사에서만 생기는 악습으로 왜곡하는 논리는 사실 어처구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조선왕조 정치를 말하면 "전하~ 아니되옵니다~" 수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조선사에서 폐해가 심했던 시기는 붕당이 완전히 붕괴된 시점인 세도정치 시기였다. 붕당일 때는 오히려 건강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민주당과 공화당이 싸우는 미국이 건강한 사회인가? 조선로동당 하나로 당파싸움이 전혀 없는 북한이 건강한 사회인가?

한편 당파 싸움을 비난하는 일본도 한국사보다 파벌싸움이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 유명한 사무라이들도 사실 막부시대 이전 천황과 대귀족간 권력다툼 와중에 정적에게 살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생긴 보디가드가 원조였다. 사무라이들이 천황과 귀족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 때 미나모토가와 다이라 가로 나뉘어 싸우고, 나중에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북조와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로 나뉘어 싸우고, 무로마치 막부의 힘이 약해지니까 각 지역 영주들끼리 싸우고, 히데요시가 교통정리좀 하나 했더니 히데요시의 잔당과 도쿠가와파로 나뉘어 싸웠으며, 에도 막부 이후에는 막부파와 유신지사파로 나뉘어 싸우고 유신지사파도 사쓰마와 조슈로 나뉘었다. 그 이후 군국주의 일본제국 시절에도 육군과 해군으로 나뉘어 파벌싸움질하다 사이좋게 미군에게 망했다. 좀 삐딱하게 꼬아보자면 일본의 역사는 파벌싸움질로 시작해서 파벌싸움질로 끝났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결국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이라는 국가보다 자기가 속한 번국에 대한 소속감이 더 강했다. 중앙집권화 경향이 강했던 한국과는 반대로 지방분권화가 대세였던 셈. 임진왜란 당시에도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카가 서로 싸운 것은 유명하며, 에도 시대 이전까지의 일본은 그야말로 자기가 일본의 천하인을 노리고 영주들끼리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일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일본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역사 내내 이어져오는 파벌싸움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한국은 아무리 당파싸움이 심하다 어쩌다 했어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과 일본의 대기업간에 기업 파벌문화가 비교된적이 있었는데, 한국 대기업은 기업 소속의 파벌들이 기업 전체의 이익을 위해 대체적으로 협력하는 반면 일본 기업은 기업내 파벌들이 기업 전체의 이익은 제쳐두고 자기 파벌의 경영권 장악을 놓고 다투기만 한다고 일본인들 스스로가 깠다.

다른 나라만 보더라도 영국에서는 찰스 1세 재위 시절 의회파와 왕당파로 갈려 올리버 크롬웰청교도 혁명(내전)이 벌어졌고 미국도 건국 초기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 간의 대립이 나중에 남북전쟁으로 터졌고 프랑스말 할 것도 없다. 심지어 고대 로마옵티마테스포풀라레스의 대립 등 당파 싸움이 내전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었고, 내전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반면 조선은 최소한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당파 없이 협력했고, 당파 싸움이 전쟁으로 치달은 것은 무신년란(이인좌의 난) 정도다.

2.6. 근대: 식민지 근대화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식민지 근대화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7. 기타[편집]



3. 폐해[편집]


위와 같은 주장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있다.[13]

해방 이후 민족주의 사관을 이끌어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 계통보다는 오히려 이병도를 위시한 실증주의 계통이 많다.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학설의 체계성이 비교적 떨어져 의의는 높게 사더라도 학문적으로는 많은 비판이 있는데, 독립운동과 광복 직후 정치 격변기에 엮여 학자 자격의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14]이다. 물론 누구누구가 말하는 것처럼 실증주의 계통이 반민족적이라는 이야기는 죽어도 아니다. '식민사관의 극복'은 일본의 개드립을 묻어버리는 고고학적 발견과 문헌 실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식민사학에 반대하기 위한 민족주의적 성향은 유사역사학, 환빠들처럼 자신들이 마치 역사에 정통한 것마냥 행패부리는 이들이 등장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민족주의적인 기준에 안맞거나 자기에게 눈에 가시 같은 학자를 앞뒤 안 가리고 이단 취급할 뿐만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관 사학자들이 한반도의 진실된 역사를 숨겨왔다'는 변명으로 이어지니, 어찌보면 식민사학의 폐해는 아직까지 다른 방식으로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정작 이들의 논리 및 행동 양식을 보면, 오히려 위에 언급된 식민사관의 내용들이 방향만 바꿔서 자리잡은 형태가 많다.

그런데 민족주의 사학이 꼴보기 싫다고 다시 식민사학적인 발언으로 회귀하는 경우가 있으니[15] 이건 이거대로 상당한 문제다.[16][17] 게다가 민족주의 사학의 성장은 1970년대에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비판까지 나오면서[18] 군사 정권기에 대한 비판이 이와 얽히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민족이라는 말만 나오면 무조건 학을 떼면서 그런거 없다는 강경 반대파가 나오는가 하면, 자기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적인 우월감을 표현하는 형태까지 나타나는 것도 문제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국까는 양반이고, 외국빠로 변신하는 것이고.

한편으로 NLPDR 또는 종북계열의 학자나 지식인들 중에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 같은 식민사학과 같은 방식으로 좋은 점은 감추거나 축소하고 나쁜 점은 부풀리거나 조작하여 대한민국을 정통성이 없는 국가로 매도하고 있다. 이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 시절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료를 그대로 채용하고, 반민특위를 탄압한 것 등을 근거로 대한민국 정부를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반민족 괴뢰정부'로 비하하며, 김일성이 세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민족의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도 오류가 있는데, 북한 또한 건국초기에 친일파 관료를 등용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반성회'[19]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그리고 이들은 이승만, 박정희의 개헌 독재는 비판하면서 1974년 '사회주의 헌법' 수립으로 김일성 독재 및 우상화에 대한 부분은 "김일성은 독재는 했지만 독립운동 전력이 있다. 그때 다까끼는 뭐 했냐?" 라는 식으로 어물쩡 넘어가려 한다. 이는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며 독재를 덮으려는 극우 박정희빠들의 주장과 판박이다.

비슷한 오류는 우익에도 있는데, 뉴라이트 계열에서 이승만 정권을 띄울 목적으로 조선사를 필요 이상으로 폄하하고, 나아가 일제강점기를 정당화하는 움직임도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작 독립운동가였던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물론 그 이승만도 대통령이 되기 위해 친일파들의 도움을 받고 그 답례로 친일파 청산을 방해했으니 마냥 아이러니하다고 보기도 그렇지만.


4. 어떻게 볼 것인가[편집]


식민사관을 대함에 있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식민사관의 중점이 당대의 한국인에게 말 그대로 식민지인 수준의 열등감을 갖게 만드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제는 단순히 한국 고대사를 비하하는 것만 식민사관의 방향으로 삼지 않았다. 만주와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단군 = 스사노오 설을 내세우고 단군을 오히려 높이 사기도 했으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북방 민족 - 한반도 - 일본에 걸친 문화권이 '불함문화권'[20]으로 묶일 수 있다는 최남선의 사관은 후에 내선일체론, 만선 사관 등과 부합해 친일 사관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로인해 '신라 때문에 우리는 대륙을 잃고 이 좁은 반도에 갇혔으니 안 된다'는 식의 생각으로 생겨나는 신라나 조선 등에 대한 비난은 딱 만선사관에 부합한다.일제로부터 국권을 찬탈당한 조선이라는 나라를 한국인 스스로 어리석은 나라라 부정하게 만들어서 일제강점기의 정당화를 선전하려는 용도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굳이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과장과 허위를 거듭하며 한국사를 재단할 필요는 없다.

또 상술된 식민사관과 조금이라도 맥이 닿는다고 '식민사관'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태도 역시 지양해야 한다. 윗 경우가 식민사관자들의 지향하는 바라면 이것은 환빠와 같은 에스노센트리즘의 유사역사학자들이 지향하는 점. 예를 들어 '연구를 해보니 조선의 도시 발달이랑 화폐 경제 측면에선, 동아시아 3국 중 미진한 것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라는 주장을 한다고 해서 정체성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래서 미개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했다.' 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사에 대한 고의적인 폄하로 이어지지 않는 이상, 어떤 주장이 함부로 식민사관으로 치부되어선 안되며 해석상 이견이 있다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옳다.

2012년 한국사 과목이 신설되기 이전의 국사 교과서는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한 안티테제로서 쓰여진 측면이 다분하다.

타율성 ↔ 내재적 발전론
정체성 ↔ 내재적 발전론(특히 자본주의 맹아론)
공리공담 ↔ 실학
사대 ↔ 민족주의
당파 ↔ 붕당정치

결론적으로, 역사를 놓고 벌어지는 이러한 일련의 싸움들은 서양의 역사발전도식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현재를 가지고 과거를 왜곡하는 등의 수준에서 벗어나 한국역사와 동아시아역사를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새로운 사관이 성립되어야 근원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안티테제의 안티테제 근대역사학의 종말

5. 주요 식민학자[편집]


  • 미시나 아키히데
  • 쓰다 소오키치
  • 아유카이 후사노신
  • 이나바 이와키치
  • 이마니시 류
  • 이케우치 히로시
  • 후쿠다 도쿠조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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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서도 극우 성향 중에서는 민족 개념을 거부하는 동시에 북한도 별개의 국가로 치부하여 고구려나 발해를 한국사로 다루면 안된다 주장하는 이들이 아주 극소수지만 존재하기도 한다.(사실 한국 내 친일 뉴라이트 세력의 주 목적은 일제강점기 미화와 조선왕조 폄하기 때문에 조선왕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주요한 발언을 잘 하지 않는다.)[2] 전근대 중화세계에서는 이것을 왕조교체에 따르는 당연한 의무로 인식했다. 일본은 왕조교체가 없었으므로 전례가 없지만 중국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며, 근현대에도 이는 계승되어 중화민국은 청사고를 편찬했으며 현재 중국 정부도 '청사'를 편찬 중이다.[3] 대부분의 유대인은 수천년간에 걸쳐 혼혈화가 진행됐기 때문에 인종이나 혈통은 의미가 없다.[4] 이 중 방점은 '한반도는 만주에 종속되었다'에 있었다.[5] 특히 이는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일본의 왜곡과 반중감정이 더해져서 진실을 알면서도 간도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6] 다만 이는 넓은 국토를 동경하는 점도 있지만, 반중감정에서 오는 영향도 어느 정도 있다. 이전부터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자부심 정도는 한국인들 사이에 당연히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것이 간도회복이나, 고구려, 발해 시절의 고토 회복 등으로 확대된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중감정에서 온 것이 크다.[7] 임나일본부 자체는 17세기 이후 일본 국학파가 일본서기, 고사기를 연구하면서 만들어낸 역사 왜곡으로 정한론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대한제국 시기 현채 등이 쓴 교과서에도 이런 개드립을 생각없이 그대로 등재하기도 했다. 이를 비판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학계에 대두된 인물이 바로 신채호.[8] 고대에는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쫓으러 이동하는 게 아니라 먹을 것이나 거주할 곳을 찾으려고 이동한 것이었다. 구석기 시대 참고.[9] 물론 위만 문서에 나오듯이 위만 본인이 처음부터 조선 출신인지 아니면 연나라계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조선에 귀화한 고조선인이란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10] '가는 듯' 으로 보이나, 일본의 봉건제와 중국 주나라의 봉건제, 중세 유럽의 봉건제는 다 같은 '봉건제' 이지만 그 실상은 많이 다르다. 중국 주나라는 혈연적 봉건제, 중세 유럽은 쌍무계약적 봉건제인 반면, 일본의 봉건제는 상하관계가 뚜렷한 체제이기 때문. 유럽의 봉건제에서, 주군이 봉신에게 '할복하라!' 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자[11] 이 과거제로 정립된 동아시아의 실적주의 관료제가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반론으로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근대에나 나올법한 실적주의 관료제가 고대 말 중세 초기에 등장해 정착한 것은 마르크스 사관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12] 이는 현대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동일하다.오히려 정당간에 서로 견제하면서 토론과 협의로 정치를 진행하는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당파간에 대립을 부정적으로는 보는것은 어디까지는 전체주의적 시점에서나 통용될뿐 오히려 사회구성원 모두의 의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각각의 구성원들의 의견을 대변할수 있는 여러 정치집단이 공존하는것이 좋다.[13]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이것 때문에 한국인들이 자기 색을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14] 박은식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사망, 신채호는 독립 운동하다 옥사, 안재홍정인보는 납북 등.[15] '백의민족은 무슨 염색 기술 없었던 거지'(흰색 참조), '일제시대가 구한말이나 1950년대보다 살기 좋았는데?' - 식민지 근대화론(당연하지만 역사 왜곡이다. 일제강점기는 1인당 GDP가 1910년보다 1945년이 더 낮았을 정도로 경제가 후퇴한 시기였다.) 등.[16]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의 양자택일만을 하려는 데서 생긴 문제로서 이는 논리학에서도 다루는 문제이다. 꼭 이거 아니면 저거일 필요는 없다. 이런 방식의 사고는 논리적 오류이며 매우 협애한 사고력을 드러낸다. 세상은 흑과 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무수히 많은 명도의 회색들이 있으며 심지어 무채색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색깔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17] 애초에 이런 식으로 민족이 미개했거나, 아니면 우월했거나 하는식으로 역사를 매기는건 우생학의 사상이 첨가된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해당 민족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에 그치는게 좋다.[18] 대표적인 예가 이순신을 군사 정권 시기 의도적으로 과하게 밀었다면서 등장한 원균 맹장설.[19]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의 친일 행각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과정. 거짓 증언을 하다 들통나거나,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친일 행위를 없던 일로 해줬다.[20] 여기서 불함은 '밝음(明), 빛'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