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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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내각
(갑오개혁을미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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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대신
군국기무처를 통한 개혁
박영효
박정양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엄세영
김가진
정병하
신기선
이범진
군부대신
조희연
안경수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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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범
서광범
장석주
탁지부대신
어윤중
심상훈
어윤중
외부대신
김윤식
김윤식
김윤식
학부대신
박정양
이완용
서광범
※ 2차 내각은 출범당시 3차 내각은 특정기간을 기준으로 함.
을미사변 이후 친일성향으로 조각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고종에게 을미사적으로 불리고 처형 명령이 떨어지면서 실각한다.



1. 개요
2. 배경
3. 내용
4. 한계



1. 개요[편집]




1895년 10월 8일(양력)[1] 을미사변으로 다시 들어선 김홍집 내각아관파천으로 무너지기 직전인 1896년 2월 11일(양력)[2]까지 추진한 일련의 개혁. 갑오개혁의 연장선상에 있다.[3]


2. 배경[편집]


삼국 간섭 이후 일본이 약간 주춤하게 되고 개화파와 친러파(김홍집, 이완용)의 연합 내각이 등장하고, 왕후 민씨의 세력이 친러파와 결탁을 하여 일본 세력 제거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에 일본은 왕후 민씨를 시해하고 친일 성향이 강했던 조희연유길준이 참여하여 4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을미개혁을 추진한다.


3. 내용[편집]




4. 한계[편집]


갑오개혁도 그렇지만 일본의 침략 행위인 을미사변으로 들어선 정권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가며 시행한데다가 갑자기 시행한 단발령 때문에 안 그래도 안 좋았던 평판이 아예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결국 김홍집 내각이 아관파천으로 무너지면서 개혁은 모두 중단되고 만다.

또한 단발령을 강요했기 때문에 을미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최익현의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칼을 자를 순 없다"라는 명언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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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은 1895년 8월 20일.[2] 음력은 1895년 12월 28일.[3] 이렇게 을미개혁의 성격이 갑오개혁과 비슷하다 보니 헷갈리지 않게 제3차 갑오개혁이라고 부르며 같이 묶는 경우도 있지만, 정확히는 갑오년에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을미개혁이라고 말하는 게 맞으며 실제로도 을미개혁이라 많이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