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탄그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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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르틀리 왕국 17대 군주
ვახტანგ | 바크탕 6세

파일:바크탕 6세.jpg

제호
한국어
바크탕 6세
조지아어
ვახტანგ
라틴어
Vakhtang VI
가족
레반(아버지)
투타 구리엘리(어머니)
카이호스로(형제)
다비트(형제)
도멘티오스 4세(형제)
흐바람제(누이)
예세(이복 형제)
시비몬(이복 형제)
테이무라즈(이복 형제)
알렉산드레(이복 형제)
루수단(아내)
바카르(장남)
기오르기(차남)
타마르 2세(장녀)
안나(차녀)
투타(삼녀)
생몰 년도
1675년 9월 15일 ~ 1737년 3월 26일
재위 기간
1716년 ~ 1724년
서명
파일:바흐탄그 6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카르틀리 왕국 17대 군주.

2. 생애[편집]


카르틀리 왕국 12대 국왕 바크탕 5세의 삼남이자 13대 국왕 기오르기 11세의 동생인 레반과 투타 구리엘리의 아들이다. 형제로 카이호스로, 다비트, 도멘티오스 4세가 있었고, 누이로 흐바람제가 있었으며, 이복 형제로 예세, 시비몬, 테이무라즈, 알렉산드레가 있었다. 그는 15살까지 이란에서 인질 생활을 했지만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이슬람교 개종을 거부하고 조지아 정교회 신앙을 고수했다.

1703년 기오르기 11세가 카르틀리 왕위에 복귀했지만 사파비 제국의 의향에 따라 카르틀리로 돌아가지 않고 아프가니스탄 반란군 진압에 투입된 뒤, 그가 카르틀리에 남아서 총독의 권한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1705년 그의 형제 도멘티오스 4세를 조지아 총대주교로 선임하도록 힘썼고, 사바 오르벨리아니가 이끄는 사절단을 프랑스로 보내 조지아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며 기독교가 조지아에서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사절단은 1714년 3월 21일 파리에 도착한 뒤 루이 14세와 협의했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프랑스는 조지아를 위해 어떠한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한편, 그는 이 시기에 외국에서 수입된 법률, 과학, 행정, 궁중 예법 등 여러 저서를 수집하여 조지아어로 번역했으며, 1709년 최초의 조지아 인쇄소를 트빌리시에 설립했다. 또한 우수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조지아의 역사를 집대성한 <조지아 연대기>를 집필하게 했다.

그는 문학가로서도 출중한 재능을 갖췄다. 애국적이고 낭만적인 서정시를 여러 편 섰으며, 고대 우화 모음집 칼릴라와 뎀나를 이란어에서 조지아어로 번역했다. 또한 쇼타 루스타벨리의 12세기 서사시 <표범의 가죽을 쓴 기사>를 출간하면서 친히 해설을 달았다. 조지아 문학가들은 이 서사시를 읽고 그동안 잊혀졌던 중세 조지아 문학을 되살리자는, 일명 18세기 조지아 문학 르네상스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그는 성경의 인쇄를 맡아 복음서, 시편, 몇몇 전례서와 기도서를 인쇄하여 대중에 배포했다. 이란 당국은 그가 쿠란을 따르는 대신 기독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애쓰는 행보를 보이는 것에 깊은 불만을 품었다.

이 무렵, 이메레티 왕국에서 정변이 일어나 기오르기 6세기오르기 7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기오르기 6세에게 결혼 동맹을 제안하며 기오르기 6세의 아들 레반을 카르틀리로 보내라고 제안했다. 기오르기 6세는 처음에 동의했지만, 레반이 카르틀리 왕에 의해 사파비 제국으로 보내질 거라는 첩보를 입수하자 거부하기로 했다. 이에 기오르기 7세를 돕기로 한 그는 1707년 기오르기 7세에게 군대를 지원해 그가 쿠타이시를 장악하고 이메레티의 왕으로 등극하게 했다. 기오르기 6세는 이에 대항해 항전했으나 끝내 패배하자 1709년 바크탕 6세의 초청에 따라 카르틀리 왕국으로 피신했다. 1711년 마미아 구리엘리가 정변을 일으켜 기오르기 7세를 축출했다. 기오르기 7세는 카르틀리로 도피하여 고리에서 그의 영접을 받았다. 기오르기 7세는 그에게 기오르기 6세를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그의 중재를 받아들여 기오르기 6세와 화해했다. 기오르기 6세는 이메레티로 넘어간 뒤 영지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1711년 카르틀리 왕 카이호스로가 아프가니스탄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뒤, 샤파비 샤한샤 술탄 호세인은 그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면 카르틀리 왕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개종을 거부했고, 술탄 호세인은 그를 케르만에 억류하도록 했다. 이후 3년간 뜸을 들이다 1714년에 그의 이복 형제인 예세를 카르틀리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예세는 다케스탄 산악 민족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귀족들로부터 신임을 얻지도 못했다. 조지아 귀족들이 그를 왕으로 세워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자, 술탄 호세인은 1716년 그를 다시 불러서 이슬람교로 개종하라고 종용했다. 그는 마침내 샤한샤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후세인 쿨리 칸(Hussayn Qouli Khan)이라는 이름으로 예세를 대신해 카르틀리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파한에서 대법원장을 맡고 있었던 그가 조지아로 돌아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장남 바카르가 그를 대신해 카르틀리를 통치했다.

1719년, 그는 마침내 카르틀리로 돌아가는 걸 허락받았다. 트빌리시에 도착한 뒤 통치를 시작한 그는 겉으로는 이슬람 신자로 행세했지만 실제로는 정교회 신앙을 꿋꿋이 이어갔다. 그는 러시아 제국과 손을 잡고 이란의 간섭을 배제하길 희망했다. 차르 표트르 1세는 그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1722년 7월 소규모 병력을 카스피해를 따라 조지아로 파견했다. 당시 사파비 제국은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의 공격으로 수도 이스파한이 포위되는 등 파탄 지경에 처했다. 그는 지금이 이란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고 조지아를 통합할 때라고 여기고 1722년 7월 간자에 4만 명의 조지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을 집결시키고 이란과의 독립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표트르 1세가 원군을 보내주길 희망했지만, 표트르 1세는 오스만 제국이 코카서스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 자신이 끼여들었다간 심각한 반발을 살 걸 우려하여 더 이상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런 사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러시아군이 코카서스 일대로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해 간자를 침공했으나 격파당했다.

사파비 제국은 그의 일련의 행동에 분개하여 카헤티 왕국의 군주이며 자신들의 충실한 가신이던 콘스탄틴 2세를 카르틀리 왕으로 세우고 그를 대적하게 했다. 1723년 5월, 콘스탄틴 2세의 카헤티군과 이란군이 카르틀리로 쳐들어왔다. 그는 이에 맞서 항전했고 이메레티 왕국의 알렉산드레 5세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1723년 5월 8일 트빌리시가 함락되고 이메레티군이 전멸하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후퇴했다. 콘스탄틴 2세는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카르틀리 왕을 칭했으나, 그와 바카르가 카르틀리 상부 일대를 장악하고 산악 지형에서 항전하는 걸 막지 못했다. 얼마 후, 오스만 제국예세를 카르틀리 왕으로 내세우며 동부 조지아를 침공했다. 그는 콘스탄틴 2세와 손을 잡고 오스만군에 항전했으나, 전세가 기울자 1724년 7월 1,2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했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트란스캅카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이스탄불 협약을 체결하고 조지아에 대한 관심을 당분간 접었다.

그 후 모스크바로 이주한 그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1,000루블의 연금과 토지를 수여받았고 1726년 성 앙드레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728년 성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훈장을 받았다. 1734년 나디르 샤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코카서스 일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자, 그는 나디르 샤와 동맹을 맺고 카르틀리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는 조지아가 러시아의 속국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그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그는 러시아 장군들과 함께 나디르 샤를 찾아가려 했으나, 1737년 3월 26일 아스트라한에서 병사했다.

그는 체르케스 공녀 루수단과 결혼하여 바카르, 기오르기, 타마르, 안나, 투타를 낳았다. 장남 바카르는 아버지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카르틀리를 대신 통치했으며,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에 망명한 뒤 장군으로 활동했다. 차남 기오르기 역시 러시아 제국군 장군으로서 복무했으며, 장녀 타마르 2세는 1712년 테이무라즈 2세와 결혼한 뒤 남편과 함께 카헤티와 카르틀리 왕국을 잇따라 통치했다. 안나는 바큐슈티 아바시제 공작과 결혼했고, 투타는 이메레티 왕국의 라차 공작 게데반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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